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새마을운동 회원국서 실행, 한국인으로 감동"
반 총장, 새마을운동 고위급 특별행사서 이같이 밝혀
스팟뉴스팀 (spotnews@dailian.co.kr)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6일(현지시각) "유엔 역사상 처음으로 새마을운동이 회원국에 도입되고 실행되고 있어 한국사람 중 한 사람으로서 감명스럽다"고 전했다.
반 총장은 이날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 콘퍼런스룸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고위급 특별행사\\'에 참석해 "새마을운동이 처음 시작될 때 저는 공무원으로서 새마을운동을 실행으로 옮기는 노력을 했다"며 "제가 살던 마을과 나라가 변화하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자부심을 느꼈고 가난했던 마을과 주민 의식의 급진적인 변화를 목격했다"고 전했다.
이어 반 총장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산불처럼 새마을운동이 번지고 있다"며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비교적 최근의 경험을 얘기했다.
반 총장은 "외교부 장관으로 있을 때 르완다를 방문했는데 공항에서 마을에 이르기까지 길이 깨끗하고 정리정돈이 잘 돼 있어 정말 인상적이었다"며 "르완다 대통령에게 그 얘기를 하자 ‘한국인이 하는 것’이라며 영어로 번역된 ‘새마을운동’이란 책을 내밀었다”고 했다.
반 총장은 또 "지난 6월 3일 뉴욕 할렘가의 한 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했는데 그 학교는 대단한 학업 성취율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었다"며 "나중에 그 학교 창업자이자 교장이 한국의 새마을운동에 영감을 받은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새마을운동 고위급 특별행사에는 헬렌 클라크 UNDP 총재, 쯔엉떤상 베트남 국가주석,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 앙헬 구리아 OECD 사무총장, 춤말리 사야손 라오스 대통령, 오얀타 우말라 페루 대통령, 마흐무두 모히엘딘 월드뱅크 총재 특사 등이 참석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이날 개회사를 통해 새마을운동의 \\'의의\\'를 강조하며 "새마을운동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끈 개발 정책이자 국민적 의식개혁 운동"이라며 "성공요인은 인센티브와 경쟁, 국가지도자의 리더십, 자발적이면서 적극적인 국민참여 때문"이라고 말했다.[데일리안 = 스팟뉴스팀]
==============================
새마을운동은 유태영 박사가 창안
새마을운동은 유태영(건국대부총장 역임) 박사가 덴마크 유학중 영감을 얻어 창안하여 귀국하여 청와대에 건의 박정희 대통령이 정책으로 받아들이면서 전국적으로 시행된 한국인이 만든 자랑스러운 개발정신운동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번져나가니 또 다른 한류입니다. 한국인의 자랑입니다. ~~~!
==============================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 유태영박사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이신 유태영 박사는 극빈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 가정 속에서 구두닦이 신문배달 아이스케키 장사 등 을 하며 중학교 고등 학교 대학에 까지 모두 야학으로 겨우 입문했고, 농촌운동으로 잘 된 덴마크 국왕에게 간절한 편지를 써서 공부의 뜻을 밝혔습니다. 국왕의 허락으로 덴마크 국비장학생으로 학비와 생활비 모두 지원받기로 하고 건너가 2년 동안 영어와 전문어를 익히고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담당교수를 만나기 전에 그 분의 논문과 글을 모두 익혀 ‘당신은 이런 면에 업적이 있고 이런 학문과 글을 쓰신 점이 마음에 들어 당신을 모시고자 합니다.’하자 교수는 그 자리에서 쾌히 승낙을 하였으며, 날이 가고 해가 가는 줄도 모르고 공부하여 단기간에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후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을 벌인 사람입니다.
언제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는 책을 쓴 건국대 류태영 박사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간증하면서 그때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전북 임실에서 더 들어간 산골마을 청웅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얼마나 빈한했는지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그에게 당부한 말씀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거라”는 것이었다.
가난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수시로 “전능하신 하나님,우리 태영이를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셨다.
그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그의 미래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못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집안에서 유일하게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를 갈 수 없어 「중학교 강해록」을 통해 독학하다가 중학교 3학년 때 편입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인 열 여덟 살에 비로소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는 무작정 상경, 구두닦이, 신문팔이, 아이스 케이크 행상 등을 하며 겨우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느 때는 너무 배고파서 쓰레기통에서 곰팡이나는 빵을 꺼내 먹기 일쑤였고 냉방에서 담요 한 장으로 겨울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으면서도 초등학교 5학년 때 믿기 시작한 하나님만 철저히 의지하면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무엇이 두려우랴"라는 단순한 믿음으로 이기었다.
찌들어지게 가난했고 장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었지만,
그는 구두닦이를 하면서도 유학의 꿈을 꾸었고,
이틀을 굶고서도 비관은커녕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 분께 감사했다.
꿈꾸는 청년 류태영에게 그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는 맨주먹임에도 불구하고 농촌을 살리겠다는 꿈을 가지고 덴마크 유학을 위해서
매일 새벽기도를 하기를 13년을 했다.
그는 기도할 때에 '바라봄의 법칙'에 따라 기도했다.
즉 덴마크 유학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덴마크에 가 있는 모습을 그리면서 기도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한 후에 덴마크 국왕 프레드릭 9세에게 유학청원을 보냈는데 40일만에 답장이 오기를 유학 허락과 더불어 왕복 비행기표까지 동봉해 옴으로 기적
가운데 덴마크 유학을 할 수 있었다.
유학이라는 말을 처음 접한지 13년만에 구두닦이 소년 류태영은 덴마크 국비 장학생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와 덴마크는 수교도 없던 터라 그의 유학, 그것도 편지 한 통 쓰고
그 나라의 초청을 받아 유학가는 경우는 거의 기적이었다.
덴마크 말이라고는 알파벳도 모르던 그가 까막눈으로 시작한 덴마크 유학생활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그는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그곳에서 또다시 꿈을 꾼다.
그 나라에서만이 아닌 전세계를 순회하며 농촌을 비교연구하겠다는 당찬 꿈을...
무일푼이었지만, 그는 덴마크 정부 특별 예산 약 3만 달러를 지원받아
유럽의 여러나라를 여행하며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결국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해보기도 전에 안될 것이라고 포기하는
우리의 마음자세가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화이다.
그는 선진 덴마크농촌을 연구하고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새마을운동을 창안했다.
귀국후 그는 청와대의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새마을운동을 전개할 것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고 그 핵심에서 일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통령의 감동을 자아냈던 그의 강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모든 것이 안정되고 아무 걱정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다.
또 다시 이스라엘 유학의 꿈을 꾸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다시 이스라엘의 협동농장을 배우고 싶어서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더니
유학 허락이 나왔고 국비장학생으로까지 선발되었다.
당시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만류가 있었지만 우리나라 농촌의 발전을 위해 공부를 더 하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것이 그와 육영수 여사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1973년 4월, 나이 37세에 류태영은 이스라엘 국비장학생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큰 문제는 언어장벽이었다. 그럼에도 열심히 기도하면서 계획을 세우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장이 500개이니 주일을 제외하고 매일 10마디씩 외우자. 이것이 유학생활의 첫 여리고성이다."라고 결심했다.
그렇게 3개월 했더니 어렵기로 소문난 히브리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8개월 만에 난공불락의 성으로만 여겨졌던 히브리대학교 대학원에 합격했다.그리고 4년 반만에 히브리대학의 석사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박사학위를 받았을 뿐 아니라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벤구리온대학의 사회학 교수로 일하게 되는 기적적인 일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류태영은 이스라엘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인물이 되었다.
7년간의 이스라엘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게 된 것도 그의 조국사랑에 기인한다.
그는 아무리 그곳에서의 생활이 안정되고 인정을 받아도 한시도 조국을 잊어본 적이 없었기에 결국 귀국, 모교인 건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는 그후 건국대학교 부총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