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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느헤미야
느 2:1-10
1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3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5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6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7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9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10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느 2:1-10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가다] 아닥사스다왕 20년 ㄷ) 니산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동안 4개월이나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왕 앞에서 술을 따라 바치게 되었다. 그런데 전과는 달리 나 자신이 아주 슬프게 느껴졌다. (ㄷ. 유대 달력으로 봄철이 시작되는 1월로서 오늘날의 양력으로는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에 해당된다) 2) 이때에 왕이 나에게 물었다. `그대의 안색이 왜 그토록 좋지 않소? 몸이 아파서 그렇소? 그런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마음에 무슨 큰 걱정이 있는 것 같소' 이때에 나는 몹시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나 3) 왕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임금님, 만수무강하소서! 우리 선조들이 묻혀 있는 성읍이 황폐하게 되었고, 그 성문들도 불에 타 없어졌으니 제 마음에 어찌 걱정이 없겠습니까?' 4) 그러자 왕이 나에게 다시 물었다.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으면 말하시오. 내가 이루어 주겠소' 그래서 나는 하늘의 하나님께 잠시 짧고도 절실한 기도를 드린 다음 5) 왕에게 대답하였다. `임금님, 임금님께서 제 소원을 기쁘게 들어주시고 이 종을 신임해 주신다면, 저를 유다 나라로 돌아가게 하여 제 선조들이 묻혀 있는 성읍을 재건하도록 해주소서!' 6) 그때에 왕후와 나란히 앉아 있던 왕이 나에게 물었다. `그대의 여행이 얼마나 걸리겠소? 언제쯤이면 그대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겠소?' 내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게 될 기간을 말씀드리자, 왕이 기꺼이 승락해 주었다. 7) 그래서 나는 세부적인 지원까지 요청하였다. `임금님, 저를 보내시는 것을 좋게 여기신다면, 유브라데강 서쪽 지방의 총독들에게 보여줄 조서도 제게 써주셔서 제가 유다까지 무사히 가도록 해주소서. 8) 또 임금님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보여줄 조서도 한 장 더 써주소서. 성전 곁에 있는 요새의 대문도 짜고 성벽도 쌓고 제가 살 집도 지을 목재를 내게 제공해 주도록 명령을 내려 주소서' 나의 하나님께서 내게 친절한 손을 펴서 돌보아주셨기 때문에, 왕이 나의 요청을 모두 승락해 주었다. 9) 왕은 나의 여행을 위하여 군대 지휘관으로 기마병들을 준비해 주었다. 나는 유브라데강 서쪽 지방에 이르러 그곳의 총독들에게 왕의 친서를 전하였다. 10) 그러자 사마리아 지방의 통치자이었던 호론 사람 산발랏과 그의 하수인으로 암몬 지역을 다스리던 도비야는 몹시 화를 내며 근심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리하게 일을 처리할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본문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비전이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왕이 묻고 느헤미야가 대답하다(1-3) 술 관원은 왕의 암살을 막기 위해 먼저 술을 맛보아야 하며, 따라서 자주 왕 앞에 나아갑니다. 기슬르월(11~12월)로부터 니산월(3~4월)까지 4개월의 차이가 있으며, 니산월에 대한 언급은 느헤미야가 기도한지 4개월 만에 응답받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1:11). 그날 왕이 그의 얼굴에 수심이 있는 이유를 묻자 그는 크게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얼굴에 수심을 가지고 왕 앞에 서는 것은 왕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져 사형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왕의 협조를 구해야 할 입장에서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되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왕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 후, 자기 나라의 성읍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슬기롭게 예루살렘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과거 예루살렘이 페르시아에 저항한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왕의 협조를 구하다(4-8) “네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느냐?”는 왕의 말을 느헤미야는 기도 응답으로 이해하고 선 채로 묵도합니다. 왕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길게 부르짖는 기도도 들어주시지만, 소리 없이 잠깐 드리는 기도도 응답하십니다. 이 기회에 그는 자기 성읍에 가서 성을 건축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유프라테스 강 건너 서쪽의 총독들에게 조서를 내려 안전하게 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려 건축에 쓸 재목을 공급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놀랍게도 왕은 이 모든 요청을 허락합니다. 자기의 이익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다(9-10)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전과 계획을 갖지만 행동하지 않기에 목적을 이루지 못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하고 계획한 대로 예루살렘 성 건축을 위해 행동합니다. 왕의 삼림에서 충분한 재목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행동할 때 반대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10).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은 선한 일을 할 때에 반대에 부딪힐지라도 목표한 바를 끝까지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적용: 느헤미야의 기도가 현실에서 어떻게 응답이 되었는지 살펴보세요.
우리는 기도를 왜 해야 하며, 기도를 하면 어떤 축복이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기도하기를 무척 힘들어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기도를 방해하는 방해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방해물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이기심, 죄, 마음속의 우상,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사역에 인색한 것, 용서하지 않는 마음,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불편한 관계, 불신앙, 게으름, 말씀을 거역하는 것 등이 기도의 방해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고 있는 요소들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털어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방해물들은 조용히 사라질 것입니다.
< 설 교 >
신나게 시작합시다
느 2:1-3:1 / 류영모목사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그렇게도 공부하고 싶었던 그림공부를 시작한 젊은 이가 있었습니다. 그림분야에서 명성을 얻기까지 숱한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요.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보니 재산은 다 잃었고 사랑하는 아내는 세상 을 떠난 다음이었습니다. 슬픔과 절망을 견딜 수 없어 술로 나날을 보내던 어 느날 예수믿는 사람을 만나 기독교 복음을 접하게 되어 훌륭한 신앙인이 되었 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속에는 기독교적인 가치들이 가득 녹아 있었습니다. 바로 렘브란트 화가의 이야기입니다. 말년 한 미술학도가 렘브란트에게 물었 습니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위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까?" 주저없이 한마디로 대답했습니다. "지금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새천년이 밝아 왔습니다. 성공의 비결은 간단합니다. 지금하고 싶은 그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랜시간 동안 기도하고 싶었는데 기도하지 못한 사 람 있습니까? 이 시간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맛보기 를 원하셨던 분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예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꿈꾸기를 원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절망에 사로잡혀서 꿈을 꾸지 못했던 분 계십니까? 이 시간 복음을 가슴에 끌어안고 꿈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고싶은 일을 멋지게 시 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한 시대를 새롭게 열어간 느헤미야를 통해 새시대엔 멋지게 쓰임받는 비결을 배우고 있습니다.
출세해서 남주나.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주기 위해서 출세하자고 했습니다. 교회부 흥돼서 남주나. 그렇습니다. 남주기 위해서 우리교회는 부흥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 습니다. 우리가 부흥을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부흥을 얼마만큼 영향력있게 나누 어 주느냐 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불은 원래 나눌 때 커지고 폭발적인 힘을 발 휘하기 때문입니다.
불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불이 있습니다. ① 자기혼자 타다가 꺼지는 불이 있고 ② 태우지 말아야 할 것을 태우는 잘못된 불들이 있습니다. 씨랜드의 불이 그랬고 인천 호프집 불이 그렇습니다. ③ 아름다운 불은 나누어 줄 때 더욱 멋지게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고국 땅이 무너지고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하면 통곡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인이 회복 되어져야 할 것이 있다고 하면 눈물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오늘 우리 귓전에 무너지는 소리들이 얼마나 커다랗게 들려지고 있습니까? 믿음이 무 너지는 불신의 소리들, 교회가 무너지는 낙심과 절망의 소리들, 정치가 무너지는 소리들, 경제와 기업이 무너져가는 소리들, 가정들이 깨어지고 무너지는 소리들이 얼마나 커다랗 게 들려오고 있습니까? 청소년들이 몰락하고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은 교실이 무너지고 수업이 무너지고 교육이 무너졌다고 한탄합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면 통곡하는 일입니다.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 하는 사람에게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게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하는 사람이 변화되어집니 다. 내가 해결할 수 없었던 그 문제 환경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 문제가 전혀 해결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문제를 능히 감당하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려워진 것이 아닙니다. 환경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입니다.
로렌스 고울드라고 하는 사람은 "세계는 원자폭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기 심에 의하여 절망에 의하여 멸망되게 될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지구상에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멸망해 갔던 21 개의 문명을 연구하고 그 가운데 21개 아운데 19개 문명은 외부의 외부의 적 이 아니라 내부의 적, 내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멸망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 습니다.
미군이 패배했던 전쟁이 있다고 하면 월남전입니다. 월맹 게릴라전의 패배감 때문에 심리전에 말려서 미군은 전쟁을 포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군은 역선전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군에게 잡히면 잔인하게 죽는다. 따이한에게 붙잡히면 갈기갈기 찟긴다 박살난다. 그래서 따이한이란 말만 들어도 월맹군들이 두려움에 떨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새천년에도 사탄은 여러분을 유혹할 것입니다. 실패가 문제가 아니고 실패감이 문제 입니다. 마음이 문제요 믿음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탄에게 과감히 단호하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탄! 한소망교회 건드렸다가 너는 박살난다. 한소망교회 성도들 건드렸다가 뼈도 못추린다. 사탄에게 선전포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되 빌빌거리는 것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상살아갈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비실거리는 것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우리는 새천년의 문을 열려고 할 때에 여러분 카렌다의 숫자를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믿음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심리적인 패배감에서 일어나야 됩니다. 절망감을 극복해야 됩니다.
어릴 때 제가 살던 마을에 이야기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아이들 모아 놓 고 사탕도 주고 옛날 얘기 들려주는 것을 낙으로 알고 살아가던 할아버지였습 니다. 우리동네 아이들은 곧잘 공부를 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때 담임선생 님은 편애를 해서 우리동네 아이들보다는 윗동네 아이들을 퍽 사랑했던 것 같 습니다. 아마 그 마을아이들이 부잣집 아이들이었나 보지요. 어린아이들이 그걸 느끼고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상심 해 있던 아이가 이야기 할아버지에게 담임선생님 욕을 하고 또 고자질을 했습 니다. 그때 이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들려주었던 이야기 할아버지의 얘기는 평생 내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보리는 밟힐 수록 더 뿌리를 깊이 박고 새 봄엔 더 힘차게 자라는 기라!」
길지않은 인생을 살았습니다만 때로 무서운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습니다. 청 소년 시절에는 철없이 인생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막다 른 골목이 아닌가? 절망감에 울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어 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목놓아 울었던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야기 할아 버지가 들려주었던 그 말이 제게 얼마나 무서운 용기를 주었는지 모릅니다. 「보리는 밟힐 수록 더 뿌리를 깊이 박고 새 봄엔 더 힘차게 자라는 기라!」 그렇다. 지금 밟혔 다 그래서 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다. 한번 밟혔다고 그래서 영원히 밟히지 않는다. 오늘의 절망이 내 인생의 끝장이 아니다. 「보리는 밟힐 수록 더 뿌리를 깊이 박고 새 봄엔 더 힘차게 자라는 기라!」
여러분 지난 한해 동안의 실패가 새시대의 실패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 넘어져 있다고 해서 그 자리가 여러분의 자리가 아닙니다. 한번 무너진 것이 여러분의 영원한 자리가 아닙니다. 새시대에는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 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먼지를 툴툴털고 새롭게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어둠을 바라 보던 눈을 열어서 하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도울 사람 없다구요. 전능한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와 주실 것입니다.
멋있게 준비하자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멋지게 쓰기기 전에 참으로 멋지게 준비시켰던 것을 볼 수 있 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그릇대로 쓰십니다. 여러분은 그런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서는 쓰레기통하고 밥그릇하고 바꿔서 사용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강단지하고 국그릇하고 바꿔서 써 본 적이 없습니다. 준비된 그릇대로 쓴단 말이예요. 기도가 익어야 합니다. 인격이 말씀 가운데 푹 익어야 합니다. 익지 않은 조기는 비린 내가 납니다. 그러나 잘 익으면 맛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 익은 성도 기도가 익 고 인격이 익은 성도들을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느헤미야는 통곡했습니다. 금식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달려가지 아니하고 차분히 준비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일터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패할 수 밖에 없 지요. 기도만하고 아무런 계획도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도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축복도 내릴 수가 없습니 다.
느헤미야는 기도하고 일터로 달려갔습니다. 오늘 본문 2장 1절에 보면 느헤미야가 왕 을 찾아간 시기가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이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니 로부터 슬픈소식을 들었던 달이 기슬르월이었습니다. 기슬르월은 지난해 가을초였고 니 산월은 유대월력으로 보면 정월달입니다. 4개월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4개월동안 차분 히 아주 용의주도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했겠지요. 계획을 세웠겠지요. 물 품이 뭐가 필요한가? 작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방해꾼들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할 것인 가? 차분히 준비했습니다.
정면 돌파했다 : 통곡
준비가 완료된 다음 이를 피해가지 아니하고 정면돌파 해 갑니다.
①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근심된 얼굴로 임금님에게 나아갔다고 하는 것은 죽음 을 각오한 태도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 느헤미야의 직책이 무엇이었습니까? 느 헤미야의 직책은 다름아닌 경호실장, 비서실장이었습니다. 임금을 기쁘게 하는 것이 느 헤미야의 사명이었습니다. 혹시 슬픈 얼굴 두려운 얼굴을 하고 임금 앞에 서게되면 임 금이 호를 내밀지 않았을 때 그가 비록 왕비라고 할지라도 목이 달아나는 겁니다. 저가 혹시 임금을 죽이려 나타난 것은 아닌가? 얼굴이 왜 사색이 되어 있지? 얼굴이 근심에 사로잡혀 있지? 임금이 호를 내밀지 아니하면 그 자리에서 그 목이 달아나는 겁니다.
② 죽으면 죽으리라! 임금 앞에 나아갔습니다. 오늘 본문 4절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2절에 보면 "그때에 느헤미 야가 크게 두려워했다" 임금께서 호를 내밀며 그들을 영접합니다. "그대가 내게 무엇 을 원하느냐."
③ 이어지는 말씀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묵도하고 - 하나님 역사하시기 시작하시는군요.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군요. 내 민족을 버리지 아 니하시고 우리 백성을 떠나지 아니하셨군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군요. 나를 통하여 전능한 하나님께서는 뭔가를 이루시기를 원하시는군요. 하나님 고마워요. 하나 님 감사해요.
계획서를 제출
그때 하나님께 묵도하고 말합니다.
① 폐하, 종의 고향 땅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그 성을 중건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임금이 말합니다. ② "그 일이 끝나는데 얼마나 걸리겠느냐? 어느 때에 그 일을 마치 고 내 곁으로 돌아오겠느냐?" 용의 주도하게 고합니다. ③ 비자 발급을 요청하지요. 필요한 물품들을 조목조목 아룁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열거하기 시작했습 니다. 문제로부터 도망가려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분들이 계십니까? 새해엔 다른 일은 몰라도 신앙생활만 큼은 멋지게 승리하고야 말리라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주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 업에 어려움을 겪었던 분들이 계십니까?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었던 분들이 계십니까? 가정에 어 려움을 겪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가장 아름다운 관계로 우리 가정이 회복되고야 말리 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습관적인 죄에 사로잡혀 계신 분이 계십니까? 김유신이 애마 의 목을 자르는 심정으로 과감히 잘라 승리하시를 바랍니다. 정면돌파하십시오.
언젠가 태안반도 앞바다를 지나던 여객선이 무서운 파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계속 해 뚫고 갈 자신이 없어 파도를 피해 기수를 돌리는데 거대한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쳤 습니다. 배가 뒤집어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지요. 파도가 거세면 거셀수록 피하면 피할수록 배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세상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피해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정면 돌파하십시오. 주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 백성들과 함께 현장을 답사합니다. 처참하게 무너진 성 벽을 보며 마음이 무너지는 듯 아팠습니다. 불에 탄 성문을 바라보며 눈물이 솟구쳐 올 랐습니다. 백성들의 손을 붙들고 이 성을 수축합시다. 다시는 이 수치를 당하지 맙시다 호소했습니다. 무너진 성 - 사는 곳곳마다 다 무너지고 가는 곳곳마다 몽땅 불에 타고 없어졌습니다. 가망이 없구나. 낙심하고 절망하지 아니했습니다.
샤르뎅은 "세상은 희망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에 분연히 일어나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깨끗이 망하게 생겼다고 얘기 할 때 아니요, 우리는 일어날 수 있 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모든사람들이 절망하고 낙망하고 있을 때에 아직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새세상은 열려질 것이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할 수 있다고 골목골목 다니며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일어나자고 외쳤습니다. 무너진 성은 수축될 수 있습니다. 깨어진 가정 은 회복되어 질 수 있습니다. 침체된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의 불길이 솟아 오르게 될 것입니다. 무너졌던 기업들마다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낙심된 백성들이 희망을 얻 게 될 것입니다.
저는 개척교회에 대한 사명이 있어서 교회를 시작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갈곳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하나님이 저를 몰아가셨습니다. 지금부터 꼭 9년 전 일입니다. 지난번 섬기던 교회를 행복하게 교회를 섬기고 있었는데 저희교 단에서 가장 큰 교회인 영락교회에서 Team ministry - 팀 목회에 저를 청빙해 주었습니다. 철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큰교회에서 오라고 그러니까 덜컥 간다고 대답을 했더랬지요. 그런데 어린 교인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울고 돌아 갑니다. 우는 교인들 떼어 놓을 수가 없어서 다시 그 교회에 주저앉고 말았습 니다. 그런데 한번 교회를 떠난다고 마음을 먹었던 터라 좀처럼 마음이 붙지 를 않습니다. 또 목사가 한번 교회를 떠난다고 얘기를 하고 나니까 교인들이 좀처럼 사랑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포항에 있는 커다란 교회에서 저를 청빙해 주었습니다. 이제는 갈 때가 됐나보다 싶어서 간다고 얘기를 했 지요. 그런데 그 교회의 청빙 절차가 교회 내부사정에 의해서 자꾸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9년전 정책당회를 하게 되었지요. 장로님 한분이 "목사님은 바다의 큰 고기이신데 우리교회는 조그만한 어항이라서 목사님을 모실만한 역량이 되지 못합니다" 그럽니다. 이게 가라는 얘기인지 칭찬하는 얘기인지 분간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문이 다 닫혀 막상 갈 곳이 없습니 다. 하나님 앞에 30일 기도했습니다. 40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한번 더 100일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크게 외쳤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의 자리를 떠나 갈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섰을 때에 아무데도 갈 곳이 없을 때, 그 어디에도 나를 오라는 데가 없을 때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오히려 나는 가장 멋진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이 선언이 오늘 한소망교회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큰 절망의 자리에 시달린 분들이 계십니까? 혼자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절망의 자리에 부딪힌 분들이 계십니까? 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골 목에 우뚝 홀로 서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동서남북 사방팔방 어디를 보아도 내 손 붙 들어 줄 수 있는 그 누구가 없는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린 분이 계십니까? 새시대를 향 하여 희망을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큰희망을 외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위대한 포부를 주님 앞에 내려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멋진 꿈을 꾸시기를 바랍니다. 그 꿈을 통하여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와 주실 것입니다.
양문(예배)을 제일 먼저 수축하라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에 성문이란 성문은 다 불타고 없어졌습니다. 성이란 성은 다 무너져 내리고 없어졌습니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될지 알지를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동서남북 사방팔방 모두 다 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분문이 나오지요. 분뇨처리장 쉽게 얘기하면 똥문입니다. 샘문이 나오지요. 옛문, 어문, 풀무망대, 동문, 마 문, 수문... 수 없는 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3장 1절에 보면 "제사장들과 함께 양문을 제일먼저 수축했다" 그랬습니 다. 여기 우선 순위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너지고 무너질 때 무엇을 가장 먼저 수축하는가? 사업이 무너져 갈 때, 가정이 상처가 될 때, 내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교회가 침체의 늪에 빠져갈 때, 정치가 불신을 당할 때에 기업들이 문을 닫을 때, 민족이 무너져 내릴 때, 세계가 절망에 휩싸일 때, 도대체 우리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하는 것인가? 제일먼저 무엇을 수술해야 된단 말인가?
만지면 푹썩푹썩 썩어 주저앉아 있습니다. 눈을 떠 보면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내리고 불타 없어진 곳 뿐입니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먼저 세워야 되는 것인가? 본문은 우리 에게 양문을 먼저 세워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문은 양을 잡는 문입니다. 제사하는 문입니다. 예배하는 문입니다. 정치 경제 사 회 문화 교육 가정 무너진 곳이 많지만 가장 시급한 곳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예 배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기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예배부터 재건해라. 거기서부터 만가지 오만가지 문제가 해결될 줄 로 믿습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이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에 저들은 먼저 예배했습니다. 예배당을 수축했습니다.
미국이 우주선을 발사했는데 고장이 났습니다. 대통령은 전 국민에게 호소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 주십시오.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영국의 왕실은 윌리엄 템플 주교에게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전 국민들에게 기도하도록 요청해 주십시오.
현대인들이 방황하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양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양식인 영혼의 양식이 없어서 참된 가치를 찾지 못해서 믿음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꿈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망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정신의 문제요 예배의 문제입니다.
이 민족이 가장 급한 것이 있다면 믿음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한국교회에 가장 무서운 시급성이 있다고 하면 잃어버린 예배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새천년에 첫발을 디디는 여러분들이 가장 시급한 일이 있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 주님을 붙들고 꿈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기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양정신이라는 젊은 여학생이 일제시대에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진달래 꺾으러 갔다가 잘못해서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 의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다른 것은 할 수 있는데 해부학을 공부한다는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개구리를 잡아서 해부학을 공부합니다. 장님이 개구리 배를 좍 갈라놓고 만져 서 이게 뭐고, 여기에 뭐가 있고 어루만져 연습을 하는데 그럴때마다 개구리가 얼굴에 개구리 내장들을 튀겨 놓고 펄쩍 뛰어 도망을 간단 말이지요. 도무지 징그럽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따리를 싸들고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랬더니 주임 교수가 그렇게 얘기합니다. "개구리 한 마리한테 지고서 그냥 돌아가겠는가?" 일본 학생들도 양정신을 놀리기 시작합니다. 기숙사에 와서 바느질을 하는데 바늘에 실 하나 끼워주는 친구가 없습니다. "조센징. 장님 이 무슨 의학을 하느냐고. 장님과 함께 의학을 공부하니 우리가 창피해서 견 딜 수 없다"고 양정신을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내 손으로 바늘을 끼 고 내 손으로 개구리를 해부하고 내 손으로 사람을 해부하는 가장 위대한 의 사가 되겠다. 제일 먼저 가장 작은 일부터 시작하겠다! 생각하고 더듬더듬했 더니 거기에 싸리 빗자루 하나가 손에 잡힙니다. 그래서 조그만한 실날 같은 것을 꺾어서 바늘 끼는 연습을 합니다. 초저녁부터 계속 연습을 했더니 어쩌 다가 한번 꿰어졌습니다. 어떻게 해서 꿰어졌는가 이제는 지혜가 터득이 되어 지지요. 두번 끼기 시작합니다. 세번 바늘 귀를 찾아 냅니다. 새벽녘이 되었 을 때는 실을 다듬어서 바늘을 꿸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장님이 바늘 귀 에 실을 꿸 수 있을 만큼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가 의학을 공부하고 미 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박사가 되고 목사가 되어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커다란 일을 감당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새롭게 일어나십시오. 예배를 무너뜨리고 사셨던 분들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세상 일에 분주하게 시달리다가 기도를 잃어버리신 분들 기도를 회복하십시오. 꿈을 잃어버리신 분들 꿈을 회복하십시오.
결론 예화
런던 번화가 모퉁이에 구두를 닦는 한소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부도를 내고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집안 살림을 꾸려가기 위하여 어린나이에 새벽부 터 밤늦게까지 한쪽 모퉁이에서 구두를 닦습니다. 그런데 구두를 닦을 때 얼 마나 신나게 구두를 닦는지 그 얼굴에는 근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밝은 얼굴 을 하고 콧노래를 하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구두를 닦았습니다. 하도 신나 게 구두를 닦으니까 한 신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구두닦는 일이 그렇 게도 신이 나니" 소년이 대답합니다 "그러믄요. 나는 흙 묻은 구두를 닦는 것이 아니고 내 희망을 닦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이 날 수 밖에요" 그가 바로 "올리브 트위스트"의 작가 챨스 디킨스입니다.
먼지 묻은 영성을 닦아내고 흙 묻은 기도와 흙 묻은 예배를 닦아내고 먼지 묻은 희망 을 털어내고 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나게 출발해 가는 것입니다. 주께서 아름다운 자리 예비하고 기다리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보다 더 멋진 자리를 주께서 새천년에 예비하고 여러분 모두에게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라
느 2:1-10 / 이성우목사(왜관교회)
오늘의 본문 말씀인 느헤미야 2장 1절~10절까지의 말씀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유다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 제3차 포로귀환자들의 지도자로서 함께 고국에 돌아와서 무너져 내린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던 느헤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된 경위를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느헤미야 선지자는 주전 444년경에 이루어진 제3차 포로귀환을 주도한 지도자로서 바벨론에서 출생하여 바사제국의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닥사스다 왕 재임 시절에 바벨론의 수산 궁에서 술 맡은 관원 장으로서 출세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자들의 지도자는 세 사람이었습니다. 1차 포로귀환을 주도한 지도자는 스룹바벨이며, 그는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무너져 내린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2차 포로귀환을 주도한 지도자는 제사장 겸 율법학자였던 에스라이며, 그는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엉망진창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개혁운동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1차 포로귀환과 2차 포로귀환 사이에는 연대기적으로 약 58년간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에스더서에 나오는 대로 하만에 의해 유대인 멸절을 시도했던 사건이 있었던 것이며, 이 사건이 2차 포로귀환의 적극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3차 포로귀환의 지도자는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이며, 그는 재건된 이스라엘의 든든한 방비와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 필요했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감당한 선지자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져 내린 상태로 약 131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남아있었거나 먼저 귀환했던 사람들은 보호를 받지 못한 채로 주변 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약탈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로에서 먼저 돌아온 사람들의 생활은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루는 하나니라고 하는 사람이 두어 명의 유대 사람과 함께 바벨론에 찾아와서 느헤미야에게 유다 예루살렘의 형편을 전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그들을 통해서 듣게 된 예루살렘의 상황은 한 마디로 말해서 비참함 그 자체였습니다. 느헤미야 1장 3절 말씀에 의하면 예루살렘 사람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능욕을 받고 있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고 성문들은 불탄 상태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느헤미야 선지자가 이 말을 듣는 순간 자기 조국과 민족의 아픈 현실로 인해서 며칠 동안 울며 슬퍼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느헤미야는 지금 바벨론 땅에서 나름대로 출세한 사람으로서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상황에서 고향 땅의 슬픈 소식을 듣고도 얼마든지 못 들은체하거나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 소식을 듣고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위한 사명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 슬픈 소식을 전해 듣고는 자기 민족을 위한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거룩한 감동과 결단을 하게 되었으며, 그 회복의 방법이 바로 기도임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혼자만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 보다는 자기 동족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 중에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미스바 기도 운동을 통해서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냈던 사무엘 선지자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써 또 다른 위기 가운데 처해있었던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는 중요한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이 대목에서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상시에 기도의 거룩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 기도의 사람들이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소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소원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결국은 그 일이 자기의 일 인양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감동을 받게 되고 그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거룩한 결단과 함께 현실적인 헌신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어 내게 됨으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올바르게 깨닫게 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고 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백성으로 선택하신 자기 백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결국에는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라는 분명한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그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셔서 택한 백성들을 회복시키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섭리하신다는 분명한 믿음의 고백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자기 조국의 슬픈 소식을 전해 듣고서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장 4절~11절에 기록되어 있는 느헤미야의 기도 내용을 보면, 그는 자기 민족과 자기 자신을 공동 운명체, 곧 한 몸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근거는 바로 출애굽 사건과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자신이 지금 기도하고 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포기와 전적인 헌신을 결단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감동적이고 중요한 내용입니다.
지금 자기 민족 유대 예루살렘 사람들이 답답한 지경 가운데 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느헤미야는 절망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방이 다 막혀 있어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하늘 문은 항상 열려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었던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런 느헤미야의 목숨을 건 간절한 기도에 대해서 넉 달 만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셔서 결국에는 느헤미야가 8절 하반 절에서 고백한 대로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통해서’ 아닥사스다 왕에게 자신이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 슬픈 사연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결국에는 왕의 허락을 받아서 군대장관과 마병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무사히 예루살렘에 귀환해서 성벽 재건 사업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게 된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하는 사실은 첫째로,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둘째로, 하나님은 무한하신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라는 사실, 그리고 셋째로,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기를 즐겨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느헤미야처럼 기도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이유인줄로 믿습니다.
느헤미야가 기도의 사람이었음은 본문 4절 말씀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손길을 철저하게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닥사스다 왕이 자기의 슬픈 근심의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그 기회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임을 알고서는 왕에게 대답을 하기 전에 막간을 이용해서 기도하는 일을 잊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아마도 기도하면서 두 가지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는 왕에게 지혜롭게 말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도록,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셔서 자기가 요구하는 것을 왕이 들어주시도록 기도했을 것임을 본문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다시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첫째로, 큰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며, 둘째로,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그 일과 그 일을 하기 위해서 헌신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 그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와 여러 가지 방해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일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진정한 용기와 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헌신적으로 임할 때에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섭리해 나가심으로써 형통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돕는 사람들을 붙여 주셔서 결국에는 그 일을 온전하게 이루도록 도우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누가 한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오늘 본문 말씀이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 시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귀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 맡은 관원 장으로서 물론 육신적인 편안함과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만약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없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그저 한 나라의 술 맡은 관원 장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조용히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오늘 본문 말씀처럼 일신상의 편안함에 머물러 있지 않고 뜨거운 민족애를 가슴에 품고 민족을 회복시키는 축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큰 믿음을 가지고 큰 사명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결국에는 한 시대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자기 민족을 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이름을 후세 사람들에게 남기는 아주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세상의 모든 역사를 섭리해 가시는 중에 이 소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일꾼으로 쓰시려고 일꾼을 찾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런 일꾼들을 준비시켜가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아무나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셔서 그 일을 맡기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열심과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만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시고 도우심으로 하시고자 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시는 분인 것을 믿으시고 느헤미야처럼 기도의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때를 분별해 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자 하는 진정한 헌신과 용기, 지혜와 도우심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으심으로써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는 행복한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절망적 상황에서 희망 품기
느 2:1-5 / 김필곤목사
지난 주 신문에 올해 서울대 후기 졸업식에 사회과학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졸업생 대표 연설을 할 박성태 씨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답니다. 어머니는 뇌종양으로 실직하였답니다. 정부의 보조를 받고 사는 기초수급자였답니다. 겨울에는 수도가 얼어 물도 안 나오는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답니다. 금수저가 아니라 흙수저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흙수저로 태어났으니까 별수 없다고 수저 계급론에 빠져 포기하지 않았답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서울 대학에 합력하였고,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겠습니까? 희망입니다. 그는 절망적 상황에서 희망을 품고 공부했습니다. 그의 꿈은 자신과 같이 어려운 소외 계층을 위한 학교나 복지센타를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희망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과 희망이 없이 공부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희망을 가지고 사업하는 사람과 희망이 없이 사업하는 사람은 결과가 전혀 다릅니다. 희망을 가지고 결혼한 사람과 아무런 희망이 없이 결혼한 사람은 삶의 결과가 많이 차이가 납니다. 심리학자로 희망에 대하여 체계화를 시도한 미국 캔자스 대학의 심리학자였던 릭 스나이더(Rick Snyder)는 대학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희망의 크기와 그 전의 수능(SAT) 점수, 그리고 대학생활에서의 학점, 졸업 후 성취 정도 등을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학생들이 대학 생활에서 좋은 학점을 받고 잘 적응하는지를 예측하는 것은 수능 점수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희망의 크기였다고 합니다. 대학 시절 학점이 높은 사람보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졸업 후 더 많이 성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20대를 변화시키는 30일 플랜"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연구소는 어느 사회에서나 65세 이상의 정년 퇴직자들이 3: 10: 60: 27이라는 비율로 경제 피라미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3%는 최고의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10%는 퇴직 전과 별 차이 없는 경제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60%는 간신히 생활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고, 27%는 자선 단체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났을까?"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3%는 젊었을 때부터 자신의 목표를 글로 적어 놓고 수시로 꺼내 읽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10%는 목표는 있었으되 글로 적고 수치로 꺼내 읽는 습관은 갖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60%는 목표가 수시로 바뀐 사람들이었고, 27%는 목표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슷한 조사 결과가 예일 대학교에서도 있었습니다. 예일 대학교는 1953년도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당신은 인생 목표를 구체적으로 적어 놓은 종이를 갖고 있습니까?" 3%의 학생이 "그렇다"고 대답했고 97%의 학생이 "아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20년 뒤인 1973년도에 1953년도 졸업생들의 경제력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3%가 나머지 97%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 온 가족 예배로 유초등부, 중고등부, 청년대학부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공부를 잘 하고 싶으면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꿈이 있어야 합니다.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부자로 살고 싶으면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출세하고 싶으면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성공하고 싶으면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으면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꿈이 있어야 합니다.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1.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절망적 상황일지라도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밤하늘의 별은 어두울수록 더욱 빛이 납니다. 상황이 절망적일수록 희망을 품고 절망을 극복하면 그 사람은 더욱 세상에 빛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느헤미야는 희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조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갔지만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품고 일해 왕의 술 관원장이 되었습니다. 술 관원장은 왕이 먹을 음식이나 술을 먼저 시음함으로써 왕이 입을 해를 사전에 방지하는 직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조국 유다가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었는가 1장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큰 환난을 당했습니다. 능욕을 받았습니다.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은 불탔습니다. 이 절망적인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어떻게 합니까?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관심도 갖지 않습니까?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까? 2장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왕에게 나아가 자신을 보내어 예루살렘 무너진 성읍을 재건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2장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재건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내 마음 속에 주신 것"이라 말씀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희망을 가졌습니다. 비전, 꿈, 사명, 소망,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절망적인 상황이 다가오면 도피하거나 포기하거나 무관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그것을 보고 듣고 그 가운데 사는 것은 그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적인 상황으로 바꾸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그 가난을 보며 절망하지 말고 부자가 되겠다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가 싸우는 집에 태어났다면 그 집을 싸우지 않는 행복한 집으로 바꾸어야 하겠다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흙 수저로 태어났다고 비관하는데 인생의 차이는 수저차이가 아니라 꿈의 차이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가정을 보며 무슨 비전이 있습니까? 자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무슨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업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시대적인 난제에 대하여 무슨 비전이 있습니까?
꿈의 크기가 인생의 크기가 됩니다. 꿈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갑니다.
꿈꾸는 자들이 성공하고 꿈꾸는 자들이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와트는 끓는 물주전자를 보다 증기 기관차에 대한 꿈을 꾸었고 증기 기관차를 인류에게 선물해 주었습니다. 뉴턴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한 꿈을 꾸었으며, 라이트 형제는 하늘을 나는 꿈을 꾸다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10세 때 뮌헨의 교장이 "너는 절대 나중에 어른 구실을 못할 것"이라고 가혹한 말을 들었지만 아인슈타인은 꿈을 꾸며 과학의 세계관을 바꿨습니다. 휴렛팩커드의 인사 담당자로부터 "헤이, 우리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 없어. 당신은 아직 전문대학도 나오지 않았잖아"라고 조롱받았지만 스티브 잡스는 꿈을 꾸며 시련과 역경을 딛고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어린 시절 음악 선생으로부터 "작곡가로서의 재능이 전혀 없다"고 평가를 받았던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꿈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악성(樂聖)이 되었습니다. 캔사스 시에서 만화를 그릴 때 "창의적이거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없으므로 신문 편집자로 일하라"는 충고를 받았던 월트 디즈니는 세계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사로부터 "너무 바보 같아서 가르칠 수가 없다"고 무시당했던 토머스 에디슨은 미국에서만 1093개의 특허를 받았으며 인류의 생활 방식을 바꾼 발명가가 되었습니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다고, 연줄이 없다고, 학벌이 없다고 꿈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막노동을 하며 살아가던 이십대 청년 김철호는 자전거 안장을 만들면서 자동차를 만드는 꿈을 꾸었고 기아자동차 창업자가 되었습니다. 톱밥난로 하나 갖다놓고 사업을 시작했던 삼십대 청년 신용호는 그의 사업계획서를 100명 중 99명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했지만 한국 제일의 보험사와 서점을 만든 꿈을 꾸다가 교보를 만들었습니다. 꿈은 무형의 자산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가장 일치하는 공통점은 꿈입니다. 자신 안에 뿌려야 할 기적의 씨앗은 꿈이라고 말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희망과 꿈까지 포기하면 안됩니다.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 에스테 로더사의 주인인 에스테 로더는 화장품을 바를 여유도 없는 가난뱅이였고, 호텔왕인 패리스 힐튼의 아버지 콘라드 힐튼은 한낱 벨 보이에 불과하였답니다. 이순신은 고학력 실업자였고, 칭기즈칸은 결손가정 출신에 왕따였으며, 나폴레옹은 전과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꿈꾸는 자들이었답니다. 빌 게이츠는 "나는 10대 시절부터 세계의 모든 가정에 컴퓨터가 한 대씩 설치되는 것을 상상했고, 또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고 외쳤다. 그게 시작이다."라는 꿈은 가지고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고, 워렌 버핏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마음속에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거부가 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라는 꿈으로 세계 적인 부자가 되었답니다. 그가 처음 주식투자에 뛰어들었을 때 그의 출자금은 고작 10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나는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할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될 것이다. 나는 군대를 이끌 것이다. 나는 미국을 독립시키고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12살에 꿈을 꾸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비전을 주십니다. 꿈을 주십니다. 요셉에게 꿈을 품게 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꿈을 주시고 이루시는 하나님, 다윗에게 꿈을 품게 하고 이루시는 하나님, 바울에게 꿈을 주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은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시145:19)"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자식에 대한 희망을 구체적으로 써 보고 매일 한 번씩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 어린이들의 꿈은 무엇입니까?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우리 청년 대학부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 희망을 기록하여 스마트폰 첫 화면에 나오게 하고 매일 보시기 바랍니다. 그 희망은 언젠가 현실이 될 것입니다.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10명은 절망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인생의 차이는 꿈의 차이입니다. 그 희망을 가진 자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2. 희망을 품은 우리 신앙인은 기도하여 하나님의 선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절망적 상황에서 희망을 품었다면 그 다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해야 하겠다는 희망을 품은 느헤미야는 무엇을 합니까?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왕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보니까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성벽이 불타고 무너졌다는 소식을 동생에게 듣고 무엇을 했습니까? 1장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절망적 상황이라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미 나라가 망했는데 혼자의 힘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 보겠습니까? 꿈만 가진다고 비전만 가진다고 저절로 이루어지겠습니까?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을 재건한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4장 1절 이하를 보십시오. 산발랏이 분노하고 비웃습니다.
4장 3절을 보십시오. 도비야도 그들과 맞장구를 치면서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느헤미야는 대적의 끊임없는 조소를 당합니다. '미약한 유다사람',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는 등의 비웃음과 야유를 보냅니다. 그 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합니까?
4장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다가 오면 가장 쉬운 방법이 포기하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 쉬운 방법은 원망하는 것입니다. 희망의 사람들은 장애물이 다가오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계속적인 방해를 합니다(2:19-3:5-4:1,7) 그런데 느헤미야는 희망을 가지고 계속 기도합니다(1:4,11-2:8–4:4–4:9) 기도하니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와주십니다.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형통케 해 주십니다. 왕이 허락해 줍니다. 여권을 내어 줍니다. 성벽 재건에 쓸 재목까지 줍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품고
모세도 기도로, 에스더가 기도로, 한나도 기도로, 바울도 기도로, 히스기야도 기도로, 베드로도 기도로 희망을 이루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가능성이고 싶다(조현영 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보다 춤에 음악에 빠져 지내 중하위권에 머무는 열등생이었답니다. 미국에 가서 첫 영어시험에 빵점을 맞았답니다. 영어 선생님은 교직 생활 30년 동안 처음으로 0점을 맞는 학생을 보았다고 합니다. 선생님께 학습장애가 있다는 말까지 들었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답니다. 어느 추운 날, 새벽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자신의 방에 들어와 자신의 몸에 손을 얹고 나지막하게 기도였답니다. 아직 찬기가 가시지 않은 어머니의 손은 자고 있던 자신을 깨게 했고 그는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무의식중에 듣게 되었답니다. "하나님, 이 아들을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이 아들이 공부를 할 때 지혜를 내려 주시옵고, 이 아이가 무엇을 하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그 후 자신도 기도하기 시작했답니다.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의 꿈을 위해 지혜를 달라고 울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미국의 명문대학이라는 스탠포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타날 수 없느니라"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도하면 길이 보이고 길이 열립니다. 기도하면 430년의 절망적인 애굽의 장애물도 무너집니다. 기도하면 70년의 비극적인 바벨론의 장애물도 무너집니다.
3.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고 기도한 후 실행함으로 희망을 이뤄내야 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품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희망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느헤미야는 기도만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을까요?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지금 어디에 느헤미야가 가 있습니까? 희망을 품고 기도한 그가 자신의 직장인 안락한 왕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건해야 할 현장 불탄 성읍 예루살렘에 간 것입니다. 공부해야 의사가 되겠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이 날마다 오락실에 가있으면 아무리 손바닥에 의사를 써 놓고 기도해도 의사가 될 수 없습니다. 희망을 이룰 책상으로 가야 합니다. 매출 일년 2천억을 올리기 위해 희망을 갔고 새벽기도와 금요 심야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했는데 매일 술집에 가서 앉아 있다면 그 희망을 죽을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업의 현장에 가야 합니다. 고달프고 자존심 상해도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느헤미야를 보십시오. 철저히 계획을 짜서 실행을 합니다(11-16). 비전만 품었다고 곧 바로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가서 3일 동안 쉬면서 현지 조사를 합니다. 공식 업무를 시작하기 전 3일 동안 침묵 속에 구상을 합니다.(11절) 12절에 보십시오. 입이 무거운 사람입니다. 자신의 계획을 아무에게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을 샅샅이 조사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정확한 현실 이해를 기초로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같이 일한 백성들에게 먼저 비전을 제시합니다(17).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수치를 당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자고 비전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간증을 합니다(18). 하나님께서 왕을 통하여 자신을 도와주었다는 간증을 합니다. 성벽의 재건은 하나님의 뜻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때 백성들의 마음에 소명감이 불타기 시작하고 '모든 선한 일을 하자'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오직 사명으로 하면서 월급도 받지 않았습니다. 적들이 방해하기 때문에 한 손에는 창을 들고 한 손에는 삽을 들고 공사를 진행하게 했습니다. 마침내 어떻게 되었습니까? 6장 15-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52일 만에 성벽 재건을 완성하여 희망을 이루었습니다. 대적들이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이 역사를 이룬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고 기도한 우리 신앙인은 실행함으로 희망을 이루어 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심을 잘합니다. 그리고 절망적 상황 앞에 포기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망적 상황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까지는 하지만 지속적으로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 번 시도해 보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실행해야 합니다. 그 희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실행해야 합니다. 무쇠도 갈면 바늘이 됩니다. 한 방울의 물도 지속적으로 떨어지면 바위에 구멍을 낼 수 있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짭니다. 지속성이 명작을 만듭니다.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대 심리학과의 아델 다이아몬드 교수의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학업이나 업무 등에서 인간의 성취도를 설명하는데 실행능력이 IQ보다 더 적합한 개념이라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 중에는 조금 공부해 보고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것은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두 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리학자 뉴턴의 초등학교 성적은 아주 나빴다고 합니다. 천재중의 천재라고 알려져 있는 아인슈타인은 네 살이 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고,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는 대학에서 낙제했답니다. 지금 성적이 전부가 아닙니다. 한 단어 한 단어 외우다 보면 10,000시간 이상 투자하면 외국인을 만나도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희망만 가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만 하고 있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이루기 위해 실행을 해야 합니다. 공부 못한다고 인생 끝났다고 포기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공부가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를 개발하면 됩니다. 포천(Fortune)이 선정한 500개 회사 CEO들의 학생 시절 평균 성적은 C였답니다. 미국 상원 의원 중 65퍼센트,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75퍼센트는 학교 성적이 평균 이하였답니다. 미국 명예의 여성전당에 오른 메리 베툰(Merry Bethune)은 노예 출신입니다. 그녀는 17째 딸로 태어나 15세 때 주인집의 거실에서 책 한권을 집어든 순간 "내려놔! 읽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딜 감히 책에다 손을 대는 거야!"라는 힐난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때 베툰은 글을 배워야 한다는 꿈을 가지고 미션스쿨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겨자씨란 이 먼지처럼 작은 씨이다. 그러나 큰 나무가 된다. 겨자씨 믿음을 가지면 우리 학생들도 언젠가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작지만, 큰 힘을 가진 겨자씨와 같은 믿음을 가진 학생이 되기 바란다."라는 설교를 듣고 "나도 내 가족들도 저 먼지 같지만 나는 겨자씨가 되겠다."라는 큰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죽을 고생을 하며 대학을 졸업하였고 1불 50센트로 학교를 창설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점점 발전하여 대학이 되었고 그녀는 "Bethune-Cookman College"의 초대 학장이 되었습니다. 희망의 씨앗은 땀을 먹고 열매를 맺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6)"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몇 차례 시도하다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전만 가지고 다 이룬 것처럼 착각하지 마라야 합니다. 기도만 하고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램 차란은 "실행력이 없는 비전은 비극이다."라고 말합니다. 많은 연구결과에서 조직 혁신 작업의 성과가 새로운 방법의 채택보다는 기존에 알려진 지식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실천했느냐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실행에 집중하라"의 저자 래리 보시디와 램 차란은 수많은 기업의 가장 큰 폐단은 실행력의 부재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구체적인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실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의미 있는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실행력의 차이가 경쟁력의 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실행력이 없기 때문에 회사가 경쟁에서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완벽하게 증명하기까지는 10년 이상의 연구가 필요했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천재적 직관보다는 집요하게 매달린 그 실행력에 있었습니다. 에디슨은 필라멘트를 만들기 까지 3000번이나 실패했고, 라이트 형제가 비행하기까지는 805번 실패했습니다. 모든 발명품은 지치지 않은 실행력의 산물입니다. 실행하지 않으면 걸작은 탄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멋진 미래와 장래 희망한다고 해도 탄탄한 실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신기루가 되기 십상입니다. 세련되고 우아한 계획과 개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행력입니다. 만리장성도 거대한 피라미드도 작은 벽돌 하나를 쌓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을 아는 것과 사랑을 행하는 것, 가고 싶은 곳과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것은 조그마한 차이 같지만 결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알고 깨닫기만 한 채, 행하지 않으면 그림의 떡과 같습니다. 위대한 사상도 작품도 한 줄 글의 표현함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라고 말씀합니다.
뇌성마비 딸을 바로세운 아버지의 감동수기가 있습니다. "일어나라 내 딸아"라는 책입니다. 딸은 81년 2월 태어난 지 3일 만에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답니다. '각오하라'는 의료진의 말에 아버지는 좌절치 않고 기도로써 각오를 다졌답니다. 그러나 기도만 하고 있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답니다. 교인들이 목회자가 뇌성마비 딸을 낳았다고 정죄어린 시선을 보냈답니다. 그래서 김일권 목사는 교회를 사임했답니다. 그는 굳어지는 딸의 전신 근육을 따뜻한 손길로 풀어줬다고 합니다. 각종 강연을 통해 보바스, 보이타 등 선진 물리치료법도 배웠답니다. 아이에게 발끝의 촉감을 느끼게 해주려고 개울가와 자갈길을 함께 걷는 등 하루 모두를 딸을 위해 보냈답니다. 하루에 수백 번씩 언어 훈련을 시켜 다섯 살 되던 해에는 드디어 엄마 아빠를 부를 수 있게 만들었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도하며 '우리는 승이를 사랑한다. 예수님은 승이를 더욱 사랑한다.'고 불러주었답니다. 밤이면 딸의 상상력과 지능개발을 위해 동화를 들려주었답니다. 결국 딸은 다소 장애는 남았지만 정상에 가깝게 성장했고, 의료진 모두 이를 보고 기적이라고 환호했다고 합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동화 작가로 데뷔하게 되었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특수교육연구소'를 설립하여 불행에 처한 뇌성마비, 자폐증, 정신지체. 다운증후군, 학습장애, 정신질환 등의 아이와 그 부모들을 돕고 있다고 합니다. 딸은 아버지의 배려로 초등학교 3년 때 동시 문집을 펴냈고 자유문학의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정식 등단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남들은 애물단지로 여길지 몰라도 승이는 태어날 때부터 내게는 보물단지였고 결국 내게 보물을 안겨준 셈이지요. 사춘기를 지나면서 다소 굼뜬 동작과 학업 부진으로 딸이 힘겨워할 때 가슴이 쓰라렸지만 결코 좌절치 않았습니다." 그는 절망적 상황에서 희망을 품었고 기도로 절망적 상황을 극복하며 기도한 만큼 행하여 결국 희망을 이루어내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적극적인 믿음
느 2:1-10 / 김태복목사
이제 2002년이 거의 50여 일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 사이 어느 분은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리어 가는 것을 보고 이 해는 만사형통할 것 같은 희망으로 부풀어 있는 반면, 어느 분은 신년부터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엉키는 느낌이 들면서 벌써부터 낙심하여 '나는 매사가 되는 법이 없어.'라고 합니다. 더 나가서는 '나는 올해도 내게는 운이 없는가봐'라는 식으로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든 일에 적극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언제나 말씀드리는 대로 우리가 적극적인 생각을 품느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생각은 온 몸의 운전대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면 적극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팻말을 보니 '포이손(poison)'이라고 써 있습니다. 영어로 '독약'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에 배가 아프기 시작하여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제 곧 창자가 녹아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진단을 마치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껄껄 웃으면서 말하기를 "포이손은 영어로는 '독약'이라는 뜻이지만, 불어로는 '낚시금지'라는 뜻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놀랍지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 환자는 배가 하나도 아프지 않은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생각은 이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미국의 수필가 에머슨은 말하기를 "사람이란 종일 자기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했고, 노만 빈센트 피일 박사는 "생각을 바꾸면 자기 세계도 바꿀 수 있다."고 했던 것입니다. 죄수들은 타에 의해 감옥이라는 곳에서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합니다. 수도사들은 스스로 산 속 수도원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단절된 생활을 합니다. 둘 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고독하고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죄수는 내내 환경을 불평하거나 타인을 저주하기 때문에 감옥이 그야말로 감옥입니다.
그러나 수도사는 깊은 진리를 찾아 스스로 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에 환경이 힘들어도, 며칠씩 굶어도 기쁨과 감사로 하루를 보냅니다. 감옥의 죄수가 수도사와 같은 마음을 먹는다면 감옥은 수도원이 되고, 수도사가 불평을 하며 죄수와 같은 마음을 품으면 수도원은 감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행복과 삶의 가치는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앞에 놓인 조그마한 장애물 앞에 흔들리지 마시고 적극적인 믿음의 생각으로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주 적극적인 사람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의 포로였으나 나중에 강대국의 왕, 아닥사스다의 술시종이 된 것을 보면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실성과 신뢰성은 물론이고 지혜가 뛰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것입니다. 술시종이란 아무 막강한 권력의 자리로, 왕이 먹는 모든 음식을 왕이 들기 전에 먼저 시식(試食)하는 직책이었습니다.
당시는 왕의 승인 없이는 왕비조차도 만날 수 없을 만큼 왕의 호위가 대단히 삼엄했는데, 그런 속에서 왕의 음식의 위험여부를 검사할 정도의 직책이라면 왕의 신임을 엄청나게 받고 있는 자가 아닐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비록 포로였으나 아주 화려한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애국자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력, 안일보다는 먼저 조국 이스라엘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언제나 관심은 자기 조국과 백성들에 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조국의 소식을 들으니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고 성문들이 불탔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수일동안 슬퍼하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이스라엘이 점령당할 때 예루살렘성은 폐허가 되었고 많은 우수한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 갖은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보다 인정이 많은 분이 왕위에 오르므로 주전 536년에는 스룹바벨이 일단의 유대인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리고 2차로 458년에는 에스라 선지자가 난민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게 되었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의 갖은 방해와 아닥사스다 왕의 지시로 재건한 성벽과 성문을 불테워진 탓입니다. 아마, 느헤미야는 무너졌던 성전과 성벽이 재건하는 데에 뒤에서 많은 후원과 자금을 대어주면서 조국 회복에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니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여러 날 울면서 금식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조국의 위기 앞에 울고만 있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결심하기를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벽을 재건해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가려면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왕이 절대 필요한 느헤미야가 장기간 먼 곳으로 가게 하겠습니까? 또한 설령 허락을 받는다 할지라도 자금이나 건축자재도 없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은 800마일나 떨어진 곳이기에 가는 동안 어떠한 위험을 만날지 알 수 없습니다.
더욱이나 지금 예루살렘 성문과 성벽이 불탄 것은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왕에게 성문과 성벽을 재건하러 떠나겠다고 하면 곧 왕의 명령을 거스르는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더 나가서는 왕의 신하들 중에는 느헤미야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음에 대해서 시기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왕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꾸미고 있다고 모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누명을 쓰고 언제 죽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가장 신임을 받던 사람이 가장 무서운 버림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이러한 여러 가지 장애요소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가서 성벽을 재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느헤미야는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뀔 수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새해 초반부터 무슨 어려움, 무슨 답답한 일, 무슨 불가능을 만나고 있습니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오늘 느헤미야를 통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1. 느헤미야는 불가능 문제 앞에서 먼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무슨 문제에 당면하면 먼저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하다하다 안 되면 마지막에 가서야 기도를 합니다. 순서가 잘 못된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내용이 1장 11절에 나타납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 했습니다.
그의 기도내용은 왕의 허락으로 예루살렘에 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여 초점을 맞춘 기도는 하나님의 눈으로 문제들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듯에 맞는 구체적인 기도는 성공을 가져옵니다. 다시 말하면 성공적인 기도는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기도 드리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렘32:17에 "주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니이다"라는 고백대로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움직이시고 국가를 움직이시고 홍해를 가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는 집중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즉각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장 1절에 보면 그가 기슬르월에 기도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로 말하면 12월을 말합니다. 그리고 2장 1절에 보면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월이라고 했는데, 니산월은 한 것을 보면 4월에 해당됩니다. 다시 말하면 12월부터 기도를 시작했으나 1월이 가도, 2월, 3월이 가도 응답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움직이실 것을 믿으면서 계속 기다림의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시간은 하나님의 준비기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앞질러서 우리의 시간에 하나님의 시간을 맞추려고 하지 마십시오. 느헤미야가 계속 기도할 때, 100일이 지나도 응답이 없다가 4월이 가서야 응답이 온 것입니다. 왕의 허락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시간까지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조금 기다리다가 결국 인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를 "하나님, 무엇을 하시고 계십니까? 나는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보고만 계십니까?"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까지 기도의 줄을 놓치면 안됩니다. 시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기도에는 큰 능력이 있습니다.
서울 충신교회 어느 여집사는 좋은 위치에 고급 아파트에 사는 30대 초반의 여인으로 갑자기 간이 나빠져서 간병으로 고통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응답이 없었음에도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기도 하는 중 환상을 보았는데 도처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음식을 먹는데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양배추에 실파를 먹으면 간이 좋아진다'고 하면서 실파를 열심히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집사는 거기에 무슨 뜻이 있는가 하여 양배추와 실파를 열심히 먹었는데 6개월만에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보는데 전에 없던 불순물이 빠져나가더니 불러있던 배가 홀쭉하게 되고 간병에서 완치되었습니다. 어느 날 TV를 보는 중 미국서 간암 치료에 양배추와 쪽파가 간암에 치료된다고 하는 연구 발표를 듣고 여집사는 더욱 확신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문제를 해결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했을 때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느헤미야가 4달 동안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렸는데, 마침내 하나님이 역사 하시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2장 2절에 보니 기도한지 4달이 되는 때에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를 향해 느닷없이 묻기를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일부러 슬픈 척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왕 앞에서 슬픈 척해 보이거나 병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자리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아무리 슬픈 일을 당해도 왕의 기분에 맞추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왕의 음식을 먼저 먹어보는 신하가 병이 있다면 왕의 건강을 위해서 당장에 추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질문을 받은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된 줄로 알고 감히 아뢰기를 3절 "왕은 만세수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수색이 없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잘못하면 이 귀한 직책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두려움이 있으나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줄 알고 그 뜻에 담대히 순종하기 시작한 느헤미야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산 믿음입니다. 에스더도 하나님의 시간이 오자,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담대히 나갈 때에 살 길이 열렸던 것이요, 모세도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에 200만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향해 '죽으면 죽으리라'고 순종으로 나갈 때에 큰 바다가 열리면서 살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그러한 대답을 하자 왕은 놀랍게도 묻기를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그 때에 느헤미야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하기를 2장 5-8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하는 것과 유다까지 통행증을 만들어 줄 것과 중건을 하기 위한 재목을 주셨으면 좋겠다고 감히 청원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너무 엄청난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왕은 기쁘게 허락하였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런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다는 믿음이 생길 때에 지체 없이 순종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말하기를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전술은 사람들에게 '내일 하지'라는 마음을 넣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말리야 산 속에는 야맹조가 사는데 낮이면 신나게 즐기다가 밤이면 잘 둥지가 없어서 다른 새의 둥지에 가서 거하면서 밤새 구박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때마다 그 새는 서럽게 울면서 '내일이면 집 지으리, 내일이면 집 지으리'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밝은 아침이면 다시 신나게 노는데 정신을 뺏기고 집을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성도들은 하나님이 기회를 주심에도 이리 핑계 저리 핑계로 순종을 미룹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어도 '내일 하지. 돈 좀 번 다음에 충성하지. 직장이 안정되면 주일성수하지.'라면서 미루다가 결국 아무 것도 못 하는 자가 됩니다. 아닙니다. 깨달음이 왔을 때 적극적인 믿음으로 순종으로 행해야 하나님의 도우심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을 주실 때에 산을 옮기려고 출발해야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불란서의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고 갈 때에 그의 장군 한 사람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한 국경 도시인 펠드리히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도시의 주변 고지에는 수많은 불란서 군대가 진을 치고 쳐들어 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펠드리히 시에서는 비상 시의회를 소집하고 불란서 군에게 미리 항복을 해서 피해를 방지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저항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너나 없이 일어나서 갑론을박했지만 좀체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 때에 모든 시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교회의 목사님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여러분, 오늘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부활절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우리의 힘을 의지한다면 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예정대로 교회의 종을 치고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 맡깁시다."라고 했습니다. 시의회에서는 이 발언 모두 찬성하였습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들이었습니다. 불란서 군대가 공격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교회에서는 기쁨에 찬 우렁찬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에 교인들이 모여서 전력을 다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 종소리를 들은 불란서 군인들은 밤사이에 오스트리아의 많은 지원부대가 도착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불란서 군대는 작전을 변경하여 오스트리아의 펠드리히 공격을 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그 도시는 군대도 없이 하나님의 간섭으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도시의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온 시민이 삶의 모든 결정권과 작전권을 자기 손에 들려드리는 믿음을 보시고 그런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신약성경 속에는 믿음이라는 뜻의 '피스토스'라는 헬라어가 600번이나 들어있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을 빼면 텅빈 책이 되고, 그리스도인에게서 믿음을 빼면 정신나간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는 믿음으로 삽시다. 때로 우리 앞에 어려운 문제가 닥쳐올 때에 열심히 기도하다가 믿음이 생기거든 그 믿음에 따라 담대하게 믿음의 순종을 나타내심으로 하나님의 강한 도우심을 만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느헤미야는 어떠한 난관에도 적극적인 믿음으로 극복한 것입니다.
마침내 느헤미야는 왕의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갖은 난관을 뚫고 가까스로 도착하게 하셨으면 이제는 형통한 길, 승리의 열림만 있어야 하는데 갖은 반대를 만나기 시작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성벽을 건립하기 전, 건립하는 도중에 내내 괴롭히고 들볶았습니다. 2장부터 7장까지를 보면 얼마나 갖은 비난과 술수와 갖은 방해와 공작을 꾸미는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뜩이나 자금이나 인력이 부족하여 중건공사가 대단히 힘든 판에 지독한 반대를 만나니 큰 부담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때로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이런 비난과 조롱, 반대와 핍박을 각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하나님의 일을 대단히 싫어하기 때문에 반드시 방해공작을 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비난과 반대, 핍박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반대나 핍박을 당할 때 가장 하기 쉬운 것은 일을 늦추거나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마귀가 가장 원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를 보십시오. 엄청난 반대와 핍박 속에서도 조금도 굴함이 없이 담대하게 충성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그 어려운 난관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그 방법이 4:9에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라고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열심히 일하면서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모든 반대들을 물리치고 성벽을 중건하는 일에 승리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일을 위한 승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방법 따라 충성을 다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능력자이십니다. 우리 앞에 무슨 반대, 무슨 난관이 있든지, 무슨 불가능이 가로막고 있든지 전혀 굴하지 않고, 오직 기도로 그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담대히 충성에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만나는 문제와 난관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을 기도로 바라보면서 오직 하나님의 좁은 길만 따라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강하신 도우심을 통해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백년에 한번 들어볼까 말까한 가수가 흑인가수인 마리아 앤더슨이라고 합니다. 그 여가수는 얼마나 많은 영광을 받았는지, 23개국에서 명예학위를 받았으며, 흑인이 차별대우를 때였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나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서 미국 국가를 독창했고 58년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유엔대표로 지명까지 했으며 63년도에는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최고훈장인 대통령 자유상패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40년 간 성악 활동을 마치고 은퇴할 때에 그는 너무나 귀한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노예 밖에 될 수 없는 비천한 흑인이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목소리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줄기차게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나도 이처럼 존귀함을 받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 앤더슨은 흑인으로 태어나 백인으로부터 짐승이하의 차별대우를 받는 극한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적극적인 믿음으로 기도하고 오직 좁은 길로 나가며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여 노래를 부를 때에 마침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2002년 여러분 앞길에 무슨 문제, 무슨 어려움, 무슨 난관이 있습니까? 더욱더 기도하시면 길이 열립니다. 길이 열릴 때 오직 순종으로 행하십시오. 그리고 어떠한 난관이 온다할지라도 끝까지 좁은 길로만 나가십시오. 그 때에 하나님의 강하신 도우심으로 승리의 복된 날을 만나게 하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다
느 2:1-10 / 김동국목사
왕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느헤미야의 끈질긴 기도였습니다 조급하게 움직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십시오
느헤미야는 술관원이었습니다. 술에 독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기 위해 술관원은 왕에 앞서 술을 마시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술관원은 왕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는 군주 앞에 정기적으로 나아가 대화를 나눌수 있는 관계였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군대의 지휘관 보다 더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본 사람
느헤미야가 술관원으로 출세함으로 이방에서의 설움은 사라지게 됐습니다. 안전과 행복한 삶이 보장된 것입니다. 이제는 더이상 기죽을 필요도 없고 약자의 아픔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기도할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그동안의 고난과 고통을 보상받을 수 있는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면 태도가 달라집니다. 어려움을 통해 배운 가치를 잊고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움켜 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권력의 묘미에 병들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민족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시온의 예루살렘 성이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비록 높은 지위에 올랐을 지라도 낮은 곳에서 압제당하고 있는 민족을 늘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형제 하나니로부터 훼파된 고향땅, 예루살렘 소식을 들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참을 수 없어 느헤미야는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습니다. 울면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아픔과 기도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자신보다 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훨씬 성벽재건을 갈망하심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 성벽 재건을 위해 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가지 않고서도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성벽재건의 일을 뒤에서 잘 도와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일을 수행하는 한 사람으로 기꺼이 헌신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본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곳에 갑니까? 자신의 능력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헌신이고 믿음입니다. 마틴 루터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실하고 담대한 확신이다. 믿음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여 수천 번도 목숨을 걸만하다.’라고 정의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성벽 재건을 가로막는 장애물
기도가 끝난 후 느헤미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현실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기회를 주실 것을 신뢰하며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2장 1절을 보십시오.
아닥사스다왕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소식을 접한 것은 기슬르월, 우리의 월력으로 12월 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로 다가온 것은 니산월, 4월경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에 목숨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4개월을 더 기다린 것입니다.
이렇게 지체된 이유 두가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역사적인 이유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환상을 처음 경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제2차 포로기간 때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이 에스라를 중심으로 성벽을 재건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도시국가의 왕들로부터 모함을 받고 이 일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에스라 4장 11~16절을 보십시오.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린 그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 강 서편에 있는 신복들은 왕에게 고하나이다 왕에게 올라온 유다 사람들이 우리의 곳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 패역하고 악한 성읍을 건축하는데 이미 그 지대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오니 이제 왕은 아시옵소서 만일 이 성읍을 건축하며 그 성곽을 마치면 저 무리가 다시는 조공과 잡세와 부세를 바치지 아니하리니 필경 왕들에게 손해가 되리이다 우리가 이제 궁의 소금을 먹는 고로 왕이 수치 당함을 차마 보지 못하여 보내어 왕에게 고하오니 왕은 열조의 사기를 살피시면 그 사기에서 이 성읍은 패역한 성읍이라 예로부터 그중에서 항상 반역하는 일을 행하여 열왕과 각 도에 손해가 된 것을 보시고 아실찌라 이 성읍이 훼파됨도 이 까닭이니이다 이제 감히 왕에게 고하오니 이 성읍이 중건되어 성곽을 필역하면 이로 말미암아 왕의 강 서편 영지가 없어지리이다 하였더라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예루살렘과 그 왕국을 몹쓸나라로 취급했습니다. 패역한 족속, 반역하는 민족이라며 고발한 것입니다. 이에 왕은 성벽재건을 하지 마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주변에 있는 나라의 왕들에게 그 성을 잘 감시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결국 성벽재건의 가장 큰 장애물은 자신이 가까이 모시는 왕이었습니다.
성벽재건을 방해하는 상황적 이유도 있었습니다. 대개 페르시아의 왕들은 잔인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배하는 나라들을 압제했고 못된 정치를 펼치곤 했습니다. 그로 인해 왕을 암살하려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왕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부하조차도 의심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아닥사스다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이 왕은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좀처럼 귀담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왕에게 가장 큰 충성과 신뢰를 바쳐야 하는 느헤미야, 항상 왕과 대면해야 하는 느헤미야의 마음속에는 성벽재건에 대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은 날마다 느헤미야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왕에게 가서 마음속에 담고 있는 속얘기를 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오해를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의 법에 따르면 좋지 않은 조짐이 보인다 싶을 때 왕은 그 자리에서 사형을 언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느헤미야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습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알지 못하지만 가장 적합한 시기에 얘기를 꺼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처지에서 본다면 성벽재건을 가로막고 있는 두번째 장애물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누리고 있는 권력, 지위가 그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 됐습니다.
태산보다도 큰 장애물 앞에서 느헤미야는 왕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함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기다렸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께 줄기차게 기도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잠언 21장 1절을 보십시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느헤미야는 인내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기다리며 기도해야 하는 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제게 ‘사람이 귀신보다 더 무섭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간섭하고 방해하고 막고 있는 것은 상황과 더불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나 사람이 우리의 삶을 방해할 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느헤미야처럼 끈질기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에 대해 실망과 낙심이 찾아올 때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끈질긴 기도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에서부터 자유케 하는 능력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바라보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전제를 내 걸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으면 철옹성같은 사람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질문, 정직한 답변
당시 신하는 왕을 유쾌하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느헤미야는 왕 앞에서 항상 용모와 표정을 밝게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니산월 이날에는 근심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정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직감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은 평소에도 느헤미야의 건강상태를 확인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술을 마시기 전에 왕은 느헤미야가 평안한지 살펴보았습니다. 왕은 느헤미야의 얼굴을 보며 평소와는 뭔가 다름을 느꼈습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왕의 반응에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엄마에게 속마음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그는 어찌할 줄 모르며 두려워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일단 곤혹스런 상태를 넘긴후 적당한 때에 자신의 마음 상태를 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순간에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지혜를 선택했습니다.
지혜로부터 정직한 마음은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직한 마음에서는 지혜가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애써서 감추려 했던 마음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심을 알고 진실하게 대답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유대인의 랍비들은 대개 질문에는 질문으로 대답하곤 했습니다. 느헤미야도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왕에게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건과 마음에 있는 속사정의 결론을 왕에게로 돌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과 이스라엘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결정을 왕이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왕에게 그런 권한이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지혜로운 질문, 정직한 답변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문제, 정치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호소했습니다. 느헤미야의 답변에는 두 가지 지혜가 숨겨 있습니다.
먼저는 왕에게 충성하는 느헤미야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고 그분이 주신 사실을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왕을 찬양했습니다. 왕에 대한 충성을 간략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고 ‘나의 열조에 있는 성읍’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닥사스다왕이 자신의 조상들의 무덤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자신의 열조에 대한 근심을 나타냈습니다. 이 지혜로운 대답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바꿨습니다. 인간의 권력은 자유와 평등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력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느헤미야는 왕의 권력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의 너그러움과 개인적인 사랑에 자신의 문제를 호소했습니다. 왕은 자신이 총애하는 술관원의 아픔을 통감하고 자신의 힘으로 결정해야함을 알게 됐습니다. 그를 돕기 원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군주가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4개월을 준비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모두 쏟아 놓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침묵하며 하나님께 묵도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계획을 설명하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순간의 침묵이었습니다.
기도와 병행한 주도면밀한 계획
느헤미야는 왕에게 자신의 속사정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를 의탁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계획을 왕에게 정확하게 보고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5~8절까지 느헤미야는 자신이 준비했던 계획을 상세히 말합니다. 필요한 것들에 대해 철저히 준비된 계획을 보고했습니다. 이동원목사님이 그리스도인이 쉽게 빠지는 두 가지 극단에 대해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먼저는 기도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계획하는 사람들입니다. 처리해야 할 어떤 일이 있을 때 기도하지 않고 자기의 지혜대로 하는 경우입니다. 신앙과 관계없는 계획입니다. 또 하나의 극단은 기도는 열심히 하는 반면 계획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끈질기게 기도하면서 왕에게 어떻게 말할 지를 계획했습니다. 기도 가운데서 세밀한 것을 하나님과 의논하면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전략을 세웠습니다.
여러분의 사업과 신앙은 관계가 있습니까? 자녀의 교육과 기도생활은 관계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선택과 믿음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계획했고 계획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사람에게 묻고 자신의 계획을 발표하기 전에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가졌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이 7-8년 전에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거절한 사실을 알고 예루살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개인적인 문제로 왕에게 접근했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신하의 근심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느헤미야에게 얼마나 준비됐는지를 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필요한 기간을 말하고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그러한 준비된 모습을 보고 왕은 느헤미야의 요구를 수락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왕의 모습을 보고 느헤미야는 두번째 전략을 펼칩니다. 필요한 것을 얻는 단계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목재를 얻게 해 주시도록 부탁했습니다. 왕은 즐겁게 요구를 허락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얻게 됐습니다. 왕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바로 느헤미야의 끈질긴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한편으로 ‘기도만 하면 되나’하는 생각을 갖을 수 있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이 자신의 현실적인 필요와 상황에 관계없이 그냥 느헤미야를 도와준 것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페르시아의 왕인 아닥사스다가 느헤미야의 요구를 들어준 데는 다른 요인이 있었음을 말합니다. 주전 460년에 이집트에서 헬라인들을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페르시아에게 위협이 됐습니다. 주전 440년대에는 시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이들을 격파했지만 소규모의 저항이 계속 그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말을 들은 왕은 그 사건들을 기억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서 느헤미야의 충성과 지혜와 철두철미한 전략이 확인되는 순간, 이 사람이라면 이집트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보호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선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거침없이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으로 보냈습니다. 느헤미야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행동했듯 왕 또한 자신의 필요에 따라 결정했고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느헤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은 일을 사람으로부터 허락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 인정받았으면 사람에게도 인정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람도 동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열정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움직였고 이 세상과 함께 자신의 사역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주어진 삶을 지혜롭고 정직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태도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장애를 어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괴롭힌다고 해서 그 사람을 도외시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장애를 치우시고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선한 일을 도모하게 하실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신앙
느 2:1-20 / 피종진목사
우리는 때때로 성경의 인물을 통해서 저들이 걸어간 신앙의 발자취의 위대성을 깨달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또 저 분들의 신앙에 대해서 박수를 보내고 존경과 찬사를 드리고 싶은 그런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느헤미야'라고 하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느헤미야는 바벨론 포로 중에 한 사람으로서 아닥사스다 왕 때에 특별히 총애를 입어 유대 총독이 되기도 하고, 또 아닥사스다 왕의 관원이라는 지위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람이 환경에 의해서만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사람인데도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니까 거기에서 관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애굽에 달려간 요셉도 비록 상고에게 팔려간 그런 상품 취급을 받은 요셉이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이방 나라 애굽에서 총리가 되기까지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이 시대를 가리켜 어려운 사회라고 말합니다. '살기가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하고 어쩌면 '세상 살기 힘들지요'라는 그 말 한마디에 눈물이 쑥 나오도록 고맙게 여기며 답례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 세상은 자기 소원대로만 되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육체에 가혹한 노동의 댓가를 지불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런 삶이 우리나라의 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 함께 하시면 느헤미야처럼 신앙생활에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느헤미야의 신앙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매사의 일들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보고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4절) 아닥사스다왕이 어느날 느헤미야를 보니까 얼굴이 수척하고 근심 걱정이 꽉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에게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2절)라고 얼굴이 수척해진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 때 느헤미야는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3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은 다시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저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했다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와 같이 매사의 일들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보고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지금 왕은 권세와 그를 도울 힘이 있고, 그가 왕에게 의지할 그런 소원도 많이 있었겠지만 그가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이 모습은 그의 신앙의 한 장면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굴을 향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입을 열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귀를 기울여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팔은 우리의 곁에서 같이 역사하고 계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거나,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느헤미야처럼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먼저 하나님께 보고하는 이런 자세를 가진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에게 부모의 궁금한 것을 알려드리고, 부하 직원이 상관에게 보고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여러분, 모든 생활의 일체를 하나님께 다 보고해보세요. 좋고 나쁜 일을 하나님께 보고해보세요.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영적 대화입니다. 모든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신앙의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감동을 입은 신앙이었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한 지 삼 일에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을 내가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11,12절) 느헤미야는 성령의 감동을 입은 신앙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에 봉착했을 때 여러분의 경험을 앞세워 미리 판단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 보다 하나님 앞에 성령의 감화를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영성이 육성을 지배할 때 성공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육성이 영성을 지배하여 일을 진행하면 실패가 따를 수 있습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라는 찬송가 가사대로 성령이 강림하셔서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주시면 좋은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울 때는 그 때 그 때 해당되는 기도의 찬송을 불러 보세요. 만일 병이 들어서 견딜 수 없을 때는 '주여 나의 병든 몸을 지금 고쳐주소서' 이렇게 찬송해보세요.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해주십니다. 무엇을 해야 될지를 모르고,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할 때는 '어찌해야 좋을지 주여 인도하소서' 이 찬송을 부르세요.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하고 믿음으로 찬송을 해보세요. 연약하여 시험에 빠졌을 때는 방황하지 말고 '험한 시험 물 속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이렇게 호소해보세요.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마음이 답답하면 평안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생활이 어려우면 물질 문제 해결해달라고 기도하세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입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비결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 함께 역사해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바로 우리의 에너지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지혜입니다. 생명입니다. 주님을 믿는 신앙세계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에서 성령의 개입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명 떠난 송장과 같고 불꺼진 난로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시동 꺼진 좋은 고급차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기름이 있어서 시동이 걸려야 잘 굴러가는 것입니다. 엔진이 좋으면 차체가 조금 약해도 잘 달립니다. 오늘 우리의 에너지는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주십니다.
느헤미야가 괴로움과 고통과 번민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의 감화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느헤미야가 어떻게 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았을까요? 그는 3일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아니했습니다. 사람 만나고 인간의 방법을 자꾸 앞세우면 점점 더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느헤미야는 3일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만났습니다. 하나님께만 대화했습니다. 하나님께만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과 깊이 만날 수 있다면 그 분은 절대 실패가 없습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 만나기를 기뻐하세요.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그 이름만 불러도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역사해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을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의 큰 일을 할 때에 하나님과의 깊은 기도 속에 성령의 감동이 내 마음 속에 임하면 그 때에 지혜가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3에 보면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일은 육신의 생각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또 고린도전서 2:10에 보면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셋째, 평소에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이었습니다.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인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고하지 아니하다가"(16절) 느헤미야는 유다 사람들이나 제사장과 귀인들, 방백들과 일하는 자들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당시에 도움을 받을 사람이 너무 너무 많았습니다. 아닥사스다왕도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의 사정을 물을 정도였고, 유대의 귀인들도 있었으며, 많은 방백들이 그의 주변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대개 하나님이 쓰신 분들을 보면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십니다. 여러분,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그 보다 더 안전함이 어디 있습니까?
아이들이 길을 몰라도 엄마 아빠가 함께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또 아무런 생활의 계획이 없어도 엄마 아빠 등에 업혀 있으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배고프면 먹여주고 졸리면 재워주고 그저 엄마 아빠가 다 알아서 해주시지요.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이와 같이 도와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을 최선으로 앞세우는 신앙이었습니다.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20절)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훼파된 성전이 재건되기를 꿈에도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에 전념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큰 일을 하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계획을 세운 일에 대해서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일을 행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선한 계획을 세웠다면 그 일에 대해서 조금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반드시 이루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면 실패하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어떤 계획을 세웠다면 도와주실 줄 믿고 기도하면서 시행해보세요. 그리하여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신앙으로 산 느헤미야에게 하나님의 손이 도와주셨고(18절), 아닥사스다왕이 그를 도와주게 되었으며, 형통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드디어 온 백성이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으며, 불에 타버리고 훼파된 하나님의 전을 다시 건축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느헤미야처럼 매사의 일들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보고하며, 성령의 감동을 입고, 평소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을 최선으로 앞세우는 신앙을 가져 모든 일을 신앙으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일을 잉태하라
느 2:1-6 / 이동원목사
6.25전쟁이 한창일 때 한 종군 취재 기자가 포탄이 나르고 있는 전쟁터의 참호속에 들어가 있던 한 유엔군 병사에게 이 순간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Give me tomorrow)
문화적 선진국 사람들과 후진국 사람들을 구별하는 가장 현저한 차이는 내일을 대하는 태도라고 합니다. 문화적 후진국에 속하는 사람들일수록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현저한 생활태도의 차이 하나가 저축의 습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오늘을 즐기면 되고 오늘을 생존하면 그뿐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흑인들의 노예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면서 흑인사회 지도자들이 동료 흑인들에게 가장 힘들여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 저축의 중요성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물론 훨씬 나아지기는 했지만 빈곤층 흑인들의 경우는 아직도 저축생활을 몸에 익히는 것을 그렇게 어려워한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내일에 대한 혹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조국과 조국의 백성들에게 안정되고 가치있는 내일을 선물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우선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를 시작했다고 해서 당장 그의 조국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포기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내일을 잉태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조국의 내일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가 내일을 잉태하기 위해 기도하며 해야만 했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이 질문을 통해 얻고자 하는 대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내일을 위해 기도할 때에 동시에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1.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희망을 버린다면 더 이상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조국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여 마침내 조국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경과된지 아십니까? 적어도 4개월 이상의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2:1에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에--"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때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 재건 프로젝트가 시작된 달이었습니다. 니산월은 4월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한 기도를 시작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1:1에 보면 "--아닥사스다왕 제이십년 기슬르 월에---"기슬르월은 11월에서 12월경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4개월 이상 경과한 것입니다. 그는 그동안 충분히 기도한 것입니다. 충분히 기도하며 충분히 기다린 것입니다. 그 동안 느헤미야 안에서 조국의 아름다운 내일이 잉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 그리고 우리 한국 성도들 같으면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언제인가부터 우리 한국인들은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뛰어야 하는 민족, 엘리베이터안에 들어가 자동으로 닫히는 그 시간을 인내하지 못하고 단추를 눌러 닫아야 하는 대표적인 민족이 되었습니다. 한국사람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 빨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습관은 우리의 기도생활에도 영향을 끼쳐서 우리는 기도를 시작하자 당장에 응답을 기대합니다. 소위 인스턴트 문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도조차 인스턴트식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도란 시간과 함께 열매를 맺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장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가 18:1이하에서 주께서는 기도를 가르치면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 지속적으로 탄원하는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그러면 왜 주께서는 당장의 응답보다 기다림의 과정을 거치게 하실까요? 아마도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기도의 응답 그 자체보다 기도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를 더 중시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한 재벌가문이 있다 하십시다. 재벌의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빨리 상속받는 일에 무엇보다 관심을 갖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재벌 아버지가 지혜로운 분이라면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재산의 상속이 아닌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는 아들로서의 인격적인 성숙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로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기다림의 시간이야말로 아들에게 있어서 내일을 잉태하고 준비하는 시간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나는 내일을 잉태하려면 기도하고 기꺼이 기다릴줄 알아야 합니다.
2. 기도하며 계획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기도하며 기다리면서 또 한가지 한일이 있었다면 내일을 계획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자, 이제 느헤미야가 그가 모시고 있던 왕으로부터 그가 기다리던 결정적인 질문을 받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마음속에 품고 기도하던 제목을 내어놓게 됩니다. "내 고향 내 조국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라고. 왕은 다시 묻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게 되겠느냐?"고. 이때 6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가 "기한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 재건 프로젝트가 소요될 시간을 산출해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7절이하에는 그가 왕에게 이 프로젝트의 완수를 위한 구체적인 도움의 리스트를 열거합니다. 이 리스트를 보면 우리는 느헤미야가 이 기간동안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을 준비했는가를 알수 있습니다. 그는 우선 왕이 주변 총독들에게 조서를 내림으로 그가 예루살렘까지 도착하는 일에 장애가 없게 명령서를 하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8절에는 왕의 삼림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려 성과 가옥 건축에 필요한 충분한 재목들을 공급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미리 치밀하게 계획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계획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두가지 상이한 입장이 존재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 되었지 계획이 무슨 필요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의 입장을 극단적인 신비주의적 접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계획하면 되었지 기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고를 역시 극단적인 이성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 접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하며 계획합니다. 기도에서 비전과 계획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꿈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꿈이 실현되느냐 못 되느냐를 결정하는 요소가운데 하나가 계획을 갖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계획 여부에 따라 비전과 개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개꿈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이런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이들 모두 개를 기르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 모두 개꿈을 꿉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꿈만 꾸는데 한 아들은 개꿈을 꾸며 개집을 설계하고 짓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아버지이고 한 아들에게만 개를 사주어야 한다면 어떤 아들에게 개를 사주시겠습니까? 개꿈만 꾸는 아들입니까? 아니면 소원을 품고 계획하는 아들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왜 우리가 계획하지 못할까요? 많은 분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계획하고 실현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존 맥스웰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계획하지 못하는 사람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입니다."(John Maxwell) 그러므로 복된 내일을 잉태하고자 하십니까?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비전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 주께서 주신 비전에 따라 내일을 계획하십시오. 치밀하게 계획하십시오.
3. 기도하며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기회를 찾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기도하며 계획한 바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결정적인 때를 찾고 그 때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회란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를 풍자하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옛날 희랍 시라큐스의 거리에 이상하게 생긴 사람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날개를 달고 있는 사람인데 앞머리는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였습니다. 동상아래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리시퍼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기회. 그대의 앞머리는 왜 그렇게 무성한가?- 내가 올 때 사람들이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그대의 뒷머리는 왜 그렇게 대머리인가?-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시 붙잡기 어렵기 때문에. 드디어 느헤미야에게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2절에 보면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색 즉 근심의 표정이 있는 것을 보고 왕이 무슨일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3절의 느헤미야의 대답을 읽어보십시오.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까?" 4절에서 왕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는 다시 묵도합니다. 감사의 기도와 함께 이제 결정적인 기회를 달라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이제 5절을 보십시오. 드디어 그의 요청을 내놓습니다. '---나를 유다땅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는 마침내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기회를 찾는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그 기회를 얻기 위해 기도해 오지 않았습니까? 1:11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이 사람(아닥사스다 왕)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이 기도는 구체적으로 기회를 얻기 위한 기도였고 드디어 그 기회가 도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분을 전도하고 그가 구원받기 위하여 기도한다면 "그가 구원받게 해 주십시오"라고만 기도하십니까? 정말 그가 구원받기를 소원하신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그에게 전도할수 있는 기회가 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막연히 기도하면 주께서도 막연히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구체적이라면 주님의 응답도 구체적일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기회를 위하여 기도했고 기회가 왔을 때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 기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자서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1961년 존 F.케네디가 미 합중국 대통령 당선자가 된후 취임식 전에 빌리 목사님이 케네디 대통령 당선자의 집에 초청을 받습니다. 케네디는 그에게 선거기간 개신교와 천주교의 종교문제로 갈라진 미국인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하나되는 일에 노력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빌리 목사님은 "최선을 다 하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때 갑자기 케네디는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습니까?"고 물었답니다. 그래서 "물론입니다" 했더니 그러면 "제가 다니는 우리 천주교도 그것을 믿습니까?"고 묻더랍니다. "신조(사도신경)에 보면 그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별로 그런 내용을 설교나 강론으로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목사님께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해서 빌리 목사님은 케네디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의 초림은 죄 문제의 해결과 새삶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구주로서의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위해서였으며, 그의 재림은 구원받지 못한 인류의 심판과 천국의 완성을 위해서 다시 오셔야 하며 그때에 비로소 인류에게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케네디는 "흥미롭군요, 나중에 다시 한번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후 2-3년이 지나간 후 빌리 그래함은 케네디 대통령을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때 빌리 목사님은 감기에 걸려 있었는데 조찬기도회가 끝난 후 케네디가 "목사님, 잠시 백악관까지 가 주시겠습니까? 잠시 목사님께 묻고 싶고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요"하더랍니다. 그래서 빌리 목사님은 "제가 감기가 들어서 병균을 옮겨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나중에 다시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했더니 "다음 기회라고요.---(더듬으면서)그렇게 하시지요."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22일 케네디 암살 소식을 듣게 됩니다.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듣자 마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뇌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감기로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했을 때 "다음 기회라고요--'하고 더듬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다음 기회는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에 민감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는 나서지 않으셔야 할 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사역의 절정의 시간에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소명을 이루시는 십자가의 고난의 시간이 가까이 왔을 때 드디어 그는 "내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고난의 잔을 마시며 당신의 때를 붙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한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류는 구원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그는 모든 민족가운데 구주와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는 새로운 내일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그의 제자된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분에게 나아와 다시 기도하며 다시 그가 주실 내일을 잉태하는 자가 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기도하며 계획하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오거든 이제 몸을 던지십시오. 내일을 위하여 말입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의 대의는 무엇입니까?
2. 1:1과 2:1을 비교하며 느헤미야가 기도로 기다린 기간과 왜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3. 본문 2절의 왕의 질문을 3 - 4절에 의하면 느헤미야가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을까요?
4. 6절 이하의 느헤미야의 대답에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기도하는 기간동안 무엇을 했다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까?
5. 우리는 어떤 새로운 일을 시도함에 있어서 기도와 계획 중 어느 편에 더 기울어져 있는가와 앞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나누어 보십시오.
왕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
느 2:1-8 / 조상호목사
오래 전 한국에서 영화 <왕의 남자>가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상영될 당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어떤 마니아는 이 영화를 혼자서 45번이나 보았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서 무명이나 다름이 없던 이준기라는 남자배우가 일약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또 <왕의 남자>를 패러디하여 이 영화에 나오는 대사를 여러 정치인들이 사용하기도 하고, <왕의 남자>를 패러디한 유머들이 사람들의 입술에 오르내리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를 소개하면, 한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학생들이 숙제를 해왔는데, 두 학생이 똑같은 답을 썼고 글씨도 비슷했습니다. 선생님이 두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둘 중에 누가 베낀 거냐?” 그러자 한 학생이 잡자기 옆 친구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놈이 나에게 언문을 배웠소. 내 글자를 보고 따라했으니, 글씨체가 똑같은 것은 물론이요, 하물며 그 내용도 같지 않겠소.” 이것은 영화 <왕의 남자>에서 나오는 대사입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에피소드가 생길 정도로 이 영화가 빅 히트를 쳤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영화가 관객 1,200만 명 이상을 돌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만, 저도 어느 분이 한국에서 빅 히트를 쳤다고 하며 빌려주어서 비디오로 만들어진 이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 영화가 다른 영화에 비해서 특별히 많은 돈을 들인 것도 아니고, 또 유명 스타급 배우가 출연한 것도 아닌데 전혀 예상치 않게 빅 히트를 쳤습니다. 그 이유를 어떤 비평가는 꽃미남 배우가 여자 광대로 분장한 ‘공길’이의 이미지가 젊은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비평가는 노골적이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성적인 풍자모습이 젊은 관객들을 뛰어넘어 중장년 관객들에게까지 어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전문가들은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과거 역사를 돌아보면 왕은 곧 법이요 하늘이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왕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 권력자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왕의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광대들, 특별히 공길이를 통해 왕의 마음이 움직인 것을 보고 관객들이 대리만족을 느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영화 <왕의 남자>에서처럼 왕의 마음을 움직인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영화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광대 공길이가 연산군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것처럼,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공길이와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꽃미남 배우 공길이는 광대놀이를 통해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어떻게 해서 느헤미야가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까요? 더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떻게 해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말썽부리는 자녀의 마음이나, 서로 갈등하고 있는 아내나 남편이나 부모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또 사업을 하다보면 거래처 사람의 마음이나, 직장에서는 서로 팀웍이 맞지 않는 동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또 전도하려고 하는 태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느헤미야처럼 우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크게 세 가지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라
첫째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맡은 일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는 최선을 다하여 아닥사스다 왕을 섬겼습니다. 당시 아닥사스다 왕은 바사제국의 왕입니다. 이 바사제국은 바벨론에 이어 중동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으로 끌려온 이스라엘 포로민의 후손으로서, 바벨론 제국에 이어 등장한 바사제국의 술관원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보통 술관원은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는 왕의 절친한 친구나 충신 등이 임명됩니다. 술관원은 항상 옆에서 술을 따르며 왕을 보좌하였는데, 단순히 술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논하며 섬기는, 오늘날로 말하면 비서실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온 후손이자 이민자인 느헤미야가 술관원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술관원이 되어 궁중에 있던 어느 날, 그의 형제 하나니가 조국의 처참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고국이 위기에 처했고 고국에 있는 동포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근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얼굴로 표현된다고 그의 근심은 얼굴로 나타났습니다.
다같이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당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왕 앞에서는 자기의 감정을 노출시켜서는 안 됩니다. 왕 앞에서 신하들은 항상 밝은 표정을 지어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밝은 얼굴로 왕을 대하는 것 자체가 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높인다는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왕 앞에서는 언제나 밝은 얼굴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요즘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마 인상 쓰는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상을 팍팍 쓰는 얼굴보다, 웃는 얼굴을 좋아합니다. 만약 두 눈에 힘을 준 채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을 보면, ”도대체 저 사람은 나에게 무슨 섭섭한 마음이 있어서 저렇게 인상을 쓰는 거야.”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게 인상을 쓰는 사람을 만나서 기분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재수 없다‘고 인상 쓰는 사람을 아예 피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들은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 시간 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웃으며 삽시다.” 다시 한 번 인사하겠습니다. “웃으니까 좋아 보이십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누구든지 왕 앞에서는 슬픈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왕후가 참석한 기쁜 파티 장소에서 술관원이 슬픈 얼굴로 술시중을 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근심어린 얼굴을 하고 왕의 술시중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죽기를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느헤미야의 행동은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행동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닥사스다 왕이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라고 느헤미야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본문 2절 하반절을 보면,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느헤미야는 자신이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왕을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왕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근심하고 있는 느헤미야를 당장 끌어내라고 신하들에게 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엇 때문에 근심하고 있느냐‘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느헤미야에 물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호의는 이것뿐이 아닙니다. 다같이 4절을 보겠습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여기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는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느헤미야의 고민을 다 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너 혼자 걱정하지 말고 자세하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질문하겠습니다. 화를 내며 ”당장 느헤미야를 끌고 나가라”고 명령을 내려야 할 아닥사스다왕이 이러한 호의를 베푼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느헤미야가 평상시 왕에게 신임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심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느헤미야를 본 왕이 오히려 느헤미야의 건강을 걱정하며 그에게 소원을 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왕의 사랑과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방인이 왕의 총애를 받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방인인 느헤미야가 왕의 사랑과 신임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는 평소에 성실하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왕의 신임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왕을 섬기되 최선을 다해 섬겼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그는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그의 성실함이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인도의 ‘마라티’라는 왕국에 한 젊은 왕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궁궐 안을 산책하고 있는데, 한 어린 하인이 왕자의 신발을 가슴에 꼬옥 껴안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습니다. 이 어린 하인은 왕자님이 언제든지 따뜻한 신발을 신을 수 있도록 신발을 가슴에 꼬옥 껴안고 잠들었던 것입니다. 왕자는 어린 하인이 작은 일에도 성실하게 마음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중대한 일을 맡겨도 틀림없이 잘 해낼 것이라고 믿고 그 어린 하인을 친위대원으로 발탁했습니다. 마침내 왕자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는 일사천리로 출세가도를 달려, 훗날 군사령관이 되어 그의 명성은 인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22절과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계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눈가림만 하는 사람들과 달리, 성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최선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느헤미야처럼 주위 사람의 마음을 얻기 원한다면, 주님 섬기듯이 최선을 다하여 주위 사람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주님 대하듯이 성실하게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들의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 섬기듯이 성실하게 대할 때 직장 동료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주님 섬기듯이 성실하게 대할 때 학교에서 힘들게 하는 친구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주님 섬기듯이 성실하게 대할 때 가족간의 갈등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처럼 맡은 일에 성실하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처럼 주님 섬기듯이 최선을 다하여 주위 사람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2) 기도하며 기다리라
둘째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니로부터 조국이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가 어떻게 한 줄 아십니까? 느헤미야 1장 4절에서,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 동안 기도하며 기다린 줄 아십니까? 느헤미야 1장 1절을 보면,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 월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기슬르월’은 11월에서 12월경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니산월’은 4월입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12월부터 4월까지 적어도 4개월 이상 기다렸습니다. 그는 기도하며 기다렸고,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4개월이 지나도록 기도하며 기다린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허락하지 않으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역사자료에 따르면 아닥사스다 왕은 아주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에스라 4장 7절부터 23절을 보면, 아닥사스다 왕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허위 고소에 속아 이미 예루살렘 성벽을 쌓지 못하게 금지조서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이 내린 조서를 뒤집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하면 그 백성이 강해져서 세금을 내지 않을 것이고, 나중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바사제국에 반항할 것이라는 사마리아인들의 말을 믿고 성벽재건 금지령까지 내린 왕을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4개월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완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4개월 동안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그가 4개월 동안 응답을 받지 못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느헤미야는 포기하지 않고 기도를 계속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왕은 느헤미야의 근심어린 얼굴을 보았음에도 화를 내기보다,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고 느헤미야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느헤미야처럼 인내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응답이 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면서 기도해야할 줄로 믿습니다.
한 꼬마가 닭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닭장 안에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까기 위해서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 시간이 갈수록 꼬마는 초조해졌습니다. 언제쯤이면 병아리가 나올까, 그것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꼬마는 암탉이 품고 있던 알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곤 알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알에서 병아리가 나올 줄 알았던 꼬마는 깜짝 놀랐습니다. 계란 안에서는 채 모습을 갖추지 못한 병아리가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 민족은 여유가 있고 매사에 인내할 줄 아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빨리 빨리‘를 외치는 소리가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조급병에 걸린 사람처럼, 식당에 가도 '아줌마, 빨리 주세요!'를 외치고, 차를 타서도 '기사양반, 빨리 갑시다.'를 외치고, 건축현장에서도 ’어이 뭘해. 빨리 하지 않고.‘를 외칩니다. 신호등이 바뀌었는데도 앞차가 움직이지 않으면 ’빵빵!‘ 크락숀을 누르며 ”야 XX야! 지금 뭐하는 거야. 빨리 가지 않고.“라고 소리칩니다. 주위에 보면 마치 병아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알을 깨뜨려버렸던 그 꼬마처럼,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애굽의 총리대신에 오르게 하기 위해 요셉으로 하여금 13년이란 세월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해 모세를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곧바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한 동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3년 동안의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무려 30년 동안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2: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응답이 올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며 기다리고, 기다리며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 30장 18절에서 ”그러나 야훼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야훼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러분, 누가 기다립니까? 야훼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줄로 믿습니다. 왜 야훼 하나님께서 기다리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까? 그를 기다리는 자, 즉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이 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한 후 기다리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한다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감람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 모여 있던 사람은 500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성령침례를 기다린 사람은 120명뿐이었습니다. 500명 중 380명은 중간에 포기해버리고 120명만 남아 간절하게 기도한 끝에 120명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380명처럼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120명처럼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장 거래처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당장 말썽을 일으키는 자녀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당장 아내와 남편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당장 친구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4개월을 기도하며 기다렸던 느헤미야처럼,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 끝에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였던 느헤미야처럼, 끝까지 기도하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것입니다.
3) 계획을 세우고 미리 준비하라
셋째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우고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가 기도하며 기다리면서 행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자세하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소원을 말했습니다.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5절) 그러자 왕이 다시 물었습니다. ”유다까지는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유다에 가면 언제쯤 돌아올 수 있느냐“ 그런데 6절 하반절에서 ”왕이 나를 보내시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이미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데 소요될 시간을 산출해 놓고 있었습니다. 또한 7절과 8절을 보면 그가 4개월 동안 어떻게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에게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그는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왕에게 조서, 즉 통행증명서를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또한 무너진 성과 불타버린 성문을 재건하고 총독인 자기가 들어갈 집을 건축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재목들을 얻기 위하여 삼림감독인 아삽에게 조서를 내려달라고 구체적으로 요청합니다. 이것으로 볼 때, 느헤미야가 4개월 동안 기도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을 때를 대비하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의 이 모습을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되,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을 때를 대비하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기는 하는데, 계획을 세우지도 않고 미리 준비하지도 않습니다. 왜 준비하지 않느냐고 하면 “어떻게 되겠지요,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때 가서 계획을 세우면 될 거예요.”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꿈만 꾸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꿈을 꾸며 계획을 세우고 미리 준비하는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미리미리 준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창세기 22장에 보면, 모리아산에서 가서 아들을 번제로 받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아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대신해 제물로 바쳐질 어린 양을 손수 준비해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 아브라함은 그 장소를 ‘야훼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The Lord will provide“ 다시 말하면 ‘공급하시는 하나님‘ 혹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달리 미리 계획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미리미리 준비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지구촌교회의 이동원목사님의 글에서 재미있는 예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아들 모두 개를 기르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 모두 개꿈을 꿉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꿈만 꾸는데 반해, 다른 한 아들은 개꿈을 꾸며 개집을 설계하고 짓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버지로서 한 아들에게만 개를 사주어야 한다면, 어떤 아들에게 개를 사주시겠습니까? 개꿈만 꾸는 아들에게 개를 사주겠습니까? 아니면 개꿈을 품고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아들에게 사주겠습니까? 당연히 소원을 품고 개집을 준비하고 있는 아들에게 개를 사줄 것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하나님도 응답이 주어졌을 때를 대비하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응답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비전을 발견하지 못한 분들은 성령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비전을 발견했으면, 그 비전에 따른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과 소원이 생겼으면, 그 꿈과 소원에 따라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당장 말썽을 일으키는 자녀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당장 아내와 남편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당장 친구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그들의 마음이 바뀔 것을 기대하며 느헤미야처럼 미리 믿음으로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당장 거래처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바꿔주실 줄로 믿고 느헤미야처럼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또 전도하려고 하는 태신자들의 마음이 아무리 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바꿔주실 줄로 믿고 초청장을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아직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처럼 주님 대하듯이 최선을 다하여 그 사람을 대하고, 느헤미야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고 기다리되,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실 것을 믿고 미리 준비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용감무쌍한 믿음
느 2:1-8 / 피영민목사
서 론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준비 시키셨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지 150년이 되었습니다. 성은 훼파되고 유다백성들은 큰 환란과 능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에 그는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이 일에 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성도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이는 방편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는 믿음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을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만 것이 아니라 믿음을 끄집어내어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당하고 연약함이 있으면 울면서 기도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런 단계에서 머무르지 않고 믿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변함없이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쓸 수 있는 하나님의 에너지는 무궁무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우리의 삶 속에 끌어들이는 방편이 바로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에도 쓰러지거나 좌절하거나 넘어지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에너지를 끌어들여 승리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강한 믿음으로 나가면 마귀가 깜짝 놀라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어려서부터 귀신들려 벙어리 된 아들을 가진 아버지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는데 남은 제자들에게 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린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믿음이 없어 귀신을 내쫓지 못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시자 그 아버지가 예수님을 붙들고 요청합니다. “예수여 만일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If you can do something)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하니 예수님이 23절에서 “너는 질문이 잘못되었다. 만일 무엇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하나님은 만일 무엇을 할 수 있거든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그 능력을 믿는 자에게는 역사하여 능치 못함이 없게 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전능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백으로 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전능한 능력이 우리의 백이십니다. 그런데 이 전능한 능력을 끄집어내서 사용하는 수표가 바로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믿음을 강화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부족함도 없고 연약함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크냐 작으냐,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믿음이 마음속에 파묻혀 있느냐 아니면 현실 속에서 사용되고 있느냐는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무슨 일이든지 쉽고 간단한 일이라 한다면 믿음도 필요치를 않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라 하면 큰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은 장애물이 많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니다. 먼저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유다백성들도 이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완전히 포기한 상태에 있었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더욱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벽재건을 막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의 신하들도 예루살렘 성벽건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에스라 4장 13절에 보니 그들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린 조서에 “이제 왕은 아시옵소서 만일 이 성읍을 건축하며 그 성곽을 마치면 저 무리가 다시는 조공과 잡세와 부세를 바치지 아니하리니 필경 왕들에게 손해가 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국민투표를 붙이면 부결되는 것입니다. 국민도 반대하고 사마리아도 반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 선교도 하고 전도도 하고 교회도 부흥시키려면 사단이 요동하고 많은 방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5장 4절을 보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믿음은 인생에 장애물이 있고 방해가 있어도 거기에 넘어지지 않고 극복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움직이게 하는 방편이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성도의 무기인 것입니다. 방해가 크면 믿음도 커야하고 사명이 어려우면 믿음도 용감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감무쌍한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용감무쌍한 믿음을 가진 느헤미야의 믿음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용감한 믿음은 큰 위험(great risk)을 감수합니다.
큰 위험이 있어도 그 위험을 피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뚫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직업이 아닥사스다 왕의 술맡은 관원장 이었습니다. 술맡은 관원장은 왕이 마시는 술이나 음식에 원수가 독을 타지 아니했는가를 감시하는 왕의 경호실장으로 왕이 최고로 신뢰하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반대로 왕이 그를 잠시라도 의심하게 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왕을 1대1로 독대할 수 있는 높고 영향력 있는 직업인 반면 대단히 위험한 직업이었습니다. 왕 앞에서는 절대로 슬픈 얼굴을 해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언제나 기쁘게 웃고 행복한 표정을 지어야 되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 앞에서 슬픈 기색을 보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것을 수색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즉시 얼굴의 수색을 감지하고 물어봅니다. 왕은 사람을 많이 대하다 보니 관상만 어지간히 봐도 걱정이 있고 근심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2장 2절에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술맡은 관원장인 느헤미야에게는 목숨이 날아 갈수도 있는 말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 앞에 슬픈 얼굴을 보이느냐는 말입니다. 그러자 느헤미야가 2절 후반에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라고 그랬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말 한마디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므로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 느헤미야가 “폐하여 제가 폐하를 죽일 의도가 없습니다. 폐하는 만세수를 하시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라고 말합니다. “나의 고국인 예루살렘에 성벽이 없어 무너졌으니 내가 그곳으로 그 소식을 듣고 어찌 슬픈 얼굴을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최고 경호원인 느헤미야가 왕을 향해서 “폐하 그대가 하시는 일이 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대가 하는 일이 내 마음에 안들어 내 얼굴에 슬픔이 생기고 근심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험한 말입니까? 목숨을 건 말 한마디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느헤미야가 삶을 포기한 듯이 말한 것은 아닙니다. 또 조급하게 말한 것도 아닙니다. 지혜롭지 않게 말하여 왕의 분노를 촉발한 것도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라며 예절을 갖추어 말했습니다. 또 5절에 보니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이런 것을 좀 들어주시옵소서.”라며 겸손하게 예절을 갖추어 말한 것입니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겁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편안한 길만 추구할 때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믿음은 때로 큰 위험이 있다 해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나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잘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버리고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하나님 인도만 따라 가는데 얼마나 위험합니까? 모세가 40년 동안 바로 궁중에서 편안히 잘 지내다가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광야로 갔을 때에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래도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로의 궁중에 있지 아니하고 포기하고 광야로 나간 것입니다.
노아가 땅에서 방주를 지을 때 사람마다 지나가면서 노아보고 정신이 이상해졌냐며 얼마나 욕을 했겠습니까? 별소리를 다하고 비난과 모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런 위험을 다 감수한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이 얼마나 위험을 많이 당했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 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많은 위험을 뛰어넘어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했습니다. 어떤 분은 처녀가 어떻게 애를 잉태하느냐고 그러는데 하나님이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그런 것도 못하시리라고 생각합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에게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낳은 것입니다. 얼마나 큰 위험을 무릅쓴 것입니까? 믿음이란 위험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선교를 하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로 용감한 믿음이 필요한 일입니다. 안전만 원한다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다음주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구원하는 태신자 전도의 날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면 광야로 나가야 됩니다. 다윗은 때로 목동생활을 할 때에 사자가 양을 물어 가면 쫓아가 사자의 입을 찢었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 한다면 위험이 있는 길이라도 과감하게 가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선교사님들은 목숨이 달아날 위험을 감수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용감한 믿음은 큰 부담(great burden)을 감당합니다.
느헤미야가 목숨 잃을 위험을 무릎 쓰고 왕 앞에 수색을 보이고 담대한 말을 한 것은 그에게 마음의 부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조국 예루살렘에 성벽이 없도다.그런데 그것을 세울 사람이 아무도 없고 바로 내가 세울 사람이다.”라며 성벽재건의 부담을 마음으로 갖고 그 부담을 피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최고의 직장과 최고로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그런 성벽재건을 위한 부담만 갖지 않는다면 편안한 여생이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음에 부담을 갖고 최고의 직장을 버립니다. 편안한 삶의 쾌락을 버립니다. 그리고 그의 온 가족을 환경이 바뀌는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는 마음의 부담과 결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마이크 성능이 좋지 않다고하면 여러분 마음에 부담이 있어야 됩니다. 마이크 성능이 좋지 않으니 좋은 교회로 가자고 하지 마시고 ‘저 마이크가 좋지 않은 것을 누가 알 것인가? 내가 하자.’는 마음의 부담이 있어야 됩니다. 또 교회가 깨끗하지 않다면 깨끗한 교회로 가자고 하지 마시고 ‘내가 교회를 깨끗이 청소하자.’는 마음의 부담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느끼는 부담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느헤미야 2장 4절에 아닥사스다 왕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런데 6절에 보니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고 그랬습니다. 왕이 왕후 앞에서 멋있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만드신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떻게 왕후를 그 때 옆에 앉혀서 왕으로 하여금 체면을 세우게 하는가? 왕이 자기 곁에 있는 부인에게 “내가 너그러운 사람이다. 이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다.이렇게 자비로운 사람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한참 생각하다 하나님이 아닥사스다 왕의 심리까지도 이용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왕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는 질문이 떨어지자 느헤미야는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하늘의 하나님 앞에 묵도하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라고 정확하게 얘기한 것입니다. 그는 일생일대의 큰 사명을 자청한 것입니다. 그 사명으로 말미암아 그의 일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큰 사명을 달성하려면 돈도 시간도 노력도 많이 필요하고 고민도 많이 해야 됩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자신의 자원으로는 이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원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잊지 말아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은도 있고 금도 있고 재물도 있는데 그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도 땅도 은도 금도 주인이십니다. 사람들이 내가 갖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잠시 맡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으면 다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야 되고 주인이 옮기는 데로 옮겨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믿음으로 주인의 것을 옮겨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옮기시면 얼마든지 옮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재물은 옮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신 은과 금이 여러분에게 몰려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큰 믿음은 하나님의 자원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큰 부담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원을 끌어들여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 부담을 이루어 보는 것이 큰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아무런 부담이 없는 인생은 아무런 비전이 없는 인생입니다. 부담이 없으니 아무런 비전도 없습니다. 비전이라는 것은 마음의 부담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에 “내가 혼란한 정치를 바로잡아야 되겠다.”는 부담이 생기면 정치가가 되겠다는 비전이 나오는 것입니다. 또 “내가 진리가 이렇게 어지러우니 진리를 밝혀봐야 되겠다.”는 부담이 있으면 학자가 되겠다는 비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담은 비전을 낳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부담도 없고 비전도 없는 사람은 눈동자가 풀리고 비참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노인들도 삶에 비전이 있으면 눈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아들집에 떡을 해가지고 머리에 얹고 가는 노인들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납니다. 왜냐하면 아들집에 가서 떡이 식기 전에 전달해 줘야겠다는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일지라도 아무런 비전이 없이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비틀거리는 이들의 눈동자는 흐릿합니다.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고 아무것도 할 비전도 없는 사람은 비극적인 사람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큰 믿음은 하나님을 위해서 큰 부담을 마음에 갖는 것입니다.
3. 용감한 믿음은 큰 요구(great requests)를 합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성벽을 건축하라는 허락을 받는데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성벽건축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읽을 때 이러다가 왕이 화가 나지 않을까 하고 너무나 마음이 조마조마해 집니다. 7절로 8절에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별 것을 다 요구합니다. “안전 보장도 책임져주시고 건축자재까지 주시옵소서.”라고 아주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미리 외우고 있다가 다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왕 앞에 나가서 요구를 할 때는 큰 것을 요구하는 것이 바른 예의입니다. 근대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침례교 선교사 윌리암 캐리의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는 말은 언제 들어도 옳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고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81편 10절에도 “나는 너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그 에너지를 우리 삶에 끌어 들이는 것은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에도 믿음으로 이겨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육신이 병이 들어 어렵다거나 사업이 어렵다거나 가정이 어렵더라도 믿음으로 이겨나가십시오. 우리 자신의 생애와 우리 자녀들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큰 것을 기대하고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는 우리 교단은 물론 대한민국에서도 중요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교육관 부지에 현재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1,500평에 가까운 땅이 있습니다.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여기에 큰 성전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예배만 드리는 공간뿐 아니라 체육관과 공부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성전을 지어주고 이 땅을 떠나야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의 부담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세계에 선교를 해야 됩니다. 대한민국이 선교강국이 되어야 됩니다. 오늘날 미국이 선교파워가 약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경제를 축복하시고 삶을 축복하시고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대한민국을 통해서 15억 인구의 중국을 선교하라는 것입니다. 중국이 변화되면 중국이 회교를 담당합니다. 중국은 워낙 크고 영향력 있는 나라이므로 함부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중국을 축복하실 계획이 있고 중국을 통해 회교를 전도하실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역사와 선교역사의 전공자로서 볼 때 이것은 명확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교대국이 되도록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선교를 하려면 물질이 필요하므로 하나님이 물질의 복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폭발적인 부흥이 다시 한번 강남중앙침례교회에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성령의 불이 떨어져 사람들이 회심하고 소리를 지르면 마귀와 귀신들이 쫓겨 나가고 병자들이 낫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큰 부흥을 주시고 선교강국이 되게 해 주시며 큰 성전을 이뤄 우리 후손들이 신앙생활을 똑바로 할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마음의 부담과 비전을 가지고 간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결 론
우리의 믿음은 용감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용감한 믿음은 큰 위험을 감수하고 큰 부담과 비전을 가지고 크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를 위해서 용감무쌍한 믿음을 그대로 간직하지 마시고 끄집어내어 사용하시고 하나님의 전능한 에너지를 체험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믿음에 모두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 역사를 이루어도 내가 내 믿음으로 다 이루었다고 자만하면 주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내 믿음이 용감하고 큰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면 하나님의 선한 손이 이루셨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큰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귀한 손길을 체험하려면
느 2:1-9 / 조상호목사
지난 남아공 월드컵축구 때, 우루과이와 가나의 8강전 경기가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우루과이는 가나와 연장전까지 이어진 120분간의 경기에서도 승부를 내지 못했으나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여 4강 진출의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기가 끝난 후에 큰 논란이 있었습니다. 두 팀이 1-1이 되어 연장전 마저 끝나가던 무렵, 가나에게 결정적인 프리킥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패널티 박스 오른쪽 외곽지점에서 찬 볼이 박스 안쪽으로 크로스 되었고, 양 팀 선수들이 뒤엉켜 혼전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가나의 아피아 선수가 날린 회심의 헤딩 슈팅을 우루과이의 공격수 수아레즈가 두 손을 번쩍 들어 펀칭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골키퍼 외에는 손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규정 때문에 수아레즈는 레드카드를 받아 퇴장을 당했습니다. 패널티킥 기회를 얻은 가나선수들은 팀의 4강행을 확정지을 수 있는 확실한 찬스를 잡았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패널티 키커로 나선 가나의 기안의 슈팅이 크로스바를 맞고 하늘 위로 솟구쳐버린 것입니다. 결국 두 팀의 승부는 승부차기에서 가려졌는데, 무슬레라 골키퍼의 선방으로 우루과이는 가나를 누르고 4강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레드카드를 받으며 쓸쓸히 퇴장했던 수아레즈는 졸지에 우루과이의 4강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일명 '수아레즈 신의 손'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이 ‘신의 손’이라는 말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이 끝난 후 생겼습니다. 8강전에서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경기를 할 때,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는 드리블을 하다가 공이 공중에 떠오르자 교묘하게 점프를 하면서 한 손으로 공을 쳐서 골을 넣었습니다. 영국 선수들은 핸드볼 파울이라고 심판에게 항의를 했지만, 그 장면을 보지 못한 심판은 그 항의를 묵살해 버렸습니다. 결국 원 핸드 점프 슛 한방으로 영국은 8강전에서 탈락을 한 반면, 아르헨티나는 8강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나중에는 우승까지 차지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자, 마라도나는 “반은 내 머리에, 반은 신의 손에 맞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여기에서 ‘신의 손’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이후 축구 경기에서 종종 ‘신의 손’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년 전 프랑스와 아일랜드가 남아공월드컵 유럽지역 예선 때 프랑스의 스트라이커 티에리 앙리는 발 대신 손을 사용하여 갈라스에게 볼을 패스하였습니다. 이것은 핸들볼 반칙이 분명한데, 심판이 그 장면을 보지 못하는 바람에 경기는 계속 진행이 되었고, 갈라스는 찬스를 놓치지 않고 골을 넣었습니다. 이 골로 아일랜드는 월드컵 본선에 탈락한 반면, 프랑스는 진출했는데, 그 경기가 끝난 후 사람들은 앙리의 손을 ‘신의 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남아공 월드컵 기간 코트디부아르와 브라질의 경기에서 브라질의 루이스 파비아누가 골을 성공시킬 때, 두 번씩이나 핸드볼 반칙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그 장면을 보지 못하는 바람에 골로 인정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파비아누는 고의로 한 것은 아니라며, “엄청나게 신성한 신의 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한국에도 한 때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가진 축구선수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출신 골키퍼 발레리 사리체프가 등번호 44번을 달고 44세까지 뛰다가 은퇴를 하였는데, 너무 골을 잘 막는다고 사람들은 그를 ‘신의 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국인으로 귀화한 후 그는 자신의 이름을 ‘신의 손’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어떠한 능력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신의 손’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은 말 그대로 사람의 손일 뿐, ‘신의 손’이 될 수 없습니다. 마라도나나 앙리나 파비아누 같은 선수들이 신의 손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골을 넣은 것이 아닙니다. 심판이 보지 못해서 그들이 골을 넣은 것뿐입니다. 사람의 손은 불완전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은 불완전한 사람의 손과 다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손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장 19절과 20절에서 “내가 나오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시편 89편 13절에서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 손은 높으시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11장 21절에 보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은 애굽의 바로 왕이 굴복할 수밖에 없도록 이적을 일으키신 강한 손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한 손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수많은 역사를 일으키는 가장 귀한 손, 가장 위대한 손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이 임하시면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같이 8절을 보겠습니다.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의 요구대로 예루살렘에 가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허락했습니다. 그것은 하반절에서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체험할 수 있었을까요?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 보면 세 가지 방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1) 기도하고 기다리라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체험하려면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형제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 성은 무너졌고 자기 민족이 고난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수일 동안 울며,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기도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지속적이라는 점입니다. 며칠 동안 기도하다가 중단해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임할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1장 1절에 의하면 그가 하나니로부터 고국의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것은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입니다. 기슬르월은 요즘으로 말하면 11월입니다. 그리고 그가 언제 행동을 취했습니까? 다같이 오늘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여기 니산월은 요즘으로 말하면 3월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11월에 고국의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기도를 시작한 후 3월이 되어서야 행동을 취한 것입니다. 그가 얼마 동안 기도하며 기다렸습니까? 4개월 동안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느헤미야가 4개월 이상 기도하며 기다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그는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혹시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해버리는 사람은 아닙니까?
어느 날 달팽이가 사과나무를 천천히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에 불과 몇 센티미터를 움직이며 힘들게 나무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나무 틈새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벌레가 말했습니다. “이 느림보야! 너는 쓸데없이 힘을 쏟으며 시간만 낭비하고 있어. 네가 저 나무에 올라가봐야 소용이 없어. 사과가 열리지 않았어.”그러나 달팽이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올라가면서 혼자 말했습니다. “내가 저 꼭대기까지 기어오를 때쯤이면 사과가 열릴 거야!”
어린이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는 자가 열매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해서 곧바로 응답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기다림’이라는 말은 ‘기대’라는 말과 어원이 같습니다. 기대하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기다림을 다른 말로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남자 친구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군대에 간 남자 친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버스가 온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응답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조급해 하지 말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끝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옛말에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물질을 드리고 봉사를 하는 것도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꾸준히 계속해야 합니다. 조급해서 멈추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야훼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야훼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5∼2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직장문제, 사업문제, 물질문제, 결혼문제, 건강문제, 진학문제, 자녀문제,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까? 무엇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응답이 늦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기다림이 길어진다고 낙심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끝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되,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2) 철저하게 준비하라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체험하려면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1,500m 경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경기에서 한국의 이정수 선수가 제일 먼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2등으로 들어온 미국의 오노 선수가 마치 1등을 한 것처럼 성조기를 날리며 경기장을 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조차 ‘오노가 일등을 했나’ 라고 착각을 하였습니다. 카메라맨들도 누가 1등인지 갈팡질팡했습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체육회, 빙상협회, 그리고 벤쿠버 한인회 등, 아무도 1등을 한 선수에게 건네줄 태극기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대한민국 선수가 1등 하기를 기대했으면서, 아무도 태극기를 준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위에 보면,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라고 하며,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잘못된 신비주의적인 신앙입니다. 반대로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는 거지, 무슨 기도를 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하면서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는 이성주의적인 신앙도 잘못된 신앙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소망을 가지고 계획을 짜고 준비하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느헤미야는 4개월 동안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도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준비하며 기다렸습니다. 철저하게 준비를 마치고 기도하며 기다리던 어느 날 느헤미야는 술잔을 가지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평소 때와 달리 느헤미야의 얼굴에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왕이 물었습니다.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2절) 그 때 느헤미야는 왕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3절) 구체적으로 자기가 근심하고 있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4절) 그 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합니까? 이것저것 정신없이 마구 대답했습니까? 아닙니다.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5절) 느헤미야는 정확하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왕이 다시 묻습니다.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그 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왕이시여,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계산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까? 아니면 ‘글세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며 우물거렸습니까? 아닙니다. 다같이 6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여기 ’내가 기한을 정하고‘라는 말은, 느헤미야가 얼마나 소요될 것인가를 묻는 왕에게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예상소요 시간을 곧바로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재건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왕에게 요청까지 했습니다.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7~8절)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고국인 유다를 들어가는데,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비자를 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벽 재건을 위해 필요한 모든 자재들을 대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느헤미야는 4개월 동안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어떻게 해야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수 있을까, 자재는 무엇이 얼마나 필요할까, 공사를 위해 사람들이 얼마나 필요할까, 또 그 사람들을 어떻게 모을 수 있을까, 이 일을 위해서 얼마나 기간이 걸릴까, 등을 생각하며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철저하게 준비하는 느헤미야의 이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아니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 몰라도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들이 목사 사택을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기자고 결의를 했습니다. 보통은 할 수만 있으면 사택을 교회 근처로 오게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결의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자기 목사가 사택에서 교회로 오는 짧은 시간 동안 자동차 안에서 설교를 준비한 후 강단에 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택이 교회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자기 교회 목사가 설교 준비를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택을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기자고 결의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설교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감을 얻기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도만 한다고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면서 성경도 읽어야 하고, 관련 서적도 보고 자료도 수집해야 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날짜가 잡혔으면 결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례를 누구로 할지, 결혼식은 어디에서 할지, 결혼 후에 피로연은 어디에서 할지를 정해야 합니다. 또한 청첩장도 만들고, 신혼살림도 장만하고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비행기도 예약을 해야 합니다. 준비하지 않고 결혼할 수 없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잘하려면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기도는 하지 않은채 공부만 해서도 안 됩니다.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또한 본인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미래는 준비된 자의 몫”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준비된 자에게 미래가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기회는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꿈이 있습니까?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습니까? 달려가야 할 비전이 있습니까? 기도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느헤미야처럼 철저하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3) 기회를 놓치지 마라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체험하려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같이 6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여기 ‘그 때에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는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왕비가 공식 석상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왕에게 가까이 갔을 때 왕비가 왕하고 같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 그 자리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 사적인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는 잠잠히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다가 왕과 왕비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함께 앉아 있을 때, 왕에게 접근한 것입니다. 그리고 왕에게 고국의 참담한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선한 손이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주어 느헤미야는 유다를 다녀오도록 허락을 받고 성벽 재건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재들까지 제공 받았습니다. 그런데 9절 상반절에 보면,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가 요구하지 않은 군대 장관과 마병까지 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잘 살렸다는 것입니다. 왕이 기분이 좋을 때를 놓치지 않고 찾아가서 결국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던 느헤미야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이 살다가 보면,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기회를 놓치고 나서 ‘그때 그렇게 할 걸, 그때 이렇게 했어야 되는데‘하고 후회를 합니다. 기회라는 말은 영어로 'opportunity‘ 인데, 원래 이 단어는 항구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옛날에는 배들이 밀물 때를 기다려 항구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해당하는 라틴어가 '옵 포르투(ob portu)'입니다. 즉 부두쪽으로 조류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항구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선박이라는 뜻입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조수가 밀려드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배를 대었는데, 여기에서 영어 'opportunity‘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런데요, 영국 속담에 보면 “기회는 앞 머리카락만 있고, 뒷머리는 벗겨져 있다. 기회를 만나려면 앞 머리카락을 잡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회는 앞에서만 잡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 번 기회가 지나가버리면 다시 잡을 수 없습니다.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에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흔히 부동산 투자에 성공하기 위한 비결은 첫째도 위치, 둘째도 위치, 셋째도 위치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성공은 타이밍에 있습니다. 첫째도 타이밍, 둘째도 타이밍, 셋째도 타이밍이라고 강조합니다. 무엇이든지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쇠는 달구어졌을 때 두들겨야하듯, 축구나 야구나 농구 등의 스포츠 경기에서 타이밍을 놓쳐버리면 승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번 타이밍을 놓치면 다시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느 글에서 처음 한국에 경부선 철도가 가설될 때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러.일 전쟁이 일어난 후 일본은 조선에서 조선에서 수탈한 쌀과 물자이동과 병력 이동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남북으로 종단하는 경부선 철도공사를 계획했습니다. 오랜 공사 끝에 1905년에 개통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공주와 부여를 지나도록 계획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 주민들이 '양반마을 앞으로 왜놈의 귀신이 지나가면 안 된다'고 극구 반대를 하는 바람에, 결국 조치원과 대전을 지나는 것으로 노선이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그때 철도가 놓이고 도로가 닦인 지역은 모두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반대했던 지역은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개발이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공주와 부여에 사는 사람들이 이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우리는 그 기회를 주실 때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합니다.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사업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용기를 내어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봉사나 전도의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봉사하고 전도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철도가 내 앞을 지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의 기회를 주실 때 놓치지 말고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한 도시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신문들이 대서특필했는데, 연주자보다 세계최고의 명품 악기인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연주당일에도 신문은 연주자보다 이 바이올린 사진을 크게 실을 정도였습니다. 드디어 공연이 열리던 날 밤, 바이올리니스트는 신들린 듯이 연주를 해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곡을 연주한 후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이올린을 의자에 사정없이 내리쳐 산산조각을 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청중들은 숨을 죽이고 이 기이한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이올리니스트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저의 악기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 신문을 읽은 다음, 저는 전당포에 가서 10달러를 주고 이 중고 바이올린을 샀답니다. 그리고 이 낡아 빠진 악기에다가 새 줄을 갈아 끼웠습니다. 여러분, 오늘밤 제가 연주 했던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 악기를 부서뜨림으로서 보여 주고 싶은 것은 악기보다 제 손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연주자요, 우리는 악기입니다. 우리가 뛰어난 악기는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우리의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별 볼일 없는 양치기라 할지라도 모세처럼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한 아이의 도시락밖에 되지 않는 5병2어도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의 도구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강하신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면 얼음장처럼 차가운 사람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며 기다리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한 손길, 능력의 손길, 축복의 손길을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루살렘의 기업과 권리
느헤미야 2:7-10, 18-20 / 석기현 목사
우리나라 정치인들 중에는 국가적 사업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하는 것만을 자기 사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과거에 경부고속도로를 제일 처음 건설할 때에 아예 도로 바닥에 드러누워서 반대했던 '전직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영종도에 국제공항을 건립할 때도 무슨 환경문제 운운하면서 극구 반대했던 국회의원들이 수두룩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 스스로 시작했던 'FTA'나 '제주 해군기지 건설'까지도 이제 와서는 무슨 나라를 망칠 일이라고 비난하면서 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매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소리만 들었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지금 전국 곳곳을 이어주는 온갖 고속도로들 대신에 여전히 국도를 덜컹거리면서 다니고 있을 것이고, 6, 7년 째 전 세계 1위의 평가를 받고 있는 인천국제공항의 편리함도 누리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반대자들은 있기 마련이지만, 특히 선구자들에게는 그런 반대자들이 더욱 많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 안 해 본 일, 남은 위험하다고만 생각하는 일, 남은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는 일에 제일 먼저 뛰어드는 사람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앞장섰던 느헤미야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연 선구자적인 신앙인답게 그런 반대 때문에 약해지거나 물러서지 않았으며, 끝내 그 시작했던 '선한 일'을 완수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요령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성도가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에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마귀의 방해공작을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본문을 통해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선구자적인 신자는 자신이 계획하는 일에 반대하는 대적이 나타나면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부흥케 할 선한 사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7절부터 10절에 기록하기를 "7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8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9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편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10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하여 바사 왕 아닥사스다로부터 특별 휴가를 위시하여 통행권 보장 및 자재 조달에 대한 지원까지 받게 된 느헤미야는 이윽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예루살렘 귀환은 바벨론 포로지에 살던 한 평범한 백성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바사 제국의 왕의 측근으로 있는 고위관리답게 "군대 장관과 마병"이 호위하며 가는 대단한 행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만약 무슨 국가적인 행사의 일환으로 바로 자기 집 앞길로 삼군 의장대가 절도 있게 행군을 하거나 기갑부대의 야전 훈련이 있어서 자주포나 탱크들이 지축을 울리면서 지나간다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밖을 내다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군대 장관'의 지휘 하에 완전군장을 갖춘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행진하고 '마병'들이 위엄 있게 호위하면서 나아가는 장면이란 당시의 민간인들에게도 평소에 보기 드문 아주 좋은 구경거리였을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런 행렬이 느헤미야가 바사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까지 오는 동안 3개월 이상 계속되었을 것이니, 그 소식은 그가 "강 서편에 있는 총독들"에게 도달하게 될 즈음 즉 유브라데 강 서편 지역으로 진입할 즈음에는 이미 유다 지역에까지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귀환 소식에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 당시 사마리아 지방의 통치자였던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지방의 통치자였던 "도비야"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 "종 되었던 암몬 사람"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암몬 지역의 신하'라는 뜻으로서 도비야가 암몬 지역에서 어떤 고위 관직에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이 두 이방 지역의 정치인들은 바사 제국에서 '왕의 술 관원'을 하던 느헤미야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심히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근심하다'라는 말은 '걱정하다'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매우 언짢게 여기고 기분 나빠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산발랏과 도비야란 자는 도대체 왜 느헤미야의 귀환 소식을 듣고 그렇게 근심하게 되었습니까?
본문을 다시 보시면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듣고서 당장 그와 같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물론 느헤미야가 그 두 사람에게 자신의 귀환 목적을 알려 준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그들은 전형적인 정치꾼들답게 이 느헤미야라는 인물이 바사 제국에서 왕의 측근에 있던 자리까지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뭔가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정확하게 추측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이나 유다 지역은 자기네의 관할 지역이 아닌데 왜 '이스라엘의 흥왕'을 두고 그렇게 견제를 시작했던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만약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고 이스라엘이 국력을 회복하게 되면 바로 이 두 사람이 정치적 및 경제적으로 직접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예루살렘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을 오가는 중요한 통상로의 요충지에 있었습니다.
인류의 4대 문명 발생지 중에서 두 곳이 바로 예루살렘 성을 그 중간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두 문명 지역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질 때에는 그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예루살렘 성이 큰 이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도시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면 그 곳을 거쳐 지나다니는 비즈니스맨들을 대상으로 요식업이나 숙박업을 통해 돈을 벌 수도 있고 혹은 융자나 환전을 해 주면서 이윤을 남길 수도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후에는 그런 이득이 사마리아와 암몬 지역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장사꾼들이 이제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지나다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음식점이나 숙소 하나조차 없는 것은 고사하고 강도당할 위험까지 있는 그 지역을 굳이 찾아갈 이유가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그 무역상들은 자연히 유다 대신에 바로 곁에 있던 사마리아나 암몬 지역을 경유하게 되었고, 사마리아와 암몬은 바로 그 덕분에 옛날 예루살렘이 누리던 부를 자기네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고 이스라엘을 부흥시키려는 사람이 온다는 소식을 산발랏과 도비야가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마리아와 암몬을 다스리고 있던 그 두 사람은 속이 언짢아질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예루살렘이 망한 덕에 재미를 톡톡히 보던 참이었는데, 이제 그 재미가 사라지게 될 위험이 닥치게 되었으니 당연히 기분이 나빠지면서 근심에 빠졌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들이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두고 시작하려 할 때 반드시 반대자들이 나타나게 되는 이유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가 흥왕하게 되면 그것은 사단에게 반드시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능력을 얻게 되면 될수록 원수 마귀는 상대적으로 그 입지가 줄어들게 되고 활동에 차질을 빚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선구자적인 신자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마음을 뭉치고 어떤 선한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면, 그 누구보다도 사단이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일을 계획해 놓고 시작하려 할 때 반대자가 일어서고 방해꾼이 나타난다고 해서 의기소침해지거나 낙심하면 안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아, 우리가 하려는 이 일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구나. 그러니 사단이 이처럼 당장 근심하면서 달려드는구나.'라고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전도회에서 무슨 사업을 결의하고 실행하려 하는데 그 첫 단계에서부터 뭔가 일이 꼬이는 것처럼 보일 때, '아이고, 이 사업은 벌써부터 안 될 징조가 훤하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렇게 빨리 마귀가 반응하는 것을 보니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 교회를 부흥하게 만들 진짜 선한 일이구나."라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선구자적인 신자가 되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수준에서 놀 줄 알아야 합니다.
원수 마귀의 궤계를 그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훤히 꿰뚫어 보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각자가 소속된 봉사 기관들을 통하여, 또한 여러분들이 특별회원이나 임원이 되어서 섬기고 있는 '예수 세계화 운동'의 여러 사업들을 통하여 어떤 하나님의 일을 계획하고 시작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반대 의견이 술렁대고 방해되는 사건들도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럴 때일수록 절대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일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을 흥왕케 하고 원수 사단에게 손해와 타격을 주게 될' 선하고 의로운 필수과업임을 확신하면서 더욱 힘차게 추진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선구자적인 신자는 자신이 충성하는 일을 비난하는 원수가 나타나면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축복의 사명'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18절 이하 20절의 말씀에 "18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19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20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대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먼저 성벽의 파손 상태를 몸소 시찰해 본 후에 방백들과 백성들을 불러 놓고 '이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진 채로 방치해 두는 것은 실로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선한 손"이 지금까지 자기를 어떻게 도우셨으며 그 결과 아닥사스다 왕이 자기에게 "이른 말씀" 즉 성벽 재건 공사를 지원해 주기로 약속한 말을 그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 유다 백성들은 "일어나 건축하자"라고 외치면서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로 직후에 또 무슨 일이 따라왔습니까?
그것은 앞에 나왔던 두 사람 곧 "산발랏"과 "도비야"와 함께 이제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라는 자까지 가세해서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을 두고 "업신여기며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와 암몬과 마찬가지로 "아라비아" 역시 예루살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었으므로 그 세 사람의 이해관계는 일치했으며 따라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에 대한 반감 역시 일맥상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느헤미야가 하려는 일을 두고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라고, 즉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바사 왕에 대한 반역행위나 마찬가지라고 모함을 하면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선구자가 무언가 하나님의 일에 착수하고 그 손발이 바빠지기 시작하면 원수의 조롱과 비방도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야 누가 조롱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신자가 주변의 불신 이웃들을 향해 "예수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부지런히 전도를 하면, "하! 교회에 나가 봐도 별 수 없던데 뭘."이라는 비웃음을 여지없이 듣게 됩니다.
'교회가 너무 많다.'라는 불신사회의 여론에 밀려서 개척교회를 세울 생각조차 아예 하지 않으면 물론 욕을 먹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명감에 찬 젊은 목사가 담대하게 나아가서 빌딩 한 칸을 월세로 얻어 교회 간판을 내걸고 개척을 시작하면, 그 주위에서는 "흥! 그 흔한 교회가 또 하나 더 생겼구나."라고 코웃음 치는 소리가 틀림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으로부터 그런 '업신여김'과 '비웃음'을 당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는 실로 기뻐하시는 일인 것을 선구자적인 신자는 꼭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그런 원수의 비난을 어떻게 이겨내었습니까?
그는 우선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 원수들이 느헤미야에게 "너희들이 바사 왕을 배반하려고 이런 일을 하느냐?"라고 모함해 왔을 때, 사실 느헤미야는 "나는 이 예루살렘 재건에 대하여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정식 허락을 받고 온 사람이다."라고 떳떳이 대꾸해 줄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대신에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일은 세상 군주의 허락 하에 이루어지는 정치적 사업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하나님의 종으로서 당연히 이 일을 하는 것이고 너희들이 아무리 비웃고 방해를 놓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형통케' 해 주실 것이다."라고 훨씬 더 강력한 카운터펀치를 그들에게 날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느헤미야는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명록'이라고 번역된 말은 '역사적으로 그 후손들까지 두고두고 누리게 될 축복'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의 이 대답은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일에 충성함으로써 앞으로 완성될 예루살렘을 통해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될 것이지만, 너희들은 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 사업에 전혀 동참하지 않고 방해만 하는 자들이니 그 성이 완성된 후에 받게 될 기업의 몫에 대해서도 당연히 아무 특권도 돌아갈 것이 없고 무슨 권리 행사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루살렘을 통해 앞으로 누리게 될 축복의 상에 너희들은 숟가락도 올릴 수 없다.'라는 말로서, 실로 너무나도 멋있는 결정타 한방이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선구자는 원수가 비웃고 비난하고 대적해 올 때 이처럼 당당하게 응수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따위 비난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생애 최고와 전부를 바쳐서 충성하고자 하는 헌신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허튼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기독신자와 교회를 매도하는 자들은 우리가 확신하며 소망하고 있는 미래의 '예루살렘의 기업'에 대해서는 아무 권리도 없는 '마귀의 자녀'들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저는 교회가 하는 일을 두고 도대체 왜 불신언론들이 제멋대로 비판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교인들이 정성과 힘을 다 바쳐서 자기네 예배당을 아름답고 크게 짓는 일을 두고 왜 불신자들이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하는지 정말 저로서는 '웃기는' 일입니다.
누가 자기네들 보고 교회 일을 위해서 기부해 달라고 했습니까?
성전건축을 무슨 자기네들이 낸 세금에서 나오는 국가 보조금으로 짓기나 합니까?
불신자들은 기독신자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나누는 예배의 은혜, 성도 교제의 기쁨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교인들이 성전을 건축하고 선한 봉사를 위하여 헌금을 바침으로써 누리게 되는 더 큰 축복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도대체 뭐가 배가 아픈지, '교회가 왜 예배당을 크게 짓는 일에만 돈을 쏟아 붓고 구제나 사회사업에는 힘쓰지 않느냐?'라고 제멋대로 험담을 내뱉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잠깐 언급했었지만 이 강서성전을 지을 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계획을 비난하고 도저히 안 될 일이라고 반대하던 사람들이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처럼 이 '선한 일'에 동참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우리 경향교회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엄청난 축복에도 결국 아무 '기업'도 '권리'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들의 후손까지도 이 경향교회의 자자손손 수천 대가 지금보다 몇 백 배, 몇 천 배 더 크게 누리게 될 축복에 대해서도 아무 '명록'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큰 일을 시작하다가 반대자나 원수로부터 조롱과 방해를 받게 될 때 절대로 구차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당신은 교회와 성도를 아무리 우습게 여기고 깔보더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섬기고자 하는 이 일을 반드시 형통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경향교회를 통하여 미래에 반드시 받게 될 축복은 당신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우리와 경향의 후손들만의 기업이 될 것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응수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받은 교회'를 통하여 온갖 '선한 일'들을 위하여 충성하는 중에 비난이 쏟아지거나 핍박이 덮쳐 오게 되면, 바로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반드시 축복하실 가장 소중한 우리만의 기업인 것을 확신하면서 더욱 자신을 가지고 과감하게 추진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을 흥왕케 하려고' 유다로 귀환했을 때 거기에 제일 처음으로 반응을 나타낸 사람은 그를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협조자가 아니라 그 일을 언짢게 여기는 대적들이었습니다.
온 유다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마음을 합하고 '이 선한 일을 하려' 했을 때 즉각 따라온 일은 무슨 만사형통의 징조가 아니라 그 원수들의 조롱과 비난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사단 역시 여전히 이 세상 임금 노릇을 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모으고 큰 일을 시작하려고 하면 그 순간 즉시 원수 마귀들이 제일 먼저 우리를 대적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처럼 우리의 하는 일에 대하여 '근심하는' 원수가 나타날 때, 우리는 그 일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옳은 일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선한 사업을 작정한 후에 채 '한 삽'도 뜨기 전에 우리를 비판하며 방해하는 세력이 나타나면, 우리는 우리가 하려고 하는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미래에 반드시 크게 축복하실 우리만의 소중한 기업임을 확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론계에 몸담고 있는 기자들에게는 가끔 협박편지가 날아드는데, 그 중에는 그 기자를 '죽이겠다는 위협'(death threat)이 담긴 편지도 있습니다.
겁쟁이 기자는 그런 편지를 받으면 당장 기가 죽고 주눅이 들어서 그 후로는 기사를 소신껏 쓰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짜 사명감 있는 기자들은 그런 협박 편지를 받게 되는 것을 두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로 여기면서, '죽인다는 위협받을 만큼 올바른 기사를 썼으니 정말 이제부터는 당신도 기자다운 기자로 인정받은 셈이오.'라고 서로 축하까지 나누는 것입니다.
선구자적인 신앙인, 선구자적인 사명인은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무 일도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을 두고 누가 비웃을 이유를 찾을 수 있겠으며, 그저 평범하게 살고 있는 교인을 두고 어떤 불신자가 무슨 언짢은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저 주일이나 겨우 지키면서 '얌전한' 신앙생활을 하고 그저 교회 예산이 돌아가는 한도 내에서 만족하면서 '평안한' 교회생활만 해 나간다면 우리를 욕할 사람도, 우리를 방해할 원수도 전혀 생기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열심을 내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상황은 틀림없이 180도로 반전될 것입니다.
원수 마귀가 당장 반응을 하면서 기분 나빠하고 신경전을 걸기 시작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정식으로 자기 정체를 드러내면서 공공연히 비난하고 결국에 가서는 집요한 반대와 끈질긴 방해공작까지 반드시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선구자적인 신자는 그런 원수의 등장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지금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며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축복의 경주를 달음질하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비난과 방해를 받는 것이야말로 그 성도가 이제 본격적으로 '신자다운 신자'가 되었으며 그 교회가 진정 '전투하는 지상교회'로 자리 잡고 있음을 확증해 주는 사실인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섬기는 길에 조롱꾼들과 방해꾼들이 나타나게 되면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흥왕'케 하는 것인 동시에 결국 자신이 누릴 '예루살렘의 기업과 권리'가 될 것이 틀림없음을 확신함으로써, 한번 힘을 내어 시작한 그 선한 일을 끝까지 담대하게 성취해 내고야 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