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박상봉
햇빛 좋은 날
영남루에서 한 여자를 만났네
푸른 잎사귀 서늘한 그늘에
오래된 흙으로 이마를 덮고
그 여자 돌 속에 들어가 꽃이 되었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꾸부정한 등
햇빛이 부끄러워 고개 숙인 채
누각樓閣에 기대어 흐르는 강물 바라보는 동안
살아온 세월이 밑바닥 드러내고
대숲을 흔들며 기차가 지나가네
웃자란 슬픔 밑동 자르고
겨우 올려다보는 하늘
눈물의 깊은 속뜻 알 것 같은데
슬픔의 뒤쪽 풍경 가만 들추니
꽃숭어리 피어난 돌 속에
잠든 여자의 얼굴,
비와 바람 흐르는 물에 씻긴
투명한 주름살도 보이네
ㅡ 『물속에 두고 온 귀』46~47쪽
이윽고 세번 째 시집『물속에 두고 온 귀』가 나왔다. 엊그제는 갑자기 청도 유천의《카페1996》에 가서 미니 출판기념회를 가지게 되었다.
마침 선배 시인 이하석 선생님도 근자에 서사시집『해월, 길노래』를 펴내서 문우들과 함께 찾아뵈러 갔는데 같이 합동으로 출판기념회 갖자고 배려해주셔서 그런 자리가 마련되었다.
점심으로 내 고향 청도 화양 읍성 뒤쪽에 있는 식당 삼토리에서 인삼 토토리 수제비를 맛있게 먹고 밀양 8경 중 하나로 알려진 월연정을 돌아보았다.
월연정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유명한 명궁인 진주 월산서원의 후손인 월연이 건립한 것으로 1985년에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담양 소쇄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통 정원의 백미라고 하는데 부끄러운 시집 출판을 기념하는 이색적인 이벤트로 매우 과분한 자리였다.
시, 존재와 존재를 연결하는 작은 창문!
4부로 구성된 시집 『물속에 두고 온 귀』는 시인이 일상에서 매순간 마주하는 삶의 모습을 47편의 작품으로 담아낸다. 1부의 시들은 유년기에 잃어버린 ‘귀(청력)’를 향해 있다. “내 귀는 아이들 곁을 떠나지 못해 / 저 바다 깊은 물속에 산다”(「물에 잠긴다는 것」)면서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아득하고 막막한 시공간에 놓인 어떤 존재와 “내”가 어떻게 소통하고 이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럴 때 시는 존재와 존재를 연결하는 작은 창문이 된다.
박상봉 시인의 시는 세상과 인간 사이에 보이지 않는 비밀한 파장의 화음을 이야기한다. 그의 시에는 삶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 비밀을 엿보고 알아차리고 깨닫는 기쁨은 만만치 않다.
2부 이후의 시에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과, 그 인간 안에 깃들어 있는 또 다른 세상을 표현해낸다. “빗속에서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고 / 젖은 발목이 더 젖어 슬프기도 한 여름”(「여름비」)은 너무나 투명해서 오히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투명함 속에서 “물 밑으로 가라앉은 숫자들은 / 저녁이 되면 별이 되어 떠오”(「알츠하이머의 집」)르고, 이렇게 떠오른 별은 시인의 손끝에서 시로 다시 태어난다. 그 별은, 시인의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유년의 기억이다.
태양 속 아이들
박상봉
태양 속에서 아이들이 걸어나온다
집을 짓는다 나는 주소를 모른다 꽃밭을 만든다 꽃 피는 커피나무를 심는다 대문이 솟아오른다 각자의 집에 문패를 단다 골목길을 연다 강물은 그즈음에서 넘치고 모두 나와서 발을 씻는다 식구들은 괘종시계를 건다 지붕 위에 빨래를 넌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풍차가 무더기로 죽는다 눈은 종점에 내리고 13월에 꽃들이 피어난다 밀물의 방패를 들고 섬들이 밀려난다 바다가 뒤집힌다 아이들은 아프리카로 간다 무지개는 사막에서 온다 태양의 중심에서 별들이 풀려난다 방안으로 들어와 달빛은 슬피슬피 운다 이미 세상엔 태양이 없다 아이들의 종적도 알수 없다 빈방이 저혼자 집을 지킨다 둥근 물방울 속 잠은 흡반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결별한 어제를 빨아들이고 시냇물을 빨아들이고 싸리꽃 흙길을 빨아들이고 혓바늘 돋는 문장의 짧고 거친 호흡으로
구름 위를 걸어다니는 둥둥 울리는 북소리
ㅡ 『물속에 두고 온 귀』79쪽
시인은 잃어버린 시절의 기억으로 집을 짓고 “결별한 어제”를 “혓바늘 돋는 문장의 거친 호흡으로” 뜨겁게 받아 적었다. 시인의 내면에서 오랫동안 “갈 길을 잃어 불안한 꿈들이 / 혈관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비수를 / 꺼내어 들고 찾아가는 곳”(「물의 나라로」)은 시집 『물속에 두고 온 귀』에 깃들어 있는 세계이다.
이 시집을 펼치면, 박상봉 시인이 투명한 언어로 빚어놓은 일상적 삶의 진실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비밀스런 세계가 보여주는 신비로운 모습에 깊이 공감하게 될 것이다. (이경호 평론가 해설 중에서)
추천의 말
박상봉 시인의 시를 읽으면 가슴이 떨린다. 마치 내가 몰래 훔쳐보고 싶었던 연인의 일기장을 엿보는 듯하다. 그의 시에는 삶의 비밀이 숨겨져 있어 그 비밀을 엿보고 알아차리고 깨닫는 기쁨은 크다.
그의 시는 일상적 삶의 진실에서 나온다. 일상의 상처와 희망에 깊게 뿌리를 내린 그의 시는 인생의 신비에 가 닿아 있다. ―정호승(시인)
첫댓글 늘 정진하심에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이하석 선생님 온화한 모습에
반가운 아득함이 뭉클합니다.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