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비 속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우는 한 남자를 본 적이 있다. 시내 한복판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거리에서 그는 발버둥까지 치고 있었다. 어이할 수 없는 격랑으로 그의 고통은 내게 밀려왔다. 울음소리와 몸부림은 절규에 가까웠다. 아직은 미소년에 가까운 모습의 그는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
샌들을 신고 설레는 마음으로 화창한 여름날 외출을 했을 부끄럼쟁이의 그가 보인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과 발, 조금은 뒤틀린 얼굴에 웃음을 담고 혼자만의 외출에 감격했을 사람, 스치는 사람들조차 기쁨이 되고 시끄러운 소음도 선율이 되었을게다.
갑자기 비가 내렸다. 안 그래도 어설픈 걸음인데 어쩌다 빗물에 미끄러져 빠져버린 발가락, 샌들은 발목에만 걸려 덜렁되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신으려 해도 끼워지지 않는 신발 한 켤레는 다가올 긴 장마를 예고하듯 멀게만 보였다.
살다 보면 소나기처럼 예기치 못한 일들을 겪을 때가 있다. 짐작조차 하지 않던 일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턱 하니 찾아올 황망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들과 나의 만남도 그랬다. 처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내게 그녀는 빚쟁이를 만난 듯한 낯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푸근하게 생긴 인상과 달리 싸늘한 그녀의 일방적 무시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녀와 일말의 이해관계도 없는 내게 해도 너무한 처사였다. 짐작 가는 일이 있기는 했다.
얼마 전 조그마한 사무실을 열게 되었다. 앞의 사람이 하고 있던 업종 그대로 적지 않은 권리금까지 주고 인수를 하게 된 터라 허가는 당연히 날 것이라 여겼다. 허나 과일 점포 앞의 수선집이 문제였다. 과일 가게는 두어 평 남짓의 컨테이너 박스로 된 불법 건축물을 축조해서 수선하는 분에게 얼마의 달세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데 구청에서 현장실사가 나와 이것이 철거되지 않으면 허가를 내어 줄 수 없다고 했다. 하루가 급한 일인 데다 수선집도, 얼마의 달세를 충당하던 과일 가게도 임대인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임대 인은 허락 없이 설치한 가건물의 철거를 통보했고 철거가 되자마자 하루 만에 허가가 났다.
불법은 그들이 했지만 오래도록 미안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하루아침에 일거리를 잃어버린 수선집 아주머니, 많지는 않지만, 불경기에 달세를 충당해오던 과일 집 주인 내외를 볼 낯이 없었다. 몇 번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고의가 아님을 달아 달라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수선집은 옆 건물의 편의점 안으로 자리를 마련했다. 과일가게 내외도 편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이해는 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바로 옆의 분식점 아주머니는 애먼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여자라고 경멸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 역력하다. 세탁소 주인만 눈엣가시 같았던 수선집이 떨어져 나가자 반색을 하며 반겼다.
여우비 내리듯 종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나만의 일은 아닐게다. 며칠 전 조카가 실직을했다. 대학 졸업 후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던 그는 건축현장에서 타일도 붙이고 마루판도 깔았다. 무엇이라도 하려는 의지가 대단했다. 어느 날 그는 벼룩 신문 구인란을 보고 모 외국계 보험회사 간부의 운전기사로 취직을 했다. 일요일에도 골프를 하는 주인을 실어 다니느라 쉬지도 못했다. 하지만 조카는 신명 나게 일했다. 공사현장에서의 험한 노동에 비하면 견딜만한 일이었다.
몇 달 후 조카는 이 주간의 휴가를 받았다. 주인이 히말라야 등정을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은 그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자신은 지금껏 너무나 편안한 삶을 살아왔다는 걸 느꼈다며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겠다고 했다 한다. 척박한 히말라야를 등정하며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니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다 여겨졌을까. 생활을 위해 등짐을 지고 줄어드는 산소를 참아내며 묵묵히 걷는 세르파들을 보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진지한 질문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뒤늦은 자기 성찰은 한 젊은이의 실업과 곧바로 연결되었다.
조심히 걷는 발길에도 해를 입는 생명들이 있다. 그저 자신의 길을 갈 뿐인데도 풀들이 앓아눕고 작은 숨 탄 것들은 비명을 지른다. 새들은 둥지를 틀지 못하고 원망의 눈길을 보내며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버린다.
그도 그랬다. 빗속의 그에게 우산을 받치며 다가가 신을 신기려 하자 그는 강하게 거부했다. 그 바람에 나도 비를 몽땅 맞았다. 그는 아침에 그저 오래오래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우리도 모르게 행해진 좀은 다른 시선들, 동정 어린 말투, 차별의 말들이 오랜 시간 동안 생채기가 되어 쌓였을 게다. 의지와 상관없이 뒤로만 미끄러지는 삶 속에서 얼마나 힘들게 버티어 왔을까. 이제까지 꼭꼭 눌러 놓았던 설움과 원망들을 모두 쏟아내고 나서야 누군가가 내민 손을 잡을 마음이 생길 것이다.
지금 나의 이웃들도 그러하리라. 불황의 그늘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어내는 그들은 울고 싶은 참에 뺨 맞은 격으로 울분을 퍼붓고 있는지 모른다.
여름 어느 날, 비 오는 거리에서 미끄러져 발버둥치는 그를 좀 더 기다려 주지 못하고 서둘러 갈 길을 가버린 두 번 다시 똑같은 잘못을 하지 않으려한다.
그들의 무작위한 울화가 잦아들면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으리라.
첫댓글 아름다운 얘기책을 읽었습니다. 남 작가님의 고운 마음씨가 훤히 보이는 군요. 감사합니다. 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남작가님은 아름다운 심성을 갖고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