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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3장
1. 아내들에게(1-6)
성경은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선하게 보이고 착하게 산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아니하다면, 그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멸망의 존재로 판단되어질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가되는 인간은, 피조물이며 말씀을 벗어난 죄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왜 그렇게만 봐야 하는가?’라는 불만을 보이기도 하지만, 피조물로 죄인으로 보지 않으면, 어떻게 봐야 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잘한 것이 있어야, 좋게 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하나님 앞에 잘 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까지 죽인 인간이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생각한다면, 인간이 꿈꾸는 소망이라는 것, 목적, 목표라는 것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본문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1-7절은 아내와 남편에 대한 내용입니다. 곧 부부에 대한 얘기인데, 사람이 결혼을 하는 이유나 목적은, 자기 행복을 위해서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결혼한다기보다는, 자기 행복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해서도 행복하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렇게 본문을 시작합니다. 1절상 ‘아내들아, 이와 같이 남편에게 순종하라.’ 곧 아내들이 꿈꾸는 행복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내들이 꿈꾸는 행복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곧 남편의 사랑만을 구할 뿐,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또한 현실적으로도 이러한 말은 맞지 않다고 여길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남편에 대한 순종은, 단순히 남편의 말을 들으라는 정도가 아니라, 6절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남편을 주인으로 여기는 정도의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이런 아내의 역할을, 순순히 기쁨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은, 현대인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여자에게만 불리하고 공평하지 못한 내용으로 여겨지기 십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이미 공평하지 못한 말씀을, 2장에서 대한 바가 있습니다. 사도는 성도에게 세상의 모든 제도에 순종하라고 하지만, 세상의 모든 제도가 나에게 유리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리하고 공평하지 못한 제도에도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공평하지 못한 말씀입니까?
또한 나를 박해하는 왕과 총독이라고 해도 순종해야 하고, 종이 악한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과 상식과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 모든 것을, 주를 위해서 하라고 말합니다. 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복과 기쁨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말씀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습니까?
1절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이와 같이라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종이 악한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하는 것처럼, 아내도 남편에게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이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고, 속 안 썩이고, 돈 잘 벌어 오는 남편에게만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못 마땅한 남편에게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라고 해도,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보면 아내가 교회 다니는 것을 남편이 방해할 때, 남편을 두고 마귀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만 다녀봐, 내가 업어 준다’는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조건을 갖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한 남편이라고 해도, 순종하라고 합니다.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잘해주면, 남편이 감동을 받아서 예수를 믿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내의 행위가 남편의 구원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아내의 행위를 도구로 삼아, 남편을 부르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은, 주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살아계신 주로 믿으면서, 주를 위해 살고자 힘쓰고, 살아계신 주님을 두려움으로 대하며 살아갈 때, 그 모든 것이 정결한 행위가 되어,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모든 자에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천국을 믿는다면, 보이지 않는 천국을 보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세상을 심판의 현장으로 보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3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금은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은, 여자에게 있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남편에게, 자신에게는 변변한 옷도 보석도 없다고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는다면, 그것이 과연 예수님을 보여주고, 천국을 보여주는 모습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마음에 숨은 사람이란 속사람을 뜻합니다. 곧 날마다 늙어가는 겉사람을, 보석과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값진 것으로 치장을 해도, 진심으로 아름다운 모습은, 속 심령이 온유하고 안정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의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에,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주어진 모든 삶에서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사람의 온유와 안정입니다. 이러한 행실이 남편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됩니다.
사도는 사라의 예를 들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부녀들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신을 단장하였다고 말합니다. 곧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내된 자들의 아름다움인데, 그 이유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주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 사는 것이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사도는 아내들을 내세워, 믿음으로 사는 성도에 대해 얘기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둔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온유한 심령으로 살게 하고, 어떤 일에도 두려움이 없이, 안정된 심령으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런 행실을 통하여 믿음을 증거하면서,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는 도구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굳이 아내의 위치에 있는, 여자에게 하는 말은 아닙니다. 성도는 자신이 존재하는 위치에서, 말씀으로 살아감으로써 주를 증거해야 하는 존재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기 위한 도구임을 믿는다면, 어떤 삶에서도 온유할 수 있고, 안정된 심령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란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면서,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을, 가장 귀히 여기며 살아감을 증거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귀한 성도됨입니다.
2. 남편들에게(7)
성도가 주님을 위해 산다면, 그것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곧 자신의 본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보답을 받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주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그 값으로 내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께 소유된 자로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자신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확실한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주님께 속한 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도,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이고, 주님을 바라보고 섬기는 종으로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럼 여자만 손해 보는 것 아닌가 라는 반발을 한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7절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이 내용 역시 육에 대해서는 나그네 정신으로 살아가면서, 주님의 영원한 말씀에 속한 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살기를 원하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남편을 세워서 말하는 것입니다.
곧 아내에게 말하는 것이나 남편에게 말하는 것은, 실제 아내의 위치에 있고 남편의 위치에 있는,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아내나 남편을 세워서 주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로 사는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먼저 남편에게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고 합니다. 아내와 동거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이구동성으로 ‘사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고 합니다. 지식이 무엇이기에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고 할까요?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그 당시 남자들의 지식이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 받아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남편에게 사도가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고 하는 것은, 지금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동거라는 말에는 남자에게 종속되고, 여자를 다스리는 관계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돕는 존재로 함께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해서,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되었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남편도 아내도 동등한 위치에 있지만, 남편에게 순종함으로써, 주님께 속한 자로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돕는 위치에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의 위치에서, 함께 살게 하시는 것은, 서로를 섬기는 자의 위치에 있게 하셔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남편이 가져야 할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따라 동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나그네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나그네 인생을 사는 것은 동일합니다. 결국 나그네와 나그네가 함께 만나서, 동거하는 것이 부부가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나그네와 나그네가 만나 동거하는 것이라면, 나그네가 아닌 사람들의 동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결국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환경, 어떤 처지, 어떤 관계에서도 주님께 속한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약점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고, 설사 생각한다고 해도 나그네라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현재의 내 형편과 처지가 나아지면,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옛 습성이, 성도의 본분을 떠나게 하는 것이고, 주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 여전히 세상에 속한 자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바른 지식을 따라 동거하는 남편이라면, 역시 그 지식을 따라 지체들을 만날 것입니다.
지식이 없이 동거하면, 서로 돕는 위치에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기쁨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성도가 바른 지식을 따라 교회로 모이지 아니하면, 서로 돕는 위치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만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왜 동등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자신의 것을 내어 놓으며, 자신을 세우고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서로 동거하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이든, 중요한 것은 바른 지식입니다.
그러면 사도가 말하는 지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는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알아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여자를 연약한 그릇으로 말합니다.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남편이 지켜주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연약하기 때문에 내가 도와야 하고, 지켜줘야 할 존재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곧 연약한 여자는 강자가 다스릴 존재가 아니라, 도와주고 지켜줘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고방식과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 약자는 지배를 받아야할 대상에 불과합니다. 강자가 약자를 돕는 세상이 아닙니다. 이러한 세상과 다른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다스리고 다스림 받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서로를 연약한 자로 바라보고,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남편을 세워서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지식은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아는 것입니다.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는다는 것은, 차별이 없음을 뜻합니다. 함께 구원 받는 사람이고,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은혜에서도 차별이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산다고 해서, 남편보다 못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아내는 연약한 자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자리에서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는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고전 3:8절에서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말씀한 것처럼, 상을 누가 일을 많이 했는가를 따져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을 제대로 하였는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자는 연약한 자의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서로 상대방이 맡은 역할에 대해, 시기하지 않게 됩니다. 곧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습니까?’라는 불만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른 지식을 따라 기도를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거부하심을 뜻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중요한 것은, 바른 지식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말씀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항상 말씀이 선포하는 바른 지식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3.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8-12)
8-9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내용을 보면 마치 복을 받는 조건이, 이 구절의 내용을 실천하는 것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우리 중 누구도 복을 받을 사람은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은 제외하고서라도,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비는 것은, 우리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우리를 어떤 삶으로 이끌어 가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사도가 말하는 내용들은, 도무지 우리 소관이 아니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만약 사도가 ‘너희가 모두 마음을 같이 하여, 헌금을 잘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목사를 잘 섬기고, 성경을 한 번씩 필사하고’ 이런 내용으로 말했다면, 우린 분명 ‘예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실천하겠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사도의 말을 자신의 소관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사도의 말에 대해, 모든 자신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빌어줄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말을 우리의 소관으로 받아 들인다면, 그 누구도 복을 이어받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는 왜 이런 말을 할까요? 먼저 8-9절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동정은 ‘처지를 이해하여 가엾게 여김’이라는 뜻입니다. 곧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자신의 처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어둠에 있는 우리의 처지를, 예수님이 자신의 처지로 받아들이시고, 우리가 가야 할 사망의 길을, 홀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로 인해서, 빛으로 나아가는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낮은 자의 자리에 머무시고, 자신의 몸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자신의 피로 모든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주님을 욕되게 하는 우리의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신 것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의 모습이, 이웃을 통해서 증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8-9절의 내용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예수님의 소관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와 괜히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이나 하게하고, 기도하면 병이나 낫게 해주기 위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힘으로는 선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루실 것임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은혜의 모습이 증거되어진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의 실천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고 말하는 것도, 사도가 말한 내용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일하고 계심을 증거 할 도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실천함으로써 복음을 이어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것 자체가 이미 복을 이어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도로 하여금, 다른 세계를 살게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는 세계가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증거하는 세계를 살아갈 자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10-11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성도는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까? 성도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악한 말을 그칠 수가 있는 것이고, 거짓을 말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며, 화평을 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랑이,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그 소망이, 성도를 그러한 세계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한 말을 그치기를 힘쓰기 이전에, 거짓을 말하지 않으려고 힘쓰기 이전에, 진심으로 자신이 생명을 사랑하는 자인지,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12절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이 말처럼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살피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지만, 주의 얼굴은 악인을 대하신다고 합니다. 주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는 것은, 의인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면서, 의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에 주의 얼굴이 악인을 대하시는 것은, 악인이 주의 얼굴을 대한다는 뜻인데, 이것은 심판을 뜻합니다.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인도 받고 있기에, 악인과는 다른 세계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만나는 것은, 다른 세계에 속한 자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가진 자로, 동일한 은혜를 입은 자로 만나는 것이기에, 모두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같은 마음에서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로, 하나 된 관계로 살아갈 뿐이지, 서로를 비교하고 경쟁하며 비판하는 것으로 나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의 말을 통해서, 나그네 정신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성도가 함께 모였을 때,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 열매가 맺어지게 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원수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어떤 마음으로 대하게 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당시 흩어졌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사실을 기억하고, 어떤 형편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세계에 속한 성도의 모습으로 증거되기를 원하는 것이, 사도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이 내용대로 실천을 잘해서, 복을 이어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 말하지만 그런 식으로 복을 받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는 성도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며, 따라서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의 습성을, 그대로 따라서는 안될 존재가 성도임을 증거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의 권고를 대하면서, ‘나는 예수 믿는다’는 말을, 섣불리 할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믿음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나에게 내 믿음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믿게 되는 것은, 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주의 은혜가, 나를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께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은 모습이 보인다면, 그것이야 말로 성령이 활동하시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성령이 일하시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저하게 주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주님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로 성도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세상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결국 나오는 것은 세상의 습성뿐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고, 욕을 욕으로 대함으로써, 분풀이를 하는 습성만 보일 뿐이고, 동정이나 불쌍히 여김이나 사랑 또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았습니까? 사랑을 배웠습니까? 긍휼과 자비를 압니까?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은 여러분을 세워서, 하늘의 것을 증거하기 위함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좋으라고 하늘의 풍성한 복을 입히신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역사하시기 위해 은혜를 주신 것이고, 사랑으로 역사하시기 위해 사랑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은혜가 있으면 은혜가 증거될 것이고, 사랑이 있으면 사랑이 증거되기 마련입니다. 은혜와 사랑이 능력으로, 쉬지 않고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나같은 자를 용서하시고, 구원 하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4. 성도와 세상(13-17)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내어 놓으며 살아갈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본래의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증거할 자가 성도라는 것입니다.
내게로부터 나오는 것은 악한 것들일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 받은 하늘의 것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것을 증거하며 사는 것이, 곧 하나님께는 선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있음으로 은혜가 증거 되고, 사랑이 있음으로 사랑이 증거 되는 삶을 사는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을까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는 것은, 세상이 볼 때도 말할 수 없는 선입니다. 이러한 선을 행하는 자를, 세상이 높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13절을 보면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는 말을 합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윤리 도덕으로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나타나는 행동을 뜻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는 것도, 진리에 순종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성도가 진리에 순종하고 있을 때, 선한 열매가 맺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성도는 누가 비방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곧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을만한 행동은, 진리로부터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많은 비방을 받고 있는 것은, 세상이 기독교를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기독교가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결과인 것입니다.
가령 진리는 교회를 향해서, 번성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번성하는 것을, 진리가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번성을 곧 진리의 뜻으로 여겨버릴 때, 교회의 번성과 연관되어 등장하는 모든 것들 역시, 진리를 등에 없고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번성을 둘러싼 수많은 폐단들이, 진리의 뜻이라는 명목아래 자행되는 것이고, 세상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진리를 말하는 기독교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비방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진리는 세상의 모든 제도에 순종하라고 하고, 악한 주인에게도 순종하라고 하면서, 자신을 포기한 자로 살라고 합니다. 그러면 비방을 받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도가 진리에만 순종하면, 비방을 받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높임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비방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까? 또한 사도들은 왜 고난을 받았습니까? 이것을 보면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해는 받지 않으나, 고난은 피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의의 길을 갈 때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가는 의의 길은, 세상이 가는 길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오직 자신을 위해 살지만, 성도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갑니다.
이처럼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의 길에 있는 성도는, 그 행실로는 비방을 받지 않으나,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는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착하게 살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세상을 알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세상이 거부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세상 전부의 악함으로 보지 않고, 단지 유대인들의 어리석은 행동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착한 행실을 통해, 진리가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증거되는 현장에는, 인간의 모든 자존감이 파괴되는 현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무너짐을 철저히 맛보게 되고, 비로소 예수님이 피흘리고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착한 행실로 가능하겠습니까?
진리가 증거 되는 현장, 의의 길에서는 죄에 대한 폭로가 있기 마련입니다. 진리는 이처럼 인간이 꽁꽁 붙들고 있는, 모든 의와 착함을 무너뜨리면서, 의에 대해 무능한 자로 만들어 버리고, 인간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윤리와 도덕으로 인간의 가치와 수준을 평가하는 세상이, 이러한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오히려 자신들의 의를 무너뜨리고, 오직 죄악 밖에 없음을 주장하는 진리에 대해, 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반발할 뿐입니다.
이 반발심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진리에 순종하고, 의의 길을 간다는 것이야 말로, 세상과 부딪히지 않을 수 없는 고난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타협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결과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자고 외치고 있는 수준은, 불교와 다를 바 없고, 유교, 천주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 모두 도덕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는 제아무리 수준 높은 도덕적인 삶이라고 해도, 모두 심판을 받아야 할 악으로 규정합니다. 세상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는 성도가 고난을 받을 때,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까 염려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리스도가 책임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는 것은, 세상이 물을 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 놓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성도의 삶은,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시기 때문에, 고난을 부딪칠 때 두려워하기보다는, 나를 책임지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생각하게 하시고, 주님으로 인해 담대함을 얻게 하시고, 주님만을 증거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기 때문에, 성도는 성령에 의해서 필히 이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모든 일에서 갖게 되는 갈등은, ‘내가 선을 행하는가, 악을 행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이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느냐, 아니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말을 감추어 버리느냐의 싸움인 것입니다.
따라서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모든 일에서 두려움이 없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온유이며, 자신이 세상과 타협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포기할 것을 염려하는 것이, 두려움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온유와 두려움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6절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는 어떤 일에서도 선한 양심, 곧 선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오셨을 때, 비록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고 고난을 받았으나, 선을 추구하며 산 것이야 말로 옳은 것이었음이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성도의 선행을 욕했던 세상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는 마지막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생명인가를 바라보고, 어떤 비방과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진리만 따라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처럼 진리의 길만 따르기를 소원하는 성도에게 고난은 없을 수가 없습니다. 17절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하는 것처럼, 성도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책임지신 주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어떤 일에서도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5. 고난의 유익(18-19)
고난은 인간의 본성상 회피하고 싶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고난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이기에, 누구도 그것을 바꿀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함께 하고자 하는 성도는, 복음과 함께 고난 받기를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을, 굳이 고난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까? 왜 백성이 고난당하는 것을, 뜻으로 세우시고 일하시는 것입니까?
시편 119:71절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으로 말미암아 주의 율례들을 배우는 유익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시대를 초월하여, 자기 백성을 유익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고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즐거운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고통스럽고 힘들 뿐입니다. 그런데도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성도는 오직 진리의 길만을 가고자 할 뿐인데, 세상이 가는 길은 진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4:3-4절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이 말은 성도는 이방인의 뜻을 따라 살던 삶에서 빠져 나온 사람이기에, 성도의 새로운 삶은 이방인의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자신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는 성도를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입니다. 따라서 고난은 성도가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3:18절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의인이신 예수님이 불의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죽으심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하나님께 인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불의한 자에게는,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영을 대개 사람에게 있다고 여기는 영혼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19절에서 말씀하는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는 내용도, 예수님의 몸이 무덤에 있을 때, 그 영혼은 지옥에 가서 그곳에 있는 영혼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셨다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이 아니라 성령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육신으로는 죽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불의한 자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입고 오신 죄인의 몸은 다 벗어버리고, 영으로서 살아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으로 살아나셔서, 영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성령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고난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육신으로는 죽고, 영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처럼, 성도 역시 육신으로는 죽고, 영으로서 사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육신으로는 죽고, 영으로 살게 하기 위해 동원하는 것이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4:1-2절이 바로 그것을 얘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다고 말합니다. 고난이 죄를 범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육신이 죽는 길로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으로 말미암아 육신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육신이 살겠다는 욕망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은 육신을 향한 욕망을 끊어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고난 후로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은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피하고 싶은 고통일 뿐이지만, 죽고자 하는 성도에게는 유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이방인의 습관들의 유혹을 받으며 삽니다. 이 유혹은 육신이 살아있기에, 당연히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난을 받으라는 말을 합니다. 고난을 받음으로써 이방인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며,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에서 육신이 아니라 주를 생각하게 되고, 내가 주 안에 있으며, 주께서 나를 책임지심을, 더욱 굳건히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고난이 내게는 유익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고난으로 이끌어 가심으로써, 이 세상 속에서 택한 백성이 어떤 자인가를, 선명하게 드러내시는 일을 하시고, 성도는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사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는 사람은, 자연히 고난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고난으로 말미암아 육신이 죽을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육으로 사는 것을 따르지 않고, 영으로 사는 것을 따릅니다.
그리고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고난이 세상과 구별된 성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기에, 성도에게는 고난도 결국 기쁨이라는 열매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성도에게는 당연히 가야 할 길일뿐입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에 대해 살았음을 증거하게 해주는 것이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의 육신이 무덤에 있을 때, 그 영혼은 지옥으로 가셔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말씀을 선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20절을 보면 지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의 때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찾아 가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지옥에까지 선포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고, 조롱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곧 지옥에 있는 영들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지금도 지옥으로 가고 있는 영들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믿지 않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영들입니다. 결국 세상을 향해서 외치는 것은, 노아 때처럼 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는 것은, 그들의 죄를 더욱 분명히 선포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선포해서 말씀을 믿고, 구원을 얻을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옥에 있는 영들의 죄를 더욱 더 선명하게 나타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이 지옥과 다름없습니다. 세상의 영들을 둘러보십시오. 무슨 생각으로 살아갑니까? 예수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집니까? 노아 때의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하나님은 육으로는 죽고, 영으로 살리심을 얻은 성도를 남겨 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악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 고난을 동원하여, 육신으로 살고자 하는 이방인의 습관을 버리게 하시고, 주를 바라보며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성도에게는, 고난도 유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6. 물은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20-22)
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짐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물로 심판을 받을 때, 그 물에서 구원을 얻은 자가, 겨우 여덟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사람이, 겨우 여덟 명이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며, 복된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 22:14절을 보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말합니다. 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택함을 입은 자가 적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 귀하고 복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가를 아는 것입니다. 심판에서 나를 택하시고 건져주신 은혜가, 얼마나 귀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그 피로 말미암아 나를 죄에서 건져 주신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귀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성도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둘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성도에게는,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피하고 싶은 고난인데, 성도는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 길을 억지로, 인상 쓰면서 가게 되지 않습니다. 성도의 속은 그리스도의 귀하고 복된 은혜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한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오직 주님이 가신 길만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던 것은, 오기도 고집도 아닙니다. 고난을 받고 죽어도 좋을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마음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크고 귀함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노아 홍수 때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 겨우 여덟 명만 구원 받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을 보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노아 때 물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심판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노아 시대 때 있었던 심판과 구원의 사건이, 지금 우리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일어난 구원과 심판의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18절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불의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된 자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살으심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곧 성도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죽은 자이고, 다시 사심과 함께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베드로는 노아 홍수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한 은혜가 아니라, 택한 자를 향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은혜가 얼마나 크냐는 것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물은, 노아 홍수 때의 물을 의미합니다. 이 물이 이방인에게는 심판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세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구원받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존재임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살아난 자가 되었으니, 성령으로 산 자가 가야 할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4:2절에서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은,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 심판에 빠져 죽은 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산 자는 길이 달라졌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임을 말합니다.
노아 홍수 때의 물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노아 때 불의한 모든 자가 죽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덟 명만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제 남은 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분명 심판이 있기 전과는 다른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살았으니, 이제부터 육체의 남은 때는, 나를 살리신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새 생명을 얻은 자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술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놓고 자고 있을 때,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내었던 함이, 저주를 받습니다. 타인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은, 은혜 입은 자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은혜를 입었고 성령을 받았다면, 심판에 처할 사람들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남은 때를 성령으로 살아난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라면,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생명을 얻은 성도가 살아가야 할, 새로운 삶이고 새로운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21절하에서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령으로 살았고 새롭게 된 성도라면, 이제부터는 육체의 더러움도 다 제하여 버리는 것이 마땅한데, 왜 ‘육체의 더러움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라는 말을 합니까?
이것은 세례나,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나, 새롭게 되었다는 것, 성령을 받았다는 말들이, 성도가 육체의 더러움을 제하면서, 곧 죄를 범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가는 의미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흔히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성령을 받았으면 죄를 범하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육체의 더러움을, 자신에게서 잘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입었고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고 더러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이고, 새롭게 된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이라고 말합니다.
선한 양심은 성령이 함께하는 양심을 뜻합니다. 나같이 불의한 자를 위해 주님이 죽으셨고, 주님이 다시 사심으로, 죽은 내가 다시 살았다는 것을 믿는 것이, 선한 양심입니다. 이것이 새롭게 된 양심입니다. 이 선한 양심은 나를 살리신 은혜만을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선한 양심은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을 거부합니다. 은혜가 귀하기에 은혜만 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새 생명을 얻은 증거이고, 그 마음이 노아의 물로써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원의 표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