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8월26일오늘역사] - 서울지방법원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 반란·내란수괴죄 등으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하다. ![]() 5.18 민주화운동 전남도청 발포 당시 상황 (85초영상)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경 발포 (위키백과=13시 00분: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 늙은 군인의 노래 - 홍경민 (원곡)늙은 군인의 노래 - 양희은 (1978년) (원곡) 늙은 군인의 노래 (1976년) 작사/작곡 김민기 노래 양희은 1.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피고 눈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죽어 이 흙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2.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아들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아들 너로다 아 ~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3.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더냐 우리 손주 손목잡고 금강산 구경일세 꽃피어 만발하고 활짝개인 그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 내 청춘 다갔네 아 ~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4. 푸른하늘 푸른산 푸른강물에 검은얼굴 흰머리에 푸른모자 걸어가네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우리 손주 손목잡고 금강산 구경가세 아 ~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펌]http://blog.ohmynews.com/gompd/150108 ![]() 이 노래에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인 김민기 씨는 70년대 저항가요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죠. 1974년 10월, 잠시 노래를 접어 두고 군대에 간 그가 배치를 받은 것은 용산의 미군방송(AFKN)이었습니다. 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카투사, KATUSA) 신분으로서였죠. 하지만 그가 그곳에 있었던 시간은 채 두 달이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삼선개헌에 반대하던 가톨릭 단체들의 집회가 명동성당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곳에서는 그의 저항가요들이 불릴 예정이었죠. 하지만, 정보가 미리 새면서 행사는 무산 되었고, 김민기 씨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수사기관이 그의 입대 사실을 알고 군 당국에 통보하면서 그의 짧았던 카투사 생활은 끝이 났습니다. 보안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고 그가 재배치되었던 곳이 강원도 최전방,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의 바로 그 원통이었습니다. 사단영창에서 보름을 지내고 12사단 51연대 1대대 중화기 중대에 배치된 그는 여느 소총수들과 같이 고달픈 군 생활을 해야 했죠. 그리고 그곳에서 삼십 여 년의 군 생활을 접고 전역을 하는 병기 선임하사의 부탁을 받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 대가는 막걸리 두 말이었죠. 1976년 겨울, 이렇게 탄생한 노래가 바로 ‘늙은 군인의 노래’였습니다. ![]() '늙은 군인의 노래'가 수록된 양희은의 앨범, 1978년. 젊은 청춘을 푸른 군복에 바친 한 부사관의 회한과 아쉬움, 소박한 나라사랑의 마음이 담긴 이 노래는 곧 병사들에게 구전되어 불려졌습니다. 그가 제대한 후 ‘늙은 군인의 노래’는 1978년 양희은의 이름을 빌려 문공부 심의에는 통과하지만 곧 가사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됩니다. 군부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라 “흙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등의 약하고 패배주의적인 가사가 군인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였습니다. 유신체제하에서 국방부 장관 지정 금지곡 1호가 된 이 노래가 그 생명을 이어간 것은 독재에 저항하던 대학가와 노동현장 이었습니다. 원래 가사속의 군인은 투사, 노동자, 농민, 교사 등으로 바뀌어 불리어지면서 대표적인 저항가요로 탈바꿈하며 오늘날까지도 애창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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