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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족잡지사 보도
필자는 항일영웅 김좌진(金佐鎭)장군의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에 가서 한달간 체류하는 기회에 김좌진기념관 그리고 서울에 있는 김좌진연구원, 김좌진 생가, 김좌진공원을 돌아보았으며 문헌자료를 직접 보고 박환, 김종해 등 여러 력사학자들로부터 장군의 업적을 적지 않게 전해 들었다. 귀국후 계속하여 김좌진 장군이 혁명하던 청산리 골짜기며 흑룡강성 해림시에 있는 그의 생가, 암살되였던 금성정미소 등 곳을 돌아보면서 장군의 혁명업적을 보다 상세하게 알게 되였다. 김좌진 장군이 태여난 충청도 홍성은 예로부터 충절과 기개의 고장으로 유명한 지방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를 끝까지 지킨 최영 장군, 단종복위를 꿈군 성삼문과 리설,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집을 지은 만해 한룡운 모두 홍성 출신이다. 안동 김씨인 김좌진 장군은 1889년 음력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주군 고도면(지금의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아버지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여나 명여(明汝)라는 자와 백야(白冶)라는 호를 갖게 되였다. 김좌진의 가정은 그 당시에 대부자집으로서 많은 땅과 산을 갖고 있었으며 50여명의 가노를 두었고 집만해도 88칸이나 되였다.김좌진은 3살에 아버지와 사별하였다. 그는 10세 때부터 하인들을 모아놓고 군대교련을 하고 말타기 연습을 하여 부근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것이다. 성장후 그는 애국계몽 및 개화운동을 해왔으며 한학과 신문학을 수학하였다. 그리고 틈틈이 병법에 관한 서적을 읽기도 하였다. 어느날 그는 50여호나 되는 가노를 불러다가 큰 잔치를 벌리고 그들 앞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종문서를 불태워 버리고 그들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집안 만석지기의 가산과 수십만평 전답을 가노와 땅이 없는 사람들한테 무상으로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지어 먹고살도록 했다. 또 88칸이나 되는 집을 내놓아 갈산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세워주었다. 장군의 집터는 지금까지도 갈산고등학교의 부지로 리용되고 있다. 1904년 김좌진 장군은 황해남도 해주 오씨 오숙근녀사와 결혼하였다. 이해 김좌진은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륙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후 임관하였으나 임관직후인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였다. 장군은 설음을 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8세에 홍성에 온 김좌진은 가산을 털어 호명학교를 설립하고 신문학을 교육하였으며 경기, 충청지역 교육계몽을 목적으로 조직된 기호흥학회의 흥성지부를 설립하였다. 이해 청년학우회가 조직되자 청년학후회에 가입하고 한성연회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나라가 금방이라도 망할 지경에 이렀는데 단순히 언론이나 교육을 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된 그는 오로지 무력으로 일제침략자를 몰아내야 한다고 가슴깊이 느꼈던것이다. "나라가 망한 이때에 산업은 다 무엇이냐. 둘이 모이면 둘이 나가 죽고 셋이 모이면 셋이 나가 죽을것이다."김좌진 장군은 무력으로 왜놈과 맞서 싸우기로 하고 1909년 11월 무역회사를 꾸렸다. 겉으로는 무역회사이지만 실지는 독립군 활동기지기도 하고 그곳에서 나오는 자금을 혁명활동경비로도 썼다. 그는 독립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인들에게 군사기술을 배워주는데 온갖 힘을 기울렸다. 독립운동기지 설정을 위한 군자금을 조달하던중 밀고가 들어가 경찰에 잡혀 2년 6개월간 홍성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였다. 그가 형무소에서 고생을 겪고 풀려나온 때는 1913년 9월이였다. 감옥에서 출소되였지만 그가 보기에 바깥세상은 감옥안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그는 다시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일제에 체포되여 홍성헌병대에 10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지만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일보》1930년 2월 17일자는 “…이전에는 불기불반하고 호탕하기가 짝이 없던 김좌진은 그 당시부터 차차 장년기로 들어가게 되여 성격도 침착해지고 매사를 치밀히 처리하였으며 그의 일생으로서는 중대한 전환기에 다달았다…”고 기사화하였다. 중국에 망명하기로 결심한 김좌진은 “남아가 태어나 실수하면 용납해주는 곳이 없으니 뜻있는 선비가 굳이 살려고 하는것은 다시 때를 기다리려는 것이다”라는 글귀를 남기고 동북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 많던 가산을 독립운동경비와 빈곤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다나니 중국으로 갈 려비마저 없게 되였다. 그래서 김좌진은 전라도 모처에 가서 돈 3000원을 변통하여 왔지만 그 대부분의 돈을 독립운동경비로 남겨놓다보니 려비가 여전히 부족하였다. 그는 부자집에 찾아가 강도행위를 하였던것이다. 《동아일보》1930년 2월 24일자는 이렇게 기사화하였다."김좌진은 한 부자집에 뛰여 들어가 3000원의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 일제놈들의 추격끝에 부상을 입었다… 한 처녀가 그를 구하고 병치료를 해주었다…” 일제놈들에 의해 추격중 김좌진은 아픔을 참아가면서 면목도 모르는 한 집에 들어가 구원을 바랬다. 마음씨 착한 젊은 녀인이 그를 숨겨두고 3개월간 상처를 정성껏 치료해주었다. 그 녀인인즉 김계월녀사이다. 3개월간 함께 있는 기간에 애정이 움터 김계월녀사는 임신까지 하게 되였다. 병이 완쾌되여 동북으로 떠나기 직전 김좌진은 이런 글을 남겨 놓았다. “만약 아들을 낳으면 두한(斗漢)이라고 이름을 짓고 딸을 낳으면 옥녀(玉女)라고 이름을 져주오.”이는 그의 친필로 된 문헌자료에 있는 내용이다.한국의 드라마 《야인시대》의 주인공 김두한(1918년 5월 15일 ~ 1972년 11월 21일)이 바로 이렇게 태여난것이다. 54세에 생을 마감한 국회의원이였던 김두한은 생전에 부패를 제일 강하게 비판한 인물이였다. 문헌에는 김좌진은 생전에 5명의 부인을 만났다고 한다. 동북에 온 김좌진은 여러 무장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김좌진은 무장독립운동단체인 길림군성사에 가입하여 참모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에는 군사전략가들이 많았다. 당시 서일(徐一)은 길림군정사에 김좌진을 보내줄것을 정중히 청구하였다. 이에 김좌진은 왕청현으로 오게 되였던것이다. 그는 북간도에서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 서일과 함께 북로군정서 사관학교를 건립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김좌진 장군은 독립군의 군사훈련과 무장투쟁에 전념하였으며 사관연성소 교장으로 초급군관을 양성하는 등 준비를 확장하였다. 북로군정서부대는 정규군같이 훈련을 하였지만 무기가 크게 없어 곤난을 받았다. 부대는 동북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무기구입에서 말이다. 많은 무기를 얻게 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울 만단의 준비를 갖추었을 때 동북군벌인 장작림이 일본의 조정에 의해 왕청에 주둔하고 있던 북로군정서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주둔군 사령관인 맹부덕(孟富德)에게 하달하였다. 서일 총재는 일본군과 독립전쟁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강조하면서 북만지역으로 가자고 주장하였고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로 이동하여 이 시기를 놓치지 말고 독립전쟁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북로군정서는 김좌진의 뜻대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서일 총재는 김좌진과 함께 행동하지 않았다. 김좌진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이 되여 반달동안 혈전을 계속할 때 그는 거처와 식사를 병사들과 꼭 같이 할뿐만 아니라 밤에는 잠을 자지 않고 자기가 파수를 보았다. 1920년 6월, 도문 봉오동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연변지구의 반일무장력의 급속한 성장에 크게 놀랐다. 놈들은 근본적인 대책을 취하기로 작심하고 연변지구 조선인 반일무장력을 “포위토벌”을 할 “초토계획”을 제정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이에 대처해 시작된것이 청산리전투이다.1920년 10월,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독립군이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6일간 10차례의 전투를 벌렸다. 독립군은 90 여명이 전사했으나 일본군은 무려 3300여명이 사살되였다. 그래서 청산리 대첩은 독립군의 항일투쟁중에서 가장 찬란한 승리로 기록되고 있으며 중국인민들의 항일고조를 불러일으켰다. 청산리전투에 연성대장으로 참가하였던 리범석의 회고록 《우등불》에는 어랑촌 조선인부녀들이 생명을 무릅쓰고 북로군정서군을 도와나선 사실이 기록되여 있다."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가지고 비발치는 총알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 덩이 두 덩이 주먹밥을 동지들의 입에 넣어주었다."청산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조선인마을을 습격하여 조선인을 대거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민간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북로군정서를 청산리로부터 밀산에 있는 로씨아변경 흥개호에 집결하였던것이다. 그후 김좌진은 시베리아로 떠났다. 그때 아들 두한은 경기도 안성지방에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원산에 있는 식당에서 일했다. 본처 오숙근한테서 낳은 옥남이가 동북에서 살았다. 문헌자료에는 옥남이는 열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자유시참변”에서 간접적으로 타격을 받은 김좌진 부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북동북지역으로 이동하여 1922년 총재에 리범윤(李范允), 총사령관에 김좌진을 선임하고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하였다. 1925년 3월 녕안현에서 김좌진 장군은 대한독립군단 김혁(金赫)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서를 통합하여 신민부(新民府)를 결성하고 북만주지역을 관할하였다. 그는 “나라를 살리는 길은 오로지 교육에 있다”면서 북동북에서 일본군과 싸우면서도 주둔하는 곳마다 독립군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그렇게 세운 학교만 해도 27개나 되는데 해림시에 있는 조선족실험소학교는 지금도 그 력사를 유지하고 있다.김좌진은 1925년 4월부터는 기관지 신민보(新民報)를 발행하고 문맹퇴치, 독립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산업진흥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927년 신민부 본부가 일본경찰들의 습격을 받아 12명이 체포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김좌진 장군은 그뒤 한족총련합회를 구성하여 모든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에 전격하였다. 김좌진은 한족련합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해림시 산시진 신흥촌에다 금성정미소를 꾸렸다. 이 정미소는 독립군의 자금을 해결하는데 일정한 도움이 있었다. 1930년 1월 24일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가인 김좌진 장군에게 있어서 그의 마지막 일생이 될 줄을 그 누구도 몰랐다. 그날 오후 2시에 정미소의 풍차구경을 나왔다가 권총에 맞아 숨진것이다.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문》 등 신문의 특대뉴스로 알려졌다. 중국군인 6~7명이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흉수를 추격하였으나 끝내 붙잡지 못했다. "할 일이… 할 일이 너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조선반도와 동북의 넓은 벌과 장백산 일대의 험난한 산을 넘나들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던 김좌진 장군은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의 날을 보지 못하고 42세의 젊은 나이에 눈 쌓인 동북벌에 최후의 피를 흘리고 말았다. 김좌진 장군의 장례는 국내외에 있는 그의 전우들을 기다리느라고 그가 순국한지 100일만에 거행되였다. 그때 방문한 조문객은 1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인들의 슬픔은 더 말할것도 없고 중국인들도 장군의 죽음을 “고려왕이 죽었다”고까지 하면서 애도하였다. 김좌진의 시신은 그의 집 뒤편에 림시로 보관되였다가 장례에 맞추어 자경촌 (지금의 신흥촌)으로 옮겨져 매장되였다.김좌진 장군을 죽인 흉수에 대해서는 그가 서거한지 8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김좌진을 암살한 흉수는 그의 부하였던 박상실(일명 리복림 공도진)라고도 하고 또 김봉환 일명(김일성 金一星)이라고도 하고 일본놈들의 “사주받고 죽였다”고도 한다. 또 “고려공산당에서 암살하였다”는 등등의 의논이 있는데 아직까지 미결로 되고 있다.김좌진의 묘소는 그를 가장 존경했던 동지들이 보초를 서가며 보호하였다. 그러던중 몇년후 자경촌(지금의 신흥촌 필자 주)으로 일본인이 이민을 온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하여 그의 유해를 고향으로 반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김좌진 장군이 순국한 후 고향으로 귀국했던 김좌진의 본 부인인 오숙근녀사는 1934년 5월 21일 다시 동북으로 왔다. 동지들의 협조를 받아 유해는 파냈지만 고향땅으로 가져가는 일이 문제였다. 일반 사람들의 유해라면 몰라도 김좌진이라면 일본놈의 감시가 삼엄하였다. 동지들의 도움으로 장사군처럼 가장해서 유해를 무사히 가져가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리호리에 가만히 밀장하였다. 이후 1957년 오숙근녀사가 타계하자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이 그의 유해를 장군의 서산(先山)인 홍성군 청초면 재정리에 다시 이장하여 현재까지도 그는 이곳에 고이 잠들고 있다. 1962년 3월 21일, 한국에서는 김좌진 장군에게 건국공로훈장과 대한민국장으로 추서하였다. 국회위원으로 있었던 김두한의 딸 김을동(金乙東, 김좌진 장군의 친손녀)도 국회의원으로 있다. 그의 아들 송일국은 김좌진의 외증손자로써 한국의 국민배우이다. MBC 대하사극 주몽 역할로 크게 소문 놓았다. (글/김원범 )
첫댓글 백야 장군의 순국장소 금성정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