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에 온지 벌써 네 달이 다 되어간다. 네 달 전 나는, 내가 장차 보내게 될 이 곳 생활을 막연히 상상하던 중에, 한 가지 엉뚱한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초대를 받아 어떤 집을 방문해 보는 것이다. 소망이라고 말하기에는 간절함이 떨어지는, 차라리 장난끼 어린 아이들 작난 같은 것이었지만, 나는, 정말로 그런 집에 초대를 받는다면 연미복은 입지 않는다고 하여도 양복은 입어야 할테니 양복을 챙겨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그 집은 보통 집이 아니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사람들이 격조있는 대화를 나눌텐데 내가 거기에 끼어들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심각하게 걱정을 하기도 하였다.
네 달 동안 실지로 보낸 이 곳 생활은 네 달 전에 막연히 상상하였던 생활과는 아주 딴판이다. 물론 나는 그 집에 초대를 받지도 못했다. 우리 가족이 그 동안 초대를 받아 방문한 집은 (방문한 순서대로 말하자면) 빌 목사네 집과 지(池) 장노 댁, 미국인과 결혼한 한국인 부인 댁, 라훌네 집, 그리고 마이클네 집이다. 그 집들 모두 근사하였으며, 그 분들 모두 근사하게 살아가는 것 같았지만, 그들 모두, 내가 초대받기를 희망하였던 그런 곳은 되지 못하였다. 우선 집의 규모에서 그 분들의 집은 많이 부족하였다. 이번 토요일에는 한국인 의사 부부가 인근 칸추리 클럽의 클럽 하우스로 우리 가족을 초대하였는데, 클럽 하우스도 그 곳에 비하면 오두막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내가 1년 동안 머물기로 결정된 곳이 알라바마주라고 말하자, 미국 사정에 밝은 내 직장의 동료 교수들은 대뜸 고온건조한 날씨와 인종차별에 대하여 말하였다. 여름 기온은 대단히 높이 올라가지만 습하지 않아 지낼 만하다는 것이며, 보수적인 지역이라서 타인종에 대한 백인의 차별이 아직도 상당히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한 교수는 마틴 루터 킹의 본거지가 바로 알라바마주의 몽고메리였다고 알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우리가 고등학교 때 열심히 보았던 성문종합영어에 나오는,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을 떠올렸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으로 평가받는 세상이 오기를 꿈꿉니다.” 그것은 정말 명연설이요 살아있는 연설이다. 나는 같은 소수 인종으로서 킹 목사와 어깨동무를 한 듯한 느낌을 다시 느꼈으며,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알라바마의 백인들에게 약간의 적대감을 느꼈다. “당신들이 은연중에 우리를 차별한다 이거지?”
남북 전쟁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하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북군 쪽 편을 들어야 한다. 북군이 노예 해방을 주장한 쪽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흑인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 보아도 북군 편을 들어야 하고, 또 객관적인 처지에서 생각해 보아도 노예해방이라는 숭고한 대의를 내세운 북군 편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노예라니? 인간이 인간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나는 위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위와 같은 것이 내 생각의 전부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그 영화를 보고 난 뒤 노예 제도를 수긍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혹은 그 영화를 보고 난 뒤 킹 목사에 대한 지지나 연대감, 존경심을 철회하게 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절대 아니다. 다만, 노예 제도나 인종 차별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하는 화제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화제가 있다는 것이며, 그 화제도 노예나 인종과 관련된 화제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한 가지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았다고 하여, 그리고 이번 이야기는 전 날 들은 그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라고 하여 감동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 분(粉))의 말투를 흉내내자면, 날마다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법이며, 화제와 이야기도 그 만큼 많다.
출국하기 직전 우연히 텔레비전을 통해 그 영화를 보았는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원작 소설에도 그대로 나온다는 머릿글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머릿글은 영화의 본 내용이 시작되기 전에 자막으로 비쳐졌는데, 그 요지는 “다른 지역에서는 기사도나 신사도의 전통이 거의 사라져 오로지 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지만 남부는 아직도 그것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 아,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옛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 전통, 그 문명은 바람과 함께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킹 목사가 꾸는 꿈과 그가 가진 비젼에도 눈물과 고통과 아름다움이 들어있지만, 저자(著者) 마가렛 미첼이 (혹은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아쉬운 마음으로 회상해 보는 것과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붙들어보려고 하는 것 속에도 눈물과 고통과 아름다움이 깃들어있다.
그 백인 부인(들)이 회상하고 붙들어보려고 하는 것, 즉 바람과 함께 사라져 가는 문명, 혹은 기사도나 신사도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물론 남부의 백인 지주들의 생활 방식으로, 구대륙에서 건너 온 것이다. 그 생활 방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아틀랜타의 누군가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무도회 장면이다. 참으로 환상적이 아닌가? 모든 것이 고급이고 화려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고 하지만, 아주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지 않을까? 아직도 그런 저택, 그런 무도회가 어딘가에 남아있지 않을까? 나는 바로 그런 저택의 무도회에 초대를 받는 것을 소망내지 희망하였던 것이다. (계속)
첫댓글 링컨이 노예해방을 주장한 것이 무슨 인간에 대한 사랑이나 그런 숭고한 뜻 보다는 대단히 정치공학적인 이유에서였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지. 요지는 자기 정파에 유리할 것이기 때문에 노예해방을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세계 역사상 인권신장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는 거지. 정치라는 게 참 무엇이 맞는 건지......근데, 남부의 백인 문화라는 게 노예제도 없이 생성 / 유지될 수 있었을까? 동전의 양면 아닐까? 영태거사, 잘 지내시고 많이 즐기시다 오시게.
영태 거사는 잘 지내고 많이 즐기고 있네. 벌써 방학이 되어, 내일은 플로리다로 떠나네. 여기서는 겨울이 되면 많이들 그곳으로 가더구만.
잃어가는 남부의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