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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교차
내밀함의 경계를 밀고 나아가는 글쓰기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와
사회학자 로즈마리 라그라브의 심도 깊은 대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프랑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아니 에르노와 사회학자 로즈마리 라그라브의 대화를 묶은 『아니 에르노의 말』이 출간되었다. 두 여성은 2021년과 2022년, 두 번에 걸쳐 ‘페미니스트 계급 탈주자들의 경험과 글쓰기’라는 주제의 좌담에 참여하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좌담을 주관하고 함께 참여했던 학자들은 이를 편집,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에르노와 라그라브는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분석을 시도하면서 여성이자 작가, 학자로서 공감을 주고받았고, 문학과 사회학, 젠더,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며 깊은 대화를 나눈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은 대부분 자신이 직접 겪은 일에 대한 내밀한 고백인 동시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위치 지어지는지 예리하게 해부하는 글쓰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많은 사회과학 연구자의 관심을 받아왔고, 아니 에르노 스스로 사회학, 특히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책에서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글을 자전적인 관점 및 사회적 구조 속에서 짚어나가며, 사회학자인 로즈마리 라그라브와 자신의 글쓰기에 깃든 공통점과 차이점을 흥미롭게 분석한다. 문학과 사회학이 관계 맺고 있는 방식을 논의하는 두 여성의 대화를 통해, 아니 에르노의 삶과 작품 세계뿐 아니라 문학이 지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면모까지 살펴볼 수 있다.
:내 책들은 일종의 사회의 호명interpellation이자 그 기능 작용이라는 점에서 단 한 번도 문학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아요. 혹은 문학적으로만 받아들여진 적이 없죠. 문학적인 이유를 내세워서 내 책들에 반감을 표하지만, 사실상 그건 문학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니까요." - 본문에서
👩🏼🏫 저자 소개
아니 에르노
1940년 9월 1일 프랑스 릴본에서 태어나 노르망디 이브토에서 성장했다. 프랑스 작가이자 문학교수이다. 루앙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한 뒤 중등학교 교사, 대학 교원 등의 자리를 거쳐 문학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자전적 요소가 강한 그녀의 작품들은 사회학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노르망디의 소읍 이브토Yvetot에서 보냈고, 노동자에서 소상인이 된 부모를 둔 소박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루앙 대학교를 졸업,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하여, 정식 교원, 문학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사회에서 금기시 되어온 주제들을 드러내는 '칼 같은 글쓰기'로 이를 해방하려 노력해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4년, 자전적인 소설 『빈 장롱Les Armoires vides』으로 등단했고, 1984년, 역시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남자의 자리La place』로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2008년, 전후부터 오늘날까지의 현대사를 대형 프레스코화로 완성한 『세월들』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했다. 2011년, 자신의 출생 이전에, 여섯 살의 나이로 사망한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인 『다른 딸L'autre fille』을 선보였고, 같은 해에 12개의 자전 소설과, 사진, 미발표 일기 등을 수록한 선집 『삶을 쓰다Ecrire la vie』를 갈리마르 Quarto 총서에서 선보였다. 생존하는 작가가 이 총서에 편입되기는 그녀가 처음이다. 2003년 자신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 문학상이 탄생했다. 2020년 『삶을 쓰다』에 실렸던 글들을 추려서 재수록한 『카사노바 호텔』을 발표했다.
데뷔 시절부터 아니 에르노는 노르망디의 소읍 이브토의 카페-식료품점이었던 자신의 유년 시절로 구성된 자전적 소재에 몰두하기 위해 모든 픽션을 포기했다. 역사적 경험과 개인적 체험을 혼합한 그녀의 작품들은 부모의 신분 상승(『남자의 자리』, 『부끄러움』), 자신의 결혼(『얼어붙은 여자』), 성과 사랑(『단순한 열정』, 『탐닉』), 주변 환경(『밖으로부터의 일기』, 『바깥세상』), 낙태(『사건』), 어머니의 치매와 죽음(『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한 여자』), 심지어 혹은 자신의 유방암 투병(『사진의 사용』, 마르크 마리 공저)을 소재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해부하였다.
그녀는 “판단, 은유, 소설적 비유가 배제된” 중성적인 글쓰기를 주장하면서 “표현된 사실들의 가치를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는 객관적인” 문체를 구사, “역사적 사실이나 문헌과 동일한 가치로 남아 있기를” 소망한다. 에르노에게는 “자아에 내재된 시적이고 문학적인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글쓰기는 “문학적, 사회적 위계를 전복하려는 의도에서 출발, 문학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대상들 ― 슈퍼마켓, 지하철 등 ― 에 대해, 이것보다 고상한 대상들 ― 기억의 메커니즘, 시간의 감각 등 ― 을 서술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그 둘을 결합하여” 글을 쓴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생각할 때 썼던 그 단어들을 되찾는 일이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개인의 기억 속에서 집단의 기억을 복원”하려는 사회학적 방법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개인성의 함정”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노력의 산물인 그녀의 작품은 자전의 새로운 정의를 부여했다.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에 타인들, 법,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아니 에르노는 사회학자의 방법론을 채택, 자신을 집단적 표본과 특성을 체득한 한 체험자의 총합으로 간주한다.
“나는 나를 특수한 존재로서, 절대적으로 특수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나 자신을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 나는 나를 사회적, 역사적, 성적 경험과 판단의 총합, 언어의 총합, 또한 세계(과거와 현재)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특수한 주관성을 형성하게 된 총합으로 간주한다. 나는 나의 주관성을 보다 일반적이고 집단적인 메커니즘과 현상을 되살리고 그것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다.
” 그녀에 따르면 사회학적 방법은 전통적으로 자전적인 ‘나’를 넓힐 수 있는 방법이다. “내가 사용하는 나는 비인격적 형태를 띄고 있다. 성별도 애매하고, 종종 나의 말이기보다는 타인의 말일 수도 있는, 전체적으로 다인격적 형태이다. 그것은 나를 픽션화하는 수단이 아닌, 내 체험 속에서 현실의 지표들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로써 그녀의 작품은 자신의 궤적의 “사회적 이종교배”(소상인의 딸에서 학생, 교수, 이어 작가가 된)와 그에 따르는 사회학적 메커니즘을 다루고 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망을 접하고 [르몽드]지에 애도의 헌사문 「부르디외, 회한」을 기고하면서 사회학적 방법론과 자신의 작품 사이의 유대감을 밝혔고, 부르디외의 글이 그녀에게 “자유와, 세계 펼에서의 실천이성과 동의어”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로즈마리 라그라브
프랑스의 사회학자. 1944년, 파리에서 태어나 노르망디에서 자랐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의 연구책임 교수였으며, ‘젠더, 정치, 섹슈얼리티’라 는 석사과정을 개설하기도 했다. 『스스 로를 가누다Se ressaisir』 등의 책을 썼다.
📜 목차
서문│자기 인정 그리고 참여―사라 카를로타 헤쉴러, 클레르 멜로, 클레르 토마젤라
이 책이 나오기까지
대화
발문│대화를 이어가기― 폴 파스칼리
옮긴이의 말│‘밋밋한 글쓰기’의 사회학: 상속자와 계급 탈주자, 그리고 남성 지배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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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으로
어쨌든 난 그때 내 책의 대상, 그러니까 지금이라면 ‘계급 탈주자가 지나온 경로’라고 부를 그것이 여성에 국한된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 p.39
버지니아 울프 얘기도 하지 않을 수 없죠. 나는 『자기만의 방』은 마흔 살이 돼서 읽었지만, 『댈러웨이 부인』과 『파도』는 글을 쓰기로, 소설을 써보기로 결심했을 때 읽었어요. 소설가로서 버지니아 울프는 남자들이 지배하던 문학사에서 등대 같은 존재였죠. 나에게 자극과 힘을 주었어요. 버지니아 울프가 해냈으면 나도 해낼 수 있다! 글을 쓸 수 있다! 이런 거죠.
--- p.49
『얼어붙은 여자』의 출발에는 일상 속에서 불쑥불쑥 솟아오르면서 점점 더 강박적이 되어간 한 가지 생각, 나에게 글을 쓰라고 부추기던 그 생각이 배어 있어요. ‘나도 직업을 갖고 일을 하는데,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을 여기저기 데려다주고 병원에 데려가는 건 언제나 내 일이다. 난 단 한 번도 혼자 극장에 가지 못하고, 남편이나 아이들 없이는 휴가를 떠나지 못한다’ 이런 생각이죠. 내가 상상하던, 스무 살의 내가 바라던 삶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바뀌고 말았을까요? 난 그 답을 알아요. 간단해요. 내가 대대로 상속된 가부장제를 대표할 만한 남자와 부르주아적인 결혼을 했기 때문이죠. 나는 당신의 아름다운 책의 제목처럼 나 스스로를 ‘가누기’ 위해서 글을 썼지만, 또한 나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서, 희미하게나마 변화를 촉발하기 위해서 한 일이기도 해요. 책이 출간되고 1년 뒤에 남편과 헤어졌고요.
--- p.55~56
보편적인 페미니즘은 불가능해요. 페미니스트 투쟁을 사회 투쟁과 분리할 수 없죠. 나에게 교차성은 명백한 일이에요. 여자들은 어떤 사회계급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인종화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남성 지배라는 조건을 같은 방식으로 겪지 않으니까요. 내가 겪고 분석한 체험들에 근거하는 확신이죠.
--- p.61
부르디외를 필두로 한 남자 계급 탈주자들이 남성의 특권에 대해 충분히 자문하지 않았다는 건 나도 자주 하는 생각이에요. 그 문제에 관해선 책을 한 권 쓸 만하죠! 지식인이든 예술가든 정치가든, 남자들은 보통 남성의 조건과 남성다움에 대해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 p.64
『빈 옷장』의 경우는 아무도 모르게,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썼어요. 책 내용이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폭력적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죠. 그래도 흔들림 없이 썼어요. 다 쓰고 나면 출판사에 보내게 되리라는 것도 알았고요. 그 글이 출간되리라는 생각이 어째서 단 한순간도 날 멈춰 세우지 않았을까요? 텍스트의 힘, 글쓰기 자체의 장악력 때문이에요. 텍스트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 텍스트가 내 안에서 만들어내는 발견들, 드러내는 진실들이 힘을 발휘하는 거죠.
--- p.73
생각해봐요. 교실에 들어가고, 노르망디 말을 쓰고, 빌어먹을 억양이 있고……. 그런데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이해가 가요?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말 때문에 ‘지적’받았어요. 그 안에 얼마나 큰 폭력이 들어 있는지 생각해봐요. 심지어 2학년 때까지도 그랬죠. 말하는 방식뿐 아니라 소위 ‘천박한’ 태도도 지적받았어요. 하지만 그 천박함이 이미 당신 몸에 배어 있는 거고, 당신 부모의 것이고, 그래서 당신한텐 천박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세상이라면? 몸에 밴 것들을, 말하는 방법을 모두 바꿔야 한다는 거죠.
--- p.98~99
거의 모든 계급 탈주자들이 스스로 부당하게 누리고 있다고 느껴요. 반면 지배계급 출신의 사람들은 자기가 인정받을 자격이 있는가 아닌가에 대해 결코 질문을 제기하지 않죠. 그들은 ‘저절로’ 정당하니까요.
--- p.100
나는 늘 교사라는 직업을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직업으로 받아들인 것 같아요. 단지 은퇴할 때까지 가르치는 일과 글 쓰는 일을 화해시키기는 쉽지 않았죠. 내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내가 ‘글을 써서 먹고살기’를 거부하게 된 데에는 아마도 기적이 멈출지 모른다는, 다음번 책은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을 거예요. 사실 지금도 난 내가 쓰는 글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갖는지 확신이 없거든요. 독자들의 반응이 그에 대한 유일한 증거가 되죠. 그리고 나보다 앞선 세대들, 노동을 해야만 가난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세대들의 기억도 고려해야 해요. 나는 바로 그런 세대 속에서 자라났으니까요. 가난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거죠.
--- p.117
🖋 출판사 서평
시대와 긴밀하게 호응하는 작가,
아니 에르노의 문학과 계급의식
‘체험하지 않은 현실은 쓰지 않겠다’라고 이야기했던 작가 아니 에르노는, 사회와 역사, 개인의 관계를 파헤쳐 건조한 문체로 서술하는 특유의 글쓰기로 평단과 독자의 찬사와 논쟁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곤 했다. 『아니 에르노의 말』에서 에르노는 작품을 쓰던 당시의 경험과 시대적 배경을 함께 이야기하며, 사회 변화 속에서 자신의 작품이 어떤 위치에 놓였는가에 대해 흥미롭게 들려준다. 출간 당시 20만 부 넘게 팔리며 폭발적 반응과 논란을 일으켰던 『단순한 열정』(1991)과 달리, 『사건』(2000)은 2만 부에 불과했으며 반응 또한 대부분 무관심이었다. 그러나 20~30여 년이 지나 두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영화화되었을 때, 『사건』을 각색한 영화 〈레벤느망〉은 임신중지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란이 일었던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커다란 반향을 불러왔다. 여성이 처한 사회적 조건들에 대해 일찍이 예민한 시선을 지니고 있던 아니 에르노는, 스스로의 자각에 ‘독서’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자신에게 충격을 안긴 첫 번째 책으로 꼽는다. 이밖에도 에르노와 라그라브는 버지니아 울프, 마르그리트 뒤라스, 도리스 레싱도 언급하며 남성 위주의 문학사에서 길을 찾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나를 키운 책들이라면 당연히 『제2의 성』부터 꼽아야 해요. 열여덟 살의 나에게 결정적인 발견이었죠. 그때까지 난 남자 여자의 관계에 대해, 여자들이 처한 조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상태였거든요. 남자들과 함께 있기가 왜 그렇게 불편한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런 나에게 『제2의 성』은 마치 환한 빛 같은 책이었죠. 좀 서정적인 표현일 수는 있지만, 정말로 루앙에서 이제르 대로를 걸어 내려갈 때 느낀 그 감정이 아직도 분명하게 기억나요. 보부아르의 가차 없는 증명이 나의 세계관을 찢어버린 거죠. 사회가 성차로 구분되어 있고 남자들이 특권을 누린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순간 얼마나 흥분되던지……. _본문에서
아니 에느로와 로즈마리 라그라브는 둘 다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태어났고 비슷한 나이인 데다, 서민에서 부르주아로 계급 이동을 경험한 ‘계급 탈주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소상인의 딸이었던 에르노는 사립 가톨릭 학교를 다니며 부르주아 계급과 자신이 속한 서민 계급 사이에서 자주 ‘분열’을 느끼곤 했다. 피지배 계급 출신 여성이라는 자의식을 지닌 에르노에게 문학은 결코 정치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고, 지배계급에 맞서는 무기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아니 에르노는 엘리트의 언어가 아닌 출신 계급의 언어를 사용하여 이른바 ‘밋밋한 글쓰기’를 시도했는데, 이는 보수적인 문학의 관점에서는 일대 파격이었다. 그러나 기존 질서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니 에르노는, 지배계급의 교묘한 차별을 폭로하고 진실을 드러내며 그만의 독보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 라그라브는 그런 에르노에게 “당신의 책들은 우리에게 든든한 고리이자 버팀목”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아무리 그래도 난 오랫동안 배신의 느낌을 떨칠 수 없었죠. 그나마 지금은 조금 덜해졌어요. 왜 그럴까요? 글을 쓰기 때문이죠. 난 젊을 때부터 “나의 종족의 복수를 위해 글을 쓰겠다!”는 바람을 지녔고, 그래서 내가 쓰는 책들의 내용과 형식이 그 목적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게끔 해야 했어요. 처음 만난 세계의 경험을 글쓰기가 최대한 직접적인 방식으로 전달해야 하는 거죠. 내 책들이 다른 사람들의 의식을 만나기도 하고, 묻혀 있거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솟아오르게 만들기도 했을 거예요. 내가 정말로 배신을 했다면, 그런 식으로, 그러니까 글을 씀으로써 속죄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_본문에서
“난 노년이 향유의 시기가 되면 좋겠어요.
다시 말해서 끝내겠다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싶어요”
두 여성이 나누는 노년에 대한 생각
사회적 계급과 자전적 글쓰기,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치열하게 전개되던 아니 에르노와 로즈마리 라그라브의 대화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노년’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어느덧 노년에 다다른 두 여성은 자율성이 약해지고 있는 몸의 변화를 깊이 인식하고 이에 대해 털어놓는다. 죽음을 금기시하거나 생물학적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대신 사회학적인 시선으로 관찰하며 사유를 주고받는다. 자신의 노화 경험에서 출발한 이러한 사유는 “고통과 쇠락밖에 남지 않았을 때 그만 끝내겠다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 공통적으로 이어진다. 페미니스트로서 ‘자발적 임신 중단’의 권리를 외쳤던 그들이 ‘자발적 노화 중단’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삶에서 가장 강렬했던, 가장 충만감을 느꼈던 시기는 마흔다섯 살에서 예순 살 사이 같아요. 로즈마리, 난 당신과 달리 늙기를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은퇴를 준비하고 해오던 일을 일찍 중단할 수는 있지만, 10년 뒤, 20년 혹은 30년 뒤의 우리 몸과 마음을 미리 겪을 수는 없으니까요.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으리라 예상한다 해도, 노년을 위해서 집 안을 개조해도, 물론 안 한 것보다 낫겠지만, 별 소용이 없죠. 어차피 노년은 갑자기 닥치니까요. 그냥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야 해요. _본문에서
『아니 에르노의 말』은 예리한 시선으로 논쟁적인 작품을 내놓았던 아니 에르노의 작가적 면모뿐 아니라, 사회문제에 참여하고 여성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페미니스트로서의 근원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동시대 작가로서 아니 에르노가 던지는 주제들이 유효할 수 있는 이유는, 개인의 정체성이 실존적 선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들과 맞물려 있는 것임을 일깨우는 엄정한 인식과 성찰에 있다. 그 성찰은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유의미한 사유의 나침반을 제공한다. 또한 명징하고 명료한, 아니 에르노의 육성을 통해 그의 작품들을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