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서가

[선비]

새벽2시경, 종로2가에서 1호터널 방향으로 탄 젊은 남녀가  낙원동 탑골공원 옆을 가달란다.

그곳까지는 채 200m도 안 떨어져 있기에 택시를 타는 것도 의아했지만 차의 머리가 남쪽을 향해있고 중앙버스전용차로 지역으로 U턴이 안되어 난감했다. 걸어가도 되는 거리라고 했더니 길을 모른다고 하면서 엉덩이가 시트에 착 달라붙었는지 일어날 생각을 아예 하지를 않아 결국 을지로2가 앞에서 불법 U턴을 해서 가주었다. 탑골공원 옆 모텔촌에 도착하니 고맙다는 말도 없이 여자가 카드를 내밀기에, 레이저광선을 쏘며 노려보았더니 남자가 나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렸는지 기본요금 3,600원을 건넸다.

그들을 내려주고 다시 1호터널 방향으로 갈려고 낙원상가 채 못미처 있는 횡단보도에서 차를 돌렸더니 웬 택시 하나가 '뿌~앙'하는 크락션을 울리며 나를 위협했다. 언짢은 마음에 종로2가 사거리에서 신호에 걸려 서게 되었을 때 그 택시기사에게 어필했다.

"아니 왜 그렇게 크락션을 울리세요?"했더니

"거기서 차 돌리는 거 불법이잖아요"하며 그는 되려 나를 쏘아보는 것이다.

"그건 알겠는데, 아저씨도 신호위반하셨잖아요."라는 나의 말에

"제 신호에 갔거든요"하는 것이다.

내가 차를 돌릴 때는 틀림없이 보행자 신호였는데 차를 돌린 후 바로 신호가 터졌다면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굳이 그가 그렇게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크락션을 울릴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나도 잘한 게 없기에 흔쾌히 손을 들어 수인사를 나눈 후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운행을 하였다.

위와 같이 택시를 운행하다 보면 하루에도 여러 번 화를 낼 일이 많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도통했는지라 일일이 상대 운전자(혹은 손님)와 시시비비를 가리며 화를 내어 평상심을 흩트리는 우를 범하는 행위는 삼가고 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되레 나를 질책할 때는 그동안 잘 지켜낸 평정심이 쉬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우리는 "법만 아니면 이걸 …우욱!"하며 불끈 쥔 주먹을 부르르 떨게 된다. 누구라도 이런 경험이 없진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신순옥도 층간 소음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경비실에 인터폰을 하여 위층 소음으로 고충을 받고 있으니 자제를 부탁하는 전화를 해주십사 요청했었다. 경비실의 전화를 받았을 텐데도 그 이후에 나아진 게 없이 소음이 계속되었다. 결국은 직접 인터폰으로 위층의 여자와 통화를 하게 되었고 잘 부탁한다는 나의 말에 위층 여자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언제나 말뿐이었으며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뒤에 일어날 일은 안 봐도 잘 알 것이다. 티브이에 나오는 막장드라마와 같이 참다못해 위층 초인종을 누르게 되고 "아이들이 있으면 다 그렇지 않으냐. 우리 얘가 유별난 게 아니고 이렇게 찾아오는 당신이 더 유별난 사람!"이라는 얘기까지 듣게 되면 이제 위층 여자는 이웃이 아니라 괴물일 뿐이다.

"상대방의 화를 전하려고 생각한다면 자신에 대한 상대방의 화도 정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p.241)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러 갔다가 되돌아온 위층 여자의 분노에 저자는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저자뿐만 아니라 공동주택에 사는 현대인들은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감정이 개입되는 일은 사람 꼴을 우습게 만든다. 화를 막 표출하고 되돌아오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밀려드는 후회와 자괴감에 자신이 조금 더 노련했으면 하는 마음을 누구나 가져보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모욕적인 일을 당했을 경우, 상대방이 한 말이나 시선, 태도 등을 정확히 기억해 두었다가 정밀하고 치밀하게 언어화한다. 여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관찰력과 긴장감이 요구된다.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분노는 상대에게 알려야 한다. 화를 전달할 때에는 다분히 연극적일 필요가 있다. 분노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화는 직접 전해야 하며, 좀더 세련되게 전하고자 할 때에는 준 언어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 준 언어란 '응' '아하' 등의 응수나 어조,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을 말한다. 한마디로 "분노에 찬 어조로 냉정히 자신의 분노를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p.239)

화내는 기술? 결국은 화내지 않는 기술이기도 하다. 화내는 기술을 장기간 훈련하다 보면 화를 자유자재로 표출하는 능력이 생긴다고 한다. "자신의 분노에 말려드는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화를 차근차근 계산해 가면서 폭발시킬 수 있게 된다"(p.242)고 『화내는 기술』(나카지마 요시미치 지음)은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화는 인간을 단련시키고 인생을 더욱 빛나고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라고 말하는 나카지마 요시미치의 의견에 신순옥은 "아마 작가처럼 화를 즐기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해 자신은 이 모양"이라며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어디 신순옥 뿐이랴. 나 또한 예전보다는 욱하는 정도가 덜하지만, 성질 급한 한국인의 기질이 어디 가겠는가.

화는 미움, 슬픔 등처럼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기는 하나 '표출'이라는 행동과 이어지는 감정이다. 살다 보면 화나는 일들을 자주 겪게 되고 화를 부추기는 일들로 넘쳐난다. 올바른 시민으로서 사회적인 분노에 동참하는 것은 당연시하면서 개인적인 분노를 표출하면 점잖지 못한 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자신의 감정 표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이 좀 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화의 철학'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은 지 일주일이나 되어 이제야 리뷰를 작성한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하루하루가 '개미 쳇바퀴'같은 일상이 되풀이될 뿐, 물먹은 솜같이 축 처진 삶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를 않고 있다. 그러한 무거운 몸을 사우나의 열탕에 담그고 앉아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인 부분과 밑줄 친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내용을 다시 복기하기까지는 네 차례의 열탕, 냉탕을 번갈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우나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다른 식으로 리뷰를 작성하려 했는데 의도치 않게 새벽의 일이 생각나 분노와 화내는 기술에 대한 언급으로 전체 지면을 할애하게 되었다.

저자인 신순옥은 위에서 보듯이 자신의 경험을 빗대어 한 권의 책을 소개하는 식으로 이 책을 전개해 가고 있다. 한창나이의 출판평론가 남편을 뇌종양으로 떠나보냈을 때는 얼마나 황망하며 허무했을까. 베레나 카스트의 『애도』라는 책을 가장 먼저 소개하면서, 삶이란 본질적으로 인간관계에서 가장 내밀한 자기와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며 '예비 죽은 자'인 산 자가 죽은 자를 충분히 애도하는 것이 상실과 죽음을 극복하는 치유라고 말하며 자신의 아픈 속내를 조심스럽게 밝히며 남편을 애도하고 있다.

 이 책은 평론가 남편을 둔 아내가 그와 함께 살면서 겪은 일상과 그를 떠나보낸 후의 상실감을 적은 글이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쓰인 글을  격주간 출판전문 잡지인 <기획회의>에 연재를 했으며, 책을 내자는 주위의 권유에도 부끄러운 마음에 만류하다가 더 이상의 거부가 무리라 어쩔 수 없이 한 권의 책으로 우리 곁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인 신순옥은 연재를 하면서 글쓰기가 삶의 보람과 의욕을 가져다주는 뜻깊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글쓰기가 얼마나 고달프고 힘겨운 것인지 조금 알게 됐으며, 그것은 남편이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글을 써야 했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은 일이기도 해서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녀의 남편인 故 최성일. 나는 아직까지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한겨레>에 그가 글을 기고했다고 하지만, 2010년 2월부터 구독했는지라 그 이전에 올린 그의 글을 읽을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그의 아내인 최순옥이 책을 내었다는 기사를 접했으며 다른 블로그의 리뷰를 보고서야 그녀의 책을 읽고 싶은 발심이 들어 결국은 손에 들게 되었다. 책은 어렵지 않았다. 근래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잘 페이지가 넘어갔다. 사회과학 류의 책을 접하다가 이렇게 부드러운 에세이를 읽어서겠지만 그녀의 내공이 남다르지 않음에 그러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남편을 먼저 보내고 두 아이를 키우고 지켜내야 하는 엄마로서의 어떤 결의와 사랑이 엿보였으며 그동안 그녀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사상이 잘 녹아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술술 읽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녀의 글을 보면서 아마 그녀 자신도 남편의 내조와 아이들을 키우는 데 시간과 정성을 쏟다 보니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몰랐던 것은 아닐까. 와인이 부드럽고 깊은 맛을 내기 위해서는 숙성 기간이 필요하듯이 글도 생각의 숙성 기간이 필요하다. 그녀에게 있어 오랜 숙성의 결실이 이 『남편의 서가』인 것이다. 과연 훌륭하다. 앞으로도 그 숙성된 와인의 깊은 맛을 계속 보여주기를 그녀에게 기대한다. 그리하여 '최성일의 아내'가 아닌 '신순옥의 남편이 그'라고 말할 수 있을 그날을 소망해본다.

[빼앗긴 들에도]

감사드립니다.
사고의시간과 여유를 주시는 님에게 언제나 좋은일만 있으시길~^^

[선비]

미천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건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