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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켄 산 산행
소화나 할 겸 데블스 펀치볼 폭포(Devil ’s Punchbowl Falls)에 잠시 가려고 30분 예정으로 나선 것이 아이켄 산(Mt Aicken)으로 향하고 있다.
트랙이 불안정하여 데블스 펀치볼 폭포로 가는 길을 폐쇄하는 바람에 뱃살이나 빼자고 시작한 것이 꽤 힘든 트레킹으로 바뀌고 말았다.
계속되는 오르막에 봉주 형님은 “난 내려갈란다. 애고고" 딱 두 마디만 남기고 하산하고 나머지는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트레킹은 일반적인 등산과 다른 점 이 많다.
한국에서는 주로 산에 가면 제일 정상의 '점’을 향해 간다. 하지만 트레킹은 좋은 경관을 따라 ‘선’으로 이동한다.
그러므로 ‘정점’이라는 하이라이트가 끝나게 되면 시들해지는 등산과는 달리 클라이맥스는 좀 약하지만 즐거움과 감격이 계속된다.
나는 트레킹 때에 발밑에서 나는 온갖 소리와 기억들을 좋아한다.
모래를 밟을 때의 사각거림, 자갈밭의 그 요란한 소리, 진흙밭의 찌걱거림, 찰방거리는 물을 지날 때는 장난꾸러기 시절, 우산 없이 신나게 폼을 적시던 즐거움이 떠오른다.
허리까지 빠지는 눈 속을 걸을 때는 힘도 들지만 그보다 큰 즐거움이 있다.
비가 올 때 비옷 위로 떨어지는 소리며 날아갈 듯한 강풍을 만난다면, 자연을 만든 창조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므로 감사할 것. 세상을 살기 위해 모든 신경과 에너지를 머리로 보냈지만, 트레킹 중에는 그 모든 것들이 다시 온몸으로 내려오는 기분이 든다. 물론 신선한 공기나 경치는 말할 필요도 없다.
허영만 화백이나 허 PD 모두 오지나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고,나 역시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허벅지가 뻐근하고 힘들지만 아무도 힘든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허 PD나 허영만 화백의 얼굴에서 삐질삐질 나오는 땀방울을 보면 분명히 나만큼 힘들 텐데.
길은 끊임없이 오르막이다.
산의 아랫부분에서는 커다란 비치나무 숲 속으로 구불거리며 나 있는 길을 따라 가고, 허리까지 숙이면서 지나가야 하는 관목 숲과 낙석이 가득한 너덜지대,
물이 말라버린 진흙길 동을 지나서 한참을 간다.
제일 먼저 쉬다 가자는 얘기는 하기 싫고, 그렇다고 뒤처져 가기도 싫고 약한 티 내기도 쉽지 않은 일행들. 그래서 우리는 거의 두 시간 동안 한 번도 쉬는 일 없이 오르고 또 올라 아이켄 산의 작은 봉우리 중 하나에 올라섰다.
뉴질랜드 트레킹의 큰 즐거움은 고립감이다.
산 정상에 오는 동안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할 정도로 한적했다.
고립감은 같은 장소라도 소음이 없고,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분 좋은 긴장감과 스릴감을 준다. (특히 도시에서 온 사람은 산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뉴질랜드는 사나운 짐승이나 독충, 뱀 등이 없는 안전한 땅이기 때문에 이러한 고립감을 위험 없이 즐길 수 있다.
웬만한 뉴질랜드의 트랙들에서는 사람들의 방해 없이 자연과 단 둘이서 독대할 수 있다.
눈앞에 펼쳐진 서던 알프스와 발밑에서 울리는 폭포 소리가 초대형 아이맥스 극장보다 훨씬 큰 무한 화면과 리얼 사운드 시스템으로 우리만을 위해서 상영된다.
오징어와 팝콘 대신 시원한 바람에 실려오는 초목의 은은한 향이 폐 속 깊은 곳에 있는 먼지까지 모두 날려 보낸다.
노다지를찾아
아서스 패스(Arthur’s Pass)는 남섬의 동서부를 자르는 서던 알프스(Southern Alps)의 최고 고지대에 위치한다. 캠퍼밴으로 내려오는 오티라 계곡 고가도로(Otira Gorge Viaduct)는 서던 알프스의 자연을 최대한으로 보호하기 위해 이곳저곳 신경을 쓴 곳이 많다.
차량 통행량으로 보면 비포장도로 정도면 충분한데, 산의 원래 모양을 전혀 손대지 않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산속에 고가도로를 만들고, 그 위로 물길을 만들어 폭포가 쏟아지도록 한 것이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험준한 산을 지나는 오티라 고지를 넘으면 웨스트 코스트라는 뉴질랜드 남섬 서부에 이른다.
이곳은 호주와 뉴질랜드 사이의 거친 태즈먼 해에서 수분을 듬뿍 담은 구름이 일 년 내내 비를 쏟아댄다. 연간 강우량이 5000-1만 2000밀리미터 정도(한국의 연평균 강우량은 1200밀리미터 정도이다)이므로 1년 365일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은 사납고 거칠고 땅은 흙과 양분이 씻겨 나가 메마르고 바위투성이인 데다 해발고도 수백 미터까지 쏟아져 내려온 빙하는 일 년 내내 찬 기운을 바다로 쏟아 놓는다.
이런 거친 자연환경은 이곳에 독특한 선물을 만들어주었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이 곳 서부에 풍부하기 때문이다. 바로‘금’이다. (서북부 쪽은 석탄이 유명하다.)
뉴질랜드의 남섬은 한때 미국 서부를 방불케 하는 노다지로 세계에 알려졌다. 많은 사람들이 금을 캐기 위해 이곳에서 목숨을 걸었고, 현재까지도 로스지역에서는 금을 캐고 있다.
아직도 이 곳의 웬만한 강 하구에서 사금 캐기를 해보면 금이 나온다. 그만큼 금이 풍부하다고는 하지만, 역시 노력 이상으로 행운을 주는 것은 없다.
금은 영화에서처럼 큰 덩어리 원석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
자연계의 거의 모든 광석에 너무나 골고루 포함되어 있어, 누구든지 집앞이나 밭의 흙을 퍼서 금을 고른다면 그중에도 0.0000005%의 금이 포함되어 있다.
2.5센티미터 정도면 전례 없이 큰 덩어리로 볼 수 있다.
또 역사 이래 금이 많은 지역은 대부분 부와 행복보다는 도박, 노름, 범죄, 매춘 등이 가득한 걸로 봐서도 금은 결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우리도 옛 뉴질랜드 선인들의 길(?)을 따라 금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상티 타운(Shanty Town 판자촌 정도로 볼수 있다)이라는 민속촌이다.
옛 거리가 복원되어 있고, 가게마다 실제로 물건을 팔고 있다.
증기기관차 역시 모형이 아니라 석탄을 넣어 그 증기로 가는 실제 기관차라 더욱 정감이 간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나지 않은 우리도 오래전의 그 모습이 이렇게 흥미로운데 이곳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가족들끼리 움직이는 모습이 많이 보이지만,그래도 뉴질랜드인지라 큰 시설에 비해 관람객이 많지 않아 한적한 옛날 거리를 그대로 보는 듯하다.
이곳 저곳을 거닐다가 다리도 쉴 겸 증기기관차를 탔다.
증기 기관차는 아름다운 숲 속의 작은 간이역에서 멈춰 섰다. 사금 캐는 곳이었다.
이곳에 내리자 관리인이 땅에서 흙을 한 삽씩 퍼서 입이 넓은 쟁반에 올려준다.
금을 찾는 또 하나의 묘미는 그 과정에서 무슨 어려운 기술이 필요한 것도, 대단한 장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흙이 담긴 쟁반을 물속에서 흔들면서 사금을 채취하는데, 그 원리는 간단하다.
사금은 비중이 가장 큰 금속으로 19.3g/ml이다. 쉽게 말해 1리터 우유팩 하나에 금을 채우면 무게가 19.3킬로그램이라는 이야기이다.
물에 비해 거의 20배나 무겁기 때문에 물에 넣어 계속해서 흔들면 가장 바닥으로 가라앉게 된다.
가라앉은 금을 제외한 나머지를 버리는 것이 밥 할 때 쌀 씻는 방법과 완전히 동일하다.
다르다면 금을 찾을 때는 가벼운 쌀(돌)을 버리고 무거운 돌(금)만 남긴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쟁반 하나를 들고 난생 처음 사금을 찾는 우리도 손으로 흔들고 돌을 골라내자 쟁반 속의 흙이 점점 줄어 노란 금가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한 삽의 흙을 퍼내 몇 분 동안 흔들고 신경 쓴 노력의 대가로 깔끔한 여학생의 비듬만큼 금이 나왔다. 관리인에게 얼마 정도의 가치가 있냐고 물었더니, 하루 종일 흙을 고르고 금을 구한다면 빵 두 쪽 정도는 먹는다는 말에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쉽다”는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말씀이 불현듯 생각났다.
제21일 웨스트 코스트 하스트
허 PD가 온 후로 살맛이 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얼큰한 된장찌개가 끓고 밥공기를 손에 들고 먹어야 할 정도로 반찬이 가득하다.
밥상의 수준 차이를 말하자면 자취생 밥생에서 한정식 식당 밥상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아침 식사 후에 시작된 여행에서 마주한 웨스트 코스트의 경이로운 풍경은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쪽에는 해가 떠있는데, 우리가 있는 곳은 비가 엄청나게 쏟아진다.
하지만 웨스트 코스트에서는 비가 많이 오는 것에 대해서 투덜거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선물만 좋아하고 선물 주는 사람은 싫어하는 것’과 같다.
워l스트 코스트의 강한 비바람이야말로 오랜 시간 동안 이 지역의 자연을 조각하고 다듬은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거친 폭우로 대지를 쓸어버리는가 하면 때론 촉촉한 비로 어루만진다.
고산에는 눈을 뿌리고 사방의 바위를 깎는다.
이런 독특한 기후 조건 때문에 웨스트 코스트를 여행하려면 몇 가지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비옷을 준비하라. (한국의 지하철이나 슈퍼마켓에서 사는 간이 비옷도 괜찮다.)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웨스트 코스트의 비를 피하다 보면 여행을 할 수도 여행의 재미도 느낄 수 없다.
강한 바람에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것도 이곳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얇은 비닐이라도 비옷을 입고 그 비를 몸으로 맞아보라.
연인의 작은 속삭임으로 시작한 빗방울이 머리와 어깨를 마구 두드려대는 박장대소로까지 들린다면 웨스트 코스트의 비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주관하는 창조주의 손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장난스러운 친구의 차가운 손길처럼 목덜미로 흘러들어오는 빗물을 즐기며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려보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진정한 삶의 생수를 맛보게 될 것이다.
둘째, 리펄런트(Repellent 벌레 기피제)를 준비하라.(8-9달러 정도) 남섬, 특히 서해안에 사는 샌드플라이 (Sand Fly)는 뉴질랜드의 순수한 풍경에 뿌려지는 매운 양념 같은 것이다.
길이 2-3밀리미터의 날개가 달린 검은색 작은 벌레로 무척이나 느리고 작은 녀석들이 몸에 붙어 모기처럼 피를 빤다.
다행히 아무런 병을 옮기지도 않고 덩치가 작은 관계로 피를 많이 훔쳐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며칠 동안 괴로울 정도로 가렵기 때문에 물리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려면 몸에 특유의 냄새가 나는 리펄런트를 발라야 하는데 뉴질랜드의 슈퍼마켓이나 약국 등 어디에서나 판다.
리 펄런트를 바르면 그 독특한 향과 맛 때문에 샌드플라이가 주위에 오지 않거나 물려고 피부에 앉더라도 다시 날아오른다.
저기압의 후덥지근한 날이면 샌드플라이들은 극도로 왕성한 식욕과 대담함을 보여주기 때문에 리펄런트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이미 물린 곳은 ‘절대로 절대로’ 손대지 말 것.
한번 긁기 시작하면 며칠동안 잠을 못 잘 정도로 가렵기 때문에 물린 곳을 만져서는 안 된다.
가려운데 어떻게 긁지 않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일단 긁기 시작하면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려워지기 때문에 최악의 고통을 맛보게 된다.
땀 냄새와 높은 온도를 좋아하기 때문에 트레킹이 끝난 직후의 사람이 샌드플라이에게는 이상적인 먹잇감이나 다름없다.
또 하나 권하고 싶은 방법은 아주 많이 물려 면역성을 가지는 것이다.
실제로 현지인들이나 나같이 수도 없이 물린 사람들은 면역성이 생겨서 물린 자리가 별로 가렵지 않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의 ‘쓴맛’을 즐기고 싶으면 맨발로 샌들을 신고 저녁에 웨스트 코스트를 산책해보라.
발가락 사이 에 붙은 샌드플라이 들이 뉴질랜드의 특별함을 오랫동안 간직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샌드플라이는 병을 옮기거나 더러운 벌레는 아니다.
셋째,출발 전에 자동차 연료를 채우고 식료품을 준비하라.
어디를 가거나 그 지역에서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해당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 여행자들이 할 수 있는 작은 배려이다.
하지만 웨스트 코스트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마을이 아주 작고 그나마 필요한 물건 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처럼 약 20분마다 늘어서 있는 주유소를 생각했다가는 큰 고생을 할 수 있다.
460킬로미 터가 넘는(그레이마우스~와나카) 거리를 달리는 동안 불과 서너 개의 주유소만 있기 때문에 항상 기름을 가득 채워야 한다.
대부분의 지역이 휴대전화가 작동하지 않는 지역이라 기름이 다 떨어져서 차가 멈춘다면 문제 해결이 더욱 어렵다.
만일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해 문제가 생긴다면 친절한 뉴질랜드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웨스트 코스트의 중간에 위치한 호키티카(Hokitika)에는 손재주 좋은 사람들이 많다. 비취 (Jade 옥)가 대표적인 특산물이라 옥 세공,나무 세공, 유리 세공 등이 유명하다
이 곳에는 옥이 흔해서 보도블록의 일부로 깔아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