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는 아모레 퍼시픽 창업자인 서성환 이야기입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아모레의 뜻이 무엇이며 어디서 유래했는지,
1960년 프랑스 파리는 밤새도록 불야성을 이룬 게 지금 우리나라와 비슷했으며....
1962년 경 영등포 신대방동의 모습 등등을 볼 수 있습니다.

아모레 퍼시픽.
어려서 시골에 화장품 팔러 다니던 집집마다 다니던 아주머니 이미지가 남아 있는데,
하마 세계적인 기업이 되어버렸죠...~~~
그는 1924년 황해도 평산 출신인데요.
1924년은 그 유명한 갑자생으로 강제징병1세대에 해당한다는 걸 기억해두면 좋을 듯 합니다.
1924년생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는 커녕 근로봉사에 하루종일 시달리다가,
졸업할 무렵 징병되었으니, 지지리도 복이 없던 세대입니다.
1910년대 생들이 누렸던 1930년대 고등학교의 제대로 된 추억이 없는거죠..
젊고 야심만만한 젊은이의 모습이 담겨 잇는 표지의 사진을 확대해 보겠습니다.

이곳이 어디일까요?
궁궐 아니면 사찰일텐데요.
제 짐작에는 사찰이기 쉽겠습니다.
일제 때 서울의 궁궐도 제대로 관리가 안되어 잡풀이 우거진 사진들도 많이 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있군요.
저 시절 카메라를 소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전후 가장 이른 시기의 야유회 모습이 아닐까 싶은데요...
후암동 시절의 직원 야유회 모습입니다.
후암동 시절이라고 하면 1954년 부터 56년을 말하는데요,,,
맥주와 소주를 두고 사탕이나 카라멜같이 보이는 게 널려 있고요.
비잉 둘러 앉은 여공들의 모습은 조선과 다름없습니다.
검은치마에 흰 저고리, 머리는 두갈래로 땋았군요.
이런 모습이 1960년대가 되면 이제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전형적인 여공의 모습으로 됩니다.
책에서 몇몇 구절입니다.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개성의 관문이자 연장으로 개성까지는 12km에 불과했다.
이 길에는 줄지어 늘어선 가게의 처마 덕분에 궂은 날에도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성내로 갈 수 있다는 말이 전할만큼.....
가게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을 개성 사람들은 '가게쟁이'라고 불렀고,
이 말이 '깍쟁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엇다는 말도 남아 있다.
한창 때의 고려 수도 개성의 인구가 70만,
반면 19세기 조선의 수도 한양의 인구가 대략 20만명 이었다고 하니
번성기 개성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겠다. p32
그 즈음 개성에는 일본 상인들을 본받아 간판을 내거는 점포가 하나둘 늘어나고 잇었다.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전만 해도 상호나 상품명을 붙이지 않는 것이 개성 상인들의 전통이었다.
개성의 시전들은 취급하는 물품의 종류에 따라 분전粉廛, 지전 紙廛 따이로 불렸을 뿐
점포 고유의 상호가 없었음은 물론 업종을 나타내는 간판을 내거는 일도 하지 않았다.
개성에서 서울까지 180리, 각광받는 교통수단은 기차가 단연 최고였다.
새벽 5시 40분 개성역을 출발하는 첫 열차를 타면 1시간 30분 만에 서울에 닿을 수 있었다.
개성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아 흔히 이 열차를 통학열차라고 했다. p58
'
일제 강점기 때는 이완용 내각의 내무대신이었던 송병준이 남대문에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미곡상, 어물상, 과물상. 좝하상 등 150여 점포가 들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1922년 일본인 소유의 중앙물산 주식회사로 그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1936년 3월에는 남대문 시장이라는 명칭조차 말소되고, 중앙물산시장으로 이름이 바뀌고 말았다.
그 시절에는 한국인 점포를 염천교 쪽으로 쫓아버려 시장안에 한국인 점포는 거의 없었다.
해방뒤 남대문 상인 연합회가 구성되었어나 시장의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한국전쟁 뒤라고 할 수 있다.
폐허로 변한 남대문 시장에 월남한 피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ㄱ
들을 중심으로 군수품과 미제 물건 등이 음성적으로 거래되면서 시장은 아연 활기를 띠었다.
1954년 2월 남대문 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시청으로부터 시장 개설권을 허가받아... p126-7'
'
1960년 그는 일본과 홍콩을 거쳐 유럽여행을 하게 됩니다. 그때의 일화입니다.
1960년 7월,
파리 비행장에 내려 나올 때 우리는 그곳 세관원의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나에게 부정품을 소지하고 잇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말하는 부정품이란 외국 연초 및 마약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서슴치 않고 노!했더니 무사 통과였다.
이른 태도만 보더라도 그들은 과연 신사적이었다.
'
전쟁과 가난, 안보를 신주단지처럼 떠받들고 사는 나라에서 온 그에게
통행금지가 없는 파리의 밤은 신선했다.
안내자의 말에 따르면 밤 1시경부터 시작된 술자리가 새벽 서너 시까지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라고 했다. 저녁 7시만 되면 거리가 침묵으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서울과는 몹시 대조되는 모습을 보면서.... p207'
'

영등포 신대방동 1962년 저랬군요.
주변에 인가도 거의 없는 넓은 벌판...논에서는 온천수도 샘솟고~~~

실제 모습입니다....~~

아모래의 뜻은 이랬습니다.




첫댓글 녹차보급에 앞장선 분이고 산이랑 머 관계있는건 없네요
^^ 현재의 영등포를 아시는 분들은 누구나 50년전 그때의 모습을 보고 여러 상념에 빠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50년대 야유회 사진은 아주 귀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 동동구루무.... 어려서 맡았던 그 냄새가 아직도 코 끝에....(먼일이지 모르지만 최근에야 구루무 바른다는...ㅎㅎ)
글쎄요... 서성환의 학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
일제말 개성에서 자전거 타고 180리 남대문시장에 다녔다는 것을 봐서는 ..
강제 징병은 같은 또래 학교다니던 분들이 43년 10월 즈음부터... 황군엔 아무나 못갔다지요....
징병아니고 징용이면 몰라도...
서성환은 1940년 대성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의 사업을 돕습니다.
개성에서 기차길이 아니라 도로가 180리 그러니까 70km쯤 되겠는데요.
남대문 시장에까지 화장품 사업때문에 도시락 세개 싸서 새벽길로 다녔다고 합니다...~
''''''''''
구루무가 세수하고 나서 바르는 스킨, 밀크 로션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모자이크-등산박물관 구루무... 스킨/밀크 로션이 바로 구루무 크림이지요...ㅎㅎ
@여름날 참내...최근까지는 그렇다면 얼굴에 아무거도 안발랐다는 말삼? ~~~
@모자이크-등산박물관 대성농업고등학교라... 검색 불가... ㅠㅠ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런 열성적인 기업가가 있었기에, 나라가 이만큼 발전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열성^^적인 문화사업가 있었기에 화장품박물관이 생겨났고요...~
검색을 해보니,
'1979년에는 국내 최초의 화장품 박물관인 태평양박물관(지금의 디아모레뮤지움)을 설립하였다. 또 녹차를 즐기는 인구가 거의 없던 1970년대 중반에 차 사업을 시작하여, 3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투자해 끽다를 생활 속에 뿌리내리게 했는데, 그 결실이 2001년에 제주도에 개관한 설록차박물관이다.'
진덕 아우! 내 죽은 다음도 냉정히 평가해주소! ㅋㅋㅋ
이미 문단 뿐 아니라 산악계와 고서계에서 정평이 나 있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말씀이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