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달 전 LG 타격코치는 한국프로야구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던 지도자였다. 미 메이저리그가 한국에 소개되기 이전부터 미국 야구서적을 탐독하며 선진야구이론을 받아들였던 이가 바로 김용달이었다(사진=LG) |
1992년 겨울. 한강은 입을 닫고, 나무는 하얀 입김을 토해냈다. 그해 겨울은 기상청 연감에 형광펜 색인을 칠해야 할 만큼 추웠다. 박종호(LG)는 지금도 당시 추위를 기억하면 목 안에 커다란 아이스크림이 걸린 기분이다. 몸뿐이 아니다. 마음도 차가워진단다. 그도 그럴 게 그해 박종호는 타율 1할9푼2리를 기록했다.
데뷔 첫해 성적이었다. 나무랄 건 없었다. 하지만, 성남고를 졸업하고 계약금 1천200만 원에 가까스로 LG에 입단한 그에겐 더 좋은 성적이 필요했다. 그래야 코칭스태프의 눈에 띌 수 있었다. 그것이 무명의 내야수 박종호가 살아남는 법이었다.
그즈음 ‘1할 타자’ 박종호에게 다가온 이가 있었다. 김용달 LG 타격코치였다. 김용달은 타격지도를 바라는 박종호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너, 스위치 타자 한번 해볼래?”
박종호는 귀를 후볐다. 잘못 들었나 했다. 아니었다. 김용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줄곧 봐왔는데 넌 스위치 타자가 제격이야. 지금부터 스위치 타자로 전향하는 게 어떠냐?”
그때까지 스위치 타자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미 메이저리그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왼쪽 타석에 서 본 적이 없는 날 보고 스위치 타자를 하라고?’ 박종호의 솔직한 심정은 그랬다. 하지만.
“날 믿고 따라오면 좋은 타자가 될 수 있다. 주전도 문제없고.” 김용달의 큰소리에 박종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지옥훈련이 따로 없었다. 왼손 타석에 적응하려고 하루에도 수천 번씩 스윙연습을 했다. 토스 배팅과 프리 배팅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살이 뭉개지고 군살이 자라는 가운데 다시 새살이 돋길 반복했다. 그러나 해도 해도 왼쪽 타석은 부자연스러웠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그때마다 김용달은 박종호를 다그쳤다.
“백업요원으로 전전하다 소리 없이 유니폼 벗고 싶으면 다시 오른쪽 타석으로 돌아가도 돼.”
박종호는 이를 악물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일어나 다시 힘차게 스윙했다. 저승사자처럼 자신을 몰아대는 김용달이 야속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은혜를 갚던, 욕을 해대던 일단 성공하고 볼 일이었다.
6년 뒤 박종호는 타율 3할 타자가 됐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00년엔 타율 3할4푼으로 타율왕에 올랐다. 타율왕에 등극했을 때 박종호는 가장 먼저 김용달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지금도 달라진 건 없다. 박종호는 말한다. “그때 김 코치가 고집을 부려 날 스위치 타자로 만들지 않았다면 한참 전에 유니폼을 벗었을 것”이라고.
한때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슬러거였던 심정수(은퇴)도 ‘김용달’하면 ‘고집’밖에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2001년 두산에서 현대로 이적했을 때다. 심정수는 밤낮으로 따라다니던 당시 현대 타격코치 김용달에게 적잖이 시달렸다. 어쩔 땐 하도 쫓아다녀 ‘스토커’로 보일 정도였다.
“현대에 오자마자 김 코치가 ‘타격폼을 조금만 바꾸면 40홈런도 가능하다. 내가 도와줄 테니 수정해보자’라고 했다. 기존 타격폼으로도 30홈런 이상을 때렸는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나 싶어 김 코치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다. 그러자 낮에는 그라운드에서, 밤이면 숙소까지 찾아와 타격폼 수정을 제안하지 뭔가.”
심정수는 결국 손을 들고 만다. 김용달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대신 둘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바로 예전 타격폼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심정수에게 ‘회귀’는 없었다. 2002년 특유의 기마자세를 바탕으로 46홈런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심정수는 은퇴를 앞두고 김용달을 “가장 기억에 남고 감사한 분”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고집이 나를 홈런왕으로 만들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김용달의 고집이 언제나 유효했던 건 아니었다.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타격코치’라는 수식어도 때론 부담이었다. 박용택(LG)과 김상현(KIA)이 대표적이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는 김용달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서 좋은 성적을 냈다.
올 시즌 박용택은 김용달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늘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그늘에서 벗어났을 때쯤엔 김용달의 조언이 이미 몸에 흡수된 뒤였다(사진=LG) |
김상현 역시 LG에서 KIA로 트레이드되며 타격폼을 수정했다. 타격 시 내딛는 왼발의 높이를 낮추고, 스트라이드 폭도 줄였다. LG 시절 김용달이 조언한 것과 ‘영’ 다른 타격폼이었다. 김상현은 이렇게 해야 내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만년 백업요원 김상현이 타격폼을 바꾼다고 3할 타자가 되겠느냐는 비아냥이 들렸다. 김상현 자신도 반신반의했다. 김용달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대성공이었다. 두 선수 모두 극적인 성공신화를 썼다. ‘만년 기대주’ 박용택은 타율 3할7푼2리의 고타율로 타율왕에 등극했다. ‘2군 배리 본즈’ 김상현은 홈런, 타점왕에 오르며 정규시즌 MVP가 됐다.
‘탈(脫) 김용달’을 외친 두 선수의 성공으로 김용달의 입지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그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각도 차가워진다. 그즈음 “현대 시절엔 원체 선수가 좋아 실제 이상의 평가를 받았던 것뿐”이라며 김용달의 능력을 냉정하게 보는 이들이 나타났다. 야구계 일부에선 “자기 주장만 강한 ‘꽉’ 막힌 이”로 그를 꼽았고, 야구전문가들은 “김용달이 지도한 타자들은 하나같이 타격폼이 똑같다”며 비판의 날을 세웠다.
‘리그 최고의 타격코치’에서 ‘리그에서 가장 과대 포장된 타격코치’로 전락한 김용달은 올 시즌을 끝으로 LG를 떠났다. 전해보다 팀 타율을 2푼이나 끌어올리고서도 그는 쓸쓸히 김재박 전 LG 감독을 따라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지금 그는 야인(野人)이다. 등산으로 하루를 보낸다. 바빠서 못 만났던 지인들과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그는 천상 야구인(野球人)이다. 야구가 그를 버려도 그가 야구를 버릴 순 없는 법이다.
얼마 전 그는 “국외유학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미국이나 일본으로 야구 유학을 다녀오겠다는 뜻이었다. 이유는 간명했다. “더욱 깊이 있는 야구이론을 배우기 위해서”다.
53살의 베테랑 타격코치 김용달은 이처럼 ‘정지’를 모른다. 다른 건 몰라도 야구만큼은 그렇다. 현역시절 한 번도 풀타임으로 뛰지 못한 설움이, 지도자만큼은 절대 실패해선 안 된다는 다짐이 그를 ‘부단히 노력하는 야구인’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말하는 김용달의 ‘고집’도 다른 게 아니다. 끊임없는 도전이다.
12월 11일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외야수 부문 수상자로 뽑힌 박용택은 “김용달 코치에게 감사드린다”는 말로 수상소감을 시작했다. 같은 시간 TV를 바라보던 김용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박용택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박용택은 ‘탈(脫) 김용달’ 때문에 성공한 게 아니라 ‘김용달’이 있어 성공한 것이 아닐까. ‘타격 장인’ 김용달의 컴백을 기다려 본다.
응원 횟수 0
첫댓글 김용달코치는 대한민국 최고의 타코죠..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하는 부분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