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黃龍寺)는 경주시내에 있는 구층목탑이 있던 절의 이름과 동일하다. 그러나 시내의 황룡사는 나중에 황룡사(皇龍寺)로 바뀐다.
조선시대 영조 때에 만든 불국사 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곳에는 선덕여왕 때 창건된 황둔사(黃屯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담화(曇華)스님이 임란 후에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절을 중창하면서 황룡사라고 불렀다. 그후 숙종 때에 불국사의 부속 암자로 등록하면서 심적암(深寂庵)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산지에 축대를 쌓아서 평지를 만들고 거기에다 가람을 배치하는 형식은 불국사가 최초의 절이기 때문에 이 절이 선덕여왕 때에 창건된 사찰이라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남아있는 석탑재로 추정해보면 탑의 건립연대 역시 800년대로 보인다. 하지만 이 절은 왕실이나 귀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보여 사격은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동경잡기에는 이 절과 관련하여 임진왜란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 골짜기로 피난을 왔는데 왜병들이 따라와 이들을 많이 살해했으며 이때 왜군에 의해 죽은 남편을 따라서 자결한 부인의 정려각이 봉황대에 세워졌다는 기록도 전한다.
금당터에는 9세기 전반 내지 중엽의 조각으로 여겨지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불상대좌가 있었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무너진 석탑재를 살펴보면 층급받침이 4단이며 몸돌이나 기단부에 장식이 전혀 없어 전통이 고수된 탑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각장식의 양식에 입각하여 탑의 계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감은사탑과 같이 전혀 장식이 없는 탑
둘째, 고선사탑과 같이 몸돌에 문비와 문고리 장식이 조각된 탑
셋째, 창림사탑과 같이 몸돌에 문비와 문고리 그리고 기단부에 팔부신중상이 조각된 탑
넷째, 장항리탑과 같이 몸돌에 문비와 문고리 및 인왕상이 조각되는 탑
다섯째, 원원사탑과 같이 몸돌과 기단부에 모두 조각이 새겨지는 것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층몸돌에서는 네모난 사리공을 볼 수 있으며 3층 지붕돌에서는 둥근 찰주공을 볼 수 있다. 석탑 사리공의 위치는 층수와 관계는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3층에 사리장치를 한 경우도 있고 1층에 사리공이 있는 경우도 있다.
현재 석탑의 무너진 모습을 보면 사리장치를 도굴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금당터에 자리한 민묘의 주인공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도굴을 위한 붕괴일 경우 몸돌만을 넘어뜨리는데 이 석탑은 기단부까지 모두 붕괴되어 있다. 이같이 묘를 쓰기 위한 석탑의 붕괴는 19세기에 도처에서 일어났던 일인데 남연군묘를 이장하기 위한 대원군의 가야사 방화사건 이후 일반화되었던 일이다.
<2005. 10. 30>
이 가설이 확고한 학술적 정설로 입증되기 위해 넘어야 할 학술적·고증적 검토 과제도 존재한다.
백제계 석탑 양식이 보이는 고려 시대 탑재 구역(서편)이 신라 시대 구역(동편)의 단순한 '후대 확장 암자'였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완전히 별개의 독립된 사찰로 운용되었는지에 대한 동-서 구역의 연대기적 관계를 밝힐 발굴 조사가 필요하다.
'황둔' 명칭의 기원도 밝혀야 한다. 황둔이라는 이름이 고려 시대 사찰의 원래 사명(寺名)이었는지, 아니면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에 맞서 진을 쳤던 군사적 기능(屯)에서 비롯된 후대 별칭이었는지가 핵심이다. 만약 임란 때 붙은 이름이라면 고려 시대 서편 사찰의 원래 이름은 별도로 존재했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
"동편 = 신라 황룡사, 서편 = 고려/임란기 황둔사"라는 가설은 전혀 불가능하지 않으며, 오히려 황룡골 내에 존재하는 두 개의 탑재 구역과 명칭의 혼용 현상을 정교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작업 가설이다.
향후 서편 절터의 명문 기와나 실물 금석문 사료가 추가로 확인된다면 이 두 사찰의 공간적·시계열적 관계가 완전히 명쾌하게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