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회사 싱글즈 잡지에서 연휴에 심하게 놀다온 사람들 인터뷰 기사를 쓴다길래 써주는 건데,
쓰다보니 길어짐. 잡지엔 몇 줄밖에 안 나오겠지만, 이건 내 보관용.
1. 일정 및 감상(카페에 올린 여행기 성격이라 너무 길겠지만 알아서 잘라 쓰시길...)
2004.09.21 화
01:00am 일 마침. 가방 쌈.
06:00am 인천 공항 도착, 항공권 발권
08:00am 인천 출발
11:50am 마닐라 도착, 국내선 공항으로 택시 타고 이동, 까띠끌란행 비행기표 구입(보라카이는 자연 보호를 위해 공항이 없다. 그 옆의 섬인 까띠끌란 공항에 내려 배를 타고 20분 정도 들어가야 한다.)
02:30pm 공항에서 복잡한 회사 일들 잊으려고 기를 쓰며 책을 읽다가 마닐라 출발
03:30pm 까티끌란 도착, 선착장으로 이동
04:20pm 보라카이 도착
배가 갑자기 바다 중간에서 멈추면, 사람들이 바지를 동동 걷어올리기 시작한다.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물 속을 한 10미터 걸어 해변으로 올라서야 하는데, 구두를 신거나 정장을 입은 사람들은 보트맨들이 목마를 태워 해변까지 건네주기도 한다.
배 안에서 만난 삐끼를 따라 걷다가 한국인 다이빙 샵이 보이길래 혼자 쑥 들어갔다. 웃통을 벗은 한국 남자 넷이 카드를 치고 있었는데, 그 중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이수정을 울궈먹었던 여행사 사장처럼 느끼하게 생긴 남자, 오 사장님이 일어선다. 인상과는 달리 멋진 분! 이 가게에서 일하는 영국인 강사 제프리가 이 섬에서 유명한 베테랑 강사라며 인사를 시켜주길래, 딴 곳과 더 이상 비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이 곳에서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뭔가 배울 땐 모국어로 배우는 게 나을 것 같아 한국인 가게에 왔는데, 영국인 강사와 함께 하다니, 이거 이상하게 얽히는구만. 그 삐끼가 없었으면 이 가게에 왔을까나?
이 곳에 가방을 두고 숙소를 비교하러 떠나기 전, 사장님께 대략의 물가와 관광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삐끼 말대로 500페소 이하의 숙소는 찾기 힘들겠다. 아까 삐끼가 말해준 그 숙소에 갈 걸, 하고 후회하며 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그 녀석이 또 나타난다. 잘 됐구나, 싶어 포근하게 웃으며 그를 따라갔더니, 오호, 숙소가 좋다. 사장님 옆집의 600페소짜리보다. 대나무로 한 동씩 멋지게 지은 카티지인데 문 바로 앞에는 해먹이 걸려 있고 응접실처럼 의자가 놓여 있다. 도마뱀들이 우글우글 기어다니는 것도 정겹고, 깔끔한 샤워실, 예쁘게 가꾼 화단도 맘에 든다. 저녁에 제프리가 준 다이빙 책을 예습하다가, 제일 경치 좋은 바에서 칵테일을 혼자 한 잔 마시고 일찍 잤다. 계속 밤낮으로, 주말에도 일을 하느라 얼마나 지쳤던가.
09.22 수
10:00am 다이빙 샵 도착.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은 오픈 워터, 오픈 워터 어드밴스트, 레스큐 다이버, 다이브마스터, 인스트럭터 코스, 이렇게 구성되는데, 오픈 워터 자격증을 따면 전세계 어디서든지 장비를 빌려 다이빙을 할 수 있다. 나는 그 동안 가난한 배낭여행객이어서 이런 비싼 레포츠는 엄두도 못 냈었는데, 직장을 다니다가 휴가를 오는 이런 안정된 여행은 다신 못 해볼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오픈 워터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제프리와 책으로 공부하고, 비디오를 보고, 시험을 쳤다. 영어로 쳤는데 만점! 야호! 배운 것을 얕은 수심에서 연습하고, 그 뒤에 배 타고 나가 깊은 수심에서 실제 다이빙을 하는 것. 이것이 다섯 번 반복되면 자격증이 수여된다.
첫 다이빙은 다들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던데, 나는 무서워서 얼른 올라갔으면 싶었다. 시작할 때 뱃전에 앉아 무거운 장비들을 하나둘씩 부착하고, 호흡기를 문 뒤 하나둘셋, 외치며 등 뒤로 머리부터 풍덩 빠져드는 순간도 어찌나 무섭던지. 하지만 배운 대로 내 몸은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고, 제프리와 손을 잡고 코와 귀의 압력을 맞춰주면서 천천히 밧줄을 잡고 18미터까지 내려갔다. 제프리는 내게서 계속 시선을 떼지 않고 격려를 하며, 손을 잡고 잘 이끌어줘서, 불가사리니 산호니, 이것저것 바닷속의 생물들을 만져가며 44분 동안 무사히 다이빙을 마쳤다.
이 다이빙 샵은 인심이 좋아서 계속 차와 맥주를 갖다주고, 점심까지 서비스로 준다. 마지막 일과를 다 마쳤더니 저녁 7시쯤. 제프리가 맥주 마시러 가자고 해서 해변 까페로 갔다가 제프리 친구인 캐나다인 랜디, 일본인 사토, 사토의 친구 둘과 합석했다. 일본인 둘이 떠난 뒤 제프리, 랜디와 함께 보라카이 최고의 피자가게라는 코코망가스로 트라이시클을 타고 떠났다. 칵테일 15잔을 연속으로 마시고 계속 서있을 수 있으면 벽에 이름을 새겨주고 기념 트로피와 티셔츠를 주는 재밌는 곳이었다. 춤출 수 있는 스테이지도 있었는데,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난리를 친다. 제프리가 돈을 다 냈다. 트라이시클 내린 데서 게스트하우스 오는 길을 잃었는데, 길을 물으니 필리핀 사람들 모두가 너무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한 아저씨가 게스트 하우스 앞까지 데려다줬다. 12시쯤 됐나, 책 좀 읽다가 잤다.
09.23 목
새벽에 비가 왔고, 미친 닭들이 떼거지로 울어대는 바람에 5시쯤 일어났나 보다. 뒹굴거리다가 또 자고, 해변을 거닐다가 적당한 데서 아침을 먹었다.
09:00am 다이빙 샵 도착. 제프리와 수다를 떨다가 또 공부, 비디오, 시험.
06:00pm 마지막 다이빙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눈부신 석양. 다이빙 샵 앞에서 정신을 잃고 있으니 제프리가 의자를 갖고 온다. 석양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랬나, 갑자기 우리는 친한 친구들처럼 마음이 열렸다. 제프리가 갑자기 과거 얘기를 해줬다.
제프리는 지금도 매너좋은 영국 신사이자 샤프한 교양이 빛나는 지성인 티가 난다. 그는 영국에서 사업을 하며 각종 문화 생활을 즐기며 즐겁게 살았는데, 부인이 직장 동료와 바람이 났다. 가슴이 찢어지던 그는 각종 자기 계발 워크샵을 쫓아다니며 마음을 추스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자 했다. 앤서니 라빈스의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는 내게도 엄청난 영향을 준 책이었는데, 그는 그 워크샵에까지 참석했고, 자기 소원과 비전을 쓰는 시간에 깊은 내면에서 올라오는 어떤 영상을 보았다. 야자수가 우거진 열대 해변에서 편안하게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얼마 후 그는 아주 우연히 보라카이에 왔는데, 그 때 석양을 보면서 맙소사, 이거 내가 꿈에도 그리던 그 장면 아냐, 하고 자신의 운명을 확인했다. 그 이후 보라카이에서 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따고 지금까지 7년을 머물렀다. 그동안 다이빙을 5000번 넘게 했고, 최고수심 95미터까지나 내려가봤고(레크리에이션 다이빙의 수심 한계는 40미터까지인데, 그 밑으로 내려가려면 질소 대신 헬륨을 넣은 탱크를 바꿔매야 하고, 잠수병에 걸리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한다. 세계 기록은 110미터라던가. 까불면서 기록에 도전하던 수많은 다이버들이 70, 80미터에서 죽었다. 제프리는 이 섬에서 가장 깊은 바닷속을 본 다이버라는 소문이 있다), 여러 명의 목숨을 살렸고, 한 달 전에는 대마초를 피운 후 미친듯 잠수하던 학생을 80미터까지 쫓아내려가서 구해냈단다. 그리고 잠수병에 걸려 2주 동안 거의 시체처럼 누워지냈단다. 그 뒤 나와 함께 첫 다이빙을 한 셈이다. 아이구, 황송해라. 그는 지금도 다이빙이 너무 좋단다. 그리고 보라카이야말로 지상천국이며, 자신은 너무나 행복하단다. 단 한 가지 문제라면, 여자 친구들이 너무 많다는 점.
같이 저녁을 먹고나니, 제프리가 라이브 까페로 가자고 했다. 오픈워터 다이버 자격증을 딴 나를 축하해준다며. 보라카이 최고의 가수라는 필리핀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수다를 떨었다. 그 때 오 사장님이 등장했다. 하루 종일 맥주 11병을 먹고 누워 자다가 나왔단다. 여기서 8년인가 지내며 제프리와 같이 강사 교육을 받았다는 오 사장님의 인생 역정도 참 재미있었지만, 한국인인데다가 정상인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기묘한 부분이 많아 내용은 생략.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다보니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적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각도의 반달이 이제 지려고 하는 시간이 왔다. 사방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지평선에 걸린 달이 비추는 수면이 너무 신비롭다.
“이런 밤엔 마닐라에서 보라카이로 오는 배를 타는 거야. 혼자 뱃머리에 앉아 있으면 완전 미치지.”
나는 혼자 물 앞에 서서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달을 보았다. 저 색깔만 품고 있으면 세상에 뭐가 힘들까...
새벽 2시쯤 돌아왔나 보다. 시계를 갖고 가지 않아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었으니. 히말라야 여행기를 읽다가,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책을 펼쳤다.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에 한번씩 꼭꼭 읽어주던 책, 그때마다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해주던 영감어린 책.
09.24 금
09:00am 다이빙샵 도착.
제프리와 오 사장님은 아침에 마닐라로 떠났다. 한국에서 친구들이 왕창 왔다며. 나는 오픈 워터 어드밴스트 코스를 하기로 했는데, 제프리 친구 캐나다인 랜디가 대신해주기로 했다. 제프리의 영국 발음이 익숙치 않아 못 알아듣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랜디는 말을 너무너무 빨리 해서 못 알아듣는 부분이 더 많다. 으이구...
랜디는 명랑만화 주인공처럼 쾌활한 사람이다. 62세인데, 배가 뽈록 나온 대머리. 입만 열면 농담에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다. 자기 얘기를 무지 많이 해줬는데, 정말 다이빙에 헌신해야 할 운명을 타고났나보다. 북극에 가까운 캐나다 지방에서 살았던 그의 가족은 너무나 가난해서 한 번도 차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늘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이동하며 살았다. 그는 4살 때 TV에서 바닷속 탐험 프로그램을 한 번 보았는데, 그 순간 “바로 저거다! 난 다이빙을 할 거야!”하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그 뒤로 매일 <씨한> 프로그램을 하는 주말만을 기다렸고, 다이빙을 하는 그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21년만 꿈만 꾸던 다이빙을 처음 한 건 25세, 취직하고 나서 월급을 받았을 때였다. 그때부터 그는 틈만 나면 다이빙을 했다.
그는 27세 때 알래스카에 놀러갔다가 17세의 순박한 에스키모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결혼해서 그가 살던 마을로 왔으나, 그 여자는 도시 생활을 하면서 사나워졌고, 술과 마약, 담배에 빠져버렸다. 랜디는 화가 나서 애들과 함께 잠시 도망을 쳐버리기로 했다. 그래서 우연히 보라카이에 왔는데, 헉, 이곳이 지상천국이었던 것이지. 그는 보라카이에 눌러앉아버렸고, 강사자격증을 땄고, 강사를 키워낼 수 있는 코스강사자격증까지 땄다. 그리고 20살 연하의 필리핀 여자와 결혼했다가 다시 이혼하고, 지금은 30살 연하의 필리핀 여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다. 여기서 릴랙스해서 사는 것이 너무 좋고, 아직도 다이빙이 너무 좋단다. 근데 필리핀 여자와 낳은 애새끼 밑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말레이시아에서 새로 다이빙 샵을 연다는 친구를 따라가기로 했단다. 전용 제트기로 골수 다이버들을 데려와 다이빙만 죽도록 하는 여행 코스라나.
랜디의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이상하게 제프리처럼 깊은 신뢰감은 들지 않는다. 그리고 자꾸 무서운 생각-입에서 호흡기가 빠져나가버리면 어떻게 되나, 건조한 목구멍이 어느 순간 말라붙어버리면 어떻게 되나(공기 탱크에서 나오는 공기는 습기가 전혀 없어 입안에 아주 건조해진다) 등등이 덮쳐왔다. 오전 다이빙 때 좀 먼 곳까지 나갔더니 배멀미까지 들었고, 호흡기에서 공기가 새는 바람에 겁까지 집어먹었다. 무사히 다이빙을 마치긴 했지만, 무서워서 오후에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일과 모레 2번씩 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만둬 버렸다. 좀 쉬면서 퍼져있기도 해야지, 안 그래?
해변을 걸어 게스트하우스로 가는데, 힘 좋아 뵈는 아줌마가 맛사지를 받으라고 한다. 그래, 그동안 너무 바빠서 맛사지도 못 받았네. 코코넛 오일을 바르고 맛사지를 받았다. 끝나고 나서 그 자리에 철퍽 앉아 아나벨이라는 맛사지 아줌마와 수다를 떨었다. 우리 다이빙 샵의 남자들에게도 들었지만, 필리핀 여자들은 정말 가족밖에 모르는 것 같다. 20대 초반에 결혼해서 다들 5,6명의 아이들을 주렁주렁 낳고, 외국인에게 고용되거나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꿈꾸며 적은 돈으로 근근히 산다. 손님이 없던 맛사지 아줌마들이 여럿 모여들어 수다를 떨었는데, 다들 내가 너무 신기한가 보다. 한국인이 왜 가이드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며, 왜 남들처럼 쇼핑이나 투어를 안 하며, 왜 영어를 잘 하며, 왜 바쁘게 돌아다니지 않고 필리핀 사람들과 퍼져 앉아 수다를 떠는지...
9.25 토
09:00am 다이빙 샵 도착.
다이빙이 처음으로 아주 익숙하고 재미있어진 날! 여러 번 해서 그런지 이제 마스크에 물이 들어와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불어내고, 호흡기가 빠져도 침착하게 다시 물 수 있었다. 물 속에서 나침반을 보며 길 찾는 것도 의외로 재미있었고, 무엇보다도 난파선 다이빙이 재미있었다. 망가진 배 속을 인어처럼 들락날락하며 신기한 물고기도 보았고, 뱃머리에 서서 타이타닉 흉내도 내보았다. 28미터까지 내려갔기 때문에 수심 5미터에서 체내에 스며든 질소를 뽑아내는 안전 정지를 3분간 해줬는데, 수면으로 떠오르는 순간, 정말 밖으로 나오기 싫었다.
해질 무렵 혼자 까페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그 옆의 바의 음악이 너무 좋아 또 퍼져앉아 망고 쥬스를 마시고 나오는 길에 제프리 친구로 소개받았던 일본인 사토를 만났다. 또다시 주저앉아 사토 옆에 앉아있던 벨기에 아저씨와 셋이서 수다를 떨었는데, 이 인간들도 제프리나 랜디와 비슷하게 산다. 이 사람들은 다 공통점이 있다. 괜찮은 직장에서 넥타이를 매고 일하며 돈을 잘 벌었지만, 보라카이에 온 순간 이곳이 지상낙원이군, 하면서 과거를 깨끗이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토는 도쿄의 한 백화점 구매부에서 일했던 깔끔한 샐러리맨인데, 역시 이곳에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필리핀 여자와 결혼해서 매일 친구들과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맑은 바다에서 노니는 맛에 산다. 이제 3년째인데, 10년을 채우면 호주에 가서 다이빙 샵을 열고 살아볼까 한단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 ‘돈보다는 릴랙스한 라이프 스타일을 선택했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선진국에서 아둥바둥 살다보면 이런 인생에 대해 꿈이라고, 도피라고 무시해버리겠지만, 이런 데 와서 퍼져사는 사람들을 만나 같이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면 이런 인생도 현실이 된다. 그리고 누가 뭐라든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재확인한다. 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따도 되고, 로컬 가이드가 되어도 되고, 조그만 가게를 열어도 되고, 하여튼 다들 잘 먹고 잘 산다.
인간들을 정착형 인간과 여행형 인간, 즉 유목민 내지는 집시로 나눈다면 나는 유목민에 속한다. 세계 어디에 가든 그런 인간들과 뭉치게 되는데, 정착형 인간들은 우리를 딱히 여기며 사회 질서에 해로운 인물들이라 생각한다. 여행병에 걸려 아까운 인생을 낭비한다고도 한다. <여행은 병인가?>라는 책을 써주고 싶다.
보라카이에 사는 외국인들은 천국에서 새 삶을 시작한 기쁨에 차 있어서 그런지, 맥주 한 병이 400~500원밖에 안 해서 그런지, 항상 서로 먼저 돈을 내고 사주려고 한다. 오늘은 또 벨기에 친구가 돈을 다 냈네.
사토상이 야간 다이빙에 대해 잠시 얘기해줬는데, 그 꿈꾸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랜디에게 내일은 야간 다이빙을 하자고 말해봐야지.
9.26 일
08:30 다이빙샵 도착. 이 가게의 최고참 매니저인 필리핀 아줌마 아나벨(우연히 그 맛사지 아줌마와 이름이 같다)이 마음에 들어서, ‘내일은 꼭 질펀한 수다를 떨어봐야지’하는 마음으로 잤기 때문이다. 아나벨은 키가 150도 안 되는 땅딸막한 아줌마로, 25살인데 딸이 둘이나 있다. 남편은 한국인에게 잘 보여서 마스터다이버 교육을 받고 다른 다이빙 샵에서 일하고 있다.
아나벨은 여기서 5년간 충심으로 일했기에, 5년간 월급이 두 배나 올라 현재 매달 85$나 받는다. 하지만 한국으로 가서 일하고 싶다고 한다. 공항 직원들, 휴양지 사람들, 택시 기사 등등 수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코리안 드림을 갖고 있다.
“만약 한국에서 일해서 3000$이 생기면 뭘 하고 싶은데?”
“조그만 땅을 사서 집을 짓고, 1층에는 구멍가게를 열고, 마당에는 돼지를 세 마리 키울 거야. 돼지는 3달만 있으면 몇 백 페소를 받고 팔 수가 있거든. 그러면 집에서 딸도 키울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아나벨은 뭐 하러 한국에 돌아가냐며 여기 눌러앉으라고 한다. 너도 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따고, 로컬 가이드를 하면 매일 석양을 볼 수 있으니 얼마냐 좋냐며. 자기는 섬에서만 살아서 잘 모르겠지만 외국인들은 다들 이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석양에 환장을 하며 눌러앉는데, 너는 왜 골치아픈 도시로 돌아가려고 하냔다. 자기가 휴가를 받는 날 자기 집에도 가고 여기저기 같이 놀러도 다니자며, 지금 당장 눌러앉지 못하면 한국에 들어가서 얼른 정리를 하고 나오라고 꼬신다.
오늘은 너무 작은 배를 타고 떠나서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뒤로 넘어지며 잠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장실 자세로 앉은 다음 앞으로 풀쩍 뛰어내리는 자세로 입수했다. 무서웠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스릴있군. 오전에는 표류다이빙을 했는데, 바다의 물이 두 섬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빠지면서 물 밑에 강한 조류가 형성되는 곳이었다. 15미터까지 잠수했네, 하고 컴퓨터를 보며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벌써 조류에 휩쓸려 있었다. 마치 로켓이 등에 달린 것처럼, 가만히 있어도 앞으로 죽죽 나아간다. 눈 밑에는 아름다운 산호초와 형형색색의 물고기들, 바위들이 지나가고, 어떤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는 몸은 삼매의 경지에 든 것 같다.
40분 정도 신선놀음을 하다 올라와 붉은 풍선을 올렸다. 우리가 물 속에서 2km 넘게 전진했기 때문에 배가 우리를 찾을 수 있는 신호를 올려야 한다. 랜디는 이제서야 말한다며, 작년에 자기 학생 하나가 이 코스를 하다가 조류에 휩쓸려 죽었단다. 우리는 수면에 15분 정도 둥둥 떠서 수다를 떨었는데, 몇 시간 정도 그러고 있어도 재밌을 것 같았다.
배를 타고 돌아와서 또다시 맛사지를 받았다. 그리고 한참 쉬다가 5시 반쯤, 다시 배를 타고 떠났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을 야간 다이빙으로 장식하다니, 난 정말 운이 좋다.
울긋불긋한 구름들 사이로 가라앉는 태양을 향해 한참을 달린 후, 태양이 수면으로 쑥 떨어지자 바닷속은 이미 검다. 이런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다니, 겁이 약간 난다. 우리는 팔뚝만한 후레쉬 하나씩을 켜고 입수했다.
아, 그 조용하고 신비로운 세계를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태고의 세계에 빛을 비추면 낮과는 다른 색깔이 그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바위산의 조그만 동굴 하나하나로 야행성 어종들이 왔다 갔다 했고, 운좋게 게도 여러 마리 발견할 수 있었다. 낮에는 웅크려있던 수초들이 마녀의 손처럼 아주 크게 부풀어있었다. 바닥에 정지하여 불을 껐다가 다시 켜니, 한참 후엔 각종 플랑크톤들이 빛 앞에 마구 모여드는 것도 신비로웠다.
수면으로 떠오르고 나니 내가 저 깊고 적막한 물에서, 저 어두운 곳에서 어찌 올라왔나 싶었다. 이미 사방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모레가 추석이니만큼 거의 보름달처럼 밝은 달빛이 바다 위에 가득하다. 배 여러 척이 달빛에만 의지해서 조용히 어디론가 미끄러지듯 가고 있다.
그와 함께 인도 식당에 갔다. 마룻바닥에 쿠션이 너무 안락해서 서양애들이 다들 바닥에 드러누워 천천히 먹으며, 수다를 떨며 인도 음악 속에 빠져 뒹굴고 있다. 제프리와 또 라이프 스타일에 관한 이야기를 한 뒤, 헤어져서 혼자 해변으로 나갔다.
밤바다를 혼자서 한 시간쯤 바라보았나. 원하는 대로 살아도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영감을 받았다.
9.28 월
어제 아침에 갔던 식당에 갔더니, 그 예쁜 소년이 “Breakfast again, Mom?"을 외치며 너무나 기뻐하며 맞아준다. 재래식 시장에 있어 외국인이 거의 가지 않는 필리핀 식당이다.
바쁜 와중에 혼자만 휴가 온 죄를 조금이나마 경감시키기 위해 우리 팀 사람들에게 줄 것들을 열심히 쇼핑하고, 자격증에 부착할 증명사진을 찍고, 시간이 남아서 해변을 따라 쭉 걸어보았다.
화이트비치의 오른쪽 끝은 보라카이가 개발되기 시작한 곳이지만 지금은 반대쪽이 더 개발되어서 상대적으로 휑한 느낌이 드는데, 난 왠지 이런 분위기가 맘에 든다. 좌우로 원시적인 조각들이 잔뜩 서있는 조그만 펍을 지나가다가, 그 분위기가 너무 신비로워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의자가 몇 개 없는 조그만 가게인데 히피스러운 장식과 아담한 분위기, 2미터 정도 되는 긴 파이프를 불고 있는 잘생긴 필리핀 청년, 북을 치는 아저씨가 너무 어울렸다. 맥주나 콜라라도 마시며 구경해야겠다 싶어 쓱 들어가 의자에 앉았는데,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거 참... 야릇한 인도 음악을 틀어 놓고 눈을 감은 채 30분 정도 연주를 하는 그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데, 엄청 멋있는 아저씨가 들어온다. 구릿빛으로 탄 온 몸이 내가 좋아하는 마르고 강한 근육으로 불끈거렸고, 긴 머리를 틀어올린 위에 빨간 꽃 한 송이를 꽂았다. 그가 무릎까지 오는 싸롱을 예쁘게 입고 왔다 갔다 하다가 잠시 미소를 지어보인다. 이곳 주인인 것 같은데 뭐 주문하겠냐고 물어보지도 않는다.
한참 그 분위기에 빠져 왜 이곳에 일찍 오지 않았던가, 이곳에 장기체류하는 외국인들은 정말 재미있는 인간들일 텐데, 하고 후회하다가 일어섰다. 그 때 그들이 말을 걸었다. 아하, 이들은 수줍었던 게로군. 파이프 불던 청년은 목공예품 디자이너, 북 치던 아저씨는 목공예품 만드는 사람. 낮에 일하다가 지겨우면 이렇게 모여앉아 논다고 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시 다이빙 샵으로 와서 제프리와 마지막 점심을 함께 먹었다. 아나벨이 빠른 시간 내에 꼭 다시 돌아오라길래 어쩌면, 그랬더니 제프리가 뽀뽀를 쪽 하며 어쩌면이라니, 하고 혀를 찬다. 소심한 내가 한심한 걸까. 잠시 놀러왔다가 가는데 손 흔들어주는 사람들도 있고 참 좋네.
03:30pm 까띠끌란 행 보트 승선,
04:10 까띠끌란 공항에서 수속
04:50 마닐라행 비행기 출발
06:00 마닐라 도착, 국제공항으로 이동, 너무 형편없는 공항 시설과 날 속이려는 공항직원들에게 잠시 분노하며 상관을 불러 신고하리라, 하고 찾아보았지만 그런 불편 신고 접수 시스템이 없는 낙후한 공항이라 그냥 책이나 읽고 앉아 있었다. 제프리가 시내에서 좀 놀다가는 게 좋을 거라고 했는데... 우이씨, 그 말 들을 걸.
12:30pm 마닐라 출발.
09.29 화
05:30am 인천 도착.
2.
마음을 강하게 먹고 다이빙을 더 많이 할 걸. 하루에 3번씩 해도 되는 것을!!!
Yapak이라는 다이빙 포스트에 못 가본 게 아쉽다. 120미터 절벽인데, ‘죽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란다. 작년에 독일인 다이버가 이곳에 갔는데, 마침 시야가 120미터까지 나오는 날이었다. 입수하자마자 밑바닥의 아름다움에 미쳐버린 이 독일인은 바닥까지 순식간에 내리꽂아버렸고, 그대로 죽어버렸다고 한다.
3.
가장 기억에 남는 곳과 것-앞에서도 썼던 표류 다이빙, 야간 다이빙. 사람들(제프리, 랜디, 오 사장님, 아나벨 등등)
4.
인천-마닐라 비행기표: 대한항공 마일리지가 쌓여서 보너스로 갔다. 공짜!
마닐라-보라카이 왕복 국내선 비행기표: 101$
다이빙 코스: 오픈워터 코스 285$+오픈워터 어드밴스트 코스 185$=470$
숙박비-500페소*6일=3000페소: 약 52$
식비, 자잘한 교통비, 공항세, 싸롱(치마) 두 벌(싸롱 두 벌에 450페소) 등: 약 43$ (나는 다이빙샵과 외국인들에게 여러 번 얻어먹어서 식비는 많이 절감한 듯)
===>6박 7일간 총 666$=약 766,000원 썼다. 혼자 갔으니 팁이나 바가지 이런 거 전혀 없다. 1페소는 약 20.5원.
5.
당연히 다이빙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지.
6.
필리핀 음식 자체는 별로 맛이 없었다. 나는 채식주의자라서 몽골리안 바베큐 같은 부페도 별로. 홍합, 작은 게 정도가 나오는 해산물 부페도 별로. 여기선 식욕도 없두만, 뭐.
7.
원래 쇼핑에는 관심도 없지만, 살 게 정말 없다. 해변에서 입을 만한 가벼운 옷 정도.
환전은 마닐라에서 하는 게 낫다. 보라카이는 환율이 안 좋다.
8.
없다. 눈이 나쁜 사람이 스노클링이나 다이빙을 하고 싶으면 콘택트렌즈나 도수에 맞는 마스크를 가져가면 편하다. 난 조그만 배낭 하나만 들고 갔는데 계속 속이 반 이상 비어있었다. 한국에서 옷을 가져가는 것보다 해변에서 예쁜 수영복이나 해변 냄새가 나는 옷을 사 입는 게 더 재밌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