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는 돌로 된 형체들을흔적으로 남겨놓았으니 사라진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빈 터에서 쓸쓸하고 허무하기 보다는 걸머지고 온 번뇌가 그저 쓸데없는 생각일 뿐
세모(歲暮)에 서산 보원사지를 지나 가야산 자락을 휘적이며 개심사로 넘어가던 길 ‘세심동(洗心洞), 개심사(開心寺) 새해 마음의 화두처럼 산문집 ‘길 위에서’에 수록된 ‘개심사에서’의 일부를 옮겨와 본다
개심사는 그저 마을을 이루는 것처럼 그 입구부터 단출하다. 봄이면 고사리 등 봄나물 좌판을 펼친 가게와 낮은 지붕의 식당들이 서너 군데. 오르는 길에 일주문은 뻘쭘하게 서 있는 게 어색한데 길가에 개울은 좀처럼 물소리를 내지 않는다. 개울을 따라 소나무 숲 사이로 나 있는 돌계단, 돌계단 앞에 서 있는 두 개의 돌비석, 무겁거나 결코 가벼워 보이지도 않는 돌에 ‘세심동(洗心洞), 개심사(開心寺)’가 옛 고향 집 사립문에 나지막이 문기둥처럼 서 있다. 마음을 씻고 여는 것은 돌이나 절집의 몫이 아닐 터 돌계단을 따라 굽이진 개울 길을 따라 오르면 이윽고 개심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는 동안 마음을 씻고 또 열리지는 않았고 언덕에 올라설 즈음 네모난 긴 연못이 기다리고 있다. 코끼리의 모습을 닮아 있다며 상황산(象王山), 그 코끼리가 물을 먹는 형상으로 연못을 준비했을까? 못 이름은 경지(鏡池), 거울 연못이라는 뜻이다. 굽이진 소나무 숲길을 오르며 마음의 흔들림은 그쳤는지 비추어 보라는 장치인가도 생각해보게 된다. 마음을 씻는다는 것이 내 안의 나를 버리는 거라면 너무나 단순하고 쉬운 일일진대 그게 그렇게 어렵다. 나를 버려야 마음이 열린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결국 내 앞에 있는 타인의 마음을 훔치는 일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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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개심사는 서너 번 갔었는데, 번놔를 벗어놓고 온 줄 알았는데, 새해 벽두에 이렇게 펄럭이는 건 뭔지요? 혼자서 석양에 찾아간 개심사, 참 좋았었고, 혼자서 자는 보령의 어느 허름한 모텔, 막걸리가 그렇게 혀에 감길 줄이야! 쌤 좋은 구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