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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기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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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1:1-11
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9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 설 교 >
느헤미야에게서 본 받을 점
느 1:1-11 / 박봉수목사
2006~7년에 중동의 작은 부족국가 두바이가 세계 8대 불가사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7성급의 세계 최고의 호텔, 무려 높이가 800미터가 넘을 것이라는 세계 최고 높이의 빌딩, 해안선이 70킬로에서 1500킬로로 확대되는 인공섬 프로젝트, 사막 한 복판에 들어서게 될 스키장과 골프장... 실로 상상을 초월한 놀라운 일이 지금 두바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실 두바이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 몇 년 만 퍼내면 고갈될 것이 뻔히 예견되는 석유 매장량, 30만 명도 채 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작은 도시, 게다가 역사 유적지 하나 없는 볼품없는 불모지의 나라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나라도 엄두도 내지 못할 창의력과 역발상으로 지금 세계의 물류와 금융. 관광과 오락 그리고 문화의 허브를 꿈꾸며 야심차게 그 꿈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최홍섭이라는 분은 [두바이 기적의 리더십]이란 책에서 상상을 초월한 기적 같은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1958년 셰이크 라시드가 아랍에미리트(UAE) 7개 부족 중 하나인 두바이 항, 인구 고작 3천여 명에 불과한 이 작은 어촌 마을 추장에 취임하게 됩니다. 그는 석유 고갈 이후 두바이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야심 찬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석유로 번 돈을 집중 투자하여 두바이 도시 전체를 리모델링하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 아버지를 이어 셰이크 모하메드가 추장이 되자 남다른 통찰력과 상상력 그리고 추진력이 더해지면서 그 꿈은 더 커졌고, 투자 또한 더욱 거대해 졌습니다. 도무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서서히 현실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가 중요합니다.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공동체가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합니다. 특히 미래가 예측하기 힘들고 불안할수록 지도자가 더욱 중요합니다.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통찰력, 사람들의 마음을 열 줄 아는 설득력, 또한 꿈을 이룰 수 있는 실천력을 갖춘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훌륭한 지도자가 뽑혀야 하겠습니다. 교회를 위해, 가정을 위해, 직장을 위해 참 훌륭한 지도자들이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저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자리에서 훌륭한 지도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수많은 지도자들이 나옵니다. 그들 중에 가장 훌륭한 지도자를 꼽으라면 결코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그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서 나라를 위기 가운데서 건져냈고, 민족을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놓았습니다.
그러면 느헤미야가 지도자로서 발휘한 리더십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저마다 훌륭한 지도자를 꿈꾸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시대에 포로로 끌려와서 70년 동안 힘겨운 포로생활에 시달렸습니다. 바사가 바벨론을 무너뜨리게 되면서 고레스 왕이 허락으로 귀환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특히 주후 537년에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려 예루살렘을 재건하게 하여 스룹바벨의 지도 하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 후 아닥사스다 왕 때 율법사 에스라가 귀환하여 백성들의 영적 각성을 위해 크게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후 12년이 흘렀습니다. 귀국한 백성들이 죄에 빠지게 되었고 여러 가지 환난과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큰 위기를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에 느헤미야는 바사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아 높은 관직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뜻밖의 고국의 위기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왕에게 간청하여 유다 통독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와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를 필두로 나라 재건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느헤미야가 사역을 시작하자 방해꾼이 나타났습니다. 우선 외부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게셈이 조직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아라비아인, 암몬인, 아스돗인 등이 가세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를 에워싼 여러 나라 여러 족속들이 유다가 돌아와 다시 예루살렘을 성벽을 재건하고 나라를 재건하자 가로막고 나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내부적인 어려움도 생겼습니다. 공사가 한참 진행 중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백성들은 굶주림 끝에 자녀를 노예로 팔아넘겨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런 내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불과 52일 만에 성벽 재건 공사를 마무리 짓습니다. 그리고 민족 공동체를 정비하고 많은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신앙 중심의 민족 공동체로 든든하게 세워갔던 것입니다.
여기에 느헤미야의 놀라운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그의 리더십이 나라를 위기 가운데서 건져낸 것입니다. 도대체 그의 리더십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 리더십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영적 리더십
우선 느헤미야의 리더십은 영적인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알았고 그래서 그를 따랐습니다.
느 1장을 보면 느헤미야가 바사에서 고국 소식을 듣게 됩니다. 3절을 보면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그 소식이 정말 안타까운 내용들입니다.
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난 뒤 그가 몰두했던 일이 바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2:1을 보면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니산월에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때까지 금식하며 기도하여 왕도 수척해진 모습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고 되어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기슬르월부터 시작했으니까 무려 4개월 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기도가 바로 리더십의 기초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느헤미야를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셔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임을 깨닫고 그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느 4장을 보면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 공사를 진행 중에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의 산발랏과 암몬의 도비야가 협박하고 나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4:4)
느 6장을 보면 또 적들이 쳐들어와서 다섯 번이나 협박하는 편지를 보내서 겁을 주었습니다. 백성들이 두려워 일손을 놓게 되었을 때 느헤미야는 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드립니다.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6:9)
그렇습니다. 일을 추진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이렇게 위기 상황 속에서도 기도하는 지도자를 백성들이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기도로 믿음과 용기를 얻고 나아가는 지도자를 백성들이 의지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지도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십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임을 깨닫고 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인 리더십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기도하는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흑인 노예해방을 추진할 때 모두가 반대했습니다. 내각이 총사퇴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 때 하루만 여유를 달라고 부탁하고는 철야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끝내고 나오는 대통령을 내각이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북전쟁시 북군의 전세가 불리해 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1863년 4월 30일 금식 기도일로 선포했습니다. 기도하는 대통령을 따라 온 국민이 금식기도에 동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기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영적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런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지도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행정적 리더십
다음으로 느헤미야의 리더십은 행정적인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그는 일처리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남다른 통찰력과 탁월한 추진력 그리고 사람들의 힘을 모으는 통합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고 따랐습니다.
우선 느헤미야는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읽을 줄 알았습니다. 남다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공동체를 이끌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볼 수 있었습니다.
느 2: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그 마음에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남몰래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비전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남들이 듣지 못한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느헤미야는 통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나아가 모두가 동참할 수 있도록 대 통합을 이끌어 냈습니다.
느 2:17-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하매” 자기가 받은 비전을 백성들과 나누었고 그들의 마음이 움직여 모두가 참여키로 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3장을 보면 대제사장으로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참여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실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치밀하게 일을 계획하고 철저하게 조직하고 끈기 있게 일을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일사분란하게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느 6:15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정말 짧은 시일 내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일이 되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꿈만 꾸게 하고 마음만 선동하고 끝나서는 안 됩니다. 무엇인가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실천력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한 마디로 “리더십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비전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고 끝없는 갈등을 유발해 내고 있습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실천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느헤미야와 같은 능력있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나라를 위해서만 아니라 교회와 직장과 가정 그리고 크고 작은 공동체 모두에게 다 필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느헤미야와 같은 능력있는 지도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격적 리더십
또 하나 느헤미야의 리더십은 인격적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사 왕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를 돕고 따랐습니다.
느헤미야는 헌신의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고국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달려가서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자 했습니다. 지금 자기는 바사의 고관으로 호의호식하며 일신의 영달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다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왕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5장을 보면 백성이 가난한 중에 성벽 건축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느헤미야는 총독으로서 자기의 녹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자기가 솔선하여 백성들의 경제적인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또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헌신할 줄 알아야 합니다. 솔선수범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앞 장 서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따릅니다.
다음으로 느헤미야는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느 1:6-7을 보면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그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자기의 죄로 삼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며 자복했다는 것입니다.
느 4:10를 보면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또한 5:1 이하를 보면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에 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늘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보일 때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따릅니다.
오스카 헤머스테인의 시가 떠오릅니다.
노래는 당신이 부르기 전까지는 노래가 아닙니다.
종은 당신이 치기 전까지는 종이 아닙니다.
당신 가슴 속에 있는 그 사랑은 그곳에 그저 남겨 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당신이 나누어주기 전까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훌륭한 지도자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절입니다. 너무도 우리의 미래가 불안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가 나와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적 리더십, 행정적 리더십, 그리고 인격적 리더십을 갖춘 훌륭한 지도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다시 세워야 할 때입니다
느 1:1-4 조상호목사
우리교회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셨습니까? 지난 2000년도 중반에 처음 홈페이지를 만들었으니까, 어느새 11년이 넘었습니다. 누구나 들어와서 자료를 볼 수도 있고, 필요하면 아무나 홈페이지에 올린 자료들을 퍼갈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많은 분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현재 출석하고 있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고, 우리교회 출신으로서 한국이나 미국 등지에 있는 청년들이나 성도님들이 많이 방문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교회와 전혀 상관없는 분들도 찾아오시는 것 같습니다. 2년 전 선교대회 차 한국에 방문했다가 머무르고 있는 숙소 엘리베이터 안에서 저를 알아보는 분을 두 분이나 만났는데, 알고 보니 한 분은 미국에서 오신 목사님이고 또 한 분은 캐나다에서 오신 목사님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목사님들을 통해서 우리교회 홈페이지가 <순복음 미주총회> 사이트에 링크되어 있어서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목사님들이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자주 들어오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었고, 홈페이지에 올린 저의 설교를 자주 보신다고 합니다. 이처럼 많은 분들이 방문해서 드러내놓기에 부족한 저의 설교를 조회하시는데, 어떤 설교는 1주일 만에 200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이나 전도사님들 중 제 설교 중에 소개한 예화 등을 사용한다고 답글을 남기는 분들도 계시고, 친절하게 개인적으로 저에게 이메일을 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 중에 기억이 나는 분이 몇 분이 계십니다. ‘왕명곤’이라는 분입니다. 저는 이 분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전에 올린 답글에 보니까 아마 청각장애를 가지신 분으로서, 계속해서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오셔서 저의 설교를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6월27일자 설교 “무엇을 소원하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설교를 올리자, 그 분이 이런 글을 답글을 써놓으셨습니다. “목사님! 소원이 있어요. 구약에 있는 말씀중 씨리즈로 말씀해 주신다면 구약 권별로 완벽하게 은혜 받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을부터는 성경 권별 씨리즈로 말씀해 주세요 소원합니다.” ‘무엇을 소원하고 있습니까‘라는 설교제목 밑에 구약성경을 시리즈로 말씀해달라고 답글을 다신 것입니다. 그래서 뒤늦게 답글 밑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이제야 답글을 보았습니다. 몇 달 전에도 답글을 올려주신 것 같은데 감사드립니다. 구약 시리즈는 기도하며 성령께서 영감을 주실 때 시작하도록 하지요... 기도해주세요.“ 또 7월 4일자 설교 ”무엇에 붙잡혀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설교를 올리자 ’8812‘라는 분이 이렇게 답글을 써놓으셨습니다. ”늘 조목사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멀리 태평양바다를 건너서 오는 말씀은 은혜 그자체입니다. 특별히 목사님의 성경 권별 씨리즈는 많은 감동이 있습니다. 또 목사님의 성경 권별 씨리즈가 시작되나요? 지난번 마가복음 씨리즈는 마가복음을 완전히 이해하는데 멋진 시간이었습니다. 또다시 기대하고 있는데 언제쯤 시작되시나요?“ 앞부분을 보면 그렇지 않은데, 답글의 뒷부분을 보면 부탁을 뛰어넘어 저의 마음에 굉장한 압박을 가하는 것 같은 느낌늘 갖게 합니다. 또 그 밑에 ’9191‘이라는 닉네임으로 다른 분이 이렇게 답글을 써놓았습니다.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 늘 주옥같은 말씀에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답글을 달아놓은 줄 아십니까? ”한 주 한 주를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넘어갈 수 없습니다. 참고로 '주옥'은 저의 아내 이름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주옥' 같은 말씀을 더 사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가 우리교회에 부임한 이래 연속식 강해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성경 권별 시리즈는 설교하는 목사에게는 압박이 심하지만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 동안 시리즈 설교를 통해 많은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대충 기억이 나는 것은 말라기, 로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여호수아, 갈라디아서, 룻기(2부 예배에서), 요한복음을 시리즈로 살펴보며 은혜를 나눈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08년도에는 마가복음을 연속적으로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었고, 지난 상반기에는 성령의 열매 시리즈를 하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 후 성경 한 부분을 선택하여 연속식 강해설교를 하려고 했는데, 환경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상반기에 시작하려고 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못했고, 하반기에 시작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지진이 발생해서 또 시작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3주 전부터 성령님께서 저의 마음 가운데 느헤미야를 생각나게 해주셨습니다. 지난 9월4일에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 대지진이 나서 시내 곳곳에서 무너진 건물과 집들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데, 느헤미야서를 보면 이곳 크라이스트처치 상황과 매우 비슷합니다. 느헤미야서의 주제는 ‘다시 세운다’는 의미의 ‘재건(再建)’ 영어로 ‘Rebuilding’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느헤미야서에 단순히 건물만 Rebuilding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도 Rebuilding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과 우리 가정들과 우리 교회와 더 나아가 이 도시가 Rebuilding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오늘부터 특별한 절기를 제외하고 연속으로 느헤미야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시간인 오늘은 “지금은 다시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지금은 다시 세워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다시 세워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살펴볼 느헤미야서는 포로시대 이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당했습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도 주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당하고 쓸만한 젊은이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 바벨론 제국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망하고 페르시아가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스룹바벨은 고레스 왕의 도움을 받아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 일부를 데리고 1차 귀환을 하였습니다. 그 때가 주전 537년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던 솔로몬 성전이 70년 만인 주전 516년에 스룹바벨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만 재건하였을 뿐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은 완전히 재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458년 에스라의 인도 아래 2차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의 방해를 받았습니다. 르훔과 심새라는 사람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반란의 위험이 있다고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갑자기 성벽재건 공사가 중단되고 맙니다. 그리고 약 14년이 지났을 때, 본문의 주인공인 느헤미야가 등장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에 보면 아닥사스다왕 20년, 그러니까 주전 445년 어느 날 느헤미야는 고향을 다녀온 형제 하나니와 몇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상황이 어떤지 물었다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같이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그 동안 느헤미야는 14여 년 전 에스라가 2차 귀환을 한 후 공사를 실시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에 타버렸으며,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때 느헤미야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가 어떻게 행동을 했습니까?
1) 슬퍼하며 울었다
첫째로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다같이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는 수일 동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왜 느헤미야가 슬퍼하며 울었을까요? 13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조국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기 동족들이 큰 환란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에게 신임을 받아 수산 궁에서 ‘술 관원’으로 있었습니다. ‘술 관원’은 왕이 마시는 술에 독이 들어있는지 없는지, 미리 술을 맛보는 사람입니다. 요즘의 경호실장이나 비서실장과 같은 직책으로서 독살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왕을 보호하고, 왕과 함께 앉아서 국정을 논하는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당시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그는 이민자로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포로로 끌려간 사람으로서 출세하기 쉽지 않았지만,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페르시아 제국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떠나온 조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건,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져 있건, 성문이 불타 버렸건, 그러한 것은 그의 삶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에게는 모든 초점이 권력에 있습니다. 어떻게 권력을 잡을 것인가, 잡은 권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술관원 역시 어떻게 왕의 신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렵게 오른 이 자리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주인공인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1,300Km나 떨어진 조국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잠깐 울다가 그친 것이 아니라, 수일 동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두고 온 조국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처럼 슬퍼하고 있습니까? 주위에서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보면서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어주고 있습니까?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울다가 웃다가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왜 울다가 웃다가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남자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내가 어제 2억짜리 벤츠 자동차를 샀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아직 보험도 들지 않았는데, 아내가 타고 가다가 고속도로에서 굴러서 아내는 죽고 자동차는 못 쓰게 되었다는 연락을 방금 받았습니다.” “그러면 슬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반문을 하자 다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사실 우리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혼하려고 했는데 아내가 죽은 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고, 2억이 넘는 벤츠가 폐차가 된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옵니다.“ 요즘 눈물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눈물을 보기 힘든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라크와의 1차 전쟁에서 승리한 후 ABC 방송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군 사령관을 초청해서 대담을 했습니다. 진행자인 바버라 월터스가 사령관에게 “미국인들은 당신을 폭풍의 장군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질문을 하자,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가슴이 따뜻한 남자입니다” 진행자가 또 “오늘날 미국의 가장 큰 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사령관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라크 같은 외부의 적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눈물 없는 남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살아가는 이 시대의 비극은 눈물이 메말라간다는 것입니다. 웃고 즐기는 일에는 적극적입니다. 그래서 깊게 생각하는 시사 프로그램이나 슬픈 내용의 드라마보다 웃고 즐기는 코메디나 개그 프로가 시청율이 높습니다. 말씀을 깊게 해석하며 설교하는 강해설교가보다 재미있고 웃기게 설교하는 설교가가 인기가 더 높습니다. 물론 복잡한 세상에서 웃으면서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기분도 전환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웃음도 필요하지만 눈물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8가지 복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애통‘ 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여러분, 누구에게 복이 있습니까?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 흘리며 애통하는 자를 위로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눈물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2)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둘째로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킨 사람들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삼상 1:7). 페르시아 왕비였던 에스더는 민족의 구원을 위해 3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에 4:3). 다윗은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 때까지 슬퍼하며 금식했습니다(삼하 1:12).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기 전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행 13:3).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돌판을 받을 때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금식했습니다(신 9:9). 예수님도 공생애를 앞두시고 친히 40일간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는 금식을 너무 자주해서 주변 사람들이 말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금식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 금식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존 칼빈 역시 “음식을 많이 먹으면 마음이 하나님께 향해지지 않고 기도도 되지 않는다. 열정적인 기도를 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 C.C.C 총재셨던 고 김준곤 목사님은 40년간 아침 금식을 하면서, 민족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또한 크고 작은 중대한 일을 앞두고는 3일, 7일 등 금식 기도를 밥 먹듯 했는데, 이런 금식을 통해 영적 힘을 얻었고, 기도의 제목이 응답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고 최자실 목사님도 당신이 직접 금식기도를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금식 3일’ ‘금식 7일’을 외치면서 금식기도운동을 벌린 끝에 여의도순복음교회 및 한국교회의 성령운동과 부흥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금식한다'는 것은 우리가 즐기는 것들을 포기하고 하나님께만 우리의 관심과 시선을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식욕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인데, 이 욕망까지 억누르고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힘이 들지만 그만큼 능력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8장 6절을 보면, 왜 우리가 금식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여러분, 왜 우리가 금식기도를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할 때, 빠르게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금식할 때 하나님께서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시고, 멍에의 줄을 끌어주시고, 눌려있는 사람을 자유케 해주시고, 모든 멍에를 꺾어주십니다. 더 나아가 금식기도는 육체적으로도 매우 유익합니다. 한소망교회의 유영모목사님이 쓸 글에 보니까 현대인들이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동맥경화, 위장병, 각종 암, 성인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맛있다고 먹고, 영양분이 들어있다고 먹고, 건강에 좋다고 먹고, 미용에 좋다고 먹습니다. 보기 좋아서 먹고, 허영으로 먹고, 탐욕으로 먹습니다. 친구의 의리 때문에 먹고, 교제 때문에 먹고, 공무상 손님을 접대하다 보니 먹고, 음식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먹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먹어서 생기는 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프랭크 맥크 의사는 <건강을 위한 금식법>이란 책에서 적당한 금식은 건강을 회복하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금식은 몸의 기관들을 쉬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불필요한 체중이 줄어들고, 조직에 쌓인 독소가 제거 되며, 피는 맑아지고, 장은 깨끗이 청소가 되어, 간과 신장에 매우 유익하다고 합니다. 물론 단 하루, 한 번의 금식으로 이런 효과를 모두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금식을 정기적으로 하면 몸에 매우 유익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골방기도는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기 때문에 좋고, 육체적으로는 몸이 좋아지기 때문에 좋습니다. 우리교회 안에는 한 달에 하루씩 금식하는 골방기도팀이 있는데, 년말에는 팀원들 중 자녀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거나 호주 등지로 이주하는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골방기도팀원들이 많이 부족한데, 지원하셔서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골방기도를 통해 육체적으로 유익을 얻고, 또한 기도응답의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는 금식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충격적인 고국 소식을 듣고 난 다음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하루에 한 끼씩 금식했는지, 아니면 야채만 먹으며 금식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주시기까지 넉 달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물론 우리의 눈물은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울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슬픈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웁니다. 그러나 운다고 해서 드라마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수많은 사람들이 울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쓰나미로 인해 수십만 명이 죽은 것을 보고 울었고, 이라크 전쟁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울었고, 9.11 사태를 보면서 테러범에 대한 분노 때문에 울었고,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죽은 전사자들을 보고 울었습니다. 여러분, 안타까운 마음으로 울었을 때 역사가 뒤바뀌어지던가요? 아닙니다. 운다고 역사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역사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역사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재건을 소원하며 운다고 할지라도, 간절하게 부흥을 사모한다 할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금식하며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금식 기도는 비상수단으로서 완악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닫힌 문을 열게 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케 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에만 매달리지 말고, 느헤미야처럼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미국의 링컨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링컨은 믿음이 좋은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링컨은 남북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863년 4월3일을 ‘금식기도의 날’로 선포하며 국민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오늘의 무서운 재앙은 선조들의 죄에 대한 형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적인 성공과 부요 속에서 너무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신만만한 나머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고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빌어야 합니다. 이것이 미국 국민의 의무입니다.” 당시 남군에 속했던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미국 국민들은 이 날 하루 동안 금식하며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남북전쟁을 끝내게 하시고 미국을 축복의 나라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십니까? 눈물에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과 남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눈물이 값진 눈물일까요? 어떤 눈물이 위대한 눈물일까요? 자기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 값진 눈물일까요? 아니면 남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 값진 눈물일까요? 남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 값진 눈물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조국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너진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으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며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무너진 것들이 많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갈등하고, 부모와 자녀가 갈등하고 있는 무너진 가정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너져서 하나님 품을 떠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업이 무너져서 어려움을 당하고, 인간관계가 무너져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너진 것들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물입니다. 말라버린 우리의 눈에서 중보의 눈물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울기만 해서는 안 되고, 느헤미야처럼 무너진 것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야 38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얼굴을 벽으로 향한 채 심히 통곡하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사 38:5,6)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무엇을 들으셨고, 무엇을 보셨습니까? 기도를 들으셨고,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주셨고, 앗수르의 손에서 나라를 보호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비뚤어진 자녀를 보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물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멈춘 채 방황하고 있는 교우들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물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진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 크라이스트처치를 보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물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빈자리가 많은 우리 교회를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물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십니다.
무너진 성벽
느 1:1-4 / 피영민목사
서론
저희가 지난주까지는 에스라서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이번주부터는 느헤미야서로 들어가게 됩니다. 원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히브리 성경으로는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제가 다르기 때문에 두 권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에스라서의 주제는 하나님 말씀의 회복, 예배의 회복입니다. 다시 말해 에스라서의 주제는 예배(worship)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서는 성벽을 재건하는 일(work)이 주제입니다. 우리 인생은 예배가 없는 일도 안되는 것이고, 일이 없는 예배도 안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안드리고 일만 한다면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일은 없이 예배만 드린다면 그것도 공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라가 있고 느헤미야가 있는 것은 우리의 인생은 예배도 드리고 일도 하는 생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삶이 예배도 있고 일도 있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배경
오늘은 느헤미야의 서론으로 구약성서의 전체 구조와 느헤미야 시대까지 이르는 역사를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모두 66권으로 구약성서는 39권이고 신약성서는 27권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39권은 17:5:17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의 17은 역사서입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에스더서까지 17권이 역사서입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5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이렇게 5권을 시가서 혹은 감정에 관한 책(emotional book)이라고 말합니다. 나머지 17권은 예언서라고도 하고 선지서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는 17권의 역사서와, 5권의 시가서와, 17권의 예언서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서 17권은 5:9:3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서 17권 가운데 앞의 다섯 권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모세가 기록했기 때문에 모세 5경이라고 하고, 가운데 9개의 역사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되기 이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포로기 이전의 역사서(preexilic historical books)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3권인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이후의 역사를 기록하기 때문에 포로기 이후의 책(postexilic historical books)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역사서 17권은 5:9:3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언서 17권도 마찬가지로 5:9:3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5인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은 분량이 두껍기 때문에 대선지서라고 합니다. 나머지 9권과 3권은 소선지서라고 하는데 소선지서 가운데 9권인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는 바벨론 포로 되기 이전의 예언을 한 것이고, 뒤의 3권인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이후의 예언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운데 9권은 바벨론 포로 이전의 선지서요 뒤의 3권은 바벨론 포로 이후의 예언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성서는 17:5:17에다 5:9:3의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역사서의 마지막 세권인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와 예언서의 마지막 세 권인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동일한 시대인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이후의 시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시대까지 이스라엘 역사는 8개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하는 선택입니다. 둘째, 노예생활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인구 200만 명을 갖춘 대국가로 성장할 인적인 자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해방 혹은 출애굽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400년 만에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되고 홍해가 갈라지고 출애굽을 하게 되었습니다. 넷째, 가나안 입성입니다.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한 후에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서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해서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왕이 없고 오늘날의 판사인 사사들이 다스렸습니다. 그들은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그리고 사무엘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사들이 통치를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나라를 보면 왕이 있는데 왜 우리나라는 왕이 없느냐며 왕을 세워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왕인데 무슨 왕을 또 세우냐고 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하나님이 안 보이시므로 안보이는 왕보다는 보이는 왕을 세워주십시오 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조금 섭섭하시지만 할 수 없이 왕을 세워 주셨습니다.
다섯째, 왕정국가 형성입니다. 이스라엘은 왕정국가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첫 번째 왕이 되어서 왕정국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들이 처음에는 훌륭한 것 같았으나 시간이 지나며 하나님 말씀을 다 어겼습니다.
여섯째, 배교입니다. 배교를 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은 두 돌비입니다. 첫 돌비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 돌비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졌고, 이웃도 사랑하지 않고 부도덕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배교를 한 것입니다.
일곱째, 포로시대입니다. 배교로 말미암아 그들은 포로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포로되어 멸망당하고, 남왕국 유다는 주전 587년에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언약을 어기면 포로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된 것입니다. 여덟째, 칙령시대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약 70년 하다 보니 하나님이 고레스라고 하는 페르시아의 왕을 일으켜서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주전 538년 고레스 칙령을 발표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가리켜 칙령시대라고 합니다. 유다백성들 가운데 5만 명에서 103명 모자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간단히 말씀드린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백성들은 주전 515년에 성전을 완공했습니다. 그것이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그리고 제사도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전을 완공하고 제사를 회복했지만 주전 515년으로부터 약 70년의 세월이 흘러도 거기서 더 발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전제사를 드려도 안전하게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도시에 성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전 444년에 3차로 귀환한 느헤미야가 귀환하기 2년 전인 주전 446년 페르시아의 왕 아닥사스다가 통치하던 제 이십년 기슬르월 즉, 12월에 수산궁에 있다가 한 형제가 예루살렘에 갔다와서 예루살렘의 소식을 알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의 이름은 하나니입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니에게 “형제 하나니여 예루살렘에 있는 우리 동포의 형편이 어떠하며 예루살렘성의 형편이 어떠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니가 대단히 절망적인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백성들은 큰 환난(trouble)과 능욕(disgrace)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벽이 무너져 없어져 버리고 성문이 다 불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주저앉아 울면서 여러 날을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슬픈 영화만 봐도 금방 눈물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외형상으로 궤휼과 권세가 많아 도무지 울 것 같지 않게 생긴 사람들도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페르시아에 태어나서 페르시아에서 성장한 유대인으로 대단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서를 읽어보면 그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페르시아에서 출세한 유대인이 별로 없는데 그는 페르시아의 경찰에 투신해 페스시아의 왕 아닥사스다의 생명을 보호하는 술맡은 관원장의 높은 위치까지 지위가 올라갔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청와대에서 주방 안전을 책임지는 경호실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연약해서 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며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느헤미야가 여러 날을 주저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2. 성벽의 중요성
오늘날 성벽이 좀 무너졌다고 뭘 그렇게까지 우느냐고 생각할 수 있으나 느헤미야 시대에 성벽은 과소평가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벽이 없는 도시는 도시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서 시대에 성벽은 네 가지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 성벽은 “구원”입니다. 성경에 성벽은 구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사야 60장 18절 후반에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벽이 구원이라는 것은 영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육신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외적이 아무리 쳐들어와도 성벽이 버티고 있으면 멸망하지 않습니다. 성벽이 높은 성 안에 살고 있는데 외적이 성벽을 기어 올라온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위에서 벽돌 같은 것을 던지거나 뜨거운 물을 붓거나 장대로 사닥다리를 성에서 떨어지게 만들면 적이 성안으로 침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벽이 단단하게 서 있다는 것은 곧 구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벽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다는 것은 원수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성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벽은 구원입니다.
둘째, 성벽은 “안전”입니다. 잠언 18장 11절에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부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현금과 부동산과 주식을 높은 성벽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게는 재물이 많아 나는 안전하도다. 나의 노년기는 안전하도다. 나의 미래는 안전하도다. 나의 많은 재물이 내게 높은 성벽이로다.”라고 생각합니다. 성벽은 안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에 여리고성에 성벽이 서있는 동안에는 여리고성의 주민들은 안전했습니다. 아무걱정을 안했습니다. 성안에 있으면 성 밖에 군대가 쳐들어와도 호랑이가 와도 곰이 와도 독사가 득실거려도 걱정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안에 있고 성벽이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백성들과 7일 동안 성을 계속 돌다보니 성벽이 무너져 버렸고 성벽이 무너지자 여리고성도 결코 안전한 곳이 못되고 결국 망해버렸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 성벽이 훼파되었다는 것은 그 성이 전혀 안전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밤에도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보초를 세우고 자야 됩니다. 왜냐하면 외적이 쳐들어와서 자기 가족을 잡아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낮에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가 없습니다. 곡식을 쌓아두어도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성벽이 없는데 누가 밤에 와서 훔쳐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벽은 곧 안전을 의미합니다.
셋째, 성벽은 “능력”입니다. 한 도시의 능력은 그 도시에 군인이 얼마나 많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벽이 얼마나 높고 길며 견고하냐에 따라서 그 도시의 능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북경에 가면 만리장성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경은 능력이 있는 도시입니다. 지금이야 만리장성 때문에 능력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옛날에는 만리장성 때문에 북경은 능력 있는 도시였습니다. 예레미야 1장 18절로 19절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가리켜 “너는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벽은 능력입니다. 성벽이 든든한 도시는 쳐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 시대에 성벽이 없다고 하는 것은 유다백성이 약한 백성이 되었고 좌절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넷째, 성벽은 “분리”입니다. 벽이 있으면 안과 밖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성벽이 없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외부와 내부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성벽이 무너져버리다 보니 이방의 종교가 마구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와 마구 섞이고 혼합되어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벽이 무너졌다는 것은 세상과 교회가 섞여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벽은 구원이요 안전이요 능력이요 분리입니다. 이렇게 성벽이 중요하기 때문에 성벽이 무너진 채로 앉아있어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궤휼과 권세가 능하고 출세한 예레미야가 홀로 성벽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 우리 고향 예루살렘에 성벽을 세워달라고 앉아서 수일동안 울며 기도한 것입니다.
3. 느헤미야의 사명
13장으로 구성된 느헤미야서의 주제는 성벽을 중건하고 다시는 수치를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2장 17절에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벽이 무너져 버리니 환란(trouble)과 수치(disgrace)가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벽을 중건하자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1~6장은 성벽재건의(rebuilding) 기록이요, 7~13장은 예루살렘 세워진 성벽 안에서 학사 에스라가 율법을 재교육(reinstruction)한 기록입니다.
결론
여러분 삶에 혹시라도 환란과 수치가 임하여있지는 않습니까? 느헤미야 1장 3절에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풍성한 삶을 누리고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누리지 못하고 왜 내 삶에는 고통과 수치가 임하였는가?”라고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느헤미야서는 그 이유를 답하기를 성벽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느헤미야서의 주제는 성벽을 다시 세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공부하면서 성벽을 다시 세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첫째, 영적인 성벽을 세워야 합니다. 기도의 성벽, 말씀 공부의 성벽, 헌신의 성벽,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하는 성벽, 봉사의 성벽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스가랴 2장 5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불성곽이 되어 주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불성곽이 되어 주시므로 마귀와 그의 졸개인 악령 귀신들이 우리 가정을 공격해 와도 안전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여호와 하나님이 불성곽이 되어주시고 우리 가정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가정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말씀공부도 안하고 헌신도 안하고 헌금도 안하는 등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은 부지런히 찾아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적인 성벽이 여기저기 구멍이 나서 결국 무너져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귀신, 악령, 마귀가 들락날락 하며 하고 싶은 것을 다해서 결국 성도의 삶이라 해도 환란과 수치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소한 얘기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정이든 교회든 직장이든 사회든 여호와 하나님이 불성곽이 되어주시는 곳은 든든한 줄로 믿습니다. 거기에는 세상과는 다른 무엇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고 안전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성벽을 다시 세워야 됩니다.
기도생활 하기를 싫어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마음을 고쳐먹고 하루에 10분이라도 기도하십시오. 아침잠이 많아 새벽기도 나오기가 힘드신 분은 저녁기도를 드리면 됩니다. 자기 전에 성경을 한 장이라도 읽고 10분이라도 하루를 돌아보며 잘못된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랄 것은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기도응답이 즉각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가정에 불성곽이 되어 주셔서 마귀가 한 길로 왔다가도 일곱 길로 쫓겨 가고 가정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불성곽이 되고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성벽을 다시 세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정신적인 성벽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이 정신이 건강해야 됩니다. 잠언 25장 28절에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이 요동하고 안정되지 못하면 성벽이 무너진 도시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잘 제어해야 됩니다. 분노하는 일이 있어도 분노를 잘 다스리고 미운일이 있어도 미움도 잘 다스려야 됩니다. 아무리 화가 놔도 마음을 잘 다스리고 “아버지 저 악한 인간은 주께 맡기나이다. 나는 저 인간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만약 돈을 떼어먹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미워하다가는 우리가 병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제 돈을 떼어먹어서 사람 하나라도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 일입니까? 저의 억울한 것은 주님께서 갚아주시옵소서.” 이렇게 해서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성벽도 잘 세우시고 마음도 잘 제어(control)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분리의 성벽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분리시켜 놓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따로 구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옥 갈 사람들하고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언제 죽어도 천국에서 내가 받아주겠다고 구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라야 됩니다. 말하는 것도 다르고 노는 것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소망하는 것도 달라야 됩니다. 기독교인인지 불교신자인지 유교신자인지 알 수 없고 도무지 예수냄새가 전혀 나지 않으면 그는 분리의 성벽이 무너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본받지 말고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분리의 성벽인 것입니다.
컴퓨터를 하는 사람들도 해커들이 많이 들어오므로 불성곽(fire wall)을 가지고 해커들을 막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공부하면서 영적인 성벽, 정신적인 성벽, 분리의 성벽을 다시 세우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가정과 내영혼의 불성곽이 되어 주시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복을 위한 시작
느 1:1-5 / 김형준목사
존 맥스웰(John C. Maxwell)과 짐 도넌(Jim Dornan)이 지은 ‘영향력(Becoming a person of influence)’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떻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에 한 시인의 글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오늘이 가기 전 내 삶은 수십 명과 만나겠지.
저녁 해가 지기 전 좋고 나쁜 수많은 흔적을 남기겠지.
내가 항상 바라는 소망, 내가 항상 간구하는 기도가 하나 있다오.
주여, 제 삶이 도중에 만나는 다른 삶을 돕게 하소서.'
사람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좋은 영향을 주고받느냐 나쁜 영향을 주고받느냐 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에게 영향을 주느냐 아니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느냐, 또 일시적으로 영향을 주느냐 오랜 기간 영향을 주느냐…….
오늘 함께 묵상하고자 하는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일어났던 일을 배경으로 합니다. 오랜 포로생활 후에 주어진 익숙하지 않은 자유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분열과 다툼으로 어려울 때였습니다. 더불어 외부로는 이방인들이 공격해오면서 방어할만한 능력도 없이 성은 무너지고 백성들은 사로잡혀 가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배감과 자괴감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느헤미야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과 함께 성을 쌓는데 사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함께 일을 이루었고 삶의 터전을 지켰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큰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나가서 예수님 오시기까지 유대백성들 삶의 중요한 영향을 주는 일들을 했습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들을 감당하면서 백성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던 느헤미야의 지도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우리는 바로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력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시대를 보면서 어떤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아니 스스로를 살펴보아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그냥 이대로 살아갈 수는 없어!’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느끼는 영적 부담감을 갖고 계시다면 느헤미야에게서 지혜를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영향력을 통해서 이 시대가 다시 살아나고, 내 인생 여정 동안 만날 사람이 다시 일어나고 희망을 얻고 깨졌던 가정이 회복과 행복을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자기 민족에게 아름다운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지혜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성경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역사의 현실을 들을 수 있는 열린 귀가 있었습니다. 역사의 현실을 들을 수 있는 열린 귀를 다른 말로 역사의식이라고 합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도대체 어떤 시대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현실에 눈 감고 하늘 소망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바꾸어 나가는 역사와 현실 앞에 책임지는 ‘책임적 존재’ 입니다.
여러분! 이란에서 발생했던 지진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동기도제목으로 놓고 같이 기도하셨죠? 마음에 와 닿으십니까? 별로 그렇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와 관계한 일에는 책임을 느끼며 내 문제라 생각하지만, 멀리 이란에서 있었던 지진은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실하게 느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정치를 보며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특징과 상황, 사람들 마음의 흐름을 보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본문 4절 말씀,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느헤미야가 울고 슬퍼했던 이유는 자기 백성들이 큰 환란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과 800마일 정도, 즉 서울과 부산 거리의 약 4배 정도 되는 만큼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이방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입니다. 성경 표현에 의하면 술관원입니다. 고대에는 독을 탄 음식이나 술로 왕을 독살하려 했기 때문에 왕은 자기가 신뢰하고 총애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고 국사도 논의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비서실장이나 경호실장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조국이 어려움에 처하고 성은 무너진다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형편을 더 자세히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멀리 수산궁에서 느헤미야는 풍요로운 생활을 하며 별 어려움이나 곤고함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신문 보도에 따르면 강남 사는 사람들이 이웃돕기 참여도에 있어 가장 낮다고 합니다. 모두 자기처럼 사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사정을 듣지 못하고, 듣지 못하면 관심을 가질 수 없고, 관심이 없으면 어떤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일에 몰두하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합니다. 정치란 어떻게 하면 권력을 잡을 것인가, 잡은 권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당시 정치의 가장 핵심부에 있었습니다. 왕으로부터 어떻게 신뢰를 유지할 것인가는 느헤미야에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런 느헤미야에게 조국의 사정이 보일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일로 인해 금식 하고 괴로워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정치와 경제,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의 소리에 귀를 열어야 합니다. 나와는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움과 가슴 찢어지는 이야기에 대해서 귀를 열고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민족의 아픔을 듣고 함께 아파하는 열린 귀가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행동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행동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와 시대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한반도와 청소년, 청년들을 함께 맡기셨습니다. 바로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린 귀를 가져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야 할 모습에 대해 분명한 그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백성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대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이 갖추어야 할 모습, 하나님 백성다운 삶이 어떠해야하는 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10절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라고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다투고 싸우는 것과 외부의 적이 쳐들어왔을 때 무참히 깨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다운 삶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사야 42장 6절에서 7절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하는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과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이끌어 내어 빛 가운데로 인도해야 될 사명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또 이사야 49장 6절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말씀과 같이 느헤미야가 보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렇게 헤매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일어서서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느헤미야는 가슴 아파하고 울면서 기도합니다.
저도 상담을 통해 혹은 그저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이 관찰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많이 돌이키는 때는 주로 ‘맞아! 이것이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어. 이렇게 살려고 지금까지 고생한 게 아니야!’ 깨닫고 처음 마음을 회복할 때입니다. 자기 비전과 꿈이 새롭게 세워질 때 인생은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느헤미야가 울며 금식한 이유는 자기 민족을 보는 기준 때문이었습니다. 기준…….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로 혹은 아무렇게나 살 백성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꿈꾸며 이 민족을 향한 비전이 느헤미야에게는 있었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만들어야할 이 백성이 오히려 열방의 조롱거리가 되어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이 좀 손해보고 자존심 상하면 몸부림치며 괴로워는 해봤지만, 하나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울며 금식해 보았습니까? 내 안에서 하나님 자녀다운 모습들, 예를 들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역사와 시대에 대한 책임 의식,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몸부림 등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내 자식들과 작은 이익 앞에서는 몸부림치면서도 하나님 계획이 무너지고 하나님 사랑이 감춰지는 것에 대해서는 정작 무덤덤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녀다운 삶의 기준과 꿈과 비전이 없습니다. 기준이 없는 사람은 자기 기준에 따라 살기 때문에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번 선거가 끝나고 선출된 몇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짧게나마 이야기하면서 이해하게 된 그분들 생각은 본인들은 감당할 능력이 없으니 직분의 옷을 입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두 가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님, 자매님! 직분이 여러분 인격을 나타내고 신분을 나타내는 옷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일하라고 주신 쟁기라고 생각하십니까?’ 두 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구원에 확신이 있습니까? 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사셨던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을 위해 사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당신이 자격과 용기, 능력이 있어 세워진 것입니까 아니면 특별히 훈련하여 하나님 일에 쓰임 받도록 하고자 세워진 것입니까?’ 두 분 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직분자에 대한 그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안수집사라면, 권사라면, 장로라면 하는 그림과 현재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사실은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직분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 위해 잘 감당하게 해달라고 몸부림치시면서 기도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목사와 장로, 안수집사와 권사로 세우셨는데 정작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가슴 치며 울어보셨습니까? 이런 안타까움이 없으면 영향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직분과 직위로 권위를 행사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주어진 권위(Given authority)는 없습니다. 스스로 만들어 가지 않으면(owning authority)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느헤미야의 통곡을 회복하십시다. 느헤미야의 금식을 회복하십시다. 내 속에 하나님 자녀다운 삶의 모습이 없음을 안타까워 할 수 있는 양심, 그 인생 기준을 회복하십시다. 그것이 사회와 역사 앞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힘이 됩니다.
1791년 2월 26일 요한 웨슬레가 노예무역 폐지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영국의회의 윌리엄 윌버포스에게 한 장의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힘이 당신을 키우지 않았다면 당신은 종교와 영국, 더 나아가 인간 본성의 적인 혐오스러운 그 죄악에 맞서 영광스러운 투쟁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 일을 위해 당신을 키우지 않았다면 당신은 인간의 적과 악마에게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 편이면 누가 감히 대적하리요? 하나님보다 강한 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이름과 그 강대하심으로 끝까지 나아가십시오. 해 아래 가장 사악한 노예제도가 사라질 때까지……. 어릴 적부터 당신을 인도하신 분께서 이 일뿐 아니라 앞으로도 당신을 강하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의 친애하는 종 존 웨슬리.‘
이 편지를 보낸 지 웨슬리는 4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웨슬레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며 심한 고초를 겪고 있는 윌버포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끝까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결국 1807년 노예무역제도는 폐지되었고, 1833년 윌버포스가 죽고 난 몇 달 후에 영국 제국 전역에서 노예제도가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웨스트민트 사원에 있는 윌버포스의 비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대중의 편에 선 훌륭한 인물이자 박애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 리더/ 동포의 육체적 영적 필요를 충족시킨 인물/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영국에서 미국노예무역이라는 죄악을 쫓아버린 업적/ 대형제국의 모든 식민지에서 노예제도 폐지의 길을 닦은 업적/ 그의 이름은 이런 업적으로 칭송 받으리라!’
여러분은 자신의 어떤 현재를 사랑하십니까? 좀더 많은 돈과 유명세를 사랑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셔야 됩니다. 하나님 자녀답게 살 때 때로는 고난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계속해서 그리워하고 사모하며 인생의 목표로 삼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소금처럼 빛처럼 사용됩니다. 여러분 자신과 가정, 이 시대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바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 영광이 드러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시는 인생 기준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가 민족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던 셋째 이유는, 운명을 바꿀 진정한 영향력을 가진 하나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4-5절 말씀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 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나라는 바로 메데파사였습니다. 지금 느헤미야가 섬기고 있는 왕은 고대근동 아니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자였습니다. 메데파사 왕의 영향력과 힘으로라면 고향에 돌아가 성을 건축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왕과 느헤미야는 절대적인 관계였습니다. 왕은 느헤미야를 무척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느헤미야가 청한다며 왕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왕에게 문제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의 미래에 가장 본질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하나님께 먼저 아뢰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역사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의 자리로 나갔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왕에게 바로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보다 하나님을 움직일 때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의 비밀을 아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느헤미야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기도의 사람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알고 기도의 능력을 믿었으며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 뿐 아닙니다. 어두운 역사를 밝혔던 수많은 사람들과 자기 운명을 극복하며 하나님 영광을 드러냈던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의 공통점은 기도였다는 사실입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이 느헤미야 1장을 강의하면서 느헤미야 1장 말씀은 느헤미야의 기도와 행동이 너무나 잘 어우러진 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다음과 같이 4가지 항목으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기도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이에게 참을성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기도 전에 먼저 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하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둘째 기도는 사물의 본질을 보게 합니다. 어떤 일을 행할 때 본질이 아닌 부수적인 것을 보고 생명을 걸었던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나고 나면 쓸데없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게 되면 그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셋째 기도는 마음을 안정시켜 줍니다. 두려움과 근심이 있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마음에 안정을 주고 평안 가운데 간구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믿음에 생명력을 더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 믿음이 더욱 생명력 있게 살아나 환경을 보지 않고 여건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들고 나갈 수 있게 됩니다.
나폴레옹 장군이 전쟁을 치를 때면, 고지에 올라가 전쟁을 지켜보며 상황을 분석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누가 이길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느 때처럼 전투를 바라보고 있던 나폴레옹은 옆에 있는 네이(Ney)장군에게 명령했다고 합니다. “장군 저기 저 언덕에 농가가 보이지 않소? 저 농가를 점령하시오!” “아니, 장군님 저 농가는 별 쓸모가 없어 보이는데요.” “아니오. 내 말대로 하시오! 저 농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괜찮소. 꼭 사수하시오.” 네이 장군은 나폴레옹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복종했고, 농가를 점령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이렇게 승리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었던 나폴레옹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승리에 능한 장군들은 어디를 거점으로 해야 할지 잘 압니다.
영적인 사람은 무엇이 승리의 길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남편 되시는 분들 본인들이 자기 아내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아내는 내 말이면 껌뻑 죽어!’ 아내들께서는 남편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녀들에게 한번 물어 보십시오. ‘엄마 아빠가 너희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냐?’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예’라고 대답은 할지 모르지요.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나도 내 자신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데 누군들 내게 절대적인 존재일 수 있겠습니까? 내게 가장 영향력 있는 분이 누구일까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내 아내에게 가장 영향을 줄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자녀에게 가장 영향을 줄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아내와 자녀를 설득하기 전에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요? 영향력 있는 하나님께 내 자신이 먼저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고달프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무언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을 통해 나라가 달라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통해 달라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역사를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내 가정의 역사와 시대의 역사가 흘러가는 데에 눈 뜨시기 바랍니다. 책임지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녀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한 그림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린 삶의 모습이 되지 못할 때 통곡 하십시오. 그때 금식하시고 회개 하십시오. 눈앞에 조그마한 이익 앞에서 괴로워하고 고통스로워 몸부림치지 말고 조금 더 거룩한 일로 울면서 금식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능력의 하나님 앞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내가 다른 누구에게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기도 앞에 꼼짝하지 못하시도록, 여러분의 부르짖음 앞에 듣지 않으면 안 되시도록 존귀하고 귀한 존재가 되십시오. 여기서부터 우리는 회복의 역사를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내 삶과 가정, 역사와 민족이 회복하는 일에 쓰임 받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역사를 바꾸는 기도
느 1:1-5 / 이동원목사
유명한 영국수상 윈스톤 쳐칠경은 그의 "전쟁 회고록"(War Memories)에서 1940.9.15을 가르쳐 자기 조국인 영국이 당시의 나치 독일과의 공중전에서 특별한 승리를 거둔 "절정의 날"이었다고 증언했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 공군기와 폭격기가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 상황에서 영국측으로서는 거의 방어수단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독일군 이 결정적인 승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독일 비행기들이 전혀 이유없이 10분동안에 걸쳐 전면적인 후퇴를 시작한 것입니다. 영국의 공군 전투 부대 사령관이었던 공군대장 다우딩(Dowding)경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날을 회고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의당 일어나야 할 사건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만 그럽이 쓴 "탁월한 중보기도의 사람 리즈 하월즈(Rees Howells)"에 보면 당시 웨일즈 성경대학의 학장이었던 리즈 하월즈의 영향으로 쳐칠수상은 두 번에 걸친 전국적인 기도의 날을 선포하여 온 교회 온 국민에게 기도를 호소했습니다. 리즈 하월즈 자신은 독일의 공습이 시작되자 학교강당에서 교직원 학생들과 함께 매일 아침1시간과 점심후 그리고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기도에 힘썼고 공습이 절정에 달할때마다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증거합니다. 그는 독일공군이 이유없는 후퇴를 하던 9.15직전에 기도회를 인도하며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잦은 공습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지옥에서 구원받은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공습에서도 구원받을수 있다는 것을 왜 믿지 못합니까?---그러나 우리가 만일 이때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수만 있다면 나치속에서 역사하는 마귀의 체제는 오래지 않아 종말을 고할 것이며, 고귀한 생명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흐름을 바꾸시는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때의 리즈 하월즈와 영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가르쳐 "역사를 바꾸는 기도"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역사를 바꾼 또 하나의 기도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는 주전445년이나 444년경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의 세계의 신흥제국 페르샤 정부에서 유대인 출신으로 아다사스다왕 1세의 비서실장을 지내고 있었던 느헤미야는 조국 이스라엘, 특히 수도인 예루살렘의 상황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당시 그의 조국은 페르샤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함으로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조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조국건설에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파괴되어 짐으로 백성들의 삶은 약탈과 무질서에 노출된채 깊은 절망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마침내 조국에 돌아가 자기 조국을 위해 예루살렘 성을 쌓아주기로 결단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성은 백성들의 삶의 안전과 미래의 번영을 보장하는 매우 중요한 보호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사역은 그의 기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역사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역사를 바꾸어야 할 답답한 현실은 없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1. 역사에 대한 열린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에 대한 열린 의식이란 무엇입니까? 역사적 현실에 대한 눈이 열려 있고 귀가 열려 있고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진정한 기도를 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 많이 하는 사람하면 어떤 사람을 연상하게 됩니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이 세상을 향해서는 마음을 닫고 산으로 올라가서 주여 삼창하는 사람일까요? 저는 역사의식이 닫힌 사람은 결코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의 기도는 기도해도 결코 자신과 가정을 위한 기복적인 기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이 아닌 이웃을 위해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이런 사람에게 기대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 본문으로 돌아와 느헤미야의 기도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절에 보면 자신의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장관하고 있던 이 사람이 어느날 고국을 방문하고 온 사람들에게 고국의 형편을 묻습니다. "--유다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했습니다. 그가 외국에 와서 출세하여 살고 있지만 고국에 대한 관심을 접치 못하고 있었던 증거라고 할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그 내용이 바로 3절입니다. 그리고 그는 조국이라는 역사의 장에서 들려온 소식을 듣고 그 현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4절은 느헤미야의 반응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렇게 해서 그의 기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식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을까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여러분 주변을 천천히 열린 눈으로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을 보십시오. 자녀들을 보십시오. 배우자를 보십시오. 찢긴 가슴으로 아파하는 이웃들을 보십시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고백할 정도의 우리 사회, 우리 민족의 답답한 현실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이 역사의 장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참으로 듣고 있다면 그 정직한 현실을 보고 있다면 그 아픔을 느끼고 있다면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역사에 대한 열린 의식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엎드려 이 민족을 위해 이웃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가정과 미래를 위해서도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역사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하려면 먼저 역사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주인이 누구이십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역사를 바꾸시고 새롭게 하실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자이실뿐 아니라 섭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가르쳐 영어로 'history'라고 합니다. his+story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 곧 하나님의 섭리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역사를 섭리하시는 그분에 대한 믿음 없이 그분에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역사의 주인으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1)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신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5절에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부르면서 제일 먼저 붙인 수식어가 '크신' 하나님(Great God)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직면한 문제가 아무리 커도 그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보다 문제가 여전히 더 크게 보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까요? 결국 우리는 그 문제아래 눌리고 절망해 버릴 것입니다.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이유가 아니었습니까? 그가 시선을 주님께 두고 있는한 파도가 두려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선을 파도에 두기 시작하자 주님은 작게 보이고 파도만 크게 보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믿음없는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고 크게 보여도 아직 주 하나님이 더 크게만 보인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심을 믿을수 있다면 우리는 주저앉을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의 고단한 역사가 바꾸어지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러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2)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5절에서 느헤미야는 기도를 시작하며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지금의 역사적 현실이 아무리 참담해도 그는 아직도 자기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이고 성경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오늘이 아무리 열악한 현실이어도 이 백성을 축복하시고 사용하시겠다는 약속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을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약속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해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또한 새 언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변함없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약속을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옛 언약인 구약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궁극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행전2:39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메시야의 언약도 궁극적으로 오늘의 우리를 위한 것임을 역설하지 않습니까?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오늘의 삶이 고단하십니까? 그 고단한 환경에만 시선을 두지 마시고 약속의 말씀을 펴서 읽으십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희망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붙잡고 외치십시오. "주님, 나는 주께서 내게 주시는 이 약속을 지키실줄을 믿습니다"고. 그러면 믿음대로 되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런 질문이 있을수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나에게 하나님이 관심을 가져 주실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19세기말부터 시작하여 20세기초에 기독교가 가진자들 소위 기득권자들에게만 관심을 가지는 종교로 오해되어 혹독하게 비판된 때가 있었습니다. 소위 기독교가 선교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정치적이고 물량적인 방법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는 강자의 종교 혹은 강자만을 위한 종교로 곡해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20세기 초부터 일부 신학자들가운데 성경을 지배자의 관점이 아닌 눌린자의 관점에서 다시 연구하고 읽기 시작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신학적 운동은 해방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해방신학을 수용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해방신학의 강조점들 가운데는 오히려 반 기독교적인 것들이 적지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방신학이 기독교계 전반에 기여한 분명하고 긍정적인 요인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에 우리가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의 대상으로 언급되는 4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언급은 문자 그대로 성경에 넘쳐 납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고아와 과부 가난한자들 그리고 나그네들인 것입니다. 한 신학자는 "성경에 나타난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거의 편애에 가깝다"는 표현까지 썼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하나님의 관심과 편애의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저는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이들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어떤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긍휼이란 약자들이나 약점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심의 덕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다시 5절의 하반부를 보십시오. 그는"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고 기도합니다. 주께서는 이런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저는 이런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며 넉넉함으로 응답하신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증거합니다. 여기서 풍성함이란 끝이없는 넉넉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빈민선교 하시는 목사님이 바다 구경을 한번도 못한 가난한 빈민촌 청소년들을 데리고 자동차로 해안에 도착하여 모래사장에 내려놓자 한 아이가 바다를 보더니 울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왜 우느냐고 했더니 "목사님, 저는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넉넉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수 있었습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를 꼭 안아주면서 "그래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저 바다처럼 끝이 없이 넉넉하시지요"하고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의 백성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직도 살아 숨쉬는 이유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 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렘애 3:22-23)
나라를 변화 시키는 힘
느 1:1-7 / 김경년목사
지금 제가 자기고 나온 것은 여러분들이 마시는 우유팩에 나오는 미아 찾기입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심정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반대로 입양된 자녀들의 부모님을 찾는 안타까운 사연도 우리는 종종 듣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애절한 사연을 가지고 찾는 것일까요? 그것은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찾는 것은 뿌리를 찾는 일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찾는 것은 생명을 찾는 일입니다. 뿌리는 생명입니다. 만약 뿌리를 뒤집어 놓으면 말라서 죽습니다. 뿌리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잃은 슬픔을 누구보다 더 잘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나라를 잃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야 했습니까? 또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까?
오늘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선열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희생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제와 싸우다 숨진 많은 애국자들과 공산군과 싸우다 쓰러진 이름모를 용사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라를 살리고 지키는 일에 언제나 성도들이 앞장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1운동 당시 우리나라에 기독교인 인구가 2십만명 밖에 안되었지만 기독교인들의 역할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6.25사변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위해 앞장서서 목숨을 바쳐 싸웠습니다.
애국정신과 신앙정신은 별개가 아닙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자세이며 신앙이 있다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뉴욕에서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이 애국정신에 대하여 이렇게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상황 속에서 애국정신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애국 정신이란 첫째, 나라를 자기보다 앞세우는 정신입니다. 둘째, 짧고 광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닌 일생을 통한 조용하고 끈질긴 헌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애국정신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볼 수 있습니다. 애국정신이란 자기보다 나라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전쟁이 나, 나라의 어려움이 닥치면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다른 나라로 이민가는 것이 아니라, 이민 간 사람도 자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조국을 찾아오는 정신입니다. 또 애국정신이란 짧고 광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닙니다. 일생을 통하여 조용하고 그리고 끈질기게 나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갔습니다.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면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식품업자들, 저들은 쓰레기 만두를 만들어 자기도 안 먹는 것을 국민들에게 팔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태로운 지경입니다. 우리나라의 부채가 지금 해마다 늘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미군은 갑자기 철수한다고 난리입니다.
모든 상황이 이러한대도 우리 정부와 위정자들은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교회만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민족종교입니다. 즉 민족을 살릴 수 있는 힘이 기독교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나라의 일에 무관심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민족이 사는 길이 우리 기독교가 사는 길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시대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께서 어느 시대에나 사람을 세우십니다. 오늘 말씀을 역사적으로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왜 구원의 역사입니까? 그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 그 자체가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구약 느헤미야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역사의 배경
우리들은 느헤미야서를 살펴보기에 앞서 역사적인 배경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 1차 포로 귀환은 바사왕 고레스 왕 때에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인솔하에 이루어졌습니다.
귀환 후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고레스 왕때에 성전 기초를 놓았지만 다리오 왕때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에스라 5~6장).
둘째, 1차 포로와 2차 포로 귀환 사이에 80년이라는 간격이 있습니다.
2차 포로 귀환은 1차 포로 귀환 후 80년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80년 기간동안 다리오 왕 다음에 등장한 아하수에로 왕때의 일입니다(에스더). 역사적으로 이 사건은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에 일어납니다.
셋째, 1차 포로 귀환 후 80년만에 제 2차 귀환이 아하수에로 왕 다음에 등장한 바사의 왕인 아닥사스왕 때에 제사장이며 율법 학자인 에스라의 인솔로 이루어집니다(에스라 7~10장).
넷째, 제 3차 포로 귀환이 유다 총독 느헤미야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느헤미야서).
3차 귀환은 2차 포로 귀환 후 14년에 이루어졌으며 2차 포로 귀환 때처럼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 때 이루어졌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14년 간격으로 본국으로 돌아와 활동했던 같은 시대의 지도자였습니다.
에스라가 신앙 지도자로 일했다면 느헤미야는 정치적인 행정 지도자로 일했습니다. 느헤미야에서는 제 3차 귀환과 성벽 재건이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이 성벽 재건은 유다 나라가 회복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 역사가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누구입니까?
본문 1절에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라고 합니다.
“하가랴의 아들인 느헤미야”라고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바사의 왕 아닥사스다 왕이 20년 째 되는 해입니다. 그 해에 느헤미야는 바사의 왕이 거주하는 수산궁에서 왕의 술관원으로 일했습니다. 당시 바사왕은 계절마다 옮겨 다니면서 거주한 궁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수산궁은 바사 왕의 겨울에 거주하는 겨울 궁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를 바사 왕의 궁전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우연히 그곳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떤 계획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를 미리 왕의 궁에서 일하게 하므로 왕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 중에 아직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들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는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오늘 우리가 여기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좌절하거나 낙심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승리하게 합니다.
느헤미야는 바사의 수산궁에서 본국의 좋지 못한 소식을 듣습니다.
본문 2절에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느헤미야는 포로 중에서 태어난 포로 2세입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바사 왕궁에서 일하는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형제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 예루살렘에서 바사로 왔습니다. 그들에게 본국의 소식을 듣습니다. 포로민의 후손인 느헤미야는 부모로부터 자기 민족에 관해서 들었고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 자기 민족의 조상들이 포로로 잡혀 오게 되었으며 그 하나님께서 다시 포로에서 건져 주실 것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포로 기간 중에서도 그 예수님의 족보에 해당된 구원의 줄기를 중단시키지 않고 계속 이어오도록 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민족을 포로에서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하여 지도자인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을 준비시켜 주셨다는 점입니다. 이제 때가 되매 느헤미야에게 유다 본국의 소식을 듣게 하시고 그에게 자기 민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느헤미야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느헤미야를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위대할 뿐입니다.
느헤미야의 형제를 유다 예루살렘에서 바사에 오도록 역사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바사까지의 거리는 약 1천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당시 자동차나 비행기가 없던 그런 시대에 이 거리를 오고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거리에 관계없이 느헤미야의 형제 중 하나니로 하여금 바사에 있는 느헤미야에게 가도록 인도해 주셨다는 점입니다.
예루살렘의 어려운 형편입니다.
본문 3절에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손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입니다.
느헤미야가 바사의 수산궁에서 하나니로부터 들은 유다의 소식은 매우 비극적이었습니다.
첫째, 유다 백성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능욕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셋째,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넷째, 예루살렘 성문들이 불에 타 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직 유다 나라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느헤미야가 금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본문 4절에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라는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말하기 전에 어떤 자세와 태도로 기도를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 말씀입니다.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면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느헤미야가 본국의 형편을 듣고 얼마나 애통했는지를 보여준 대목입니다. 우리에게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통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느헤미야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 합니다.
본문 5절에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라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녀가 부모님에게 “아빠 1주일 전에 저와 약속을 했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1등을 하면 컴퓨터를 사주신다고 한 약속 기억하시죠. 이번에 제가 1등을 했습니다. 컴퓨터 사주세요.” 자녀가 이렇게 나올 때는 부모는 꼼짝 못합니다. 자녀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약속해 주신 그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할 때 무조건 도와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내가 얼마나 지켰는지, 지키고 나서 그 약속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나라와 민족의 죄를 자기 잘못으로 회개합니다.
본문 6~7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기도는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고백하는 중보자의 자세입니다. 책임 있는 자의 행동입니다.
첫째,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한다는 고백입니다(6).
둘째“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였다”고 고백합니다(7).
이런 행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행동입니다. 이런 것을 기뻐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 론
우리는 나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민족의 죄를 나의 죄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어려움은 바로 나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책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모든 힘의 원천은 어디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돈에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돈이 많으면 힘이 많은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은 힘의 원천이 아닙니다. 돈이 있으면 편리하겠지만 힘의 원천을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이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있으면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이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정보가 힘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 보다 더 유익하겠지만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힘이 됩니까?
참된 힘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운행자이십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그분의 손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힘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길은 무엇일까요? 오직 기도 외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힘이 곧 하나님의 힘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제가 결혼 시계를 세탁기에 모르고 넣고 돌려서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집사람이 결혼 기념으로 새 시계를 사주었습니다. 늘 시계를 보면 집사람이 생각납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시계라도 약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금시계를 가지고 있어서 약이 닳으면 시계가 멈추게 됩니다. 시계의 힘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보이지 않지만 속에 들어있는 조그마한 약에 있습니다.
우리의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힘은 우리의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기도의 힘에 있습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국가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이 변화하고 다시 살 길은 기도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여름 가뭄에 양수기로 땅속에 물을 끌어올리는 것은 도움은 되겠지만 물을 가뭄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물을 내리게 하면 물 부족을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3년6개월 동안 가뭄으로 물 한 방울 내리지 않던 이스라엘에 기도로 말미암아 하늘 문을 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다는 진단 결과를 받았어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의 힘을 잊지 맙시다. 아멘
성공이 아닌 승리하는 삶
느 1:1-9 / 서정호목사
어제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전 국민이 열광하며 성원을 보냈고 우리나라 선수들이 열심히 싸웠지만 승리하지 못하므로 아쉽게 16강에 오르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을 남지만 세계열강들과 넉넉하게 겨룰 수 있음에 자부심도 긍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격려를 보내고 싶습니다.
모든 목적지에는 승리가 기다리고 있을 때 함께 기뻐하고 흥분도 하고 열광도 하고 살아가는 보람도 느끼고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승리한 경험이 많습니까? 아니면 실패의 경험이 많습니까? 또한 여러분은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죄와 죄책감, 가난과 질병, 절망과 좌절, 교만과 이기심, 미움과 시기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경험이나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 품안에 있는 성도,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구원 안에 있는 성도는 아무리 어렵고 큰 환난이 닥쳐와도 보호를 받으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경쟁하지 않고 살 수 없는 존재이며 우리는 늘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끔 이런 질문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왜 저 사람은 행복한데 나는 행복하지 못할까? 왜 저 사람은 기쁘게 사는데 난 기쁘게 살지 못할까? 왜 저 사람은 늘 감사와 고마움과 얼굴의 생기와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사는데 난 두려움과 섭섭함과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가?
삶의 경쟁력과 삶의 차이점, 모든 행동이나 표정도 마음의 태도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태도가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고 그 사람의 오늘의 현실도 결정합니다. 마음이 편안하면 눈빛도 예쁘고 표정도 예쁘고 걸음걸이도 예쁘지만 마음이 불편하면 이런 것들이 다 흔들립니다.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붙들었더니 비굴하지 않았고,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혔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오늘도 잘 달려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는“만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고 하면 누가 나를 대적하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나의 후원자가 된다면 내가 무엇을 겁낼 것이 있겠는가?”입니다.
인간은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단순하게 반응하지 않고 생각을 하고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크게 변화하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삶을 부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늘 긍정적이고 소망이 있는 해석을 합니다. 즉 좋은 쪽으로 인생의 결론을 맺습니다. 그래서 만사형통합니다. 이 사람은 성공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승리할 때 행복한 것이지 성공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유학생활 중에 고생 많이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가는 곳마다 적응을 잘 하고 어려움을 잘 이겨냅니다. 그런데 그가 공부를 해서 학위를 받았지만 원하는 학교에서 교수가 될 수 없어서 시골에 가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나 몸이 아파서 목회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이 잘 안 풀리고 불행해보이지만 그는 항상 자신에게 정직하고 늘 되는 쪽으로 생각을 합니다. 즉 어려움이 올 때마다 잘 적응합니다. 그는 세상적으로는 성공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이 보일지라도 분명한 것은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승리해 나가는 그의 삶을 가치로 계산한다면 어마어마한 부자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부자를 쓰십니다. 즉 갖추어지고 준비된 자를 쓰십니다.
승리한 사람 느헤미야
그는 나라가 망해 페르시아에 끌려가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어느 날 자기 나라 자기 고향 예루살렘이 다 망가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왕의 허락으로 예루살렘에 총독임명을 받아 고향에 돌아와서 성을 쌓습니다. 벌써 그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자식고생 안 시키려고 국적을 포기하거나 살기 힘들어서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방해가 예사롭지를 않습니다. 처음에는 협박을 하고 그 다음에는 싸움을 걸어옵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협상을 걸어 왔습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이 성을 쌓아서 페르시아 왕을 배반하려고 한다는 음모를 꾸며 세상에 소문이 나게 합니다. 그러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성을 다 쌓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또 이겨내고 또 이겨낸 힘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뜻한 바를 이루려는 마음의 힘입니다. 마음으로 이기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민수기13-14장에 보면 정탐 군을 보내고 보고를 받게 되는데 10명이 와서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낙심을 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 때 하나님이 진노하시면서 쓰신 단어가 있습니다. 민14:33“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그들이 40년 고생하게 되는 이유가 패역입니다. 이 패역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낙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못한다, 안 된다 하면서 포기하는 것이 패역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크게 화내실 일입니다.
두 가지의 패역
하나는 삶의 의미도 없이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패역입니다. 건강이 있는데도 공부를 할 수 있는데도 노력을 할 수 있는데도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패역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열심히 하다가도 인간적인 생각으로 안 된다고 하고, 노력하다가 그 대가가 없다고 실망하여 포기하는 것도 패역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광야로 몰고 나가십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승리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델이 될 만한 사람들은 주로 성공한 사람들이기 보다는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요셉도 성공한 사람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나를 형님들이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나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과거나 관계를 다 아름답게 해석해 내는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지 늘 좋게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자기에게 피해를 주었어도 하나님은 아시리라 생각하면서 더 이상 그 사람 때문에 인생을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승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십니다.
다윗도 성공한 사람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믿음으로 골리앗을 이기고 사울을 믿음으로 존경하고 자기의 죄를 회개할 줄 아는 자기와의 싸움이나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밧세바를 간음하고 나서 승리한 사람인데 그는 그 사건이후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이 말은 "하나님 제게서 부정적인 태도를 없애 주시고 제가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제 안에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영을 주시옵소서” 스스로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일어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포기하지 않고 승리할 때까지 싸우는 사람을 하나님은 자기편으로 삼으십니다.
사도바울도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적으로 볼 때 평생 고생만 한 사람이지만 그는 승리한 사람입니다. 한 번은 전도하다가 매를 죽도록 맞고 감옥에 갇혔으나 그는 거기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찬송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 승리가 곧 감옥에 지진이 일어나서 풀려나는 기적을 가져옵니다. 항상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따라 오지만 포기하는 사람은 세상이 더욱 어둡고 불합리한 일들만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자랑이 되는 것은 죽음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죽음을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승리한 삶입니다. 그 승리가 곧 부활이라는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공했다기보다는 승리한 분입니다. 성령이 왜 오셨습니까? 우리를 성공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승리하도록 돕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증인이라는 말은 순교자를 말하는데 능력 받으면 죽음 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순교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죽을 수 있는 것이 승리입니다. 보통 사람은 죽지 못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만이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넉넉한 이김
여러분은 요즘 잘 이기고 있습니까? 승리하기를 선택한다면 아무리 견디기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 다가온다 해도 이겨내기만 하면 됩니다. 고난은 이기라고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선수들은 이기기 위해 싸우고 그 게임이 짐이 아니라 돈입니다. 하나님의 성령 받은 사람들은 어려움이 짐이 아니라 승리이고 축복입니다. 어떻게 이기시겠습니까? 수없는 원수들이 나를 따라오더라도 그것을 바라보지 마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말씀의 갑옷을 입으시고 기도의 창을 가지시고 그리고 믿음의 방패를 앞에 잡고 나가면 이 세상에서 반드시 이기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는 여러 번 바닥에 떨어지고, 밟히며, 더러워지는 일이 있습니다. 실패라는 이름으로, 실수라는 이름으로 또는 패배라는 이름으로 겪게 되는 그 아픔들을 겪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쓸 모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우리 인간이 실패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의 가치는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겨지고 짓밟혀도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가치를 우리에게 부여하시고 그리고 사랑하시며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롭거나 불의할 때를 불문하고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잘 났을 때나 못 났을 때를 불문하고 사랑하시며 우리가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 그리고 건강할 때나 약할 때를 막론하고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깊은 수렁과 같은 고난 속에 있을 때, 가장 위험한 적은 바로 ‘외로움’ 입니다. 세상 그 넓은 곳에 나 혼자만 던져진 채 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결코 외롭지 않은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사랑’이 고난당하고 있는 우리를 붙잡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외로움 속에서 홀로 고난과 싸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두르고 있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눈을 들어 주변을 살필 때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이 주변에 있습니까? 그에게 이 놀라운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
인생은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 때는 공부와의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좀 더 자고 싶고 좀 더 놀고 싶은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건강한 생활을 위해서도 자신과의 싸움을 하여야만 합니다. 음식을 절제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과의 싸움인데 음식을 절제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고 많은 사람이 이 작은 싸움에서조차 승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벌떡 일어나 여건을 찾아 나서는 사람,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스스로 여건을 만들어내는 사람만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행운을 불러온 사람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루어내고 싶다면 자신의 여건을 만들어보세요. 다른 사람의 여건으로 자신을 만들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여건을 스스로 만들어 승리를 향한 길을 가는 자가 행복하고 고귀한 사람입니다.
6, 25 오십육 주년을 맞으며
6,25전쟁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돌려놓은 뜻 깊은 전쟁이었습니다. 우리 겨레가 이 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이런 희생을 통하여 일류 역사에 큰 공로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전쟁에서 세계적화(世界赤化)의 설계를 품고 한 단계 한 단 계씩 그 계획을 실천하여 나가던 국제 공산주의를 가로 막지 못하였더라면 지금의 세계는 심히 어려운 처지에 처하여 있을 것입니다. 중국이 공산화 된지 불과 8개월여 만에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6,25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빠른 시일 안에 전 세계를 공산화 하려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세계 전략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6,25전쟁을 통하여 16개국이 유엔의 깃발 아래 참전하여 이 땅의 공산화를 막아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6,25전쟁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우리말에 과거를 나타내는 말로‘어제’가 있고 현재를 나타내는 말로‘오늘’이 있지만 미래를 나타내는 말이 없습니다. 내일이란 말이 있으나 순수 우리말이 아닌 한자의 내일(來日)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처지가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형편이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이민가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 중에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민 가려는 마음을 품는 것이 '오늘이 고생스러워서’가 아니라‘내일에의 희망을 가질 수 없어서’라고 합니다. 그간에 우리는 너무 과거사에 매달려 있거나 지난날의 시시비비를 밝히려다 내일에의 희망을 잃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싸우게 되면 미래가 희생당한다고 합니다. 어제를 잊어서도 아니 되지만 어제에 매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어제와 오늘을 소중히 하는 것은 밝은 내일을 열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나마 우리 모두가 보다 밝은 내일을 열어나가기 위해 어제와 오늘을 함께 극복하여 나가는 일에 마음과 뜻을 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큰 승리
세상에는 이기는 승리도 있지만 지면서 이기는 승리도 있습니다. 사람을 파멸시키는 패배가 있는가 하면 누군가를 일깨우는 패배도 있습니다. 인생은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따라 드러납니다. 내가 의심하지 않는 참다운 의미의 승리는 조그만 씨앗의 생명력 속에 숨어 있습니다. 씨앗을 시커먼 흙 속에 심어 놓으면 그것만으로 승리의 조짐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씨앗의 승리를 제대로 축하려면 먼저 시간이 흘러가야 합니다. 가장 큰 승리는 가장 빠르고, 가장 똑똑하고, 가장 총명하고, 가장 부유한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는 사람에게 오는 것입니다. 누구나 넘어질 때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넘어진 채로 주저앉으면 영원한 패배자가 되지만 다시 일어서면 반드시 승리자가 됩니다. 민족은, 역사는 더욱 그러합니다. 일어나야 큰 승리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
느 1:2-4 / 이정익목사
8. 15 광복절을 맞이했습니다. 올해로 벌써 59돌을 맞이했습니다. 마침 금년 8,15는 주일날 맞게 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나라사랑하는 마음들이 고취되었으면 합니다. 60여 년 전 나라를 잃고 방황 댈 때 우리선조들은 참 고민이 많고 갈등과 속상함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때는 한편 마음이 막연했을 것입니다. 상대 일본은 너무 강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 마음은 슬펐을 것입니다. 어쩌다 나라를 빼앗기고 우리가 이렇게 사는가 하고 후세에 면목이 없어 난감한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라 없는 백성은 이렇게 할말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가 뭐래도 그 시대를 책임감 있게 살고 그 시대를 염려하며 살아가는 계층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라를 사랑하는 성숙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형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중심을 잃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한 시대를 중심 있게 살아갔던 느헤미야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아주 혼돈스러운 시대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BC444년경 예수탄생 400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때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 인재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때 느헤미야도 잡혀갔습니다. 바벨론이 다시 바사에게 망합니다. 예루살렘은 바사제국이 지배하던 127도 중 한도로 편입되어 지배를 당합니다. 주변의 이방인들로 하여금 괴롭힘과 능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찬란했던 예루살렘 도성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훼파되고 하나님 백성은 초라하게 낮아진 채 환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때 성경을 보면 느헤미야가 등장합니다. 백성의 한사람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결국 이 느헤미야를 통해서 무너진 고국의 성벽을 재건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 느헤미야에게서 몇 가지 정신과 책임 있는 신앙자세를 보게 됩니다. 그 느헤미야의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타났으면 합니다.
“성실성”
느헤미야는 바사왕국에서 포로로 생활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실했습니다. 그래서 포로 신분이었는데도 아닥사스다 왕의 음식 수종자로 간택을 받습니다. 그가 그런 중책을 맡은 것은 그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가 하는 점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태도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인정받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가끔 교회가 불신 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 마음이 슬퍼집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이 사람들 입에 매도되고 비난받을 때 마다 마음이 슬퍼집니다. 세상에서 칭찬받고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칭찬받고 산다면 더할 나위없는 일이지만 보통은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을 받고 살아갑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면 비난을 받고 삽니까. 요셉, 다니엘, 모르드개, 아브라함, 이삭이 모두 남의 나라에서 살았으면서도 그 나라 왕 곁에 앉아서 일하고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예가 왕의 음식을 책임 맡은 자로 선택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 인정받았다는 말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입으로만 나라사랑한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책임 있는 삶이 뒷받침 된 채 그 시대를 살아야 인정받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시대를 성실한 사람으로 살아갔던 대표자였습니다.
“고국 염려”
그렇게 남의 나라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사람이 자기 나라와 민족을 한시인들 잊고 살았겠습니까. 어느 날 예루살렘에 살던 친동생 하나니가 찾아왔습니다. 동생이 온 이유는 지금 예루살렘 형편이 급박하게 돌아가니까 페르시아 왕궁에서 고위직에 있는 형에게 알려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물었습니다.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2)”, 대답하기를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란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하는지라”(3). 지금 예루살렘 살고 있는 남은 자들은 능욕을 당하고 성전은 불타서 훼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순간 슬퍼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다”(4)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고국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을 때 “아 나는 그때 포로로 잡혀온 것이 다행이었구나.”하고 생각한 것이 아니고 슬퍼하며 “내 동포는 그동안 고난을 당하고 살았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편안하게 살았구나.”하는 자책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나라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남북대치가 한창이던 70년대 초 미국에 이민 간 어느 장로가 주일날 대표기도하면서 그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전쟁의 위험과 지옥 같은 서울을 떠나 천국 같은 미국으로 이민 오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장로 입에서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모두 이 차원을 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비판받고 사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내 백성이 지금 능욕을 당하고 내 나라, 내 동포가 지금 능욕당하고 성전이 불타고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을 듣자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나라사랑하는 마음이고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하고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공동체의식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정신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라가 어렵고 위기에 처하고 힘들 때는 염려하여야 하고 눈물 흘려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느헤미야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선조로 두고 나라 지도자로 두면 그 정신이 대대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애국자를 두고 나라사랑하는 지도자를 둔 나라의 백성들은 그 정신이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여러분, 중동전이 벌어졌을 때 있었다는 이야기 아시지 않습니까. 중동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에 와 공부하던 이스라엘학생과 아랍학생이 함께 공부했는데 한 교수가 두 학생을 불러 “오늘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는데 아느냐“ 하니 모두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이 교수님이 “너희들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를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두 학생이 모두 결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숙사에 문의해 보니 “이스라엘 학생은 어제 귀국하여야 한다고 귀국 수속을 했고 아랍학생은 고국에서 징집영장이 올까 걱정하면서 기숙사를 옮겨야 한다고 나갔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느헤미야 같은 나라사랑하는 마음들이 성경을 통해서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해진 영향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역사를 배우고 영향을 받은 그 후손들이 이런 정신을 이어갔을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나라 사랑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모두 자기중심, 자기 이익 챙기는데 분주합니다. 엊그제 있었던 모 정유회사 노동자파업 사태를 보면서 참 철이 없어도 분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정유회사 노동자들은 연봉 7천만 원을 받고 입원하면 특급병실을 사용하고 풀장 딸린 사원 아파트에 사는 노동자들입니다. 세상 천지에 이런 노동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 회사 노동자들은 미국 본사 칼텍스 근로자들 임금의 꼭 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우가 부족하다고 자기 회사 회장 목을 치는 동영상을 올려놓고 파업을 하고 있으니 이게 나라를 사랑하고 자기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뿐 아니고 신입사원을 뽑지 못하게 하고 자기들 월급만 올려달라고 하니 이게 극단의 이기주의 아니고 뭡니까. 또 한국 바스프 여수공장에서는 10% 임금인상과 매출액의 5%를 성과급으로 달라고 파업을 했습니다. 그러면 연봉이 1억 2천만 원입니다. 지금 이 땅의 노동자들이 세상 물정 모르고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지금 대다수 근로자들은 회사가 문을 닫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어 피서 철 휴가도 제대로 가지 못하는 실정인 것을 그들이 알기나 하는지 모릅니다.
이 나라는 위아래로 생각하는 것들이 모두 이 정도 수준입니다. 참 우리나라 가 지금 위태위태합니다. 참 걱정됩니다. 걱정이 경제만 걱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상도 이념도 걱정입니다. 빨치산 출신 간첩 비전향수 3명이 모진 고문을 끝까지 극복하면서도 전향하지 않고 사상을 고집했다고 해서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민주화 인사라고 부르자고 합니다. 그리고 의문사위에서 간첩혐의로 복역한 사람이 군 장성들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해군이 경계선을 넘어오는 적에게 경고했다고 옷을 벗기고 윽박질렀습니다. 문제가 된 북방한계선이 무너지면 곧장 영종도 국제공항이 적의 손에 넘어갑니다. 또 백령도로 가는 뱃길도 적의 수중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북방한계선은 사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의 군함이 그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보면 분명 북한 군함인데 그 군함도 2년 전 서해교전 때 우리 고속정에 포격을 가했던 그 군함이 지금 중국어선이 내려가고 있다고 기만교신을 하며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청와대에 보고하기를 기만교신을 하고 있다는 말은 누락하고 경고포격으로 물리쳤다고 보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왜 북한 군함으로부터 교신이 있었는데 보고 안하고 포격을 가했느냐, 왜 남북화해에 찬물을 끼얹느냐고 자기 나라 해군을 윽박질렀습니다. 기만교신을 왜 누락했는가 하면 만일의 경우에는 포격을 해야 하는데 기만교신이 왔다고 보고하면 당장 포격을 중단하라고 할 텐데 그러면 2년 전 서해교전 때와 마찬가지로 앉아서 당할 것이 분명해서 보고를 누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해군이 지금 한눈으로는 북한 눈치보고 또 한눈으로는 청와대 눈치 보아야 하는 처량한 해군으로 변했습니다. 나라를 이렇게 운영해도 되는 것입니까.
지금 북한에서는 남한이 무장해제 하고 있는 사이에도 남한에 대한 공작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간부급들이 동요조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정일이 은밀하게 당 중앙위에 내려 보낸 교시내용을 중국에 팔아먹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수한 문건에 의하면 이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2003. 2. 21일자 김정일이 당 중앙위에 내린 교시내용입니다. “남조선으로 도피해간 탈북자들이 잘 살고 있다는 말은 적들의 심리작전이니 우리는 탈북자들 속에 우리 공작원을 침투시켜 효과를 거두게 해야 한다.” 2004. 1. 30일자 교시입니다. “남조선 청년 학생조직을 통한 공작사업에 힘을 넣어 빈틈없이 대책을 세우라.” 3. 2일자 교시입니다. “남조선에 간 탈북자들과 대북방송을 통해 북조선을 헐뜯는 배은방덕한 사람들을 응징하되 조심할 것은 우리가 직접 나서지 말고 삼자를 동원하라.” 지금 북한은 탈북자들 속에 공작원을 끼워 보내고 있는데 지금 그 수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한에서는 저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제 자식들에게만 매를 때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노동자들은 저모양이고 나라 책임자들 사상은 저렇게 느슨한데 누구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느헤미야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내 동포가 굶고 능욕당하고 아픔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슬퍼하며 금식하고 기도합니다. 나는 이 마음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하는 것이고 눈물로 하는 것입니다.
“왕께 호소”
결국 느헤미야는 금식하며 눈물로 매일 슬퍼하며 다니니까 하루는 왕이 물었습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2:2)하고 말합니다. 그때 느헤미야가 왕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고국이 황폐화 되고 성이 불탔다고 하니 내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아오리까.”(3)하고 대답합니다. 그랬더니 왕이 대답하기를(4) “그러면 내가 무엇을 도와주랴”하고 물어옵니다. 나는 왕의 마음을 이렇게 부드럽게 만드신 것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받아야 할 복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일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왕이 말합니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도와주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낱 포로 신세인 느헤미야가 그 당대에 가장 큰 강국인 바사 왕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느헤미야가 왕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에게 아뢰되 왕께서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께로부터 은혜를 입었으면 나를 고국으로 보내셔서 무너진 성을 건축하고 돌아오게 하소서”(5). 이것이 노예 신분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느헤미야에게 그 말을 들을 때 아닥사스다 왕은 가슴이 뭉클 했을 것입니다. 비록 노예 신분이나 자기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그를 볼 때 내 나라에는 저런 백성, 저런 신하가 없는데 저 망한 나라에는 저런 백성이 있구나 하고 감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내 나라는 좋든 나쁘든 내 나라입니다. 내 나라가 싫다고 욕하면 결국 자신을 욕하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나라는 참 재미있는 나라이고 미스터리의 나라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IMF 경제위기를 맞고도 3년 안에 그 위기를 벗어난 나라. 월드컵에서 1승도 올리지 못하던 나라가 갑자기 4강까지 해치운 나라. 매일 아침 7시 40분에 등교해서 밤 11까지 수십 년간 공부하며 인내하는 청소년들을 가진 나라. 아무리 큰 재앙을 만나도 1년이면 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또 당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나라입니까. 그래서 저는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속상해도 나라를 흉보지 않고 오히려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도 욕하지 않고 그 걸음걸이도 이제는 좋게 보아주려고 합니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에게 큰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느헤미야 같은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우리도 이 느헤미야가 가지고 있던 민족을 향한 그 뜨거웠던 가슴을 가지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이 진정으로 나라사랑하는 모습이고 마음이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느헤미야는 왕의 허락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가 지치고 허기진 백성을 격려하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다시 아닥사스다 왕에게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이 책임감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합니다. 역사를 보면 나라와 민족의 앞날이 어려울 때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섰었습니다.
준비된 사람 느헤미야
느 1:5-11 / 피영민목사
서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통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것이지 인생의 어떤 일이나 세계역사의 어떤 일을 일으키는 파워가 될 수는 없습니다. 파워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1장을 읽으면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느헤미야 1장에 기록된 모든 사건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요 하나님의 위대한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니라고 하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성벽이 무너지고 성읍이 황폐한 것을 본 것도, 수산궁에 와서 느헤미야를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또 느헤미야가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 1장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당신의 위대한 일을 위해서 느헤미야라고 하는 한 사람을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실 때에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누구 이 일에 꼭 맞는 사람 없냐? 누구 준비된 사람 없냐?”하고 다급하여 찾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준비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대단히 계획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도 영원 전부터 미리 예정하시고 구원하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얼마나 준비심이 많은 하나님이냐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인생을 살아가실 때에 준비하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을 고생하다가 출애굽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미리 모세라는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모세가 먼저 40년은 바로의 궁중에서 온갖 현대교육을 다 받게 하시고 또 나머지 40년은 광야에서 야전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80년의 세월동안 훈련하시고 출애굽의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모세가 우연히 불타는 가시떨기 나무를 보고 우연히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예비하시고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120세가 되어 죽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해야 될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모세에게 붙여서 훈련을 시켜 여호수아가 칼의 사람이 되어 전쟁을 하고 가나안을 정복하도록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기 전에도 예레미야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장 5절에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그냥 갑자기 오신 것이 아니라 침례요한이라는 사람을 준비하셨다가 길을 닦아 놓고 예수님이 오시게 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데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 해야 되겠다 할 때에도 하나님은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을 다 공부시키고 준비하셨다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쓰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어떤 일이 있을 때에 사람을 미리미리 준비하셨다가 때가 되면 그 일에 불러다 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건설을 위해서 하나님은 “느헤미야”라고 하는 한 사람을 예비하셨습니다. 물론 그를 사회적으로도 예비하셨습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경찰계에 투신했습니다.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경찰로 헌신해서 출세에 출세를 거듭하다 급기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을 맡은 관원장, 오늘날로 말하자면 청와대 경호실장이 되어 왕을 수시로 뵐 수 있는 지위에 올리셨습니다. 그런 면으로 사회적인 준비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하나님이 느헤미야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준비하셨느냐는 측면이 아니라 영적으로 어떻게 준비하셨느냐는 영적인 준비라는 측면에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세상도 사람을 키웁니다. 정치가는 정치가를 키우고 학자는 학자를 키우고 예술가는 예술가를 키웁니다. 그러나 세상이 사람을 키우는 방식과 하나님이 쓰시고자 키우시는 방식은 대단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준비하시고 키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어떻게 준비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심령을 상하게 만드셨습니다.
심령을 슬프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쓰시기 전에 깨어 부수기를 먼저 하셨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1장 4절에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영혼은 슬픈 영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영혼이 슬픈 분 계십니까? 명절에 실컷 먹어 몸은 배불러도 영혼은 슬픈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슬픈 영혼은 하나님이 가까운 영혼입니다. 너무 행복하고 기쁘고 좋으면 왠지 사람이 경박해 보입니다. 그런데 슬프고 심령이 상하면 사람이 깊이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쓰시기 전에 그 영혼을 먼저 상하게 하시고 부서뜨렸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심령이 슬프고 상한 것은 자기 개인의 문제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개인의 문제로 사업이 안되어서 슬프다,가정이 어려워서 슬프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 느헤미야가 단순히 국가를 생각하는 애국자이기 때문에 슬픈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장로님들과 한산도에 다녀왔는데 한산도에서 이순신 장군이 앉으셨던 수루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거기에 “한산도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는 남의 애를 끓나니” 1592년에 일본이 쳐들어와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수루에 앉아 ‘왜적이 이렇게 쳐들어와서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면서 깊은 시름에 잠겼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물론 영혼이 슬펐습니다만 지금 느헤미야가 슬퍼한 것은 그런 이순신 장군의 애국적인 슬픔은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생각하고 자기 백성의 죄를 생각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은 소화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능욕과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3D 직종은 기피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4D 도시가 되었습니다. 멸망(Destruction)되었고, 황폐(Desolation)되었고, 위험(Danger)하게 되었고, 무방비(Defenselessness)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다 불타고 멸망하고 황폐하고 위험하고 방비가 없는 그런 도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나의 죄 때문이요 하나님 백성들의 죄로 인해서 이렇게 되었도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에게 모독을 받게 되었도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되는데 도리어 모독을 받게 되었도다. 이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슬프고 내 마음이 고통스럽다.”는 그런 영혼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크게 쓰신 이유는 그가 온 나라를 보고 하나님 앞에 죄악된 것을 생각하며 심령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높이 쓰시고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슬픔을 알아야 기쁨을 압니다. 그리고 패배를 알아야 성공도 압니다. 가난을 알아야 부요도 알고 배고픈 것을 알아야 맛있는 것을 압니다. 요즘 아이들은 추석이 되어도 별 기대가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추석이 되어야 불고기와 토란국을 먹고 새 옷과 신을 신으므로 추석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물질적으로 풍부해서 워낙 맛있는 것이 많다보니 불고기와 토란국이 뭐가 맛있느냐고 하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배고파보지 않으니까 맛있는 것이 뭔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마찬 가지로 슬퍼보지 않으니까 기쁜 것이 뭔지 모릅니다.
예레미야는 슬펐습니다. 예레미야 8장 18절에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라고 기록되었고, 8장 21절에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13장 17절에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요 외로운 선지자요 온 나라가 대적하는 그런 선지자였습니다. 심령이 상하고 슬퍼했습니다. 그런데 심령이 상하고 슬프면 하나님이 무척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편 여러 곳에서 이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시편 34편 18절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17절에도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오랜 동안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은 슬프고 상한 심령을 가까이 하신다는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이 거하시고 안식하실 처소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이사야 66장 1절로 2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통회하고 하나님 말씀을 인하여 벌벌 떠는 사람을 내가 돌보아(take care of)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영혼에 하나님이 편안히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본질적으로 교만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근본죄는 교만죄입니다. 깨어지지 않으면 교만한 것이 인간의 영혼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이 그를 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영혼을 먼저 깨뜨려 놓으시고 겸손케 하신 것입니다. 대가 높고 넓고 큰 집을 “고대광실(高臺廣室)”이라고 하는데 이 고대광실을 지어서 하나님 “여기 계시옵소서.”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거기 계시겠습니까? 고대광실을 보고 하나님께서 “하늘도 내가 지었고 땅도 내가 지었는데 고대광실이 무엇이냐? 내가 구두 닦으려고 발을 올려놓는 발등상도 안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슬픈 영혼, 상한 심령,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로소이다. 내 일생 내가 죄를 짓고 살아 지금 이처럼 수치와 능욕이 임하게 되었나이다.”하고 슬퍼하는 영혼에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고 안식하시고 그 영혼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이 진리를 더욱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로 4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완고하고 교만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말씀 앞에도 떨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애통해 하지도 않습니다. 그 영혼은 교만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영혼을 쓰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영혼을 깨어 부수시고 겸손케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무능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왜 느헤미야가 털썩 주저앉아 수일동안 울고 금식하고 기도했느냐? 그것은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벽의 돌 하나 놓을 수도 없고 내 능력은 성벽을 세울 수도 없다. 나는 무능하고 무가치하고 연약한 존재로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털썩 주저앉아 울은 것입니다. 우리가 “나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는 잘합니다. 내가 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을 대할 때에 심령이 편안하지를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 나는 잘한다. 내가 다한다.” 이러면 하나님께서도 “네가 다하냐? 네가 잘할 수 있냐? 그럼 한번 해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전 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일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무능하고 연약합니다.” 이렇게 나오면 하나님께서 “내가 해주겠다. 내가 널 도와주겠다.” 이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진리입니다.
사사 기드온 시대에 이스라엘은 7년 동안 요단강 동편 땅 지역의 미디안 사람들로부터 침략과 약탈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농사 지어놓은 것을 다 약탈해 가고 사람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대낮에도 큰 도로로 다니지 못하고 좁은 골목길로만 다녔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준비시키시고 미디안을 쳐부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사사기 6장 14절에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하시자 기드온이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15절에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바로 깨달았구나.” 그래서 16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네가 이제 너의 무능을 깨달았으니 너와 함께 하여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겠다. 나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무능과 연약을 고백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 삶에 나타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역대하 20장을 보면 여호사밧 왕이 연합군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모압과 암몬과 마온, 세 나라가 힘을 합쳐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여호사밧이 역대하 20장 12절에서 유명한 기도를 합니다. 12절에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입니다. 15절 후반에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여호사밧은 나아갔습니다. 전쟁하는 사람이 성가대를 앞에 세워가지고 찬양하며 나가고 군인들은 뒤에 노무자처럼 따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성가대가 찬양을 하자 암몬 모압 마온 연합군들이 자기네들끼리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서로 치고 죽이고 하더니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였습니다. 이렇게 성가대가 나아가 싸움하나 하지 않고 적군을 전멸시킨 것입니다. 역대하 20장 26절에 “제 사일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도바울도 이 역설적인 진리를 체험하고 확증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은 약해져야 강해지는 것입니다. 져야 이기는 것입니다. 이겨 봐도 별 볼일 없습니다. 지십시오. 그러면 이깁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이고 우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큰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부족하고 말씀을 연구해도 부족하고 전도를 해도 “내가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헌신을 해도 “내가 이렇게 부족하니 되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육신적인 능력만 의지하면 실패할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반드시 성공하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머리가 좋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아이큐 150밖에 더 됩니까? 또 능력이 많으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능력과 비교가 됩니까? 그런데 자기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여 사는 사람은 얼마나 다르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이려면 우리 영혼이 깨어져야 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능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그 때부터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 역사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느헤미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무능과 연약을 깨닫는 사람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편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준비할 때에 기도를 시키신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준비하신 것입니다. 느헤미야서에 보면 느헤미야의 9가지 기도가 나옵니다. 그 가운데 느헤미야 1장이 가장 긴 기도입니다. 느헤미야는 4달 동안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 1장 1절과 2장 1절 사이에는 4달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 1장의 기도는 한 번하고 만 기도가 아니고 4달 동안의 기도 요약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에는 영어 C로 시작되는 4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먼저 집중(Concentration)했습니다. 기도할 때에 앉자마자 성벽 건설해 달라 하고 가버린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 집중한 것입니다. 느헤미야 1장 5절에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라고 기록되었고, 10절에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두 가지를 물어봐야 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내 문제를 도와줄 능력이 있으신가(Can God help me)?”는 질문입니가. 그리고 능력이 있다면 둘째로 “하나님은 나를 도와줄 의지가 있으신가(Will God help me)?”는 두 가지 질문을 해봐야 됩니다. 느헤미야의 대답은 둘 다 “그렇다(Yes)”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줄 능력이 있으시냐?” “그렇다. 하나님은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먼저 건져내신 역사가 있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궁합니다. 여러분 문제가 어떤 것이라도 능히 도와줄 능력이 있으십니다. 나를 도와주시든지 안 도와주시든지 간에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러면 그 전능한 능력으로 날 도와주실 것인가? 하나님에게 나를 도와줄 의지가 있으신 것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전능하지만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시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줄 의지가 있으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도 대신 죽기까지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려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도 내어주었는데 너희를 위해서 무엇을 안 하시겠느냐? 그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만이 아니라 나를 도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신다. 즉, 능력도 있으시고 의지도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께 집중하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둘째, 죄를 구체적으로 자백(Confession)했습니다. 느헤미야 1장 6절로 7절에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고백입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성벽재건을 목표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앉자마자 성벽재건을 해주시라고 한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께 집중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를 고백한 것입니다. “저 사마리아 사람 때문에 안됩니다.”라고 남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먼저 고백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두루뭉술하고 애매모호하게 고백한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십계명입니다. 우리가 내가 죄인인지 아닌지 알고 싶으면 십계명을 보면 됩니다. 십계명은 거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신,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상,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삼망,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사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오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육살, 살인하지 말지니라. 칠간, 간음하지 말지니라. 팔도,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구거,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십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이 십계명을 보고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했습니다(Claiming Promises). 느헤미야 1장 8절로 9절에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찌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먼저 너희가 범죄하면 열국에 흩어버리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한 가지는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님이 자식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네가 아무리 공부하기를 싫어해도 시험에서 60점은 넘어야 되지 않겠냐? 60점을 못 맞으면 내가 회초리로 한 대 때리고 60점을 넘으면 자장면을 한 그릇 사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상벌을 해도 이렇게 정확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아이가 59점 맞아 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약속대로 회초리로 한 대 때려야 됩니다. 그리고 아이가 어쩌다가 운 좋게 61점을 맞았다고 해도 자장면을 사줘야 됩니다.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리 부모님이라도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하나님, 저희가 범죄하고 잘못해서 열국 중에 흩을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대로 이미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잘못해서 때린 것은 이미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니 우리를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은 이뤄주셔야 될 것 아닙니까?”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claiming)하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어도 성경에서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것을 자꾸 기도할 때마다 얘기하면 하나님도 할 수 없이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주장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구체적인 행동에 헌신했습니다(Commitment to Action). 느헤미야의 기도는 느헤미야 1장 11절로 끝납니다. 11절에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고 우리를 도와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복시키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제가 아닥사스다 왕 앞에 나가서 도와달라고 할 때 꼭 함께 하여 도와주십시오.” 이 행동을 기도하고 행동을 도와달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법과대학 다니는 학생이 “하나님 제가 사법고시에 붙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고 공부를 해야 됩니까? 하지 않아도 됩니까? 공부를 해야 됩니다. 행동에 헌신을 해야 됩니다. “사법고시 붙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새벽기도와 금식기도를 드리고 나가서는 실컷 술 마시고 논다면 어떻게 사법고시에 붙을 수 있겠습니까? 고등학생이 “하나님 아버지, 서울대학교에 합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새벽에 한번 10분 기도하고서는 아침에도 자고 점심에도 자고 저녁에도 자고 온종일 잔다면 서울대학교에 틀림없이 떨어질 것입니다. 또 “저의 사업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만하고 사업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려고 하시다가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한 것을 행동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도한대로 들으시고 축복하십니다. 느헤미야는 “아버지, 성벽을 재건해 주십시오. 그런데 아닥사스다 왕이 그것을 해줄 수 있으니 제가 왕 앞에 가서 얘기할 기회도 주고 얘기할 때에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느헤미야는 네 가지 C를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했고(Concentration on God), 죄를 자백했으며(Confession of sin),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했고(Claiming God's promises), 행동에 헌신했습니다(Commitment to Action).
결론
우리는 느헤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은 두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혼의 겸손함이고 둘째는 입술의 기도입니다. 겸손과 기도가 무능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을 끌어들이는 양대 산맥이고 비결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고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쓰시려 해도 쓰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겸손하고 입술은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 평생에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 마음껏 역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라 사랑의 길
느 1:9-10 / 강성찬목사(전주동부교회)
1951년 1월 3일 이른 새벽 한국전에 참여한 영국 병사 데이비드 스트래쳔(David Strachan)은 경기도 고양시 인근 들판에서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합니다. 그는 최전방 참호 속에 있었다 합니다. 갑자기 그의 코앞에 중공군이 불쑥 나타났고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총을 당겼다 합니다. 적병의 몸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참호 속으로 떨어졌다 합니다. 이 영국 병사는 자기보다 더 어려 보이는 중공군 병사가 바로 자기 밑에서 신음하며 4시간에 걸쳐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합니다. 한국전이 끝난 후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 전역을 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런데 전역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영국 자택 침실에서 악몽을 꾸다가 그의 침실로 걸어 들어오는 생생한 어떤 인기척을 느끼고 깨어 일어났는데 60년 전 그가 죽인 중공군이 피 묻은 군복을 입고 그의 발치에 서 있었다 합니다. 그 후 상당히 오랜 시간 자주 스트래쳔은 이 중공군 병사의 방문을 받아야만 했고 이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다 합니다. 정신과 의사는 그에게 한국 방문을 권하여 가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한국이었으나 그는 치료를 위해 한국에 돌아왔고 그가 기대한 한국과 전혀 달라진 새로운 한국을 발견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는 전쟁과 주검, 배고픔과 전혀 다른 번영한 한국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합니다. 그런데 그의 한국 방문도중 하루는 벨트 버클이 고장나 가죽 수선 집에 들어갔다가 그가 참전 용사임을 알게 된 주인은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수선비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집을 나오면서 자기의 존재의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뭉클한 어떤 감동과 함께 자기도 모를 뜨거운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내가 결코 헛된 일을 위해 이 땅에서 피 흘려 싸운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중공군의 환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다시 그를 괴롭히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더 타임즈 기자(앤드류 샐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한국 방문 경험을 회고하다가 문득 기자에게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주는 것(giving)과 사랑하는 것(loving)사이의 차이가 무엇이지 아십니까?" 그리고 이어서 자기의 질문에 스스로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둘 사이엔 차이가 없어요. 50년 전 나는 내 일생의 1년을 한국에서 바쳤어요. 나의 작은 공헌이 한국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잘 모르고 살았지요. 다시 찾은 한국을 둘러보며 환대를 받았습니다. 한국은 모든 것이 최신식이고, 멋지고, 기운차고, 세속적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번영하는 국가였습니다. 나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한테 감사하지 마세요. 내 인생을 가치 있는 인생으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 영국 신사는 한국의 번영으로 그의 참전의 명분을 정당화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영국의 더 타임스지 서울 특파원 앤드류 샐먼(Andrew Salmon)이라는 기자가 쓴 기사라 합니다)
6월달은 국가 보훈의 달로서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도 안 될 6,25 사변이 일어났던 뜻 깊은 달입니다. 우리 한국의 5천년 역사 가운데서 크고 작은 전쟁을 비롯하여 끔찍한 고난을 수없이 많이 당하였다고 하지만 사실은 6,25와 같이 우리 민족에게도 처절했던 기억들과 영영 지울 수 없는 쓰라린 상처투성이의 갖가지 사연들을 남긴 사건은 일찌기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6.25에 대해서도 무서운 전쟁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6,25를 역사 속에 뭍혀 있는 비사로 여기며 너무 안일하고 나태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을 하기도 합니다.
메르스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우리 민족의 문제점에 대하여 쉽게 흥분하고 쉽게 잊어버린다고 지적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 국민의 80% 가까이 되는 6,25 전후세대는 6,25 동란을 격지 않았으니 그렇다할 찌라도 더욱 안타까운 실정은 전쟁을 격은 기성세대까지라도 그 비극적인 사건을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고 무관심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바사의 수도인 수산 궁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유다인이었습니다. 느헤미야 이전에도 상당수의 유다 지식인들이 바벨론과 바사 제국의 관리로 봉직하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유다 총독으로 파견된 것은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 Ⅰ, B.C. 464-424) 때였는데, 1차로 B.C. 445년경에 부임하여 12년 간 행정 업무를 관장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하여 자신에게 명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 심사숙고하여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그들이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는 일에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도우셔서 형통케 하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어떠한가를 교훈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길입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6절).
사무엘도 민족이 살길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길밖에 다른 뽀족한 수가 없기에 기도 하였던 것을 성경은 말씀 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삼상 7:5)고 합니다.
에스더처럼 " 죽으면 죽으리라 "는 자세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 4:16)고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며 기도하여야 합니다.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14:34)고 합니다.
공의는 성경에서 번영보다도 우선하는 가치입니다. 다시 6.25같은 비극이 이 땅에 되풀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단순히 축복과 번영만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이 땅의 백성들이 좀 더 공의를 갈망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민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6,25전쟁을 둘러싼 교회 동정을 기록한 문서들을 살펴보면 두 장소에서의 의미 있는 기도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전쟁 발발 후 불과 81일 만에 낙동강까지 북의 침략에 밀린 절대 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300여명의 목사님들이 부산 대신동 초등학교에 모여 일주일 동안 금식하고 회개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장마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어 B29가 낙동강을 3일 동안 폭격하여 낙동강 전선을 적이 넘지 못한 일이 일어났고, 이어서 부산으로 피난 온 교역자 250여명을 수용했던 부산 초량 교회에서 여기에 숙식한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민족을 위한 또 하나의 구국기도회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나라 사랑을 기도로 나타내야 할 줄 믿습니다.
나아가 회개하는 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었으나 항상 목이 곧아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그들에게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고 하시고,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네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받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거역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노라고 서약했습니다(수 24:16-18).
이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바알과 온갖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한마디로 우상 숭배의 죄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어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고 하나님을 등 뒤에다 버렸습니다(왕상 14:9). 그 범죄의 대가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고, 솔로몬이 끌어들인 바알 숭배로 인하여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같은 범죄를 하나님 앞에 깊이 자복했습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느 1:6)였다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열국 중에 흩어진 것은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곧 나와 나의 아비 집에 원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리며 회개 합니다. 이것은 겸비와 회개입니다.
에덴에서 최초의 인류는 범죄 후 하나님의 책망에 범죄의 원인을 남에게 전가했습니다. 여자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고 말했고 남자는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13)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 인류의 범죄 심리는 언제나 '나 때문'이 아닌 '남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내가 못 사는 것은 남이 내 몫을 더 많이 착취해 간 때문이요, 내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회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유다의 모든 죄가 '나와 나의 아비 집'의 범죄임을 자복하였습니다.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느 1:7)라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았음을 자백했습니다.
계명은 히브리어로 '미츠바'인데 이것은 율법(토라) 중에서도 모든 법의 기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계명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계명은 역시 십계명입니다. 계명은 종류가 많고 구체적이며, 상호 동등하고 독립적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정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속에 다 들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마 22:37-40).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계명은 초기 기독교회가 윤리적 교훈으로 수용하여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율례는 히브리어 '호크'나 '후크'에서 번역된 말로서 규정된 법령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으로서 형법이나 민법 등 송사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에 근거하고 있으며(신 4:5, 14; 5:31),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규례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나 '다드', 또는 '추카'에서 번역된 말로서 의식법이나 위생법, 또는 논쟁법과 같은 일시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법규이며, 이 법규를 변화무쌍한 상황에다 계명(말씀)을 적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규례가 제정되면 어느 일정 기간 동안은 그 규례를 철저하게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시편에서는 규례에 순종하는 것을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것이 곧 특권이라고 가르칩니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시 119:55, 56)라고 합니다.
계명과 율례와 규례는 모두 법도(ordinance)와 같은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의 민족과 자기 조상의 집이 포로로 잡혀간 이유를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않은 데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회나 국가가 패망하는 원인도 전통과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를 고백하며 기도하여야 합니다.
민족의 살길은 어느 특정인 어느 한 사람의 회개보다는 거 교회적 거 민족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운동과 회개하며 기도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할 줄 믿습니다.
여호와만 섬기며 도움을 구하며 동행하는 길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 1:4)라고 합니다. 기도하며 회개하는 참 모습은 오직 여호와만 우리 주님만 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4)합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이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5:6)고 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 6:1-3)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민족이 살길도 전적인 여호와의 도우심과 동행하는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이스라엘과 형편이 비슷한 우리 한국도 여호와께서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 주시고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도 벌써 옛날에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엔 UN 안전보장 이사회를 통하여 북한의 행위를 침략으로 규정하여 즉각 유엔 UN 16개국을 파병하여 한국을 도와주심은 분명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속에도 이런 일은 일어납니다. 어니스트 섀클턴은 남극점 정복 대신 남극 대륙 횡단을 계획하고 27명의 대원과 함께 범선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세 번째 남극 탐험 장정을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탐험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실패', '위대한 항해'라고 부른 다는 것입니다. 그를 위대한 탐험가로 평가를 한다 합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새클턴 팀은 남극점에서 155km 떨어진 장소에서 식량부족으로 남극점을 향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 누구보다 남극까지 다가갔지만 더 이상 강행을 할 경우 수많은 동료들의 생명을 잃게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섀클턴을 포함한 27명의 대원이 634일간 영하 30℃를 오르내리는 남극의 빙벽에 갇히는 극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섀클턴을 비롯한 대원들은 이런 일기를 남겼다 합니다. "섀클턴은 은밀히 자신의 아침 식사용 비스킷을 내게 내밀며 먹으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내가 비스킷을 받으면 그는 저녁에도 내게 비스킷을 줄 것이다. 나는 도대체 이 세상 어느 누가 이처럼 철저하게 관용과 동정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죽어도 섀클턴의 그러한 마음을 잊지 못할 것이다. 수천 파운드의 돈으로도 결코 그 한 개의 비스킷을 살 수 없을 것이다." 비스킷 하나는 바로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한데 그것을 나눈 것이라는 것입니다. 추위에 떠는 대원에게 자기 몫의 우유를 나누어주었다 합니다. 그러기에 섀클턴의 대원이라는 것이 축복이라고 부하들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자기가 믿어온 대원 하나가 잠들기 전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대원의 식량 주머니에 손을 뻗치더라는 것입니다. 새클턴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식량주머니를 열어 자기의 비스켓을 그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자기를 희생하자 대원들도 서로 이렇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살 희망이 없어 보였다 합니다. 그러자 남경 포경기지, 고래를 잡는 선원들이 있다는 곳으로 몇 명의 대원과 함께 6미터가 조금 넘는 소형 선박을 타고 풍랑이 거친 바다를 건넜다 합니다. 해발 3000m에 달하는 얼음산을 맨손으로 넘었다 합니다. 약 1290km에 달하는 죽음의 항해를 16일 만에 넘어 고래잡이 선원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길을 뚫고 예인선을 끌고 와서 남은 대원을 모두 구조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탐험 끝낸 후 아내에서 보내는 편지에 "얼음산을 넘을 때, 우리 일행은 분명 세 명인데 난 네 명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 생각돼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웠던 여행 내내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셨음을 나는 믿는다.”라고 기록을 했다 합니다.
그런데 새클턴과 그 팀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진정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한 마디로 이야기 하라면 자기희생이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는데 그때 이상한 힘이 생겼고, 실제로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진정 6, 25 사변은 우리 민족에게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기게 한 가장 비극적인 전쟁입니다. 이 전쟁의 이면에는 반드시 새로운 역사의 교훈과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함게 한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사화복 나라의 흥망성쇠는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꿈에도 소원인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하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도우심을 믿고 구하며 동행하며 이 땅위에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이 재발되지 않도록 힘을 모으는 모두가 되어야할 줄 믿습니다.
공의는 성경에서 번영보다도 우선하는 가치이다. 다시 6.25같은 비극이 이 땅에 되풀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단순히 축복과 번영만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이 땅의 백성들이 좀 더 공의를 갈망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민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 6ㆍ25전쟁을 둘러싼 교회 동정을 기록한 문서들을 살펴보면 두 장소에서의 의미 있는 기도회가 있었다. 한번은 전쟁 발발 후 불과 81일 만에 낙동강까지 북의 침략에 밀린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300여명의 목사님들이 부산 대신동 초등학교에 모여 일주일 동안 금식하고 회개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그때가 장마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어 B29가 낙동강을 3일 동안 폭격하여 낙동강 전선을 적이 넘지 못한 일이 일어났고, 이어서 부산으로 피난 온 교역자 250여명을 수용했던 부산 초량교회에서 여기에 숙식한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민족을 위한 또 하나의 구국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우리도 나라 사랑을 기도로 나타내야 할 줄 믿습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1)
느 1:5-11 / 조상호목사
수년 전 TV의 한 노인 프로그램에 여든을 넘긴 부부들이 출연했습니다. 사회자는 이 부부들을 상대로 여러 가지 퀴즈를 냈습니다. 그중에서 낱말 맞추기 게임이 시청자들의 폭소를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한쪽이 낱말이 적힌 글자판을 보고 상대방에게 설명해서 답을 맞추는 게임이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천생연분’이라는 글이 적힌 글자판을 들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를 향해 그 단어의 뜻을 설명했습니다. “우리처럼 오래 잘 사는 사람을 뭐라고 하지?” “….” 할아버지는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다시 설명했습니다. “우리 같은 부부를 왜 이것이라고 하잖아!” 할머니는 그제 서야 알겠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웬수” 객석은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변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일단 움찔했다가 다시 진땀을 흘리며 단어의 뜻을 설명했습니다. “그것 말고, 네 글자로 뭐라고 하지?” 할머니는 더욱 자신감을 보이며 대답했습니다. “응, 평생웬수”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둘 사이를 빗대어 ‘천생연분’으로 설명했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평생웬수’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자가 그 부부에게 물었습니다. “그동안 부부싸움을 안하셨나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할머니가 내 성격을 알고 모두 받아주었어요. 우리는 천생연분입니다. 절대로 싸움 같은 것은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할머니의 대답은 약간 달랐습니다. “부부싸움이요? 말도 마세요. 내 속 썩은 줄을 누가 알기나 하겠어요? 하나님이나 내 검게 탄 속을 아실까요?”
그러니까 한쪽은 ‘천생연분’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은 ‘평생웬수’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 다 여든이 넘었기 때문에 만약 20세에 결혼을 했으면 60년을 함께 살았을 것이고, 30세에 결혼을 했으면 적어도 50년 이상을 함께 살았을 텐데, 상대방의 마음 상태를 잘 몰랐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오랫동안 한 지붕 밑에서 한 이불을 덮고 한 솥밥을 먹는 부부임에도 서로에 대해서 모를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상대방을 아는 만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정확히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데, 잘 모르기 때문에 자주 오해를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년, 3년, 5년, 10년, 20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찬양은 부르면서도, 열심히 기도는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때 미국 오페라계에서 활약했던 할버튼이란 유명한 가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할버튼은 밖에 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자기 아들과 이웃집 아이가 놀면서 주고받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이웃집 아이가 “우리 아버지는 시장님을 잘 안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할버튼의 아들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안다.” 이 대화를 들은 할버튼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래서 급히 서재로 들어가 실컷 울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잘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느헤미야 강해설교 두 번째인 이 시간 “어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지난 주 우리는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온 형제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성문들은 불에 타버렸으며, 사람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의 두 가지 반응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자마자 수일 동안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그가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
첫째로 느헤미야는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다같이 5절을 보겠습니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야훼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여기 ‘두려우신 하나님’을 NIV영어성경에 보면, ‘awesome God’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말은 ’위엄있는 하나님‘ ’최고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최고로 위대하신 하나님,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백성들이 환난과 능욕을 당하고 있고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성문들은 불에 타버리는 등,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느헤미야는 결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1,300Km나 떨어진 고국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천지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좋지 않은 일(?)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어느 목사님의 글에 보면,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전쟁을 마친 다음, 충성을 다한 부하들을 불러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동안 참으로 수고들 많이 했소. 이제 내가 여러분들에게 상을 내리려고 하오. 각자의 소원을 한 가지씩 말해 보시오!” 알렉산더 대왕의 말에 어떤 신하는 큰 집을 한 채 달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 동안 전쟁 때문에 너무 지쳤기 때문에 1년 휴가를 보내 달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예쁜 여자 10명을 구해 달라는 등, 각자 원하는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래도 알렉산더 대왕은 그 소원들을 다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부하 중에 ‘데닉’이라는 부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왕이시여, 대왕께서 정복한 많은 나라 중에 한 나라를 저에게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부하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감히 그런 소원을 말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충성스런 부하라지만, 어떻게 나라를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모든 부하들은 속으로 “저런 말도 안 되는 소원을 말하다니, 왕이 화를 내는 것은 아닐까?”하면서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은 껄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 나라 하나를 그대에게 주마. 그대는 나 알렉산더를 나라 하나라도 달라고 하면 줄 수 있는 큰 인물로 믿어 주었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겠노라!”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데릭이라는 부하만이 알렉산더를 큰 인물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큰 인물이기 때문에 나라를 달라고 요청해도 분명히 줄 것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오늘은 교회력에 따르면,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 조항을 공표함으로써 유럽을 뒤흔든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시작할 때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그대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작은 하나님을 붙들지 말고, 크신 하나님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죤 터프먼 목사는 프린스턴 신학교를 나와 12년 동안 목회했지만, 목회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목사로서의 사역을 그만 둘까 하는 생각을 할 만큼 좌절하고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졸업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실시하는 목사 연수교육에 참가했습니다. 그곳에서 존경하던 노교수 로버트 윌슨박사를 만났습니다. 제자의 상담을 받은 노교수는 그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합니다. “자네는 12년간 작은 하나님을 믿었군. 이제 큰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게!” 그는 노교수의 이 말을 듣고 자신이 12년 동안 크신 하나님을 작은 하나님으로 믿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그는 작은 하나님이 아닌 크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목회를 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부흥하고, 그는 유명한 설교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신앙원리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원리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며,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믿든지 믿지 않든지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따라 역사하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은 그릇을 준비하면 작게 채워 주시고, 큰 그릇을 준비하면 크게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하나님을 믿지 말고, 크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처럼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고,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둘째로 느헤미야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짓을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 거짓말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옛날에 중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방패장수가 시장에 나와서 요란하게 떠들며 방패를 팔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파는 방패를 선전하기를 “이 방패는 그 어떠한 창도 뚫을 수 없는 훌륭한 무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그가 시장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창을 가지고 나타나서 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창은 그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훌륭한 무기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말이 됩니까? 처음에는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방패라고 하고, 두 번째는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이라는 이것이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창 모(矛)자, 방패 순(盾)자를 쓴 ‘모순’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즘 주위에서 말이 안 되는 말을 하면 '모순이다'라고 합니다.
주위에 보면 모순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지키지 못하는 약속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키려고 했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한 번 약속하신 것은 틀림없이 지키십니다. 또한 여호수아 21장 45절에서 “야훼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주십니다. 또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Yes)가 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예‘라는 말은 NIV 영어성경에 보면 "Yes"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수많은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Yes"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말씀하신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은 감정에 따라 또 환경과 상황에 따라 약속을 어기지만,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는 바로 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다시 한 번 5절을 보겠습니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야훼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헤미야가 믿은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느헤미야는 약속하신대로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을 믿고 간구했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붙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일까요? 예레미야 25장 12절과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야훼의 말씀이니라. 칠십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리라. 내가 그 땅을 향하여 선언한 바 곧 예레미야가 모든 민족을 향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라.” 또 에스겔 36장 33절부터 3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주 야훼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하게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주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폐하게 보이던 그 황폐한 땅이 장차 경작이 될지라.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주민이 있다 하리니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야훼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야훼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그러니까 예레미야 25장과 에스겔 36장 이 두 말씀을 종합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망한 지 70년 만에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피난을 떠났던 주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며, 황폐하게 변한 땅에 다시 농사를 짓게 될 것이고, 무너진 곳이 다시 재건된다는 약속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가 정유소를 운영하다가 광산업에도 손을 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투자자금을 몽땅 날리고 말았습니다. 광부들이 폭도로 변하여 밀린 임금을 요구하며 난리를 부렸습니다. 그는 너무 힘이 들어 자살을 하려다가 폐광 앞에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십일조 생활을 해 왔는데 왜 이런 시련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 살아 계시다면 그 증거를 보여주세요.” 그러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때가 되면 거두리라. 더 깊이 파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이 미쳤다고 수군거렸지만, 폐광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파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검은 물줄기가 공중으로 솟구쳤습니다. 석유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44세에 미국 석유사업의 90%를 차지하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실질적인 오너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계약을 어길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철저히 이행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결코 채무불이행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채무를 이행하시고, 당신께서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록펠러씨처럼 느헤미야처럼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응답이 주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2)
느 1:5-11 / 조상호목사
셋째로 느헤미야는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다시 한 번 5절을 보겠습니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야훼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헤미야가 믿은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여기 ‘긍휼’은 영어로 ‘compassion’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함께‘라는 의미의 ‘com'과 ’고통‘이라는 의미의 ’passion' 두 단어로 이루어졌는데, ‘함께 고통을 나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긍휼’은 히브리어로 ‘라카밈(rachamim)'인데, 이 단어는 어머니가 아이를 임신하는 자궁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여기에 사람의 모든 감정이 담겨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78장 38절에 보면,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내지 아니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 긍휼은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2장 4절에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또 시편 145편 9절에 보면, ”야훼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기 원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나와 부르짖어 간구하는 문둥병자, 시각장애자, 중풍병자를 보시고 언제나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긍휼을 구할 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R.A.토레이 목사님이 ‘기도‘라는 주제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강대상에 올라가서보니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 믿은 지 30년이 넘은 장로입니다. 지금까지 교회학교 부장으로 봉사해 왔고,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 성실한 교인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는 안 들어 주시는 것일까요?” 토레이 목사님은 그 편지를 읽은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기도하면서 30년 동안의 신앙 경력과 장로직분과 주일학교 부장이라는 직분과 노력한 수고를 너무 의식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는 세리 같이 해야 합니다. 세리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하나님이여,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누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까? 세리입니다. 세리처럼 긍휼을 구하는 자세로 기도하세요.”
여러분, 바라새인들처럼 주장하는 기도를 하지 말고, 세리처럼 겸손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는 말씀처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던 하박국 선지자처럼,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라고 기도했던 느헤미야처럼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느헤미야는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를 보면, 매우 구체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는 수년 전에 에스라 선지자가 2차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를 시작했지만, 르훔과 심새의 거짓된 상소를 받은 아닥사스다 왕이 성벽재건 공사를 중단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 가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공사를 허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닥사스다 왕 한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그냥 ‘잘 되게 해주세요,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워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고, 왕에게 은혜를 입게 해주셔서 재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느헤미야의 이 기도의 자세를 배워야 합. 마태복음 7장 7절과 8절을 보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구하기 위해 기도하고, 찾기 위해 기도하고, 열리기를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 여러분, 느헤미야처럼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되 구체적으로 기도하시기.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 때 있었던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폴레옹이 평민 차림을 하고 부관과 같이 어느 시골의 여관에서 묵게 됐습니다. 여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자, 웨이터가 계산서를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나 부관 두 사람 다 지갑을 방에 두고 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한 시간 뒤에 돈을 가져오겠다고 하자 웨이터는 이해를 했지만, 여관 주인은 ‘정신 없는 놈’들이라고 하면서 ‘당장 돈을 내놓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웨이터가 ‘두 사람을 믿어보자‘고 해도 주인은 듣지 않고 화만 냈습니다. 할 수 없이 웨이터가 자신의 돈으로 14프랑을 계산했습니다. 1시간 뒤, 부관이 와서 웨이터에게 14프랑을 갚았습니다. 그리고 여관 주인에게 "이 여관이 얼마요?"하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얼마 전에 3만 프랑을 주고 샀다면서 왜 묻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관은 그 자리에서 그 여관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3만 프랑을 주고 주인으로부터 여관의 등기문서를 받은 부관은 그 문서를 웨이터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쓴 쪽지 하나를 전해 주었습니다. "오늘부터 네가 이 여관의 주인이다. 너는 나를 믿어 주었다. 그것으로 나는 이만큼 기뻤다."
나폴레옹은 웨이터가 자신을 믿어 준 것이 3만 프랑만큼 기뻤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 드리면 하나님은 온 우주만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작은 하나님을 믿지 말고,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처럼 구체적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