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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를 저희가 선택해서 어른들 앞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또 참석했던 분들도 또 한 번 더 은혜를 받으려고 우리 주일 학교 친구들을 소개했습니다. 순서에 따라서 발표하고 이렇게 할 때 여러분들이 큰 박수도 쳐주시고 함께 호응해 주셨으면 우리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먼저 우리 아인의 다시 한 번 박수 부탁드립니다. 뉴진스보다 더 나은 것 같아요. 그렇죠 그래선 지금 제가 서론에 말씀드리는 건 어떻든 제 생각이에요. 제 생각에 요즘 사람들 심지어 성도들까지 원래는 유난히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지고 보면 성탄절이고 또 연말이라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야 할 때인데 유난히 원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건 순전히 제 느낌일 수도 있어요. 세상엔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데 목사인 제가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하려는 노력이 또 마음이 없어서 제가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조금 주관적이긴 해도 요즘 사람들은 특별히 원래는 사람들이 사랑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제 주변을 봐도 사랑에 대한 결정을 하는 그런 일들이 별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주관적이 아니라 좀 더 객관적으로 봐도 어떤 사랑에 대한 결단과 사랑에 대한 헌신을 작정하는 일이 지금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 당연히 우리가 이유도 고민해 봐야 되겠죠. 왜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결정을 하지 못할까 사람들이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냥 저는 목회자니까 말씀을 좀 비추어 봤어요.
왜 사람들이 사랑하지 못할까 사랑에 대한 결정을 하지 못할까 그것은 사람들이 낮아지지 못했기 때문인 거죠. 그러니까 교만한 마음으로는 그러니까 자존심이 가득 찬 자존감이 아니라 자존심이 가득 찬 마음으로는 누구를 사랑할 결단과 마음을 먹을 수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지금 이 시대가 교만함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는 거죠.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할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교만해져서 사랑할 결정을 잘 하지 못하고 목회자도 교만해져서 사랑할 결정을 잘 하지 못하고, 사람이 가난해서 사랑할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교만해서 사랑할 결정을 하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는 항상 이렇게 핑계를 대요. 가난하니까 시대가 어려우니까 사랑하는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고 하지만 그 사람의 이면을 파고 들어가 보면 가난해서가 아니라 교만해서 시대와 어떤 환경이 나라와 백성들을 또 성도들을 교만하게 만들어서 사랑할 결심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난해서 사랑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쩌다 그런 경우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은 교만해서 사랑할 결정을 하지 못하는 거예요. 예전 같으면 지금쯤 사랑하기 위한 사랑을 나누기 위한 결정들이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때보다 오히려 더 풍성한 삶을 삶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 가운데는 사랑할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범죄한 인간을 사랑할 결심을 하셨을까?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는 인류를 인간을 피조물을 사랑할 결심을 하셨을까?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을 철저하게 배반하고 다 떠난 제자들을 사랑할 결심을 하셨을까?
그 이유는 내려놓았기 때문인 거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실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는 인간을 사랑할 수 있으셨던 것은 창조주의 자리, 또 심판주의 자리, 아들의 자리를 내려놓았기 때문인 거죠. 내려놓음의 결정이 사랑을 결정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 말씀입니다. 우리 함께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내려놓음이 사랑을 결정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도 자신을 내려놓지 않으면 겸손하지 않으면 사랑할 결심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미움의 결정은 아무 때나 할 수 있어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결심은 아무 때나 해도 돼요. 조건이 필요 없어요. 왜요? 우리 본질이 본질이 범죄한 인간이잖아요. 그래서 언제든 미움의 결정은 할 수 있지만, 사랑의 결정은 아무 때나 함부로 할 수 없는 게 사랑의 결정이에요.
언제 할 수 있을까요? 자기를 내려놓을 때 할 수 있습니다. 미움의 결정은 자신을 내려놓지 않아도 가능합니다. 자신을 버려두면 우리는 아무 때나 미워할 수 있어요. 굳이 어떤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아도 우리는 그냥 사람을 미워할 수 있고, 미워하는 결정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결정,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하는 이 결단과 결정은 자기 포기, 자기 내려놓음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사랑의 결단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이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거죠. 세상에서 자기를 내려놓지 못해서 사랑의 결단을 하지 못하는 것이고, 교회 안에서도 자기를 내려놓지 못해서 사랑의 결단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내려놓으셨기 때문에 사랑의 결단을 하셨던 거예요. 더 큰 걸 내려놓으면 더 큰 사랑의 결단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목숨을 내려놓으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의 결단을 할 수 있어요. 물질을 내려놓으면 물질을 헌신한 사랑의 결단을 할 수 있어요. 더 큰 것을 더 많은 것을 내려 놓을수록 우리는 더 큰 사랑의 결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 이 말이 어떤 말이냐 하면 하나님과 하나라는 거예요.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한 분이신 하나님인 거죠. 그런데 하나님과 동등됨을 치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종이 되셨고 사람이 되셨고 피조물이 되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히는 결단을 십자가의 자기를 내려놓는 결단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자기 포기가 없으면 사랑의 결단을 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 세대는 자기 의지로 똘똘 뭉쳐져 있어요. 그래서 설교하는 일도 옛날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어요.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이 교만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가끔 옛 어른들의 이렇게 설교집을 볼 때가 있어요.
근데 지금의 지금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보다는 어떤 경우는 성경도 틀린 경우도 있고요.
그때는 워낙 알레고리적 해석이 많을 때라서 성경의 본래적인 의미와는 차이가 많은 설교도 많이 하셨어요.
근데 그때는 사람들이 아멘하고 그 말씀을 받고 근데 교회가 크게 부흥했잖아요. 지금은 저 말고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그러니까 설교 내용 전달 방식 빼고 설교 내용만 보면 정말 좋은 내용이에요. 별 차이가 없어요. 대형교회 목회자들이나 작은 교회 목회자나 설교 내용은 큰 차이가 없어요. 이런 환경과 분위기와 여건 어떤 영적인 조건들이 일만 제외한다면 정말 큰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왜 사람들이 말씀의 은혜를 못 받을까요?
자기 포기와 자기 내려놓음이 없기 때문인 거죠. 너무 자기 의지가 강해요. 그래서 말씀 한 구절이 내 삶을 삐집고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를 않는 거예요.
여러분 말씀이 내 삶을 비집고 들어와서 내 삶의 잘못된 공간들을 파헤치고 깨뜨리고 새롭게 해야 우리 영혼과 삶이 새롭게 되는 거잖아요. 근데 우리 의지가 너무 강해서 말씀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허락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예전보다 훨씬 더 좋은 내용의 말씀들이 선포되고 그때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말씀이 선포되지만 그때만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랑의 결단이 점점 사라지는 것 그것은 성도들과 또 목회자들이 내려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거죠. 내려놓는다는 것에 다른 말은 포기한다는 의미인 거죠.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의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결단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라옵니다. 그러니까 대가가 없는 사랑은 없어요. 그러니까 대가를 치러야 사랑의 결단을 할 수 있는 거죠. 가치 있는 것을 내가 헌납해야 가치 있는 것을 희생시켜야 내가 사랑의 결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영혼을 살리는 큰 결단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의 대가를 교회가 치르지 않기 때문인 거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영혼 구원을 할 수 있는 만큼의 대가를 교회가 치러야 돼요. 그래야 영혼 구원의 역사가 교회 안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가치를 치르지 않으면 사랑의 결단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셔서 사랑의 결단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생각을 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인 거예요.
여러분은 어떤 사랑의 결단을 최근에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들을 버리시고 우리를 양자 삼아 주셨어요. 아들을 버리셨기 때문에 양자 삼는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최근에 누군가를 여러분의 양 아들과 양 딸로 삼으실 결정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나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는데 나는 누군가를 양자 삼을 결단을 하지 않는 건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은가요?
그러니까 교회 안에 이렇게 정말 그냥 가정으로 입양하지 않을지라도 얼마든지 가족 관계처럼 주변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일들이 할 수 있잖아요.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가 양자 되었어요. 하나님의 아들을 버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양자 될 수 있었던 거죠. 우리가 양자 되는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는 또 누군가를 양자 삼는 사랑의 결단을 하는 것이 정상인 거죠.
사랑은 큰 사랑을 받았는데 나는 작은 사랑을 가지고 누군가에 베풀고 있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잘못된 신앙 잘못된 모습이 아닐까요?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 내가 아깝게 여기는 걸 포기해야 가능합니다. 나를 위해 돈 쓰는 것을 포기해야 사랑의 결단을 내릴 수 있고, 나를 위해서 시간을 쓰는 것을 포기해야 사랑의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쓰는 것을 포기해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사랑하는데 자기 것을 내려놓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데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결단이 없고 헌신이 없는 사랑만 가득 차 있어요. 심지어 사랑의 이야기로 넘쳐날 이 시점에 사랑의 이야기도 들리지 않습니다. 감각적인 사랑은 넘쳐나지만 결단과 헌신이 있는 사랑은 없는 거죠. 그래서 겉보기에는 사랑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사랑이 없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할 결심은 해요. 그러나 남을 사랑할 결심은 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를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어요. 여러분 2022년도에 사랑할 결심이라는 책자가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어요.
이런 거죠. 자기를 이거는 자기를 사랑할 결심이라는 의미인 거예요. 또 낯선 주제라서 사람들이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나름 많은 도전을 받은 것처럼 보여요. 그러니까 시대가 이런 거죠. 나랑 사랑할 자기를 사랑할 결심에는 많은 반응을 보이고 이웃을 사랑할 결심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거죠. 나를 사랑할 결심은 세상의 한 흐름을 만들어 가는데, 하나님 나라를 사랑할 결심은 세상의 물줄기를 못 만들고 있는 거죠. 그만큼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결단은 쉽게 하고 그렇지만 누군가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랑의 결심과 헌신은 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결심이 많아지면 타인을 사랑할 결심은 점점 줄어듭니다. 왜냐하면 포기하거나 내려놓거나 희생해야 사랑할 결심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족을 사랑하는 일도 내려놓음이 있어야 돼요. 성도를 사랑하는 일에도 내려오룸이 있어야 하고, 자기 교회를 사랑하는 일에도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할 결심을 사랑의 결단과 헌신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든 자기의 소유든 포기함이 없어는 사랑의 결단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의 결단이 없으면 사랑의 열매도 없어요. 그러니까 교회의 창고가 텅텅 비어져 가는 것은 사랑할 결심이 없긴 거죠. 여러분 교회는 규모는 컸는데 세상을 섬길 수 있는 속된 말로 총알은 별로 없어요.
왜 그럴까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교회 안에서도 풍족하지만 사회와 이웃을 누군가를 사랑할 결단과 헌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사랑의 열매가 교회 안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결단이 많아야 좋은 교회가 되고 좋은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단에는 은근히 미움이 들어 있어요. 근데 미움의 결단은 선한 영향력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결단에 미움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뭔가를 결단을 하는데 영향력은 안 되는 거죠.
근데 우리의 결단이 사랑이 들어 있으면 자기 헌신이 들어 있으면 선한 영향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해야 될 결단을 해야 하는가?
내가 어떤 것을 내려놓고 포기해야 사랑해야 될 사람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나는 교회를 위해서, 나는 이웃을 위해서 내 것을 내려놓고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이 준비된 사람이 사랑의 결단을 할 수 있고, 사랑의 결단이 푹 많은 공동체가 선한 영향력이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망하는 공동체는 망하는 결정을 했기 때문이에요. 안 되는 공동체는 안 되는 결정을 했기 때문이에요. 힘든 공동체는 힘든 결정을 했고, 어려운 공동체는 어려운 결정을 했기 때문인 거죠. 사랑의 결정만이 교회와 공동체와 성도와 가정과 민족과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사랑할 결심이 많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어떤 분이 그러셨어요? 지난주에 어떤 분이 우리 교회 예배를 잠깐 드리러 오셨다가 이제 목장 교회는 아멘이 너무 적다고 너무 적다고 이 말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객관적으로 적다는 의미도 있고 좀 교만하게 들릴 말이지만 아멘 할 만한 정도의 말씀인데 왜 성도가 아멘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 앞으로 아멘도 어떻게 보면 자기 내려놓음이에요. 우리 교회가 아멘도 많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사랑할 결심이 여러분 삶에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