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대성(戴聖) |
국가 |
중국 |
분야 |
철학 |
해설자 |
도민재(청주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전임강사) |
≪예기(禮記)≫는 유교 경전 중 오경(五經)의 하나다. 주(周)나라 말기에서 진한(秦漢)시대까지의 예(禮)에 관한 학설을 집록한 것으로, ≪주례(周禮)≫, ≪의례(儀禮)≫와 함께 ‘삼례(三禮)’라고 한다. 예경(禮經)이라 하지 않고 ≪예기≫라고 한 것은, 예에 대한 기록 또는 예에 관한 경전을 보완(補完)ㆍ주석(註釋)했다는 뜻이다. 이에 ≪의례≫가 예의 경문(經文)이며, ≪예기≫는 그 설명에 해당된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예기≫에서는 의례의 해설뿐 아니라, 음악ㆍ정치ㆍ학문 등 일상생활의 사소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예의 근본정신에 대해 다양하게 서술하고 있으므로, ≪예기≫를 단순히 ≪의례≫의 해설서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예기≫의 성립과 전승
≪예기≫의 성립에 대해서는 그 설이 일정하지 않지만, 현재 전하고 있는 ≪예기≫는 전한시대 대성(戴聖)에 의해 정리된 예에 대한 기록인 ≪소대례기(小戴禮記)≫다.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망실되었던 서적들이 한무제(漢武帝)가 유학을 관학(官學)으로 삼은 후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예(禮)에 대한 것으로는 노(魯)의 고당생(高堂生)이 <사례(士禮)> 17편을 전했고, 하간헌왕(河間獻王)이 고례에 관한 기록 131편을 모아 한무제에게 헌납했다. 이후 <명당음양기(明堂陰陽記)> 33편, <공자삼묘기(孔子三廟記)> 7편, <왕씨사씨기(王氏史氏記)> 21편, <악기(樂記)> 23편을 더 얻어 모두 214편이 되었다고 한다.
고당생은 소분(蕭奮)에게 학문을 전했고, 소분은 맹경(孟卿)에게, 맹경은 후창(后蒼)에게 전했으며, 후창은 대덕(戴德), 대성(戴聖), 경보(慶普) 등에게 예를 전수했다. 이들의 학문은, 선제(宣帝) 때에 학관(學官)이 설치되어 박사(博士)를 두게 되었다. 이 중 대덕은 대성의 작은아버지이므로 대대(大戴)라 일컫고, 대성은 소대(小戴)라 일컫게 되었다. 대덕과 대성은 흩어져 있는 예설을 수집ㆍ편찬했는데, 대덕이 편찬한 책은 ≪대대례기(大戴禮記)≫ 85편이고, 대성이 편찬한 책은 ≪소대례기≫ 49편이다. 이후 경보의 경씨례(慶氏禮)는 점차 쇠퇴해 망실되고, 대덕과 대성의 학문이 주로 남게 되었다.
한나라의 뛰어난 학자인 정현(鄭玄)은 ≪육예론(六藝論)≫에서 “지금 세상에서 행해지는 예는 대덕과 대성의 학(學)이다. 대덕은 기(記) 85편을 전했으니 바로 대대례(大戴禮)고, 대성은 예 49편을 전했으니 바로 예기다”라고 하여, ‘예기’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정현이 ≪주례≫ㆍ≪의례≫와 함께 ≪소대례기≫에 주석을 붙여 ‘삼례’라 칭하게 된 후, ≪소대례기≫가 ≪예기≫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대대례기≫는 흩어져서 일부가 없어지고,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40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대대례기≫ 85편에서 49편을 정리ㆍ편찬한 것이 ≪소대례기≫인지, 아니면 두 책이 각각 별개로 편찬되어 전승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학자들은 대개 별도로 편찬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또한 대성이 정리한 것은 46편이었으며, 한말(漢末)의 마융(馬融)이 <월령(月令)>, <명당위(明堂位)>, <악기(樂記)> 세 편을 더해 49편으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예기≫ 각 편의 작자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몇몇 편에 대해서는 작자가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육덕명(陸德明)은 ≪경전석문서록(經典釋文敍錄)≫에서 <중용(中庸)>은 자사(子思)가 지은 것이고, <치의(緇衣)>는 공손니자(公孫尼子)가 지은 것이라고 했다. 또한 정현은 <월령>이 여불위(呂不韋)가 지은 것이라고 했고, 노식(盧植)은 <왕제(王制)>가 한나라 때의 박사(博士)들이 지은 것이라고 했으며, 왕숙(王肅)은 <월령>이 주공(周公)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이외에 <예운(禮運)>은 자유(子游), <학기(學記)>와 <악기>는 모생(毛生), <대학(大學)>은 증자(曾子)가 지었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청대(淸代) 고증학자(考證學者)들이 많은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 점으로 보아,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예기≫는 고금을 통해 수많은 주석이 있어 왔는데, 그중에서 정현의 주석이 가장 먼저 권위를 인정받았다. 정현은 ≪예기≫를 주석하면서 신중하고 엄밀한 학문적 자세를 취해 원전을 존중했고, 잘못임이 분명한 대목일지라도 원문의 글자를 고치는 대신 주석으로 자세하게 지적해 두었다. 이러한 정현의 주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해 당(唐)나라의 공영달(孔穎達) 같은 학자는 “예는 바로 정학(鄭學)이다”라고 그를 높이 치켜세우기도 했다. 공영달은 당태종(唐太宗)의 명을 받아 ≪오경정의(五經正義)≫의 편수에 참여해 ≪예기정의(禮記正義)≫를 편찬하면서, 정현의 주를 바탕으로 웅안생(熊安生)ㆍ황간(皇侃)의 ≪예기의소(禮記義疏)≫를 참작해 독자적인 정리를 했다. 이후로 ≪예기≫는 정주공소(鄭注孔疏)라 해서 정현의 주와 공영달의 소가 존중되었다.
이 밖에 송(宋)나라 때 위식(衛湜)이 편찬한 ≪예기집설(禮記集說)≫, 원(元)나라 때 오징(吳澄)이 편찬한 ≪예기찬언(禮記纂言)≫과 진호(陳澔)가 편찬한 ≪운장예기집설(雲莊禮記集說)≫, 명(明)나라 때 호광(胡廣)이 편찬한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 등이 대표적인 주석서라 할 수 있다. ≪예기집설대전≫에서는 진호의 ≪예기집설≫을 표준으로 채택해, 이때부터 정현의 주석보다 진호의 주석이 널리 읽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명나라 호광 등이 찬집한 ≪예기집설대전≫이 널리 읽혔다.
≪예기≫가 우리나라에 언제 전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이나 ≪주서(周書)≫ 등에 “서적으로는 오경(五經)이 있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수용된 듯하며 통일신라 이후로는 관리 등용 시험에 필수 과목이 되는 수가 많았다.
우리나라 학자에 의한 주석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학자인 양촌 권근(陽村 權近)의 14년에 걸친 연구의 결실인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26권 11책)이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예학(禮學)의 흥성과 함께 뛰어난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가 간행되었다. 이외에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은 ≪예기≫에 국문으로 토를 단 책으로, 영조 43년(1767)에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했다. 이 책에는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이 서로 토론해 토를 달았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예기≫의 내용
≪예기≫는 여러 사람이 잡다하게 기록한 것을 모은 책이기 때문에 내용이 체계가 없고 번잡한 느낌이 없지 않으며 편차(編次)의 배열도 일정한 원칙이 없다.
정현은 전한(前漢)의 학자 유향(劉向)의 ≪별록(別錄)≫을 참고로 예기의 목록을 다음과 같이 내용에 따라 아홉 가지로 분류했다.
전한(前漢)의 학자 유향(劉向)의 ≪예기≫ 분류
전한(前漢)의 학자 유향(劉向)의 ≪예기≫ 분류
분류 |
편명 |
통론(通論) |
<단궁(檀弓)> 상ㆍ하, <예운(禮運)>, <옥조(玉藻)>, <대전(大傳)>, <학기(學記)>, <경해(經解)>, <애공문(哀公問)>, <중니연거(仲尼燕居)>, <공자한거(孔子閒居)>, <방기(坊記)>, <중용(中庸)>, <표기(表記)>, <치의(緇衣)>, <유행(儒行)>, <대학(大學)>. |
제도(制度) |
<곡례(曲禮)> 상ㆍ하, <왕제(王制)>, <예기(禮器)>, <소의(少儀)>, <심의(深衣)>. |
명당음양기 (明堂陰陽記) |
<월령(月令)>, <명당위(明堂位)>. |
상복(喪服) |
<증자문(曾子問)>, <상복소기(喪服小記)>, <잡기(雜記)> 상ㆍ하, <상대기(喪大記)>, <분상(奔喪)>, <문상(聞喪)>, <복문(服問)>, <간전(間傳)>, <삼년문(三年問)>, <상복사제(喪服四制)>. |
세자법(世子法) |
<문왕세자(文王世子)>. |
자법(子法) |
<내칙(內則)>. |
제사(祭祀) |
<교특생(郊特牲)>, <제법(祭法)>, <제의(祭義)>, <제통(祭統)>. |
길례(吉禮) |
<투호(投壺)>, <관의(冠義)>, <혼의(婚義)>, <향음주의(鄕飮酒義)>, <사의(射義)>, <연의(燕義)>, <빙의(聘義)>. |
악기(樂記) |
<악기(樂記)>. |
또한, 원나라 때의 오징은 ≪예기찬언≫에서 <대학>과 <중용>을 제외한 47편을 다음과 같이 여섯 개 부분으로 분류했다.
원나라 오징의 ≪예기≫ 분류
원나라 오징의 ≪예기≫ 분류
분류 |
편명 |
정경(正經) |
<투호>, <분상>. |
정석의례(正釋儀禮) |
<관의>, <혼의>, <향음주의>, <사의>, <연의>,
<빙의>.
|
통례(通禮) |
<곡례> 상ㆍ하, <내칙>, <옥조>, <소의>, <심의>, <월령>, <왕제>, <문왕세자>, <명당위>. |
상례(喪禮) |
<상대기>, <잡기> 상ㆍ하, <상복소기>, <복문>, <단궁> 상ㆍ하, <증자문>, <대전>, <간전>, <문상>, <삼년문>, <상복사제>. |
제례(祭禮) |
<제법>, <교특생>, <제의>, <제통>. |
통론(通論) |
<예운>, <예기>, <경해>, <애공문>, <중니연거>, <공자한거>, <방기>, <표기>, <치의>, <유행>, <학기>, <악기>. |
이상과 같은 ≪예기≫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는 의례에 대한 해설 부분이고, 둘째는 예 일반에 대한 철학적 이론 또는 잡다한 기록이다.
≪예기≫의 내용은 주로 중국 고대사회의 생활 의식에 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예의 영역은 국가의 통치 제도에서부터 사회적인 도리(道理)의 규정, 개인의 수신(修身)에 이르기까지를 망라하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통치의 수단이며 교화의 방법이었던 ‘예’를 기술한 ≪예기≫는 유교적 예치주의(禮治主義)를 선양하기 위한 교재로 중시되었으며, 그 영향은 ‘삼례’ 중에서 가장 컸다고 하겠다. 또한 ≪예기≫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와 진한(秦漢) 시기의 유교사상이나 사회사상을 연구하고 유교적 예치주의를 이해하는 데에도 기본이 되는 책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우리의 생활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이다.
참고 도서: ≪유교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국고전백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