半月城
이인로(李仁老, 1152~1220) 고려 중기의 문신, . 본관: 경주. 자: 미수(眉叟). 호: 쌍명재(雙明齋). 예부원외랑·비서감우간의대부·좌간의대부 등을 지냈다. 뛰어난 한문학자·시인으로, 죽림고회(竹林高會)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고려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한 학자로 초서·예서 등에도 능했다. 저서로 《파한집》만 전하고, 《은대집》과 《쌍명재집》은 이름만 전한다.
孤城微彎象半月 荊棘半掩鼪鼯穴
고성미만상반월 형극반엄생오혈
鵠嶺靑松氣鬱葱 鷄林黃葉秋蕭瑟
곡령청송기울총 계림황엽추소슬
自從太阿倒柄後 中原鹿死何人手
자종태아도병후 중원록사하인수
江女空傳玉樹花 春風幾拂金堤柳
강녀공전옥수화 춘풍기불금제류
외로운 성은 살짝 굽어 반달 모양인데,
가시덤불은 승냥이와 날다람쥐의 굴을 반쯤 덮었네.
곡령의 푸른 소나무는 울창하게 기운을 뿜고,
계림의 누런 낙엽에는 가을빛만 쓸쓸하구나.
태아검의 자루가 거꾸로 쥐어진 뒤부터는,
중원의 천하는 과연 누구의 손에 들어갔던가.
강가의 여인은 옥수화를 전했다는 이야기만 남고,
봄바람은 몇 번이나 금제의 버들을 스쳐 갔던가.
孤城(고성) : 외롭게 남은 성. 신라의 옛 도성인 반월성 微彎(미만) : 약간 굽은 모습.
荊棘(형극) : 가시덤불. 半掩(반엄) : 반쯤 덮다.
鼪鼯(생오) : 족제비와 날다람쥐. 鵠嶺(곡령) : 경주 북쪽의 산 이름.
鬱葱(울총) : 울창하고 푸르다. 鷄林(계림) : 신라의 별칭, 곧 경주.
蕭瑟(소슬) : 쓸쓸하고 적막한 가을 기운.
太阿(태아) : 중국의 명검 태아검(太阿劍). 왕권·국권을 상징.
倒柄(도병) : 칼자루를 거꾸로 쥐다. 권력을 남에게 넘기거나 나라를 잃음.
中原鹿死(중원녹사) : "사슴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천하의 패권 다툼을 의미한다.
何人手(하인수) : 누구의 손인가.
江女(강녀) : 강가의 여인. 신라와 관련된 전설 속 인물.
空傳(공전) : 헛되이 전해질 뿐이다.
玉樹花(왕수화) : 신라 궁중과 관련된 고사나 영화로운 옛 자취를 상징하는 표현.
金堤柳(금제류) : 궁성 주변 제방의 버드나무.
이 작품은 이인로가 경주의 반월성을 찾아 신라의 흥망을 회고한 회고시(懷古詩)다.
첫 네 구는 현재의 풍경을 그립니다. 반달 모양의 성곽은 아직 남아 있으나, 성안은 형극이 우거지고 들짐승의 굴이 되어 버렸다. 반면 곡령의 소나무는 여전히 푸르지만, 계림에는 낙엽만 흩날려 신라의 쇠망을 더욱 처연하게 대비한다.
다섯째·여섯째 구에서는 역사적 성찰. '태아검의 자루를 거꾸로 쥐었다(太阿倒柄)'는 말은 국권을 스스로 잃고 권력이 타인에게 넘어간 상황을 비유한다. 이어 '중원의 사슴'은 천하의 패권을 상징하는 고사로, 왕조의 흥망과 권력의 무상함을 탄식하고 있다.
마지막 두 구에서는 영화로운 궁궐과 사랑 이야기는 전설로만 남았고, 봄바람만이 해마다 버들을 스쳐 갈 뿐이라는 이미지로 인간의 영광은 사라져도 자연은 변함없이 순환한다는 깊은 허무와 역사의 무상을 노래한다.
고려의 문인인 이인로가 옛 신라의 수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대까지 함께 성찰한 점에서, 이 작품은 고려 회고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