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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서정과 현실》 하반기호 <내가 읽은 시조>
서정적인 것의 현실, 현실을 위한 서정
우은진
《서정과 현실》 2019년 상반기호의 권두시화에서 천양희 시인은 “시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시가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도 아닌데” 왜 시를 쓰려고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왜 쓰는가는 시인들이 무언가를 쓰려고 할 때마다 스스로 하는 고민이기도 하고, 문학을 한다고 하면 종종 듣게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앞에 세워지면 그때마다 매번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매번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천양희 시인은 「삶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라는 글의 제목으로 그에 대한 답을 내어놓고 있다. 시인은 삶에 대하여 시라는 방식으로 질문을 던짐으로써 “존재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사람의 상처를 꽃으로 피”울 수 있다고 한다.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어요/ 남은 밥이랑 김치 있으면 문 좀 두들겨주세요”라는 말을 죄송하다는 말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담은 쪽지를 남긴 채 2011년 병마와 생활고로 인해 생을 마감한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시조 텍스트 속에서 ‘리바이벌’되고 있는(이광, <리바이벌> 부분) 동시에, 실제 사회에서도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문학인들은 문학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에게 빵을 마련해주는 것도 아닌데 왜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자주 아프게 부딪히게 되곤 한다. 그럴 때면 서정적인 것을 쓰고 있는 어제와 오늘이 때로는 “우수(憂愁)의 말”이 “우수수 쏟아”지는 세계에서 “헛꿈만 모아/ 무쇠솥에 삶”고 있는(오종문, <평일 고해―심법 ‧ 68> 부분) 괴로움의 시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 세계에서 발생하는/숨겨진 아픔과 슬픔을 형상화, 재형상화하고 있는 많은 문학 텍스트를 읽고 있으면, 현실 속의 불안과 부조리를 다시(한 번 더/다른 방식으로) 보게 하는 시선을 마련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고통과 상처에 언어를 부여하여 그것들이 들리게 하기도 하는 서정적인 것의 역할에 대해 또 생각하게 된다. 곧 그러한 시선과 목소리를 빚어내는 일이야말로 결국(혹은 역시) 우리 현실에서 서정적인 것이 하는 일, 해야 하는 일 중 매우 중요한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미주택 동백연립 먹히고 말았으니 이름이 고운 탓에 너무 다정한 탓에 굴삭기 요란하더니만 느닷없이 서슴없이
구구단처럼 숫자들을 외워도 좋았을 걸 오므린 혀 궁글리며 중얼대도 좋았을 걸 뜻 모를 낯선 이름들 사다리를 높인다
먹혀서 사라지면 사라지게 두자는 듯 사라져 잊히면 잊어두고 살자는 듯 불 밝힌 대단지 고층들 저녁 창이 저리 밝다
―김소해, <우리 동네> 전문―
김소해 시인의 시조 <우리 동네>에서는 익숙한 장소에서 밀려난 것들/이들을 뒤돌아보는 동시에, 그것들이 사라짐으로써 변해버린 동네를 낯선 공간처럼 바라보는 발화주체의 시선과 목소리를 읽을 수 있다. 1) 동네에 “느닷없이 서슴없이” 나타난 “굴삭기”는 “요란”하게 “장미주택 동백연립”이라는 친숙해서 “다정”하게 느껴지던 “이름”들을 가진 집들을 밀어내고, “뜻 모를 낯선 이름들”을 가진 “대단지 고층들”을 그 자리에 세운다. 그것이 발화주체에게는 그저 “구구단처럼 숫자들”이 불어나길 욕망하는 자본적 계산에 의해 그곳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던 이들에게 삶의 터전으로서 존재하고 있던 장소가 “먹혀서 사라지”는 일로 인식된다. 그런데 누군가와 그들의 장소가 먹히고, 사라지고, 잊히는 일을 그 공간에 새롭게 들어선 이들과 우리 사회는 당연하게 여기거나 무관심하게 밀어둔다. 자본과 효율성을 이유로 점점 “사다리를 높”여가는 재개발을 막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당연시와 무관심에 의해 그 장소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의 “다정”한 관계성과 상호작용이 공간에서도 사라지고 기억에서도 잊히는 일은 발화주체에게 쓸쓸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대단지 고층들”이 환하게 “불 밝”히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그에게 “저녁 창이 저리 밝”은 조금 멀고 쓸쓸한 풍경으로 이야기된다.
‘ㅋ’이 든 중심 말은 ‘크다’가 될 것이다. 큰 것은 많은 것과 높은 것과 친해서 가끔씩 인간의 얼굴 숨길 때가 있었다.
―문무학, <한글 자모 시로 읽기 ‧ 11―닿소리 ㅋ> 전문―
문무학 시인은 시조 <한글 자모 시로 읽기 ‧ 11―닿소리 ㅋ>를 통해 ‘크다’를 ‘ㅋ’의 “중심 말”로 자연스레 떠올리는 우리의 인식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큰 것”을 욕망하는 인간의 마음이 깔려 있다. 이때 “큰 것”을 바라는 마음은 무엇에 대한 어떠한 방향의 욕망이냐에 따라서 그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자본적 효율성과 계산가능성을 기준으로 “더 많이, 더 높이, 더 빨리”를 행동강령으로 외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큰 것”은 당연한 듯 혹은 쉽게 “많은 것과 높은 것과” 함께 묶이곤 한다. 그렇게 더 큰 부, 더 많은 생산과 수익, 더 높은 효율성을 가치의 기준으로 두는 사회는 “가끔씩 인간의 얼굴을 숨”기고 외면하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우리가 현재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큰 것’은 누구의, 누구를 위한 어떠한 욕망인가를 성찰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시조 종장 뒤에 따라붙게 된다.
부서질 운명 유리(遊離)의 다른 이름
더러운 지문들이, 잔금들이 꿈꾸는
한 호흡 그리운 망치에 산산조각 부서지고픈
―선안영, <유리의 감정> 전문―
선안영 시인의 시조 <유리의 감정>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개인이 안고 있는 불안으로서 “부서질 운명”과 “유리(遊離)”되고 있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개인은 지금-여기의 사회 시스템 속에서 결국 깨어져야 하는 동시에 소외되기 쉬운 “유리”와 같은 존재로 명명되어 있다. 그러한 “유리”에는 사회 속에서 살아오면서 얻게 된 무수한 흔적과 상처들로서 “더러운 지문들”이 묻어 있고, “잔금들이” 생겨 있다. 그리고 그 “지문들”과 “잔금들”은 “유리”를 부서지게 하는 원인이자, “유리”가 “유리(遊離)”된 자리에 있다는 증거, 혹은 “유리”를 “유리(遊離)”시키기 위해 드는 이유 등으로 작동하게 된다. 그런데 “유리”는 그 속에서 그 “지문들”과 “잔금들”을 소외되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삶을 치열하게 경험한 결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한 태도를 지닐 때, “지문들”과 “잔금들”은 상처에서 응전의 근거이자 동력으로 전화(轉化)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유리”가 “꿈꾸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그리운 망치”로 “한 호흡”에 부서지는 일이다. 여기에는 현실의 삶에서 개인이 부서지는 일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그런 인식 위에서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이 정한 시기에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세계에 부딪침으로써 자기의 의지와 책임으로 부서지고 싶다고 꿈꾸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사회 속에서 소모되면서 조금씩 부서져가는 수동적인 운명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이는 사회가 통제,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사회 시스템이 일방적으로 “유리”의 삶에 “잔금들”을 만들고 있는 현실 속에서 “유리”도 그 사회 시스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인 것이다. 이때 시조를 포함한 서정적인 것, 문학은 “유리”와 같은 존재의 삶, ‘감정’, 생각들을 이해하게 하고 전이시키는 언어로서 우리 현실에 존재하고 있으며, 또 있어야 한다. 서정적인 것의 언어는 다른 이를 등지고 “자신을 껴안은 채 등 뒤로 말을 받”으며 “웅얼”대고 있는 “알 속의 생”을 살고 있는 우리의 상처, 두려움, 소통 부재 등의 단단함과 깨질 수 있음을 함께 생각하게 하기도 하고(염창권, <섬> 부분), 삶에 대한 “약속이 성립되지 않”는 “비정규적 생”들의 “희망을 둘 곳 없다, 는” 말이 가진 아픔이 자신의 안에도 찌르듯 날카롭게 파고들게 하기도 한다.(염창권, <길거리에서의 용서> 부분) 또한 불안한 세계 속에서 생을 향해 “타는 듯”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소말리아” 소녀의 모습 위에 “내 열 살 기억 저편”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붉은 전흔”을 겹쳐 봄으로써(박옥위, <흑백사진> 부분), 경험의 공유를 바탕으로 한 연대감을 만들어내어 일상적으로는 멀리 떨어진 듯 보이는, 무관하게 느껴지는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기도 한다. “벼랑으로 내몰”린 절박한 상황에서 “발목 푹푹 빠지는” 답답한 삶을 힘겹게 살아내다가 “스쳐가듯” 길지 못한 생을 서글프게 마감하지만, “자고 나면 잊혀지”고 마는 “사람들”의 뒤에 그들을 위한 “늦은 배웅”이나마 오래 남도록 해주는 것도(이태순, <그 먼 기별> 부분) 서정적인 것이 하는 일이다. “때때로 새로움이 익숙함을 밀어내”고 있는 현실에서 오늘이 불러온 “처음”이 밀려나고 있는 어제의 “끝”을 종종 돌아보게 하고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것도(김미정, <헌 의자> 부분) 문학의 언어를 통해 가능한 일이다. 텍스트들을 읽으며 이러한 서정적인 것의 역할을 생각하고 확인할 때, 왜 쓰는가에 대한 물음은 왜 써야만 하는가, 또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관한 사유로 이어지게 된다. 그와 함께 서정적인 것과 시인이 처해 있는 현실과 사회인식 문제에 대해서도 더 고민하게 된다. 우리의 현실에서 시조가 서정적인 것으로서 밀려난/밀려나고 있는 존재들을 성찰하는/성찰하게 하는 역할을 다채로운 언어 텍스트를 창작해냄으로써 수행할 때, 시조는 겉보기엔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지만 “현실과 등을 돌린 무심한 담배연기”만 피워 올리고 있는 “영혼 없는 문장들”(박연옥, <노숙> 부분)이 아니라, 시대의 목소리, 있어야 하는 문학으로 앞으로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소리도 소리 나름/ 두드린다고 소리 아니듯” 시조 율격에 맞게 아름다운 리듬으로 언어를 직조하면서도 그 “속내”에는 존재와 현실을 위한 사유가 스며들어 있게 해야 한다. 이때 단번에 “기미를 알아채게” 하지 않는 은유적 언어로 “넌지시” 표현하는(홍성란, <난타 생각> 부분) 미학도 필요하다. 그런데 서정적인 것은 우리 현실의 가난에 대해 성찰하는 역할을 하는 언어이지,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현실에 처해 있어야만 하는/있을 수밖에 없는 언어가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서정적인 것의 창작이 우리 사회에 마련해주는 이해와 성찰, 새로움 등의 가치를 존중할 때, 우리는 현실의 부조리를 여러 시선으로 포착하며 그 부조리에 의해 생긴 상처들을 여러 목소리로 말하는 서정적인 것의 역할로 말미암아 더 나은 세계를 생각하고 만들 수 있다. 더불어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줄어들고 있는 일상에서도 “달그락,/ 마른 무게로/ 흔들리는 저 투명”한 풍경 속에서 저무는 가을(유재영, <가을 經> 부분)을 느끼고, 간밤에 “싸락별이 그리움을 떨”구고 간 자리에 피어난 듯한 “풀꽃들”을(정해송, <풀꽃, 가을>) 바라볼 수 있는 감각이 인간의 내면에 아직 살아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순간들을 만들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도 서정적인 것을 창작하는 시인의 현실이 나아진 사회, 서정적인 것이 현실을 위해 제 역할을 하는 사회를 동시에 생각하며 또 바라보고 있다.
1) 장소는 공간보다 더 구체적인 개념으로 인식된다. 우리가 공간에 대해 더 잘 이해하며 가치를 부여할 때, 공간은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이푸 투안, 구동회·심승희 역, 『공간과 장소』, 대윤, 2007, 13-1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