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349) / 그리스
미스트라스의 고고 유적(Archaeological Site of Mystras; 1989)
‘모레아(Morea)의 경이(驚異)’라는 뜻을 가진 미스트라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Region of the Peloponnesos] 라코니아 주[Prefecture of Laconia]에 속하며, 1249년에 아카이아(Achaia)의 군주 기욤 드 빌라르두앵(Guillaume de Villehardouin; 발라르두앵의 윌리엄 2세)이 건설한 요새의 주위에 원형 극장으로 건설되었다. 비잔틴에 의해 재정복되었다가 터키 인과 베네치아 인의 차지가 된 도시는 1832년 이후 버려졌으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자리 잡은 숨 막힐 듯한 중세 유적은 잘 보존되어 있다.
사람에 의해 버려졌고 식물들이 성벽을 쪼개고 언덕 기슭을 뒤덮으며 잠식하여 역사의 연약한 흔적들을 여기 저기 파괴하고 있지만 미스트라스의 유적 단지는 화려한 운명을 간직한 도시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미스트라스는 1248~1249년에 아카이아의 군주이자 프랑크의 제후였던 기욤 드 빌라르두앵이 스파르타를 내려다보는 620m 높이의 언덕 위에 커다란 성을 세우기로 하면서 탄생했다. 이 성은 비잔틴 제국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었으며, 또한 타이게토스 산[Taygete]에 살고 있던 슬라브 족 멜링게스(Melinges) 인과 레제리테(Lezerite) 인을 가리키는 에스클라본(Esclavon) 인들을 견제할 수 있었다. 폐허가 된 뒤에도 성 안에는 소수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1832년에 오토 1세가 새로운 도시 스파르타를 건설하면서 이 도시는 버려지게 되었다. 미스트라스는 거의 6세기 동안 불안한 존립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몇 차례 여러 왕조의 지배 아래 정치적・문화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기욤 드 빌라르두앵이 이 도시를 건설할 때도 역사의 소용돌이는 비껴가지 않았다. 성이 막 완성되었을 즈음에 기욤 2세는 펠라고니아(Pelagonia) 전투에서 비잔틴 팔라이올로고스(Palaeologus) 왕조의 미카일(Michael) 8세에게 패하여 포로 신세가 되는 바람에 기욤 2세는 모넴바시아(Monemvasia)・마니아(Mania)・미스트라스 등 3개의 요새를 미카일 8세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1261~1262). 1265년 승리의 여신이 다시 일시적으로 기욤 2세에게 빛을 비추었을 때, 그는 스파르타 주민들이 취약한 그들의 도시를 버리고 미스트라스 성 주변에 피난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1262~1348년까지 미스트라스는 많은 전쟁에서 전리품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1년 단위로, 1308년부터는 영구적으로 비잔틴의 군사령관이자 총독이 이곳에 부임했다. 스파르타의 주교구도 이 새로운 도시로 이전했고, 1264년에는 성 데메트리오스[St Demetrios]에게 바치는 메트로폴리스가 건설된 뒤 1310년 이후에 재건되었다. 또 성 테오도레 수녀원[Theodore Saints; 196년 이전], 브론토키온 수녀원(Brontochion; 1310년경) 등도 화려한 장식과 함께 건설되었다. 1348~1460년 사이에 미스트라스는 모레아 공국[Despotate of Morea]의 수도가 되었다. 이 공국은 봉건 체제를 바탕으로 왕가의 권력을 가족―아들과 형제들에게 이양한 칸타쿠제노스 왕조(Cantakouzenos, Cantacuzene; 1348~1384)와 팔라이올로고스 왕조(Paleologi, Palaeologos; 1384~1460)의 탈중앙 집권화에 대한 욕망의 소산이었다. 미스트라스의 최전성기였던 이 기간에 페리블렙토스(Peribleptos) 성당(1350)과 판타나사(Pantanassa) 수도원(1428년경)이 세워졌고, 이 국제적인 도시는 지중해 지역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통치자들은 프랑크 왕국의 공주들과 결혼했고, 터키 인[오스만 제국]이나 베네치아와 불가피한 동맹을 맺기도 했다. 1402년 팔라이올로고스 왕조의 테오도레 1세(Theodore I Paleologus; 재위 1382~1407)는 미스트라스를 로데스(Rhodes)의 기사단에 팔았으나 주민들이 반발함으로써 그 거래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1446년의 원정에서 승리한 무라드(Murad) 2세에게 조공을 바친 후, 미스트라스는 1460년 5월 30일 무하메드(Mohammed) 2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사건은 동서양의 역사에서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비견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의 부흥기에 그려진 극적인 프레스코화로 뒤덮인 미스트라스 교회들의 아름다움, 이곳 도서관의 명성, 그리고 신플라톤주의적 인문주의를 이탈리아로 전해 준 게오르게스 게미스테 플레톤(Georges Gemiste Plethon), 바실리오스 베사리온(Basilios Bessarion) 등과 미스트라스 작가들의 영광은 그 후 ‘모레아의 경이’로 실체화되었다. 미스트라스는 16세기에 터키 인에게 점령되었다가 1669년에는 베네치아에게 일시적으로 정복된 뒤 1687~1715년까지 지배를 받았으며, 이어서 1715년에는 다시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다. 미스트라스는 여전히 약 40,00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는 어려웠다. 그 도시의 제조와 무역에 유일한 원천은 견직물 산업뿐이었다. 1770년의 대반란[Magna Revolt] 때 미스트라스는 알바니아 인들에 의해 화재를 입었으며, 아예 폐기되는 바람에 결국 폐허 상태가 되었다. |
첫댓글 지중해의 문화가 비슷비슷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