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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경남의 세금횡령 조사 보고서와 1907년 연해 어민들의 청원서>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는 대한제국기 경남 진주군의 서기 강기립과 그의 휘하 사음 배도연의 세금횡령에 따른 도주 사건의 보고서(報告書)와 경남 연해지역 어민(漁民)들이 일본인 업자와 부패한 관리의 횡포에 맞서 법적 권리(문권)를 근거로 승소하고 권리를 지켜내려 했던 청원서(請願書)를 소개하겠다.
먼저 ①「1900년 11월 21일 경남 진주의 세금 횡령 사건, 봉세관의 조사 보고서(報告書)」는 대한제국기 지방 관리와 이속들이 결탁하여 공금을 횡령하고 수사망을 피하는 전형적인 부패 사례를 보여주며, 중앙 정부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물리력을 동원하려 했던 긴박한 행정 기록이다. 이 문건은 1900년 11월 경상남도 봉세관(捧稅官, 세금 징수관) 김형달이 내장원경에게 올린 보고서다. 내용을 보면 경남 지역 미납 세금과 세금 징수 현황을 독려하다가 진주군의 서기 강기립이 세금 7천냥을 횡령했음을 밝혀내게 된다. 이내 그 휘하의 사음(舍音) 배도연이 1500냥을 가지고 도주했다. 그런데 지방 이속들의 유착 땜에 지방 하급관리들도 명령에 불응하였고 이웃들도 범죄인을 숨겨주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봉세관이 보고서를 작성해 해결책을 강구하니 내장원에서 "관찰부에 훈령을 내려 시행하라(發訓觀察部向事)"는 지령을 내렸다.
다음으로 ②「1907년 7월 경남 연해 각군(沿海各郡) 어민(漁民)들의 청원서(請願書)」는 구한말 일본의 어업 침탈에 맞서 우리 어민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며, 특히 법적 문권을 근거로 국가에 당당히 권리를 주장했던 당시 어민들의 높은 민도(民度)를 엿볼 수 있다. 내용인즉, 일본의 경제적 침탈이 노골화되던 시기였던 1907년 경남 연안 어민들이 대한제국 황실 재산을 관리하던 경리원(經理院)에 제출한 청원서와 그에 대한 답변이다. 황실 사무를 맡던 궁내부가 어촌의 어장(漁基)과 미역바위(藿巖) 등에 세금을 매기기 시작하니 일본인 카치(香稚)가 의친왕부와 계약을 맺고 내려와 어민들의 사적 어장을 침탈하고 게다가 부패한 관리들이 서로 결탁해 어민들의 사유 어장들을 멋대로 팔아치운다. 이에 연안 어민들이 공공 어장과 민간 어장을 명확히 조사하고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당국의 답변은 미온적이었다.
1) 「1900년 11월 21일 경남 진주의 세금 횡령 사건, 봉세관의 조사 보고서(報告書)」
이 자료는 1900년(광무 4년) 11월 21일, 경상남도 봉세관(捧稅官, 세금 징수관) 김형달이 중앙 정부 내장원경(내장사무 책임자)에게 올린 보고 제4호의 내용이다. 당시 지방 관리의 세금 징수 과정에서 발생한 비리와 관리의 도주 사건을 다루고 있다.
*주요 상황을 요약하면, 봉세관 김형달이 곤양, 하동, 남해, 고성, 통영, 거제, 웅천, 창원 등 여러 군을 돌며 전년도(기해년, 1899) 미납 세금과 올해(경자년, 1900) 세금 징수 현황을 조사하고 독려했다. 그런데 진주군에서 비리가 발생했다. 특히 진주군(晉州郡)의 서기 강기립(姜璣立)이 큰 문제를 일으켰다. 강기립은 기해년 세금 중 7,000여 냥을 횡령(범포, 犯逋)했다. 그 휘하의 사음(舍音, 마름) 배도연 역시 1,500여 냥을 가지고 도주하여, 현재 그 형을 잡아두고 독촉 중이다.
*문제의 핵심은 지방 이속들의 유착이다. 봉세관이 강기립을 체포하려 했으나, 진주군의 하급 관리(군례, 郡隷)들이 모두 강기립의 부하들이라 명령을 듣지 않고 체포를 거부했다. 결국 강기립은 4~5일 만에 도주했으며, 인근 주민(사린, 四隣)들도 한패가 되어 그를 숨겨주고 있어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다.
*봉세관이 해결책 건의를 요청한다. 김형달은 이러한 관례적 비리가 세금 징수를 지연시키고 국가 기강을 흔든다고 판단하여, 다음 중 하나로 엄벌(별반처분)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경순검(서울 순검)을 급히 파견하여 체포하게 할 것. 또 진주관찰부에 명령(발훈)을 내려 관찰부 소속 순검들이 강기립을 잡아 봉세관에게 압송하게 할 것.
[결과(지령)] 내장원에서는 이에 대해 "관찰부에 훈령을 내려 시행하라(發訓觀察部向事)"는 지령을 12월 17일에 내렸다.
* 덧붙여 이번 「1900년 11월 21일 조사 보고서(報告書)」는 발신자가 경남 봉세관(慶南捧稅官) 김형달(金瀅達)이고 수신자는 내장원경서리(內藏院卿署理)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1900년 11월 21일 경남 진주의 세금 횡령 사건, 징수원의 조사 보고서(報告書)」
광무 4년(1900년) 11월 21일. 보고 제4호.
봉세관(세금 징수관)인 제(金瀅達)가 기해년(1899년)분 각 둔토(군대 주둔용 토지) 세금의 실제 징수 및 미납 현황을 조사하고, 경자년(1900년)분 세금은 곡물로 거두어들이는 일로 세 군데 군을 조사하며 둔민(둔토 농민)들에게 엄히 신칙(타이르고 경고함)한 사유는 이미 앞선 보고서에서 보고드린 바 있습니다. 이후 곤양, 하동, 남해, 고성, 통영, 거제, 웅천, 창원을 모두 조사하고 신칙하였으며, 현재 봉세관은 김해군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그중에서도 진주 본군(진주군)의 수서기(수석 서기) 강기립(姜璣立)은 기해년(1899년) 목도전(목장에서 거두는 세금)의 원래 징수액이 9,000여 냥인데, 관청이 몇 달간 비어 있는 틈을 타 모두 가혹하게 독촉해 거두어들였습니다. 그 휘하의 사음(舍音, 마름) 배도연(裴道淵)은 1,500여 냥을 횡령해 도망쳤으므로, 현재 그 형을 잡아 가두고 (돈을 내놓으라고) 독촉 중입니다.
또한 강기립은 7,000여 냥을 횡령하고도 태연하게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봉세관인 제가 경계에 도착해 장부를 조사한 후 해당 돈을 독촉해 납부하라고 하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미루었습니다. 이에 군청의 하급 관리(군례)들에게 강기립을 붙잡아 대기시키라고 명령했으나, 군청 관리들이 모두 강기립의 수하들이라 도무지 명령을 듣지 않고 붙잡지 않았습니다. 결국 4~5일 만에 강기립은 도망쳐 숨어버렸습니다.
이웃 사람들까지 한통속이 되어 숨겨주니 다시 나타날 기미가 없습니다. 강기립과 같은 자의 습성으로 볼 때, 막중한 나랏돈을 누구나 횡령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며, 이로 인해 세금 수납이 점점 늦어져 한 명의 잘못이 백 명에게 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강기립을 즉시 서울 순검을 보내 체포하여 경부(한성부 경찰부)에 수감하시든지, 혹은 진주관찰부에 훈령을 내려 진주부 순검으로 하여금 체포하여 봉세관에게 넘기게 하시든지 특별한 처분을 내려주십시오. 이를 통해 본보기를 보여 수많은 세금을 실효성 있게 거둘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광무 4년 11월 21일. 경상남도 봉세관 김형달. 내장원경 임시서리 겸 경부협판 귀하.
[지령] 진주관찰부에 훈령을 내려 시행하도록 하라. 1900년 12월 17일.
[光武四年十一月二十一日. 報告第肆號. 捧稅官니 己亥條, 各屯稅捧未捧査實과 庚子條各屯稅, 以本穀收捧事로 三郡에 調査고 申飭屯民之由는 已報前號이온바 昆陽河東南海固城統營巨濟熊川昌原, 竝調査申飭고, 捧稅官는 轉向金海郡이오며 就中晉州本郡首書記姜璣立이가 己亥牧賭錢原捧數, 爲九千餘兩이온 空衙累月에 擧皆猛督야 該舍音裴道淵이가 一千五百餘兩, 犯逋逃躱. 故捉囚其兄와 方今督現오며 姜璣立는 七千餘兩을 犯逋고 偃然不動타가 捧稅官니 到境와 文簿調査후 右錢督納, 則此推彼推옵계 使之郡隷捉待오라호되 郡隷가 俱爲璣立率下之卒이오라 都不捉待고 仍至四五日에 謂云逃躱라. 四隣니 挾同와 更無現形온즉 以若姜漢之所習이오면 莫重公錢을 無人不犯이요 收刷는 由是以漸至稽緩와 以一舛百이온즉 如此姜漢, 卽發京巡檢와 捉囚京部옵실는지 發訓於晉府옵셔 使之晉府巡檢으로 捉付于捧稅官옵시는지 別般處分옵셔 以一懲百와 數多收刷에 幸有實效케시믈 伏望. 光武四年十一月二十一日. 慶尙南道捧稅官 金瀅達, 內藏院卿臨時署理警部協辦閣下. 〈指令〉 發訓觀察部向事. 十二月十七日]
2) 「1907년 7월 경남 연해 각군(沿海各郡) 어민(漁民)의 청원서(請願書)」
이 사료는 1907년(광무 11년) 경상남도 연안 어민들이 대한제국 황실 재산을 관리하던 경리원(經理院)에 제출한 청원서와 그에 대한 지령(답변)이다. 이 청원서(請願書)는 당시 일본인 업자와 부패한 관리의 횡포에 맞서 어민들이 법적 권리(문권)를 근거로 승소하고 권리를 지켜내려 했던 긴박한 기록이다.
[시대적 상황] 당시 대한제국기 광무 11년(1907년)은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융희)하던 혼란기다. 곧 일본의 경제적 침탈이 노골화되던 시기였다. 황실 사무를 맡던 궁내부가 어촌의 어장(漁基)과 미역바위(藿巖) 등에 세금을 매기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인 업자와 부패한 관리들이 결탁해 어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했다.
[청원서에서 어민들의 호소] 웅천·거제 지역의 진상용 어장 13곳이 의친왕부로 이속되었는데, 이를 빌미로 일본인 카치(香稚)가 계약을 맺고 내려와 모든 구역이 자기 소관이라 우기며 어민들의 사유 재산(民私條)까지 침범했다. 그런데 마산 이사청 재판에서 일본인이 패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리 김봉수(金鳳洙)가 조정의 명령을 무시한 채 어민들이 문권(권리증)을 가진 사유 어장들을 멋대로 팔아치웠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어민이 직업을 잃고 죽을 지경에 처하자, 진남(통영)·고성·창원·동래의 어민 대표들이 천 리 길을 걸어 서울에 와서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다. 이에 공정한 관리를 다시 파견하여 공공 어장과 민간 어장을 명확히 조사하고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한다.
[지령의 내용(당국의 답변)] 융희 원년(1907년) 8월 8일, "이미 조사를 거쳐 어민 소유로 확인(탈급)된 사유 어장은 다시 조사할 필요가 없다. 만약 관리가 이를 임의로 침범한다면 일체 금지하여 민원이 발생하지 않게 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이 문서는 구한말 일본의 어업 침탈에 맞서 우리 어민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특히 법적 권리(문권)를 근거로 국가에 당당히 권리를 주장했던 당시 어민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 덧붙여 이번 「1907년 7월 청원서(請願書)」는 발신자가 진남(鎭南, 통영)의 김영견(金榮見), 김태진(金泰振), 이수현(李壽賢) 등이고 수신자는 경리원경(經理院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1907년 7월 경남 연해 각군(沿海各郡) 어민(漁民) 청원서(請願書)」**
경상남도 연안 각 군 어민들의 청원서. 광무 11년(1907년) 7월 일. 청원인 : 경상남도 연안 각 군(郡) 어민들.
육지에서 농사짓는 백성이나 바닷가에서 고기 잡고 미역 따는 백성이나, 모두 성스러운 시대에 나라가 보살펴야 할 백성들입니다. 그동안 연안 각 군의 어장(漁基)과 미역바위(藿巖) 터에 세금 징수원(派員)을 정해 세금을 거두어 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부터 웅천과 거제 두 군의 진상용 어장 13곳이 의친왕부로 옮겨졌고, 일본인 카치(香稚)가 계약을 맺고 내려와서는 "전부가 내 소관이다"라고 주장하며 백성들의 사유 어장을 침범하였습니다.
이에 마산 이사청에서 재판을 열어 결국 일본인이 패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세금 징수원 김봉수가 본원(경리원)의 훈령을 가져와서는 법적 세금 외에 함부로 세금을 거두는 사고가 발생하여, 여러 차례 한성부에 호소하고 재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해당 징수원이 올해 또다시 황제의 조칙과 훈령을 따르지 않고, 어민들이 문권(권리증)을 가진 사유 어장을 마음대로 내다 팔았습니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어민이 직업을 잃고 죽을 지경에 처했습니다. 이에 천 리 길을 걸어와 다시 청원하오니, 부디 민망한 사정을 살피시어 공정한 관리를 특별히 파견해 주십시오.
각 군에 도착하여 공공의 것과 세금을 감면해야 할 것을 일일이 조사하여 바로잡음으로써, 한편으로는 국가 세금을 온전케 하고 한편으로는 백성의 폐단을 없애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광무 11년 7월 일, *진남(통영) 거주 : 김영견, 김태진, 이수현. *고성 거주 : 정주서. *창원 거주 : 최홍기, 박현영. *동래 거주 : 김덕언 등. 경리원경(經리院卿) 각하 앞.
[요지 및 지령(답변)] 진남 거주 김영견 등이 "우리는 어업을 생업으로 삼는데, 지금 세금 징수원이 문권이 있는 사유 어장을 마음대로 팔아치워 수천 어민이 실업 상태이니 특별히 처분해 달라"고 함.
[지령(指令)] "문권(권리증)이 있는 백성의 사유(私的) 어장은 이미 조사를 거쳐 어민의 소유로 인정(頉給)된 것이니, 이제 와서 다시 조사할 필요가 없다. 만약 해당 징수원이 자기 마음대로 침범하려 든다면 일절 금지하여 백성들에게 원통함이 없도록 하라." 융희 원년(1907년) 8월 8일. 관찰도(觀察道)
[光武十一年七月 日. 請願書. 慶尙南道沿海各郡漁民等.
陸地耕作之民과 濱海漁採之氓이 俱是聖世化育中物也라, 沿海各郡漁基及海毛藿巖地를 定派員收稅矣러니 自昨秋로 熊川·巨濟兩郡中進上漁基十三條난 移屬義親王府와 日人香稚가 契約下來, 而稱云全部所管이다侵討其民私條이다가 至於馬港理事廳裁判야 日人이 竟至落科고 各郡民私條는 派員金鳳洙가 持來本院訓令와 濫討科外之事故로 屢呈京府에 幾次質判이옵더니, 該派員이 今年又不遵詔勅及訓飭고 有文卷民私條를 肆自放賣기로 數千條漁民이 仍此失業에 幾至死境故로 裹足千里야 玆又請願오니, 特念民情시와 另派公正派員와 行到各郡에 付公者及當減者를 一一調査核白歸正야 一以完正供고 一以除民弊之地을 伏望. 光武十一年七月 日. 鎭南居 金榮見, 金泰振, 李壽賢. 固城居 鄭周瑞. 昌原居 崔洪基, 朴顯榮. 東萊居 金德彦 等. 經理院卿閣下.
鎭南居金榮見等, 本人等漁採爲業, 今派員有文卷民私條, 肆自放賣, 數千漁民, 仍此失業, 特別處分事. 指令, 有文券民私條 旣經調査頉給인즉 今不必更事査核이요 倘或已所頉給者를 該派員이 自意橫侵이거든 一切禁斷야 無至民冤 事. 隆熙元年八月八日. 觀察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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