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비->장충족발집까지 널널히 우정도 다지고 남산길을 걸어면서 아름다운 서울의 모습도 구경했습니다.
보성 57 송년산행을 멋지게 마치고 일년동안 건강한 한해를 무사안산했습니다.화이팅!!!
우린 만나면 소꼽동무가 최고지~~~
노땅들 오늘은 어린 소년처럼~~~
남산 케이블카는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듬뿍 느끼게 해주는 추억의 명물이자 자라나는 어린 이들에게는 우리의 보배로운 산 남산의 참 가치를 일깨워주는 참으로 소중한 시설이지요.
노땅들 계단도 잘 올라오시네!!!
봉수대에서 포도청과 추억의 사진 찰각~~~ㅎㅎㅎ
봉수대는 전국에 620여 개소가 있었으며 이들은 목멱산(남산)에 있는 5개소의 경봉수(京烽燧)를 최종 목적지로 편제되어 있었다. 따라서 목멱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남산에는 태조 3년(1394)부터 고종 32년(1895)까지 근 500여 년간 봉수대가 유지되었으며, 서울에 위치한 봉수대라 하여 일명 경봉수라고도 불렸다. 현재의 남산 봉수대는 남산 정상에 있던 목멱산 봉수대를 〈청구도〉(靑丘圖) 등 관련 자료를 통해 고증하여 복원해놓은 것이다.
목멱산 봉수대는 동쪽의 제1봉부터 서쪽 방향으로 제5봉에 이르는 다섯 개의 봉수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봉의 봉수대는 함경도를 출발하여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양주의 아차산(지금의 광진구)에 닿은 신호를 받았고, 제2봉의 봉수대는 경상도 해안을 출발하여 경상도 내륙과 충청도 내륙을 거쳐 경기도 광주로 이어진 봉화를 받았다. 제3봉의 봉수대는 평안도에서 황해도를 지나 경기도 내륙을 거쳐 한성의 무악 동봉에 전해진 신호를 받았고, 제4봉의 봉수대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바닷길을 따라 경기도의 육로로 들어와 한성의 무악 서봉에 연결된 봉화를 받았으며, 제5봉의 봉수대는 전라도 해안과 충청도 내륙, 경기도 해안을 거쳐 양천(지금의 강서구)의 개화산으로 전달된 봉수를 받았다
남산정상 팔각정에서 추억을 남기자~~~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우남정을 지었다가 1960년 4.19의거 때 철폐되었다가 1968년 11월 11일 다시 건립되었다. 이팔각정은 남산정상에 세워져 있어 서울시가가 눈아래 펼쳐진다.
날씨가 쌀쌀하고 이런 오전인데도 많은 관광객들이 남산을 찾아서~~~
남산 팔각정광장은 세게인의 광장으로~~~서울의 마음의 고향이지~~~
제임스박 요즘 즐거우니 이마가 더 왓뜨다~~~ㅎㅎㅎ
강회장께서 2년 동안 테마가 있는 산행을 이끌어 주어 감사~~~김도박사 항상 멋진 문화해설도 고맙고~~~
해발 479.7m, 철탑 101m, 탑신 135.7m
남산서울타워’는 효율적인 방송전파 송수신과 한국의 전통미를 살린 관광 전망시설의 기능을 겸비한 국내 최초의 종합전파 탑으로 방송문화와 관광산업의 미래를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세계 유명한 종합 탑들이 그 나라 또는 그 도시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 것처럼 '남산서울타워' 역시 지난 40여 년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서울의 상징물 역할을 해왔습니다.
‘남산서울타워’는 서울 시내 전 지역에서 바라보이는 탑의 높이와 독특한 구조, 형태 등으로 인하여 시민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었고, 내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제1의 관광 명소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류 바람을 몰고 온 각종 예능, 드라마의 촬영지로 이름이 높아지면서 내외국인 관광객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과거 백제, 조선의 수도로 시대에 따라 위례성, 한산, 한성, 한양, 양주, 남경, 경성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암사동 선사주거지를 통해 알 수 있듯 서울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고,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거쳐 약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곳입니다
김도 박사께서 한양 서울의 명칭에대한 해박한 문화해설도 듣고~~~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조선을 창건하고, 1394년 한양을 조선의 수도로 확정한다. 1395년 경복궁과 종묘·사직단이 준공되고 1405년 창덕궁이 낙성되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실질적인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가 시작된다. 조선은 수도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백악(북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따라 약 18킬로 미터의 성곽을 쌓았고, 왕의 생활공간이자 통치공간인 궁궐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을 지었다.
고대,서울은 500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백제의 지배 : BC 18 ~AD 475
고구려의 지배 : AD 475 ~ AD 551
신라의 지배 : AD 551 ~
기원전 18년, 백제는 위례성을 수도로 하여 나라를 세웠다.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가 위례성이 위치했던 곳으로 위례성은 후에 큰 성이란 뜻인 한성 혹은 대성이라는 명칭으로도 불 렸고, 왕이 거주하던 곳이란 뜻으로 왕성이라고도 불렸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서울은 식민지 수도 경성에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38선을 경계로 미국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하게 되고 두 연합군이 신탁통치안을 제안하면서 반대하는 우파와 찬성하는 좌파간의 대립이 격렬해졌다. 대표적인 정치지도자로는 이승만과 김구를 들 수 있다
경성시에서 서울시로 명칭이 공식적으로 바뀐 것은 미군정이 <서울시헌장>을 발표하고 한달이 지난 1946년 9월 28일이며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로 전환되었다
국립극장은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깊은 극장이자, 공연예술 발전의 중심이 되는 극장이다. 그러나 이 극장은 관립극장으로 시대의 변화를 적극 수용하지 못하고, 목적극적 경향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민간극장이 감당할 수 없는 대형극과 전속단체를 활용한 총체극을 무대에 올려 공연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관객을 찾아가는 순회공연이나 개방공연을 실시하여 문화복지를 구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장충단비에서 강회장의 증명사진!!!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의 장충단 공원에 있는 석비로서 조선시대 말기 을미사변 때 목숨을 바친 충신·열사를 위하여 1900년에 조성한 장충단의 건립기념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호.
원래 장충단비와 사당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신라호텔 쪽이었는데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장충단비의 앞면에 씌여진 글자는 순종 황제가 황태자 시절에 쓴 친필이고 뒷면에 새겨진 찬문(撰文)은 당시 육군부장(陸軍副將)을 지내던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이 지었다.
장충단 공원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인 영조 임금 때 서울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군영(軍營)인 남소영(南小營)이 있었던 곳으로 고종 임금이 이곳 남소영 터에 장충단을 꾸민 뒤로는 장충단이라 불리어 왔다.
장충체육관은 1960년 3월 서울시에서 예산 900여만 원으로 기공하여 1963년 2월에 준공하였다. 총 공사비 9,200만여 원으로 3,293평의 대지 위에 우리 나라 최초로 세워진 실내체육관이다.
장충체육관은 그 당시 필립핀에서 자본을 지원해 주어 건설되었답니다.(김영민교우로 부터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