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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북, 서쪽 건축자의 명단
느 3:1-15
1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2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3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4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야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 중수하였고
5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6 옛 문은 바세아의 아들 요야다와 브소드야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7 그 다음은 기브온 사람 믈라댜와 메로놋 사람 야돈이 강 서쪽 총독의 관할에 속한 기브온 사람들 및 미스바 사람들과 더불어 중수하였고
8 그 다음은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 등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향품 장사 하나냐 등이 중수하되 그들이 예루살렘의 넓은 성벽까지 하였고
9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의 절반을 다스리는 후르의 아들 르바야가 중수하였고
10 그 다음은 하루맙의 아들 여다야가 자기 집과 마주 대한 곳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하삽느야의 아들 핫두스가 중수하였고
11 하림의 아들 말기야와 바핫모압의 아들 핫숩이 한 부분과 화덕 망대를 중수하였고
12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
13 골짜기 문은 하눈과 사노아 주민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분문까지 성벽 천 규빗을 중수하였고
14 분문은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15 샘문은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고 덮었으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왕의 동산 근처 셀라 못 가의 성벽을 중수하여 다윗 성에서 내려오는 층계까지 이르렀고
느 3:1-15 / [성벽 공사자들의 명단] 성벽 보수와 성문 재건에 가담한 이들은 다음과 같이 43개 단체로 구분할 수가 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을 비롯한 제사장단은 성전 북쪽의 양떼가 드나드는 성문을 다시 지어 들보를 얹고 대문을 달았다. 그들은 이어서 양문에 연결된 성벽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재건해 나갔는데, 제일 먼저 함메아 망대에 이르기까지 수축하였고, 뒤이어서 하나넬 망대에 이르기까지 수축하였다. 2) 그런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할 이들은 여리고 성읍의 주민들이며,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었다. 3) 하스나아 자손들은 북쪽에 있는 물고기 장터에 인접한 성문을 수축해 들보를 얹고 대문을 달았다. 그리고 빗장과 빗장꽂이를 만들어 달았다. 4)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학고스의 손자이며 우리아의 아들인 므레못이며,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므세사벨의 손자이며 베레갸의 아들인 므술람이며,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었다. 5)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들은 드고아 사람들이었으나, 그 성읍의 유지들은 내가 할당해 준 일을 떠맡지 않았다. 6) 물고기 시장의 서쪽에 인접한 옛 성문은 바세아의 아들 요야다와 브소드야의 아들 므술람이 수축하였다. 그들은 이 성문에 들보를 얹고 대문을 달은 다음, 빗장과 빗장꽂이를 만들어 달았다. 7)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들은 기브온 사람 믈라댜와 메로놋 사람 야돈인데, 이들은 유브라데강 서쪽 지방의 총독에게 통치를 받던 기브온 사람들과 미스바 사람들과 더불어 성벽을 수축하였다. 8)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인데, 이 집안은 대대로 금 세공업을 해왔다.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하나냐인데, 그는 여러 가지 기름을 혼합시켜서 향료를 만드는 이였다. 그는 웃시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 서쪽 성벽의 남단에 있는 넓은 성벽에 이르기까지 수축하였다. 9) 그 다음에 뒤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후르의 아들 르바야인데, 그는 예루살렘 구역의 절반을 다스리는 구역장이었다. 10)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하루맙의 아들 여다야인데, 그는 바로 자기 집 맞은편의 성벽을 보수하였다.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하삽느야의 아들 핫두스였다. 11) 하림의 아들 말기야와 바핫모압의 아들 핫숩은 풀무 망대에 이르기까지 성벽을 수축하였다. 12) 그 다음에 뒤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인데, 그는 예루살렘 구역의 절반을 다스리는 구역장으로서 자기의 딸들까지 동원하여 공사를 하였다. 13) 그 다음에 이어서 남단의 쓰레기 성문에 이르기까지 대략 450미터 구간의 성벽은 하눈과 사노아 성읍의 주민들이 수축하였다. 사노아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6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며, 성주 하눈은 온 주민들을 거느리고 성벽을 수축하면서 동시에 쓰레기 성문과 풀무 망대의 중간에 위치한 골짜기 성문도 재건하였다. 그들은 대문을 달고, 빗장과 빗장꽂이를 만들어 달았다. 14) 쓰레기 성문은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수축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남쪽 드고아 건너편의 벧학게렘 지역을 통치하는 자로서 자기의 아들들과 함께 대문을 달고, 빗장과 빗장꽂이를 만들어 달았다. 15) 샘터로 통하는 성문은 미스바 지역을 다스리는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수축하였는데, 그는 문간을 새로 짓고, 지붕도 다시 만들어 덮고, 대문을 달고, 빗장과 빗장꽂이를 만들어 달았다. 그는 또 셀라 못가의 성벽을 수축하여 다윗성에서 내려오는 층계에 이르기까지 완성하였다. 성안의 셀라 못은 성밖의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왕의 동산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다.
느헤미야의 주도로 폐허 위에서 성벽 재건이 시작됩니다. 북쪽에서부터 시작한 성벽 재건은 서쪽과 남쪽, 동쪽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은 전체 성벽을 42구역으로 나누어 10개의 성문과 4개의 망대를 중심으로 성벽 재건 작업을 묘사합니다. 느헤미야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 하도록 구체적인 위치와 할 일을 정해주고, 재건하는 일을 위임합니다. 본 장은 재건 공사의 과정 기록이면서, 재건 공사를 완성한 공로자들의 명부입니다. 여기에는 “그 다음은”이라는 문구가 28번 나오는데, 이 문구는 실행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거룩한 재건 작업을 이루어낸 느헤미야의 리더십, 그와 백성들의 협력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2). 성벽 재건은 단지 무너진 건물의 재건이 아니었습니다. 무너진 영혼의 건축이고, 황폐해진 여호와 신앙의 재건이었습니다.
양문을 건축하여, 어문은(1-5) 예부터 유다의 대적들은 주로 북쪽에서부터 공격해 왔기에 북쪽 성벽은 완전히 무너진 뒤 황폐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북쪽 성벽에서부터 작업하도록 지시합니다. 북쪽 성벽과 2개의 문인 양문, 어문 그리고 2개의 망대가 중수되었습니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의 형제들, 여리고 사람들, 이무리의 아들 삭굴입니다.
옛 문은(6-10) 예루살렘의 북쪽 성벽 중 어문에서 옛 문에 이르는 구역들, 예루살렘 서쪽 성벽인 옛 문에서 풀무 망대에 이르는 부분이 중수되었습니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스나아의 자손들,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 등입니다. 평소 고된 노동을 하지 않는 부유한 사람들(8-9)도 이 거친 작업에 동참한 것이 눈에 띕니다.
화덕 망대, 골짜기 문, 샘문은(11-15) 예루살렘 성읍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는 화덕 망대, 골짜기 문과 분문, 샘문이 있는 남서쪽의 성벽이 중수되었습니다. 이 일에 동참한 사람들은 하림의 아들 말기야, 바핫모압의 아들 핫숩 등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에 이어 대단한 권력을 가진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관리자들(9, 12, 14-15)도 이 작업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적용: 당신은 무너진 신앙과 삶을 재건하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지금 그 일을 시작하십시오.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 사람도 두 유형으로 나뉩니다. 고통스러운 일, 억울한 일, 괴로운 일이 닥치면 몸을 숨기는 ‘닭형 인간’과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담대하게 대처하는 ‘독수리형 인간’이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항상 독수리형 인간입니다. 시련을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식의 인생여정에는 고난의 가시밭길이 그치질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담대하게 고통을 극복한 사람들에 의해 다시 쓰여집니다. 서양 속담에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나운 바람으로 인해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전했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나약한 닭에서 강한 독수리로 바꾸어놓습니다.
< 설 교 >
성벽재건의 다섯 비결
느 3:1-5 / 피영민목사
서론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여러 차례 망했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애굽의 노예가 되었다가 살아났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가 살아났습니다. 바벨론의 포로 되었을 때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칙령을 발표하여 주전 538년에 스룹바벨의 인도로 돌아 왔습니다. 그것도 옛날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살렘에 돌아 온 후, 성전을 새롭게 지었고 율법도 재건했습니다. 주전 458년에 에스라의 인도로 2차 귀환을 해서 율법을 재건했고 주전 444년에는 느헤미야의 인도로 돌아와서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한 주석을 보게 되면 성벽의 문이 열 개가 있는데 각각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 문을 건설한 사람의 이름은 무엇인지, 또 그 이름의 의미를 말하였으며, 또 문의 의미와 사람이름의 의미가 어떻게 연결 되는지 설명 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3장의 말씀의 의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데, 느헤미야가 1시 방향으로부터 시작해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재건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은 만리장성 보다는 작지만 열 개의 문이 있고 네 개의 망대가 있는 큰 성벽입니다. 이것을 건설하는데 많은 인력과 물질이 소요되었습니다. 심지어 반대도 심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벽재건에 성공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을 보면 사람의 이름과 누가 어디를 중수했는지 계속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3장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단순한 이야기 속에 심오한 뜻이 가득한 장(chapter)입니다. 수십년 동안 성벽을 재건하려고 하지 않았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벽재건에 앞장 섰습니다. 오늘 느헤미야 3장은 느헤미야의 인도로 어떻게 예루살렘 거민들이 성벽 건축에 성공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느헤미야3장은 “성벽재건에 성공한 비결은 무엇인가?”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책 같지만 5가이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다섯가지 비결은 목사에게는 목회 성공의 비결이고, 정치가에게는 정치성공의 비결이, 사업가에게는 사업성공의 비결이, 가장에게는 가정성공의 비결이 됩니다. 이 다섯가지는 이해하고 외우기 쉽도록 영어의 C로 시작을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 다섯가지 원리를 통하여 성공하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Ⅰ. 첫째, 사람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는 것이다. (Coordination)
적절한 사람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옷을 입을 때에도 조화를 잘 이루어서 입어야 합니다. 만약에 아침에 출근 할 때에 옷을 입는데 곤색 양복에 빨간색 와이셔츠에 노란색 와이셔츠를 맨다면 부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즉, 어떤 일이든지 적절한 사람이 적절한 위치에 가서 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느헤미야 3장을 보면 “그 다음에는 누가 중수하였고” 라는 구절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 지휘를 할 때에 어떤 사람이 어디에 가서 일할 것인가를 미리 계획해서 적절하게 배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적절히 계획적으로 배치되어야 혼란과 갈등이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은 밖에 나가서 일을 하고 아내는 집안일을 돌봐야 합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적절한 위치에 있을 때에 성공은 찾아 옵니다 . 교회 또한 적절한 사람이 적절한 위치에 가서 일을 해야 성공합니다.
느헤미야는 사람을 배치하는데 가만히 앉아서 지시하지 않았고 합리적으로 배치했습니다. 사람의 배치는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23절을 보면 “베냐민과 핫숩이 자기 집 맞은편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아나냐의 손자 마아세야의 아들 아사랴가 자기 집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본문 28절까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집 문앞을 중수하였고,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습니다. 성벽을 건설하는데 자기 집 앞에 있는 벽을 건설하는 것은 합리적인 배치입니다. 이것은 동기부여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벽돌 하나라도 정성들여 쌓은 후 집에 돌아와 편히 쉴 수 있었고, 성벽재건을 하는 도중 원수가 쳐들어 왔다면 일을 중지하고 전쟁에 나가는데 시간도 절약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안심하고 성벽재건에 전념 할 수 있었습니다. 기업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성공하는 요인은 적절한 사람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합리적인 동기를 가지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왕좌왕 하는 집단은 결코 성공 할 수 없을 것입니다.
Ⅱ. 둘째로,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조직하는 것이다. (Communication)
성벽을 건설하는 것은 매우 큰일입니다. 만약 느헤미야가 지시사항을 전달 할 때에 이곳 저곳 돌아다녔다면 목이 쉬고, 피곤해서 쓰러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40명의 감독을 뽑고 성벽을 40곳으로 나누어 감독들에게 맡겼습니다. 느헤미야가 지시사항을 전달 할 때에는 40명의 감독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한 후 한 자리에서 지시사항을 전달했습니다. 지시사항을 전달받은 감독들은 돌아가서 성벽재건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의사소통을 일사불란하게 이루었습니다. 이로 인해 성벽재건에 성공 할 수 있었습니다. 가정에서도 가족간에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져야 행복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한 마디 대화도 없습니다. 가끔 한다는 말이 “세금 냈어?” 이런 대화라면 의사소통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대화가 풍성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일이 있습니다. 제가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서 일을 진행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진행한다면 설교준비도 하지 못하고 저는 쓰러질 것입니다. 각 분야의 담당자를 세워 그 사람들과 대화하고 일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사소통의 문제없이 일체감을 갖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긴박한 상황으로 인해 40명 감독들을 모을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갑자기 적들이 쳐들어 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느헤미야 4장 20절을 보면 “너희가 무론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긴박한 전쟁 상황에서는 나팔수를 두었습니다. 이 나팔 소리를 듣고 성벽재건을 잠시 중단하고 전투 태세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즉, 느헤미야는 의사소통에 탁월한 지도자였으며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작은 집단에서도 의사소통이 잘 되어야 합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교회에서도, 뿐만 아니라 직장, 국가에서도 잘 되어야 합니다. 그만큼 의사소통은 중요합니다.
Ⅲ. 셋째로,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전심으로 협력하였다. (Cooperation)
느헤미야 3장을 자세히 보면 모든 직업의 사람들이 협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은 주의 일을 한다고 열외를 요청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손에 삽과 곡괭이를 가지고 성벽재건에 참여했습니다.
본문 8절을 보면 “그 다음은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 등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향품 장사 하나냐 등이 중수하되 저희가 예루살렘 넓은 성벽까지 하였고”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 볼 것은 ‘수많은 직업가운데 왜 금장색과 향품장사하는 사람이 기록되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금장색은 금을 가지고 세공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눈과 손을 다치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난 세공업을 하는 사람인데 눈과 손을 다치면 일을 못하니 제외 시켜 주십시오’라고 요청하면 제외시켜 주어야 합니다. 또 향품장사가 ‘땀냄새 나는 몸으로 장사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한다면 제외 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제사장, 금장색, 향품장사까지 모든 이들이 성벽재건에 최선을 다해 협력했습니다. 그리고 남자 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협력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 딸들이 중수하였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살룸의 집은 아들이 없었고 딸들만 있었습니다. 살룸이라는 사람도 느헤미에게 ‘내 딸들이 시집 갈 때가 되었으니 성벽재건에 보낼 수 없습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룸과 그 딸들은 성실히 성벽재건에 참여하여 협력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거하는 거민들만 협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2절에는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본문 5절에는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느나”, 본문 7절에는 “그 다음은 기브온 사람 믈라댜와 메노놋 사람 야돈이 강 서편 총독의 관할에 속한 기브온 사람들과 미스바 사람들로 더불어 중수하였고”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거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모두 협력했습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루살렘은 성벽은 예루살렘 주민을 위한 것이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들은 “예루살렘이 안전해야 우리도 안전합니다. 수도가 평안해야 우리가 평안합니다.” 라고 생각하여 이들도 성벽재건에 모두 동참했습니다. 모든 직업의 사람들, 모든 성별,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동참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비판만하고 협력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5절 보면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다 담부치 아니하였으며”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드고아의 평민들은 물질과 노동력으로 성벽재건에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드고아 귀족들은 협력하지 않았고 앉아서 비판만 했습니다. 귀족으로써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담부(擔負)치 안했습니다.
귀족일수록 앞장서서 솔선수범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드고아의 귀족들과 같이 행하지 말라고 그들의 소행을 성경에 기록 해 놓았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속한 곳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협력하시기 바랍니다. 불어에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귀족이나 가진 자는 더욱 도덕적인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은 지켜야 할 의무를 지키지 않으면서 권력을 누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드고아의 귀족같은 사람이 없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1세기는 개인주의 시대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나만 잘 믿으면 되지 교회는 내가 알바 아니다’ 이렇게 믿어서 안됩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고, 우리 성도는 몸의 지체라고 했습니다. 즉, 지체인 성도가 서로 협력해야 몸된 교회가 건강해 지고 원활해 지는 것입니다. 배는 고픈데 입이 밥을 안먹는다면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모두가 협력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Ⅳ. 넷째로, 수고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칭찬하였다. (Commendation)
느헤미야 3장을 기록할 때 “성벽을 재건하는데 모든 거민들이 참여해서 건설했다“ 라고 한 줄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각 사람의 이름을 지루할 정도록 기록했습니다. 3장은 히브리 이름이 열거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 하나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시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을 다 기억하시고 칭찬하십니다. 여러분!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에는 가지고 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가시겠습니까? 돈이 남습니까? 명예가 남습니까? 만약 천국에 금덩어리 갖어 간다면 베드로가 보도블럭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할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이것이 남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조그마한 일을 해도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칭찬하십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그 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룩이 일을 했는데 “힘써” 일을 했습니다. “힘써”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바룩의 내적인 자세도 보셨다는 것입니다. “힘써” 일한 사람을 기억하고 칭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일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그것 또한 기억하십니다. 사람은 보지 못해도 하나님은 세밀한 것까지 보시는 분입니다.
느헤미야 3장 5절과 7절을 비교해 보면 드고아 사람들이 2번 언급됩니다. 본문 5절을 보면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3장 27절을 보면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드고아의 귀족들은 무관심 했지만 드고아의 평민들은 두 몫씩 담당하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또, 3장 13절을 보면 “골짜기문은 하눈과 사노아 거민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본문까지 성벽 일천 규빗을 중수하였고”, 3장 14절에는 “본문은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눈과 말기야는 성벽을 세우고 성문을 달았을 뿐만 아니라 문짝도 달고 자물쇠와 빗장까지 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물쇠, 빗장까지 달아 놓은 것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몫을 수고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칭찬했습니다. 또, 우리가 작은일 행한 것까지도 기억하시고 상을 주시는 분이 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한 가지를 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만가지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가 복 받은 것이 있다면 우리 조상들이 믿음으로 뿌리고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핍박 받고 순교 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을 보면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냉수 한 그릇 주는 것까지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결단코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시고 기록해 놓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상호 무관심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는 서로 기억하고 인정하고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칭찬은 관계를 좋아지게 합니다. 칭찬과 인정은 교회가 움직이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또한 언제부턴가 비판과 욕설이 많아 졌습니다. 비판과 욕설보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우리의 입술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계적인 미인, 미남이십니다” 한번 칭찬해 보시기 바랍니다.
Ⅴ. 다섯째로, 시작한 일은 완성하려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Completion)
히브리어는 태가 2개 밖에 없습니다. 완료태와 미완료태입니다. 완료태는 끝난 것이고, 미완료태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느헤미야 3장의 나오는 모든 히브리어 동사는 완료태입니다. ‘중수하였고, 갖추었고, 이루었느니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100%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열심히 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열정이 식어지고 결국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용두사미(龍頭蛇尾) 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거민들은 반대가 심했고, 사람들의 게으름도 있었고, 부정적인 생각도 있었지만 모두 이겨내고 예루살렘 성벽을 완성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일을 마쳐야 한다는 건강한 정신을 갖어야 합니다. 제가 침신대 교수로 12년을 지내면서 많은 학생들의 논문을 지도했습니다. 논문을 지도할 때에 철칙으로 삼는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선정한 제목을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번 바꾸게 되면 자꾸 바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시작한 일이 있다면 우리는 성취를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인생을 마칠 때 성취감이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7절을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인생 마지막에 자신의 인생에 대한 만족감과 성취감이 있었습니다.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성도님들도 만족감과 성취감이 있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결 론
느헤미야 3장에 기록한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적절한 곳에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의사소통을 잘 하고 협력정신을 가져야 하며 남들을 인정하고 칭찬해야 합니다. 또한 시작한 일은 끝까지 완성해야 합니다. 이 다섯원리를 실천하여 살아간다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모든 일을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형통의 축복이 모든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은
느 3:1-6 / 이대성목사(광성교회)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그 다음은”입니다. 다같이 따라할까요? “그 다음은” 여러분의 기도 덕택에 사모와 함께 지난 한 주간동안 두 날개 양육시스템 4단계 훈련을 잘 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번 훈련을 받으면서 더욱더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진정 건강한 교회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건강한 교회란 과연 어떠한 교회일까요?
고린도전서 1장 10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온전히 합하라.”
다같이 따라하십시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열매” 그렇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열매를 맺는 큰빛광성교회와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말씀인 느헤미야 3장을 읽다보면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다음은" 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3장 하나에 계속적으로 30번 이상 등장합니다.
여러분? 저를 한번 쳐다보실래요? 제 얼굴에서 가장 잘생긴 게 뭡니까? 코! 제 입으로 말하긴 좀 쑥스럽지만, 가까이서 옆으로 거울로 코를 비춰보면 그야말로 예술입니다.
제가 LG 다닐 적에 연수원 갔을 때에 코 큰 사람 콘데스트 에서 당당히 일등 했다는 거 아닙니까? 이런 걸로 일등하면 안되는데.... 앞으론 영성이 제일 뛰어나신 목사님이라는 말을 듣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코가 큰 사람은 뭐가 큽니까? 지금 잠시 잠깐 이상한 생각하신 분 있으시죠? 여러분? 코가 크면 콧구멍도 큽니다. 콧구멍! 이게 기가 막힌 겁니다. 콧구멍이 이렇게 생겼으니까 다행이지, 만약 위를 향해서 뚫려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러면 비오는 날 과연 어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각자 자기 위치가 있고, 자기 역할이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위치 분간을 잘못해서 입, 귀, 코, 눈들이 제 마음대로 붙어 있다면 우리는 그를 뭐라 부릅니까? 괴물이라고 부릅니다.
‘마땅히 있어야 될 그 자리에 내가 서 있고 거기서 내가 그 일을 감당했다. 그리고 그 옆에 또 그 자리를 지켜야 할 사람이 거기 서서 자신의 일을 성실히 감당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 맡은 본분을 잘 감당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교회요, 하나님 나라의 참된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진정 연합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행해야만 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모두 다함께 일해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할까요? “모두 다함께 일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다함께 일하는 이런 아름다운 역사 속에서도 낙오자 구경꾼 방관자들이 있었습니다. 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 여러분? 모두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참여했음에도 끝내 참여치 않은 방관자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과연 누가 참여치 않았습니까?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 여러분? 여기에 바로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드고아 귀족들이 방관자, 구경꾼, 낙오자의 위치로 전락하고야 말았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는 데 함께 동참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드고아 귀족들은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는커녕, 오히려 수수방관함으로써 거룩한 주의 사역에 동참하는 기쁨을 스스로 포기하고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열두제자 중 사도가 될 수 있는 거룩한 기회를 망각했던 가룟 유다, 세상을 사랑한 나머지 사도바울의 아름다운 동역자가 되는 길을 마다했던 데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경배드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잃어버리고야만 헤롯 대왕과 같은 못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드고아의 귀족들, 가룟 유다, 데마와 헤롯 대왕과 같은 못난이들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내가 방관자 드고아 귀족들은 아닙니까? 혹시 내가 배신자 가룟 유다는 아닙니까? 혹시 내가 기회주의자 데마는 아닙니까? 혹시 내가 세상 부귀영화만을 탐하는 헤롯 대왕과 같은 자는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거룩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멋지고 아름다운 기회를 주셨음에도, 내가 바로 그 기회를 놓쳐버린 방관자는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간절히 쓰시길 원하셨음에도, 나는 단지 구경꾼으로 낙오자로 방관자로 전락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슈브" “돌아오라” 너의 자리가 잘못되었으니 그 자리에 그냥 있지 말고, 주저앉아 있지 말고, 누워있지 말고 돌아오라는 겁니다.
네가 가는 길이 잘못되었으니 돌아오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7)
하지만 사탄 마귀는 우리의 귀를 막아서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먼저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 되겠노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히 반응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과 기쁨이 늘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서 넘쳐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음성에 민감했던 사도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킴으로 마침내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쓰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벽 중건에 참여했을까요? 1절에는 대제사장이 등장합니다. 8절에는 금장색(대장장이)과 향품 장사가 등장합니다. 12절에는 예루살렘 지방을 다스리는 사람들, 즉 정치인들이 등장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도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 딸들이 중수하였고” 또한 29절에는 동문지기가 31절에는 상고가 등장합니다.
상고란 장사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처럼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함에 있어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일일이 열거되고 있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일에는 차별이나 귀천이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은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는 모든 사람이 다 필요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처한 위치에서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해 헌신 봉사했으며, 일하면서 이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노라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기쁜 마음으로 매우 효율적으로 지혜롭게 감당했습니다.
"그 다음은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자기 침방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29-31절).
‘그 다음은’ 여러분? 이 말은 일의 순서를 밝히는 단순 나열이 아닙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말이 "next him, next them"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은 자기가 서야 할 위치에 서서 그 일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그 옆에 자기가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서서 그 일을 하고, 그래서 이 엄청난 예루살렘 성의 건축이 단 시일내에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모두 다함께 예루살렘 성을 열심히 쌓았더니, 그 일이 결국엔 자기들의 집에 유익하게 되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자기들의 집이 안전하게 되었고, 자기들의 집이 아름답게 단장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절대로 ‘교회 따로 집 따로’가 아닙니다. 교회와 집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유익이, 결국 가정의 유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 뭔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다함께 헌신 봉사할 때에, 가정의 유익은 저절로 생겨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마치 누비이불과도 같습니다. 조각 조각을 서로 끼워 맞추다 보면, 나중에 하나의 완성된 이불이 되어 우리 모두에게 참된 기쁨과 만족을 안겨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많은 일들 중에는 한 사람의 개인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공동체의 일은 결단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공동체 모두가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개인주의나 영웅주의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훌륭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훌륭한 지도자들이 우상화되는 것을 결단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위인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영웅전이나 위인전들은 위인의 삶이 불필요하게 과장되고 영웅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존경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에서 그들이 범한 실수를 가차 없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 헌신된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해 만민이 복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 건축에 수고한 사람들을 일일이 열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이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함께 하셨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주인 되신 하나님을 위해 힘써 일함으로 주인이 베푼 축복의 자리에 참여하는 기쁨과 감격을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린 서로 격려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서로 격려자가 되어야 합니다.” 3장에 보면 15가지 이상의 직업이 나오고, 75명 이상의 사람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기에 느헤미야 자신의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아니 느헤미야란 이름이 한번 나오긴 합니다. 하지만 그는 본문을 기록한 지도자 느헤미야가 아닌 동명이인 느헤미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 예루살렘 성의 건축은 느헤미야의 공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당시 역사가들이라면 누구나 다 앞 다투어 가면서 느헤미야가 대업을 이루었노라 공치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느헤미야 이름은 전혀 기록되지 아니하고, ‘문짝은 누가 달았다. 기둥은 누가 세웠다. 돌멩이는 누가 갖다 놓았다.’ 이런 말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철저히 느헤미야 자신은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느헤미야 자신은 진정한 격려자 였습니다. 여러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로부터 박수 갈채가 전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아무도 보는 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에,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세우는데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들어가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섬길 때에도 이런 격려자가 필요합니다. 옆 사람을 향해 이렇게 한 번 격려하십시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이왕 격려하는 거 야곱처럼 이렇게 한 번 격려하십시다. “형제님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2번) 여러분? 카누 경기를 보면 노를 젓는 사람이 있고, 가운데 앉아서 냅따 소리 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박자 맞추는 사람,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힘을 더해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이런 격려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자꾸만 상대방을 깎아내리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늘 언제나 격려하는 자가 되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한없는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격려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그 사람을 칭찬하게 되면 그 칭찬 때문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이 자꾸만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 칭찬처럼 그 사람이 점점 더 변해서 마침내 그 사람의 인격이 아름다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사람의 단점을 비판하고 비난하기 시작하면 어느 덧 장점은 사라지고 비판하는 그 모습만이 자꾸만 커지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일을 해 보신 분들이 왜 교회 일이 힘들다고 말합니까?
열심히 일하고도 제일 비판당하기 쉬운 것이 교회 일이기 때문입니다. 월급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뼈 빠지게 열심히 일하고도 나중에 실컷 비판만 당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각자가 한 일을 일일이 기록하면서 그들 모두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중에서도 좀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격려하면서도 느헤미야는 어떤 한 사람을 매우 특별히 취급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20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그 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
여러분? 이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사용한 일이 없는 표현입니다. 보통은 "누구누구는 이러이러한 일을 했다."라고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바룩 만큼은 매우 특별하게 힘써 일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얼마나 크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사람들이 수고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희생을 많이 했던 한 사람을 기억했다가 반드시 잊지 않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룩은 다른 그 누구보다 애쓰고 힘써서 자신에게 위임되어진 일을 잘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고 귀감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모두가 힘들어 지쳐 있을 때에도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음으로 인해 지도자는 크나 큰 힘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바룩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진정 공동체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작은 능력이지만 주를 위해 최선을 다한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마25:21,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사람 이름을 하나 하나 기록했던 느헤미야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저 또한 이 모습을 배우기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고 있는데도 참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우선 머리가 옛날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 제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특별한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기도 제목을 다 들어가며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부족한 종과 주의 힘쓰는 동역자들을 격려하고 칭찬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들어가며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서로 이해하며 사랑하며 격려하는 참된 연합의 공동체로 거듭나는 큰빛광성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무엇이 무너졌습니까?
느헤미야 3:1-3 / 류영모목사(한소망교회)
I. 모든 성경 말씀에 메시지가 있다
성경연구론 - 레위기
새해가 되면 성도님들이 금년에는 성경 1독 해야지? 매일 성경을 읽어야지? 결심하 게 됩니다. 창세기 잘 흘러갑니다. 출애굽기 다 읽었습니다. 레위기에 가면 성경이 진 도가 안나갑니다. 위기가 왔다 그래서 레위기입니다. 금년에는 신약성경부터 읽어보자. 마태복음 1장을 펼칩니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 산부인과 병원 도 아니고 이게 뭐야? 덮어버립니다.
성경을 읽다가 보면 오늘 본문도 바로 그 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누구는 어느 성벽 을 건축했고 누구는 어느 성문을 달았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그 얘기입니다. 무슨 건 설회사, 약사도 아니고 이게 뭘까? 싶은 느낌이 듭니다.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들어 와서 백성들과 함께 성벽을 잘 건축했다. 그러면 끝날 얘기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 게 시시콜콜하게 오늘 사람들의 이름을 들먹이고 성문 성벽을 들먹이며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연구론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성경연구방법론이란 과목을 공부했습니다. 신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여러 과목과 함께 이 과목(예배와 교육, 성경연구방법론)을 가르쳤습니다. 그때마다 개강 첫 시간 서론적인 얘기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아, 내가 아는 이야기’ 그러면 안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고 들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기대감을 가지고 연애편지를 읽듯이 설레임을 가지고 읽어야 한 다.
내가 성경을 읽을 때에 사실은 성경이 나를 읽고 있는 느낌을 가져보라. 그러면 성 경 속에서 내 얼굴이 보이고 본문 안에서 내 역할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성경과 한 몸이 되어야 하는데 창세기를 읽을 땐 말씀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 제가 창세기입니 다” 느헤미야서를 읽을 땐 “하나님, 제가 느헤미야입니다”라고 고백을 해 봐라.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가 잘 안되거나 믿음이 부족해서 잘 받아들여지 지 않는 말씀이 있을 것이다. 억지로 이해하고 먹으려 하지 말고 “뼈로다”하고 살만 발라 먹어라. 못된 강아지 닭 뼈다귀 씹다가 목에 걸린다. 나중에 이해가 된다. 내가 이해가 안되는 것이지 성경이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 라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라는 것을 잊지 마라.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문자 속에 담겨있다는 건 기적이다. 그렇다면 모 든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 시니라” 창조부터 요한계시록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 멘”까지 기적이 아닌 내용은 없다. 기적이 아닌 장은 두 장 밖에 없다. 성경 앞껍데 기 한 장 뒤껍데기 한 장. 모든 성경은 기적이다고 가르칩니다.
대형건설회사, 약사 같은 오늘의 내용 누가 무슨 문을 달았다. 무슨 성벽을 건축했 다? 이 지루한 얘기를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모든 성경에 메시지가 있 고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걸 발견하는게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고 그걸 가르쳐 드리 는게 설교입니다. 모든 구절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다. 모든 사건 속에 하나님의 간섭이 있다. 오늘도 마찬 가지이다. 구원받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삶의 터전 의미 없는 곳 없다. 그 어느 것 하나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일어나야 된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이 하고 싶은 것입니다.
II. 방문
오늘 본문은 BC445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벽 재건 역사를 기록한 내용입니다. 성벽 을 재건하고 BC430년경 느헤미야가 기록했다면 느헤미야서는 아마 구약의 마지막 성경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 성경이후 400년 암흑기로 접어드는 겁니다. 하나님 의 계시가 나타나지 않는 긴긴 400년에 접어들게 되는 겁니다. 400년 후에 신약의 문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성벽 재건의 역사는 단순히 무너진 성벽을 쌓았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당시 무너진 백성들의 신앙을 세운 사건입니다. 허물어진 예루살렘 주민들의 마음을 치유한 사건이요 희망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깨어진 가정과 사회 공동체를 재건한 사건 입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국가를 새롭게 세운 사건입니다.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도전합니다.
당신은 무엇이 무너졌느냐? 네 믿음이 잘 서 있느냐? 네 예배 굳건히 잘 서 있느냐 무너지지 않았느냐? 기도의 제단은 봉헌의 헌신은 하나님 앞에 잘 서 있느냐? 네 건강은 잘 지키느냐? 네 가정은 잘 서 있느냐?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으로 살아가는 삶의 터전, 사회 환경, 사업터 잘 서 있느냐?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이 무너졌습니까?”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세요. “넌 무 엇이 무너졌니?” 오늘 본문이 여러분에게 말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야 제국 아닥사스다 왕의 경호와 비서 업무를 감당하던 관원장(비 서실장) 장관입니다. 70년 포로에서 되돌아와 살던 고국 땅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 문이란 성문은 모두 불에 타고 백성들은 환란과 능욕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 요. 가슴을 부둥켜안고 수 일을 슬퍼하여 울다가 왕의 조서를 받아 예루살렘 총리가 되어 돌아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성벽과 성문들을 백성들과 함께 수축합니다.
이 사건은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모든 것이 푹푹 쓰러지고 무너져 내리는 전 방위적 위기 앞에 어떻게 그것들을 세울 수 있는가 하는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여러 분 무엇이 무너졌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것들을 일으켜 세우는 원리, 비결, 능력을 배우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이 무너진 여러분의 모든 성벽이 수축되는, 포기한 모든 것들이 새롭게 세워지는 은혜를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허물어진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양문을 수축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느헤미야 3장 1절 양문건축으로 시작하여 32절 양문으로 끝이 납 니다. 이 양문은 양을 끌고 들어가 양을 잡고 제사하는 문입니다. 예배의 문입니다. 무너진 예배를 세우고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세우는 것이 내 삶의 터전을 일으 켜 세우는 시작이요 완성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을 하든지 예배 로 시작합니다. 예배로 마칩니다. 양문으로 시작하여 양문으로 끝나는 것 이것이 무 너진 것을 세우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여기 양문을 통과할 때 흠이 있는 양은 못 들어갑니다. 내 마음이 예배하기에 합당한가? 성령님이 와 계셔야 되는데 마음에 왕좌가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가? 비어 있 는가? 그 얘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습니 다. 예배의 부름,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예배로 나아가지 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못함, 상처, 원망, 불평, 이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흠이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예배 시간 지키는 것도 양을 흠 없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배 시작 부름 부터 회개 축도까지 한 마리 양이라면 축도없이 도망가는 분들은 꼬리 잘라 놓고 가는 겁니다.
부득이한 형편으로 사회 환경 여러 이유로 늦으시는 분이 있기는 합니다. 지각 잘 하시는 분들 저는 다 이해합니다. 왜 지각하는지. 교회 안 나오려는 자식놈 일으켜 데리고 오다가 늦은 것 다 알아요. 교회 안 따라 오려는 남편 억지로 데리고 나오다 참고 나오다 보니 지각 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지각하지 않는 분들인데 오다 보니 앞차가 고장 나서 내 앞길을 막아요. 그래서 늦었다는 것 압니다. 저는 이해를 합니 다. 그러나 가능하면 예배 시간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 봉 헌의 예물을 드리는 것도 봉헌이란 말은 희생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 께 드리는, 감사를 미리 잘라 놓은 것, 이게 있어야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님은 주기철 목사님입니다. 그 교회 선임 장로님 가운데 독립운동가 조만식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한번은 예배를 드 리는데 조만식 장로님은 주기철 목사님의 오산학교 스승입니다. 교장선생님 때 주기철 목사님이 그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어느 주일 예배를 막 시작했을까요? 찬송 부르고 예배를 드리는데 조만식 장 로님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조 장로님을 향하여 주기철 목사님이 큰 소리로 “조 장로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흠을 내십니까? 들어오지 마시고 거기 입구에 서서 예배를 드리세요.” 서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끝나갈 무렵 “봉헌의 시간입니다. 조 장로님 기도하시죠?”
“하나님, 독립운동한답시고 이곳저곳 뛰어다니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이 시간을 흠집내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예배하는 온 교회가 특별히 주의 종 마음을 불편하게 한 죄인입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장로가 되어 서 교인들의 본이 되지 못한 무자격한 사람입니다. 용서하여 주세요.”
III. 리더가 일어서야!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는 과정에서 오늘 본문 느헤미야 3:1은 참 중요합니다. 다 무너진 성문 열 개 중에서 제일 먼저 양문, 예배의 문을 수축했다는 사실 외에도 여 러 가지 통찰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 때에”입니다. 성벽 재건을 시작하는 바로 “그 때에”입니다.
무너진 것 수축하는 첫 걸음에, 첫 삽에, 첫 역사에 처음으로 양문을 시작했다. 예 배는 내 인생 우선순위(priority) 1번입니다. 연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코로 숨 쉬면 발로 걸어갈 수 있으면 그 때에 우선순위 1번 예배 다.
그런데 양문 수축을 누가 담당합니까?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지도자들 이 앞장섭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제사하고 중보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백성들이 나누어서 성벽을 수축하고 성문을 달 때에 우리는 뒤에서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일하세요. 예배할께요. 제사지낼께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제일 먼저 달려가서 주머니를 털고 옷을 벗고 비지땀을 흘리며 양문을 흘리는 것입 니다. 이것이 시대가 서고 공동체가 일어나고 세상이 달라지는 첫 출발이라는 것입 니다.
교회들마다 교회 리더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 게 교회를 섬기고 어떻게 헌신하는가? 하는 것이 공동체를 세우는 힘이 됩니다. 바른 예 배는 무너진 사람을 세우고 무너진 시대를 세우고 무너진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무 너진 모든 것들을 세우는 첫 출발이 예배입니다.
한국 초기에 영수라는 직분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들 곁에서 선교사를 돕 는 비교적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요즘 전도사 직분 정도입니다.
엄씨 성을 가진 엄영수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의 직업은 왕손의 말고 삐를 잡고 다니는 마부입니다. 어느날 양반 나으리를 모시고 길을 가다가 나무그늘 밑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으리 예수 믿으시 지요. 못들은 척 하다가 하도 얘기를 하니까 비아냥합니다. 그래 이놈아. 예수를 믿으면 너 같은 상놈이 양반이라도 된다더냐? 예수를 믿으면 너 같은 마부가 왕손이라도 된다더냐?” 그때에 엄영수가 그렇게 얘기합니다. “나으리 예수 믿으면 상놈이 양반이 되는게 아니고 좋은 상놈이 되는 겁니 다. 나으리 예수 믿으면 마부가 왕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착한 마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신분이 상승되는 것이 아니고 품성이 상승되는 것입 니다. 곳간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 말에 감동을 받고 왕손이 예수를 믿 었다는 얘기입니다.
12절에 보면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수도 권 절반을 다스리는 사람이니 요즘으로 말하면 서울시장 아니면 경기도지사쯤입니 다.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 할로헤스 뿐만 아니라 그의 아 들들과 딸들이 본을 보이고 무너진 성벽을 수축했다는 것입니다.
옛날 한 서당에 학생들에게 붓글씨 연습을 시켜놓고 졸기를 잘하는 선생님 이 계셨습니다. 한 학생이 묻기를 “선생님은 왜 그리도 졸기를 잘하십니 까?” “예끼 이놈. 선생님은 조는게 아니다. 아직도 배울게 많다. 잠깐 잠깐 짬이 나면 배우러 공자님을 만나러 가는 거다.”
며칠 후 이 학생이 졸고 있습니다. 회초리로 등짝을 찰싹 때리면서 “이놈! 공부는 안하고 왜 졸고 있느냐?” “선생님, 공부할 것이 많고 물을 것이 있어서 잠깐 공자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래 뭘 물어 보았느냐?” “우리 선생님이 자주 공자님을 뵈러 오셨을 텐데 뭘 배우고 가십니까?” “그래 뭐라고 대답 하시더냐?” 공자님 왈 “너네 선생은 여기 온 적이 없느니라.” 안다니까. 내가 알고 네가 알고 선생이 알고 학생이 알고 목사가 알고 교인이 알고 자기 가 아는 것입니다.
모든 성문이 잿더미처럼 불타고 모든 성벽이 무너져 쓰레기 더미가 되었습니다. 하나 님의 특별한 간섭으로 느헤미야가 총리로 부임했습니다. 더 이상 수치를 당하지 말 자. 하나님의 백성들아 일어나자.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리라. 외치는 느헤미야의 말 을 듣고 온 백성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역사 속에서도 낙오자가 있습니다. 방관자가 있었습니다. 구경꾼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 하지 아니하였으며”(느3:5) 그 다음은 누가 수축하고 그 다음은 누가 문짝을 달고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연결해 나가다가 갑자기 그러나 드고아 귀족들은 분담하지 않 더라.
쉽게 번역하면 모든 사람이 힘써 봉사하고 분담하여 일을 감당하는데 귀족이란 자 하 나가 뺀질뺀질 구경만 하는 자가 있었다. 그걸 우리가 기억하자. 오고 오는 세대에 이런 사람 있을 수 있으니 경성해라. 내가 알고 네가 하나님이 안다는 것입니다. 언 제나 드고나 귀족은 있는 것이고 가롯 유다는 있는 것이고 도망가는 데마는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성경에 기록되었듯이 하나님 나라 상급 책에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아무도 몰라도 기록되고 뺀질거리는 것도 기록된다 는 것입니다.
IV. 그 다음은(Next him)
오늘 본문에 보면 자꾸 입에 걸리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next him next them 계속해서 그 말이 나옵니다. 이 본문을 한 장을 읽으면 그 다 음은 또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32절 가운데 자그마치 29번 나옵니다. 거 의 매절마다 나오는 격입니다. 김 집사는 김 집사 자리에서 자기 자리를 잘 지키더 라. 박 집사는 박 집사 가정에서 가정을 잘 세우더라. 직장에 가서 그 직장 책상에 앉아서 그 자리를 잘 지키더라.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도 내게 맡겨진 사람을 정성으 로 사랑하고 세우더라. 그 얘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역사에서 모든 사람, 모든 사역은 소중합니다. 내 자리, 내 사역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어문을 지키는 사람이 나옵니다. 고 기 비린내 나는 어문을 수축하는 일은 역겹고도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지키는 게 세상을 살리는 길입니다. 분문. 분뇨를 처리하는 쓰레기 문입니다. 그곳 을 지나면 게헨나(Gehenna) 골짜기가 있어서 분뇨를 갖다 버리고 쓰레기를 갖다 버립니다. 1년 365일 똥 냄새가 나고 쓰레기 타는 연기가 진동하는 곳입니다. 왜 우리 가문은 이 문을 맡깁니까?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을 세웠을 것입니다.
중세 수도원의 주방장 쉐퍼 로렌스는 공부를 많이 하고 착하고 잘 생긴 청 년이었습니다. 주방에서 봉사하겠습니다. 주방장이 되었습니다. 어느날부터 수도원에 오는 사람들이 원장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고 주방장 로 렌스로부터 예수님을 만납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주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그가 쓴 글 가운데 “부엌은 나의 성전이요 도마는 나의 제단이 요 칼은 성구다”라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차량을 안내하는 지휘봉은 내 강단이다. 카메라 붙들고 있는 것은 목사님이 설교하는 저 제단과 내가 카메라 붙들고 있는 이 손길과 다를 바 없다. 목 장에서 두 명 앉혀 놓고 목장모임 갖는 그 자리가 골고다 언덕이다. 아이 한 명을 앉혀놓고 공부 가르치는 그 자리가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골고다언덕이다. 양 한 마리가 피를 흘리며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 앞에 죽어가는 자리, 죽 은 영혼이 살아나는 자리, 지옥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나는 자리, 그 자리가 아이 한 명을 앉혀놓고 가르치는 자리, 찬양하는 그 자리에 홀로 서 있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나의 제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 지키고 그것 세우는게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귀하고 남이 하는 것은 시시하고, 내가 잘 못 했을 때는 그럴 수 있지 뭐, 남이 잘 못하면 웬 세상에 그런 놈이 다 있어. 이런 것을 내로남불이라 고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 그를 사랑하기 때문, 남이 나를 비판하면 속 좁은 비인격자. 내가 끼어들면 바빠서 부득이, 남이 끼어들면 무례한 운전자. 내가 화를 내면 소신, 남이 화를 내면 옹졸한 인간. 내가 아프면 쉬어야 할 때, 남이 아프면 체력에 문제. 내가 옷을 잘 입으면 센스, 남이 잘 입으면 사치. 내가 소중하듯이 네가 소중 하고, 내가 하는 일이 귀하듯이 네가 하는 일이 귀한 것입니다.
속을 썩이는 자식 내려놓고 싶고 포기해 버리고 싶지만 그 자식 하나 끝까지 포기 하지 않고 기도하고 격려하고 세워가는 것이 나라를 세우는 길입니다. 대통령이 나라를 세우는 것과 조금도 하나님 앞에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내 부모 존중하고 곤경하는 것 이 세상을 존중하고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입니다. 내 교회 건강하 게 섬기는 것 한국교회 세우는 일이요 내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때로는 마음에 낙심되는 일이 많고 믿음 지키기 어렵지만 내 믿음 붙들고 지키는 것, 내 마음 붙들 고 지키는 것, 이것이 시대를 세우는 길이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길입니다. “모든 지 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4:23)
V. 잡초는 없다
느헤미야는 고국땅 성벽이 무너지고 모든 성문이 불에탄 소식을 듣고 달려갑니다. 달려가 보니 더 심각하게 무너진 것은 백성들의 마음이었습니다.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합시다. 일어섭시다. 하나님께 예배합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 이상 수치를 당하지 맙시다. 아무런 길이 없다고 포기하고 널브러져 있는 백성을 세웁니 다. 자존심을 자존감을 깨웁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백성이다. 일어납시다. 하나님이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이 무너졌습니까?
하나님 힘들어요 건강이 무너졌어요. 하나님 어렵게 시작한 사업의 문을 닫아야 해 요. 하나님 내 자식의 길이 없어요. 도와줄 힘도 없어요. 나라도 어렵고 한국교회도 위기라고 합니다. 도와주세요.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진짜 무너진 것은 네 믿음이니라. 네 비전이야. 네 마음 지켜야 돼. 네 말씀 신앙을 지 켜야 돼. 기도 무너뜨린 것 잘못된 거야. 예배 잘 드려야 돼. 하나님 앞에 나를 드리는 약속 서원이 무너진 거야. 이게 세워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느헤미야 3장엔 75명 이상의 이름, 인물이 등장합니다. 15가지 이상의 직업군이 나 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1권의 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재건과 개 혁의 현장을 기록하며 저자는 자그마치 686절 가운데 42.7% 293절 을 역사에 동 참한 사람들 그 당시에 있던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 포로에서 돌아왔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포로에서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겨우 자리 잡았을텐데 털고 돌아온다는게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당신 집도 세우지 못했는데 성벽 수축하고 성문을 세워 주어서 감사 해요. 제가 알아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하나님이 알고 계세요. 갚아 주실 거예 요. 역사가 흐른 다음에 후세에 사가들은 BC445년 수고했던 조상들의 수고를 기억 할 거예요. 잘하셨어요. 그 얘기입니다.
17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야생 들풀을 연구한 고려대 강병화교수가 있습니다. 17 년동안 무려 4500여종의 잡초, 들풀의 씨앗을 모았습니다. 연구의 결론이 뭔지 아 십니까? ♪이름 모를 잡초야 ~ 이런 것 없더라. 이름이 다 있더라.
♪이것 저것 아무 것도 없는 잡초라네 ~ 그런 것 없더라. 그 안에 생명이 있고 의미 가 있고 향기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멋이 있더라.
17년의 결론이 “하나님이 만든 풀 가운데 잡초는 없었다. 하나님이 기르시더라. 밀밭에 잡초가 심겨지니 잡초가 된 것 뿐이다. 들풀 가운데 밀이 돋아나면 밀이 잡초가 된다. 콩밭에 보리가 나면 보리가 잡초가 된다. 모든 풀 속에 이름이 있고 생명이 있고 나름 의 멋이 있다.”
하나님의 사람 그 누구도 꺾여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당신 무너지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무너지면 안됩니다. 당신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나라 역사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소중한 자녀들 무너뜨리면 안됩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조그마한 사역 어떻게 하든지 일으켜야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무너뜨리면 한국교회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붙들어야 됩니다. 75명의 소중한 사람들, 15개의 직업들, 여러분의 사업도 힘드시지요. 그러 나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의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배 무너지면 안됩니다. 기도 포기하면 안됩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한국교회여!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아 더 이상 수치를 당치 말자. 아무것도 없이 깡통 들고 살아도 내 마음, 내 믿음 무너뜨리지 말고 당당하시기를 바랍니다. 품위 있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여러분의 이름이 당당히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형통케 해주십니다. 다같이 따라할까요? “하나님이 형통케 해주십니다.” 느헤미야 2장 20절 말씀입니다. (시작)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이런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 안에 하나 되면 하나님께서 형통의 축복을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탁월한 지도자 느헤미야는 늘 언제나 해결사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오늘 중요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기도 시간을 더 늘려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계십니까? 긴급히 결정해야 할 일이 있으십니까? 우선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진정 중요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격려해서 어서 속히 예루살렘 성벽 쌓는 일을 완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일을 앞두고 ‘수일 동안’ 최우선적으로 한 일은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든지 반드시 형통의 축복을 맛보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심 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행동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은 절대로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도야말로 가장 확실한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제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기도가 아니면 대답도 하지 않았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는 결단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진정 환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을 느헤미야에게서 배우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를 통해서 좌절도 낙담도 환경의 방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서 당당하고도 용기 있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의 싸움은 바로 기도의 싸움입니다. 세상과 사단 마귀는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고자 온갖 모략과 술수를 쓰고 또 씁니다. 따라서 우리가 한시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낙심과 낙망과 두려움의 나락에 이내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가 없으면 우리는 흙무더기만 보아도 실망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일거리를 볼 때에 먼저 짜증부터 납니다. 무슨 부탁을 받을 때에도 심술부터 납니다. 조금만 속상한 말만 들어도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합니다. 자꾸만 삶이 헝클어지고 마음만 분주할 뿐,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정 영적전쟁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영적전쟁의 최선봉에 바로 기도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부터 기도할 때에도, 기도한 후에도, 계속해서 시험거리를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해도 여전히 문제는 있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험산준령은 가로 막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기도하게 되면 어떤 문제를 만나도, 어떤 험산준령을 만난다 할지라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입니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뻥 뚫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게 하시리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형통의 축복을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저들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자원하는 마음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성벽 재건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하심이 없었다면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먼저 그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합니다. 천지만물을 주관하시고 지금 이 시간에도 눈동자처럼 우리를 지켜 보호 인도하고 계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예루살렘 성벽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여 날마다의 삶 속에서 ‘이 는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모든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는 참된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벽을 쌓은 사람들의 명단
느 3:1-15 / 김영준목사(기쁜소식교회)
만리장성을 쌓을 때 국민 수 백 만명을 일꾼으로 동원했다고 하죠. 공사를 하다가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 위에 계속 성을 쌓아나갔다고 했습니다. 만리장성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지만 그 성을 쌓기 위해 수고한 사람들은 하나도 기억하지 않고 오로지 황제 한 사람의 명령에 의해, 황제 한 사람의 영광을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이 한 고생을 말하지 않고 그들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세계 불가사의 중에 하나입니다. 그 옛날에 그 많은 무거운 돌덩이를 어떻게 운반을 했고 쌓아올렸는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입니다. 영화 <십계(The Ten Commandments, 1956)>를 보면 수많은 히브리 노예들을 동원해서 도시를 건설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피라미드가 결국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왕 한 사람의 무덤을 쌓는 일입니다. 왕 한 사람의 무덤을 쌓기 위해서 그 많은 사람들의 노동과 희생을 동원했다는 말이고 그 왕을 기억을 하지만 그 무덤을 쌓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바가 없고 그들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의 성벽과 성문을 건축하는 일에 수고한 사람들의 명단을 일일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 3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는 일에 있어서 누가 어떤 일을 했는가, 누가 무엇을 했는가를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문은 히스기야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었다는 둥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다는 둥 그 다음은 누구의 손자, 누구의 아들, 누가 준수하였고,그 다음은 누가, 누가 어떤 일을 했느냐 이 모든 것을 일일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선한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지 사람의 수고를 기억하거나 알아줄 필요가 없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우수한 인물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한 사람의 영광을 위해 나머지 사람들이 수고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 사람들, 여러 믿음의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서 같은 목적을 위해 함께 수고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처럼 사람들을 독려하고, 비전을 제시할 지도자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느헤미야 혼자 이 모든 성벽을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모든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믿고, 거기에서 용기를 얻고 그래서 한 마음으로 수고하고 협조해야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느헤미야의 일만을 성경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이 모든 사람들 이름을 일일이 거명을 했고 그들 중에는 누구의 딸이 이런 일을 했다, 여성의 이름까지도 일일이 거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일평생 애쓰고 수고하는 일이 피라미드를 짓는 일 같다면 아니면 만리장성을 짓는 것과 같다면 그래서 수고하고 일은 일대로 하지만 그 수고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아주지도 않고, 기억하지도 않고, 잊혀져버린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영화 <마진 콜(Margin Call, 2011)>을 보면 이 영화는 “2008년 금융위기 때 가상의 은행을 소재로 해서 소위 을 다른 은행이 먼저 팔기 전에 선수를 쳐서 먼저 팔아서 손실을 최소화했다.”라는 그런 가상의 시나리오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그 일에 앞장섰던 은행 중역이, “내가 월가에서이 일을 하기 전에는 땅에 파이프를 심는 일을 했었는데 그 일을 하다가 돈을 벌기 위해 월가에 진출을 했는데 만일 내가 과거에 하던 땅에 파이프를 심는 일을 했다면 적어도 땅 판 흔적은 남았으리라.” 이렇게 한탄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새겨서 들어야 되는 대목입니다. “자기가 월가에 와서 돈을 많이 벌고, 돈 벌기 위해 이 일을 했는데 그런데 세상에 별로 남긴 것이 없고, 세상에 별로 기여한 바도 없고, 돈을 벌기는 했지만 그 이후의 무엇을 기억하는 것도 없고, 기억할 만한 일도 없다.”라고 스스로 한탄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월가의 금융 직업을 도매급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지만 사람이 일평생 수고를 한 결과로 과연, “무엇이 남았느냐? 어떤 결과가 남았느냐? 누가 그것을 기억을 하겠느냐?” 하는 중요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억할 만한 일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어떤 사역자라던가 목사가 되어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니에요. 목회자도 그가 일평생 수고해서 남긴 것이 어떤 교회 건물에 불과하다면, 어떤 무슨 사람들을 한때 많이 모은 것에 불과하다면 그건 일시적인 것이고, 그건 만리장성을 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피라미드를 쌓는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이 남느냐?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고 했어요. 고린도의 성도들을 가리키면서, “너희가 우리의 편지다.” 그 말은, “너희가 우리의 성과다.”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성도들의 내면에 일어난 변화, 그들의 영적인 변화, 그들의 영적인 성장, 이것이 바울의 수고의 결과다. 그런 의미로,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 위에 쓴 것이 아니요, 육의 신비에 한 것이라. 성도들의 내면에 일어난 변화, 사실 그것을 하나님 이외에 누가 아시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사람이 그걸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죠.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인간은 결코 다 파악할 수도 없고 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섣불리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뉴스에 의거해서, 뉴스를 듣고, 기독교가 한 일이 없다느니, 교회가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뉴스에 의존해서 평가하는 것처럼 미련한 일이 없어요. 실제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기자들이 파악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방송국이 취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과 당사자 이외에는 다 알 수 없는 일이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개인의 삶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조차도 나 이외에 누가 안다는 말입니까? 나도 다 기억하지 못하고 나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하신 일을 누가 다 파악할 수 있으며 누가 그것을 다 기억할 수 있습니까? 그건 사람들도 모르게 지나가는 일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신문보도에 의존을 해서 하나님이 이렇다느니, 기독교가 이렇다느니, 교회가 이렇다느니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언론이라는 것이 그 성격 자체로 문제를 파악하고, 문제를 보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언론에 의존해서 신앙이 이 세상에 이런 일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을 눈으로도 볼 수 없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하나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보여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눈으로도, 귀로도, 마음으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도리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하나님이 과연 어떤 일을 얼마만큼 하셨는가 하는 것은 그건 천국에 갔을 때 비로소 다 알게 될 것이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것을 다 알 도리도 없고,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줄 사람도 없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 마음에 간직할 뿐 그것을 반드시 남들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 그것을 간직할 뿐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사람마다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한 것이 분명히 있으리라고 우리가 짐작을 하는 것이 그것이 옳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껏 살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이제껏 낙심하지 않고, 실족하지 않고, 그 사람이 교회를 다니든, 안 다니든, 그 사람의 믿음이 내 눈에 얼마만큼 드러나 보이든 간에 그것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만으로 어떻게 판단합니까? 예수께서 문둥병자 10명을 깨끗하게 해주셨는데 한 명만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했어요. 나머지 9명 그 사람들도 깨끗함을 얻었어요. 그 사람들도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했어요. 다만 그들은 잊혀 졌죠. 그들의 이름을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과연 그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 했을까? 그 사실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처럼 대부분은 잊혀지고, 대부분은 아무도 말하지 않고, 대부분은 그것을 얻기는 얻었으되 떠나 가버린 것으로 끝나버린다면 한 명의 문둥병자가 돌아와서 감사한 것, 그것만을 가지고, “주님이 하신 일이 이것뿐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의해서도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땅이 한 부류에 불과했죠. 옥토라고 불리는 한 부류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아, 하나님이 하신 일, 기독교 신앙이 이룬 것이 이것뿐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이외에 다른 종류의, 여러 종류의 땅에도 씨앗을 뿌렸고, 거기에서도 어떤 결과가 있었어요. 다만 그것이 흡족하지 않았던 것 뿐이죠. 그건 주님에게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말씀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씨를 안 뿌렸기 때문도 아니에요. 다만 사람마다 자기의 사정이 있고 그 사정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똑같은 말씀의 씨앗을 뿌렸는데도 그 결과가 그렇게 다양하더라는 것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그 땅 하나만을 보고 그 이외에는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이외에는, “헛되었다 라던가, 그 이외에는 하나님이 태만했다 라던가, 그들을 잊어버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판단할 수 있는 능력에는 심히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가시적인 성과만을 가지고 신앙이든, 말씀이든, 성령이든, 하나님이든, 기독교든, 교회에 그 수고의 결과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눈에 숨겨져 있고, 감춰져 있고 사람이 쉽게 알 수 없고 숨겨져 있습니다. 본인과 하나님 사이에 말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고, 돌 위에 쓴 것이 아니요 사람의 신비에 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이런 사역을해야 기억할 만한 또 보존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많은 사람들은 제사장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평범한 직업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농사짓는 사람, 양을 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별의별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느헤미야가 어디에서 건축자재를 사오며, 무슨 돈으로 벽돌을 사오며 무슨 능력으로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천직이 있고
자기의 수입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건축 자재든, 벽돌이든, 이것이든, 저것이든 그것을 기부할 수 있고 이 일에 유익하게 효과적으로 동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천직을 통해 얻는 소득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어느 한 사람의 능력이나 실력이나 노력이나 헌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아야 됩니다.
교회를 처음 나오게 된 사람들의 대부분의 계기는 설교자의 설교 때문도 아니고, 방송 설교 때문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전도 때문도 아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교회로 초청을 해주었기 때문에 옵니다. 그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그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교회를 나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인터넷도 아니고 티비도 아니에요. 서적도 아니에요. 누군가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사람이 교회로 초청을 해주었기 때문에 교회에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외국도 그렇습니다. 일반 성도들의 역할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아마 사람들은 기억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초청했나, 누가 누구를 교회로 인도했나. 당사자는 알아요. 당사자는 기억을 합니다. 그 때 그 분이 우리 가족을 교회에 초청을 해주어서 우리가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죠. 사람이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 중의 하나는 교회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같이 가자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만큼 큰 친절이 없어요. 그것처럼 큰 사랑이 없어요. 신세를 지는 것입니다. 은인이에요. 은인.
왜냐하면 과연 몇 명이나 자기 발로, 자기의 의지로 어떤 교회인 줄 알고 어디를 찾아가겠습니까? 누군가가, “같이 가자.” 불러줘야 됩니다. 거의 강권적으로, “이번 주일부터 갈 테니까 딴 생각하지 말아라.” 그건 강권이 아니고 그건 사랑의 표현, 사랑. 저희 교회를 개척할 때도 지하 2층 볼링장을 2000년 봄에 계약을 해서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의자, 기자재, 오디오, 악기 모든 것을 다 갖추고 그래서 2000년 5월부터 수요 성경 공부를 시작하고, 금요 심야기도회를 시작하고, 새벽기도회를 시작하고 그리고 9월 3일에 주일예배를 드림으로 교회를 창립을 했죠. 다른 교회에 남부럽지 않도록 예배당을 정성껏 준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많은 성도들이 동참했기 때문이에요. 제가 이전에 섬기던 교회든, 주변에 지인들이, 많은 분들이 기꺼이 동참을 하고 도와주어서 남부럽지 않게 예배당을 준비할 수 있었어요. 아마 그 때를 기억하는 분도 계시고 그 이후에 저희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게 그냥 된 게 아니에요. 여러 성도들의 신앙과 관심과 헌신, 도움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처음에는 이 지하 2층을 임대한 데서 시작을 했지만 몇 년 후에 건물주로부터 이 건물을 우리가 구입하지 않았습니까? 당시에 100억이 넘는 가격이었어요. 아마 지금은 가격이 2배 정도는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이 혼자 힘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함께 믿고, 함께 수고하는 많은 성도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거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을 보면 천국에 생명책이 있고 또 다른 책이 있다고 했어요. 생명책에는 구원받을 자의 이름이 적혀있고 다른 책에는 사람들의 행적이 기록이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좋은 행적, 나쁜 행적을 다 포함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예루살렘의 성벽과 성문을 수축하는 일에 도움을 베풀었던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을 한 것을 보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기록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예를 보여주는. 수 천년 전에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 일에 동참했던 사람의 이름을 기록을 해서 수 천년이 지난 후에 우리가 여전히 그들의 이름을 읽을 수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을 기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헌신, 수고, 여러분의 사랑, 헌금 이 모든 것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바로 이런 데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실 것이고 그리고 그 결과로 혜택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 기억이 될 것입니다.
힘을 모으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느 3:1-5, 28-32 / 문성옥목사(일산명성교회)
무드에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궁궐 안에 매우 맛있는 과일이 열리는 <오차>라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왕은 그 과일나무를 지키기 위해 경비원 두 사람을 고용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자였고, 또 한 사람은 다리가 불편한 지체장애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사람은 그 과일을 따먹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어떻게 하면 그 열매를 따먹을 수 있을까’ 상의한 끝에 한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시각장애자가 자기 어깨 위에 지체장애자를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자는 직접 과일을 딸 수는 없었지만, 지체장애자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서 맛있는 과일을 딸 수가 있었습니다.
뒤늦게 점점 그 진기한 과일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몹시 화가 나서 두 사람을 잡아가둔 후 조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범인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각장애자는 “앞을 볼 수 없는 제가 어떻게 높은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먹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지체장애자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제가 어떻게 높은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먹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두 사람이 그 진기한 열매를 따먹은 것이 분명한데도, 증거가 없어서 더 이상 두 사람을 조사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탈무드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함께 힘을 모으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결의 힘’이라고 합니다. 본문이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힘을 모으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이 기록된 배경은 바벨론제국에 포로로 있던 유대인들은 바벨론이 바사(페르시아)에게 망한 후, 바사제국의 고레스왕(고레스2세)이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함에 따라 ‘1차 귀환’을 하였습니다. 그 때가 B.C. 538-537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스룹바벨이었습니다. 그 후 B.C. 458년 아닥사스다왕 때에 에스라를 지도자로 ‘2차 귀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주전 444년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으로 있던 느헤미야가 고향을 방문하고 돌아온 동생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4개월 만에 마침내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아 많은 건축 재료들을 싣고 무너진 성벽건축을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것을 ‘3차 귀환’이라고 부릅니다. 느헤미야는 많은 방해들을 뚫고 52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 한 사람을 통해서 52일 만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게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 느헤미야 외에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았습니다. 본문에는 무려 75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느헤미야가 할 일이 없어서 본문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뭔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로 하여금 본문을 기록하게 한 것입니다.
(1) 다양한 사람들 - 느헤미야 3장에는 무려 75명이나 되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15가지 이상의 직업이 나옵니다. 사람마다 고유하게 맡은 일이 있고 각각의 일이 다른 일과 모자이크처럼 연결되어 완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전체성벽을 42구역으로 나누고, 10개의 문과 4개의 망대들을 세워 그곳에 필요한 사람들을 배치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과 직업 중에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있는데, 제사장들은 예배가 우선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성 쌓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또한 유대지방에 있어서 여성의 지위는 정말 보잘 것 없어 이렇게 언급되는 일이 드물 뿐 아니라, 남성들과 달리 고되고 험한 일을 잘 하지 못했지만 함께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배경과 직업이 있었지만 자기 이유를 달지 않았고, 자기 입장과 생각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2) 하나 된 사람들 - 본문을 보면 비록 직업과 나이와 집안과 성별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하나’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그 다음은(Next)’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질서를 지키며’ ‘협력하여’ 성벽재건공사를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75명의 이름이 다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한 사람도 소외됨 없이, 연합해서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부족해 보여도 함께 하는 사람들을 쓰셨습니다. 모세가 혼자서 수백만 명을 이끄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장인 이드로를 통해서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들을 세우게 하여 함께 일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낼 때 한 사람씩 보내신 것이 아니라, 둘씩 짝지어서 보내셨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나 홀로 신앙생활이 아닌 더불어 신앙생활 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서로 하나가 되어 힘을 모으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주님께서도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큰 역사가 있을 것이라 하셨고, 사도행전의 일곱 집사가 성령 충만하여 하나가 되었을 때 모든 분열과 분쟁의 위기를 극복 할 수 있었습니다. 120문도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을 때 초대 교회의 역사가 바뀌었고 사도행전이 기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힘을 합하면 좋은 상을 얻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전 4:9-12)
1934년 10월 16일 8만 명의 중국 공산당 군대인 홍군은, 장개석이 이끄는 70만 명이나 되는 국민당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후에 모택동의 7,000명의 공산당 군대는 장개석의 70만 명의 국민당 군대를 무찌르고 중국을 공산당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중국 역사는 바뀌었고, 그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중국이 공산국가가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다른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역사학자들은 그 이유를 “원칙을 잘 지켰기 때문이다.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쫓기는 입장에서도 지켜야 할 기본 행동규율을 지킴으로써 수많은 국민들로부터 인심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젊은 병사들도 많이 얻게 되었습니다.
모택동은 다음과 같은 규율을 정하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첫째 아무리 배가 고파도 민중의 것은 감자 한 알이라도 훔치지 않는다. 둘째, 잠자리에 사용했던 건초는 반드시 묶어서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셋째, 여자들이 있는 곳은 피해서 간다.
그렇습니다. 잘되려면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이것을 지켜 가면 이것이 성공하는 길이요,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의도를 잘 알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잘 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벽 공사
느 3:1-32 / 염두철목사
느헤미야 3장은 예루살렘 성벽 중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중수’라는 말이 무려 39번 나옵니다. 느헤미야 전체의 주제가 ‘중수’입니다. 중수라는 단어는 ‘보수하다“라는 뜻입니다. 허물어진 곳을 세우고, 망가진 곳을 다시 고치고, 뚫린 곳을 막으면서, 벽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 중수입니다.
그런데 말이 중수이지 실제는 재건축 수준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잘 파악했던 느헤미야였기에 2장 5절을 보면 그가 바사 아닥사스다 왕에게 도움을 요청을 할 때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재건축 수준의 성 보수공사는 최우선적으로는 성벽과 성문 보수였습니다. 보수 공사는 북동쪽에 위치한 ‘양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라고 재건축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보수 공사는 양문에서부터 시작하여 반시계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어문’이 나오고, 6절을 보면 ‘옛 문’이 나오고, 13절을 보면 ‘골짜기 문’이 나오고, 14절을 보면 ‘분문’이 나오고, 15절을 보면 ‘샘문’이 나오고, 26절을 보면 ‘수문’이 나오고, 28절을 보면 ‘마문’이 나오고, 31절을 보면 ‘함밉갓 문’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은 10개의 성문과 4개의 망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7개의 문이 중수되었음을 3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3장 본문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성벽 재건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나오고, 공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루하지는 않았습니까?
설교를 준비하면서 오늘 이 본문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이 많았습니다. ‘이 본문을 끝까지 같이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고, 처음 본문을 대할 때는 ‘여기서 무슨 설교를 할 수 있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무의미하게 기록된 성경은 없습니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본문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벽 재건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연합된 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성벽 재건에 있어서 지도자는 느헤미야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을 재건한 것은 느헤미야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었습니다. 성벽 재건은 지도자 한 사람만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힘이 하나로 모아져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여리고, 드고아, 기브온, 미스바, 벧술, 그일라 등 다양한 지역 명칭이 나옵니다. 직업도 역시 제사장, 금장색, 향수 장사 등 다양합니다. 성벽 재건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떠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들이 없는 관리는 그의 딸들이 건축 공사에 참여하여 아들을 대신해서 성벽 공사에 참여했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이 본문 12절입니다.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레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
이렇게 사람들은 지도자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회복을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전도서 4장 9절을 보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밭일을 해보면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낫고, 두 사람보다는 세 사람이 낫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힘든 일도 같이 일하면 지루하지도 않고, 재미도 있고, 일의 성과도 눈의 띠게 나타납니다.
신명기 32장 3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천이면 둘일 때 2천이어야 하는데 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나타나는 시너지 효과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협력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힘을 합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사람의 탁월함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전체가 힘을 합칠 때 세워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성벽 재건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들이 먼저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가장 먼저 ‘양문’이 나오는데 이 문은 양들이 들어가고 나가는 문이었습니다.
이 양문을 누가 중수했습니까?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건축했습니다. 뒷짐을 지고 어른 행세를 할 대제사장이 그 바쁜 성전 사역에도 불구하고 성벽을 쌓는 일에 솔선수범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말이 성벽 쌓는 일이지,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당시에 제사장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면 평생 동안 제사장입니다. 제사에 관련된 일만 하던 대제사장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문을 건축하고 문짝을 달고 망대를 세우는 일에 나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 번도 손에 연장을 잡아본 적이 없는 대제사장이 돌과 나무를 깎느라 손에 물집이 잡히고 긁히고 벗겨지고 멍들고, 심지어는 손톱까지 손상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험한 일에 기꺼이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자신의 지위와 사회적 체면, 자존심을 버리고 뛰어든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형제 제사장들이 그의 모범을 보고서 합세한 것입니다.
이것은 느헤미야의 열정이 전염된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열정이 대제사장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고, 대제사장의 솔선수범이 이렇게 다른 이들의 헌신을 일으키는 불꽃이 되었던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교회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어도 사람들은 ‘누구 그 일을 할 것인가’ 바라만 볼 뿐 나서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나서면 따라 나서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솔선수범하는 그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셋째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체계화된 분담으로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자기 집과 마주 대한 곳을 중수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23절을 보면 “자기 집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8절을 보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곳을 담당했습니다. 이것은 시간상으로나 동기 부여 면에서도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분담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벽 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부터, 눈에 보이는 일부터 시작한 것처럼 우리 개인이나 교회도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교회에 주어진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려고 할 때 멀리 있는 그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하기보다 먼저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도우려 할 때 멀리 있는 그 누군가를 도우려 하기보다 먼저 내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0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했고, 디모데전서 4장 8절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병든 자기 부모는 돌아보지 않고 양로원을 찾아가서 다른 노인들 수발하는 일을 한다고 하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사랑과 봉사, 섬김은 눈에 보이는 가까운 곳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불평 없이 자원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성벽 재건은 자신의 집 가까운 곳에서부터 다음 사람의 집까지 중수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그 다음은 삽베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삼베의 아들 바룩이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까지 중수해야 하는데 거리가 아주 멀었습니다. 그래서 성을 돌아서 힘써 중수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많다고 불평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성경은 어떤 사실을 미화하지 않고 사실대로 기록했기 때문에 있었으면 있었다고 기록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없는 것을 보면 삼베의 아들 바룩은 다른 사람보다 일이 많았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사명으로 알고 충성스럽게 감당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롭고 감동이 넘치는 현장입니까?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아름다움입니다. 공동체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습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위하기 때문에 일이 많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저는 밭일을 하면서 이 원리를 깨닫습니다. 밭에서 일할 때 열심히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래야만 어머니가 일을 조금이라도 적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벽 재건이 자원함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는 금장색들이 참여한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보면 “그 다음은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 등이 중수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31절을 보면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2절을 보면 “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긍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장색은 금세공업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에게는 섬세함이 생명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성벽 재건과 같은 거친 노동일에 자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당한 핑계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직업상 거친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러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은 돈을 쓰면서 하는 일입니다. 대가가 없습니다. 봉사로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불평이 생길 수 있습니다. 주의 일에 불평이 없으려면 자원함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이름 없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성벽 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는데 모두 75명입니다. 이들은 각 가족의 대표들이었습니다.
본문을 읽다보면 굳이 누군지도 모르는 이름을 이렇게 일일이 나열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이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한 사람의 책임자나 대표적인 인물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칭찬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 일에 동참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수고와 노력이, 또 공로가 드러나지 않음으로 인해 서운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느헤미야 한 사람만 기억하신 것이 아니라 성벽 재건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십니다. 본문에 75명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조금이나마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했을 때 내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성벽 한켠을 보수하고 있는 무명의 사람들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토끼가 거북이에게 경주를 진 이후로 피나는 연습을 하고 다시 도전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경주를 벌인 결과 또 다시 거북이의 승리로 끝나버렸습니다.
낙심한 토끼가 고개를 푹 숙이고 집에 가고 있는데 달팽이가 나타났습니다. “너 또 졌다면서?” 열 받은 토끼가 온 힘을 다해서 달팽이를 한 대 쳤습니다. 달팽이는 저 멀리 산기슭까지 날아갔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에, 토끼가 집에서 쉬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자신이 1년 전에 때린 달팽이가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달팽이가 말했습니다. “너 지금 나 쳤냐?” 달팽이는 1년 동안 열심히 토끼집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느끼기에 하나님의 시간이 느리고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언젠가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행하고 지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잘 3절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는 은밀한 일들까지도 모두 지켜보시고, 기억하시고, 때가 되면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연합된 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체계화된 분담으로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불평 없이 자원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름 없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할 때도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기회가 주어질 때 이와 같은 귀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서 이루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느헤미야 3장 성벽을 세우는 사람들
새해를 맞이하면 새로운 꿈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까? 이왕이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로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겠다는 결단을 가지고 계획을 세워야합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적으로도 새 교회당 마련 project가 한편으로는 흥분되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하지만 막상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려면 주춤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느헤미야 그리고 그와 함께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둘레가 4마일, 두께가 1m, 높이가 5m 이상 되는 성벽 재건을 불과 52일 만에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역을 통하여 성경적 형통의 원리를 찾으며 교회당 마련을 앞둔 저희에게 적용하고자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중의 일부가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고향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돌아 와서 '여호와의 새 일'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파괴된 성전을 다시 짓는 일과 예루살렘 성을 수축하는 일이었습니다. 가까스로 성전을 지었지만, 성벽 공사는 진행하다가 중단되었습니다. 성이 무너지고 성문이 제대로 없으니 주민들은 항상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변의 방해가 만만치 않으니 어느 누가 선뜻 나서서 다시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의 필요성과 더불어 이 일은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확신을 불어넣으며 무리들의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성벽 재건은 단순히 무너진 성벽에 대한 개축 공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을 대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요, 예루살렘 성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페르시아 왕조차도 이 사역을 돕는다는 말을 들으면서 지도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며 성벽 재건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그러자 백성들도 한 마음으로 성벽 재건에 참여하게 됩니다. 일단 성을 쌓고 문을 달자는 데는 뜻을 모았습니다. 그 다음에 대두하는 문제가 어떻게 지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보통 성을 쌓으려면 왕이나 유력자가 많은 돈을 들이고 많은 사람을 동원해서 수년에 걸쳐 공사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예루살렘은 그런 공사를 할 만한 예산이나 행정조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정상적으로 성을 쌓으려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비참한 생활을 그만두고 제대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성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을 짓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느 한쪽에서부터 공사를 시작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공사가 끝나게 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또 하나는 여러 구간에서 동시에 시작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후자를 택했습니다. 성 전체를 42구간으로 나누어 할당된 그룹마다 각자 맡은 구간의 공사를 진행하도록 했습니다. 이 방식을 택한 이유는 지금의 공사가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처음 짓는 것이 아니라 재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을 재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흙더미 속에 파묻힌 돌을 파내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백성들이 이 공사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노동력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한쪽에서 시작하면 다른 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놀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원수들의 방해입니다. 한쪽에서 성을 쌓고 있는 동안 원수들이 와서 다른 쪽을 허물어 버린다면 아무리 쌓아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내린 결론은 다른 사람들이 성을 쌓아주기를 막연하게 기다리지 말고 최소한 자기 집 앞부분은 자기가 성을 쌓아 지키자는 것입니다. 단체경기에서 팀웍이 필요하듯이 신앙생활에서도 필요합니다. 느헤미야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예루살렘 성 재건을 위하여 백성들의 힘을 하나로 모읍니다. 공사 전체의 큰 그림을 가지고 진행 과정을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지휘하듯이 깔끔하게 이끌어갑니다. 그들은 뛰어난 팀웍을 바탕으로 마침내 성벽 재건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어떻게 짧은 시간에 견고하게 세워질 수 있었습니까?
1) 리더들이 앞장섭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 형제 제사장들의 공사를 먼저 언급합니다. 즉 공사가 북쪽에 있는 양문에서 시작됩니다. 다른 문이나 구간에는 성별했다는 말이 없는데 양문과 두 망대 사이를 성별했다고 한 것은 다른 구간과는 달리 성전과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생 제사에 사용되는 양들을 인접한 베데스다 못에서 깨끗이 씻은 후에 양문을 통하여 성전 구역으로 운반하였습니다. 그들은 양문의 기둥을 놓고 문짝을 달았으며 함메아 망대에서 하나넬 망대에 이르는 구간에 돌을 쌓아 성벽을 건축하였습니다. 건축하였다는 것은 그 구간이 완전히 무너져 새로 지었다는 뜻입니다. 망대는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감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망대는 다른 성벽보다 더 높이 쌓아야 하니까 더 힘이 드는데 이것도 제사장들이 감당합니다. 제사장 가문의 사역을 제일 먼저 기록한 것은 성벽재건 project는 단순한 성 쌓기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을 거룩한 도성으로 구별하려는 목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랫동안 버림받고 방치되었던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고 무기력했던 유대인들이 개혁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남으로써 나라를 바로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성벽 공사가 끝났을 때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면서 예루살렘 성 전체에 대한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느 12:30). 제사장들 뿐 아니라 고위공직자의 아들들, 고급직종에 종사하는 사업가들도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이 솔선수범하니 일반 백성들이 성벽 쌓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리더는 무슨 일을 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본을 보여줌으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동기를 제공해야 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빌 3:17)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본받으라는 바울의 말은 그 자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을 과시하려는 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알려고 하는 열심, 예수님을 닮아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는 열심, 복음의 진보를 위한 그의 열정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본이 되는 목사, 본이 되는 장로, 집사와 권사, 본이 되는 목자들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섬기는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2) 공동체가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대제사장 가문으로부터 시작하여 평민에 이르기까지 공사에 참여한 75명의 리더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 공사에는 유다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었습니다. 제사장이 앞장서서 일합니다. 성전에서 가장 천한 일을 담당하는 느디님 사람들이 자기들이 거주하는 성전 망대 주변 지역을 재건합니다. 각 지방의 통치자들 즉 예루살렘 지방, 벧학게렘, 미스바, 벧술, 그일라 지방을 다스리는 자들의 아들들도 성벽 중건에 참여합니다. ‘금 장색, 향품장사’들은 힘든 육체노동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비교적 고급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자기의 일들은 잠시 접어둔 채 성벽 중건에 참여합니다. 레위인들이 참여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도 참여합니다. 그들은 번 돈을 가치 있는데 쓰고 싶어 했는데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성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이들 뿐 아니라 개인들도 참여합니다. 관리의 아들 르바야는 부와 권력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신 일할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 자기 손으로 직접 수고하였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자기에게 할당된 직임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지위고하, 빈부귀천,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여성들이 참여합니다.
성벽 서쪽의 망대 부분을 건축한 살룸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릴 정도의 고위 관리였지만 아들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수하의 사람들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딸들을 데리고 와 성벽을 보수하는데 참여하였습니다. 여성들의 지위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에 여성들이 직접 땀을 흘리며 작업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눅 8장에 보면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물질적으로 도운 사람들도 주로 여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남녀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경건한 여성들의 수고가 주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합니다.
- 원근각처에서 참여합니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성 밖에 거주하는 자들도 참여하였습니다. 예루살렘 밖에 사는 자들은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은 지역에 할당되었습니다. 여리고(2), 드고아(5, 27), 기브온(7), 미스바(7) 사람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원래 여리고성은 여호수아에 의해 저주를 받은 성인데 이 성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을 쌓는데 참여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20km 쯤 떨어진 드고아에서 온 평민들도 동편 성벽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수아를 속여 조약을 맺었다가 이스라엘의 종이 되었던 족속입니다. 그들도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귀한 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3) 역할을 분담합니다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 원근각처에 사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각자 자기에게 할당된 구간만 맡아 일하면 되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은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이 맡은 관할 구간 등을 상세히 소개합니다.
- ‘그 다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작업 방식은 ‘그 다음은’이라는 단어에 잘 담겨져 있습니다. 3장에 이 단어가 28번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공사 구간을 42개로 나누고 이것을 38개 가문에 분담시켰습니다. 한 그룹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고, 그 다음 그룹이 그 다음 부분을 잘 감당하면서 전체가 이루어집니다. 역할을 분담함으로 일을 능률 있게 하고, 책임 의식을 고취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다시 세우는 것은 크고 힘든 일이지만 각 그룹이나 사람이 자기의 몫을 감당하였을 때 가능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공사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구간의 연결부분입니다. 성벽은 모든 구간에서 튼튼히 잘 지어져야 합니다. 만일 각자가 맡은 부분은 열심히 하는데 연결 부분을 엉성하게 공사하거나 어느 한 부분이 부실하게 지어졌다면 대적들이 그 부분으로 공격해 올 수 있습니다. 42구간으로 나누어 공사를 하지만 전체를 감독하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 부분을 느헤미야가 담당했습니다. 느헤미아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예루살렘 성 전체 공사를 잘 감독하고 서로 연결되게 하였습니다.
- ‘집 맞은 편’
아무리 짓겠다는 열정이 있어도 일할 수 있는 자리에 제대로 배치되지 않으면 노력이 낭비 될 수 있고 일이 재미없으면 그 열정도 시들기 마련입니다. 느헤미야는 일을 하기 전에 미리 현장 답사를 통하여 어떻게 사람들을 배치할 것인지를 결정했습니다. “집 맞은 편,” “집 옆,” “마주 대한 곳”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해당 구간의 거주자들이 집 근처에서 일하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 집 근처에 있는 성벽이나 성문이 무너져있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떨까요? 착잡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부분을 맡아 일하면 잘해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멀리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기에 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대적들이 쳐들어올지라도 가족들을 보호하기가 쉬울 것이요 또 건축할 때 가족들이 함께 도울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배치하였습니까? 그들은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성벽 구간에서 일하게 하였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성벽의 북쪽 부분을 담당하였고 사노아 사람들은 힌놈 골짜기의 험난한 지형 위에 성벽을 쌓으며 골짜기 문을 세웠습니다.
교회의 사역도 목회자가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역할을 분담해야 합니다. 엡 4:12에 의하면 목사의 하는 일은 성도들을 잘 훈련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감당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찬양, 주일학교에서 가르침, 친교, 청소, 비품 관리, food bank에서 음식 분배 등등. 할 일은 많습니다. 부서별로, 선교회별, 목장별로 나누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 개개인의 능력은 미약할지라도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나아갈 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4) 열정이 있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려면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육신의 힘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수행하면서 지어보았자 느헤미야 좋은 일만 시킨다고 생각하면 아무도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벽재건에 참여한 백성들은 이 성이 제사장들의 성도 느헤미야의 성도 아니요 하나님의 성이요, 우리의 성이라는 의식이 있었기에 힘들지만 동참하였습니다. 사방에 대적들이 여전히 존재하여 안전을 위협받고 포로에서 귀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였지만 공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샬룸은 딸들과 함께 참여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20절에는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한 부분'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둘째 부분'이라는 뜻입니다. 바룩은 제사장으로서 다른 제사장들과 함께 먼저 한 공사를 끝내고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까지 또 다른 부분을 맡아 일했습니다. 46개 그룹 중 바룩에게만 특히‘힘써’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일했지만 바룩이 남들보다 더욱 열심을 내었다는 뜻입니다. 드고아 사람들도 자기들의 귀족은 공사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자기들에게 배당된 공사를 먼저 마치고 다른 부분의 재건에도 참여합니다.(27) 므레못(4, 21)과 하나냐(8, 30)와 므술람(4, 30)도 성벽 두 군데를 쌓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참여할 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열과 성을 다하여 참여해야 합니다. 자신의 일을 감당하고 남을 돕는 사람들은 공동체에 뜨거운 열성을 불어넣습니다. 한 마음으로 공동체가 가진 달란트와 자원을 합치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협동의 유익입니다.
이 교회는 담임목사나 특정인의 교회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교회요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며 섬겨야할 우리 교회라 하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 모두가 각기 한 분야씩을 맡아 그 일을 책임지고, 자원하여 모든 일에 참여할 때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거둡니다. 바울은 권면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진대 기쁨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섬기되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 하나님의 일의 특징
1) 하나님의 일은 다 귀합니다.
‘분문’은 성읍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시중의 쓰레기와 오물을 실어 나르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선뜻 나서서 일하기가 꺼려지는 냄새 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와 아들이 분문 쪽을 담당하였습니다. 주의 일을 하다보면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 일, 일을 해도 남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심지어 더럽고 하찮게 보이는 일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누군가 카펫을 청소하고 화장실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어지럽혀진 방을 정돈해야 하고 음식을 먹은 후에 설거지를 하거나 쓰레기를 갖다버려야 합니다. 누군가 주보를 접어야 하고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물론 일을 하고 싶어도 육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할 수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큰 것, 작은 것, 더러운 것, 천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과부의 동전 두 잎을 기뻐하신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성도들을 기억하십니다.
2)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 사람을 하나님이 다 기억하십니다.
느헤미야가 대제사장 엘리야십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성벽 재건에 참여했다고 쓰지 않고 이름들을 일일이 기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것이기에 그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느헤미야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 사람들을 다 기억하신다는 것이요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이 너무도 귀하다는 것입니다. 후손들이 그들의 이름을 볼 때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반면에 드고아 귀족의 자손들은 자기의 조상들이 성벽 재건 사업에 참여하지 않고 빠진 것을 보면서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저와 여러분이 베푸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주님의 일에 참여할 때 우리의 행위가 다 기록됩니다. 예수님은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충성한 자들에게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교우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원하여 주의 일을 감당하고,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이 교회역사를 보면서 목사와 장로들이 함께 일어나 성전의 기초를 놓고 성별하였고, 그 다음은 오집사가 지붕을 담당하였고, 그 다음은 주집사가 페인트를 칠했고, 그 다음은 김집사가 음향시설을 담당하였고, 그 다음은 이집사가 오르간을 봉헌하였고 권사들은 공사기간 중 기도에 전혀 힘을 썼고 아브라함회원들은 시간시간마다 현장에 나와 교회를 돌보았다고 할 것입니다. 얼마나 기쁨으로 주님의 일에 참여했는지 주님은 기억하시고 상을 주십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3) 하나님의 일에도 비협조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드고아 평민들은 성을 쌓는 일에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리더들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한 내용이 기록된 것은 백성들 모두가 공사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기들은 귀족이니 성벽을 짓는 힘든 일을 직접 하기를 꺼리고 뒷짐만 지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권리만 찾을 줄 알았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는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많은 역량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에 구경꾼으로 남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은 계속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드고아 귀족 같은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은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소극적이거나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인 모습이 우리와 상관없는 단어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포로에서 귀환한 별로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었지만 기도와 말씀으로 얻어진 느헤미야의 영력, 철저한 조사와 분석을 바탕으로 한 계획, 낙심한 백성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역사 세우기에 동참하자는 느헤미야의 호소,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지음으로서 선민으로서의 정체성 회복을 원하는 백성들의 결단과 헌신 등이 합쳐져서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본문에 나타난 성경적인 형통의 원리는 리더의 솔선수범, 공동체의 적극적 참여, 역할 분담, 그리고 열정입니다. 이 원리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2013년도 팔로마한인교회에서 벌이는 귀한 역사에 한 마음이 되어 참여합시다. 성벽을 재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어깨를 서로 들이대고 참여합시다. 전부터 있는 교인이든지 최근에 참여한 교인이든지, 어른들이든지 학생들이든지, 중직자든지 신임 제직이든지 함께 참여하여 하나됨의 위력을 보여줍시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함께 만들어가는 동역자들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도로 참여하는 사람들, 물질로 참여하는 사람들, 손과 발을 움직여 참여하는 사람들이 다 필요합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자원하여 그리고 헌신적으로 드리는 모든 수고를 주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온 교우들이 한 마음으로 ‘팔로마 성전을 짓는 사람들’이 되어 사역에 동참하면서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을 쌓은 일꾼들
느 3:1-12 / 엄기호 목사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회 속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어떤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이 언제나 일치하지 않고 분분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면 의견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누어져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교회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만장 일치의 찬성을 얻어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 일은 영적이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는 이해되기 어렵습니다. 하나의 공통된 의견 속에서, 반대 없이 행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는데 있어서 적절한 반대와 어려움은 오히려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 볼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확신을 갖고 많은 일들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는 일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어떠한 가치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나 오늘의 교회 현실을 볼 때, 하나님의 일을 두고서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일에 방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에 예루살렘 성을 쌓는 일꾼들과 그때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을 쌓은 일꾼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중단이나 후회가 없었습니다
성을 중수하는 자들은 많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중단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후회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일을 함에 있어서는 시작과 끝이 좋아야 합니다. 어떤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튼튼하게 보수하였습니다. 무너진 곳을 튼튼하게 보수해야만 도적이나 짐승이 넘어 들어오지 못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이라는 성벽에 무너진 곳은 없는지 점검하고 확인하고 보수하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양평기도원과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중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 자들은 하늘나라에 그 이름과 공적이 기록되어 상을 받을 수 있으나, 그 일을 하지 않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 5장 23절에 보면 하나님 일을 돕지 않는 방관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거인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그러한 상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잃은 양을 찾아내며, 교회와 교구를 보호하며, 생명의 말씀과 진리로 견고케 되어야 합니다. 예배드릴 성전을 확장해 나가며, 성도들을 사탄의 세력에서 보호하고, 마귀의 역사를 막기 위하여 교회 일과 교구 일에 더욱 열심이어야 합니다.
태만과 싸워 이겼습니다
성을 쌓은 이들도 역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랜 기간에 걸쳐 성을 쌓을 때에, 가족관계, 사업, 건강 등으로 어려움도 있고 태만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과 태만과 싸워서 물리쳤습니다.
그들은 성벽을 중수함에 있어서 구역을 분담하여 봉사했습니다. 그들은 42부문으로 나누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역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래서 효과적으로 이 역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여러 사역은 재능대로 한 부분씩 맡아서 수고하고 하나님께 충성할 때에 능률이 오르고 최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체가 참여해야 조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어느 특출한 몇 사람에 의해서 교회를 유지할 것이 아니라, 모두 각자 맡은 일에 기쁨으로 헌신하고 충성하며 봉사해야 합니다. 또한 맡겨진 구역을 사명을 가지고 잘 이끌어 나가면 구역이 잘 활성화되고 교구가 번창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합력하면, 교회는 아름답게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사안일주의로, 자기의 일신상의 평안만 추구하고 맡은 바 일에는 애착심이 없고, 열심도 없으며, 성의도 없는 교인이 있습니다. 바로 적당주의, 무관심의 태도를 지닌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교회성장과 발전에 저해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무관심은 염병보다 더 큰 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교회가 원하는 일에는 자기를 포기하며 헌신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기주의자는 사탄의 권세 아래 있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무르지 못한 사람입니다.
또한 비판주의의 사람이 있습니다. 마귀가 교회를 분열시키는 최고의 무기는, 성도들에게 잘못된 비판의식을 주어 교회의 모든 일과 방침을 비판하게 만들고 정죄하게 만듭니다. 불평을 심어 주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르지 않고 원망과 불평을 할 때는,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전진하지 못하고 멈추어 버렸고, 죽음의 진노만이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불평과 비난의 소리들이 교회에서 일어날 때 교회의 발전이 멈추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불평은 전염병과 같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병들게 합니다. 교회의 모든 일들을 비판하게 만들고 정죄하게 함으로 교회와 개인의 믿음을 파괴시킵니다. 결국은 사탄의 흉계에 빠져 버리고 말게 됩니다.
느헤미야 3장 23절에 ‘자기 집 맞은 편 부분’ 혹은 ‘자기 집에서 가까운 부분’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구절의 뜻은 교회 봉사에 있어서 자기가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맡아서 하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협력하고, 헌신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방해를 물리쳤습니다
그들은 무장과 방비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합력하고 협동으로 봉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무장된 군사는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비할 수 있습니다. 방비가 안되면 적의 기습을 받게 됩니다. 역사가 큰 것일수록 팀웍이 잘되어야만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세속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구원은 받았으나 육신의 것을 좋아하여 세상을 사랑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데마는 바울의 수행원이었으나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다시 세상으로 떠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신앙의 중간지대에서 헤매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나 하나님의 일에 희생을 요구할 때, 모르는 척하고 적당히 세상으로 돌아서버립니다. 세속주의적인 신앙의 특징은 재물에 애착을 갖고, 봉사를 중요시하지 않으며, 헌금도 안하며 나중에는 십일조를 불규칙으로 하다가 안하고 마는 신앙인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언제든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군병이라는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선한 사업에는 언제나 마귀의 공격이 드세게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방해 공작과 유혹도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우리의 열심을 빼앗아 갈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이 가져다주는 모든 어려움을 주를 섬기는 열심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한 부분씩 최선을 다해 수행할 때 교회는 성장되고 이 세상은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팀사역이 중요합니다(1)
느 3:1-32 / 조상호목사
1차 세계대전 때 있었던 유명한 한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 영국 전투기들이 독일 전투기에 의해서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영국 전투기들이 한 대씩 공중전에 임하는데 반해, 독일 전투기들은 항상 두 대가 짝을 지어서 공중전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략은 신앙심이 두터운 한 독일 공군 장교에 의해 생겼다고 합니다. 그 장교는 성경을 읽다가 “.....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라는 신명기 32장 30절 말씀이 눈에 들왔습니다. 그래서 실험을 했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비행기 한 대가 기관총을 쏠 경우에는 2.4미터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를 격추시킬 수 있는데 반해, 두 대가 편대를 지어 기관총을 쏠 경우에는 놀랍게도 사정거리가 100배로 확대되어 240미터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를 격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때부터 독일 전투기들은 한 대가 아닌 항상 두 대가 전투에 나서 영국 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미국 공군은 독일의 이 비밀 전략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비행기는 미국 비행기보다 성능이나 양적으로 훨씬 우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 전투기들은 미국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일 때마다 전멸되다시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 전투기들이 한 대씩 전투에 임한 반면, 미국 전투기들은 독일 공군처럼 2대씩 편대를 지어 전투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군대에서 뿐 아니라 일반 기업체 등 사회 전반에서 이 원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바늘을 만들면 하루 종일 25개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함께 만들면 2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려 25배인 625개나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말 한 마리가 1톤의 짐을 실은 마차를 끌 수 있지만, 두 마리 말이 함께 끌면 무려 5톤의 짐을 실은 마차를 끌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1+1'이 ‘2’ 이상의 효과를 낼 때가 있는데, 이것을 ‘상승효과(相乘效果)’, 영어로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라고 합니다. 이 시너지 효과는 사람이 만든 원리가 아니라, 수 천 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원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사역에 이 원리를 적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로서 혼자서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병사들에게 체포당하실 때,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열 두 군단은 12만 명입니다. 예수님은 말 한 마디로 천사 12만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한 배가 없어도 걸어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남자만 5,000명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2만 명 이상을 먹이고도 12바구니나 거두게 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무슨 일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3장 13절부터 15절을 보면,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무엇을 가장 먼저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세우는 일을 가장 먼저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혼자서 일하지 않으시고,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팀사역을 하셨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6장 7절에 보면,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제자들을 나홀로가 아닌 둘씩 짝을 지어 팀사역을 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팀사역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느헤미야 강해설교 5번째로 <팀사역이 중요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복습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셔서,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의 요구대로 예루살렘에 가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허락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으로 임명을 받고, 여러 가지 건축자재들을 가지고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 때가 주전 444년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3일 동안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무너진 성벽을 돌면서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건축을 시작합니다. 느헤미야 6장 15절에서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건축을 시작한 지 52일 만에 성벽 건축을 마쳤습니다. 이것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예루살렘성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에 타버렸기 때문에, 142년 동안 무너져 있던 성벽을 단 52일 만에 재건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팀사역의 중요성입니다. 물론 느헤미야의 철저한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한 사람이 52일 만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 것이 아닙니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 느헤미야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팀사역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마치 마태복음 1장의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라는 말씀과 창세기 5장의 “누구는 몇 살에 죽고, 누구는 몇 살에 죽고”라는 말씀처럼, 느헤미야 3장에도 75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누가 무엇을 건축하고 그 다음은 누가 무엇을 건축하고 그 다음은 누가 무엇을 건축하고....” 계속해서 이름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고,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설교할 가치가 있느냐고 반문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할 일이 없으셔서 느헤미야로 하여금 수많은 이름들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신 뜻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로 하여금 75명이나 되는 사람의 이름으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매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언급되어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직업
첫째로 직업이 다양했습니다. 다같이 1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1절은 성벽재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시작되는 부분인데, 매우 특이합니다. 일반적으로 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건축 전문가들의 이름이 언급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대제사장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이 가장 먼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 가문이라고 뒤짐 지고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성벽재건에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8절을 보겠습니다. “그 다음은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 등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향품 장사 하나냐 등이 중수하되 그들이 예루살렘의 넓은 성벽까지 하였고” 여기 ‘금장색’이란 금 세공업자(gold smith)를 의미합니다. 당시 금세공업자들은 금으로 장신구를 만들어 팔았는데, 그들도 성벽 재건공사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향품 장사’란 애굽이나 인도 등지에서 향수를 수입해서 팔거나 식물에서 향수를 추출해내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건축과 전혀 관련없는 향수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성벽재건에 참여하였습니다. 또 9절에서 ”예루살렘 지방의 절반을 다스리는 후르의 아들 르바야가 중수하였고“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일반 평민이 아닌 방백들도 건축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힘을 모았습니다.
다양한 출신
둘째로 출신 배경이 다양했습니다. 다같이 2절을 보겠습니다.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이 말씀에 의하면 여리고에 살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는 주거지와 상관없이 예루살렘까지 와서 공사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7절을 보겠습니다. “그 다음은 기브온 사람 믈라댜와 메로놋 사람 야돈이 강 서쪽 총독의 관할에 속한 기브온 사람들 및 미스바 사람들과 더불어 중수하였고” 기브온과 미스바 출신 사람들도 건축에 참여하였습니다. 또 5절을 보면 ‘드고아 사람들’과 14절에 보면 ‘벧학게렘 사람 밀기야’도 건축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힘을 모았습니다.
다양한 연령
셋째로 연령이 다양했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 중수하였고” 나이가 든 대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아들이나 손자, 등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았습니다.
다양한 성별
넷째로 성별이 다양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보통 OO의 아들 OO가 어디어디를 건축하였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남자 뿐 아니라 여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같이 12절을 보겠습니다.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 힘이 약한 여자들은 성벽을 쌓는 일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성벽재건 공사에 빠졌다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 남자 뿐 아니라 여자들도 힘을 모았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동참한 사람들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제사장, 레위인, 정치인, 금 세공업자, 상인, 성문지기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동참했습니다. 또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 뿐 아니라, 여리고와 기브온과 미스바와 두고아와 벧학게렘 출신의 사람들도 동참했습니다. 또 나이가 든 대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아들이나 손자, 등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동참했습니다. 또 남자 뿐 아니라 여자들도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언급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냥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해 무너진 성벽을 재건했다고 간단하게 언급할 수도 있는데, 구태여 다양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팀사역이 중요합니다(2)
느 3:1-32 / 조상호목사
비교하지 마라!
첫째로,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과도한 비교의식은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이 생각을 멈추지 않는 한 불행은 계속됩니다. 가인이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된 이유는 비교의식 때문이었습니다. 비교의식은 분쟁의 원인이 되고 시기와 미움과 절망과 분노와 좌절을 불러 일으켜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 동창회를 갔다 온 후에 열등감과 무력감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친구와 자기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두 남자가 자기 부인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남자가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내 아내는 정말 천사야, 천사!” 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남자가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습니다. “자네는 좋겠다. 우리 마누라는 아직도 살아 있어!” 자기 아내와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비교한다면, 그 가정이 행복할까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바꾸지 못하고 무르지 못할 바에야 나의 배우자를 다른 사람의 배우자와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비교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그 가정은 불행해집니다. 마귀는 비교하도록 충동질합니다. “친구는 벤츠를 타고 다니는데, 너는 아직도 티코를 타고 다니냐?” “누구는 Fendalton에 100만불 짜리 집을 샀는데, 너는 아직도 랜트집에 살고 있냐?” “누구누구의 딸은 오타고 의대에 합격했다는데, 네 딸은 폴리텍에 진학하는 것이 말이 되냐?” 마귀는 계속해서 나와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만들고, 내 배우자와 다른 사람의 배우자를 비교하게 만들고, 내 자녀와 다른 사람의 자녀를 비교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2절 하반절 말씀을 메시지 성경으로 읽으면 굉장히 마음이 와 닿습니다. “비교하고 등급을 매기고 경쟁하는 자들은 사실상 핵심을 놓친 것입니다.” 비교하고 그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갈라디아서 6장 4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각자 자기 행위를 살피십시오. 그러면 남과 비교하지 않고도 자기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행한 일과 다른 사람이 행한 일을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역과 다른 사람의 사역을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했다고 생각하면 인해 낙심할 수 있고, 반대로 다른 사람보다 내가 잘 했다고 생각하면 이로 인해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교하는 태도는 섬김을 방해하고 사역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분문은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분문’이란 분뇨를 처리하는 문으로 쉽게 말하면 똥문(Dung Gat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똥문 건축을 맡았던 말기야는 다른 사람들이 맡고 있는 일과 자기의 일을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제사 드릴 양과 염소가 드나들게 하는 양문(Sheep Gate)이나(1절), 말을 탄 사람이 성내로 들어갈 때 이용했던 마문(Horse Gate)이나(28절), 여의도 광장 같은 대형광장 앞에 있는 샘문(Fountain Gate)(15절)과 같은 문들을 건축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그에게 본문을 건축하라고 했을 때, “나는 못합니다. 왜 나에게 그 더러운데 사용되는 똥문을 건축하라고 합니까?”라고 하며 불평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갑의 아들 말기야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다른 사람의 일과 비교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달란트 비유를 보면, 주님께서는 두 달란트를 남겼든지 다섯 달란트를 남겼든지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칭찬하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일과 다른 사람의 일을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맡겨진 일이 빛이 나는 일이든지 빛이 나지 않는 일이든지, 눈에 띠는 일이든지 눈에 띠지 않는 일이든지 비교하지 말고 말기야처럼 맡겨진 일,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조화를 이루라!
둘째로,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하던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수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그리기 힘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한참을 생각하던 다빈치가 말했습니다. “저녁 해질 녘에 저 들에 드리워진 노을을 그리기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가 다시 물었습니다. “왜 노을을 그리기가 그렇게 힘든가요?” 그러자 다빈치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녁 노을에는 빛과 어두움이 공존합니다. 빛만 있어도 그리기가 쉽고, 어두움만 있어도 그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빛과 어두움의 조화를 그리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을을 잘 그리기만 하면 명작이 됩니다. 조화를 잘 그리면 명화가 되지요.”
그렇습니다. 이처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조화롭게 그리면 멋진 작품을 만들어 수 있습니다. 성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가대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 네 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여성 소프라노는 멜로디를 부르며 전체 곡을 인도하고, 여성 알토는 잔잔하게 소프라노를 받쳐줍니다. 남성 테너는 고음으로 화음으로 넣고 베이스는 낮은 음으로 받쳐주면서 음악을 만들어갑니다. 이 네 개 파트가 함께 협력하고 어우러질 때, 좋은 화음이 나올 수가 있고 듣는 회중들에게도 기쁨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네 개 파트가 따로따로 소리를 질러대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 됩니다. 그리고 듣는 회중들을 불편하게 만들게 됩니다.
이처럼 미술이나 음악이나 모든 분야에서 조화를 이루며 함께 협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혼자서는 하지 못합니다. 서로 협력하고 연합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다음은’이라는 말입니다. 2절에 보면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고’, 4절에도 보면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가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 중수하였고’ 계속해서 ‘그 다음은 누구, 그 다음은 누구, 그 다음은 누구‘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7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따로따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며 함께 협력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142년 동안 무너져 있던 성벽을 단 52일 만에 재건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과의 조화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나이와 학벌과 수입과 직업과 피부색깔, 등에 따라 차별을 한다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는 차별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격과 자라온 배경과 은사가 다르다 할지라도, 나를 주장하기보다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구경하는 사람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7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며 함께 협력했지만, 그렇지 않고 구경만 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같이 5절을 보겠습니다.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이렇게 계속 잘 나가다가 뭔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너진 성벽도 다시 쌓고, 불타버린 문짝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다는 등, 성벽재건 공사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나 드고아 출신 귀족들은 이 프로젝트에 동참하지 않고 구경만 했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구경꾼과 참여자 두 부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입니까? 드고아 출신 귀족들처럼 하나님의 일을 구경하는 구경꾼입니까? 아니면 힘들고 어렵지만 성벽재건공사에 참여했던 75명처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주인공들입니까? 저는 이 자리에 하나님의 일을 구경만 하는 구경꾼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참여자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는 기도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보급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보급로가 끊기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중보기도 없이는 선교의 결실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 바누아투로 출발하는 우리 선교팀이 승리하고 돌아오려면 기도의 보급로가 끊어지면 안 됩니다. 여러분, 선교팀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선교팀을 보내놓고 멀찍이 떨어져 구경만 하지 말고, 기도로 이번 미션 2010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미국의 ‘Golden Gate Bridge(금문교)’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길이 2,825m, 너비 27m의 6차선 도로가 나있는 금문교는 1933년에 착공하여 당시 돈 ,500만 달러가 투입된 끝에 1937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원래 이 지역은 수심이 90m나 되는 곳으로 차갑고 거센 조류와 안개가 많은 날씨 그리고 수면 아래 지형이 복잡하여 건설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4년 만에 완공되어 미국 토목학회에서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이 다리의 특징은 다리 양쪽에 227m 높이의 두 개의 큰 교각이 세워져 있는데, 교각과 교각 사이의 거리가 1,280m나 된다고 합니다. 다리 중앙부는 해면에서 70m나 떨어져 있고, 수심이 깊어 다리 밑을 대형선박이 통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면과 다리와의 사이가 넓어 비행기도 통과할 수 있고, 시속 160km의 풍속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금문교의 핵심은 다리 상판을 떠받치고 있는 교각과 교각 사이에 연결된 직경이 1m나 되는 두꺼운 줄에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보통 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려 27,000개의 작은 철선이 합해져서 한 줄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말해주는 이야기입니까? 비록 가늘어도 그 줄들이 많이 모이면 1,280m나 되는 무거운 상판을 떠받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닥의 굵은 줄보다 비록 가늘더라도 여러 겹의 줄이 더 견고하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밀림에는 매우 사납고 힘이 센 동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동물이 가장 무서운지 아십니까? 개미떼라고 합니다. 개미떼가 이동하면 몸집이 큰 코끼리나 밀림의 왕이라고 불리 우는 사자 같은 동물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개미떼가 있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맹수들이 개미떼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개미가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닙니다. 개미가 가지고 있는 협동심 때문입니다. 개미는 지극히 작은 동물이지만, 수십만 마리가 함께 힘을 합쳐 공격하면 몸집이 큰 코끼리나 사자라 할지라도 단 하루 만에 앙상한 뼈만 남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미떼만 나타나면 맹수들이 무서워서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팀사역이 중요합니다. (전 4:12)에서 “한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았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 지지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혼자서는 패배해도 서로 연합하면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도가 연합하여 힘을 모으면 교회가 부흥되는 줄로 믿습니다. 선교팀이 연합하고 하나 될 때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맡겨진 일,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교향악단처럼 나를 주장하기보다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팀사역을 통해,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공하는 사역의 세가지 법칙
느 3:1-7 / 김형준목사
‘파레토의 법칙’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백 년 전 이탈리아인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 1848-1923) 가 처음 발견한 법칙으로, 오늘날에는 ‘80대 20’ 이라는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빌 프레도 파레토는 19세기 영국의 부와 소득의 유형을 연구하던 중에 소수의 국민이 대부분의 소득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즉 인구의 20%가 전체부의 80%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경제와 사회에 매우 중요한 일반법칙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교회에 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성도 중 20%만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여러 조직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의 힘만이 동안교회를 움직이는 가용 힘으로서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다른 조직체나 혹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쓰고 있는 힘의 20% 외의 나머지는 낭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파레토 법칙과 관련하여, 리처드 코치라는 사업가가 자신이 옥스퍼드 대학을 다닐 때에 한 권의 책의 가치를 20% 정도의 페이지에서, 그리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는 시간의 20%이내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러한 원리에 착안한 리처드 코치는 세계적인 호텔경영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고, 1980년대 세계에서 가장 성공했던 비즈니스 전략회사인 ‘엘이케이 파트너십(The LEK Partnership)’의 창업주가 되었습니다. 리처드 코치는 버려지는 80%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연구하여, 개인과 기업이 활성화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가정과 개인 뿐 아니라 교회와 국가도 20%만 쓰고 80%를 그냥 버리고 있다면, 얼마나 많은 낭비입니까? 만일 나머지 80%를 다 사용할 수 있다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계속해서 몇 주간 묵상하고 있는 느헤미야를 생각해보면, 여러 사람이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현실적으로 봤을 때 불가능한 일이었던 예루살렘 성의 재건축은 20%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가지고 있던 모든 힘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함께 참여하여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많은 인원에, 예산과 조직의 낭비 없이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파레토의 법칙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느헤미야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정이 매우 안 좋습니다. 개인도 경제와 정치도 너무 어려워 이제는 우리 힘으로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혼율이 30%가 넘어가면 사회 자정능력을 상실한다고 했는데, 훌쩍 뛰어넘은 지가 오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나라와 가정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내 삶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녀의 문제요, 우리 미래가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해 우리 조상들을 축복하셨고, 여전히 축복하실 통로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려움 앞에 너무나 무기력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전에, 느헤미야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했던 원리를 배워보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개인의 삶 속에서도, 교회 속에서도, 국가 속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쌓을 수 있었던 원리는 첫째, 동기부여의 원칙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이 건축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백성들이 자기 문제로 받아들여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일이 좋고 필요하다고 해서 사람들이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고, 자기 생존과 연관이 없으면 그리고 자기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쌓는 일이 성전을 짓는 일도 아니고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그저 성을 쌓는 일입니다. 성을 쌓음으로 인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 손해를 보는 사람 등, 이에 따라 얽힌 이해관계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느헤미야는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1장 10절에서 왜 이 일을 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2장 3절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축복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허락하셨기에 어렵고 힘들지라도 민족의 미래를 펼쳐나갈 땅이라 믿고 있는 느헤미야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2장 1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이제 중건합시다.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맙시다.’ 한마디로 성을 중건하는 일은 너와 나의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헌신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될 때 움직입니다. 느헤미야가 백성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너와 나의 일 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선택된 자녀답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3장에는 여러 지역과 사람 이름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드보아 사람’이 나옵니다. 드보아 사람은 예루살렘 남쪽으로 16㎞ 떨어진 해발 850m에 사는 고지대 마을 사람들입니다. 또 기브온 사람 몰라댜와 메로놋 사람 야돈은 행정적으로 볼 때에 유다의 예루살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역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성을 중건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아내와 남편을 섬기고, 이웃을 돌아보는 것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로 받아들인다면 포기하고 싶다 해서 쉽게 포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또 어떻습니까? 이 나라를 포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주신 땅,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계획과 섭리가 머물러 있는 곳이기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내 일이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나 당회원이 알아서 하겠거니 생각하며 그냥 예배만 드리고 가면 안 됩니다. 교회에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오면서 기도하시는 것, 때로 화장실 청소하고 먼지를 닦아내는 것, 교사와 성가대 또 구역장으로 섬기는 모든 일이 특정인만 하는 교회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대할 때 임하는 자세는 달라집니다.
골로새서 3장 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3장 23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옆 사람과 인사할 때도 ‘주께 하듯’ 하라고 하십니다. 이제껏 어떻게 인사하셨습니까? ‘웬 이상한 사람이 옆에 앉아있지?’가 아니라, 주님이 옆에 앉아 계십니다. 주님께 인사한다면 반갑고 따뜻하게 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 자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라 믿고 나갈 때 임하는 우리 자세는 자연히 달라집니다. 이런 확신 없이 일 할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에너지가 나오게 됩니다. 성경은 주의 일이 따로 있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주어진 일이 주의 일이라 믿고 주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인도하심 따라 진행해 나간다면 그것이 곧 주의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또한 느헤미야가 동기부여를 얼마나 잘했던지 1절을 보면,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양문에서 어문에 이르는 성을 수축하도록 했는데, 양문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개의 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ship gate’, 즉 양들이 지나다니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바로 양문을 통과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양문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양문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제사장들에게 건축을 맡겼으니 얼마나 정성껏 했을까요? ‘하나님, 이 성을 세웁니다. 백성들이 드리는 많은 제물들 중에 흠 없고 죄 없는 재물이 드려지게 하시고, 재물이 지나갈 때 우리 죄가 사하고, 우리 민족의 죄가 사하여져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백성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뜨거운 마음으로 성을 건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각자가 맡은 일을 보면 모두 ‘내 일’로 여길 수 있도록 잘 분담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 앞에 있는 성을 쌓도록 하여 성을 쌓는 모두가 ‘내 일, 하나님 일’로 여길 수 있도록 동기부여가 잘 되었습니다.
찬송가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이 있습니다. 이 찬송은 1907년도 남궁억 선생이 작시한 곡입니다. 당시에 한일 합방을 앞두고 사람들 마음속에는 좌절감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를 삼키기 위해서 우리 민족에게 이 땅은 버려진 땅,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으며 따라서 일본이 돕지 않으면 안 될 땅이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 불어넣었습니다. 이 때 남궁억 선생이 곡을 지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하나님이 주신 동산입니다. 이 동산에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방의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하나님 주신 동산입니다. 지금은 절망하고 포기할 때가 아니라 봄 돌아와서 밭 갈 때니 사방의 일꾼이 필요할 때입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하나님이 주신 동산입니다. 지금은 곡식이 익어 거둘 때니 사방에 일꾼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모두 이 주님의 부름 앞에 대답합시다. 그리고 일하러 갑시다. 하나님 주신 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말입니다.’
한반도는 버려진 땅, 절망적인 땅이라 생각하던 젊은이들이 이 가사에 감동을 받고 농촌으로, 만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런 정신이 3.1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남궁억 선생의 찬송시는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3.1 운동으로 이어졌고, 민족의 가슴에 불을 질러 조국을 찾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고도 남았습니다. 일본은 1937년 3월에 이 노래를 중단시켜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국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한민족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을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과 이 민족을 통해서 하고 싶으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할 목적과 목표가 있습니다. 이제는 낙심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왜 스스로 포기하십니까? 하나님도 가능성 없다 절망하지 않는 이 민족을, 왜 우리 스스로 포기하여 떠나기도 하고 가망이 없다고도 합니까?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도리어 주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일어서야 하는 이유를 느헤미야의 사건을 통해서 찾게 됩니다.
둘째 느헤미야가 현실을 극복하고 불가능해 보였던 예루살렘 성을 건축할 수 있었던 원리는 연합의 원리입니다. 느헤미야 3장에는 15가지 이상의 직업이 나옵니다. 그리고 75명의 사람 이름이 등장합니다. 사람마다 고유하게 맡은 일이 있고 각각의 일이 다른 일과 모자이크처럼 연결되어 완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전체성벽을 42구역으로 나누고, 10개의 문과 4개의 망들을 세워 그곳에 필요한 사람들을 배치했습니다. 3장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다음은(next)’인데, 원어로 ‘웨알’이라고 합니다. ‘웨알’이란 계획과 분담과 책임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 구역마다 사람들은 맡은 구역에서 할 일을 분담했고, 맡은 일에 대해서는 책임지도록 했던 것입니다. 75명의 이름이 다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한 사람도 소외됨 없이, 연합해서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완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과 직업 중에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있는데, 제사장들은 예배가 우선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성 쌓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은 직업은 금장색이었습니다. 금을 세공해서 장신구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직업상 손이 무척 귀하기에 함부로 험한 일을 하여 손을 쓰면 안 되었음에도 성 쌓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이건 내 전공이 아닙니다. 내가 언제 건축하는 일을 했습니까? 금세공하는 일을 더 잘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냐는 향품 장사들로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입니다. 성을 쌓든 말든 큰 영향이 없는데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후르의 아들 르바야는 또 어떻습니까? 르바야는 예루살렘 지방의 절반을 다스리는 높은 관리였는데 평민들과 이방인들과 함께 성 쌓는 일에 참여합니다. 할로세스의 아들 살롬과 그 딸들도 등장합니다. 유대지방에 있어서 여성의 지위는 정말 보잘 것 없어 이렇게 언급되는 일이 드물 뿐 아니라, 남성들과 달리 고되고 험한 일을 잘 하지 못했지만 함께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이유를 달지 않았고, 자기 입장과 생각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라 믿으며 연합했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내무반 책임자로 있을 때에, 본부에서 불조심 포스터를 그리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마침 내무반에 홍대 미대 다니다가 온 신병이 있어서 그리라 했더니 “못합니다.”합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좀 살벌할 때인데, 아주 당당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간 큰 신병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까 자기는 서양화 전공이기 때문에 포스터를 그리고 나면 그림 감각이 다 죽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군대에서 이런 이유가 먹힙니까? 고참들이 야단치려다가 뭘 모르는 신병이려니 싶어 그냥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나중에는 벌 받더라도 다같이 하지 말자고 분위기가 흘러가는 것을 보고 한 사람의 영향력이 참 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참 신병, 별로 영향력 없을 것 같던 사람이 전체 연합에 영향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46년의 역사가 있는 오래된 교회입니다. 오래된 교인은 교회에 무엇이 부족한지 잘 모르지만 새로 온 분들은 금세 압니다. 본당 앞쪽에 달려있는 스피커가 얼마나 위압적입니까? 스피커 바꾸자는 메일을 여러 통 받았습니다. 또 안내하는 분들 표정이 너무 굳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사로 서 있는데 새로 오신 분들은 그것이 보입니다. 시골에서 장작에 불을 피울 때, 밑불이 안 살아나면 밑에 불만 자꾸 넣는 것이 아니라 장작으로 넣습니다. 그러면 밑에 불도 같이 살아납니다. 우리가 전통과 옛것만 자랑하고 우리끼리 이대로 살 생각만 한다면 같이 썩어 버릴 것입니다. 새 신자, 새 생각이 들어올 때 옛 전통도 새롭게 거듭나 옛 삶의 틀이 깨져 하나님께 헌신되고, 변화되고, 개혁되고,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낡고 오랜 것은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루어지기까지 많은 성도들의 눈물과 희생 그리고 땀이 있습니다. 남들은 모르는 사연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이것이 함께 존중될 때 연합의 역사,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정의 경우를 한번 살펴볼까요? 요즘은 너무 자녀 중심이라 문제지만, 자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한밤중에라도 난리가 납니다. 우리 자녀들이 집에서 하는 일이 있습니까? 볼일 봐놓고 뒤처리 해 달라 하고, 밥 혼자 못 먹으니 먹여 달라 하고, 가는데 마다 어질러 놓습니다. 남편 아내 사이에 대화라도 할라치면 아이가 방해 놓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당당한지 모릅니다.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나 정말 가치가 없습니까?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줍니까?
그렇다고 연세 많으신 어른들의 당당한 삶의 자리가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저는 상담을 공부했기 때문에 압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자란 자녀들은 정신 질환이 없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인해 얻는 인생의 풍성함이 있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은 훨씬 부드럽고 이해심도 많으며 자존감도 높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가족 구성원이 제각각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녀는 자녀대로 부모님이 고생하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알뜰하게 살고, 남편은 남편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 되어 연합할 때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전도서 4장 9절부터 12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연합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어 한 목적을 이루어 가는 조화입니다. 일본사람을 밀가루라 한다면, 한국 사람은 모래입니다. 밀가루는 물만 부으면 딱딱하게 뭉쳐집니다. 일본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는 약한데 뭉쳐지면 굉장히 강합니다. 그런데 모래는 물을 부으면 흩어집니다. 반드시 시멘트 같은 것, 이해관계라든지, 학연이나 지연 등을 집어넣어야 단단해지지 그냥은 뭉쳐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가장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연합입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분 모두의 힘이 다 필요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자리에 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며 서로 격려하고 위로할 때에 본래 가진 것 이상의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될 것이고, 버려지던 나머지 80퍼센트의 힘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가정과 교회, 그리고 우리나라에 이 연합의 원리가 가장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느헤미야가 현실을 극복하고 불가능해 보였던 예루살렘 성을 건축할 수 있었던 셋째 원리는 격려와 칭찬의 원리입니다. 느헤미야 3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행한 일들이 나옵니다. 문짝, 문고리 달아 놓은 것까지 기록이 다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까지 다 적어 놓았습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느헤미야 3장을 강해할 때 의미가 없다고 하여 3장을 빼고 강해하셨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수많은 사람들을 왜 여기에 나열했을까 생각해보면 의미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수고한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20절, 바룩을 가리킬 때에는 ‘힘써’라는 단어를 넣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힘써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격려와 칭찬을 한 것은 아닙니다. 5절 말씀에 드고아의 귀족들은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일을 완성하게 하는 것은 바로 격려와 칭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귀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은 받은 은혜가 은혜 되게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중요한 원리는 서로 격려하고 피차 권면하는 것이라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도록 하는 것은 서로 격려하고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몸소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 서두에 바나바를 소개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나바가 했던 역할은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사울까지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나바, ‘위로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을 때, 바나바는 바울이 이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고향 다소에 내려가 바울을 데리고 왔고 지도자 위치에 세웁니다. 사도행전 처음에는 ‘바나바와 바울’ 해서 바나바가 먼저 나오다가,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와 바울’로 순서 없이 나오다가, 뒤로 갈수록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나중에 바나바는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사라져야 될 때를 알고, 소리 없이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던 바나바는 놀라운 사람입니다. 자기가 세워야 될 사람을 세워 격려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빠져야 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조용히 사라질 줄 알았던 바나바가 그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러기가 갈매기 모양으로 날아가는 것은 멋있어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류학자들이 밝혀냈습니다. 갈매기 모양으로 날아갈 때 71%를 더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맨 앞에 날아가는 새가 뒤 따라오는 새가 받을 공기 저항을 줄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러기가 날면서 우는 이유는 뒤에 따라가는 새가 앞서 가는 새를 격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참 날다가 힘들면 앞서 가던 새와 자리를 바꿔 먼 여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한 마리가 이상이라도 생기면, 다른 두 마리가 같이 내려와 있다가 다른 떼에 흡수되어 다시 날아갑니다. 격려하고 위로할 때 본래 역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격려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녀를 격려하는 아버지입니까? 또 어머니들은 어떻습니까? 격려와 사랑이 없는 가정이 얼마나 살벌할까요? 못할 때 마다 징계하고, 잘 할 때만 상주는 딱딱하고 두려운 가정에서 격려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라서도 열등감 속에서 삽니다. 비판과 분석을 10% 한다면 90%는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비효율적인 언어와 삶의 모습을 갖고 살아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의 격려가 없었더라면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주님 격려를 받고도 남을 격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리석고 완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스터 홀랜드 오퍼스(Mr. Holland oppu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해석하면 ‘홀랜드 선생님의 교향곡’입니다. 글렌 홀랜드의 실화를 영화화 한 것입니다. 홀랜드는 브로드웨이에 진출하여 유명한 교향곡을 작곡하여 이름을 날리고 싶은 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했고 가족들을 부양해야했기에, 조그마한 시골 학교에서 잠시 위기만을 넘기려고 교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만 30년간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재정문제가 생겨서 학교를 떠나야만 되게 되었습니다. 지난 온 날들을 돌아보니 꿈은 다 깨져 버렸습니다. 브로드웨이에 가서 훌륭한 교향곡을 작곡하여 심포니를 연주해서 유명해지고자 하는 꿈도 이루지 못했고, 아들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청각 장애인이었고, 남은 것이라고는 주름진 이마와 초라한 퇴임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학교를 걸어 나가는데, 강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강당으로 뛰어가 봅니다. 가서 보니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들이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홀랜드가 감격해 있을 때, 무대 휘장이 걷히며 제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있었고 홀랜드에게 지휘봉이 넘겨졌습니다. 선생님이 연주를 인도합니다. 맨 앞자리에는 클라리넷을 연주하지 못해서 좌절했던 학생이 앉아있습니다. 이 학생은 홀랜드 선생님의 격려와 칭찬으로 클라리넷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직 주지사로서 있을 만큼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난 다음에 주지사인 제자는 인사말을 합니다.
‘홀랜드 선생님은 저와 많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혹시 후회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부와 명예를 안겨줄 심포니 작곡을 하셨지요. 하지만 선생님은 부자도 아니고, 이곳에서만 유명할 뿐입니다. 따라서 실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홀랜드 선생님은 부와 명예를 초월한 성공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선생님께 영향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는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우리가 선생님의 심포니입니다. 우리가 선생님 작품의 음표이자 음악인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은 선생님의 작품입니다. 오늘 나는 선생님이 작곡하신 심포니의 음표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있는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음표입니다. 아름다운 인생의 음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격려와 사랑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새 인생을 살아가는, ‘저 사람은 오늘 내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시대에 여러분 가정의 자녀와 아내와 남편, 여러분이 섬기고 사랑했던 교회 식구, 직장과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을 말해줄 수 있는 작품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이 살아오신 삶을 말해주는 여러분의 음표와 음악과 같은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나아가서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음악의 음표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협화음과 분쟁과 다툼 그리고 고통과 괴로움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포기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을 줄 압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가정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 이제는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 이제는 직장, 사업, 미래를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분들이 혹시 계십니까? 포기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동의를 구하십시오. 여러분만의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일이 이뤄지도록 도와주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흩어진 여러 가능성을 다시 찾아보십시오. 80%가 버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느헤미야의 원리를 기억하고 적용하는 것도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그 나라를 위하여 내 가정과 교회 그리고 민족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멋진 삶, 가치 있는 삶을 함께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 일에 헌신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