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털 / 조영안
흔히들 미움은 질투에서 시작되는 일이 많다. 때론 너무 사랑해서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 여동생이 그랬다. 그래서 한평생 미운털을 안고 산다. 남아선호 사상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대쪽 같은 성격이었다. 시골 사람이지만 그 시절에 이미 한글을 터득해서 <홍길동뎐> < 춘향뎐> <토끼뎐> 등을 끼고 살았다. 돋보기를 콧등에 걸치고 날마다 읽었다. 반듯한 책이 아니라 실로 엮은 제법 큰 책이었다. 몰래 훔쳐보기도 했는데 글자가 요상하게 생겨 내팽개치곤 했다. 그리고 긴 곰방대로 담배를 피웠다. 깡통에다 톡톡 털기도 했고, 볏짚으로 그 안의 진을 빼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다. 지금처럼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 특이 하다는 것을. 그래도 주변을 깨끗이 하여 담배 냄새는 약간 스치는 듯 미미했다.
한겨울인 음력 정월 초닷새가 동생의 생일이다. 위로는 세 살 터울의 오빠와 여덟 살 차이가 나는 내가 있다. 당신은 오랜만에 태어난 손녀가 아들이기를 바랐다. 동생의 운명은 태어나자마자 결정되었다. 시골의 방바닥은 겨울이면 군불을 지펴서 항상 뜨끈뜨끈하다. 할머니는 갓 태어난 날부터 동생을 이불로 다독다독 싸매서 아랫목에 밀쳐 놓았다. 며칠 후 아기 등에는 이상 증세가 보였다. 불그스레한 몽우리 세 개가 자리를 잡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처음에는 그대로 두었는데 점점 상처가 커졌고,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등 전체로 번졌다. 아마도 연약한 살이 뜨거운 방에서 화상을 입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그때는 가까이에 큰 병원이 없었고, 마을 도로변에 있는 작은 약방에서 겨우 연고나 사서 바를 뿐이었다. 할머니는 툭하면 ‘가시나가 하필 정월달에 태어나 재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 원망에 무심하게 동조한 가족도 죄인이긴 마찬가지였다.
큰 병원에 한 번 가보지도 못하고 상처는 아물었지만 등 전체는 화상 자국이 심했다. 어깻죽지까지 번져 몸 균형도 기울어졌다. 동생은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영리하다. 어느 때 부터 목욕탕에도 못 가고 집에서 몸을 씻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부모에게 ‘내 등이 왜 그러냐고?’ 따졌지만 명쾌한 대답은 얻지 못했다. 그 무렵 할머니는 심한 천식을 앓았다. 숨도 가쁘고 가래도 많이 내뱉었다. 동생은 개의치 않고 잔심부름도 하면서 가래가 담긴 깡통도 깨끗이 청소했다. 타지에 나가 있던 나와 남동생은 그런 심부름을 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자라서 할머니 때문에 등이 그렇게 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원망하지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저세상으로 떠났다. 손녀한테 평생 지우지 못할 흔적만 남겨 놓은 채.
아버지는 그런 딸이 안쓰러워 부산 대학병원에서 성형수술을 하기로 했다. 허벅지 살을 떼어 이식하는 수술이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일부는 피부가 살아났지만 아쉬운 점이 많았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전라도 애양병원까지 동생을 데려갔다. 초행길이지만 꾸불꾸불 바닷가 옆으로 난 길을 물어서 간 것이다. 피부과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으나, 병원에서는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나중에 국군 통합 병원에서 복무중이었던 남동생의 주선으로 치료의 기회가 있었지만 이미 굳어진 상태라서 어렵다고 했다. 이렇게 동생의 치료는 멈췄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다. 역시 머리가 좋아 전액 장학금을 계속 받으면서 졸업했다. 혼자서 신문 배달 알바를 하면서 용돈을 스스로 벌었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서였을까.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교편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적령기가 되자 주위에서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때마다 수녀가 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데 얼마 후 동생은 뜻밖에 결혼할 거라고 연락해 왔다. 의외였다. 상대는 대학 시절 장애인 동아리에서 만났던 선배였다. 그동안 동생은 도움을 많이 받았단다. 남자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목발 없이는 걷는 게 힘들었다. 솔직히 우리 가족은 탐탁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멀쩡한 딸이 그런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주위에서 서로 좋아하는데 어쩌겠냐며 응원 해주었다.
결혼식은 대구에서 열렸다. 마을에서 버스 한 대가 출발했다. 평소에 동생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축하 해주었다. 도착하니 신부는 예쁜 드레스를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의 어느 신부보다 더 예뻤다. 그런데 슬그머니 작은 봉지 하나를 건넸다. "신혼여행 가면 남은 음식이 상할까 봐 소죽 끓이는데 넣어라"며 설명한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그게 뭐기에 결혼식 날까지 챙긴단 말인가. 동생은. 그만큼 알뜰하게. 흐트림없이 살고 있다. 잠시 후 식이 시작되었다. 주례는 멀리서 동생의 대학교 은사가 와서 봐 주었다. 목발을 짚은 신랑이 입장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뒤이어 키가 작은 신부가 입장하자 여기저기서 힘차게 박수를 치며, 눈물을 훔쳤다. 식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결혼식'이라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제부는 구청 세무과에서 일했다. 시아버지가 아픈 손가락이라며 하던 공장을 물려주었다. 집도 마련하여 사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2세가 문제였다. 시아버지는 둘다 머리가 천재니까 똑똑한 아이가 태어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동생은 배가 부르면 힘들어한다. 꼭 낳으려면 방법은 있었다. 만삭이 되기 전에 수술로 아기를 낳고 인큐베이터에서 키우는 거였다. 부부는 여러 생각 끝에 태어나면서 부터 아이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고 양가 부모에게 선포했다. 그 이후 2세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다.
동생 부부는 현명했다. 부모가 물려준 공장을 처분해서 형제들과 사이좋게 나누었고, 시아버지도 모셨다. 치매를 앓던 시아버지는 동생의 보살핌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현재는 부부가 명예퇴직하고 집에서 쉬며 취미 생활을 즐긴다. 여행도 다니며 지역 장애인 협회에서 봉사 활동도 한다. 그런데 얼마 전 다니던 병원에서 뼈가 장기를 눌러 힘든 상태라고 수술을 권유했다. 인공 뼈로 지주대를 만들어 장기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갑상선에 문제가 있어서 그마저도 하지 못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미운털이 박혀 억울하게 살았던, 심성고운 내 동생이 이제는 좀 편했으면 좋겠다. 계획대로 전원주택도 지으면서 삶이 조금 더 순조롭기를 응원한다.
첫댓글 동생 부부는 아주 잘 살고 계시네요. 응원해 주는 언니가 있어서 더 평안하고 즐겁게 사실 것 같습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언니로서 해준게 너무 없거든요. 오히려 제가 도움을 받고 산답니다. 절 항상 걱정해주니까요.
가슴 아픈 이야기네요. 앞으론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네요. 동생 부부의 앞날을 저도 응원합니다.
우리가족 어느 누구도 동생 한테는 할 말이 없답니다.그래도 제일 행복하게 살아요.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생분의 심성이 잘 드러나는 글이네요.
그래서 오래오래 잘 살았음 좋겠어요. 건강이 더 악화되지 않고요.
@글향기 에휴. 언니도 마음이 예뻐요. 위에 글에서 여동생이 결혼식 당일도 소 밥을 걱정했다는 거죠.
@심지현 소밥 걱정이 아니라 동생이 신혼여행가면 음식이
상해 아까우니까 갖고가서 소죽 끓이는데 넣어라고. 준거예요. 그만큼 알뜰하지요.하하
@글향기 착하시고 알뜰하시고 진짜 예쁜시네요.
@심지현 그렇게 봐주는 심지현 선생님 마음도 예쁩니다.
감사해요.
상처가 많을텐데 어떻게 이렇게 좋은 심성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우리한테는 표시를 안내지만 혼자서는 얼마나 울었을까요.
가슴만 미어집니다.
훌륭하고 멋진 동생을 두셨네요. 저도 더 행복해지길 응원할게요!
고마워요.
살아오면서 동생한테 해준게 너무없어 늘 죄인이랍니다.
누군지 했더니 여동생이었군요.
할머니가 원망스럽네요.
제가 이런 맘인데 동생은 오죽할까요?
네,
그녀에서 동생으로 바꿨어요. 선생님 말씀이 옳았습니다.
그래도 원망않고 살아가는게 고맙지요. 시아버지나 친정부모님께도 잘하거든요.
어느 가족이나 아픈 손가락이 있는 것 같아요. 동생분이 대단하네요.
모르는 분이지만 건강을 빌어 주고 싶네요.
열심히 예쁘게 살아가는 동생이
대견하답니다. 고맙습니다.
동생을 사랑하는 언니 마음도 예쁘네요. 할머니께는 미움의 대상이었지만 가족들에게는 더 많은 사랑을 받아서 동생이 예쁘게 컸나 봅니다.
아니예요.
저는 늘 못난 언니랍니다. 결혼식 준비도 혼자서 했거든요.
늘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