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 성을 시찰하는 느헤미야
느 2:11-20
11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12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13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더라
14 앞으로 나아가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서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15 그 밤에 시내를 따라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본 후에 돌아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 돌아왔으나
16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족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알리지 아니하다가
17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18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19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20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느 2:11-20 / [성벽재건의 준비]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나는 일단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감동시켜 깨닫게 하신 일과 내가 예루살렘 도성을 위하여 하기로 작정한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사흘을 지낸 다음, 직접 상황 파악에 나섰다 나는 밤중에 몇 사람만을 데리고 나귀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13) 우리는 한밤중에 서쪽의 힌놈 골짜기로 통하는 성문을 지나서 용의 우물이 있는 남쪽으로 갔다가 쓰레기를 쳐내는 동쪽 성문에까지 갔다. 이때에 나는 예루살렘 성벽이 얼마나 허물어져 있으며, 성문들이 얼마나 불에 탔는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14) 거기서 나는 북쪽으로 샘터가 있는 성문을 향하여 기다가 왕의 연못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서는 내가 탄 짐승이 더 이상 성벽을 따라 나아갈 수가 없었다. 15) 그래서 나는 골짜기를 타고 조금 더 올라가면서 성벽의 상태를 점검하였다. 그런 다음에 나는 오던 길로 되돌아와서 힌놈 골짜기의 성문을 지나 시내로 들어왔다. 16-17) 그러나 내가 밤중에 어디를 다녀왔으며,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 유다의 지도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그때까지는 어떤 유다인에게도 내 계획을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려줄 때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 계획을 실천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들로서, 제사장들과 예루살렘 도성의 지도자들과 귀인들과 유지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직접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의 처지는 지금 매우 비참합니다. 예루살렘이 쓰레기더미와 같이 되었고 성문도 모조리 불에 타서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성벽을 재건하여 이런 커다란 수치를 씻어 냅시다.' 18)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신 일과 바사 왕이 나에게 내려 준 특혜에 대해서도 그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그들이 모두 `어서 재건합시다' 하고 말하면서 힘을 내어 일하기 시작하였다. 19) 우리가 이렇게 성벽재건을 위하여 일을 시작하자, 사마리아 지방의 통치자인 호론 사람 산발랏과 그의 하수인으로 암몬 지역을 다스리던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그 소식을 듣고 우리를 멸시하며 조롱하였다. `너희가 정말 엄청난 일을 시작하였구나! 너희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는 너희가 임금님에게 반역이라도 하겠구나.' 20) 그러나 나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성공시켜 주실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분의 종된 백성으로서 이 성벽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이 도성 예루살렘은 너희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이곳에는 너희가 차지할 땅도 없고, 이 땅에 대하여 간섭할 권리도 너희에게는 없다. 너희는 이 도성에 아무 공로가 없기 때문이다.'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위해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시찰하다(11-16)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도착 후 사흘 만에 행동하는데 여기서 그의 신중함이 엿보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 서편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돌아 시계반대 방향으로 가서 출발지점으로 돌아왔습니다(13-15). 이로써 성벽의 무너진 정도를 정확히 파악하였습니다. 13절의 “보니”와 15절의 “살펴본”은 의학용어 사바르로서 치유를 위해 손상 정도를 진단한다는 뜻입니다. 상황 파악을 하기 전에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계획을 말하지 않습니다. 의사가 치료를 위해 진단을 하듯이 일의 시작보다 문제 파악이 먼저였습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 먼저 원인을 진단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벽을 시찰한 것처럼, 우리가 인격과 삶의 무너진 곳을 살펴본다면 크게 개선될 것입니다(잠 25:28).
지도자들을 만나다(17-18) 느헤미야는 시찰을 마친 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만나 성벽 건축의 필요성을 설득합니다. 먼저 당시의 상황을 “우리가 당한 곤경”이라고 표현하며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왕실 고관이 성벽을 건축하여 얻을 유익이 없지만, 그는 백성의 수치를 자신의 수치로 여겼습니다. 또한 주민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그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그곳까지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합니다(18). 이로써 이것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이라는 사실을 천명합니다. 느헤미야는 탁월한 리더로서 백성의 동참을 이끌어냅니다.
반대를 극복하다(19-20)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려 할 때 반대에 부딪힙니다.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산발랏과 도비야입니다(10). 산발랏과 도비야 모두 제사장과 연관이 있습니다(느 13:4; 13:28). 이들은 유다인들이며 예루살렘 주민들의 형제들입니다. 그러나 성벽 건축을 반대하며 하나님의 사업을 업신여깁니다. 명분은 그 일이 페르시아 왕을 배반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의 비웃음을 일축해버립니다.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왕의 조서를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신 비전대로 건축 일을 진행합니다. 그는 확고한 비전의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 않는 자는 얻을 기업도 없다고 그는 선언합니다(20).
적용: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보다 문제의 원인을 아는 것이 왜 우선이 되어야 할까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지혜로워지며, 성령 충만할 때 기쁨이 충만해지며, 성령 충만할 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게 되며, 성령 충만하게 되면 범사에 감사하게 되며, 성령 충만을 받으면 피차 복종하는 놀라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죄를 짓고 싶어도 짓지 못하게 하나님의 성령이 브레이크를 잡아 주십니다. 성령님은 항상 우리의 모든 사정을 가장 잘 아셔서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인도해 주심을 믿고 늘 성령충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일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느 2:10-20 / 조상호목사
어느 병원에 밤늦게 응급환자가 실려 왔습니다. 환자는 교통사고를 당한 후 뼈가 부러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겉모습은 환자의 심각한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응급실 담당의사는 우선 압박붕대로 지혈하는 등 응급조치를 취했고, 부러진 팔과 다리뼈 수술을 위해 정형외과 의사를 급하게 호출하였습니다. 그런데 정형외과 의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 환자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그 환자가 죽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환자의 기도가 막혀 호흡이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응급실 의사는 환자의 기도가 막힌 것을 모르고 다른 치료에만 정신을 쏟았다가 결국 환자가 죽고 만 것입니다. 물론 의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최선의 노력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잘못된 순서로 환자를 치료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골프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한국의 어느 골프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친구들끼리 골프를 하다가 여름철 위생관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너도나도 위생관리에 관한 ‘원 포인트 레슨’을 한마디씩 하게 되었습니다. 골프장 잔디 위에는 들쥐나 야생동물이 돌아다니면서 배설물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잔디에 앉지 말고 반드시 카트나 의자에 앉아야 한다, 실제로 쯔쯔가무시 병에 걸린 사람도 있었다, 농약이 묻은 공을 만지다가 얼굴을 만지거나 눈을 비벼서는 안 된다, 골프화나 골프장갑도 소독해서 써야 한다, 골프채도 사용 후에는 매번 잘 닦아두어야 한다, 등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날의 결정적 발언은 남자들의 소변습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늘집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볼 때 ‘먼저 볼일 본 후 손을 씻어야 한다’와 반대로 ‘손을 깨끗이 씻은 후 볼일을 보아야 한다’는 두 가지 의견이 팽팽하게 갈렸습니다. 좀 말하기가 그렇지만 있는 그대로 전하면 이런 말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 귀중한 물건(?)에 각종 세균이 묻고 농약까지 묻히니 문제지. 그러니 물건(?)이 제대로 건사가 안 되는 거라고.” “무슨 소리야. 기왕에 세균을 묻혔으면 농약까지 발라놔야지!”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의사친구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것도 루틴이 중요한 거야. 반드시 손을 먼저 씻고 나서 그 소중한 물건(?)을 만지라고, 당신들 혼자 쓰는 물건(?)이 아니잖아!”
주말골퍼들이 웃으면서 나눈 이야기지만, 매우 의미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화장실에서 소변이나 손을 씻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일의 순서가 더 중요합니다. 식사할 때도 먹는 순서가 중요합니다. 식사 전에 디저트와 같이 단 음식을 먼저 먹으면 혈당치를 급격히 상승시켜 몸에 큰 부담을 준다고 합니다. 미쓰오 다다시의 <10년 젊게, 30년 오래>라는 책에 보면, 식사는 식이섬유, 단백질로 시작해서 탄수화물로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순서로 식사를 하면 혈당치가 서서히 올라가므로 인슐린 분비량도 급격히 늘어나지 않고, 식사 후에 혈당치도 서서히 떨어지므로 가짜 공복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마사지를 할 때에도 순서가 중요한데, 심장에서 먼 부분부터 시작하여 심장 가까이로 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 순서가 중요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나, 음식을 만들 때나, 식사를 할 때나, 마사지 할 때나, 운동을 할 때나, 비즈니스를 할 때나, 하다못해 여성들이 화장을 할 때도 순서가 중요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여러 곳에서 ‘순서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께서는 먼저 구해야 할 것과 나중에 구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구분 지을 줄 아는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입니다. 오늘은 느헤미야 강해설교 네 번째로 “일의 순서가 중요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느헤미야는 기도하며 기다리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셔서,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의 요구대로 예루살렘에 가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허락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까지 임시직이지만 유대 총독으로 임명 받았고, 건축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자재들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리고 요구하지 않은 군대장관과 마병까지 붙여 주어서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 때가 주전 444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가 무엇부터 했을까요?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1) 먼저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언제나 기도를 최우선적으로 했습니다. 3주 전에 이미 살펴본 것처럼, 형제 하나니로부터 고국의 참담한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가 가장 먼저 무엇을 했습니까? 1장 4절에서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다른 일을 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를 시작한지 약 4개월이 지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2장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여기 ‘묵도하다’는 원어는 ‘팔랄‘이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간절한 소원을 품고 하나님께 기도로 매어 달렸다’는 의미입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말을 듣고 나서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이처럼 느헤미야에게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백마를 타고 화려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지도 않았고, “여러분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가 왔습니다!”라고 선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벽돌을 만들고 성을 쌓기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3일 동안 조용하게 있었습니다. 다같이 1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3일 동안 무슨 일을 했을까요? 물론 1,300Km나 되는 장거리를 여행하느라 피곤했기 때문에 휴식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도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도 평소처럼 기도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동참할 유대의 실력자들과 유지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국의 참담한 소식을 들은 후 먼저 기도하고, 왕에게 대답하기 전에 먼저 기도했던 것처럼, 예루살렘 성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의 인생의 첫 번째 키워드는 항상 기도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도 느헤미야처럼 무엇보다도 기도를 우선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공격하자 다윗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삼상 23:1~2). 또한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시글락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부하들과 함께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아말렉 사람들이 기습 공격하여 불사르고 아낙네들을 잡아갔습니다. 그 때도 다윗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삼상 30:7~8). 또 그를 그렇게 집요하게 죽이려고 추격하던 사울 왕이 죽었을 때도 다윗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삼하 2:1)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그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 군대가 물 밀듯이 몰려와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라고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기도보다 앞서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모습을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위에 보면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을 벌이고 나서 뒤늦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수리형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동차가 고장이 난 후 정비소에 찾아가서 수리하는 것처럼, 일이 터지고 나서 기도하는 것을 수리형 기도라고 합니다. 물론 늦게라도 기도하는 것이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지만, 우리는 ‘수리형 기도’보다 ‘정비형 기도’를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일을 벌인 후에 문제가 생길 때 기도하기보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인기배우 제임스 머독이 링컨의 초청으로 백악관에 머물었는데, 새벽에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가보니, 링컨이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링컨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어려울 때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내게는 충분한 지혜가 없지만 기도하고 나면 특별한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이처럼 링컨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기도보다 앞서지 않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미국 윌로우 크릭교회의 릭 워렌목사는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맨 마지막에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우선적으로 하기를 원하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백화점 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존 워너메이커는 “어떤 것도 기도보다 앞서지 않아야 합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일을 벌이기 전에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보다 앞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나 다윗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는 해야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느 2:11-20 / 이윤재목사(한신교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상당히 심각한 질문입니다. 한 마디로 답변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이번 미국 보스톤에서 하바드 대학을 갔습니다. “하바드” 대학이 어떤 대학인지 아십니까? “하루 종일 바쁘게 드나드는 대학”입니다. 거기서 바쁘게 드나드는 한 한국인 남자를 만났는 데 나이가 40은 넘어 보여서 처음에는 교수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하다 보니까 학생입니다. 나이가 40대 초반, 가족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늦게 공부하러 나왔느냐고 했더니 자기는 서울에서 어느 유명한 회사를 다녔답니다. 연봉도 좋고 전망도 좋아 열심히 일했는 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불안해 지더랍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공부랍니다. 자기는 정말 공부가 하고 싶었는데 일찍 결혼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몇 년전에 결단했답니다. “내가 당장 굶어도 하고 싶은 것은 해야 겠다”. 그리고 사표쓰고 미국으로 왔답니다.
그를 보면서 오래 전의 제가 생각났습니다. 저도 오래전에 네 식구를 데리고 공부하러 떠났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40에 가까웠는 데 정말 그때 하루 하루가 힘들었습니다. 제 일생 공부하는 것이 꿈이었는 데 나이는 먹어가고 꿈은 이루어지지 않고 정말 사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네 식구가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에 딱 떨어졌는 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당장 가진 것이 없고 내일 어떻게 될지 몰랐지만 너무 좋았습니다. 꿈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입니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할 때입니다. 힘들긴 합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힘든 것이 하고 싶은 일을 못하면서 편안한 것보다 낫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손자를 봅니다. 아들 내외가 일하기 때문에 손자를 보는 데 매우 힘듭니다. 가끔 안보고 싶지만 아들 생각해서 봅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외손주를 보았습니다. 이제는 외손주까지 봅니다. 그래서 “권사님, 힘들지 않아요?” 했더니 “어쩌겠어요? 내가 할 일인데. 내가 안하면 저것들이 어떻게 살겠어요?” 합니다. 할머니가 손자 둘을 보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내가 할 일을 하기 때문에”, 그리고 “손자들이 예뻐서 하는 일이니 괜찮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이 하고 싶을 하고 삽니까? 하루 세끼 밥먹고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행복합니다. 해야 할 일을 해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고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을 발견했습니까? 오늘은 그 일을 어떻게 발견하며 어떻게 이루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일의 좋은 모델을 안내하겠습니다. 이 사람처럼만 하면 해야 할 일을 하고 그것을 반드시 이루는 법을 배웁니다. 그 사람이 느헤미아입니다.
느헤미아는 대략 주전 444년 경에 페르시야에 살던 유대인입니다.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위로”라는 뜻입니다. 과연 느헤미아가 살던 시대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시대였을까요?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또 다시 페르시야에게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그때 페르시야의 수도가 수산궁이었는 데 지금 이란에 있습니다. 이 궁전은 주전 4세기, 알렉산더대왕에게 망하기 전 약 200년 동안 페르시아의 수도였습니다. 그 왕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지금 남아 있는 기둥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그림2). 고고학자에 의하면 수산궁의 모든 재료는 외국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 사르디스의 금, 이집트의 은, 에티오피의 상아, 엘람의 돌, 이런 세계 최고의 재료로 궁을 지었습니다. 이것이 현재 복원된 수산궁의 모습입니다(그림3). 그때 느헤미아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이 궁전에서 왕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왕을 먹고 마시고 움직이는 모든 일을 담당하는 비서실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니 느헤미아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세계 최강의 왕을 매일 모시는 신하에게 무엇이 부족했겠습니까?
그러던 어느날 그가 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기 동생 하나니가 자기 조국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형님에게 왔습니다. 그런데 벌써 안색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동생, 왜 그래?” 했는 데 동생이 말합니다. “형님,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번에 예루살렘을 다녀왔잖아요? 그런데 예루살렘성은 무너지고 성벽마저 허물어 졌더라고요. 그 옛날 다윗의 영광은 어디로 갔는지. 참혹해서 볼 수가 없었어요”. 그 말을 들은 느헤미아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 조국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페르시아에 짓밟힌 것은 알았지만 차마 그 정도로 폐허가 된 줄은 몰랐습니다. 동생이 떠난 후 느헤미아는 망연자실, 그 자리에서 넋을 잃고 서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자기 조상의 땅, 다윗과 솔로몬의 성읍이요, 유대인의 혼이 싯든 도시가 아닙니까? 그 도시가 그렇게 참혹하게 파괴되다니. 느헤미아는 그것도 모르고 이국땅에서 호의호식하며 하루 하루 먹고 사는 재미로 살았으니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느1:4에서 느헤미아의 그때 심정이 나타납니다. 느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여러분도 느헤미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때부터 느헤미아의 마음은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좋은 것 봐도 재미가 없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이 없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했습니다. 어느날 왕앞에 음식을 들고 갔는 데 왕이 묻습니다. 느2:2,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할만큼 인생을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사는 것이 이것이 내 인생의 전부일까? 내가 지금 겨우 밥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가? 내 젊음의 꿈과 포부가 고작 이것이었나?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지금 뭔가는 해야 하겠는 데 그것이 뭔지도 모르겠고 마음은 급하고 그래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사명은 이렇게 해서 탄생되는 것입니다. 평생의 사명이 그냥 쉽게 주어진다면 누가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비전은 자신의 삶에 대한 지독한 회의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사는 지금의 삶이 최선일까? 이것이 내가 본래 하려고 했던 것일까?“ 답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비전을 향해 가는 사람은 이 과정을 밟습니다. 이 고독하고 아프고 답답하고 속상하고 막막한 터널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느헤미아에게 전광석화와 같은 하나님의 비전이 임했습니다. 그것은 에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비전이었습니다. 그 비전은 이렇게 임했습니다. 느2:11-12,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문지 사흘만에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이 말씀은 비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말씀입니다.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이 말씀은 크게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내 하나님께서“. 비전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비전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다음 ”에루살렘을 위하여“. 비전의 목적이 다릅니다. 비전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비전은 나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나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에루살렘을 위하여“.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지“. 이 말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라는 말입니다. 무엇이나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비전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것이 비전입니다. 옛날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느2:12,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해서 나로 하여금 행하게 하신 일, 그 일이 비전입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크게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소원”이라고 합니다. 해야 할 일을 “비전”이라고 합니다. 가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중첩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은 주로 내 생각에서 나오고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내 마음의 감동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감동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나를 위하여 하는 일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나를 감동시켜서 하는 일입니다. 하고 싶은 일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이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 차이를 모세를 통해 보겠습니까?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 만나기 전에는 그는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았습니다. 왕궁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고 심지어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사람을 둘씩이나 죽이며 살았습니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은 그를 기분좋게 했으나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의 최종적인 결과는 비참한 살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호렙산에서 하나님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신발 벗으라고 하더니 말씀합니다.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데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라”. 청천 벽력과 같은 명령이었습니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한 몸 가누기도 힘든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는 것은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만 합니까?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고 삽니까? 미국의 밥 버포드라는 사람이 “하프타임”이라는 책을 썻습니다. 이 사람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그는 젊을 때 방송사 사장으로 잘 나갔습니다. 그때는 그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들이 물놀이 하다 죽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내 삶은 무엇이었는가?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편하게 살았지만 내 아들 하나 모슈 살리지 않았는가?” 그때부터 그가 삶을 바꾸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던 사람에서 뭔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삶을 이렇게 두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 – 성공을 목표함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 – 의미있는 삶을 추구함
여러분은 어떻게 삽니까? 과거에는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았지 않습니까? 이제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야 할 일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명령으로 우리에게 주신 일입니다. 하지 않으면 불순종하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롭습니다. 우리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은 이 부담감입니다. 뭔가 해야 한다는 부담감, 안하면 안될 것 같은 부담감, 그 부담감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갑니다. 소설가 서영은씨가 스페인 산티에고를 다녀와서 책을 썻습니다. “노란 화살표방향으로 걸었다”(그림4). 김동리의 늦은 아내이기도 한 그는 나이 60이 훨씬 넘어 멀고 힘든 길을 출발했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도시에서 출발하여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700킬로, 거기 가면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습니다. 작가는 책 서문에서 그곳에 간 이유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오래전 산티아고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내 마음은 불탔다. 언젠가는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 길은 내가 더 늙기 전에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 먼 길을 출발했습니다. 40일만에 마치고 돌아와 책을 썻습니다. 그가 먼 길을 떠났던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반드시 그 길을 걷고 싶었다.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무거운 부담감”. 그것이 60이 넘은 그로 하여금 700킬로를 혼자 걷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길도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이 있습니까? 내가 안하면 안될 것 같은 일이 있습니까? 그 일을 미루면 내가 지금 사는 이유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일이 있습니까? 이 해야만 하는 일을 우리는 “사명”이라고 부릅니다. 사명은 소원을 넘어 섭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이 발전하면 인생길이 됩니다. 여러분은 영화 “명량”을 보셨나요? 이순신이 배12척으로 330척의 왜군과 싸웁니다. 이순신은 왜 그렇게 무모한 싸움을 싸웠던 것일까요? 이순신도 인간적으로 그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패잔병 군인을 데리고 왜군과 싸워야 하는 일은 그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그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싸웠습니다. 그래서 이겼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내가 안하면 안되는 일”입니다. 그 일은 우리에게 힘들지만 그 일을 실행하다 보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그의 계획을 이루어 갑니다. 오래전에 제 친구목사 한 분이 여름에 두어 달 교회를 비웠습니다. 그래서 여행갔나 했는 데 알고보니 중국선교를 갔습니다. 그런데 얼마후에 들려온 소문은 이 친구가 중국에 가서 다시 안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인가 알아보았더니 그가 선교차 중국 단동에 갔는 데 거기서 은혜를 많이 받았답니다. 그가 중국쪽에서 북한 쪽을 바라보는 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탈북자 몇 명을 만났는 데 또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때 그가 평생에 그가 찾던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북한선교”입니다. 그리고 결단했습니다. “아.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살았는가? 내가 할 일이 여기 있었는 데 왜 일찍 발견을 못했을까? 나는 앞으로 북한동포를 위해 살겠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오지도 않고 북한선교를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교회에게는 안되었지만 그가 평생에 걸쳐 해야 할 사명을 발견했다면 그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을 비전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는 사람을 비전가라고 부릅니다. 우리를 이끌어 가는 힘은 비전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반드시 해야 할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행복하고 목적 지향적으로 산다면 여러분에게도 해야만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행복하지 않고 방황하고 산다면 해야 할 일을 아직 찾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명한 일, 내 일생에 반드시 해야만 할 일, 그 일로 인해 여러분의 삶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시작하면 우리는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비전의 또 하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해야만 할 일을 우리가 시작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일을 잘 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 할까요? “해야 할 일을 순종하면 할 수 있게 하신다”. 느헤미아가 그랬습니다. 느헤미아는 오랫동안 고민하고 기도한 끝에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2장 11-12절의 말씀으로 다시 보면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둘째 예루살렘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셋째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일을 시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전은 받았으나 그것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할 때 따라는 문제는 그것을 시작할 때 많은 문제와 위험이 따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위험이 따릅니까? 우선 당장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의 이란에서 예루살렘까지 그 먼 광야와 사막, 산과 강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했다고 해도 거기 있는 수많은 반대자, 방해자들과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아는 이 모든 과정을 믿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루었습니다. 비전은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작하면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20절이 참 중요합니다. 느2:20,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20절, “하늘의 하나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우리 인생의 첫 번째 과제, 우리가 평생 해야 할 일을 발견하는 것, 두 번째 과제, 그것을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 다같이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시작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실천할 때 할 수 있습니다. 18절을 또 보시겠습니까? 느2:18,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정말 우리가 믿음으로 읽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니”. 아멘.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우리를 돕습니다. 비전이 하나님께로 왔다면 그것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임을 믿어야 합니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이루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이 마지막 구절이 너무 좋습니다.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두 가지 선한 것이 나옵니다. “선한 손”, “선한 일”.
선한 손 – 하나님의 비전의 손입니다. 모든 비전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옵니다.
선한 일 – 모든 비전에 우리의 선한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 우리의 선한 일, 선한 손이 선한 일을 이루고 선한 일은 선한 손에서 나옵니다.
성경의 사람들의 특징을 아십니까?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을 정복하라는 비전을 받았습니다. 가나안 정복은 그에게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것을 이루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수1:3, “네 밟바닥으로 밟은 땅을 네게 주리라”. 발바닥으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비전은 한 걸음의 발바닥의 순종이 필요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어느날 발바닥으로 그 땅을 밟자 가나안 땅은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해야 할 일을 시작하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농부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기드온아, 미디안을 쳐부수라”. 기드온은 겁도 많고 그를 따르는 자도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큰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 기드온이 그 말을 듣고 힘을 얻어 나팔을 불자 수많은 이스라엘 지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시작하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전을 받은 사람이 기억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적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기회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에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기적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몽상과 비전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몽상은 꿈이 저절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가 많이 쓰는 말은 “기적”입니다. 그러나 비전은 자신이 그 일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가 많이 쓰는 단어는 “기회”입니다. 기회가 기적을 가져옵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자녀를 가르칩니까? 그가 기적을 만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기회를 만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사업을 하십니까? 내 사업에 기적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내 사업을 통해 기적이 나타나도록 내게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시작해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켄터키 치킨을 아십니까? 잘 모르신다면 이 할아버지를 아십니까?(그림5). 미국 어디 가나 이 치킨집이 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오래 사업을 하다 망했습니다. 나이는 많고 할 일은 없어 그의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좋은 음식을 통해 세상을 유익하게 싶은 꿈이 있었는 데 이루지 못하고 한 생이 지나갔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가 먹어봤고 만들어 보았던 가장 맛있는 치킨을 기억나는대로 다 써 보았습니다. 그리고 식당을 찾아 다니며 자기가 맛있는 치킨을 만들 줄 안다고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결국 그 일로 그는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창립했고 세계 수 천개의 프랜차이즈를 만들어 냈습니다. 비전은 기회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시작해야 하고 지속해야 하고 또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비전을 가진 분이 있었습니다. 고 이중표 목사님, 1977년, 청계산에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이 그에게 이런 비전을 주셨습니다. “한국민족을 신자화해라”. “한국민족이요?” 그때부터 그가 한국에 미쳤습니다. 지나가다 한국이란 말만 봐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한국이란 이름만 들어가면 다 좋았습니다. 한국, 한국인, 한국일보, 한국사람, 한국신학대학, 그러다가 드디어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한신교회”, 한신교회를 “한국민족을 신자화하자“에서 나온 말입니다. 한국민족을 미쳐 한국민족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자. 이것이 그가 받은 비전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30여년, 이제 그 비전은 우리의 비전이 되었습니다. 그 비전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만 할 일입니다. 그 비전은 우리가 시작할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지속하고 또 시작하고, 헌신하고, 또 헌신할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막연히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적을 만들기 위해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우리 앞에 펼쳐졌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오래 살아서 늙는 것이 아니라 꿈을 잃어버릴 때 늙는다” (맥아더), “사람이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간다”(니이체).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 마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고국으로부터 수 천킬로 떨어진 곳에 매어 있던 느헤미아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던 기생 라합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도 막달라 마리아도, 베다니의 마리아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미국에서 한 목회자 부부를 방문했습니다. 크리스와 프리슬라 부부입니다. 이들은 침례교 목사로 미시간대학생을 대상으로도 많은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프리슬라의 몸에 이상이 왔습니다. 몸이 굳어지는 루게릭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 병이 급격히 진행되어 지금은 아무 것도 못합니다. 작년에 저희 딸이 미국갈 때까지만 해도 공항에 마중나오고 그 집에도 있게 했었는 데 지금은 아무 것도 못합니다. 남편은 목회를 접고 아내만 돌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리슬라는 자기는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몸을 움직이지 못하지만 나는 너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우리가 돌본 많은 학생들이 아들같고 딸같아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 때문에 너무 감사합니다“. 대화를 마치고 집을 나서면서 제가 ”또 뵙기를 바랍니다”했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 다음에 이 집에 와서 제가 없거든 제가 천국에 있는 것으로 아세요. 저는 그때 하나님품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해야 할 일은 우리가 건강할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몸이 망가져 꼼짝 달싹 못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가 할 일은 계속된다는 것을. 우리에게는 몸이 아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약 5주전, 저는 돌아가신 정양웅 안수집사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는 위장암 말기로 죽음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제가 가서 손을 잡았더니 그가 천천히 입을 열고 말합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그동안 제가 죽음을 못 받아들여 교회에도 연락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괜찮습니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것, 참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도 감사하고 사람들에게도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의 인생은 모두 은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것이 정집사님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비록 죽어가면서도 “감사합니다. 은혜였습니다” 했다면 그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앞에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몸이 아파도 죽음앞에 서도 우리는 할 일이 있습니다. 그 해야 할 일, 하나님이 주신 일, 그 비전이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헤미야 2:11-18 / 석기현 목사
'선구자'라는 제목의 유명한 가곡이 있습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라는 가사의 노래입니다.
여기에서의 '선구자'란 바로 일제 치하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2절에 나오는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라는 가사와, 마지막 3절에서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라고 더욱 명백히 밝혀 주는 가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에 이 노래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다른 좋은 호칭도 많은데 '독립투사'를 가리켜 왜 하필이면 '선구자'라고 칭했는지 좀 의아스러웠습니다.
'선구자'라는 단어는 조국을 되찾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걸고 싸우는 '독립투사'에게는 무언가 좀 부족하고 어울리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선구자'란 이름이 '독립투사'에게 참 의미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독립투사'는 꼭 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선뜻 나서서 하기 어려워하는 일을 앞장서서 이끌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사제국에서 고위관직을 가지고 편안히 살 수 있는 생활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해 전 인생을 다 바쳤던 느헤미야 역시 바로 그런 정신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일국의 수도가 재건되는 그 엄청난 대과업이 단 한 사람의 선구자적인 헌신을 통하여 시작되었고 결국 성취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오늘날 역시 과연 어떤 신자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인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 영적 선구자가 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선구자적인 신자는 필요한 하나님의 일을 앞장서서 찾아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2장 11절과 12절에 "11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한 지 삼일에 12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을 내가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심으로써 그가 모시고 있던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특별휴가와 지원까지 받게 되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곧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일단 "삼일" 동안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이것은 먼 여행길 직후 따르는 피로를 풀기 위한 휴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자동차나 비행기 따위는 물론 없었던 그 당시 바사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적어도 3개월 이상 걸리는 먼 여행길이었으니 한 삼일은 쉬어야 어느 정도 여독이 풀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물론 쉬더라도 방안에서 그냥 뒹굴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여태까지 인도해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본격적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하면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짰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휴식이 끝나자마자 느헤미야가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예루살렘 성벽의 파손 상태를 살펴보려고 현장답사를 나간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을 감동시켜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투신하게 하신 일에 대하여서는 아직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방백들이나 백성들을 불러 모아 놓고 "내가 바로 바사제국 임금의 술 관원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이토록 어려운 걸음을 해서 이곳에 찾아왔다."라는 식으로 떠벌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남몰래 "밤에 일어나" 그저 자기를 보좌하는 "두어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 성벽 상태가 어떤지 몸소 현장을 살피러 나갔습니다.
느헤미야는 그저 말로만 나서지 않고 구체적으로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나서는 것부터 제일 먼저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3절 이하 15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13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소화되었더라 14앞으로 행하여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15그 밤에 시내를 좇아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 본 후에 돌이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서 돌아 왔으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느헤미야가 그날 밤에 어떠한 경로를 거쳐서 예루살렘 성벽을 답사했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 답사를 시작했던 출발지인 "골짜기 문"은 예루살렘 남서편의 힌놈 골짜기에 위치한 것으로서 성벽 남쪽 문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문이었습니다.
그 문으로 나가서 "용정" 즉, '용의 우물'이란 곳을 지나갔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 '골짜기 문' 근처에 위치한 우물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 다음에 지나간 곳은 "분문"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배설물의 문'이라는 뜻으로서 예루살렘의 모든 쓰레기와 오물이 바로 이 문을 통하여 힌놈 골짜기에 버려졌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분문"은 남쪽 성벽의 거의 한가운데, 즉 "골짜기 문"에서 동남쪽으로 약 450미터 되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돌면서 답사하고 있는 방향은 서울로 치자면 '서소문'으로 나와서 '남대문'을 거쳐서 '동대문' 쪽으로 돌아 올라가는 방향인 셈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성벽 답사를 진행하다가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샘문" 즉 샘터가 있는 문은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문이며, "왕의 못"은 그 샘문 부근에 있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실로암 못'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연못입니다.
거기서부터는 느헤미야가 타고 있던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을 정도로 예루살렘 성벽이 극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길이 막히자 느헤미야는 "시내를 좇아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 본 후에 돌이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여기 "시내"란 바로 예루살렘 성 동편에 있는 기드론 계곡을 따라 흐르는 기드론 시내를 가리킵니다.
성벽 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히자 느헤미야는 그 기드론 계곡의 높은 지대를 따라 우회하여 올라가면서 계속 동쪽 성벽의 상태를 조사했던 것입니다.
그 계곡의 높은 지대는 지형상 예루살렘 북동쪽 모퉁이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느헤미야는 계곡을 따라 계속해서 예루살렘 북쪽 그리고 서쪽 일부 지역까지도 갈 수 있는 데까지 더 나아가서 가능한 한 성벽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고서 다시 되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의 어떤 부분이 어느 정도 파괴되었는지, 어떤 부분에 어떤 공사가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되새겨야 할 것은, 그날 밤에 느헤미야가 살펴보았던 그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진 지 이미 백 수십 년이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1차 및 2차로 귀환했던 유다인들이 한때 성벽 재건 사업을 시도했다가 중도에서 포기하고 내버려 둔 이후로도 또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즉 그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느헤미야보다 먼저 보았던 사람들이 몇 만 명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성벽을 재건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 무너진 성을 하루하루 무심하게 지나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저 '아, 저 성벽이야 원래 무너져 있었던 거지 뭐. 백 수십 년 동안을 그냥 저렇게 무너진 채로 있어 왔는걸. 언젠가 한번 재건해 보려고도 했었나본데 역시 안 되는 일이었었지. 그러니 나라고 무얼 어떻게 하겠나?'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그 무너진 성벽을 보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어떤 문제점으로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 반드시 시급히 해 내어야 할 하나님의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처럼 무너져 있는 상태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실인 것처럼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오직 느헤미야의 눈에만 그 성벽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사실상 육안에 비치는 성벽의 모습은 느헤미야나 다른 예루살렘 성민들에게나 똑같았겠지만, 그것을 보고난 후에 자신의 마음에 인식된 영상은 전혀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그 몇 만의 유다인들이 매일같이 보고 있으면서도 무심하게 넘기고 있던 사실이 결코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 반드시 완수해내야만 할 하나님의 일인 것을 오직 느헤미야만 느낄 줄 알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보아오면서도 아무 자극도 받지 못하고 있던 일을 느헤미야라는 단 한 사람의 선구자는 바로 그날 하룻밤 사이에 자신에게 주어진 일생 최대의 사명으로 확신했던 것이었습니다.
교인들 중에도 그 유다인들처럼 '성벽이 무너져 있는 것이 그저 당연한 상태인 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다 한번 전도를 해 보았는데 도저히 씨도 먹히지 않으면 당장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역시 전도란 안 되는 것이야. 사람들이란 원래 전도를 잘 안 받기 마련이지. 그러니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나.'라고 간단히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고는 몇 개월 몇 년을 전도 한번 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 주변에서 많은 불신친구와 이웃들을 보면서도, 한 지붕 밑의 가족 가운데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혈육을 매일같이 보면서도, 바로 그들이 전도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사명이라는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무심하게 사는 것입니다.
눈으로는 보면서도 마음으로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지금 당장 해야 할 시급한, 반드시 성취해야 할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낼 줄 아는 선구자적인 자세를 익혀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별들의 운동'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학교 지원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우리나라 전체 신학교의 조류입니다.
실로 마지막 때에 추수일꾼은 점점 더 모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에 대하여 대부분의 목사나 신학교장들은 '그게 요즘 추세인 것을 어떡하나?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들어 와서 강제로 목사 시킬 수도 없으니 무슨 별 수가 있겠나?' 하고 끝나고 맙니다.
하지만 '다른 교회에서 신학생 지원자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바로 우리 경향교회 안에서 신학생을 더 많이 키워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사고의 전환이, 이 '별들의 운동'이라는 참으로 멋있는,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요긴하고 필요한 또 하나의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게 만든 것입니다.
모름지기 영적 선구자는 바로 이런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지극히 당연한 일들이 눈앞에 산적되어 있는데도 마치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생각하는 무사안일주의를 떨쳐 버리고, 지금 당장 절실히 요구되는 시급한 하나님의 일을 부단히 찾아내는 영안이 밝게 뜨인 영적 선구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선구자적인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자고 다른 성도를 격려할 줄 아는 사람
본문 16절과 17절에 "16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인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고하지 아니하다가 17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야밤의 성벽 답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그 답사를 마치고 17절에 "후에"라고 한 때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가 대사를 시작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한 사람이었는지를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특히 목사와 같은 지도자는 무슨 일을 시작할 때 그처럼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한 후에 말을 꺼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단 목사가 당회 앞에 그 일을 발표하게 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목사가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지도 않고 불쑥불쑥 생각나는 대로 당회나 교회 앞에서 말을 남발하면, 그런 일들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을 것은 물론이요 그 자신의 지도력 부재와 무능을 드러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런 신중한 준비 기간을 충분히 거친 후에 드디어 예루살렘 백성들을 불러 놓고 이 대사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성이 당한 일이 '우리의 당한 곤경'이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불러다 놓고 "너희들, 이게 무슨 부끄러운 모습이냐? 너희들이 오래 전에 예루살렘에 먼저 돌아와서 살고 있었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일찌감치 했어야 할 일 아니냐?"라고 책망할 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대신에 '우리의 당한 곤경'이라고 즉 '너희의 일'임과 동시에 또한 '나의 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들을 생각할 때 그것들을 항상 '남의 일'로만 여기는 교인들도 많지 않습니까?
"교인이라면 당연히 성전건축에 참여하고 신자라면 당연히 선교후원을 해야지요."라고 말은 하면서도, '하지만 헌당헌금이나 특별선교헌금은 돈 많은 장로님들이나 할 일이지 내 일은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늘 기도에 힘써야지요."라고 하면서도, '우리야 사노라고 먹노라고 바빠서 매일 기도할 수 없으니 교역자들이 우리 기도까지 대신 다 해 주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일은 저 사람의 일이지, 저 일은 누구 다른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라고만 하다가는 결국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일은 바로 '너와 나의 일'이며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해당되는 일'이라고 피차 격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가 아니냐"라고 말하면서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아, 날이면 날마다 이 불타서 무너져 있는 예루살렘 성벽을 목도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부끄럽지도 않느냐?'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이방인의 손에 파괴되어 버린 그 자체도 수치였지만, 이제 해방을 받아 조국으로 돌아왔다는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다는 것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에 주일마다 출석했던 어떤 미국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대부분의 미국 교회당들이 그렇듯이 바닥이 카펫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오래 되었던지 사람들의 발이 자주 닿는 곳은 이미 닳을 대로 닳아빠져서 속이 허옇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아무리 검소한 미국 사람이라 해도 그게 자기 집 카펫이었다면 그런 것을 보고 가만 둘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동네가 창피해서 빚을 내어서라도 당장 갈아치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네들이 매 주일 예배드리는 예배당의 카펫이 그 모양 그 꼴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끄럽게 생각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낯이 두꺼워서는 안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내버려 두고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실로 자신에게 수치스러운 일인 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무심하게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은 실로 불명예스럽기 짝이 없는 일인 것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18절 말씀에 "18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라고 기록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처럼 예루살렘이 처하고 있는 곤경과 수치스러움을 백성들에게 먼저 일깨워 준 후에 당장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자고 백성들을 고무시켰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선한 손이 자기를 도와주신 일" 그래서 바사왕 아닥사스다가 승낙하고 협조까지 약속해 주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자기네들의 불충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 준 후에 이어서 약간의 격려만 덧붙이니까 그 예루살렘 성벽재건의 열기는 마치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말이 끝나자마자 온 백성들이 "일어나 건축하자"하면서 일순간에 함께 감전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서 성벽 재건 공사에 일로매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 얼마나 멋있는 장면이었습니까?
단 한 사람의 선구자적인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찾아내고 그 일을 하자고 백성들을 자극시키고 격려했을 때, 그것은 무려 몇 십 년 동안 무심하게 잠자고 있던 수만 명의 마음들을 하나 같이 일깨우고 그 수만 명의 몸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원로목사님을 잘 아시는 다른 교단의 목사님을 한 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우리 원로목사님께서 부산에서 목회하고 계실 적에 다른 목사님들이 붙여 준 별명을 제게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고집이 목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 목사'라는 뜻입니다.
교회 일이든지 교단 일이든지 하여튼 무슨 하나님의 일이다 싶은 것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면서 하시는 분이셨던 까닭에, 선배 목사님들께서 오히려 '하고집이 목사도 저런 하고집이 목사가 없다.'라고 혀를 내둘렀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하고집이 목사님'을 따라서 우리 경향교회가 지난 39년 동안 오직 '하자'는 말만 앞세우는 교회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교회는 '하지 말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도저히 발을 붙이지 못하는 교회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 강서성전을 지을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장로와 교인들 중에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이 일은 도저히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이 강서성전 건축이 절대로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결국 우리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로지 '하자'는 긍정적이고 선구자적인 사고방식에 이미 숙달되어 있던 대부분의 당회원들은 아무리 'IMF'고 뭐고 해도 이 경향학원에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확신하면서 '자, 우리의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우리 경향인들 역시 그 말에 '일어나 건축하자'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에 일사불란하게 뛰어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처럼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안 될 일이라고만 여겨졌던 성전건축은 끝내 완성되었고 입당과 헌당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이처럼 경향인들을 도우신 것을 저와 여러분이 목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우리 경향교회에서는 오직 '하자'는 소리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꼭 해내어야 할 하나님의 일을 찾아내고 그 일은 너와 나의 일이라고, 그 일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깨우쳐 주는 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함께 합시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전에도 함께 하셨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라고 서로를 격려하는 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일어나 함께 하자'는 소리가 항상 앞장섬으로써 '하나님의 선한 손이 전에도 함께 하신 것처럼 이번에도 함께 하시는' 가운데 이보다 더 큰 역사를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저 '하나님의 뜻이 내 가정에, 이 경향교회에, 우리 조국에 이루어지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만 하고 그 후에는 팔짱 끼고 가만히 앉아만 있다면, 우리 눈앞에서 하늘로부터 뭔가 뚝뚝 떨어지듯이 그 일들이 자동적으로 실현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과 입을 기도의 도구로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을 그 응답의 도구로 또한 사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전 인격과 생활이 함께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쓰이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의 일을 부지런히 찾아내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그것을 놓치지 않고 '하자'라고 시작해야 합니다.
항상 부정적인 비관주의자는 '그것은 도저히 안 될 일이다.'라고만 생각하는 까닭에 아무 것도 시작조차 하지 못합니다.
무사안일한 낙관주의자는 '그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자꾸 미루는 까닭에 매사에 한참 늦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선구자는 '그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고 내가 시작해야 할 일이다.'라고 깨닫고 실천에 옮김으로써 꼭 필요한 일을 꼭 필요한 때에 이루어내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남들은 무심하게 넘겨 지나가는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꼭 필요로 하시는 일을 찾아내는 선구자, 찾아낸 하나님의 일을 '나와 너'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이라고 서로 자극하고 격려할 줄 아는 선구자가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경향을 통하여 앞으로도 계속 행하실 '이 선한 일'에 항상 앞장서서 쓰임 받고 '예루살렘의 흥왕'을 통한 축복을 같이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다
느 2:11-12 / 이한규목사
< 속성주의를 피하라 >
가끔 보면 어린 나이에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명문대에 진학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이 더 잘 살고 더 인류에 공헌하고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의 빠른 성취가 인생 전체의 성취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되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음악 콩쿠르나 과학경시대회 등에서 상위권을 휩쓸다가 왜 대학에 들어가면 점차 선진국 학생들에게 따라잡히는가? 너무 일찍 공부를 많이 시켜 기력을 다 빼놓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노는 것과 사랑받는 것도 중요하다. 유대인들은 유치원 때 알파벳도 가르치지 않는다. 선진국에서는 공부과목 중 볼링과 수영 등 노는 과목들도 많다. 반면에 우리는 놀아야 할 때는 너무 학대하고 정작 대학에 들어가 공부해야 할 때는 공부와 담을 쌓는 경우가 많다. 후반전이 강한 인생이 진짜 강한 인생이다.
어린이 노래대회를 휩쓸던 한 아이가 러시아로 조기유학을 갔다. 그런데 러시아 선생님은 6년 동안 발성법을 전혀 안 가르치고 다른 기초 공부만 시켰다. 성대를 너무 일찍 무리하게 사용하면 안 된다는 얘기였다. 결국 그 아이는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다. 어렸을 때는 공부의 기초를 쌓고 인성교육과 놀이를 통한 공동체 교육도 중요하다. 그래야 인생의 본론도 좋아지고 후반전도 강해진다.
명품은 빨리 다량으로 생산되지 않는다. 과정과 절차를 중시하고 기다림과 인내와 정성을 들일 때 명품이 만들어진다. 요새 속성과정으로 무엇을 해준다는 곳이 많지만 진짜 깊은 맛은 속성과정이 아닌 숙성과정을 통해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의 40년 기간을 허락하셨다. 속성으로도 약간의 실력을 얻을 수는 있지만 최고의 실력파가 되려면 상당한 시간도 필요하다. 속성보다 숙성을 중시하는 인생이 결국 명품 인생이 된다.
<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다 >
느헤미야는 동족을 위한 뜨거운 사랑과 사명을 가지고 바사의 수산궁에서 멀리 예루살렘까지 왔다. 그리고 큰 소리로 “내가 성벽을 건축하러 왔다!”고 광고하며 바로 성벽 재건에 착수하지 않고 먼저 3일 동안 말도 없이 쉬었다(11-12절). 그때 피로를 풀며 무엇을 해야 할지 먼저 기도했다. 그처럼 무슨 일을 하든지 말씀과 기도를 앞서지 말라.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의 감동과 지혜와 용기와 같은 ‘채워야 할 것’은 채우고 욕심과 자만과 나태와 같은 ‘버려야 할 것’은 버리라.
큰 비전과 능력이 있다고 해서 무작정 일에 뛰어들지 말고 먼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자기 조절 능력부터 갖추라. 치우치지 않고 선한 일을 밀어붙일 수 있어야 복된 열매가 맺힌다. 힘으로 밀어붙이지 말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자기 조절 능력부터 키우라. 그래야 더 멀리, 더 높이 간다. 마귀가 영혼을 넘어뜨릴 때 쓰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분주하게 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기다림의 순간을 가지게 하는가? 그 기간에 먼저 준비된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비전 성취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 기다림은 쉽지 않지만 그 기간을 좀 더 준비하고 좀 더 안식하는 기간으로 삼으라. 성취동기를 따라 살면 비전이 늦게 이뤄질 때 답답해서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거룩한 동기를 따라 살면 비전이 늦게 이뤄져도 넉넉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큰 비전을 하루라도 빨리 완성하면 인간적으로는 좋지만 비전 성취가 늦어진다면 이렇게 생각하라. “하나님이 더 큰 축복을 위해 준비 기간을 넉넉히 주시는구나.”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다. 그때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영력(靈力)을 준비하고 용서와 너그러움을 배워 심력(心力)을 준비하고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능력(能力)을 준비하라. 잘 준비하면 기다림의 기간은 짧아지고 조만간 놀라운 축복의 때가 다가올 것이다.
폐허를 딛고 서서
느 2:11-18 / 김기석목사(청파교회)
막중한 임무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한 해의 또 다른 절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의 백성답게,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답게, 종말론적 비전을 품은 신자답게 살았는지 돌아볼 때 부끄럽기만 합니다. 매 순간 충실하게 지내려고 애쓰기는 했지만, 지난 반 년을 돌아볼 때 떠오르는 단어는 ‘엄벙덤벙‘, ‘는적는적‘입니다. 활기차게 살았다기보다는 시간에 등 떠밀리며 살았던 나날이었습니다. 7월이면 상황이 좋아질 거라는 우리의 낙관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어둠이 스멀스멀 우리 가운데 스며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 조심조심 살아야 하겠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이 이야기를 통해 이 어려운 때를 살아갈 지혜를 얻으면 좋겠습니다. 바빌로니아 제국이 페르시아에게 무너진 후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속주로 전락했습니다. 근동 지역의 대부분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독립 국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페르시아는 바빌로니아와는 달리 각 나라의 자치와 종교적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과도한 세금 때문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왕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통치권을 확고히 세우기 위해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느헤미야서가 시작됩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관료로 등용되어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터운 신임을 받아 왕에게 술을 따르는 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유다에서 온 하나니를 통해 예루살렘의 형편에 대해 듣습니다. 하나니 일행은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곳에 남겨진 이들의 고생이 아주 심할 뿐 아니라,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느헤미야는 깊은 슬픔에 잠겨 며칠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거역하는 죄를 지은 것을 자복했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 또한 그러한 죄와 무관하지 않다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그들이 이렇게 이방 나라에 흩어진 것은 주님의 뜻 안에서 벌어진 일임을 그는 시인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렇게 참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돌이키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겠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자비를 간청합니다.
노련한 정치인답게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그는 왕에게 무너진 예루살렘 성읍을 다시 세우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왕과 왕후는 깊이 신임하는 신하가 자기들 곁을 떠난다는 사실을 달가와하지 않았지만, 결국 느헤미야의 청을 받아들입니다. 왕은 장교들과 기병대를 딸려 보내 느헤미야를 보호하게 했고, 유프라테스 서쪽 지방의 총독들에게 그의 안전을 보장하고 필요한 것을 제공하라는 친서까지 써주었습니다. 그때 페르시아의 임금은 아닥사스다 1세였고,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주전 445년경이었습니다. 그는 이중의 과제를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는 한편, 무너진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을 세워야 했습니다. 한번 무너진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느헤미야는 궁중 정치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역사에 대한 비전도 없고, 늘 자기 이해에 따라 처신하는 일에 익숙한 관료들에게 처음부터 자기 계획이나 목표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총독으로서의 권한을 가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뜻이 좋으면 사람들이 다 동의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천박한 낙관론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일쑤 빠지는 함정입니다. 가장 시급한 것은 현실 파악이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속으로 얽히고 설킨 사람들 간의 역학 관계도 파악하고, 예루살렘과 유다의 사회 경제적 현실도 파악해야 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일에 착수하기도 전에 반대에 부딪힐 수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사흘 동안 쉬었다고 말합니다. 그 시간은 그야말로 암중모색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그는 밤에 수행원 몇 명만 데리고 순찰을 나섰습니다. 예루살렘의 남서쪽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다니며 성의 형편을 살폈습니다. ‘샘 문’과 ‘왕의 연못’에 이르렀을 때 더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그 길은 이미 풀들의 차지였을 것이고, 마구 버려진 쓰레기더미와 무너진 건물의 전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을 겁니다. 그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성벽을 둘러보고 다시 ‘골짜기 문‘을 지나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착잡했을 겁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암담했을 겁니다. 지도자는 그런 암담한 상황에서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상황이 암담할 때면 사람들은 문제의 크기에 압도되게 마련입니다. 살다보면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거대한 바위가 길을 막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그 바위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레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 큰 바위를 움직일 수는 없지만 그 바위를 잘게 쪼개며 제거할 수는 있습니다. 일단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터키의 오르한 파묵은 자기의 소설 쓰기를 가리켜 ‘바늘로 우물 파기’라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열정과 인내가 있기에 그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처럼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일 속에 뛰어든 사람들입니다.
용기를 불어넣음
현실의 암담함을 토로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절망감을 다독이며 희망의 불씨를 살려내는 사람이 진짜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절망은 자기 충족적입니다.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누가 돕지 않더라도 절망에 빠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시126:5) 했습니다. 전도자의 말도 떠오릅니다.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한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전11:4).
폴란드 시인인 아담 자가예프스키의 시 ‘신세계’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현실을 면밀히 살핀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정상적인 것들은 가장 짧게 지속되고/비정상적인 것들을 이해하기는 너무 쉽고/순응하기는 더욱더 쉽다/그 쉬움이 너를 안심시키지 말기를”(아담 자가예프스키,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최성은·이지원 옮김, 문학의 숲, p.23)
사람들은 쉽게 현실에 순응합니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알고 삽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새로운 세상을 시작해야 합니다. 때가 이르렀다는 판단이 들자 느헤미야는 관리들을 불러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폐허가 된 성, 불타버린 성문, 무너진 성벽…누구나 다 아는 현실입니다. 누구나 다 알기에 차마 입 밖으로 내놓지 않던 자기들의 현실입니다. 느헤미야의 말은 자기들이 안주하고 있던 느른한 현실이 비정상임을 일깨웠을 겁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다시는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 하자면서 무너진 성벽을 일으켜 세우자고 말합니다. 성벽 재건이라는 가시적인 목표는 실은 무너진 신앙적 정체성을 세우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출애굽 공동체가 시내산 언약 이후에 했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회막을 지었습니다. 회막 짓기는 출애굽 공동체가 최초로 함께 한 창조적인 일이었습니다. 함께 일을 하는 동안 그들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벽을 쌓는 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느헤미야는 주저하는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두 가지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선하신 손길로 지금까지 자기를 어떻게 보살펴 주셨는지를 증언했습니다. 신실한 믿음은 또 다른 믿음을 부르는 법입니다. 둘째, 페르시아 왕이 유프라테스 서쪽 지방의 총독들에게 친서를 보내 느헤미야가 하는 일에 협조할 것을 명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새로운 시작
마침내 사람들을 가리고 있던 절망과 무기력의 어둠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공사를 시작하겠다고 말하고, 힘을 내어, 기꺼이 그 보람있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폐허와 잔해를 보며 절망 속으로 침잠했던 그들이 마침내 일어선 존재가 된 것입니다.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며칠 전 북촌갤러리에서 열린 “시리아愛봄” 사진전에 다녀왔습니다. 내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시리아의 상황을 알리기 위한 전시였습니다. ‘헬프 시리아‘ 사진 봉사를 하는 우리 교회 권산 작가와 사무국장인 압둘와합이 기획한 전시였습니다. 몇 점 안 되는 사진이었지만 그 사진들은 인간의 잔혹함과 파괴성과 더불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의 숭고한 모습도 담겨 있었습니다. 포연이 오르고 있는 마을, 건물의 잔해에서 구출된 아이를 품에 안고 달리는 사람들, 아비규환의 상황에 내몰려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물결 등이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조용히 희망을 만드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흰색 헬멧을 쓰고 시리아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현장에 출동해서 긴급 구조 활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흰색 헬멧은 그 땅에서 시작되는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터키와의 국경 지대 인근에 세워진 난민 캠프도 볼 수 있었습니다. 직접 사진을 찍기도 하고 또 다른 이의 사진을 선정하기도 한 압둘와합은 참혹한 느낌을 자아내는 사진은 일부러 배제했다고 말했습니다. 난민들은 헬프시리아가 준비한 구호물품을 가지고 그곳을 찾은 압둘와합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도 필요하지만 자기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라며 학교를 세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 파종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청이었지만 꼭 해야만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세우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1년 안에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난민촌에 살고 있는 인부들은 학교를 3개월만에 지었습니다. 자기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기에 그들은 24시간 3교대로 일했던 것입니다. 난감한 상황에 몰려 있으면서도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난민촌에 살고 있지만, 그곳에서 서로 돌보며 살았던 기억 그리고 그곳에서 배웠던 소중한 가르침을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꾸게 될 것입니다.
폐허 더미를 치우며 희망의 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보람은 영적 존재인 인간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심각할 정도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선 자리가 다른 이들은 서로를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신뢰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진영에 선 사람들은 자기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적대적인 말, 냉소하는 말, 비아냥거리는 말들이 우리 귀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말과 감정의 찌꺼기들이 켜켜이 쌓여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그 자리야말로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시작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흰색 헬멧이 시리아 난민들의 희망이듯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새로운 세상의 단초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부끄러운 말, 사람들을 가르는 말, 냉소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대화의 용기를 내야 합니다. 암담해 보여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평화의 도구가 되기를 희망했던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처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꿈은 바로 우리의 그런 노력을 통해 이 땅에서 영글어 갈 것입니다. 투덜거림을 멈추고, 우리 주변에 널린 폐허의 잔해를 치우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난관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결국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선물로 주어진 한 해의 또 다른 절반이 희망을 파종하는 기쁨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장애물을 넘어서
느 2:11-20 / 문성욱목사(일산명성교회)
허들경기는 우리네 인생과 너무도 비슷합니다. 인생을 마치는 날까지 힘겨운 장애물이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하나가 끝났나 싶으면 어느새 또 다른 것이 나타나 힘들게 합니다. 계속해서 다가오는 인생의 장애물을 넘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장애물들은 하나하나 모든 것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떨게 합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러나 또 담대한 마음으로 달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장애물을 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느헤미야에게 끝없이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이 장애물들과 당당히 맞섰고 마침내 성공적으로 장애물들을 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들이 장애물을 잘 넘을 수 있었을까요?
먼저, 기도했습니다.
구약성경 느헤미야는 한 마디로 기도의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장에 보면 느헤미야의 기도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내용도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13장 마무리도 기도입니다. 느헤미야는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기도부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TV나 영화에서 커다란 파도가 밀려오면 서핑 보드를 타고 밀려오는 파도를 멋지게 타고 나가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엄청난 파도 사이를 서핑을 타고 지나가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많은 서핑 선수들이 더 큰 파도를 타고 싶어서 호주 해안을 찾는다고 합니다. 파도가 클수록 멋진 장면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마치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큰 장애물이 밀려와도 기도는 서핑보드처럼 우리를 타고 넘게 해 줍니다. 기도를 잘하는 사람들은 그 장애물을 넘어도 멋지게 넘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서툴러도 기도를 하기만 하면 그 장애물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서핑보드를 타지는 못해도 보드만 잡고만 있으면 파도를 넘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우리를 지켜줍니다. 기도가 우리의 갈 길을 안내해 줍니다.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다가오는 장애물을 넘게 해 줍니다. 본문의 느헤미야는 마치 서핑보드 프로선수와 같습니다. 멋진 모습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넘는 선수처럼 다가오는 인생의 장애물을 멋지게 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때 비로소 응답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둘째로 힘을 모았습니다.
느헤미야 3장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같은 마음을 가지고 힘을 모을 때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하나는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로 뭉치는 공동체이고, 다른 하나는 무관심하고 흩어지는 공동체입니다. 그렇습니다. 불행은 무관심에서 발생합니다. 사탄은 항상 무관심의 바이러스를 이 세상에 퍼트립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무관심의 바이러스를 전염시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책이 손에 들려지지 않고 책꽂이에 꽂아 두게 합니다. 기도는 순간적으로 후닥닥 해 치워 버리거나 잠이 쏟아지게 만듭니다.
여러분! 인생의 장애물이 다가올 때 힘을 모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냥개비 하나는 힘없이 부러집니다. 그러나 성냥개비 열 개가 모여지면 쉽게 부러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혼자는 장애물 앞에 너무도 연약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강해집니다. 가족들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온 교인들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 기도함으로 여러분의 문제가, 우리 교회의 어려움이, 이 나라의 걱정 근심이 다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로 담대히 전진해야 합니다.
생물학자 카프만 여사가 쓴 ‘광야의 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누에고치 4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관찰했습니다. 누에고치 하나에 바늘구멍만한 구멍이 하나 뚫렸습니다. 그 구멍이 조금씩 커지더니 그 구멍을 통해 작은 나방 한 마리가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드디어 나방 한 마리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가뿐하게 날개 짓을 하며 날아다닙니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그 사람이 다른 누에고치에다가 나방이 좀 더 쉽게 나올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나방은 별 고생도 하지 않고 쉽게 고치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쉽게 빠져 나온 그 나방은 날개를 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얼마 못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나방이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으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나방의 몸에 묻어 있던 체액이 나방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나방의 몸이 가벼워집니다. 그 체액은 나방의 몸속에 들어가 나방에게 영양분을 공급해 줍니다. 그리고 몸부림을 치면서 날개와 어개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와서 힘차게 하늘을 향해 날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 때문에 우리는 삶이 힘들다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때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장애물이 우리의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의 신앙을 능력 있는 신앙으로 만들어줍니다. 인생의 장애물이 없는 삶이 축복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 장애물이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걸려 넘어지라고 우리 앞에 장애물을 두신 것이 아닙니다. 뛰어넘어 더 큰 축복의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장애물을 우리 앞에 두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수많은 장애물들을 넘어왔고 앞으로 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애물은 우리가 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장애물이 내 앞에 다가올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담대하게 맞설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떨거나 자기 힘으로 넘으려 할 때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애물 앞에 서 있는 우리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금번 3월 특별새벽집회를 통해서 기도하며 힘을 모아 담대하게 나아갈 때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의 모든 장애물이 사라지고, 원하는 모든 소원이 다 응답되고, 승리하고 형통하는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임할 것입니다.
새벽을 준비하는 느헤미야
느 2:11-20 / 김동국목사
우리 사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가정의 울타리가 헐렸습니다 느헤미야를 사용하셨던 하나님,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주님은 이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누가 이 새벽을 맞겠습니까?
2001년 6월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점치는 집의 수가 1만1천4백54개라고 합니다. 다방과 찻집의 수는 4만4천3백60개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찻집 4개당 1개가 점집인 셈입니다. 이렇게 많은 점집이 있고 수 많은 무속인들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이들을 신앙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인과 무속인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신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있습니다. 무속인들은 자기가 중심이 되어 신을 이용합니다. 점을 보고 굿을 하고 부적을 붙이는 일련의 행위들로 신을 달랩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복을 얻습니다.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자기를 부정합니다. 신앙인은 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복과 욕망을 채우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자신을 아낌없이 드립니다. 이것이 신앙인입니다.
진정한 신앙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그렇습니다. 믿음은 죽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사십니다. 내 안에 사는 그 분을 따라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느헤미야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고, 하나님의 환상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고 나아갔으니 느헤미야의 길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마게도냐의 환상을 보고 나아갔던 바울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모진 매와 감옥이었습니다. 한동대 김영길 총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총장을 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첫번째 두번째 제안을 거절하고 세번째 제안이 왔을 때, 장로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순종했습니다. 부름 때문에 따라갔지만, 장로님을 기다리는 것은 부채와 고난과 감옥이었습니다. 부름 때문에 바벨론을 떠난 느헤미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패배한 역사와 낙망한 백성들, 그리고 대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느헤미야가 한 것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한 지 삼 일에
느헤미야는 적어도 두 달 이상의 여행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의 호위병과 함께 화려하고 위풍당당하게 입성하는 모습은 황폐한 성읍에서 소망없이 사는 유대인들에게는 놀라움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관심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지 않고 머물러 있었습니다. 왜 행동하지 않고 3일 동안 쉬었을까요.
서두르는 것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서두르는 것이 좋지도 않습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가고 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소문을 들은 후 그는 마음에 근심을 감출 수 없어서 왕에게 근심을 들켰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3일 동안 그냥 머물러 있었습니다.
‘머무름’의 의미
이 머무름에는 세 가지 영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첫째로 이 기간은 느헤미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객관화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목숨을 걸고 이루어야 할 사명이지만 느헤미야는 개인의 지혜와 힘으로 그 일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고위 관리들을 만나며 정치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했습니다. 부자들을 만나면서 경제적인 지원을 요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전 재건의 사명은 누구의 사명입니까? 개인의 것입니까, 민족의 것입니까? 성벽 재건의 주인공이 느헤미야입니까? 아닙니다. 주인공은 그 땅에서 아픔을 겪고 있는 유다민족입니다. 느헤미야의 ‘여유’는 예루살렘 재건이 느헤미야 한 사람의 일이 아닌 모두의 일이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느헤미야의 머무름은 유다민족의 행동을 부추겼습니다.
둘째로, 이 머무름은 사람의 지혜와 힘이 아니라 사람의 가슴에서부터 일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요란합니다. 작은 것을 큰 것이라고 떠듭니다. 자신이 없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것처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원하는 것은 떠들썩한 변화가 아니라 조용한 혁명입니다. 느헤미야는 침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머물면서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맡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되새깁니다.
성벽이 재건되어야 할 곳은 총독의 관저가 아닙니다. 부자들의 집이 아닙니다. 성벽이 재건되어야 할 곳은 여인들이 유린당하고, 어린이들이 먹을 것을 찾아 헤메는 거리, 밤이 찾아와도 잠들 수 없는 억울함이 있는 통곡의 땅, 주님의 찢겨진 가슴이 있는 곳, 주님의 꺾여진 무릎이 있는 바로 그 땅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벽 재건을 위해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지만, 느헤미야는 역사의 새벽을 맞기 위해 하나님과 함께, 민족과 함께 그 아픔의 자리에서 동고동락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새벽을 깨우는 첫 삽질, 첫 곡괭이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2~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세상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두 단어로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서지 않고 ‘물러가셨다가’ ‘거기서 사셨습니다’. 주님의 공적 사역은 고통받고 있는 그 땅의 백성들과 머물러 함께 떡을 먹고, 그들의 눈물을 보고, 그들의 아픔을 나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느헤미야도 그렇게 시작합니다. 느헤미야는 사람을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권력으로 압력을 가하지도 않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습니다. 평생 살아온 깊은 가슴, 그 가슴을 나누며 사역을 시작합니다. 어디에서 역사의 새벽을 맞을 수 있습니까? 동 트는 민족의 가슴에서 새벽을 맞을 수 있습니다. 3일의 안식은 개인의 사명을 객관화 했고,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민족의 가슴으로 사역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용기
마지막으로, 머무르며 지냈던 그 시간은 느헤미야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폐허 속에 도착한 느헤미야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용기였습니다. 예루살렘의 환상을 갖고 도착한 느헤미야가 직면한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벨론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그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저항군인 반페르시아계가 예루살렘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적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성벽을 재건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가 홀로 바로 왕 앞에 섰던 것처럼, 느헤미야는 절벽과 같은 상황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였습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격려하십니다.
“느헤미야야 걱정하지 말아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피해가도 상황은 변하지 않고, 뚫고 가도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용기를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합니다. “가자,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백성들을 이끌고 나갑니다. 그는 대적자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조롱했지만 느헤미야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실 것이다. 너희들은 이 기업을 함께 위업으로 받을 수 없다. 떠나가라.”(20절)
세상 끝에 서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느헤미야의 이 용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주목하십시오. 그분에게 마음을 드리십시오. 그분과 함께 머무르십시오.
지금은 ‘역사의 새벽’ 깨워야 할 때
이제 느헤미야에게 행동의 때가 왔습니다. 12~16절을 보십시오.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을 내가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쌔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본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소화되었더라 앞으로 행하여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그 밤에 시내를 좇아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본 후에 돌이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서 돌아왔으나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인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고하지 아니하다가
3일 동안 쉬고, 침묵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용기를 얻은 느헤미야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쉴 때가 있으면 일할 때가 있습니다. 지도자는 종종 다른 사람이 잠잘 때 깨어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쉴 때 일을 합니다. 대적을 의식한 느헤미야는 한밤중에 일어나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기 위해 예루살렘을 시찰했습니다.
지도자들은 공상의 세계에 빠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실을 직시하고 직면해야 합니다. 좋은 소리 뿐만 아니라 좋지 않는 소리도 분별력있게 들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시찰하고 모든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모든 정보를 수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꼭 필요한 정보를 얻었고, 성벽 재건을 위한 설계를 마쳤습니다.
설계를 마친 느헤미야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가서 외쳤습니다. 17, 18절을 보십시오.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헤미야의 호소는 열정적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단순하고 분명했습니다. 이 단순한 도전 앞에서 유다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왕의 마음을 움직였던 하나님은 이미 그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패배했던 과거를 들먹거리지 않았습니다. 자원하고 헌신했습니다. 자신들의 생명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여전히 황폐하고 무너진 돌무더기는 거리를 막고 있었지만, 이미 이들은 역사의 새벽을 깨우고 승리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교육이 무너지고, 가정의 울타리가 헐렸습니다. 느헤미야를 사용하셨던 하나님,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주님은 이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깨우시고 새벽으로 부르십니다. 누가 이 새벽을 맞겠습니까?
큰 일을 시도하려면
느 2:11-20 / 엄기호목사
사람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큰 일을 계획하기도 하고 계획 없이 큰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큰 일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내게는 큰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작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일을 작은 일이라 해도 내게 있어서 큰 일은 역시 큰 일입니다. 우리는 큰 일을 어떻게 처리했느냐에 따라 성공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실패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큰 일을 행하려고 합니다. 그 큰 일이란 바로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는 일입니다. 그는 지금 포로의 몸으로서 멀리 메데 바사에 있으나, 다행스럽게 출세하여 수산궁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가 성을 중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큰 일을 시도하기로 결정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느헤미야가 이 큰 일을 행하려는 모습을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기도로서 사람을 움직인다
모든 인간사를 살펴보면,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성공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의 실패는 궁극적으로 인간관계의 실패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이나 경영학은 인간관계에서 지혜와 기술을 터득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세상적인 방법보다 훨씬 탁월한 인간 경영의 방법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로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성공적인 선교를 했던 선교사에게 어떤 사람이 선교의 비결을 물어왔습니다. 그때 그 선교사가 유명한 대답을 했는데, 곧 “오직 기도로 사람의 사람을 움직였을 따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로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내 힘으로 남편을 움직이려 하지 말고, 내 힘으로 아내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지 말고 오직 기도함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 때 알아야 할 것은 먼저 대상을 알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벽을 향해 부르짖는 독백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나 어떤 철학자들처럼 자신의 양심을 향해 스스로 기도하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을 갖추신 하나님을 향해 드려지는 간구인 것입니다.
올해를 시작할 때 이 새 천년에는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년과 다름없이 올해도 뜻하지 않은 때에 큰 시련과 환난의 어두운 밤이 닥쳐오기도 했습니다. 잠시라면 참을 수도 있고 소망을 가져볼 수도 있으나, 기대했던 기간이 지나고 고통이 연장될 때는 누구나 이처럼 홀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기가 쉽습니다. “아! 나는 이제 하나님께 버림받고, 또 사람에게도 버림을 받은 자가 되고 말았구나.” 이러한 심정은 가장 무서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려운 일은 끊임없이 몰아치고 누구하나 자신을 이해하거나 인식해 주지 않는다는 외로움과 좌절감에 사로잡힐 때 “나는 이제 그만이다. 끝장이다. 아무 소용도 없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러한 때는 누구나 예측할 수 없는 위기의 십자로에 서게 됩니다. 잘못하면 무서운 타락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존재마저 부인하는 무신론자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또 숙명론적인 자포자기의 어둠 속으로 말려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진실한 신앙생활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러한 때라 해도 낙심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찾고 간구하면 멀지 않은 장래에 큰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주려 죽게 된 한계 상황에 처했을 때 홀연히 잊고 있었던 아버지를 생각한 것처럼, 결코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알렉산더 대왕보다 더 위대하시고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자비하시고 크신 일을 이루시는 위대하신 분으로 믿고 구하면 어떤 일이든지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하되 우리의 해야할 일은 해야합니다.
무디 목사님이 어느 날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는데 그 배 안에서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배 안에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 목사님이 있다는 것을 안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불이 났습니다. 기도 좀 해주십시오.” 그러자 무디 목사님은 황급히 일어나시면서 “아니오. 물동이를 가져와요. 물을 부어 불을 끄면서 기도해야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때 무디 목사님이 그 사람의 요구대로 배 뒤편에서 기도만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라
오늘날 우리는 분주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를 가나 기다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돈을 찾으려고 은행에 가도 기다려야 하고,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하려해도 기다려야 하고, 약혼한 젊은 남녀는 결혼할 날을 기다리고, 월급쟁이는 월급날을 기다립니다.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기다리는데 쓰고, 마음과 생각과 계획들을 기다리는 일에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소식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기회를 기다려야 합니다. 성도는 주일날을 기다리고, 또 곧 재림하실 주님을 고대하며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기다릴 때 변화가 되고, 기다릴 때 좋은 세월이 오고, 기다릴 때 전진과 발전이 있으며, 기다릴 때 응답과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보통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고 실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이 배워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기다리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2장 1절에 느헤미야가 기도한 후 넉 달을 기다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넉 달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수심에 찬 얼굴로 왕 앞에 갔습니다. 당시 시중을 드는 사람이 얼굴에 수심을 띠면 그 순간부터 지위가 박탈당하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왕은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면서 부드럽게 묻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조상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황폐하고 황무하였는데 어찌 제가 편안히 살며 제 얼굴에 근심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 동안 하나님께 드린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놓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기도의 사람’이라고 하면, 흔히들 이 세상을 등지고 산 속이나 기도원에 들어가 세상물정도 모르면서 밤낮 “주여!”만 외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기도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눈을 뜨고 기도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대해 눈을 뜨고 냉철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이며, 열린 귀를 통해 주위 환경의 소리를 듣고 가슴 아파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의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보면 양극단에 빠지게 되는데, 한 극단은 기도하지 않고 마음대로 계획하는 사람이요, 한 극단은 기도는 하는데 계획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계획한 후에 하나님의 손으로 나를 도와주심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큰 일을 이루도록 인도하십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린 끝에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20년을 기다려 소와 양과 약대가 한 떼 두 떼 등 큰 무리를 이루었고, 요셉은 13년을 기다린 끝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만민의 생명을 살리는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장애물을 극복하라
우리가 큰 일을 시도하려면 반드시 장애물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느헤미야가 성을 건축할 때에도 산발랏과 도비야가 이스라엘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을 하였을 뿐 아니라, 결국 이들이 문제를 일으켜 성을 건축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한다 해도 하나님은 때대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십니다. 너무 잘되면 우리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될까봐 항상 반대자들을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경과 반대에 부딪히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계속하려는 우리의 결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대한 것을 꿈꾸는 사람에 의해서 역사는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하나님,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는 구원해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고 우는 자에게는 위로를, 가난한 자에게는 풍성함을, 비천한 자에게는 높임을, 잡힌 자에게는 놓임을 주시고, 또 병든 자에게는 고침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큰 일을 시도하려 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함으로 사람을 움직이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도함으로 어떤 장애물이든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일을 계속하기로 결심합시다. 그럴 때 내 앞에 강과 바다가 열리고 산이 열림같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는 엄청난 축복이 임합니다. 2002년 한 해를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잘 보내고, 내일부터 시작되는 2003년을 맞이하여 성공, 축복, 승리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한 손을 믿고
느 2:11-20 / 이수영목사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많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살게 된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이 또 페르시아 제국에게 정복을 당하고 멸망했으며 바벨론에 끌려와 살던 유다 백성의 새 통치자가 된 페르시아의 왕의 새로운 정책에 따라 바벨론의 유대인들이 고국 땅으로 돌아가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도 다시 건축할 수 있게 되자 귀향의 역사가 시작되었음도 또한 알고 있습니다. 세력과 영토를 계속 넓혀간 페르시아제국이 동쪽으로는 인도와 국경을 같이 하며 서북쪽으로는 마게도니야와 서남쪽으로는 이집트와 리비아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다스리던 때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궁정에 느헤미야라는 한 유대인이 술 관원으로 있었음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느1:3)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슬퍼 울며 금식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자기도 고국 땅으로 돌아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중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느1:11) 아닥사스다 왕의 호의적인 허락과 유다 총독으로서의 지위와 성벽 재건에 필요한 물질적 지원을 위한 조치들을 얻어내 예루살렘에 오게 되었음을 돌아본 바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돌아온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중수의 역사를 시작하기 직전까지의 그의 활동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이 준비과정 속에서의 느헤미야를 주목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우선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청원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조금 앞서는 2:7-8을 봅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한 것입니다. 이 청원 속에는 두 가지 요구사항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까지 가는 동안 통행의 제약을 받지 않도록 조서를 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왕의 삼림 감독 아삽이 예루살렘 성곽과 문과 느헤미야가 거할 집에 쓸 재목을 공급하도록 조서를 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혜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벽을 중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치밀하게 조사하고 신중하게 그 일을 추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에서 유다까지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프라데스 강을 건너 서쪽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데 왕의 허락 없이는 그곳 총독이 그 누구도 통과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건축에 쓰일 자재의 확보가 필수적임을 생각했고 어디서 자재를 공급받을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를 움직여야 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려달라고 청원했는데 아삽은 히브리 이름입니다. 즉 그는 유다 백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목재는 레바논에서 공급되곤 했는데 아마도 유다에 인접한 레바논에 있는 왕 소유의 삼림을 감독하는 사람이 유다 사람이라면 왕이 조서만 내려주면 잘 협력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사실을 느헤미야는 면밀하게 조사해서 알아놓았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자기의 계획을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잘 이해시킬 수 있을지 그 때와 방법 또한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의 중수와 민족공동체의 재건의 뜻을 품은 지 넉 달 동안 그는 그저 슬피 울며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그가 단계적으로 취할 모든 일을 곰곰이 구상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먼저 무너진 성벽 터를 직접 꼼꼼히 돌아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13-15절은 그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치밀할 뿐 아니라 부지런하면서도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11-12절을 봅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먼저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성벽 터 현장점검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고 할 때는 금요일 해 지기 전에 돌아가셔서 주일날 새벽 동트기 전에 부활하셨다는 말입니다. 사실상 그 사흘 중에 온전한 날은 하루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보면 느헤미야가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라고 한 것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다음날 딱 하루 쉬고는 그 다음날로 성벽 터 현장점검에 나섰다는 말입니다. 그 머나먼 길을 오느라고 쌓인 피로를 풀자면 한 주일쯤 필요할 법도 한데 그러기에는 느헤미야는 너무나 부지런한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그가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마음에 있는 계획을 먼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터를 살피러 나가기 전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6절에도 보면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족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내부에도 유다의 대적들과 내통하는 사람들이 있을 가능성을 숙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전에 정보가 새어나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반대와 방해에 부딪치는 것을 피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족의 지도자들이 다함께 성벽중수와 민족공동체재건에 나서게 만들기 위해서는 탁상공론이 아니라 현장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기초한 대안을 제시하며 설득해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계획을 내놓기 전에 현장을 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터를 보러 나갈 때 “밤에 일어나” 나갔고 그것도 “몇몇 사람”하고만 나갔습니다. 그 몇몇 사람이라는 것도 아마 주로 현장지리를 잘 아는 안내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또한 철저한 기밀유지를 위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한 것은 자기 혼자만 나귀를 타고 갔다는 말입니다. 여럿이 말을 타고 가면 고요한 밤에 남의 눈에 띄기도 쉽고 말발굽 소리와 말울음 소리 때문에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말보다는 소리를 작게 내는 나귀를 타고 갔으리라 봅니다. 아무튼 대단히 신중한 느헤미야의 행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비밀리에 성벽 터를 둘러본 느헤미야는 앞으로 자기가 행할 일들을 다시 한 번 숙고한 후에 드디어 백성의 지도자들을 만난 설득작업에 나셨습니다. 본문 17-18절을 봅니다: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심을 되찾자는 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정신적, 정치적 구심점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하신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안전히 지켜져야 할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벽이 다 무너지고 문이 다 불타 없어진 채로 긴 세월 동안 방치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지극히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음을 역설하고 지도자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한 것입니다. 물론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의 삶의 여건이 열악했고 스스로 성벽을 건축하기에 재력도 부족했음을 느헤미야가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불가능항 일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느헤미야는 지도자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는 그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때까지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셨음을 간증했습니다. 그러자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귀족들이 한 입으로 말하기를 “일어나 건축하자.” 했고 모두 힘을 내어 그 선한 일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항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다 일어나 성벽을 건축하기도 하자 그 사실은 곧바로 유다의 북쪽과 동쪽과 남쪽의 모든 인접지역의 행정관들이 일제히 방해공작을 시작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은 예루살렘의 성벽이 중수되고 유다 민족의 공동체가 재건될까봐 마음 졸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의 9-10절을 보면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했습니다. 페르시아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던 자가 유다의 총독이 되어 돌아왔다면 그 동안 그들이 누린 유다에 대한 통치와 행정권을 잃게 될 것이 뻔하였기에 그들은 근심 가운데 느헤미야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유다의 지도자들이 성벽을 건축하자고 다 일어나니 이제는 노골적으로 방해작전에 돌입한 것입니다. 본문 19절을 봅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계략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 백성을 업신여기는 말로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했습니다. 그 말은 “도대체 될 일을 해야지. 너희가 정말 그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보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계략은 유다 백성에게 겁을 주어 공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했습니다. 이들은 전에도 이런 식으로 유다 백성과 페르시아 왕 사이에 이간질을 벌여 왕이 성벽재건공사의 중단을 명하는 조서를 내리게 하는 성공을 거둔 바 있습니다.
그러자 느헤미야가 나서서 반박했습니다. 본문 20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느헤미야는 그 대적들의 비웃음과 겁박이라는 양면 전략을 페르시아 왕의 명령과 조서에 의거해서 공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그들도 다 알고 있는 바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오직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종들로서 그의 뜻을 받들어 성벽을 건축하려 할 뿐이라는 신앙고백으로 맞섰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느헤미야는 그 대적들에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고 잘라 말하며 성벽 건축하는 일에 참견하지 말 것을 단호히 표명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얻어먹을 것도 없고 그럴 권리도 없으며 그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만큼 기여한 바도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적으로 유다 백성과 함께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중수하는 일은 유다 백성의 신앙의 문제이고 그 순수성을 회복하며 유지하기 위한 일이니 하나님을 바로 알지도 못하고 섬기지도 않는 자들과는 상관없는 일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느헤미야의 지도자로서의 열정과 치밀함과 부지런함과 신중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지도력은 역시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선한 손을 믿고 예루살렘 성벽중수와 민족공동체 재건에 나선 것입니다. 그는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선한 손으로 함께하실 것을 확신하며 그를 의지했습니다. 그는 그 자신 최선을 다해 연구하고 계획을 세우며 추진했지만 모든 것을 자기가 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한 손의 역사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라.” 이것이 그의 신념이고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지혜요 힘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한 손만을 의지하는 느헤미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 허락하셨습니다.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유다까지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조서와 왕의 삼림 감독에게 건축에 쓰일 재목을 공급하도록 하는 조서를 내려달라는 청원만 했을 뿐인데 왕은 느헤미야에게 군대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그와 동행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느혜미야가 요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스스로 한 일입니다. 아니 느헤미야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와서 왕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느2:8-9). 느헤미야가 그것을 받아들인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산발랏을 비롯한 대적들에게 그가 왕의 권위와 지원을 입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새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느헤미야의 믿음은 우리에게 깨우치는 바가 큽니다.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방해하는 사람도 있으며 비웃는 사람도 있고 겁을 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 건축하기에는 너무나 경제적으로 약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처럼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라.”는 믿음으로 나아가면 다 이루고도 남을 것입니다. 느헤미야처럼 기도도 많이 해야 하겠지만 우리의 지혜와 역량을 총동원하여 최선의 준비를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최선을 다하되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뜻을 잘 받들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을 믿고 새 성전 건축의 큰일에 다함께 힘과 지혜를 모으는 우리가 됩시다.
예루살렘을 위해
느 2:12 / 강성찬목사(전주동부교회)
(느 2:12)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영국의 양심'(God's Politician, 두란노, 2001 가트 린 Garth Lean)에서는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lberforce 1759-1833)가 헌신된 그리스도인이며 나라를 사랑한 사람인 것을 증언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자 청년이며 하원의원이었던 윌버포스는 웨슬레의 영적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회심한 그는 쾌락과 출세와 명예를 따르던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들려주시는 내면의 음성에 순종하면서, 나라와 인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 헌신하기로 다짐했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과 많은 식민지로 인해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으나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서 사회정의에 문제가 많았고, 방탕과 술 취함으로 타락한 사회였다고 합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윌버포스는 한 나라의 영적인 건강이 기독교를 믿고 실천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나라의 도덕적 중생에 헌신하기로 다짐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사명이 노예무역의 근절과 관습을 개혁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일생을 그 일에 헌신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윌버포스를 후세의 사가(史家)들이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활동한 시기에, 영국은 가장 잔인하고 살벌한 나라에서 가장 절제하고 예의바르고 질서정연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주의를 19세기 영국인의 인격의 토대가 된 반석이라고 묘사했다고 합니다. 윌버포스는 헌신된 그리스도인이면서, 나라를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우찌무라 간조오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복음에는 국경이 없지만 크리스천들에게는 자기가 섬겨야 할 조국이 있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의 크리스천은 일본 민족을 섬기고, 미국 크리스천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섬기고, 조선 크리스천은 조선 민족을 섬겨야 한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본분이다.’ 라는 글을 썼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 같이 애국자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나라 없이 애굽에 종살이하던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목숨을 던졌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보장된 희망찬 미래를 나라를 위해 포기했습니다.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려면 차라리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라고 합니다.
바울도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나라 사랑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주는데 우선 나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합니다. 비록 위정자들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어서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다해서 따를 수 없는 점도 있을 수 있으나 그래도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용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존경하며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선하게 감당하라고 합니다.
롬 9장을 보면 이방인을 위한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마음이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기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한다(롬9:3)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시 삼일절을 맞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며 헌신 했던 많은 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3.ㅣ운동당시 당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이 체포되자 일경은 온갖 고문을 하며 배후를 밝혀내려 하였다고 합니다. ‘누가 3·1 운동을 시켰소?’ 라는 일경의 물음에 이상재 선생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하나님이 시켰소.’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일경은 다시 ‘3·1 운동 본부는 어디에 있소?’하자 선생의 대답은 ‘하늘에 있소이다.’라고 한결같았다고 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취조하는 검사에게 ‘나는 밥을 먹어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자 검사는 ‘그러면 당신은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일본의 실력을 모르는가?’라고 질문하자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나라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갖기를 원한다.’ 하니 ‘그건 무슨 뜻인가?’라고 다시 묻자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인 우리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다. 2천만에게 원한을 품게 하는 것보다 우정을 가진 2천만을 이웃으로 두는 것이 일본에게 득이 될 것이다. 내가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라고 예상치 못했던 대답을 하자 도산 안창호를 취조하던 일본인 검사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고 하기도 합니다.
느헤미야가 살던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에게 나라를 빼앗겨 포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바사의 수도인 수산 궁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유다인 이었습니다. 느헤미야 이전에도 상당수의 유다 지식인들이 바벨론과 바사 제국의 관리로 봉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귀와 안일에 안주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을 위해 일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셨다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 1: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고국에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고국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과 가치관, 그리고 삶과 제도가 하나님을 향해 가야 합니다. 기도실에서의 기도와 함께 삶과 행위에서의 기도를 함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삶이었다고 합니다. 회개와 기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성도가 해야 할 일인 줄로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금식하며 자기의 기도가 이루어지기까지 끊임없이 기도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가 헛되지 않을 줄을 믿었기 때문에 주야로 울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에스라처럼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악을 연대 책임지고 친히 자기의 죄처럼 여겨 회개하며 기도한 사람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여호와를 ‘하늘의 하나님’으로 칭함으로써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고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무한히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조차도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그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회개치 않는 자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이지만, 회개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지키는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시 103:17)라고 합니다.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5)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의하여 그의 백성들과 관계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의 말씀은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그의 신실하심과 진실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언약을 이행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그의 말씀대로 다 이루십니다. 그의 언약의 성취에 있어서 때로는 오랜 세월이 걸리기도 하지만 마침내 이루시고야 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으로서 긍휼을 베푸시며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심을 알고 신실하게 의지하고 믿어야 하겠습니다(신 7:9; 롬 4:13).
시 79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의 시라고 합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진정한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시 79:13)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 열강들이 우리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위정자들 지도자들 저들이 이 나라를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잠시 쓰일 뿐입니다. 이 나라의 오늘과 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런 철저한 신앙고백 위에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라는 기도가 우리의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기도가 나라를 지키는 힘이 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위해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지혜자는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14:34) 고 합니다.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회복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고 합니다. 아니 진보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도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주 앞에 범죄 했음을 자복했습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느 1:6)라고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리고 깊이 자복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열국 중에 흩어진 것은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곧 나와 나의 아비 집에 원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겸비와 회개입니다. 에덴에서 최초의 인류는 범죄 후 하나님의 책망에 범죄의 원인을 남에게 전가했습니다. 여자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고 말했고 남자는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13)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 인류의 범죄 심리는 언제나 ‘나 때문’이 아닌 ‘남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내가 못 사는 것은 남이 내 몫을 더 많이 착취해 간 때문이요, 내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회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유다의 모든 죄가 ‘나와 나의 아비 집’의 범죄임을 자복하였습니다.
그는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았음을 자백했습니다.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느 1:7)라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자기의 민족과 자기 조상의 집이 포로로 잡혀간 이유를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않은 데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회나 국가가 패망하는 원인도 전통과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데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함께 할 줄 믿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 새(느 2:12)라고 합니다.
신앙의 사람은 그 마음을 하나님께 토하고(시 62:8) 사람들을 삼가 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자기의 할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지혜로운 처신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감동을 통해서 받은 사명조차도 얼마 동안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큰일을 하는 자는 말을 앞세우지 않고 은밀한 중에 말없이 준비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약 1:19) 한다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벽을 쌓는 큰일을 이루기 위해 먼저 은밀한 중에 준비 작업을 하였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하기 전에 비밀리에 예루살렘 성의 폐허부터 시찰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예루살렘 성을 시찰한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느헤미야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치밀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심사숙고한 후에 완벽한 준비와 계획을 가지고 성을 쌓는 일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제는 자신에 넘치는 격려와 권고를 하며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일이 진행되리라는 것을 알리고 '일어나 건축하자'고 외칩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하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느 2:17-18)였다고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의 재건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였다고 합니다.
가리발디는 19세기 이탈리아의 개혁과 통일운동에 공헌한 국민적 영웅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가리발디가 청년들을 모아놓고 민족을 위해 싸우자고 역설하자 한 청년이 나와서 "만일 내가 조국을 위해 싸운다면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가리발디는 단호하게 "칼에 베인 상처, 심한 부상, 끝내 죽음이 대가로 주어질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대들의 상처와 죽음으로 이탈리아는 자유로운 나라가 될 것이요, 우리의 후손은 평화롭게 살 것이었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고자 할 때 여러가지 어려움도 따르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라 사랑을 삶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나라 사랑이 가득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한 병사가 가슴에 총탄이 박혀서 그것을 빼내는 수술을 받는 중에 “좀 더 깊이 째 보십시오. 내 가슴 속 깊이 조국이 들어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시인 브라우닝은 “내 마음을 열어보면 마음 깊이 새겨진 한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은 바로 조국이다 고 노래했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슴 속에 조국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아! 대한민국”이 소중한 이름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위해서도 함께 하여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요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며 하나님의 나라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과 행복으로도 가득 찬 세상입니다. 이웃과 함께 나누며 고난 받는 자들을 위로하며 슬픔을 함께하고 기쁨을 함께 누리는 아름다운 곳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영광의 왕국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 합니다.
재미있는 통계가 있다 합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조사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교인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25%의 교인이 기도를 안하고 있고, 35%의 교인이 성경을 읽지 않고, 60%의 교인이 신앙 관계 서적을 읽지 않고, 70%의 교인이 교회 활동을 외면하고 있고, 85%의 교인이 한 명의 영혼도 인도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해서 100%의 교인이 하나같이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생활 그 자체가 복된 길이요, 영원한 하늘나라를 향한 영생의 삶입니다.
새 예루살렘 곧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진심으로 헌신하며 봉사하며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짐은 국가다’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스의 독재자 로이 14세 장례식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황금으로 만든 관에 누워 대성당 중앙 앞에 안치되었다고 합니다. 대성당 내부의 등불은 다 꺼진 채 오직 한 자루의 큰 초만이 황금 관을 비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루이 14세야 말로 가장 위대한 왕이었음을 나타내고자 함이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유럽의 각국에서 왕들과 귀족들이 모여들었고 장례 의식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 돌연 집례하던 사제가 그 초를 끄고는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에 빛나는 위대한 왕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섬길 때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영광 제일 중심해야 한다는 이 점을 철저하게 인정하며 사명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위해서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위해서도 함께 하여야 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고 천하보다 귀한 영혼 사랑으로 전도하되 이 땅의 예루살렘이라 할 수 있는 유다 나라를 위하여 느헤미야가 기도하며 회개하고 헌신했던 것처럼 우리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거룩한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주어진 사명 감당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장애물을 넘어서
느 2:17-20 / 박봉수목사
육상경기 중 허들경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110미터 허들경기는 110미터 트랙에 설치된 높이 106.7cm의 허들 10개를 뛰어넘는 경기입니다.
이 경기의 특징은 우선 9.14미터마다 나타나는 허들을 계속해서 넘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 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 넘어야 하고 또 넘어야 하고 경기 마칠 때 까지 계속 허들을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경기를 완주하려면 담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허들의 높이가 106.7cm인데 일반인들은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높이에 겁을 먹고 이 경기를 해 보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두려움을 없애고 뛰어보면 웬만한 사람은 대부분 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허들경기가 우리네 인생과 너무도 비슷합니다. 인생을 마치는 날까지 힘겨운 장애물이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하나 끝났나 싶으면 어느새 또 다른 것이 나타나 힘들게 합니다. 계속해서 다가오는 인생의 장애물을 넘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장애물들은 하나하나 모두가 우리를 두려워 떨게 합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러나 또 담대한 마음으로 달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 느헤미야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느헤미야에게 끝없이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온 힘을 기울여 그 장애물들을 넘고 있습니다. 성공적으로 그 장애물들을 하나씩 넘고 있습니다. 마치 금메달을 딴 선수의 허들 경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느헤미야를 자세하게 읽어보면 저들이 넘어야 했던 장애물들이 여러 가지가 나타납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귀환 이후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 힘겨운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70년 넘게 그 땅을 차지하고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기 땅이라고 나타난 사람들에게 선선히 그 땅을 내줄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다음으로 3차 포로귀환 때 백성을 이끌고 돌아온 느헤미야가 그 땅에 자리 잡게 되자 성벽을 재건하고자 했습니다. 이 때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힘을 합해서 방해했습니다. 저들의 집요한 방해가 또한 저들에게 또 다른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한 뒤에 과감한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합니다. 이 때 도비야를 중심으로 일부 제사장 무리들이 성전 안에서 은밀하게 악한 일들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이 또한 저들에게는 감당키 힘든 장애물이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장애물들이 계속해서 밀려왔습니다.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었습니다. 하나 넘었나 하면 또 다른 것이 다가옵니다.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물러서지 않고 이 장애물들과 당당히 맞섰습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 장애물들을 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장애물을 잘 넘을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이것이 장애물을 넘어야하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기도했습니다.
구약성경 느헤미야는 한 마디로 기도의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장에 보면 느헤미야의 기도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내용도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13장 마무리도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이어지고 기도로 마치는 책이라는 말입니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느헤미야는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기도부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1:4를 보면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소식을 들어보니 앞서 돌아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환난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느헤미야는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2:11을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한 지 삼일에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제일 먼저 다른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일간의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마음을 감화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정착해야 할 힘겨운 장애물 앞에서 저가 기도부터 시작한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4:1-4를 보면 “산발랏이 ... 비웃으며, 암몬 사람 도비야는 ...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우리 하나님이 들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성벽건축을 시작하려 하자 거센 방해가 시작됩니다. 느헤미야에게 감당키 어려운 장애물이 나타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장애물이 나타나자 바로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느헤미야의 장애물 넘는 힘은 바로 기도에서 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해보고 싶었지만 아직도 해 보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서핑입니다. TV나 영화에서 여러 차례 그 멋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서핑 보드를 타고 밀려오는 파도를 멋지게 타고 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수들은 더 큰 파도를 타고 싶어서 호주 해안을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파도가 클수록 멋진 장면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마치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큰 장애물이 밀려와도 기도는 서핑보드처럼 우리를 타고 넘게 해 줍니다. 기도를 잘하는 사람들은 그 장애물을 넘어도 멋지게 넘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서툴러도 기도를 하기만 하면 그 장애물에 삼키우지는 않습니다. 서핑보드를 타지는 못해도 잡고만 있어도 파도를 넘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파도가 밀려오는데 서핑보드가 없으면 정말 큰일입니다. 수영을 잘해도 파도가 밀려오면 헤어 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어렵사리 헤어 나온다고 해도 정말 죽을 고생을 하게 됩니다. 파도가 심하면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라 해도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우리를 지켜줍니다. 기도가 우리의 갈 길을 안내해 줍니다. 기도가 우리를 다가오는 장애물을 넘게 해 줍니다. 본문의 느헤미야는 마치 서핑보드 프로선수와 같습니다. 멋진 모습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넘는 선수처럼 다가오는 인생의 장애물을 어쩌면 그렇게 멋지게 넘는지 정말 부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기도를 다시 시작하십시오. 기도를 더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우리 인생의 장애물을 멋지게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힘을 모았습니다.
2:17-8을 보면 느헤미야가 유다 사람들, 제사장들, 귀인들, 방백들, 그리고 성벽을 짓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 그들을 설득합니다. 그리고 모두 힘을 합해서 이 선한 일에 동참케 합니다.
3장을 보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이 한 일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를 도와서 성벽 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이 한 일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호소를 받아들여 한 마음 한 뜻을 모아 밀려오는 거대한 장애물을 극복한 기록인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느헤미야의 지도력의 탁월함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지도력이란 일반적으로 “추종자들에 대한 영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도력이 탁월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말을 잘 듣고 따르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번에 중국선교여행을 하면서 또 한번 중국의 저력과 빠른 발전에 두려움마저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저 빠른 발전 뒤에는 중국 지도자들의 탁월한 지도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은 최근 후진타오라는 젊은 지도자가 장쩌민의 바통을 받았습니다. 세계가 이 사람의 지도력을 주목해 왔습니다. 놀랍게도 후진타오는 벌써 장쩌민보다 국민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중국은 대내적으로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대단한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빈부격차입니다. 중국은 호리병과 같아서 국민의 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전체 국부의 50% 정도를 가지고 있어서 7000만 명 정도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살지만 70%가 넘는 사람들은 절대 빈곤에 가까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의 말을 믿고 참고 따라갑니다. 온 국민이 나라 발전에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점차 나아질 비전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한 마디로 지도력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마음으로부터 신뢰하지 않습니다. 지도자가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하고만 대화하려하고 자기와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들은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대통령이 앞장서서 국민들의 힘을 갈라놓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정책적 결정이 국회나 이익단체들로부터 비토를 당합니다. 국민들이 사사건건 반대하고 시위를 합니다. 뭐 하나 국책사업들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외국인들의 투자는 급격히 위축되고 있고 나라는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두 종류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하나는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로 뭉치는 공동체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힘을 모아서 그 위기에 대처합니다. 다른 하나는 위기를 만났을 때 흩어지는 공동체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서로 책임 공방을 벌입니다. 서로 다투고 싸웁니다. 자중지란이 일어나 작은 위기도 큰 위기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장애물이 다가올 때 힘을 모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냥 한 개비는 힘없이 부러집니다. 그러나 성냥 열 개비가 모여지면 쉽게 부러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혼자는 장애물 앞에 너무도 연약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강해집니다. 가족들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온 교인들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담대히 전진해야 합니다.
본문 19-2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 대적들이 비웃고 협박할 때 느헤미야는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맞섰고, 힘차게 전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10을 보면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대적들이 두려워했고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왜 느헤미야를 두려워했을까요? 20절에 보면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와 함께 하셔서 형통케 하실 것을 대적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탐험대가 정글을 탐험해 들어갈 때 가끔 맹수들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맹수들이 포효를 하며 위협합니다. 호랑이나 사자나 심지어 코브라와 같은 독사들이 이빨을 드러내 놓고 살기어린 소리를 지르며 위협합니다. 그런데 맹수들은 먹이 앞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기다리다 사냥합니다. 맹수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들이 사람들이 무섭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아가는 곳에 사탄이 두려워 떱니다. 대적들이 겉으로는 위협하고 덤벼들지만 저들이 속으로는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 8:28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갑자기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소리를 질러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주님께서 가다라 땅에 가시자 귀신들이 먼저 두려워 떨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사탄이 두려워 떱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대적이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줄리어스 씨이저가 지중해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마침 큰 풍랑이 일어 배가 가라앉을 위기를 맞았습니다. 노를 젓던 사공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이 때 씨이저가 사공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나 씨이저가 타고 있는 한 이 배는 결코 파선되지 않을 것이다.”
씨이저의 위대한 점은 어떤 난관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갔다는 점입니다. 연약한 인간 씨이저도 저렇게 담대하게 나아갔는데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민 13-14장을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고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잘 아시는 대로 10명의 정탐꾼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어떤 장애물도 겁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너무도 크고 강해서 우리 힘으로 도저히 넘을 수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장애물이 크고 강해도 주님께서 넘지 못할 장애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니 벌써 돕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끝내 그 장애물을 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수많은 장애물들을 넘어 왔고 넘고 있고 또 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애물은 우리가 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장애물이 내 앞에 다가올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담대하게 맞설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떨거나 자기 힘으로 넘으려 할 때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장애물 앞에 서 있는 우리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기도하며 힘을 모아 담대하게 맞서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