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된 정신을 가르치십니다. 참된 안식일의 정신은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닌,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1-5절 안식일의 참 주인이십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해 바리새인들이 규정 위반을 주장하며 비난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윗 시대의 일화를 제시하시며 안식일 해석의 권위 문제를 다루십니다. 즉 다윗이 율법의 조문은 어겼더라도 정신은 지켰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 다윗보다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계명을 만드신 하나님의 권위를 입고 오신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권위 안에서 안식일의 기본정신이 사람들을 규정으로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고 구원하는 것임을 밝히십니다(9절). 하나님을 향한 내 열심도, 나 자신에게 쉼이 되고 이웃에게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6,7,11절 오른손이 말랐다는 것은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그를 치유하는 것은 한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일상의 회복을 선사하는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언제에 관심이 꽂혀있던 종교지도자들은 생명이 위급하지 않은 병자를 안식일에 치유했다며 도리어 화를 내고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모의합니다. 율법을 보호하려는 그들의 대단한 열심은 도리어 안식일의 참된 정신을 보지 못하게 하는 가림막이 되었고, 더 나아가 잔인한 폭력이 되어 포로된 자의 해방을 훼방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나의 열심은 전통에 있습니까? 본질에 있습니까?
8-10절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한가운데 일으켜 세우시고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을 각기 대비하며 둘 중 무엇이 옳은지를 물으십니다. 이 말은 사실 선을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구하지 않는 것으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곧 악을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입니다(약 4:17). 사랑은 수동성이 아닌, 앞서 나가 도와주는 능동성으로 표현됩니다. (매일성경, 2025.01/02, p.158-159, 죽이는 율법주의, 살리는 율법정신, 누가복음 6:1-11에서 인용).
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된 정신을 가르치십니다. 참된 안식일의 정신은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닌,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참 주인이십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해 바리새인들이 규정 위반을 주장하며 비난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윗 시대의 일화를 제시하시며 안식일 해석의 권위 문제를 다루십니다. 즉 다윗이 율법의 조문은 어겼더라도 정신은 지켰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 다윗보다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계명을 만드신 하나님의 권위를 입고 오신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권위 안에서 안식일의 기본정신이 사람들을 규정으로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고 구원하는 것임을 밝히십니다(9절). 하나님을 향한 내 열심도, 나 자신에게 쉼이 되고 이웃에게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② 오른손이 말랐다는 것은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그를 치유하는 것은 한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일상의 회복을 선사하는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언제에 관심이 꽂혀있던 종교지도자들은 생명이 위급하지 않은 병자를 안식일에 치유했다며 도리어 화를 내고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모의합니다. 율법을 보호하려는 그들의 대단한 열심은 도리어 안식일의 참된 정신을 보지 못하게 하는 가림막이 되었고, 더 나아가 잔인한 폭력이 되어 포로된 자의 해방을 훼방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나의 열심은 전통에 있습니까? 본질에 있습니까?
③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한가운데 일으켜 세우시고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을 각기 대비하며 둘 중 무엇이 옳은지를 물으십니다. 이 말은 사실 선을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구하지 않는 것으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곧 악을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입니다(약 4:17). 사랑은 수동성이 아닌, 앞서 나가 도와주는 능동성으로 표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