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꽃잎이 시들어도
김혜경
나들이는 남여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기분이 들뜨게 한다. 특히 철쭉이 만
발한 꽃 숲에 숨어드는 봄나들이는 더욱 더 맘이 설레 일수밖에 없다.
오늘은 수필 반 문우들이 모여 상당산성에 야외수업을 가기로 한 날이다. 모처
럼의 외출에 공연히 분주하다. 상당산성은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지만
내게는 친구들과의 깊은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다. 외지의 친구들이 오면
청주를 소개하기 위해 꼭 들르는 곳이다.
그 곳에서는 나이를 잊고 추억에 잠길 수 있을 것 같다.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친구들과 숨길 것 없이 속을 드러내고 잔돌 하나만 굴러가도 깔깔거리며 숨넘어가
게 웃고, 기억 속 그 누군가와 두 손 꼭 잡고 걸었던 소녀 시절의 추억이 자리 잡
고 있다.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단체로 봉고차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혼자서
드라이브를 즐기고 싶다. 맑은 공기도 들이 키고 박강성의 음악을 들으며 푸른빛
에 취해보고 싶다. 호숫가를 산책하며 멋진 시 구절 하나 건져내 볼 심산이고 보
니 영락없는 문학소녀가 된 듯하다.
산성의 공기는 늘 푸르고 달콤하다. 영산홍, 철쭉이 작년에 피었던 그 자리에 그
대로 고운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초롱초롱한 병 꽃이 그늘 속을 밝히고 모든 것
이 제자리를 지키며 봄 속에 영글어가고 있다.
안타깝게도 소나무 두 그루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제 목숨 다해가는 것을 알
았던지 무수히 많은 솔방울을 매달고 종족번식의 마지막 소임을 다하려 한다.
자연을 벗 삼아 글을 읽고 유쾌한 벗과 나누는 술잔 속에 인생을 담는다.
삶이 매일 이럴 수 있다면 작가들이 쓰는 글이 어찌 연애편지처럼 달콤하지 않
으리오. 모든 행사가 즐거이 마무리될 쯤 선물로 준비해간 양말 몇 켤레가 남은
모양이다. 얼핏 귓전에 연세 드신 분들을 드리자는 소리가 들린다. 화장실에 다녀
와 보니 내 가방 속에 양말이 들어 있지 않은가. 선물을 받고 이렇게 기분이 착잡
해보기는 처음인 것 같다. 몇 살이나 되었다고 어느새 연세 드신 분들 속에 들어
야한단 말인가.
버스 속에서 처음으로 어린 학생에게 자리를 양보 받은 느낌이 이런 것일까. 마
음 들떠 차려입은 연분홍빛 옷이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그 곳에 가면 소녀가 될
것 같았던 마음이 검게 시들어가는 소나무 위에 걸려버린 느낌이 든다.
집에 돌아와 심란한 마음으로 치자 꽃을 마주하고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있다.
치자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히 해주고 울화와 스트레스를 가라 안치는 효험이
있다고 한다. 하얀 꽃잎 속에 코를 묻고 열 번 스무 번 향기를 들이마신다.
두 손을 펴고 나이만큼 접었다 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한참을 접었다
펴야하니 나이가 많긴 많은 모양이다. 허긴 어느 장사가 세월을 이기리오 얼굴에
깊이 박힌 시간의 흔적을 무슨 재주로 감출 수 있으련가. 쪼그려 앉았다 일어서려
니 허리도 무릎도 우지직 버거운 소리를 지른다. 힘겨워 휘청거리는 육신을 꽃분
홍 입성으로 가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서산에 해가 이운다. 붉은 비단을 걸치고 있어도 이미 저무는 석양일 뿐인 것을.
허나 가슴에 담은 정열을 다 태우지 못해 마지막 열정을 저리 붉게 토해내고 있음
을 누가 알리오.
산성에 두고 온 소녀의 마음이 이 가슴속에선 아직도 꽃 분홍인 것을.
첫댓글 서산에 해가 이운다. 붉은 비단을 걸치고 있어도 이미 저무는 석양일 뿐인 것을.
허나 가슴에 담은 정열을 다 태우지 못해 마지막 열정을 저리 붉게 토해내고 있음
을 누가 알리오.
산성에 두고 온 소녀의 마음이 이 가슴속에선 아직도 꽃 분홍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