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철조망이란 사람 또는 동물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한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말한다.
농촌이 모내기로 한창 바쁜 6월의 어느날 나는 정읍군 산내면 어는 산골에 위치한 녹차 밭에 다녀 온 일이 있었다. 산자락 아래로 논밭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회색기둥들이 드문 드문 서있었고 기둥사이로 여러 가닥의 긴 전깃줄이 걸려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 출몰하는 멧돼지들의 횡포를 막기 위한 철조망이라고 한다. 이놈들은 철조망 아래로 깊은 터널을 파고 들낙 거려 마을 사람들의 애를 태우며 피해도 크다고 한다. 철조망의 전류에 따끔한 맛을 보았겠지만 산 아래에 널려있는 먹거리에 대한 유혹은 떨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차밭은 마름쇠에 가시덩굴로 빈틈없이 막아 놓았기 때문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주인의 설명이었다.
나는 휴전이 성립 되던 해인 1953년 봄에 K군 M면 소재지의 초등학교에 교사 발령을 받았다. 동기생 5명과 함께 4월초에 부 하였다. 면소재지는 전기 철조망으로 애워 싸여 있었고 가동중 이었다. 그 무렵은 공비[共 匪]의 잔당들이 출몰 하고 있어 이를 막기 위함이었다. 이런 철조망 조차 가끔은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가끔 두꺼운 멍석을 들고와 철조망위에 걸쳐놓고 이를 타고 넘어와 민가에 침입 곡식을 약탈해 달아났다. 이들 몇은 퇴로를 차단당해 무장경찰에 의해 사살 당했으며 이들이 멘 배낭에는 얼마쯤의 곡식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공비들이 저질렀던 미명의 ‘보급투쟁’역시 먹지 않고는 살수 없었기 때문이다.
1953년의봄은 단군 이래 최악이란 흉년이든 이듬해였다. 도시 농촌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린 때였다. 수물 안팎의 장정인 우리들 역시 배가 곺았었다. 하숙집의 아침 꽁보리 밥 한 그릇과 점심은 유니세프 원조 로 나온 강냉이죽 한 그릇과 저녁보리죽이 하루의 먹거리 전부였다. 우리들에겐 의무 복무 3년 이란 게 있었지만 다 집어 치우고 집에 돌아가 밥이나 실껏 먹는 게 솔직한 심경이었다. 배곺은 다섯명의 햇병아리 교사들은 기막힌 아이디어를 생각 해 냈다. 가정방문이었다. 지금의 교육 목적과는 거리가 먼 가정방문이다. 마을에 산재 하고 있는 학부형 가정들 가운데에는 그래도 끄니 걱정을 하지 않고 사는 가정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런 가정들을 골라 방문 리스트를 만들었고 실행에 옮겼다. 방문을 받은 가정들은 있는것 없는것 다 털어서 선생님들을 대접하는 게 당시의 민심이었다. 우리는 그런 점을 이용했다. 우리 다섯명은 ‘어드민니스트’란 은어로 통하였다. ’어드민니스트[ADMINIST]란 영어로 행정부란 뜻이지만 발음이 우리말의‘ 어드먹으러‘ 와 비숫하다 하여 그렇게 부른 기억이 난다. 어느날 한 학부형의 가정방문의 저녁밥상은 참으로 푸짐하였다. 희끗한 쌀이 섞인 맥반에 삶은 닭고기와 막걸리 주전자 까지 얺혀서 나왔으니 우리에게는 드문 성찬이었다. 그날의 밥상에 그만 시간 가는 걸 깜박 잊었었다.
우리 일행이 철조망의 통로에 이르렀을 때에는 통로는 몇 가닥의 전선으로 막혀있었다. 늦은맘 행인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지서의 경찰들이 나와 길을 막아 버린다. 가지고다녔었던 전등을 비춰보니 걸쳐 놓인 전선의 높이는 우리 허리 춤 보다는 조금 낮은것 같았다. 잘하면 뛰어 넘을수 있는 높이였다. 그러나 일행중 누구 하나 선뜻 뛰어 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들에 매어 놓은 황소도 감전하면 피가 말라죽는 어마어마한 전류가 흐르고 있음을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곳 어디엔가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공비에게 걸려들면 끝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주저란 용납 되지 않았다. 하나 둘 목숨을 걸고 전깃줄을 뛰어넘었다. 발바닥에도 땀이 나는 것을 그때에 처음 알았다. 나는 이런 가정방문이 얼마나 계속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어느 아파트의 한 경비원이 그곳 쓰레기장에 버려진 낡은 전기 밥솥하나를 발견하고 뚜겅을 열어 보니 손도 안댄 흰 쌀밥이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세상에 어찌 이럴 수 있담 하고 혀를 찼다고 한다. 아무리 먹거리가 넘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럴 수는 없었다. 먹을 음식이 없어 배를 곺아 본 고통은 건강이나 다이어트를 위해 억지로 겪는 그런 고통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흘 굶어 남의 집 담장 넘지 않을 장사 없다는 그런 배곺음 일것이다
최근 어느 T,V. 한 장면에 농촌 부녀자들이 머리에 모판을 이고 거리에 나와 시위를 벌이는 것을 보았다. 희안한 시위였다. 벼가마를 트럭이나 경운기에 싣고 와 불태우는 시위는 가끔 보았으나 처음 보는 광경이다. 외국산 쌀 수입반대 시위로 농민들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닌 것 같았다. 경작지 마저 줄어드는 마당에 농민들의 생산의욕 마져 떨어지면 농사는 누가 짓는단 말인가 세계 주요 곡물 생산국들은 식량자원을 무기화 한다고 한다. 그 어떤 무기보다도 무서운 무기가 될것 같다.
적어도 식량자원 만큼은 자급자족하여 우리 세대가 겪은 재앙을 우리 후손에게 물려 주지 않았으면 한다. [2015.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