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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통학의 추억(1편)
오늘 고등학교 친구 결혼식에 갔었는데 10여명의 동창들이 모였다
어떻게 이야기 하다 보니 어 이 자리에 정읍선(호남선: 익산 - 정읍) 통학차 타고 학교에 다니는 놈들이 많네 너는 신태인
에서 탓고 너는 김제에서 탓지, 응 그리고 너는 감곡에서 탓나 너는 마지막 역인 부용역(호남선 익산에서 김제 방향
첫 번째 역으로 지금은 열차가 정차 하지 않은 간이역으로 되었음)에서 탓지 하면서 옛날 학교에 에 기타 통학을 했던
이야기를 한참 했다
이런 이야기 중에 옛날 열차 통학했던 일이 생각나 한번 적어 봄 니다
이 이야기는 65년도 중학교 들어 갔을 때 이야기니 50년 전으로 거슬러 간 이야기이다
같이 다녔던 학생들의 기차 통학의 목적지는 전북 이리(현재 익산이다) 그당시 전라북도에는 3개의 큰 도시가 있는데 제일
큰 도시는 도청 소재지인 전주 그리고 다음 큰 도시는 항구 도시인 군산 그리고 제일 작은 도시는 이리였다 그 당시 도시는
시 단위가 도시다 나머지 읍 소재지는 그런데로 시장도 있고 도시 답기는하나 나머지 면 지역은 소 달구지 가 황톳길을
오가는 완전 깡촌이나 다름 없다
지금은 모든 인구가 도시로 몰려 들어 도시는 비대해지고 농촌은 사람이 살지 않고 노인네들 몇 명만 마을을 지키고 있지만
40~ 50년대에는 농촌에 인구가 도시 인구보다 훨씬 많았다 그 당시 전주 인구가 10만이나 되었는지 모르겠고 익산은 2만 정도
그 인구면 요즘은 어디 서울근처 대 단위 아파트 단지만 못한 인구지만 그 당시 2만명은 엄청 큰 도시이다
그 당시 이리라는 도시의 특징은 전라북도에서 철도교통 중심지였다
이리를 중심으로 기차가 대전, 목포, 전주, 군산 4개 지역에서 기차가 왔기 때문에 그 당시 버스도 별로 없고 오직 탈 것이라고는
기차 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그러니 기차는 얼마나 크고 사람과 화물을 대량 수송 할수 있는 운송수단인가 농촌에서는 탈 것이라고는
소달구지만 있었을 시절이지
그때 이리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학교가 많은 게 특징이었다
인구는 2만명 정도 얼마 되지 않는데 중학교가 10개 고등학교가 10개 대학교가 2개 이렇게 많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이리
시내에 집을 가지고 집에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 시골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거나 기차를 타고 학교에
다닌다 그 시절 버스는 몇 대 다니지 않았고 대부분 학생들이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하던 시절이다
그 당시 익산 상주인구가 2 만명으로 알고 있다 익산의 인구가 다소 특이한 것은 낮에 인구와 밤에 인구이고 배 차이가 난 다고 한다
(엇그제 어느 동창이 이야기를 하였지 주진형이가 했나) 낮에는 인구가 4만명으로 늘어 났다 밤에는 2만명으로 줄어 든다는 이야기
다 이 2만명이 시 외곽에서 드나드는 학생들일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대충 학생수를 어림 잡아 보면 중학교 한 학교 한학년이 500명을 뽑았으므로 중학교 한 학교 3학년이니 한 학교
전 교생이 1500명 중학교 10개 있으니 15000명 고등학교는 중학교 학생 수보다 조금 적으니 10개 학교에 10000명 그러니 이중
5000명 정도는 시내서 다니고 나머지는 버스를 타던 자전거를 타던 기차를 타던 시 외곽에서 들어오니 밤과 낮의 인구가 배 차이가
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아침 통학차는 대전,정읍. 군산, 전주등 4 개 지역에서 약 5분 ~ 10분 간격으로 이리 역에 들어 온다 한 개 열차만 들어 와도
빠져 나올려면 역구내 지하 통로를 거쳐야 하는데 지하 통로가 막혀 역을 빠져 나올수가 없을 정도인데 한 개 노선 통학열차가
늦어 2 ~ 3개 열차가 한꺼번에 도착 한면 역 전체가 학생들로 꽉 들어 찰 뿐 만아니고 이때는 이리 시내 도로 전체가 학생들로 들어
차 붐비게 될 정도이다 그때 학생들은 모두 교복을 입었기 때문에 겨울에는 검정 교복 입은넘들이 시내를 꽉 메우므로 시내 전체가
완전 까만 색갈이다 이때 통학열차에는 99% 가 학생이다 익산 시내에 직장이 있어 열차를 타고 출근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아마 시내에 일찍 볼일이 있어 타는 일반인들 몇명만 탄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기차 통학을 하니 학교에서도 아침 통학 기차가 늦게 도착 하면 학교에서 수업을 할 수 없을 정도 학생들이
텅텅비어 통학차가 도착해야 수업이 진행될 정도이다 그러니 학교 별로 열차 통학생 지도 교사가 있어 등하교시 학생 지도나 안전을
지도 한다 물론 등교시는 학교에 오느라 학생들이 한눈팔 시간이 없이 학교에 오지만 하교시는 열차 기다리는 시간동안
시간이 있어 나쁜짓도 할수가 있으니 하교 지도는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았다
그러니 학교에서 오후에 보충 수업도 늦게까지 할 수가 없다 대부분 학생들을 태우고 갈 기차는 6시 정도에 이리역에서 출발을 하니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이 기차를 탈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기차를 놓치면 집에 갈수가 없다 다음 기차는 밤 10시나 새벽에 있으니
그걸 타고 집에 갈수가 없다 왜 냐 하면 기차를 타고 적게는 20분 많게는 1시간을 타고 목적지에 가면 차에 내려서 역전 코 앞에
집이 있나요 또 보통 2 ~ 3 KM 걸어 가야 집이 나오기 때문에 통학생들에게 통학차를 놓친다는 것은 대책이 전혀 없기 때문에
기차를 놓친다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다 역시 통학생들에게는 아침에도 통학차를 놓칠 수 없는 일은 마찬가지이고
그 당시 통학차 놓쳐 학교를 못가면 걸어서라도 가야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기차를 탄다
아침 통학차 타는 일은 정말 목숨을 거는 일이다
음.... 나 같은 경우 통학열차 는 통학차가 정읍에서 올라온다 그 당시 통학열차는 화물 열차와 여객역차가 같이 연결된 여객과
화물 혼합 열차였다 물론 기관차도 60년대 중반에는 석탄을 때는 시컴한 증기 기관차 가 운행 되었을 때입니다 지금 생각 해보면
화물열차가 목포에서 새벽 3 ~ 4 시경에 출발 하여 정읍에 도착 하면 정읍에서 화물열차에 여객 열차를 연결하여 올라 오는 시스템
인 듯 하다 그러니 정읍에서부터 학생들이 열차를 탄다 처음으로 사람을 태우므로 거기에서 타는 학생들은 모두 자리를 잡아 않아
온다 다음에 서는 역이 초강, 신태인 감곡 김제 와룡 그리고 마지막 역인 부용역에 도착 하면 여객 객차 안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이
학생들로 꽉 들어 찬다 열차를 타야 하는데 객차 안에 들어갈 수는 없고 학교는 가야 하고 그래도 객차 화물차 같이 연결 하고
다닐때는 객차에 못타면 화물칸에도 올라 탈수 있었는데 어느때인가부터 화물차는 없애 버리고 객차로만 운행 한다 그 당시
통학열차는 객차 8량을 달고 운행하는데 그때로서는 증기기관차로서 객차 8량을 끈다는 것은 가장 많은 열차를 달고 운행하는
것으로 아마 증기 기관차가 그 무게에 많이 보대꼈을 것이다
객차만 달고 오니 이제 화물칸에 탈수도 없고 죽으나 사나 객차 승강기를 매달려 오는 수밖에 없다 마지막역인 부용역에 타는 학생
들만 약 400명 이 타야 하는데 이미 이전 역에서 탄 학생들로 객차 입구 까지 만원이 되어 도착하는데 부용역에서 타는 학생등을
어디 들어 갈수가 없다 그때도 머 여학생들도 많고 중학생들도 많다 그런데도 차에 오르기 힘들지만 먼저 여학생들이 먼저 타고
다음 중학생이 겨우 올라타고 마지막에 고등학생들 차에 매달리단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객차 내에 들어 가지 못하고 승강대에
매달려 야하는학생들이 하나의 승강대에 7~ 8명 정도 잡으면 한 객차가 한쪽 승강대가 2개 그리고 8량의 객차면 16개 승강대에
10명정도 매달리면 120 ~ 130 명 많게는 150명정도가 기차에 매달려서 학교에 간다
지금 같으면 상상 할수도 없다 요즘 객차는 승강대 열차 문이 저절로 닫히고 닫히지 않으면 열차가 출발을 하지 못하니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열차 승강대에 매달려 다니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 천만하게 학교에 가는 것이다
요즘 학부모 같으면 자식을을 얼마나 똥 단지 같이 여기는지 아마 이렇게 학교에 간다고 하면은 학생 본인은 학교 안가겠다고
억지를 부릴 것이고 이렇게라도 학교에 간다는 학생들이 있다면 그 부모가 학교에 보내겠어 아마 하숙을 치라 하던지 외국에 보내지 않을 까 생각 된다
앞서 이야기한바와 같이 목숨을 걸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다 이러한일을 하루 이틀 만 하나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6년을 거쳐야 이러한 통학열차를 타는 일이 끝나는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위험하게 기차를 타고 다니니 1년에 몇 번씩은 달리는 열차에 떨어 져 죽는 학생들도 생기게 마련이다 이렇게
죽어 가도 머 철도청에서는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다 모든 물자가 부족한 시기이라 머 철도청에서도 기관차나 객차가 여분이
있을 수가 없으니 달리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그냥 현행대로 열차가 운행 된다
열차는 부용역에서 출발 하면 익산 역까지 약 8 km를 가야 하니 걸리는 시간은 아마 15분 내외 였을 것이다
매달려 다니는 것은 무척 위험 하다 당시 증기 기관차라고 하나 김제 익산 은 산이 없어 모두 평야지인 논바닥을 열차가 다니므로
요즘같이 100KM 이상은 달릴수가 없어도 아마 증기기관차가 달릴 수 있는 초고 속도를 낼 수 있을 터이니 (아마1960 년도 말 경에
디젤 기관차로 모두 바뀌었다 디젤 기관차에 미국과 한국이 손을 잡고 있는 아마 미국 원조 기관차였 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10여분 열차에 매달려 가다 떨어지면 아마 70 ~ 80% 는 사망일 것이다 제일 위험한 것은 역사 밖으로 열차가 빠져 나갈
때와 역에 진입할 때다 그 위험 요인은 수동으로 열차 선로를 변경하는 전철기 (그 당시는 포인트라 하던데) 다 학생들이 매달린
상태로 열차가 전철기를 지나가면 학생들의 허리에 그 전철기가 닿는다 지나갈 때 어떻게 해서든지
허리를 안으로 밀어 들여 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곳에 허리가 부딧치게 되면 어떻게 되겠나요 최하가 허리가 부러지고 촤악은
죽는 것이지 엄청 위험 !!! 그런데 그 곳에 부딧쳐 다치거나 죽은 학생들 하나도 없었음 맨 날 매달리고 다니므로 그 위험을 인식하
고 있어 본능적으로 조심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다른 위험 한 것은 익산 들어 가지 전에 만경강 철교가 있는데 아마 길이가 500M 정도 되는 엄청 긴 철교가 있다
열차가 통과 하는데도 시간이 솔찬하게 걸릴 정도 , 여기서 추락 하면 엄청 높은데서 떨어지고 재수 없으면 물속에 들어 가니
더욱 위험한 장소 인데 여기게 추가 되는위 험 요소가 머가 있냐 하면
열차가 철교에 진입 하면 열차 선로 보수원이라든지 일반인들도 가끔 철교를 건너너다가 열차가 오면 대피 하라고 설치한 난간이
있는 대피 장소다 이곳도 난간이 열차와 가까워 승강대에 매달려 가면 난간이 허리에 닿을 정도라 위험 한데 역전 진입하고 출발
할때의 전철기 보다 좀 거리가 떨어 진 듯 하다 어찌했더 무척 위험한 한 열차 통학이다
열차에 매달리는 학생들도 서열이 있다 제일 밖에 매달리는 학생이 제일 위험 한데 그 넘이 손을 놓아 버리면
내 생각으로 약 10여명이 한꺼번에 떨어 진다 그 넘 손에 많은 목숨이 달려 있는 이지 열차를 타려면 난간이 3 개 정도
계단을 올라야 열차에 오르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제일 첫 번째 계단에는 제일 마지막으로 바깥에 양쪽 난간 손을 잡고타는
학생 한명과 한손으로 만 난간을 잡는 학생 4명 정도 그다음 2 번째 난간에 타는 넘은 매달리지 는 않아도 아무 곳도 잡을
것도없이 겨우 서있을 정도 학생 3 ~4명 이넘들도 위험하다 2번째 계단 이라고 안심할수 업는게
제일 마지막 난간 붙잡고 가는 넘은 두팔로 나머지 학생들은 한팔로 난간 손잡이를 잡고 버티지만 2 번째 계단에 있는 애들이
균형을 못 잡고 힘이 아래로 쏠리면 첫 번째 2 번째 계단에 있는 넘들은 다 떨어 지게 되어있다(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공동 운명 이여)그러므로 제일 밖에 매달리는 넘은 덩치도 크고 팔고 길고 아저씨 같은 고등학생 그리고 첫 번째 계단에
올라 서는 애들은 고등학교 남학생 2 번째 계단에는 여학생도 있도 중학생들도 있다 그러니 난간에 타는 애들은 떨어져 죽을 확률
이 많다 언제 인가는 대전에서 오는 통학열차가 달리는 도중에 객차 중간이 끊어져 객차 연결 부위에 타고 있던 여학생 4 ~ 5명이
선로에 떨어져 한꺼번에 죽는 끔찍한 대형 사고도 발생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열차에 매달려 다녀도 힘들게 다녔다고 하는 넘들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열차도 없었으면 학교 다니기가 어렵지 .. 그 당시 사회는 겨우들 먹고 사는 시기라
애들 학교 가르친다고 도시에 하숙집을 얻어 학교에 보낸 다는 것은 정말 부자집 애들 들이나그렇게 학교에 다니지 농촌에서
그렇게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집은 마을에 한두 집 정도다
그렇게 6년동안 지내 다 보니 기차를 타고 다녔던 학생들은 열차 통학에 대한 각자의 추억도 엄청 많을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타고 다니니 맨날 보는 넘이 또 그 넘들 그년이 그년들이지 그러다 보니 학교 통학을 하다 보면 동네 사람 부모님
들 눈치를 볼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연애를 하는 일이 많아 진다 또 학교에 다니는 시간에는 부모들 눈에 벗어 나나게 되니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양아치라 하나 껄렁패라고하나 학생 깡패로 전락하는 애들도 많이 생긴다(그당시는 자녀들이 많아
부모들이 먹고 살기힘든데 학교 교복만 입고 학교에 가는 것만 보아도 뿌듯하게 생각했지 머 공부를 어떻게 하고 안보이는
사이 머하는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도 열차를 타고 다니면서 기분 좋은 것은 봄 여름 가을 밖에 매달려 열차가 다니면
(여름 객차 내는 사람들이 많으니 문을 열어 놓아도 완전 찜통이 었을 것이다 )
정말 시원하니 좋은데 좋지 않을때에는 겨울 눈보라 치면 눈보라를 맞아 가고 추운 겨울철에는 칼바람을 맞아가면서 열차에 떨어지
지 않으려고 참고 매달려 가는 것을 보면 지금 생각 하면 처철한 삶이라 해야 하나 학교 생활이라고 해야 하나 또 한가지 안 좋은
일은 그 당시 객차는 화장실에 똥 오줌을 싸면 바로 객차 외부로 떨어져 철로 가장자리에 똥 오줌이 떨어지니
달리는 열차에 똥오줌을 싸면 이게 어떻게 되겠어 이 넘들이 달리는 열차로 인해 일어나는 강한 바람에 따라 춤을 추지 이 넘들은
땅 바닥에 떨어져서 공중으로 튀거나 달리는 객차 바람에 날려 열차 승강대에 매달려 가는 넘들 얼굴이고 옷이고 다 튀기니 정말
신경나는 것이지 이것은 열차 통학하면서 별로 좋지 않은 추억임
생각 보다 글이 길어 졌네요 머 하도 오래 전이야기가 생각 나는데로 적어 보았기때문에
내 기억이 잘 맞지 않은 내용도 있을 것이므로 잘 참고 해서 읽어 봐 주시시를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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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매달려서 크게 다친 사람이 열차 통학 이야기를 한다면 추억이 아니라 아픈 기억으로 남겠지요. 저로서는 모든 것이 부족하던 때는 지나가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