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92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새벽의 땅 부여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공주의 서남쪽이 부여인데, 백마강(지금의 금강)변이며 백제의 옛 도읍터다. 조룡대(釣龍臺), 낙화암, 자온대(自溫臺), 고란사 1) 는 모두 백제시대의 고적이며, 강변에 맞닿은 암벽이 기묘하고 경치가 매우 훌륭하다. 또 땅이 기름져서 부유한 자가 많으나, 도읍 터로 논한다면 판국이 좀 작고 좁아서 평양이나 경주보다는 훨씬 못하다”라고 기록하였다.
위례성과 웅진에 이어 백제가 마지막으로 도읍지를 옮긴 곳이 사비성, 곧 부여다. 옛 이름이 소부리군(所夫里郡), 반월(半月), 여주(餘州)라고도 했던 부여는 122년간에 걸쳐 백제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백제가 망한 것은 31대 의자왕 때, 660년 7월이었다.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부여는 새벽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 조용했던 새벽의 평온은 나당 연합군의 침략으로 산산이 깨졌다. 『동국여지승람』은 당시의 모습을 “집들이 부서지고 시체가 우거진 듯하였다”라고 기록했으며, 이때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고 전해져 온다.
정림사지의 백제 탑을 보라. 오층석탑의 기단부에 ‘대당평제탑(大唐平齊塔)’이라는 글자가 화인(火印)처럼 찍혀 천 몇백 년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사람들은 가끔 옛 추억을 찾아가듯 부소산 낙화암에 올라 요절한 가수 배호의 「추억의 백마강」을 부르는 것으로 잃어버린 왕국을 생각하곤 한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 아래 울어나 보자.
조선 숙종 때 사람 석벽(石壁) 홍춘경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나라가 망하니 산하도 옛 모습을 잃었구나.
홀로 강에 멈추듯 비치는 저 달은
몇 번이나 차고 또 이지러졌을꼬.
낙화암 언덕엔 꽃이 피어 있거니
비바람도 그해에 불어 다하지 못했구나.
이 같은 역사를 지닌 부여에서 내세우는 부여팔경은 어떠할까? 양양 낙산사, 삼척 죽서루 같은 관동팔경이나 도담삼봉, 사인암 같은 단양팔경에서 내세우는 아름다운 광경이나 경치와는 이름부터가 다르다. 미륵보살상과 탑 하나 덜렁 남은 정림사지에서 바라보는 백제 탑 뒤의 저녁노을과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백마강가의 아지랑이, 저녁 무렵 고란사에서 들리는 은은한 풍경 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이따금 뿌리는 가랑비, 낙화암에서 애처로이 우는 소쩍새 소리,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외로운 돛단배.
정림사지 오층석탑백제시대의 대표적 석탑으로,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다. 정림사는 사비의 시내 한가운데 있던 중요한 절이었다.
부여팔경은 부소산과 낙화암 그리고 그 아래를 흐르는 백마강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경치다. 거기에 신동엽 시인의 「금강잡기(錦江雜記)」에 이르면 백마강과 부여 땅에 스민 슬픔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게 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초여름 백마강가 고란사에 세 젊은 여승이 찾아왔다. 회색 승복을 단정히 입은 그들은 이틀을 묵으며 고란사를 찾는 사람들과 그 근처 상인들과 잘 어울렸다. 때로는 보트도 타고 조약돌을 주워 바랑에 넣으며 이틀을 지낸 후 여승들은 조약돌이 가득 담긴 무거운 바랑을 어깨에 걸어서 허리에 꼬옥 졸라매고 일렬로 늘어서서 강의 중심을 향해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 건넛마을 사공이 날씨를 보러 문밖에 나왔다가 어스름 아침에 강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세 그림자를 보고 말았다. 놀란 그는 마을 청년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와 때를 같이 하여 주먹만 한 소나기 빗발이 온 천지를 덮으면서 난데없는 뇌성벽력이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소나기와 천둥이 가라앉은 후 마을 사람들과 절간의 승려들이 모든 배를 동원하여 그들을 찾았는데 가장 어린 여승의 시체가 물 위에 떠올랐다. 스물둘, 스물넷이라던 두 여승은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 유서도 없이, 유언도 없이 그들은 떠오르지 않기 위해, 발견되지 않기 위해 무거운 자갈 바랑을 몸에 묶고 물속으로, 죽음의 길로 걸어간 것이다.
그들은 이승 저편 피안의 세계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들의 죽음에 하늘은 어찌하여 소나기와 뇌성벽력을 조화했을까? 신동엽 시인은 그날 오후 백마강가에 나가 죽어서 누워 있는 그 젊은 여승을 보았단다. 너무도 앳된 얼굴, 이 세상 그 어느 것에도 상관이 없다는 듯 평화스러운 얼굴을 바라보고는 강기슭을 한없이 거닐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경관과 나라 잃은 슬픔이 곁들여져 이곳을 찾는 나그네들의 심사를 어지럽히는 백마강 건너로 부소산이 솟아올라 있다. 부소산에는 임금과 신하들이 서산에 지는 달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겼다는 송월대가 있고, 동쪽 산정에는 임금이 매일 올라가서 동편 멀리 계룡산 연천봉에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맞으며 국태민안을 빌었다는 영일루가 있으며, 군창 터가 남아 지금도 불에 탄 곡식을 찾아볼 수 있다. 낙화암은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고사로 유명하지만, 『여지도서』에 삼천궁녀라고 명시된 구절은 없다.
낙화암은 관아의 북쪽 1리에 있다. 의자왕이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자 궁녀들이 급히 달아나 이 바위 위에 올라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에 꽃이 떨어진 바위라는 뜻으로 낙화암이라고 이름 하였다.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었다고 와전된 것은 어찌된 일일까?
고란사 뒤편의 약수는 백제 왕들의 어용수(御用水)로 유명하다. 임금이 고란사의 약수를 마실 적에 물위에 고란초 잎을 띄웠다. 고란초에 대해서는 조선 세종 때 편찬된 『향방약성대전』에 수록되어 있는데, 고란초는 신라의 고승 원효가 백마강 하류에서 강물을 마셔보고 그 물맛으로 상류에 고란초가 있음을 알았다는 신비의 여러해살이풀이다. 고사릿과에 속하며, 한방에서는 화류병(花柳病)에 즉효약으로 쓰였다고 한다. 고란사 아래를 흐르는 백마강을 대왕포(大王浦)라고 부르는데 『삼국사기』 무왕 37년 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3월에 왕은 좌우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백마강) 북포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그 사이에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을 심었는데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왕은 술을 마시고 흥이 극도에 이르러 북을 치고 거문고를 뜯으며 스스로 노래를 부르고 신하들을 번갈아 춤을 추게 하니, 사람들이 그곳을 대왕포라고 말하였다.
한편 부소산에는 천정대(天政臺)라는 대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백제에서는 재상을 임명할 때 뽑힐 만한 사람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한 다음 바위 위에 놓아두었다. 조금 뒤에 이를 가져다 보고, 이름 위에 도장 흔적이 있는 사람을 재상에 임명하였다. 그런 까닭에 하늘이 관리를 임명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천정대’라고 불렀으며, ‘정사대(政事臺)’라고도 하였다.
수심은 얕아졌지만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흐르고 있는 백마강에는 슬픈 역사가 서려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 성을 공격할 때였다. 소정방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도저히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소정방이 근방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물으니 “백제의 의자왕은 밤에는 용으로 변하고 낮에는 사람으로 변하는데, 왕이 전쟁 중이라서 변하지 않고 있어서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소정방이 타고 다니던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아 올리자 금세 날이 갰고, 드디어 당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여 성을 함락하였다. 그때 용을 낚았던 바위를 조룡대라 하고, 강의 이름을 백마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금강공주의 영역은 매우 넓어서 금강 남쪽과 북쪽에 걸쳐 있다. 금강변에는 이중환 가문의 정자인 사송정과 금벽정, 독락정 등의 정자가 있다.
부여현감 한원례의 초청으로 부여를 찾았던 다산 정약용은 이러한 이야기에 크게 실망하고 다음과 같은 『조룡대기』를 지었다.
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찌 이리 황당함을 좋아하는가! 조룡대는 백마강의 남쪽에 있는데, 소정방이 여기에 올랐다면 이미 군사들이 강을 건넌 후였을 것이니 어찌 눈을 부릅뜨고 용을 낚아 죽였겠는가? 또 조룡대는 백제 성(사비성) 북쪽에 있으니 소정방이 이 대에 올랐다면 이미 성은 함락된 후였을 것이다. 당나라 군성이 바다로 와서 백제 성 남쪽에 상륙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강을 수십 리나 거슬러 올라가 이 조룡대 남쪽에 이르렀겠는가?
어찌 이곳들뿐이겠는가. 나라 곳곳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혈(穴)을 박았다는 혈처는 어찌 그리 많으며, 일본인들이 꽂았다는 쇠는 또 어찌 그리도 많은지.
꽃잎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삼천궁녀의 전설이 서린 사비성을 찾았던 춘원 이광수는 백마강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사자수 내린 물에 석양이 비낄 제
버들 꽃 날리는데 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패망의 역사이고 다시 올 리 없는 세월이지만 험난했던 그 역사를 간직한 곳이 부여다. 고려 때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당시 부여에서 떠돌아다녔다는 말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년 봄 2월에 여우 떼가 궁중에 들어왔는데 흰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앉았다.
여름 4월에 태장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장수를 보내어 신라의 독산, 동잠 두 성을 침공하였다.
5월에 서울 서남쪽 사비하에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3발이었다.
가을 8월에 웬 여자 시체가 생초진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9월에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의 곡성과 같이 울었으며, 밤에는 대궐 남쪽 행길에 귀곡성이 있었다.
20년 봄에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해 연변에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다 먹을 수 없이 많았다. 사비하의 물이 핏빛과 같이 붉었다.
여름 4월에 왕머구리(머구리는 개구리의 옛말)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성안의 사람들이 까닭도 없이 누가 잡으려 하기라도 하는 듯이 달아나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사람은 계산할 수도 없었다.
5월에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서 천와, 도양 두 절의 탑에 벼락이 내렸으며 또 백석사 강당에 벼락이 치고 동쪽과 서쪽에는 용과 같은 검은 구름이 공중에서 서로 부딪쳤다. 서울에 있는 뭇 개들이 노상에 모여서 혹은 짖고 혹은 곡을 하더니 얼마 후에 곧 흩어졌다.
웬 귀신이 대궐 안에 들어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하고 크게 외치다가 곧 땅속으로 들어가므로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들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더니 3자가량 되는 깊이에서 거북 한 마리가 발견되었는데 그 등에 ‘백제는 달과 같이 둥글고, 신라는 달과 같이 새롭다’라는 주문 글자가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달과 같이 둥글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 달과 같이 새롭다는 것은 가득 차지 않은 것이니 가득 차지 않으면 점점 차게 된다”라고 하매, 왕이 화를 내고 그를 죽여버렸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달과 같이 둥글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달과 같이 새롭다는 것은 미약한 것이니 생각하건대 우리나라는 왕성해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해간다는 뜻인가 합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고려 때의 문장가인 이존오가 신돈에 의해 탄핵되어 이곳에 머물며 남긴 시 한 편이 애절하다.
낙화암 아래에는 물결만 출렁대고,
흰 구름 천년 동안 속절없이 유연(悠然)하다.
대재각1700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잡혀갔던 이경여가 낙향하여 거처하였던 곳에 그의 손자인 이이명이 세운 정자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금강은 한 폭의 산수화나 다름없다.
한편 구드래나루에서 서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부산(浮山)의 중턱에 대재각(大哉閣)이 있다. 대재각은 1700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잡혀갔던 이경여가 낙향하여 거처하였던 곳에 그의 손자인 이이명이 세운 정자다. 이경여는 병자호란 때 당한 치욕을 보복하고자 효종에게 북벌 계획과 관계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효종이 비단을 내리며 “일모도원지통재심(日暮途遠至痛在心(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고통이 마음속에 있구나))”이라는 여덟 개의 글자를 내렸다. 그의 손자 이이명이 우암 송시열의 글씨를 받아 백강 옛터에 각을 세우고 상서와 대재왕이라는 뜻을 따서 대재각이라고 하였던 것을 이곳에 옮겨 지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금강은 한 폭의 산수화나 다름없다. 부산은 해발 107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백마강에 외따로 솟아 있어서 마치 물위에 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 산에는 대재각과 부산서원 터 그리고 청룡사라는 절이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고을 안에는 세 개의 산이 있다. 일산(日山), 오산(吳山), 부산이라고 불러 백제의 전성기에는 그 산 위에 각각 신령한 사람이 살면서 아침이나 저녁이나 계속 날아서 서로 왕래하였다고 한다”라고 실려 있다. 홍수가 질 때면 강물에 뜬 섬처럼 보인다 하여 ‘뜬섬’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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