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골적인 계급 편향성이 근본적 원인
헌법 개정 포함, 새로운 청사진 내놔야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좋은세상연구소 대표
20대 청년 시절에 읽었던 프리초프 카프라의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은 나에게 개안의 희열을 안겨준 책 중 하나였다. 근대 서구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개인주의, 과학주의,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사회과학 방법론에 익숙했던 나에게 인간과 자연의 상호 연관관계, 그리고 지구 생명 전체의 작동을 총체적 관점에서 볼 것을 일깨워주었다. 동아시아의 근대 이전의 불교사상이나 전통의학에서는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생명체를 통합적으로 보는 사고의 전통이 있는데, 왜 우리는 이런 것을 잊어버리고 서양 물리학자의 눈으로 우리를 되돌아봐야 하는가 하는 안타까움도 가졌다.
그 이후 나는 소화가 잘 안돼 병원에 갈 때마다 카프라의 접근법을 생각했다. 이미 서양의학에서도 충분히 이론화되어 있지만, 소화가 잘 안되는 것은 위장만의 문제가 아니고, 위장은 심장, 폐, 그리고 뇌 등 모든 장기의 작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의식했다. 그래서 위장병을 위장약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몸 전체의 활력과 균형이 필요하다는 한의학과 카프라의 가르침대로 실천을 해왔다. 물론 몸의 어떤 부위에 외상을 입었을 때는 그 부위를 당장 외과적 방법으로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달려갔지만, 소화기능 저하 등 만성질환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온몸 전체의 정상화를 위해 시간을 할애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회의록 등 의대 증원의 근거자료를 두고 정부와 의료계가 연일 공방을 이어가는 가운데 13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이 환자, 내원객, 의료진으로 붐비고 있다. 2024.5.13. 연합뉴스
고차방정식 같은 사회문제, 우격다짐으로 풀 수 있나
사회학자로서 나는 사회유기체론자는 아니지만, 사회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유기체와 유사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체로서 접근해야만 어떤 부분이나 영역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제대로 된 처방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는 개인으로 구성되지만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 이상의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주로 경제적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인간은 경제적 동기 이상의 것, 소속감과 정체성 그리고 사회적 인정을 추구한다. 저출생 문제가 심각하니 출산 부부에게 1억을 주면 애를 낳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이나, 의대 증원이 시급하니 정부의 증원방침에 따르는 의대에게는 대폭 재정지원을 하겠다는 식의 정책으로는 이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경제문제도 그렇지만 사회문제는 극히 복잡한 여러 가지 변수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고차방정식이며, 정부의 방향이 올바르고 충분한 재정과 정치적 의지가 있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어떤 사회문제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회 전체의 작동과 연관되어 있으며, 단순히 개인들의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의 이데올로기, 경제적 조건, 여러 정책과 제도, 사회의식, 그리고 정당과 사회단체의 힘 등 극히 복합적인 조건과 변수의 누적적 결과다. 장차 의사 수가 절대 부족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대폭 의대 증원을 하려는 윤석열 정부의 정책이 난항에 빠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지방의료 서비스 확대를 명분으로 의대 정원을 늘려도 지방 의대생들은 결국 수도권으로 몰려올 것이고, 고교의 최상위권 학생들이 모두 의대를 지망해서 미래 우수 과학인력 공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즉 의사 증원이라는 정책 하나에 한국 의료체제 나아가 사회경제체제 전체 문제가 긴밀히 얽혀 있기 때문에, 사회정책의 제도화는 거의 10년 이상 공론장에서의 논쟁, 이해 충돌의 조정,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청사진이 결합되어야 할 사안이라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의대증원을 반대하는 의사들의 이기주의를 타박하는 것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시장주의 의료공급체제, 그리고 의사들의 높은 특권의식과 정면으로 맞서서 이길 수 있는 정부는 없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사회정책 접근법은 거의 검사가 범죄자 수사하는 방식의 원시적 수준에 가깝다. 저출생 문제가 장차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기에 빠트릴 것이라는 여론이 비등하자 윤석열 정부는 급기야 저출생부를 신설하고, 대통령실에 저출생 수석을 신설하겠다고 한다. 이런 접근법이 출생률을 높일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노골적인 계급 편향성이 역대 최악 사회 지표의 원인
지난 2년 동안 윤석열 정부의 각종 사회정책의 성과는 역대 최악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4분기 출생률은 0.65명으로 떨어져서 역대 최저기록을 갱신했다. 노동 부문은 더 심각하다. 지난 2년 동안의 최저임금 인상률은 역대 최저인 3%에 그쳤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은 증가했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격차는 확대되었다. 사교육비는 연 27조 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으며 학교폭력은 지난 10년 이래 최대 폭으로 증가했다. 자가주택 소유자 비율은 약간 늘었으나 청년들의 자가 보유율은 더욱 낮아졌다.
윤석열 정부 2년 동안 한국의 여러 사회 지표가 이렇게 최악을 기록한 것은 충분히 예상된 결과다. 윤석열 정부의 법인세, 종부세, 상속세, 양도소득세 감세조치로 2023년 한 해 동안 56조 원의 세수 결손이 발생했고, 이런 재정 결손은 거의 사회 전 분야의 지출 삭감으로 귀결되었다. 지난해 예산안 전체 감액 중 가장 비중이 큰 분야가 사회복지 분야였고, 그 중에서도 임대주택 지원에서 그 전 대비 5.6조 원이 삭감되었다. 윤석열 정부의 재정 축소와 작은 정부 기조는 시장지배적 사업가들에게 큰 선물을 안겨주었고, 공공 사회정책이 지향해야 할 빈곤층과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더욱 처참한 상태로 몰아넣었다.
사실 정당한 과세를 일종의 ‘징벌’이라고 말하는 윤석열 정부는 국가의 재정 운영에서 노골적인 계급 편향성을 갖고 있었다. 법과 공권력 집행에서도 그러한 기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화물연대 파업 진압, 노조 세무조사, 노란봉투법 거부권 행사, 그리고 중대재해법의 사용자 처벌 유예, 체불임금 사업장에 대한 관리와 감독의 방기 등으로 인해 노조의 대항력과 교섭력을 일방적으로 약화시켰고, 이런 노사 간의 힘의 불균형을 더욱 심화하는 법과 행정 조치로 인해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되고 빈곤층의 삶의 조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사교육비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청년 주거 빈곤이 더욱 악화되는 나라에서 어떻게 청년들이 결혼을 생각을 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결혼한 커플이 출산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젊은 부부들의 출산 의지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주거, 교육, 돌봄, 복지의 여건을 더욱 시장의존형으로 만들면서 저출생부를 신설하는 것은 일종의 면피용 아닌가? 자사고를 존치하고 사교육비를 잡겠다는 모순적인 태도도 그렇고, 의사 수를 늘려서 국민들의 의료서비스를 확대하겠다고 하면서 의료 상업화와 의료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모순적인 정책들도 모두 면피용이거나 사실상 기만적인 정책들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저출생·고령화 문제를 '국가적 비상사태'로 규정하고 부처 신설을 위한 입법에 국회의 적극적인 협력을 촉구했다. 사진은 10일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2024.5.10. 연합뉴스
총체적 난국 속 야당의 모습은 21대와 다를까? 같을까?
취임 2년 이후 지지율로는 역대 최저인 24%의 윤석열 대통령이 장차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기도 어렵지만, 정책을 집행하는 관료들의 동의와 협조를 얻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경제 안보뿐만 아니라 사회 여러 분야에서도 한국은 거의 총체적 난국에 처해 있다. 이대로 3년이 더 지나면 아예 국가가 기능 부재에 빠질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며칠 전 민주당의 박찬대 원내대표는 1가구 종합부동산세 폐지를 언급했다. 이것은 종부세가 부자들에 대한 징벌적 세금이라는 윤석열 정부나 여당인 국민의힘의 생각과 박자를 맞춘 발언이다. 그러나 종부세는 집부자들에게 벌을 주자는 세금이 아니다. 서울이나 대도시에서의 집값 상승은 개인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사회적 인프라 구축의 결과이며, 부동산 가격상승과 같은 불로소득은 세입자들의 주거권과 생존권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정의 수립의 차원에서 국가가 부과하는 것인데, 민주당이 그런 원칙을 접으려 한다.
민주당 원내대표의 이러한 발언은 기본적으로 집부자들을 달래서 다음 대선에서 승리하려는 선거공학적 고려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살 만하다. 물론 정당이 선거 승리를 언제나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권력을 넘겨준 것도 지난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민주당이 주로 선거만을 의식해서 부자 몸조심한 결과가 아니었던가? 지난 문재인 정부가 사회경제 분야에서 시도했던 약간의 개혁적 성과마저 이 정부 들어서 거의 원점으로 돌아간 이유는 바로 사회정책에 대한 기본 철학과 일관된 방향이 애매했기 때문이다. 박찬대 의원의 이번 발언은 또 한 번 거대 다수당이 된 민주당이 다시 지난 정부 방식으로 되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만든다.
사실 저출생, 주거, 교육, 노동권. 의료, 복지 등 사회정책의 여러 영역에서 민주당은 국민의힘과 뚜렷하게 차별적인 노선을 보여주지 않았으며, 약간의 개혁을 시도는 했으나 일관된 의지를 갖고 국민의힘을 설득하고 또 밀어붙이려 했는지도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특히 사회정책의 접근법에서 국민의힘과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예를 들어 총선 당시 민주당의 저출생 정책안을 보면 신혼부부 1억 원 대출, 돌봄 무상지원 등 경제적 지원이 대부분이다. 이런 유인책이 약간의 효과는 내겠지만, 문제의 근원을 피해가는 점에서는 국민의힘과 별로 다르지 않다. 거대 양당은 지금 한국의 출생률이 이렇게 낮은 것은 기혼자들의 출산 기피에 기인하기보다는 아예 결혼 자체가 불가능한 데서 기인한다는 점, ‘돈이 없어서’ ‘집이 없어서’ 결혼하지 못한다는 청년들의 고백과 전문가들의 진단을 외면한다.
답답한 정치현실, 그래도 기대할 건 야권 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는 아예 거론할 것도 없지만 민주당 역시 사회정책을 국가와 사회의 장기적 지속가능성, 특히 탈공업화, 에너지 위기, 디지털화, 초고령화의 거역할 수 없는 추세, 그리고 수도권 초과밀화, 사회 서비스의 과도한 시장 의존적인 구조 속에서 어떻게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구조적 제도적 차원을 구분해서 단계적으로 접근할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이 잘 안 보인다. 그래서 비록 12석이지만, ‘사회권 선진국을 만들겠다는 조국혁신당이 사회적 의제를 선점해서 22대 국회를 이끌어갔으면 하는 기대도 한다.
사실 5년 단임의 대통령제, 지역구 의원 중심의 의회 구성 자체가 이런 일관된 사회정책 수립과 그 관철을 위한 정치적 동원을 어렵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 개정을 포함한 정치개혁이 사회개혁의 선행 조건일지 모른다. 사실 지난 30여년 동안의 중요한 사회개혁은 정당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의제를 제기하고, 캠페인을 벌이고, 의원들을 압박해서 그나마 이 정도라도 온 것이다. 언제까지 정당은 여론 추이만 수동적으로 살필 것인가? 정책정당의 길은 아직도 요원한가?
어쨌든 윤석열 정부가 나라를 더 거덜내기 전에 야권은 사회정책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접근법을 취해서 제대로 성과를 내주기를 기대한다.
출처 : 거덜나기 일보 직전의 나라, 야권은 무얼 해야 하나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