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변방의 기러기 석양의 구름 속으로
花石亭 화석정--栗谷 李珥 율곡 이이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 산토고륜월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 새홍하처거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지니
시객의 생각은 끝이 없어라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더욱 붉도다
산은 외로운 보름달을 토해놓고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날아가는가?
울고 가는 소리 석양의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10회 부산 낙동서화대전 대상-(은산)김경연
[청와 론]
1. 시를 훑어 보고
율곡이 8세 때 지은 오언율시입니다. 그래서 팔세부시(八歲賦詩)라고 일컬어집니다. 짝수 구절에 '궁-홍-풍-중'으로 운자를 맞춘 것도 뛰어납니다.
자신을 소객(騷客), 시인 묵객의 문사로 인식하고 있는 당찬 모습도 보입니다. 뉘가 알 리 없는, 산이 품고 있는 외롭고 큰 뜻(山吐孤輪月)과 만년을 구비 흐르는 세상의 흐름(江含萬里風)을 '내뱉고 머금는다'라고 대비한 표현도 탁월합니다.
'변방에서 날아오는 기러기'는 아직 세상 밖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현재와 어찌 펼쳐질지 모르는 미래를 동시에 나타냈다고 보고 싶습니다.
율곡은 예견이라 해야할지 예언이라 해야할지 모를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왜란을 대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이야기나, 선조가 피난할 것을 어찌 미리 내다보고 '화석정'을 중수해서 들기름 칠을 부지런히 해두었다가 화석정에 불을 질러 선조의 도강을 도왔다는 이야기 등이 그렇습니다.
율곡이 만년(1583년, 죽기 한 해 전)에, 당쟁을 중재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역풍을 맞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벼슬을 버린 채 홀로 떠나면서 지은 시의 첫구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四遠雲俱黑 사원운구흑
사방은 온통 먹구름인데
당쟁의 풍파로 나라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래서 <화석정>의 결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기러기 울음소리 석양의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8세에 지은 시에, 석양의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기러기 울움소리를 이야기하고, 죽기 1년 전 47세에 지은 시에, 한양을 떠나면서 세상이 온통 먹구름이라 애달파하는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 구름이 그 구름이었으리라 갖다 붙인 격인지 몰라도 이야기꺼리라는 겁니다.
율곡에게서 천재성뿐만 아니라, 신끼마저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