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소중한 연인 친구, 술 그리고 영화”
한 영화평론가는 그를 가리켜 “느리고 깊은 배우”라고 말했다. 이제 누구나 높이 평가하는 `배우 최민식', 그 개인의 몇가지 기억을 들춰봤다.
내 인생의 여자 지금 결혼이 두번째 아닌가. 그냥 고마울 뿐이다. 부족한 거 없이 자란 사람인데 이 중고차를 받아줘서. 가끔 아내가 “오빠, 너무 일에만 미쳐있는 거 아냐”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래 나 미쳤다”라고 농짓거리하지만, 실은 내 맘이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주는 게 진짜 사랑같다. 이제 죽을 때까지 그럴거다
내 인생의 친구 허승철이라고 고등학교 동창이 있다. 누구보다 날 잘 이해해주고 배우로서 존중해준다. 풍족하지 못한 친군데 내 영화를 꼭 표 사서 보려고 한다. <파이란>도 네 번 봤더라. 어렸을 때는 함께 개차반처럼 놀았다. 학교 땡땡이 치고 삼양동 뒷골목 중국집에서 술먹고, 학교 기슭의 옛 발칸포 부대 벙커에 숨어서 담배피고…. 우리 사이가 갈수록 좋은 모습이다.
내 인생의 술 아직 주선의 경지는 아니다. 그냥 사람이 좋고, 얘기가 좋으니까 그 수단으로 삼는거지, 내공으로 따지면 아직 넘어야할 고지가 많다. 앉아서 소주 13병까지 먹던 친형님으로부터 술을 배워서 그런지 주사가 없다. 단지 깊게 취하면 세상 모르고 자는데, 대학 시절 추운 겨울, 장충단 공원에서 술먹고 자다가 친구들에게 무지 맞았다. 그러다 얼어죽는다고.
내 인생의 영화 너무 많아서…. 학교보다 좋은 영화가 나를 가르쳤다. 고등학교 때 <디어 헌터>를 보러 갔는데 반전영화라서 그랬는지 미성년자 관람 불가였다. 앞에서 학생증 검사하는데, 내가 좀 겉늙어서, 사복입고 은하수 하나 꺼내물고 떳떳이 표사서 들어갔다. 그런데 영화 끝나고 공수부대원 한명하고 해병대 군인 한명하고 박터지게 싸우더라.
새영화 ‘취화선’ 장승업역 최민식
카메라도, 감독도, 관객도 아닌데 그 앞에서 그의 눈빛이 촉촉해지고 불그스레하게 충혈돼 가고 있었다. 처음 무덤덤했던 표정은 배우의 자존심에 대해, 한국영화의 현 주소에 대해 말하면서 조금씩 달궈지더니 어느 순간 툭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되었다. 그건 한참 감정이 고조된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이처럼 배우 최민식(39)씨의 열정은 언제든 튀어나올 준비가 돼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건 <해피엔드>에서 조용하지만 처절한 살인극을 벌이던 서민기의 모습이라기보다 <쉬리>의 특수 8군단 소속 박무영과, <파이란>의 `생양아치' 강재가 쏟아내던 뜨거움이었다. <파이란>이 아직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는 시점이었지만 그는 이달말부터 촬영에 들어가는 임권택 감독의 새 작품 <취화선>을 위한 `변신'에 골몰하고 있었다. 조선말 화가 장승업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참 지지리도 운이 없던 사람”이어서 그가 단골처럼 맡아온 인물들과 맥을 잇고 있었다.
■<취화선>의 장승업
면역성 없는 아기 같은 존재다. 그냥 기인이라고 보면 안된다. 당시의 보수적이고 제약많은 사회에서 이탈해 자유로워지고 싶어했던 것 뿐이다. 오죽했으면 고종이 자기한테 와서 그림 그려라 했는데 그 부와 명예를 버리고 뛰쳐나왔겠는가.
한 시대를 처절하게 살다간 예술의 무게를 연기해야 하는데 지금 배우고 있는 동양화나 단소처럼 단편적인 준비로 되는 게 아니다. 몸이 전부 준비중이다. 눈 뜨고부터 자는 순간까지 온 신경이 다 장승업에게로 가 있다. 근데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거야 하는 가닥을 찾고 있다.
■배우의 자존심
자연인으로서는 별로 자존심 부리고 싶지 않다. 다만 경제적으로 어려워져도 평생 좋은 작품만 하자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 자존심 아닐까. 그 시대의 얼굴을, 문화를 투영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사명감이나 자부심을 가질 뿐이다. 얼마전 연극을 보러갔을 때 어떤 배우가 자기를 몰라봤다고 극장 직원에게 굉장히 화내는 걸 봤는데, 그러면 안된다. 그냥 표사서 조용히 보면 멋있는 거 아닌가.
■천박함
제작사나 언론에서 관객의 숫자놀음에 열을 올리는거나, 흥행에 성공하면 배우나 감독이 목에 힘주는 것을 보면 그렇게 천박해보일 수가 없다. 언제부터 관객수치가 그렇게 중요해졌나? 그 시발점이 된 작품에(<쉬리>를 뜻하는 듯) 출연하기는 했지만 대박을 터뜨리지 못하면 감독과 배우가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된 현실이 참 촌스럽다.
■의리의 사나이
주변에서 그런 얘기들을 하는데, 개뿔도 없다. 영화가 혼자 잘났다며 하는 게 아니다. `내 팀이다'라고 생각하고 짜증나도 참고 그래서 주위를 챙기며 전체의 목표에 다가가는 게 프로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연극할 때 만난 선배와 선생님들이 고맙다. 대학 시절 연극할 때, 연습에 10분 늦었다고 죽도록 맞은 적이 있는데 그 때 공동작업의 중요성을 배웠다. 나만 생각하면 안된다.
■계백장군
99년 신혼여행 때, 파리에서 뤼크 베송 감독의 <잔다르크>를 보려고 젊은이들이 새벽까지 줄지어선 것에 놀랐다. 우리로 치면 류관순 누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 아닌가. 우리도 우리 선조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상업적으로 잘 만들어 가야 한다. 계백 장군의 황산벌 전투 같은 거 잘 찍으면 <글래디에이터>보다 훨씬 볼만할거다. 도대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세상이니.
■파사모
지난 주말 `<파이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동호회가 만들어졌다. 나로서는 처음인데 좋았다. 근데 한참 술먹다가 젊은 친구들에게 `나 너희들 믿지 않는다. 다만 오래 갔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좀 충격 받더라. 그럴 때가 있었지만 이제 나에 대해 극찬하거나 비난하는 것에 들뜨거나 상처받지 않는다. 꾸준한 게 좋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