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상영관에서 볼 수 있는 접이식 의자가 객차 양쪽에 있고 가운데는 일반 기차좌석 모양의 것들이 배치되어 있다.
문은 지하철의 출입문과 같다.
물론, 안전 손잡이도 있다.
지하철을 탄 기분마저 든다.
남창으로 향했던 것은 진하해수욕장을 보기 위함이다.
15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스무살이 머물렀던 곳에 추억의 발걸음을 놓아보았다.
남창역...
조그맣고 아기자기한 철도역은 객지로 나온 행자의 마음을 일단 다스려주는데 그만이다.
역의 앞 큰길따라 도로가 나있고, 그 도로 위로는 "돌다방" 아가씨가 스쿠터를 타고 커피 배달을 간다.
"돌다방" ...
이쯤되면 생각나는 박영희 시인의 "곰소 잔디 다방"
[곰소 잔디 다방]
- 박영희 -
채석강 다녀오다 언 몸 녹이고 싶거든
곰소에나 한 번 들러 보게
그 곳에 가면 터미널 건너편에
다방 하나가 육십 년대 풍경을 하고 있나니
자네가 들어서면 아마
제대로 삭은 조개젓 마담이
얼른 커피 한잔 끓여 내주고는
프라이팬에 안주 볶느라 분주할 걸세
고만고만한 동네 여자들 죄다 불러 놓고
주방 옆 테이블에 제멋대로 둘러앉아
소주잔 기울여 가며 화투장 넘기고 있는 걸 보노라면
자네도 시커먼 커피 내치고
꼽사리 끼고 싶어 안달일 걸세
그래도 조심하게나
그 풍경에 넋이 나가 버스 놓친 사람 한둘 아니거든
아, 그리고 잊지 말게나
여기저기 구멍난 소파가 자네에게
뭐라고뭐라고 수작을 부려 올 텐데
그러거든 못 이기는 척 슬쩍 한 번 물어는 보게나
하룻밤 묵어 갈 여인숙이 어디 없겠느냐고
싱싱하진 않지만 곰소에는
갯바람에 곰삭은 조기새끼가 제법이거든
마침 점심때가 되었으니 배를 채워야 추억도 살맛이 날 터...
간이역 앞 한적한 도로 양옆으로 몇개의 다방이 있고, 스쿠터를 타고 커피 배달하는 다방아가씨, 약국, 작은우체국, 농협...
영락없는 어느 읍내의 풍광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나는 오랜만에 읍내에 나온 시골총각이 되어 짜장면을 한그릇 시켜 먹어야 어울리는 점심이 될 듯 하다.
역시...
짱께는 영원하리...!!!
짜장트림에 이어 "식후불연초 자손만대 고자손"이라는 강한 경고메세지를 떠올리며 한대 피워문다.
고자를 낳지 않으려면 한대 빨아죠야지...
진하해수욕장으로 향하기 전에 잠시 발길을 샛길로 빼본다...넌지시...
이런 곳에 오면 걷기를 좋아한다.
우연히 만나야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상품가치들보다 자연스레 그 곳이 그 곳임을 알게 해주는 풍경들이 있다.
그러한 것들은 너무도 평범하여 따로이 소개된 바도 없고, 그런 가치도 없지만
행자의 마음속 꽉찬 긴장감을 풀어주는 것들은 오히려 그러한 배경 속에 담겨진 잠언적 메세지들이다.
택시를 타고, 오늘의 목적지 진하해수욕장에 닿는다.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 했던가...
15년의 세월담장을 목빼꼼 빼내밀고 쳐다보니 내 스무살이 저기 해변을 뛰고 있다.
해변 백사장 모래알마다 섞여있는 15년 전의 시간들이 바람소리에 일어나고 있던 것이다.
마치 삼류소설의 서두같은 추억의 첫장을 열었다.
그래, 추억은 차라리 삼류소설같은 통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좋다.
약간은 유치하게...
내가 상주하는 지역을 벗어난 어느 곳에서 내가 머물렀던 시간들을 꺼집어 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다른 세상에 놓여진 기분도 든다.
따뜻한 겨울햇살...
이 아이러니한 문구를 거침없이 쓸 수 있도록 날씨는 상당한 배려를 해놓았다.
15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해변 이끝에서 저끝까지 한번 뛰어볼까 ?
미친 짓이겠지...
백사장은 15년 전보다 좁아보였다.
세월의 풍화작용인가...나는 또 얼마나 풍화되고 부식되었을까...
충분한 넓이의 마음이 깎여 나갔을테지...세월을 탓하면서...
아주 긴...무시못할 길이의 끝과 끝을 횡단했다.
흡사 15년의 시간길이를 걸어간 듯도 하다.
해변 가까운 곳에 섬이 하나 있다. 딸린 조그만 섬도 하나 있고...
스무살의 기억에는 없던 것이었다.
그때는 "섬"을 볼 시각이 열려있지 않았을 때여서인가...
아니면, 기억의 퇴색이 낳은 생경함인가...
돌아오는 길에 남창에 사는 진이네에 들렀다.
내 강아지...^^
인어공주 십자수 완성한 것을 펼쳐보이며 뿌듯해 한다.
오빠 눈에 잘보이라고 발뒤꿈치를 돋우어 들고 작품을 벽에 붙여 보여주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귀여운 녀석...
커피 한잔 마시며 넷마블에서 고스톱쳐서 사이버머니 다잃고 파산났다는 진이의 무용담같은 이야기를 간식으로 먹었다.
(앗, 이건 발설하지 말라고 했던 이야기였던가...!)
퇴근한 황서방과 진이의 대접에 맛있는 감자탕에 소주 일잔했다.
본시 비번날 여행후에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그전날 야근의 충격이 예사롭지 않게 밀려옴도 있고, 몸도 예전같지 않아서...^^)
하지만, 황서방이 권하는 술이라면 눈이 빨개져도 일잔 걸치고 싶다.
세상에는 분명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내가 세상은 아름답다고 뼈속에 간직하기 시작한 것은 스물한살 때였다.
그때는 머리속에 횡횡한 바람만이 불때였는데,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내 곁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남아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아직도 난 세상은 아름답다는 것에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세상"이란 단어를 협소한 인간군상 범주로 국한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돌아오는 통일호 열차 안...
나는 예전의 비둘기호를 생각한다.
레일 위를 달리던 내 기꺼운 시간들...
시간틈이 벌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게 잡아준 과묵한 나의 침목들도...
[간이역]
- 김세현 -
자네 수성못을 아는가 허허로이 둑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오동
나무에 걸린 듯 왼통 붉은 얼굴로 담배만 뻑뻑 빨고 있는 늙은
기차를 볼 걸세 그 곳 간이역에 내려 본 일이 있는가 요즘은
배롱나무 꽃도 만발해서 쓸쓸하기는 덜할 거야 가끔 늦은 시간에
소나기가 왁자지껄 와서는 늙은 기차의 분통을 식혀 주고 가기도
하지 적막할 때 나는 그림자를 데리고 가서 한잔 술 털어 넣고
세월을 잘못 건너 폐인이 된 어떤 사내를 떠올리곤 한다네 아까운
인재였는데 태양의 빛살을 잘못 맞아 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지
높이 나는 게 자랑이 될 수 없다는 걸 그는 내게 가르쳐 주었지
후줄근한 삶의 길목에 내린 간이역에서 자네와 만나 무중력의 상태
가 되도록 술잔을 높이 던지고 싶으이 고향처럼 아늑한 향수를 강이
되도록 퍼 담고 싶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