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23일 사순절 셋째 주일예배
성경: 엡1:1-14절(신310)
제목: 은혜의 복음
성도 여러분,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입니다. 여기서 우리 역할은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복음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바울의 옥중서신의 하나인 에베소서는 신학적 내용(1-3장)과 윤리적 권면(4-6장)으로 구별되며, 1장은 인사말(1-2)과 찬양(3-14)과 기도(15-23)로 되어 있습니다.
1. 에베소서에서 바울의 인사말입니다(1-2).
먼저, 바울은 당시 서신의 형식에 따라 자신과 수신자들을 소개합니다(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이유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 즉 그의 은혜(긍휼하심)에 있다고 설명합니다(고후4:1, 롬1:5).
에베소서의 수신자들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입니다. 중요한 사본들에 ‘에베소’라는 어구가 없는 것은 에베소서가 소아시아에 있는 여러 이방인 교회들에게 보내진 회람 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신실한) 자들’인 ‘성도들’은 에베소(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분리(구별)되어 그리스도(하나님)에게 속한(헌신 된) 자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진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나그네(벧전1:1), 우리의 본향(시민권)은 하늘임(빌3:20)을 항상 아시기 바랍니다.
이제 바울은 인사말을 통해 에베소서의 내용을 ‘은혜와 평강’으로 소개합니다(2).
(‘은혜와 평강’은 서신의 끝인사(6:22-23)에서 마무리로 다시 제시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인 ‘은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그의 복음의 이유(원인)이며(2:1-10), ‘평강’은 복음(6:15)의 열매(목적)로서 죄로 인하여 파괴된 창조 질서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 것을 가리킵니다(9-14). 그래서 ‘은혜와 평강’이 각각 헬라 인사와 히브리 인사(샬롬)라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2:11-22).
2. 하나님에 대한 찬양입니다(3-14).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하는 3-14절은 신약에서 가장 길고 복잡한 하나의 문장으로 구별하기가 어렵기에 구별하는 많은 의견이 있지만, 우리는 ‘구원의 복음’(13)인 3-14절을 세 부분, 즉 찬송의 주제(3)와 그 주제(이유)를 설명하는 4-14절에서 ‘은혜’를 강조하는 4-8절과 ‘평강’을 강조하는 9-14절로 구별하여 읽을 것입니다.
첫째, 찬송의 주제입니다(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복) 주시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복 주신’(관계대명사 형용사절)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감탄의 선포, 또는 명령적인 선포로 에베소서의 메시지(내용)를 시작합니다.
바울은 ‘축복(찬양)하다(율로게오)’와 관련된 세 단어, 즉 ‘찬송하리로다(율로게토스)’, ‘복(율로기아)’, 그리고 ‘복 주시되(율로게사스)’를 사용하여 그의 찬송의 이유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부정과거 분사)는 사실임을 분명히 합니다.
또한, 바울은 세 개의 ‘엔(안에)’의 전치사 구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복을 설명합니다.
첫째는 ‘모든 신령한 복 안에서(으로)’입니다. ‘신령한 복’은 영적인 복인 구원을 가리킵니다(하나님은 물질적 복도 주십니다). 여기서 ‘신령한(프뉴마티케)’는 ‘성령’과 같은 어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령한 복’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의 약속의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구원의 복’입니다.
둘째는 ‘하늘 가운데’입니다. ‘하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승천하여 올라가신 장소로서의 영역입니다(20-21). 이것은 하나님이 구약의 종말 약속을 그의 부활을 통하여 성취하셨다, 즉 ‘오는 세대(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의 하늘이 우리에게 실제가 된 것입니다(2:6).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셋째는 ‘그리스도 안에서(때문에)’입니다. 이것은 첫째로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의미하며(2:5-6), 둘째로 구원의 복이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이유는 우리 자신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송의 ‘하나님’을 ‘우리 (구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소개하여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죄인인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오직 그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으며, 세상의 복과 질적으로 다른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주셨기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이라 외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할까요?
둘째,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둔 찬송 주제(3)의 이유입니다(4-8).
둘째 부분(4-14)을 시작하는 ‘곧’(4)으로 번역된 ‘카소스’는 비교급(~와 같이)과 인과관계(~때문에)의 종속 접속사인데, 여기서는 후자로서 14절까지 계속됩니다.
첫째로 창세 전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의 선택의 목적인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는 ‘모든 신령한 복’(3)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그의 주권적 선택에 있습니다. 특히 그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 이유가 결코 우리에게 있을 수 없고 전적으로 그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서 ‘예정하사’는 부정과거 분사로서 ‘택하사’(4)를 설명하기에 그의 예정은 창세 전의 그의 선택보다 앞선 것이며, 그 예정의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그의 양자가 되는 것’(5)도 ‘ 모든 신령한 복’(3)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신 이유도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의 기쁘신 뜻대로’, 즉 그가 그것을 오직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예정과 선택의 궁극적 목적은 그의 영광의 은혜를 알고 찬송입니다(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서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는 ‘그의 은혜’를 설명하는 것(관계대명사 형용사절)입니다.
‘거저 주시는(에카리토센)’은 부정과거로서 ‘그가 은혜를 주셨다’는 의미이며, ‘바’는 앞에 있는 ‘그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즉 ‘그가 그의 은혜를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입니다. 이처럼 ‘은혜’라는 명사 다음에 ‘은혜를 주다’는 동족 동사가 나온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그의 풍성한 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의 은혜의 영광’에서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3), 즉 ‘그의 선택과 예정’(4-5)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의 은혜의 영광’은 이러한 그의 영광이 곧 ‘그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구원의 영광은 그의 은혜와 동일시 됩니다. 곧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의 은혜가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6)입니다. ‘그가 사랑하시는 자(그의 사랑받은 자)’는 당시 예수님의 칭호입니다(마3:17, 눅20:13). 여기서 왜 ‘그리스도’ 대신에 ‘그의 사랑받은 자’일까요? 이 칭호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고난(죽음)을 통한 그의 구속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마3:17).
넷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량 곧 죄 사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7-8).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여기서 ‘받았느니라’(7)로 번역된 ‘에코멘’은 현재형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다’입니다.
이것(7-8)은 어떻게 우리가 구원받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피를 통한 속량’(7)입니다. ‘속량’은 원래 몸값을 주고 노예를 해방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죄의 노예인 우리의 몸값(대속물)으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피(생명)’(7)을 십자가에서 주시고 죄와 사망과 마귀의 결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것입니다. 한편, ‘속량’은 죄 사함(칭의)입니다. 이는 죄 사함을 받은 결과로 죄의 속박에서 언약적으로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의 피를 통하여 우리를 속량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7)입니다. 여기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8)가 설명(관계대명사 형용사절)하는데, 원문은 “그것(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 가운데서(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셨다(부정과거)”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그의 은혜의 풍성함에 따라 그의 피를 통하여 속량하시는 우리에게 그의 은혜를 넘치게 하셨다’라고 그의 은혜를 반복하여 ‘그의 속량(복음)’의 이유가 오직 ‘그의 풍성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방법)’(8)입니다. 칼빈은 ‘모든 지혜와 총명’을 복음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복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고전1:24).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는 하나님이 그의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하신 방법이기에 복음 전파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통하여 그 은혜를 알게 하신 것도 의미합니다(9, 2:7). 1:17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은혜의)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성도 여러분,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 즉 그의 복음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직 ‘그의 은혜’입니다. 롬11:32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이처럼 ‘역사(history)’는 ‘그의(His)+이야기(story)’, 즉 그의 드라마인데, 그의 드라마의 목적은 자격 없는 모든 사람(죄인)에게 그의 은혜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의 드라마 속에서 은혜의 복음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시며 은혜의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