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20~21 / 간절한 기대와 소망(2)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20) 내가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항상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높이기 원합니다.
(빌 1:21)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내게는 유익합니다.
다시 한번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구원에 이를 줄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구원은 좋은 길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로마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간절한 기도 제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감옥에서 나가야 좋은 길은 아닙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나오는 것도 좋은 것이고 감옥에 있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사는 것도 좋은 것이고 죽는 것도 유익한 것입니다.
어쨌든 바울은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반드시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을 따라서 부끄럽지 않은 것입니다.
소망에 부끄럽지 않은 삶은 소망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궁극적이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의 간절한 소망은 하나님 앞에 갈 때 부끄럽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면 갇히기를 원했고 죽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면 죽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삶에서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존귀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은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은 꼭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도 좋습니다.
살아서 그리스도를 높일 수 있다면 사는 것이 좋고 죽어서 그리스도를 높일 수 있다면 죽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깊은 내적인 소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은 감옥에 갇혀서 비방을 받아도 예수님이 이름이 전파될 때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내게는 유익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질 수만 있다면 자신은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내가 살아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할 수도 있지만 죽어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의 생사관은 자유롭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높아진다면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습니다.
사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살아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였습니다.
광풍에서 살리고 독사에서 살리고 돌에 맞았을 때 살림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감옥에서는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복음이 생명보다 가치 있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헤롯이 죽이려고 가두어놓은 상황에서 베드로를 처형하기 하루 전에 건져 주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예수님을 위해서 거꾸로 못 박혀 죽음으로 순교 당하는 많은 사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로마시대에 많은 크리스천이 순교의 피를 흘리는데 하나님은 구하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찬송을 부르면서 원형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갔습니다.
그들은 기쁘게 죽음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실히 있다는 것을 삶으로 증언하였습니다. 콜로세움에 앉아 있는 로마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이 살아서 전도한 것보다 죽어서 전도한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죽는 것도 복음을 위해서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천안교회에 교회 오빠로 통하는 이관희 집사가 있습니다.
그는 대장암이 걸리고 재발 되어 대장암 4기가 되었습니다. 그 아내 오현주 집사는 혈액암 4기였습니다. 교회 오빠 이관희 집사님이 붙잡고 산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는 기쁨으로 죽어갔습니다. 그가 어떻게 기쁨으로 죽을 수 있었을까요?
(빌 1:20) 내가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항상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빌 1:21)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죽는 것도 내게는 유익합니다.
이관희 집사는 천국을 실제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관희 집사는 크리스천이 이 정도일 수 있다고 크리스천의 신분을 높였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증언하여 주었습니다.
불신자가 그에 대한 다큐먼터리를 찍었습니다.
그는 영화 교회 오빠를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였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승리를 통해서 영화롭게 되지만 때로는 우리의 질병이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됩니다.
바울의 몸의 가시인 간질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내가 어떻게 되든지 그리스도가 높아지면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도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아진다면 죽어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