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은 자리를 옮겨 레느리아나 사제의 방에 와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많이 변한 모습의 레니 사제를 대하고 있었다. 장난기 가득하던 소녀는 이제 대사제라는 직책에 걸맞은 성숙한 여성으로 변해 있었다.
"그럼 우리가 파라그레이드에 머물던 사이, 대륙의 시간이 자그마치 10년이나 흘렀다는 말씀입니까?"
윤기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윤기의 표정을 상당히 심각했다. 레니 사제 역시 표정이 밝지 못했다.
"시간상으로는 확실히 지금은 카오스 력 9949년 겨울입니다. 아마도 파라그레이드의 영향으로 시간의 균형이 깨어진 것은 아닐지."
"...아니면 시공을 관리하는 파이란 여신의 뜻일지도 모르고."
윤기가 중얼거렸다. 레니 사제는 윤기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파이란 님을 만나셨다는?!"
윤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 사제는 찻잔을 든 체 한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레니 사제를 깨운 것은 화민이었다.
"아까 성기사의 태도를 보니 우리는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10년 전... 모나드 시에서 모습을 감춘 것이 아마 역사가 알고 있는 마지막 기록일 것입니다. 그 동안 당신들에 대해서 많은 소문이 있었습니다. 파라그레이드 너머 어딘가에 새로운 나라를 새웠을 거라는 말도 있었고, 모나드리우스 산맥 어딘가에 은둔했을 거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파라그레이드로 들어가서 죽었다는 말도 있었고요. 당신들의 대한 소문은 워낙 종류가 많아 뭐라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거의 모든 사람이 당신들을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다만 전하께서만은 당신들은 절대로 쉽게 죽지 않았을 거라고 언제나 말씀하셨습니다."
레니 사제의 말에 일행들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졌다.
"주, 죽었다고?"
현진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쩌면... 정말 죽을 뻔했었지만."
광채가 파라그레이드에서 가디언들과의 전투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천 단위를 가볍게 넘기는 수많은 언데드들이 광채의 눈앞에 그려졌다.
"그런데... 아까 전부터 '교황'이나 '전하'라는 말을 자주 하시는 듯한데요."
우영이 레니 사제에게 물었다. 레니 사제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두 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참,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군요. 세리스 선생님께서는 이제 파이란 교단의 교황 전하이십니다."
"그렇군요. 그 분이라면..."
윤기는 레니 사제의 말을 듣고 잠시 재광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그의 어머니였다. 그러나 아직 재광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딱딱히 굳은 무표정이었다. 세르니우스의 이야기가 나온 탓인지 잠시 일행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동안 대륙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선 그 것부터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수민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며 레니 사제에게 질문을 던졌다. 레니 사제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우선은 혁명 이후 사람들은 사제들을 비롯한 몇 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푸름식 이름을 계명 했습니다. 반대도 많았지만 '성姓' 이라는 것에 한 맺힌 이들이 많았던 탓에... 그렇다고 귀족의 방식을 따를 수 없다하여 그렇게 결론지어졌지요. 특별한 제약은 없지만 요즘은 푸름식 이름이라는 말보다 왕국식 이름이라는 말을 더욱 많이 씁니다. 한 동안 혁명 세력 중 소수 귀족 일파가 가문의 성씨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이 많기도 했었지요. 이 이름의 문제는 단순한 신경전이 아니라 결국 혁명 세력 간에 귀족 일파와 평민, 천민 일파로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과거 마로드 제국이었던 마로드리안 공화국은 사분 오열로 분열되었고 바일론 공화국은 또 한 번의 전쟁을 거친 끝에 귀족 일파의 수장인 유크리트 남작이 통령이 되었습니다. 이 혼란기에 음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카르테우스의 교단이 들고 일어나게 되었지요. '종교에 더 이상 국가가 관여치 않는다.' 라는 유크리트 남작, 아니 안태성 통령도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 여러분이 아스테르와 전투로 만들어 놓은 '피의 계곡'에 본거지를 만들고 카오스의 성역인 '카이저'를 공격했습니다. 또한 다른 교도들을 보기만 한 번 칼부림을 하는 카르테우스 교도들 탓에 오히려 과거와는 반대로 카오스나 파이란의 신도들이 음지로 숨어드는 형편이지요."
"복잡하군."
레니 사제가 잠시 차를 들이키는 사이, 화민이 중얼거렸다. 대륙은 10년 동안 급박한 변동을 겪어온 것이다.
"... 귀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윤기가 레니 사제에게 물었다. 레니 사제의 표정이 잠시 어두어졌다.
"혁명 이후 가장 끔찍했던 사건이 떠오르는군요. 사람들은 이번 혁명을 '피의 겨울의 대혁명'이라고 합니다. 흔히 '피의 겨울' 이라고 하지요. 혁명 세력을 제외한 모든 귀족들은, 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아기까지 처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심지어 빛의 본당인 이 곳 세르바즈로 피신해 온 사람들까지... 신성불가침이란 이제 옛날에나 먹히던 말이지요. 성기사들이 외부인에 대해 날카롭게 변한 이유도 그런 것입니다. 제가 돌보던 한 어린 남매는 제가 보는 앞에서 혁명군에게 처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변하셨군요."
지인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레니 사제는 잠시 고개를 떨구고 침묵했다. 그 때였다.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방 밖에서 울려왔다.
"교, 교황 전하! 그렇게 뛰시는 것은...!"
"저, 전하!"
밖에서는 사제들의 놀란 음성이 들려왔고 이어 레니 사제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 곳에는 이제 노인된 한 여성이 일행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의 눈길이 일행들 하나 하나를 지나쳐가며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오랜만이군요. 여러분."
교황 세르니우스와 이들의 만남을 시작으로 그들의 이름이 다시 역사 속에 기록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긴 시간이 떨어뜨려 놓았던 한 모자가 재회하려한다. 재광의 시선은 교황 세르니우스에게 꽂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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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게으른 사람이라 항상 글이 늦군요.
잠깐 사이에 주인공들을 열 살이나 먹여버리는 사악한 글쓴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대략 33~34 정도가 되었군요. 정확한 것은 파트1부터 다시 찾아서 계산해봐야 알겠군요. 좀 헷갈려서 말이죠.
어찌 되었든 노총각, 노처녀가 된 주인공들은 이제 다시 세상으로 나서게 될 겁니다. 이제는 귀족도 아니고 믿을 건 '장난 아닌' 능력들과 '친구' 뿐이겠지요. 아마 마족들과 이해 관계나 카르테우스 교단과의 혈투, 그리고 다시 찾아오는 파라그레이드 가디언들로 조금은 복잡하게 전개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목적은 카르테우스 때려잡기라는 거죠. 그럼 다음 이야기를 기다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