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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214경>을 생각해 보자고 했는데..
그전에 <잡. 319. 일체경>을 일단 보렵니다.
319. 일체경(一切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이 때 생문(生聞) 바라문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 서로 문안 인사를 나누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고타마이시여, 이른바 일체(一切)라는 것은 어떤 것을 일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일체란 곧 12처(處)에 의해 생기는 것이니,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으로 이것을 일체라고 하느니라.
만일 또 어떤 사람이 '그것은 일체가 아니다. 나는 이제 사문 고타마가 말하는 일체를 버리고 따로 다른 일체를 세우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만 말만 있을 뿐이니, 물어도 알지 못하여 그 의혹만 더 커질 것이다. 왜냐 하면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 때 생문 바라문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일체하면 크게 두 가지 뜻이 떠 오른다.
하나는 여기서 보고 있는 일체(一切)로 '모두 다 everything' 라는 뜻.
세상에 에 있는 일체라 하는 데, 일체는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할 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생긴 겁니까 하고 묻는 것..
다른 하나는 '한 몸통 one' 이란 뜻인 일체(一體)가 있다.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하나라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가 그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三位一體)라 하여 비로자나 불, 노사나 불, 석가모니 불은 셋이나 같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신은 하나라며 삼위일체라 한다.
불교의 삼위일체설이 초기 기독교에 아이디어를 주었는데.. 불교에서는 그런 주장이 희미해진 반면에
기독교에서는 매우 강조되어 지금은 삼위일체설하면 기독교 교리로 알고 있다고 평소 청화 큰스님(淸華, 1923~2003)은 말씀하셨다.
세상에 있는 일체를 묻는 <319. 일체경> 해설을 보면..
일체는 6근인 안이비설신의와 6경인 색성향미촉법인 것들의 총체로 일체를 해체하여 보여주고 있다며,
6근은 주체인 나이고, 6경은 대상인 세계로.. 나와 세계의 합이 일체라고 상좌부 학인들은 설명한다.
그리고 일체(一切)는 5온, 12처. 18계로도 설명하니..
5온이 일체라 함은..
색온..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수온.. 느끼는 자와 느껴지는 것,
상온.. 이미지[상]를 만드는 자와 이미지가 되는 것,
행온.. 이렇게 저렇게 하려는 자와 이런 저런 것,
식온.. 색,수,상,행을 통해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것으로
주체와 대상으로 설명하면서 그 합이 일체라 하는 것이고.
12처가 일체라 함은 <319. 일체경>에서 보았듯이
안과 색이 만나 보이는 일체가 생긴다.
이와 성이 만나 소리 일체가 생긴다.
...
의와 법이 만나 법 일체가 생긴다. 하여
주체인 6내입처와 대상인 6외입처가 일체를 만드는 근본 원소처럼 된다.
18계가 일체라 함은
12처가 있고, 그 각각을 인식하는 6식을 더한 것.. 12처 + 6식.. 이 일체라고 설명한다.
대승불교는 상좌부 견해를 받아들이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주체가 대상을 '인식한 것'에 포인트를 주어
일체는 마음인 식에 의지한다는 일체유심조로 결말을 맺는다.
흥미로운 점은 상좌부의 일체설과 대승불교의 일체유심조로 발전될 수 있는 내용이 <잡아함경>에 모두 나오고 있어..
'잡(雜)'이란 의미가 단일이 아닌 섞여있다는 것임을 알면..
<잡아함경>이란 제목 얼마나 탁월한 선택인지 새삼 감탄하게 된다.
<잡아함경>과 비슷한 내용이 실린 남방불교의 <쌍윳따니까야>에는 일체유심조로 발전할 수 있는 내용이 빠져 있다.
일체는 말이 다를 뿐 그 내용은 상좌부에 설명하는 5온 또는 6근6경으로 귀결된다.
그러기에 <319경>에 대한 상좌부 학인의 설명은 처음 들으면 그럴싸 한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만 불교적 언어일 뿐 누구나 이미 다 알고 있는 별 볼일 없는 설명이 아닐 수 없다.
어릴 적 모든 게 궁금했던 시절.. 옆에 있는 동무에게 문득 묻는다.
"일체가 뭐지?"
"일체?.. 그거야 보이는 모든 거[6경] 다지, 그걸 보고 있는 나[6근]를 포함해" 하는 말과
주체인 6근과 대상인 6경의 합이라는 학인의 설명은 무엇이 다른가..
그런 어린애 같은 질문을 당시 지식인인 바라문이 하고, 맞장구 치듯 유치한 답변을 신과 인간의 스승이라 존경받는 분이 했으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인류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경> 속에 전했다고?.
부처님을 유치하게 만드는 게 불교를 욕보이는 일임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현대에 이르러 종교계는 일체를 생기게 하는 근본은 신으로, 신이 창조했다는 주장을 가르치고,
과학계는 118개의 물질의 근본 원소가 있어 그것들의 결합과 화합하여 일체가 생겼다고 주장한다.
현대를 과학 시대라 하듯 지금은 물질인 원소에 의해 일체가 생겨났다는 설이 주류
다.
2천6백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과 생문이라 불리는 바라문이 살던 당시는
일체가 생기는 근본에 대해
브라만이란 신이 변해 각각의 실체(원소)가 되어 일체가 생긴다는 창조설인 적취설과
일체는 근본적인 실체 지.수.화.풍 4가지 또는 거기다 공. 식을 합해 6가지 원소가 화합하여 일체가 만들어졌다는 과학적 유물론인 적취설로..
그 내용은 현대 보다 유치할 수 있지만 근본은 지금의 창조론이나 유물론과 별 차이가 없고..
일체의 근본에 관심이 있는 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때였다.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고타마 구루[석가세존]는 또 다른 근본설을 주장한다고 하여.. 그것이 궁금해 찾아와 묻는 것으로..
생문 바라문의 질문 요지는..
어린이가 질문하듯 일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게 아니라..
일체를 만드는 근본 원소가 신이나 물질 근본 원소가 아니라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그 대답은 일체를 만드는 근본원소를 답한 것이니..
(안과 색), (이와 성), (비와 향), (살과 미), (신과 촉) 그리고 (의와 법)인 12처는 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과학의 눈으로 보면 주체의 감각기관인 안 등 6근이 관여하여 일체를 만드는 것이니 유물론과도 다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런 즉 상좌부에서 가르치는 주체와 대상의 합이라는 일체설로 이해하는 게 무리없어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안과 색 등 2법6쌍으로 묶여 있는 12처가 일체를 만드는 근본이라 하면..
상좌부에서 설명하는 것과 다른점이 있다는 것이 보이지 않는지?..
"일체란 곧 12처(處)에 의해 생기는 것이니,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으로 이것을 일체의 근본이라고 하느니라.
2법6쌍인 12처와 열두 개인 12처는 무엇이 다른가?.
안과 색이 묶여 있다는 것은.. 마치 산소와 수소를 한 그릇에 넣은 것처럼 즉시 작용하여 물을 만든다.
이 말은 안과 색이 묶이면 즉시 작용하여 안식이 생긴다.
안과 색이 묶인다는 것은 일반적인 설명으로.. 눈으로 보면 망막에 맺힌 상이 즉시 뇌에 전해져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반응을 한다. 이게 늦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 하여 찰라지간에 일어난다고 한다.
그 작용을 달리 말하면.. 안과 색이 만나면 안식이 생기고 반응을 한다.
그 작용을 더 정밀하게 말하면..
안식이 생겨 반응을 하고 나면.. 그런 일련의 반응은 안과 색이 만났기 때문임을 그 후에 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여기서 중요한가?.
안식 등 일체 인식은 2법6쌍으로 생기는 것이지 6근과 6경이 있다고 생기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일체는 인식으로 생긴 것일 뿐, 사르트르 표현을 빌어보면 즉자적 존재로 있는 게 아님을 보여주어..
일체는 인식임[일체유심조]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가 존재가 아닌 인식이라는 것은..
창조설이나 유물론과 천양지차로 다름을 보여주는 것인데..
<319. 일체경>에 나오는 생문 바라문은 그 뜻을 알고 기뻐했을까?.
여유를 갖고 다시 천천히 살펴보면..
2법6쌍인 12처는.. 일체를 생기게 하는 2법6쌍으로
안과 색 둘이 아니라.. 안과 색이 섞여 분별을 기다리고 있는 게 된다.
이와 소리[성] 둘이 아니라.. 이와 소리가 섞여 분별을 기다리고 있는 게 된다.
비와 냄새[향] 둘이 아니라.. 냄새 맡는 자와 냄새가 섞여 분별이 되니 일체 냄새 생긴다.
설와 맛[미] 둘이 아니라.. 둘이 섞여.. 맛 일체가 생긴다.
신과 촉 둘이 아니라.. 둘이 섞여.. 촉 일체가 생긴다.
의와 법 둘이 아니라.. 둘이 섞여.. 일체 인식[법]이 생긴다.
그러면서 안이비설신의는 우리 모두 각각에게 있지만.. 둘이 만날 때 생기는 6식은 각각이 다를 수 있기에..
둘이 만나 생기는 새로운 식은 우리 각각이 모두 다르다. 그 말은
내가 인식하는 세계와 너가 인식하는 세계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듯 12처에서 2법의 의미는 대상이란 존재가 아닌 인식이라는 주체인 마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인데..
상좌부나 대승불교 학인의 설명은 존재 세계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12처를 6근6경으로 이해하는 상좌부나 대승불교 학인은
입으로는 12처 법이라 말하지만 생각은 12 가지를 존재의 근본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
뇌피셜이지만..
<구사론>이나 <청정도론>이 나오던 상좌부 시대에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 문자로 수집정리되어 12처가 마치 존재하는 언어처럼 사용되고 있음을 본 선지식들은..
이해불가한 12처를 억지로 이해시키려 노력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해할 수 있는 18계의 12계로 만들어 설명하는 게 당시 불자들에게 혼란을 줄일 수 있다는 판단으로..
12처라 말하면서 6근6경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택한 게 아닌가 한다.
그 결과..
"볼 때는 보는 자[안처]와 보이는 것[색처]이 만나서 (보는 자가) 본다." 는 것처럼 이해하니..
"볼 때는 아트만이 보는 눈에 들어가 본다"는 힌두교의 설명과 차이가 없어졌다.
하여 마음[식]이 일체를 만든다는 불교의 특징이 사라져 힌두교와 별 차이가 없어져..
코카냐 팹시냐 하듯.. 한두교나 불교냐 하다 어느 하나가 살아남으니..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본다.
석가세존이 12처를 설한 이유는..
제자들이여, 지금 너희들은 12처를 보지 못하므로 당장 스스로는 증명하지는 못한다.
밖에서는 세상이 이미 존재하고 우리는 존재하는 세상을 접촉하며 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인 것을 내부에서 결합하여 만든 세상이 외부에 존재하고 있다고 알 뿐이다.
그러나 우리 내부에서 안과 색이 결합할 때 12처인 법이 되고,
외부에 투사할 때 안계와 색계 등 12계로 만들어 투사하고 그것들을 6식계로 인식하여 일체라 한다.
는 것으로
12처는 존재가 아닌 마음에 생긴 법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12처는 존재가 아닌 법임을 알 수 있는 경이
<잡. 214. 2법경>이다.
2. "두 가지 인연이 있어서 식(識)이 생긴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이니라.
3. 안(眼)과 색(色)을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나니,
그것은 무상하고 유위(有為)이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다[心緣生].
4. 만일 색과 안과 식이 무상하고 함이 있으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心緣生]이라면,
이 세 가지 법이 화합하는 접촉[觸], 접촉 뒤의 느낌[受], 느낌 뒤의 의도[思], 의도 뒤의 생각[想], 이러한 모든 법도 다 무상하고 함이 있으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른바 접촉[觸]·생각[想]·의도[思]이다.
5. 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6.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경>에 나오는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은
12처로 6근 6경의 이름과 같다.
위 경에 나오는 2법6쌍을 6근과 6경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하여 둘의 묶음을 6근6경의 진행형으로 감각 기관이 감각 기능인 접촉을 하고 있는 상태라고 설명한다.
눈은 볼 수 있는 감각 기관인데.. 본다는 기능은 보이는 대상과 만났을 때 작동한다. 마찬가지로
귀, 코, 혀, 몸이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이 되려면 대상인 성,향,미,촉,법을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위에 나오는 여섯 쌍인 안과 색인 2법은 6근6경이 아니라 12처의 2법6쌍이다.
그 근거는 "3. 안(眼)과 색(色)을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나니,
그것은 무상하고 유위(有為)이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다[心緣生]." 에 나오듯
안과 색 등은 안식처럼 존재가 아니라 '마음을 연해 생긴 것'이라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안과 색은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듯이.. 존재하는 것인데 어째서 마음에 생긴 것이라 하는 것인가..
안식은 쉽게 뇌에 생긴다.
뇌에서 접촉으로 아는 안식은.. 눈과 외부에 있는 색이 망막에 맺히면..
OX 전기 신호로 바뀌고 전달되어 뇌에 이른 것이다.
안식은 망막에 생겨 있는 상이 아니라.. 신경전달 세포를 타고 전달된 OX 전기로 바뀐 상을 대상으로 한다.
12처란 말하자면 OX 전기 상태가 된 안과 색인 두 가지인데..
부처님 설명에 의하면 2법인 안입처와 색입처가 만날 때 마음인 욕탐이 간섭한다.
<214경>에서 눈에 띄는 곳은..
안과 색 2법6쌍이 생기면 6식이 생겨 욕탐이 있는 3사화합 작용이 일어난다. ---> 18계 생김
3사작용인 촉이 생기면 이어서 수, 상, 사[행]이 생긴다 ---> 5온 생김
지금껏 우리는 5온에 의해 12처[6근]가 생기고 12처에 의해 18계가 생긴다고 들었는데..
<214경>에서는 마음에 생긴 12처에서 18계가, 18계에서 5온이 생기는 순으로 되어 있고..
그때 5온이란 마음에 의해 생긴 것을 외부로 투사해 생긴 모습이 된다.
그런데 <214경>에서 보듯
5온이 마음에 생긴 것이라 함은..
일체 법은 존재가 아닌 마음에 의해 생긴 것이라는 것.
마음에 의해 생긴 것이기에.. 마음에 생긴
일체 괴로움은 마음공부를 통해 멸할 수 있다는 것이 되고,
일체를 멸했다는 것 역시 마음에서 그리 되었다는 게 된다.
만일 괴로움이 존재이고, 열반이 존재라면.. 괴로움의 멸은 몸이 죽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괴로움은 존재가 아닌 마음에 일어나 있는 것이기에
지금 여기서 멸할 수 있다.
꼰단냐의 깨달음 노래인 '고제즉집제'는
괴로움은 무명에서 생긴 것이요, 괴로움 멸은 무명멸에서 생긴다.
괴로움은 무명의 유 또는 무가 있을 뿐으로 다른 차이가 없다.
그 둘 모두 마음에서 일어남을 깨닫고 노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12처인 법은 6근6경 존재가 아닌 것이다.().
12처가 6근6경이 아님을 바르게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알아 깨달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그 깨달음을 깨침으로 승화시켜야만 하는데..
그럴 때 필요한 게 수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