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동뒤에는 반드시 붉은 정치세력이 ●대구, 제주, 여수, 순천…그리고 광주
이 명 인 본지기자
1946년 5월 6일 미소공동위원회는 무기휴회되었다. 그로부터 9일 후인 5월 15일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공산당은 불법화되고 간부들은 지하로 잠적했다. 6월 3일 지방순회 중이던 이승만은 전라도 정읍에서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읍발언'을 했다. 6월 11일 조봉암은 박헌영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그의 노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7월 29일 평양에서는 신민당이 김일성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에 합당을 제의함에 따라 두 당은 합당했다. 8월 3일 서울의 인민당 당수 여운형은 공산당의 박헌영에게 합당제의를 했고 하루 뒤인 5월 4일 박헌영은 이를 수락했다. 이때 공산당내의 反박헌영파(대회파)인 이정윤, 김근, 서중석, 김철수, 강진, 문갑송 등 6인은 합당에 앞서서 합당문제 일체를 자신들에게 위임하고 조속히 전당대회를 열어 당중앙을 민주적으로 개편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공산당과 좌파들의 이합집산 8월 8일 박헌영파는 이정윤을 당에서 제명하고 김철수, 서중석, 강진, 김근, 문갑송에 대해서는 무기정권 처분을 내렸다. 8월 9일 대회파는 기자회견을 갖고 이를 전면거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9월4일 신민당 당사에서 만난 3당의 대표들은 합당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9월6일 좌익계신문인 '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3개 신문이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정간당했다. 9월 7일 박헌영, 이주화, 이강국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전국의 경찰은 비상경계에 들어갔다. 이보다 한발 앞서 박헌영은 자신에 대한 체포령을 전해듣고 9월 6일 영구차에 누워 서울을 빠져나와 월북했다. 9월 8일 이주하가 경찰의 예비검속에 걸려 들었으나 신분을 속이고 풀려 나왔다.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과 남조선 과도입법기관 설립운동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또 대회파는 박헌영파와는 별도로 조선공산당 대회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위원장에 윤일을 선출한 다음 박헌영에 반대하는 신민당의 반간부파, 인민당의 31파와 손잡고 별도의 3당합당(사회노동당)을 추진하였다. 박헌영파는 신민당의 허헌, 인민당의 이기석 등과 손잡고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기로 하여 합당대회 개최허가를 신청했지만 미군정은 집회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미군정과 김일성을 등에 업은 대회파, 여운형 등의 협공으로 궁지에 몰린 박헌영은 미군정과의 정면대결로 위기를 돌파하는 전술을 택했다. 그것이 이른바 '정당방위의 역공세'라는 구호 아래 나온 '신전술'이었다. 46년 7월 10일 공산당은 전평 산하의 조선화물자동차주식회사 노조에 시험삼아 파업지령을 내렸다. 수백 명의 종업원이 열흘 가까이 파업한 이 사건으로 남한의 육로수송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중경상자가 60여명이나 생겼으며 1백 여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공산당은 해방 후 시도한 최초의 무력 투쟁이 일단 성공적이었다고 보고 다시 기회를 봐서 10월경에 추수기의 농민들과 연계하여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파업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쌀배급, 임투 가장한 공산파업전술 그런데 때마침 46년 8월 20일 미군정 운수부가 '적자타개와 노동자관리의 합리화'라는 이유를 들고 운수부 종업원 25%의 감원과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기로 발표하자 공산당 지도부는 전평을 통해 10월로 예정된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길 것을 지시했다. 9월15일, 조합원 4만 명을 거느린 당시 이남에서 가장 큰 노조인 철도노조는 미군정 운수부장과 철도국장에게 6개항의 요구조건을 1주일 기한부로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고 운수부 철도국 경성공작창 종업원 3천7백 여명이 시위를 벌였다. 요구조건의 내용은 ①쌀을 노동자 4홉, 가족 3흡씩 배급할 것 ②일급제 반대 ③임금인상(물가수당 월2천원,가족수당 1인당 월9백원 신설) ④해고, 감원 절대반대 ⑤점심급식 계속할 것 ⑤노동법령을 실시할 것 등 철저히 노동조건에 국한된 것으로만 위장하였다. 이에 대해 미군정측이 별다른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자 전평은 서울역 앞 건너편의 전평회관 안에 전국 총파업 지휘부인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위원장 허성택)를 설치하고 전국에 파업지령을 내렸다. 23일 0시부터 부산의 철도노동자 7천 여명이 파업에 들어갔으며 24일에는 전철도 종업원 4만 여명이 일제히 총파업에 돌입했다. 25일부터는 출판노조, 전기노조, 체신노조, 해운노조 등이 파업에 들어갔다. 또 각급 학교도 공산당 세포의 선동으로 동맹휴학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신문과 출판물의 간행이 중지됐고 서울, 부산, 대구의 전신전화 업무가 마비됐다. 그런데 애당초 이 같은 파업의 목적에는 노동자의 권익옹호가 아닌 공산당의 정치적 계산만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은 미군정측에 당수 박헌영의 체포령 해제와 폐간 조치한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좌익계 신문의 복간, 남로당 결성대회의 허가 등을 요구했다.
철도·출판·체신…잇따라 파업·혼란조성 9월24일 대구에서도 파업은 시작됐다. 경상북도 인민위원장 이상훈, 공산당도 위원회 대표 장적우, 대구시당 등의 선동으로 대구지구 철도종업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하여 파업은 계속 확대되어 남전을 비롯하여 대구중공업회사, 대구신흥제사공장, 편창, 조선제사공장 등 대구시내 생산공장 40여개 노조단체가 파업에 들어갔다. 공산당 경북도당 위원회에서는 대구시당 위원장 손기영 전평 경북평의회위원장 윤장혁 등 10여명으로 '남조선 노동자총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라는 파업지휘부를 조직하여 체계적인 파업지도와 민심선동공작을 벌였다. 원래 대구는 해방이후 좌익세가 가장 강한 곳이었다. 철도파업으로 인하여 식량을 비롯한 생활필수품 공급이 잘 되지 않자 주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대구시 금정 전평사무소에 설치된 남조선노동자 총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 앞에서는 27일부터 '쌀을 달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평 대구지부 선전부 염필수 등 11명의 선전요원들이 노동자들을 모아 놓고 적기가 등을 부르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에 9월30일 대구경찰서에서는 '총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의 간판을 철거할 것을 명령하자 전평 경북위원장 윤장혁은 자진해서 철거할 것을 약속해놓고 10월1일 새벽부터 부녀자와 어린이 등 약 1천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대구시청 앞에서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소동을 일으키게 했다.
경찰 약올려 발포유도하는 수법 윤장혁은 모인 군중들에게 그해 여름에 거둬 들인 곡식의 배급 및 미국산 밀가루, 옥수수 배급을 폐지한 것 등에 의혹이 있다고 터무니없는 말로 군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어 오후 2시 30분부터는 대구시내 태평로 일대에서 대구역 광장에 이르기까지 운수 금속·화학노동조합 등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5백 여명이 모여 파상시위행렬을 벌였다. 경찰은 이러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대구경찰서 최수덕 경위가 80여명의 경찰관들을 데리고 현장에 나가 이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군중들은 경찰의 말을 잘 듣지 않았고 오히려 최경위를 폭행하기까지 했다. 경찰은 오후 5시30분 경 다시 무장경관 1백50명을 증파하여 시위군중들을 해산하려 했으나 군중들이 말을 듣지 않아 밤늦게까지 옥신각신하던중 밤 11시경 경찰이 위협 발사한 총탄에 맞아 군중 속의 한사람이 죽게되었다. 총소리에 놀라 시위대열은 모두 흩어졌지만 이는 폭동의 시작을 예고하는 것에 불과했다. 공산당은 즉시 지금까지의 식량투쟁을 군중의 반경감정을 자극하여 폭동으로 발전시키기에 총력을 다하였다. 대구의대 학생자치회 간부로 있던 최무학은 조선공산당 대구시 당의 학생 담당 비밀당원이었다. 최무학과 의대 내의 공산당 프락치들과 대구사대 전문부의 간부학생들, 대구농과대 학생일부, 경북중학, 대구상업중 등의 공산당 학생세포들은 시신을 앞세워 군중을 선동하는 전무후무한 '시체데모'를 구상하였다. 즉 그들은 사망자의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점에 착안, 대구의대 해부학 교실의 시체탱크에 있는 시신 한 구를 빼내서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노동자의 시체라고 속여서 군중을 흥분시킨 다음 시신을 앞세우고 대구경찰서로 쳐들어간 것이다.
해부학용 시체를 데모에 악용 10월2일 오전 10시 대구경찰서 앞 본정 1정목 네거리는 1만5천 여명의 인파가 집결하였다. 이중에는 공산당 학생세포들이 대구시내 각급 학교를 돌면서 선동하여 대구시내 3개 대학, 경북중, 대구상업, 대구농림, 대륜중학, 경북고녀, 대구여상, 신명여고, 계성중 등에서 나온 2천 여명의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무학 등 학생데모의 지휘부는 군중 모두에게 보란 듯이 시체를 경찰서 앞 계단에 놓아두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이성옥 대구경찰서장에게 정식으로 경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이성옥 서장은 경찰서를 포위한 군중들에게 압도되어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여기에 공산당 경북도책 장적우, 경북도 인민위원장 이상훈 등이 이성옥 서장을 만나 그의 친일경력을 들먹이며 "이 기회에 양심적인 경찰관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식으로 회유, 경찰이 총기를 거두면 학생들을 해산시키겠다며 끈질기게 설득작전을 폈다. 처음부터 싸울 의사가 없었던 이성옥 서장은 그들의 말을 믿고 총기를 무기고에 넣도록 지시했다. 경찰이 순순히 무기를 무기고에 거두어들이자 이를 지켜보던 좌익요원 누군가가 경찰서 앞으로 뛰쳐나가 "경찰이 백기를 들었다"고 외쳤다. 그 순간 군중 속에서 "처단하라"는 구호와 함께 수백 명의 청년들이 경찰서 안으로 물밀듯이 돌려들어 왔고 이에 놀란 경찰관들은 모두 서둘러 경찰모와 상의를 벗어던지고 당을 넘어 도망쳤다. 경찰서에 남아있던 이성옥 서장과 경찰간부 너댓 명은 인질로 잡혔다. 낮12시 대구경찰서는 폭도들에게 '접수'되었다. 유치장이 개방되었고 무기고가 탈취되어 경찰무기가 좌익들에게 넘어갔다. 풀려난 죄수와 잡범들은 깡패, 양아치들과 뒤섞여서 무기를 가지고 시내 각지를 돌아다니며 경찰관서를 습격하였고 눈에 띄는 경찰관이나 경찰가족들을 살해하고 우익인사들에 대한 습격을 주도했으며 부잣집에 들어가 강도행각을 일삼았다. 상가는 서둘러 철시하고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았다. 전 시가지에 걸친 방화와 약탈이 자행되었고 치안이 무력화된 대구거리는 무법천지였다.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이 있은 후 공산당의 파괴력에 놀란 미군정은 공산당과의 대결적 자세를 버리고 타협적 태도로 나왔다. 미군정은 남로당의 결성대회를 허가했을 뿐만 아니라 46년 11월23∼24일 열린 결성대회 때 하지중장이 자신의 대리로 범펠로 소령을 내빈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미군정 대공대결에서 타협으로 김일성 또한 박헌영의 위치가 남한내의 좌익에서 확고부동함을 깨닫고 지금까지 은밀히 대회파를 사주해오던 태도를 돌변하여 박헌영 지지로 돌아섰다. 뿐만 아니라 '사노당에 대한 결정서'를 발표하여 남로당의 사노당 와해공작을 적극 지지하기까지 했다. 이와는 반대로 여운형은 미군정과 김일성 양쪽으로부터 이용가치를 잃게 되어 정치적 기반이 몰락했다. 미군정과 김일성은 모두 여운형을 이용하여 박헌영을 견제코자 하였으나 여운형의 역량이 박헌영에 뒤지는 것을 알고 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 것이다. 이것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철저히 배신해버리는 김일성의 속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그리하여 대회파와 여운형, 백남운 등이 만들었던 사로당은 해체되었다. 이는 폭동 후 박헌영과 공산당이 얻은 최대의 성과였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남로당은 더욱더 폭력 투쟁에 치중하는 노선을 가게 되었다.
남로당, 해방후 군대 먼저 조직 해방 후 초기에는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이 그 수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평화적 방법으로 공산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신탁통치)을 공산당이 지지하는 바람에 점차 대중의 지지를 잃게 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휴회에 들어가자 공산당은 폭력투쟁으로 전술을 바꾸게 된 것이다. 남로당은 해방 후 제일 먼저 자신의 군대를 조직하였다. 그것이 바로 건준산하의 국군준비대였다. 이 국군준비대는 서울시내 국민학교 운동장 등에서 공공연히 군사훈련을 하다가 얼마안가서 미군정에 의해 해산당하고 간부들은 체포되는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 이에 남로당은 작전을 바꿔 미군정이 편성하기 시작한 남조선 국방경비대에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국방경비대 지원자에 대해 사상검열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군에 지원하는 사병들의 가정성분은 대부분이 빈농출신이었다. 또 남로당은 한번도 국방경비대나 국방군을 비난하는 성명을 낸 적도 없었다. 남로당은 이주하를 책임자로 하는 군사부 산하에 이들 군내의 프락치들을 점조직으로 두고 있었다. 박헌영은 우선 이들을 통해 반란폭동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남한 정부와 군부의 움직임을 감시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정도 에 그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48년에 들어서 남한만의 단독선거인 5·10선거가 치러지게 되자 박헌영은 '단독선거를 반대하라'는 지령을 내리게 되고 이제 따라 제주도에서 4·3폭동이 일어나 문상길 등이 나서게 되고 그 와중에 다시 여수에서 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군내 프락치들에 의한 폭동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제주도내 14개 지서 일제습격 살상 평소 제주도는 지리적 여건상 본토의 행정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관계로 공산당의 조직활동이 가장 활발하여 주민의 상당수가 좌경화되어 있었다. 또 해방 후 제주도로 귀환한 동포들 중에는 일본군과 중국 팔로군에서 전투경험이 있는 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남로당 군사부 직계의 소위 제주인민해방군 사령관 이덕구와 제주도 군사부 총책 김달삼도 일본군 학도병 출신이었다. 이들 1천 5백 여명은 해방전 제주도에 주둔했던 약 8만 명의 일본군 부대가 퇴각하면서 남긴 무기와 탄약으로 무장하고 군사훈련은 중국 팔로군에서 사용했던 유격전술을 가르쳤다. 제주도의 좌익폭력난동은 47년 3·1폭동을 계기로 시작되어, 48년의 2·7폭동과 4·3폭동으로 연결되었다. 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의 여파로 제주도에서도 좌익검거의 선풍이 닥치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이탈을 막기 위한 의도에서 47년 3·1절 행사에서 찬탁·반미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의 과잉진압을 시비삼아 대대적인 소요사태를 일으켜 시위군중 6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했다. 남로당은 사건의 모든 책임을 경찰에게 전가하였다. 3·1사건으로 좌익계 간부들에 대한 경찰의 강력단속이 시작되자 좌익 대부분이 지하로 은신한 상태에서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는 '4월3일 새벽 2시를 기해 한라산을 비롯, 전도의 산악고지로부터 일제히 봉화를 올리고 무장투쟁을 전개하라'고 당기관에 지시하였다. 당일 오전 2시에는 제주도의 산마다 봉화가 피어오르고 당원들을 선두로 약 3천명의 인민자위대가 모여 들었다. 이미 3월부터 김달삼은 자기부하 조노구와 국방경비대 제9연대 세포조직책 문상길 등과 밀회, 치밀한 작전계획을 짰다.
공비 내통한 연대장 바꾸자 암살 인민자위대는 일시에 제주도내 모든 지서를 습격, 방화하여 14개 지서가 불에 타고 경찰관 13명이 살상당하고 민가 4채가 불에 탔다. 폭도들은 경찰관,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대한독립촉성회 회원 등 우익인사들과 가족들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남로당은 미제타도, 단정반대, 신탁통치 찬성, 경찰 철수 등을 요구하였다.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9연대는 제주도 향토방위를 위해 1946년 11월 모슬포에서 창설되었으나 그 병력이 1개 대대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국방경비대 총사령부에서는 4월10일 부산에 주둔중인 제5연대 제2대대를 제주도로 파견하여 제9연대에 배속하였다. 경찰도 전국에서 1천7백 여명의 지원병력이 급파되었다. 그러나 제5연대 제2대대장 오일균 소령은 남로당 프락치였다. 그는 제주도에 도착하고도 차일피일 출동을 미루면서 "경비대는 경찰과 민간인의 싸움에 개입을 하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정신교육만을 1개월 동안 실시하였다. 그러므로 경비대 장병들은 경찰에 협조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오일균의 계략에 따라 공비두목 김달삼과 9연대장 김익렬 소령이 만나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일본군 학병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김달삼은 경비대가 자신들을 적대시하지 말아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김익렬은 공비들이 귀순할 것을 요구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 이후 9연대장은 수차 병력을 출동시켰으나 그때마다 오일균, 문상길 등이 공비들에게 작전을 누설하는 바 람에 공비와 마주치는 일이 전혀 없었고 어쩌다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공비들은 군대를 공격하는 일이 없이 모두 도망쳐 버렸다. 그래서 경비대가 전과도 피해도 없는데 반해 경찰만 단독으로 작전을 벌이게 되어 경찰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공비와 내통한 군, 경찰 고립화 그러다가 9연대장이 공비와 접촉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자 경비대사령부는 김익렬 소령을 보직해임한 뒤 수원의 11연대를 제주도로 이동시키고 9연대(실병력 1개대대)를 11연대에 편입시켰다. 새로 제주도에 온 11연대장 박진경 중령은 종전과 달리 적극적인 토벌작전을 벌이게 되자 김달삼은 문상길에게 연대장 암살을 지령하였다. 지령을 받은 문상길은 6월18일 취침중인 연대장을 총으로 사살하였다. 군 수사기관의 수사로 문상길, 오일균 일당은 체포되어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후 후임 연대장 최경록 중령은 선무공작을 통해 공비를 한라산 밀림으로 축출하여 그들의 세를 크게 약화시켰다. 11연대가 물러가고 다시 재편성된 9연대장으로 부임한 송요찬 중령은 군 프락치 80여명을 체포하였으며 공비 110명을 사살하고 276명을 생포하였다. 그후 제주도 폭동은 군의 선무, 토벌작전이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김용관, 이덕구, 김민성 등이 사살되면서 49년 5월15일께에야 거의 평정되었다. 그러나 4·3폭동으로 인해 제주도내 2개 선거구는 48년 5월10일에 선거를 치르지 못하고 만 1년 뒤에야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그리고 산중에 남아있던 잔여공비들은 53년 4월에 가서야 완전 소탕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4·3폭동의 진압을 위하여 출동하려던 여수 14연대의 좌익세포들의 난동에 의해 다시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반란조, 민간좌익과 합세 여·순 점령 1948년 10월19일 제 14연대는 1개 대대가 제주도 공비토벌작전 증원차 출동하기 위해 여수항에서 선적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 출동대대의 환송을 겸한 회식이 장교식당에서 개최되었다. 19시경 회식이 끝나고 연대장 이하 참모들은 다시 여수항에 나가 선적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20시경 연대 남로당 조직책인 지창수 상사가 약 40명의 당세포원들을 동원하여 병기고와 탄약고를 점령케하는 동시에 비상나팔을 불어 출동부대인 제 1대대를 집합시킨 다음, 경찰타도, 제주도 출동거부, 인민군이 지금 남진중에 있으니 우리는 이에 호응하여 북상하자는 등의 선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이에 하사관 3명이 반대하고 나서자 즉석에서 이들을 사살하여 집합한 군인들에게 겁을 준 다음 모두 맹종하게 만들었다. 이어 지창수는 곧바로 자신이 반란군의 연대장임을 선언하고 그들이 계획한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등 반란군 지휘체계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나서 부대내의 장교 20여명을 사살하였다. 연대장은 반란소식을 듣고 여수항에서 급히 부대로 들어오다가 총성이 나고 사방에서 반란군들이 난동을 부리는 것을 목격하고는 사태수습을 포기하고 즉시 해군 경비정을 타고 목포를 거쳐 광주의 제5사단 본부로 가서 진상을 보고하였다. 반란이 성공하고 3천명 정도가 된 반란부대는 지창수의 지휘하에 여수시내로 진입하여 지서와 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관들을 무차별 살해한 후 20일 오전 9시경 여수시내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들은 곧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인민공화국기를 게양하였으며 인민대회를 열어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 남한정부의 법령무효, 친일파 소탕, 무상 분배·무상몰수의 토지개혁 실시 등을 공포하였다. 곧이어 반동분자 색출과 학살이 시작되었다. 반란군은 여수장악 후 2개대대 병력이 오전 9시 30분 경 열차편으로 순천으로 출발하여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홍순석 중위(남로당원)지휘하의 2개 중대와 합류하였다.
좌익들 여경잡아 전라로 찔러죽여 광주에서 제4연대 1개중대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급거 출동하였으나 중대내 좌익계 하사관 일부가 중대장과 일부 사병들을 사살한 뒤 이들과 합류해버리는 바람에 오히려 반란군의 세력만 더욱 커지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경찰은 이들의 순천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필사의 방어작전을 폈지만 4백 여명의 전사자만 내고 반란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하였다. 이날 17시에 반란군은 순천의 전 시가지를 완전 점령했다. 이들은 지역 좌익들로 하여금 반동을 색출케하여 즉석에서 5백 여명을 인민재판에서 학살하였다. 여수에서는 21일에도 인민재판을 개최하여 여수경찰저장 고인수를 비롯한 사찰계 직원 10여명을 처형하였고 특히 여수경찰서 소속 여경 2명을 붙잡아 대낮에 벌거벗긴채 죽창으로 국부를 찔러 죽였다. 여수·순천을 장악한 반란군은 다시 3개부대로 재편성하여 1개부대는 북쪽의 학구·구례 방면으로, 1개부대는 동쪽의 광양방면으로, 1개 부대는 서남쪽의 벌교·보성 방면으로 분진하면서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경찰관들을 살해하였다. 정부에서는 여수 순천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10월21일 광주에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는 송호성 육군준장을 임명하여 제2여단과 제5여단을 통합 지휘케 하는 한편 10월21일에는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반란군 토벌에 동원된 병력은 5개연대 10개 대대였으며 1개 비행대와 함정 등이 이를 지원하였다. 반란토벌 전투사령부는 반란사건이 발생한지 5일 만인 25일 순천, 벌교, 보성, 광양을 탈환하였으며 여수지역은 27일에야 치안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여수·순천 반란사건은 9일만에 완전히 진압되고 그후부터는 지리산, 백운산 등지로 입산도주한 반란군에 대한 토벌작전이 전개되기에 이른다.
DJ "민주주의 국민 피먹고 자란다" 1980년 2월 29일 정부는 김대중씨 등 긴급조치위반자에 대한 복권을 발표하였다. 김대중씨가3월부터 정치활동을 자유롭게 재개할 수 있게 되자 신민당내에 잠재해 있던 김대중씨 지지세력과 김영삼씨 지지세력간의 알력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김대중씨는 신민당이 초당적 상황에서 재야인사를 대폭 영입할 것을 주장했고 김영삼씨 측은 당헌에 따라 부총재 1명, 정무위원 5명, 중앙상무위원회에 30명의 범위내에서만 영입하겠다고 맞섰다. 그것은 신민당내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싸움이었다. 김대중씨는 비서실장 예춘호씨와 이용희 의원 등에게 각 1천만원씩을 주어 공작을 벌이도록 했으나 당권파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김대중씨는 정책연구실과 비서실, 민주헌정연구회 간부진 등 자신의 참모들과 연일 회의를 거듭한 결과 신민 당에 들어가서 집권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이미 정부일각에서는 2원 집정제 구상이 새어나오고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신당설도 유포되고 있었다. 이것은 과도정부가 계엄을 장기화시킨 다음 집권을 계속 연장하려는 의도로 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선거가 치러진다 해도 정당 조직이 없는 동교동으로서는 열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상대보다 힘이 약할 때는 정공법보다 변칙적인 공격에 의존해야만 한다. 판단은 끝났다. 김대중씨는 3월26일 YWCA 연설을 시작으로 학생, 근로자, 종교인, 농민 등 각계 각층과의 직접 접촉에 나서기 시작하는 등 장외활동에 들어갔다. 이날의 연설에서 김대중씨는 "민주주의는 그 나라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김대중씨는 이날의 연설이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하고 4월4일 김영삼씨와 만나 회담하고 나서는 4월7일 신민당 입당포기를 정식으로 선언했다.
DJ "민중운동 정정적 시기는 5월" 4월10일 김대중씨는 "국민연합에 복귀하여 민주회복투쟁에 전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날 저녁 8시 문익환, 예춘호, 고은태, 함세웅, 이우정씨 등 국민연합 인사들은 북학파크호텔에서 만나 김대중씨의 신민당 입당포기 지지와 국민연합복귀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4월16일 한신대 연설에서 김대중씨는 재야세력이 민주화의 구심점이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4월18일 동국대 연설에서는 "10 26사태는 독재에 항거해 온 전국민의 혁명"이라고 규정하고 "탄압을 받더라도 우리가 끈질기게 저항하면 성공할 것이다"고 열변을 토했다. 김대중씨는 80년 5월을 민중운동의 결정적 시기로 보고 조성우, 심재권, 장기표, 이현배씨 등 학생운동 지도자들에게 매달 20만원씩의 활동비를 지급하면서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한 후 그 결행시기를 5월 중순경으로 결정한 뒤 정부전복후 과도내각 역할을 맡게 될 한국민주제도연구소를 구성한 후 소장에 이문영, 이사장에는 예춘호씨를 임명하고 일부 인사들로부터는 서둘러 전문위원 취임승낙서를 받기도 했다. 5월12일 북악파크호텔에서 김대중씨를 중심으로 한승헌, 이문영, 이해동. 예춘호, 서남등, 문익환, 심재권, 계훈제, 김종완, 이현배, 장기표씨등이 모여 전략회의를 갖고 "민주화 운동을 하자는 것은 궁극적으로 반민주유신세력들의 음모를 분쇄한 다음, 민주주의에 역행하여온 독재정부를 무너뜨려 우리 민주인사들이 참여하는 민주정부를 수립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이글에서 보듯 항상 폭동 뒤에는 빨갱이들이 개입돼 있음을 알수있읍니다.
그리고 민주화 운동으로 변신하죠..
그리고 보상으로......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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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빨갱이 때리잡아야합다... 근데거시기 여기카페에서. 중국공산당비판 북한비판게시글에 태클거는자들..친중공친북좌파들이겟지? 가제는 게편이라 맘에안드는거겟죠? 친북좌파..이거이들..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