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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전략을 위한 전쟁 이야기를 우연히 읽었다. 다윗과 골리앗과 같이 중무장으로 이동이 부자유스러운 중보병을 궁병과 비슷한 돌팔매로 제압하고 적의 무기로 목을 자르는 것은 나의 강점으로 적의 약점을 공격하고 적의 자원으로 나의 자원을 보강하는 방법이다. 싸움은 이겨놓고 시작해야 하고 적은 내편으로 만들어서 타격을 두배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외교와 이를 지원하는 정보는 중요하다. 내가 유리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원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13
전차전투인 이집트 람세스2세와 히타이트 우와탈리2세간의 카데시전투에서 람세스는 카데시성으로 4개의 부대로 나눈 2만여명의 병력을 진두시켰다. 부대간 간격이 커진 상태로 정찰병이 적병을 사로잡아 히타이트군이 2배의 병력으로 성뒤에 매복중임을 알게되었지만, 다른 부대와 소통이 어려워진 상태였다. 도강하던 한 부대는 급습당해 괘멸했고 선두부대역시 같은 운명이 되었다. 결국 이집트군은 철수해야 했고 기존 영유하던 시리아지역을 잃었음은 물론이다. 정보없이 무리하게 공격하는 것은 자멸하기 쉽고 운이 좋아도 상당한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21
마라톤전투는 1만명의 아테네와 2만명의 페르시아의 대결이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와 전열을 맞추기위해 중앙은 8열의 반으로 했고 양익에 주력을 배치했고 페르시아는 반대로 궁병을 양익에 배치했다. 사거리인 200미터까지 접근한 후에는 달리기 시작했다. 중앙은 주력을 배치한 페르시아가 돌파했지만 양익이 무너져서 포위되었고 6천명의 전사자를 내고 함대로 대피했다. 이러한 전술은 한니발이 로마군을 대상으로 활용했던 적이 있다. 전령이 생포되고 계획이 누설됨으로서 패하기는 했지만. 26
페르시아 다리우스왕은 2차원정을 계획했지만 이집트의 반란진압이 우선이었다. 아들 크레르크세스가 유지를 이어 이집트를 진압하고 대군을 구성했다. 보병180만, 기병10만, 해군50만, 함선1200척에 달하니 1차의 100배가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대군의 원정은 보급이 가장 큰 약점이 된다. 그래서 그리스의 연합군은 산과 바다로 좁은 지역을 이루는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군을 주축으로 지연전에 나선다. 영화 300으로 유명한 이 싸움은 페르시아군 2만명이 산길을 우회하여 협공하는 바람에 그리스가 패배했지만, 해전에서 승부가 다시 엇갈린다. 32
3일간의 지연으로 시간을 번 그리스는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스파르타는 진격하는 대군에 맞서 다시 지협인 코린토스에 성벽을 쌓고 펠로폰소스와 연합하여 방어하려 했고 아테네는 지역적으로 떨어져있었기에 섬으로 피신하여 육지를 포기하고 광산수입을 배분하지 않고 전쟁에 대비해 함선을 건조해두었기에 이를 활용하여 바다에서 싸우기로 했다. 향해술은 페르시아 해균의 주력인 페키니아인이 우위였다. 하지만 급조된 아테네 해군은 안마당이었기에 지리에 강했다. 페르시아는 빨리 전쟁을 끝내야 했고 이는 아테네가 적은 전력에 유리한 좁은 해협인 살라미스에서 싸울 수있게 도왔다. 37
아테네의 해전승리로 페르시아는 퇴각했고 여기에 더 이상 관련되고 싶지 않았던 스파르타는 동맹에서 탈퇴했다. 그래서 아테네가 중심이 되어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고 페르시아를 몰아내면서 얻은 협력은 무역으로 연결되어 아테네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초기에는 현명한 페리클레스가 동맹을 이끌었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그가 사망한후에는 선동정치가에 의해 포퓰리즘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스파르타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장기간의 전쟁시 시작되었는데 스파르타는 강력한 육군으로 아테네 주위를 공격했고 아테네도 해군으로 괴롭혔다.
결국 사라쿠사의 재물에 욕심이 났던 아테네 시민들은 원정을 주장하는 알키비아데스와 전쟁의 위험을 막자는 니키아스중 이익에 현혹되어 정벌에 나서서 4만명중 3만명이상이 전사하여 스파르타가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패권을 잡았지만 이오니아지방을 지키지 못해 페르시아가 다시 접수했고 결국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한다. 생각해보면 자신보다 나라를 생각했던 염파와 같은 현명함이 없었던 것이다. 단기적인 승리보다 장기적인 이익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 아테네는 물론 스파르타의 운명을 바꾸게 된 셈이다. 41
인간은 씨를 뿌리는 것이 목적인 생물의 일원이다. 문명이후 다른 점은 축적이 가능해졌기에 단순히 씨를 뿌리고 이를 위해 생존하는데 필요한 이상의 사치를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먹이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의 상하한이 있지만 사치는 그렇지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절제된 삶은 행복의 필수조건인데 이는 무리한 것을 원하거나 얻기위해 노력하지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절제된 삶에 필요한 의식주를 추구하는 것은 생존에 필수고 이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삶을 살 수있게 해준다. 뇌물을 거부하고 가진 것을 나눌 수있게 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전투방식은 대부분이 알고 있고 적용한다. 그래서 같은 전술을 활용하는 전쟁에서는 자원이 승패를 가리게 된다. 그래서 자원이 부족한 쪽은 관행을 깨는 것이 그나마 승리할 가능성을 가지게 한다. 전쟁은 미리 이겨놓고 확인하는 과정이어야 하지만 침략을 당하는 등 피치못하게 싸워야 하는 경우는 손자가 주장하듯 허를 찔러야 한다.레욱트라 전투는 1만명의 스파르타와 6천에 불과한 병력을 가진 테베의 싸움이었고 당연해 보였던 스파르타의 승리는 관행적인 집단방진전투를 개선한 테베레로 좌절되고 몰락의 길로 내려간다.
집단방진은 중보병이 10겹으로 구성하고 정예를 우측에 배치하기에 비슷한 전력을 가지 부대가 싸우면 당연히 반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싸운다. 테베는 병력이 절반수준이므로 정예를 좌측에 배치하고 50겹으로 구성하여 좌측우선인 사선으로 접근했다. 어차피 싸움은 지역적인 우위로 결정되므로 적의 주력인 10겹을 5배에 해당하는 주력으로 돌파하는 방법을 사용했고 이는 당연히 성공했다. 전체 병력은 50%였지만 적어도 좌측에서는 5배였기에 좌측에서 승리했고 이는 전체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믿었던 주력이 괘멸되었기 때문이다.
좌측의 주력은 주로 동성애자로 구성했는데 고대 희랍시대에는 그들이 장년의 소크라테스와 청년들과 같이 멘토와 멘티관계이기도 해서 서로 목숨을 걸고 보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단방진은 검술보다 먼저 방패로 밀고 틈이 보이면 칼을 사용하는 방식이어서 10겹과 50겹의 물리적차이는 절대적이었고 밀리던 스파르타주력은 방패사이의 틈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왕을 포함하여 천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해야 했다. 46
한니발은 강력한 기병을 활용하여 로마보병을 무력화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약점은 보급로가 긴 원정군이라는 것을 간파한 파비우스는 적은 병력으로 가능한 방어에 치중하며 지연전술을 사용했고 다음해 집정관선거에 패배하여 물러났다. 새 집정관은 대군을 편성해 한니발과 정면대결하지만 역시 참패하여 로마는 위기에 빠진다. 결국 다시 집정관이 된 파비우스가 지연전술을 다시 활용하여 카르타고는 결국 멸망에 이른다. 60
스키피오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한니발의 근거지였던 에스파냐를 점령하고 카르타고로 진격하자 한니발은 본국방어를 위해 귀국해야 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강점이 기병이라는 것을 알았던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기병의 주축이었던 누미비아와 동맹을 맺고 한니발보다 강한 기병을 구성했다. 로마는 보병3만에 기병6천이었고 카르타고는 보병4만에 기병4천에 적의 전열을 흐트리는 목적의 코끼리가 80마리였다. 코끼리의 돌진으로 시작된 전투는 한니발의 전술을 이해하던 스키피오에 의해 코끼리에게 길을 내줌으로써 싱겁게 시작되었고 기병우세를 활용하여 승리를 굳히게 되었다. 사실 패인의 본질적인 이유는 국가에 있었다. 해상을 장악하고 경제적 번성을 즐기면서 다투곤 했던 카르타고는 국가에 일치된 힘을 보내주던 로마와의 전쟁에서 지게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65
전국시대말기에 최강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나머지 6국이 합종책을 구사하여 함곡관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고 진나라는 원교근공의 연횡책으로 먼 나라와는 화친하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선 가까운 한과 위를 공격했는데 한나라는 남쪽은 흡수했지만 북쪽은 조나라가 차지하게 되어 조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3년후 장평대전으로 두나라간의 전쟁이 시작되는데, 진의 왕홀이 진격을 개시했고 조나라의 염파가 이를 막았다. 진나라는 대규모 병력이어서 병참이 약점이어서 염파는 지연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방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나라의 효성왕이 젊은 조괄로 늙은 염파를 교체했다. 왕은 공격을 명했지만 노련한 염파는 최선이라고 생각한 기존의 전략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조왕은 25만의 장병을 징집해 조괄이 염파의 군사 20만을 인수하여 대규모 공격을 시작하게 한 것이다. 결국 거짓 후퇴와 매복으로 포위당한 조의 대군은 한달이 지나자 물과 식량이 떨어지고 조괄도 전사했다. 사령관이 죽자 40만명의 조군이 항복했지만, 초군은 모두 생매장했고 조나라는 남자의 씨가 말라 멸망하게 되었다. 96
위나라 방연이 한나라를 침공했고 한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제나라 손빈은 우선 위나라의 수도로 진격하여 방연이 철군하도록 하여 한나라를 구원했고 병력의 열세를 고려해서 위장 후퇴와 줄어드는 밥솥수로 동문수학했던 방연이 겁먹은 탈영자의 증가로 병력수가 준다고 자만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험로를 선점하는 효과도 노렸다. 결국 속은 방연은 진군속도를 높혔고 부대는 둘로 나뉘게 되었고 병력이 줄어든 상태에서 험로에 매복했던 손빈이 방연을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결국 전쟁은 다 이겨놓고 하는 것이다. 99
한신의 배수진은 퇴로가 없다는 점에서 훈련되지않고 아직 충성심이 없던 한군이 수세에 몰리면 탈영할 가능성이 높았을 경우에는 나름 합리적이다. 더우기 병력의 열세와 보급선의 길이가 길었던 상황에서 좋은 장소를 선점하여 장기전에 유리한 조군과 빠른 결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전략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한신은 미리 일부를 붉은 기를 줘 조군의 진지인근에 매복시키고 조군이 총공격에 나서면 바로 진지를 인수하여 기를 게양하도록 했다. 퇴로가 없어 결사적으로 항전했던 한군때문에 진지로 돌아오던 조군은 붉은기를 보고 도주하기에 바빴고 승리는 한신이 거둔 전략에 주어졌다. 105
흉노의 묵돌은 선우의 장자였다. 하지만 새엄마가 아들을 낳자 선우는 묵돌대신 새아들을 후계자로 임명하고 그는 인접국에 볼모로 보내지는 신세가되었다. 더우기 선우는 그 나라를 공격함으로서 묵돌은 죽을 위기에 놓였지만 다행히 탈주에 성공했고 귀국한 그는 선우와 새엄마를 죽이고 새로운 선우가 되었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명적이었다. 명적은 화살촉을 대체하여 공기의 저항으로 소리를 내며 주로 돌격신호로 사용되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무조건 명적소리를 향해 화살을 쏘라고 지시했고 이에 따르지 않으면 죽였다. 첫 시험은 그가 아끼는 명마였고, 다음은 애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우가 아끼는 명마였다. 모든 부하가 선우의 명마에 화살을 쏘는 것을 본 그는 선우와 사냥을 나가게 되자 선우에게 명적을 날렸고 모든 부하들이 선우를 고슴도치로 만들어 죽였다. 우선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르는 경우는 언제 어떻게를 자신이 결정해서 공격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서는 희생해야 한다. 묵돌도 아끼는 명마와 애첩의 목숨을 포기했다. 스스로 살기위해서. 110
테무친은 동족에게 쫒겨나 초원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했다. 초원은 척박한 땅이고 사람들은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기위해 서로 죽이고 빼았곤 했다. 결혼을 위해서 여자를 납치하는 것도 일반적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은후 배다른 형이 어머니를 첩으로 만드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의 형도 가장으로서 아버지의 첩인 그의 생모를 첩으로 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그는 약했지만 동생과 같이 화살로 형을 쏘아죽인다. 그는 전투에 패해 먹을 것이라고는 호수의 흑탕물뿐인 발주나 호수가에서 남은 19명과 발주나 맹약을 맺고 징기스칸이 된다. 그 19명중 몽고인은 소수였고 출신보다 능력으로 인재를 기용하는 기본 원리가 된다. 153
몽골을 평정한 징기스칸군은 비단길을 따라 서쪽으로 영역을 확장한다. 지역지형과 민심을 조사하면서 천천히 진격하던 그들은 조지아군과 조우한다. 몽골군은 이기기위해 싸우지만 조지아군은 멋을 내기위한다는 것을 파악한 그들은 치고 빠지는 전술을 통해 중무장해서 쫒다가 힘이 빠진 상태를 활용하여 포위하고 화살로 몰살시킨다. 이후 조지아기병의 귀족은 거의 죽고 몽골군의 병력을 공급하게 된다. 루시연합군은 8만명으로 몽골군의 4배에 해당했다. 그들은 정면대결을 피하고 천천히 미리 조사한 지역으로 후퇴하면서 후위에 궁병을 보내 꾸준히 괴롭혔다.
선두 기병과 후위 보병이 이격되었을 때 그들은 좁은 험로에서 반격을 시도했고 결국 수의 우위효과를 낼 수없었던 루시기병이 몽골군의 집중적인 화살공격으로 후퇴하게 되자 후위보병과 섞여서 자멸하게 되었다. 162 쿠빌라이는 징기스칸의 후계자로 동생이 즉위하자 목숨의 위험을 느끼고 자신이 관할하던 북중국에서 지지자를 규합하여 스스로 칸에 즉위한다. 군사력은 몽골의 동생이 우세했지만, 그는 몽골의 경제적 배후가되는 북중국이 있었다. 우선 징기스칸의 동생들과 남송과 제휴하여 동생의 세력과 배후의 위협을 줄이고 몽골로의 경제지원을 중단했다.
고려도 몽골에 40년간이나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조보존이 가능했던 이유는 쿠빌라이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원래 몽골 공주는 몽골인과만 결혼했지만, 쿠빌라이가 고려만은 예외로 해서 자신의 딸을 충렬왕에게 시집보내 부마국으로 인정했다. 166 칸이 된후 남송정벌은 다음 수순이었다. 경제력과 문화에 뛰어난 남송은 다른 방법이 필요했는데 장기전과 뛰어난 무기로 최고의 적장을 귀순시키는 것이었다. 우선 최강의 장수 여문환이 지키고 있는 형주로 가서 100키로에 걸쳐 토성으로 포위했다. 그리고 남송지원군을 물리치면서 5년간 형주성과 토성사이에서 교역을 벌여 식량공급을 했다.
마지막은 일한국에서 초청한 기술자가 개발한 투석기로 80키로의 돌로 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도저히 더 버틸 수없다고 느낀 여문환은 투항했고 이를 극진히 대우하자 그는 남송정벌의 선봉장이 된다. 많은 남송의 장수들이 저항하지않고 투항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71 조선초에 왜구토벌에 성공하자 대신 택한 것이 다소 멀지만 허술하고 오히려 물자는 풍부한 상해였다. 상해를 지키는 병사는 많았지만 내전으로 단련된 사무리이검법을 대항하기는 무리였다. 밀집진을 치고 싸웠지만 중간에 뛰어들어 양손으로 힘차고 정확하게 자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약탈을 당하던 주민들이 중앙정부에 호소했고 산동출신의 장수 척계광이 부임한다. 그도 초기에는 똑같이 당했다. 그래서 방법을 바꾸기로 한다. 우선 기존 군대를 해산하고 시골출신으로 새로 모집했다. 아는 것이 없었기에 새로운 훈련에 잘 따랐다. 그가 고안한 진은 원앙진인데 수컷이 죽으면 암컷도 따라죽는다고 믿는 새였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다만 수컷이 암컷보다 훨씬 많기에 교미기에는 수컷의 깃털이 화려해지고 암컷은 가장 화려한 수컷을 골라 교미하나 홀로 새끼를 키운다.
조류의 90%가 일부일처제이지만 원앙은 교미가 끝나면 즉시 다른 암컷과 다시 교미하는 일부다처제다. 오히려 여색을 밝히는 것으로 알려진 늑대는 일부일처를 고수하고 암컷이 죽는 경우가 아니면 다른 암컷과 교미하지 않는다. 늑대왕 로보도 암컷때문에 죽음에 이를 정도였다. 또한 무리의 대장만 번식한다. 번식을 원하는 수컷은 따로 무리를 만들어야 한다. 어쨌든 원앙진법은 기존 밀집진법이 중대규모였으나 분대규모로 대장과 취사병에 10명의 대원이 함께하는 구조여서 개인적으로 싸우는 왜구에 적합하다.
주로 혼자 공격하는 왜구를 우선 새로 만든 가벼운 등나무로 만든 방패를 가지고 방패병이 저지하고, 낭선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대나무에 칼을 매달아 만들어 낭선병이 일본도의 움직임을 둔화시킨후, 긴창을 가진 병사와 새로 만든 삼지창형태의 당파를 가지고 왜구를 제압했다. 1대1의 대결에서는 무술에 능한 왜구가 유리했지만 12대1의 경우는 12명의 팀웍이 이루어지는 경우 왜구혼자 이길수없다. 그래서 도망친 병사는 용서하지 않았고 대장이 사망한 경우는 분대전체를 처형하기도 했다. 이는 임진왜란때 지원하러 왔던 명군에 의해 조선군에 전수되기도 했다. 176
명나라는 조공무역을 했다. 주변국을 제후국으로 지정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는 대신 후한 하사품을 내려주는 형태로 권위를 위해 무역적자를 보는 구조였다. 그런데 그 규모가 커지면서 적자감당이 힘들어지자 규모를 축소했고 결국 말을 보내고 식량을 받아 생존해왔던 몽골은 전쟁외의 선택지가 없게되었다. 영종은 환관이 권한대로 친정을 했고 유방이 당했던 대로 몽골에게 유리한 초원에서 대패하고 포위된다. 건조지역에서 일주일정도 포위되자 근위병이 환관을 살해했고 황제는 포로가 되었다. 더 우수운 것은 몸값을 달라는 몽골의 요구에 조정은 새황제를 세우고 거부했다. 몽골은 북경을 포위했지만 초원과는 달랐기에 그냥 주변을 약탈한후 영종을 풀어주고 퇴각했다. 180
수양제는 백만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한다. 대군의 단점은 병참이고 특히 공격하는 경우 병참선이 길어져 더욱 취약하다. 요동성은 중과부적으로 함락되었지만 다른 성은 싸우지않고 농성함으로서 수나라의 발을 묶었다. 결국 수양제는 우문술에게 30만명을 지휘해 수도를 공격하게 한다. 당시 100일치의 식량을 개인별로 지급했다고 하니 현재 국제연합의 하루 권장량 600그램으로 계산하면 60키로나 된다. 결국 많은 병사가 행군중에 땅에 파뭍게 되었다.
을지문덕은 이를 간파하고 전면전보다 청야전술을 사용했다. 길목의 백성을 요새로 가축이나 식량과 같이 이주시킨 것이다. 추가로 우물을 매우고 농가와 마초를 불태워 아무 것도 활용하지 못하게했다. 그러니 수도에 가까에 접근했을 때는 식량이 떨어져 진퇴양난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항복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려서 우문술이 퇴각하도록 했다. 그다음 살수대첩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손자병법에도 현지 도달한 식량은 20배의 가치가 있다고 하며 유목민은 청야전술의 대가이기도 하다. 185
단 12척의 배가 남은 상태의 명량대첩에서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것은 다른 대안이 없는 방안이다. 일본수군이 보급품 수송을 위해 남해에서 서해로 올라가려면 거쳐야 하는 길목인 진도인근의 명량은 좁은 해협으로 물살속도가 국내에서 가장 빠른 12노트에 이르는데 조선수군의 노를 저어 내는 속도인 3노트의 4배에 이른다. 가장 속도가 커지는 때는 조수간만의 차가 큰 음력보름과 그뭄이고 하루 두번의 밀물과 썰물이 있어 조류의 방향과 속도가 바뀐다.
서쪽방향으로 흐르는 조류를 타고 순항하던 일본 수군은 율돌목에서 조선 수군을 만나 함포사격과 불화살, 그리고 조총으로 해전을 시작한다. 일부 타격이 있었지만 수적인 우세로 밀어붙였고 이를 무서워하여 뒤에 처져있는 부하를 독려하며 이순신장군은 홀로 물살이 바뀔 때까지 20여척을 박살내며 버텼다. 그리고 조류가 동쪽으로 바뀌자, 지역정보가 없었던 일본 수군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대열이 흐트러졌고 이를 틈타 이순신은 총공격을 지시해서 130척이상의 배를 격침시켰다. 189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당시 일본정부 1년 예산의 4배에 해당하는 배상금으로 군비확장 10개년 계획을 추진하여 군사강국으로 도약한 계기는 일본보다 청에 원인이 있었다. 군수예산을 서태후의 환갑잔치를 위한 이화원건축용으로 전용하고 지지기반유지를 위해 이홍장이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했기 때문이다. 청군의 부패와 낮은 사기, 그리고 훈련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반대로 일본은 세계정세를 읽고 유학생을 보내는 등 선진문물의 도입에 적극적이었으니 결과는 명약관화다. 198
남북전쟁의 분수령이었던 게티스버그에서는 명령지휘통제가 아직인 상태에서 양군이 집결을 시작했다. 승부는 낮은 고지였지만 중요한 지형을 선점한 200여명의 메인출신 북군에 기인한다. 명령은 없어도 중요하다고 판단한 리틀 라운트탑을 선점하고 몇배의 남군의 공격을 방어하던 챔벌레인은 탄약이 떨어지자 기존의 방어전술을 포기하고 백병전으로 승부했다. 공격명령에 일제히 착검하고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가는 북군병사를 본 남군은 대열을 흐트리고 도망갔고 왼쪽 숲속에 매복해있던 북군의 일제 사격으로 두배가 넘는 4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245
손자병법에는 10배의 병력이면 포위, 5배는 공격, 2배는 분할하여 차례로 공격, 동등하면 최선을 다해 싸우고, 열등하면 도망치고 승산이 없으면 피하라고 구체적인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적은 병력이지만 높은 기동력으로 국지적인 병력우위를 만들어 승승장구했는데 기동력이 높았던 이유인 천막이나 취사도구를 현지 조달하는 방법을 모두 따라하면서 몰락하게 되었다.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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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3,000년 전쟁사에서 배우는 자기 경영 비책
1장 사람을 간파하라 / 고대 전쟁 편
[기회]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다 /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익] 기여할 만한 이익과 명분을 공유하라 / 트로이 전쟁
[판단] 무모해질 때를 조심하라 / 카데시 전투 [전략] 치밀한 전략은 열세도 뒤집는다 / 마라톤 전투
[전력] 결과에 상관없이 멈추지 않을 때도 있다 / 테르모필레 전투 [주도권] 내 구역에서 싸워라 / 살라미스 해전
[역량] 얻었다면 지키고 지키려면 대비하라 / 펠로폰네소스 전쟁 [혁신] 관행을 깨라 / 레욱트라 전투
[솔선수범] 움직이게 하려면 먼저 움직여라 / 이소스 전투 [계산] 손해를 보면서까지 이기지 마라 / 피로스의 승리
[판세] 상대가 원하는 싸움에 응하지 마라 / 제2차 포에니 전쟁 [학습] 좋은 것은 내 것으로 만든다 / 자마 전투
[임기응변] 위기 대처 능력이 진짜 실력이다 / 알레시아 공방전 [지휘 계통] 자신의 노하우로 이끌어라 / 파르살루스 전투
[행동] 경솔은 순간이지만 잘못은 평생 간다 / 카르헤 전투 [의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 악티움 해전 [역전] 지난날로 현재를 평가하지 마라 /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2장 상황을 지배하라 / 동북아 전쟁 편
[자만] 자신하는 순간을 경계하라 / 장평 전쟁 [지피지기] 적을 분석하라 / 마릉 전투
[배수진] 벼랑 끝에 서라 / 정형 전투 [목표] 원하는 것을 정조준하라 / 흉노 수장 묵돌선우의 패권
[후퇴] 자존심을 굽혀야 할 때를 알라 / 백등산 포위전 [패배] 한 가지만 얻으라면 마음이다 / 관도 전투
[환경 적응]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 / 적벽 대전 [내공] 규모에 상관없이 강해져라 / 이릉 전투
[통치력] 내부가 튼튼해야 무너지지 않는다 / 비수 대전 [협력] 파트너십을 구축하라 / 탈라스 전투
[분별력] 생각을 빼앗기면 나머지도 모두 빼앗긴다 / 고선지의 사망 [능력] 무능함은 얕은수로 덮이지 않는다 / 정강의 변
[결의] 위기에도 함께할 내 편을 만들어라 / 발주나 맹약 [정벌] 싸움은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 / 조지아 중세 기병의 몰락
[위장] 후퇴는 또 하나의 전략이다 / 칼가강 전투 [권력] 자신의 상황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 대칸 쿠빌라이
[인내] 시간을 질질 끌어라 / 양양 공방전 [방식] 새로운 문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하라 / 척계광의 왜구 척결
[위치] 부실한 리더십은 금방 탄로난다 / 토목보의 변 [혼란] 적이 알아서 지치게 하라 / 살수 대첩
[선점] 전략적 위치를 먼저 차지하라 / 명량 해전 [변화] 변화의 흐름에 주목하라 / 중가르 전쟁 [패권] 먼저 깃발을 꽂아라 / 청일 전쟁
3장 전략을 실현하라 / 서양 중세 이후 전쟁 편
[전의] 끝까지 가려면 지치지 않아야 한다 / 하틴 전투; [개성] 개인의 역량을 다하게 하라 / 모르가르텐 전투
[경쟁력] 한물간 방식을 고수하지 마라 / 크레시 전투 [일원화] 모두가 한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 / 만지케르트 전투
[허점] 쇠퇴할수록 허점이 많아진다 /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방비] 건설은 길지만 멸망은 짧다 / 잉카 제국의 몰락
[감각] 제대로 보고 곧바로 실천하라 / 툴롱 공략전 [상황] 상황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게릴라] 빠르게 치고 빠져라 / 스페인 전쟁 [고지] 요지를 선점해야 승기를 잡는다 / 게티즈버그 전투
[용인] 필요한 곳에 필요한 사람을 써라 / 칼레 해전 [자멸] 서서히 그러나 치명적으로 망가뜨려라 / 아편 전쟁
[타성] 이유 없이 하지 마라 / 발라크라바 전투 [계발] 어설프게 실천하기 전에 확실하게 이해하라 / 로이텐 전투
[심리] 자존심을 건드려라 / 보불 전쟁 [돌파] 아직 도전하지 않았을 뿐 못할 것은 없다 / 아카바 침투 작전
[투혼] 저지선을 지켜라 / 갈리폴리 전투 [리더십] 자신의 약점을 역이용하라 / 롬멜의 북아프리카 전역
[실력]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돼라 / 연합군의 이탈리아 진공 [저력] 실패는 옵션이 아니다 / 디엔비엔푸 전투
마치며 승리도 패배도 우리 모두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