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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한처음'으로 돌아가자>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한 처음>은 시간의 처음이 아니다.
<한 처음>은 시간이 있기 이전이다.
<한 처음>은 그래서 시간이 없다.
빛이 생기라는 말씀을 꺼내기 전이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는데 그 첫날도 있기 전이다.
<한 처음>은 시간이 없을 뿐 아니라 공간도 없다.
시간이 있기 전일 뿐 아니라 궁창도 있기 전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없는 <한 처음>은 영원이고,
공간이 없는 <한 처음>은 무한이며,
이런 <한 처음>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이다.
<한 처음>은 시간과 공간만 없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너도 없고, 나도 없으며 부모도 없고, 부모의 부모도 없다.
그러기에 <한 처음>은 무(無)다.
한 처음에는 존재만 하느님 외에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 아니다.
당연히 행위도 하느님의 행위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하느님의 뜻만 있고 나의 뜻은 없었으며,
하느님의 계획만 있고 나의 계획은 없었으며,
그러니 하느님의 행위만 있고 나의 행위는 없었다.
“생겨라”는 말씀과 생긴 다음에 보시고 “좋다”는 말씀만 있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생겨난 모든 것 순종치 않은 것 아무 것도 없으니
오늘 우리 모두 <한 처음>으로 돌아가자.
하느님께서 다시 창조하시게 하자!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다 하시게 하자!
- 작은형제회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치유되기 위하여>
여기저기 아파보면서 얻게 된 깨달음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질병, 예를 들면 피부병이라든지 타박상, 찰과상이라든지 골절상 같은 병은 꾸준히 치료하면 대체로 빨리 낫습니다.
빠르게는 한두 주일, 길게면 한 달 두 달 길어봐야 6개월, 1년입니다.
그런데 치료하기가 더 어려운 질병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부의 질병입니다.
위장이나 대장 질환, 간이나 혈관질환 등등.
우선 잘 보이지 않기에 치료도 복잡하고 힘들뿐 아니라 질병이 만성질환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내부의 질병보다 더 치료가 어려운 질병이 있습니다.
마음이나 정신의 질환, 영혼의 질병입니다.
이 질병이 무서운 것이 사람에 따라서 자각 증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질병의 상태가 어디까지 진전되었는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본인이 잘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환자는 자신 겪고 있는 영혼의 질환이 마치도 ‘말기 암 증상’과도 같은데도 불구하고 우선 살아 숨쉬기에 그걸 깨닫지 못하기도 합니다.
치료를 위해서는 현재 병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 그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질병의 심각성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간 몰랐었는데 강렬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등장하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빛으로 인해 자신들의 어두움, 자신들이 앓고 있는 질병의 심각성을 낱낱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만사 제쳐두고 치유자이신 예수님께로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마르코 6장 54~55절)
예수님 앞으로 달려온 환자들은 앞다투어 자신들의 깊은 상처를 가감 없이 그분께 보여드렸습니다.
마치 놀다가 다친 어린아이가 울면서 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그 결과가 기적적인 치유의 은총이었습니다.
기적적 치유에 이르기까지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스스로 심각한 환자임을 솔직히 고백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환부를 예수님께 보여드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자비하신 분,
우리를 향한 무한한 측은지심을 지니고 계신 분,
그래서 우리를 죽음의 질병에서 구원해주실 전지전능한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굳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런 저런 내과적 질환, 외과적 질환, 정신과적 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은 아무래도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는 것이 최상책이겠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질병, 영혼의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우리 마음과 영혼의 주치의이신 예수님께로 달려가셔야겠습니다.
영혼의 질병을 가장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보물인 성경을 손에 드셔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모두들 안녕들 하셨지요?
저는 9일 동안의 성지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른 순례길, 기도와 묵상을 하면서 주님을 더욱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고
또 그 길에서 얻은 뜨거운 감동으로 무척이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그 힘을 통해 더욱 더 열심히 살아갈 것을 주님과 여러분들 앞에 약속해봅니다.
아무튼 제가 없는 동안 새벽 카페를 지켜주심에 감사드리며 오늘의 묵상 글을 시작하여 봅니다.
자매님들이 형제님들로부터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뽑는다면
첫 번째가 축구 이야기, 둘째가 군대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최고로 싫은 이야기는 군대 가서 축구한 이야기라고 하지요.
아마 군대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일이 축구한 이야기이고, 그래서 많이 말할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군대에서 이 축구 때문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한 번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군대에 가서 자대 배치를 받은 뒤에 군기가 가득 들어있는 상태에서 동기들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는데 선임병들이 다가와서 저희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 축구 잘 하냐?”
차례로 이야기하는데, 동기들은 “잘 못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저 역시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축구는 잘 못합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한 선임병이 저에게 “그러면 뭘 잘하는데?”라고 묻는 것입니다.
다른 친구에게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게만 그런 질문이 던져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큰 소리로 “농구도 잘하고, 탁구도 잘합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가능성을 가진 대답 그 자체가 그 뒤로 계속해서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요.
그때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조건 못한다는 생각보다는 가능성과 함께 언제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어떤 일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가능성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커다란 사랑과 은총의 힘을 쏟아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가를 보십시오.
자기는 할 수 없다고 주님 앞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 가능성에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옷자락 술에 손을 대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 손을 댄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해주시는 사랑가득하신 분이니까요.
- 인천교구 / 안식년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창조의 협력자>
신발을 판매하는 회사가 새로운 판매처를 찾다가 아프리카로 두 명의 영업사원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곳에서 판매를 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사람은 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회사로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프리카에 가니 그곳 원주민들은 신발을 전혀 신고 있지 않아서 신발을 팔 수가 없습니다.”
사장은 곁에 있던 다른 사원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맞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아무도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신발을 신으면 얼마나 좋고 편한지를 알려 준다면 아프리카의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의 고객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일한 곳을 탐방하고 왔지만 한 사람은 불가능을, 다른 한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신발은 누구를 통해 아프리카에 생겨나게 될까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신발을 신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음을 믿는 누군가가 받아주어야만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창조 이야기가 나오는데,
자칫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냥’ 말씀으로 빛도, 공간도, 사람이 살 육지도 만드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자 혼자서 아기를 낳을 수 없기에 협조자인 여자를 만들어 주셨듯이,
하느님의 창조에도 항상 협조자가 존재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물!’이라고 외치면 물이 생깁니까?
아무 변화도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옆에 있다가 물을 한 잔 가져다주면 내 앞에 없던 물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하느님은 절대 혼자서 고독하게 창조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창조자를 ‘지혜(소피아)’라고 말합니다.
잠언에 의인화된 ‘지혜’가 창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읽어보면 흥미로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심연이 생기기 전에, 물 많은 샘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산들이 자리 잡기 전에, 언덕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그분께서 땅과 들을, 누리의 첫 흙을 만드시기 전이다.
그분께서 하늘을 세우실 때, 심연 위에 테두리를 정하실 때 나 거기 있었다.
그분께서 위의 구름을 굳히시고 심연의 샘들을 솟구치게 하실 때,
물이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바다에 경계를 두실 때,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잠언 8,22-31)
따라서 오늘 독서에서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줄 첫 번째 피조물이신 온 천지만물과 인간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누군가의 협조 없이 절대 아무 것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여 이 세상에 모든 피조물들이 태어나도록 그 말씀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신
그 ‘지혜’의 단서가 바로 창세기 1장 2절에 등장합니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땅’은 성경에서 ‘여인’을 상징합니다.
그 여인과 관계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인 성령입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물’과 관계 있습니다.
여인이 성령으로 가득하여, 그 성령의 열매인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야만 말씀이 열매를 맺어 새로운 무엇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줄 성령으로 가득한 이 첫 번째 피조물인 ‘지혜’를
교회 학자들은 모두 ‘성모 마리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나중에 태어나셨지만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계신 분이신 것처럼,
그분을 낳으신 마리아 또한 시간을 초월하셔야 함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머니로부터 인성을 받으신 분인데,
어머니가 없이 그리스도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부 에프렘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물이 불로 따듯해지는 것처럼, 또 암탉이 달걀을 따듯하게 품어야만 알에서 병아리가 탄생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신 어떤 어머니와 같은 존재를 통해 창조가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암브로시우스는 성령의 도움으로 씨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 것이 창조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을 내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당신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
(시편 104,30)
그리고 성경의 주보성인인 히에로니무스는 이 구절이 ‘세례’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참조: 교부들의 주해)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창조하실 때 성모님의 ‘믿음’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처럼,
창조는 하나의 ‘열매’입니다.
‘씨’(말씀)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땅’(어머니)이 있어야 하고 ‘물과 따듯함’(성령)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시는 것은,
말씀이신 당신을 받아들인 성모님을 통해 교회가 탄생, 즉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모든 창조된 것들은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와 열매를 맺게 창조되었습니다.
빛과 공간과 땅이 창조되었다면,
그 안에 해와 달과 별, 새들과, 짐승들이 채워지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인간 또한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누군가를 받아들여야 하는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참 주인이신 ‘말씀’이 들어와 열매 맺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아직 창조가 끝나지 않은 불량품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창조당하고 창조에 협력하는 인간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태초의 창조의 협력자로서 그분의 깨끗함 덕분으로 성령님을 충만히 지니고 계셨던 성모님의 모델을 닮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창조의 협력자셨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라>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을 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 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
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삼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의 가슴을 풀어 제치며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을 받으시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 받겠습니까?
옛날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새로워진 사실을, 구원 받은 사실을 함께 기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 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 6,56).
그 동네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게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 받을 것입니다.” (야고 5,15)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 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 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 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 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 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 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 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 ‘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이 내용에서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르 5,27-29)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병이 나은 일은 많은 군중 가운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이 소문을 퍼뜨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고...
그런 기적 이야기들은 복음서 저자들의 '신앙의 증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이니까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루카 1,37)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학자들 가운데에는 그런 기적을 부정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하거나, 심리적인 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태도는 자신에게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를 바랐던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옷만 믿는 사람들로...
1)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옷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안수를 해 주시면 좋고, 말씀을 해 주시면 더 좋고...
그들은 옷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신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병을 고치는 등의 기적만 바라고, 그 이상의 은총은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은 부족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써 병이 나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더 잘 믿게 되고, 그래서 예수님을 더 잘 따르게 된 사람이 몇 명은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이 나은 뒤에는 그냥 떠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도 아직은 많이 부족한 믿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루카복음 17장에 나오는 열 명의 병자가 좋은 예입니다.
그들 가운데 아홉 명은 몸의 병을 고치기만 하고 그냥 가버렸고, 한 명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한 명만 '구원'을 받았다는 선언을 들었습니다(루카 17,15-19).
가버린 아홉 명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고 떠나버렸기 때문에 자기들이 받을 수 있었던 더 큰 은총, 가장 좋은 은총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못 받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지는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입니다.
'기적'은 그 나라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러 가지 은총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2)
예수님의 옷만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든지 아니든지 그런 것은 상관없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병을 고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옷이 병을 고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청하는 사람들의 병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믿음보다 처지를 먼저 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옷을 믿었더라도 병이 나은 뒤에는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이 나은 뒤에도 계속 예수님을 안 믿고 옷만 믿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옷을 믿는 것은 예수님 덕분에 병이 나았더라도 진짜 믿음이 아니고, 그냥 미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옷이든, 신으셨던 신발이든, 직접 사용하셨던 어떤 물건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런 것은 생명 없는 물건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물건들을 신처럼 섬긴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사용하는 많은 성물들을 그런 식으로 잘못 사용한다면, 그것도 역시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옷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예수님)이 아닌 것을(사람을) 하느님(예수님)처럼 섬기는 일은 전부 다 우상숭배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리스트라에서 어떤 장애자를 고쳐 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본 군중이 바오로를 제우스라고 부르고, 바르나바를 헤르메스라고 부르면서 제물을 바치려고 했습니다(사도 14,13).
군중은 두 사도를 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오로 사도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 14,15)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버리고 참 하느님을 섬기기를 바라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하느님을 섬기기는커녕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우상으로 섬기려고 했으니...
바오로 사도는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요즘에도, 뛰어난 운동선수나 연예인들을 신이라고 부르는 일이 흔히 있는데, 결코 좋은 일은 아닙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나를 떠나 주님께 데려가는 사랑>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시는 예수님을 ‘곧 알아보고’ ‘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6,54).
사람들은 온전한 창조질서와 하느님의 선과 온갖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어둠으로부터의 해방을 그토록 갈망하였던 것이다.
더러운 영과 질병, 온갖 고통은 바로 하느님의 선을 거스름으로써 초래된 인간의 왜곡된 실상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고통과 무질서, 반생명적인 가치들을 양산(量産)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와 해방과 온전한 선을 갈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찾아오는 병자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신다.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6,56).
여기서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의 태도에 집중하여 우리가 살아야 길을 짚어보자.
어떻게 병든 이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주목할 점은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의 눈길이 다른 이들의 아픔에로 향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에 대한 애착과 이기적인 중심성에서 벗어나야
다른 이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의 아픔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기 이탈’이야말로 영성생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첫 단계임을 새겨야 하리라!
자신을 벗어나는 그만큼 다른 이들이 보이고 그때부터 참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병든 이들의 아픔에 눈길을 고정시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시켜주실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알았을 것이고, 그분에 대한 소문을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이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과 그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인이 아니라 도구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힘을 지니신 분이심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수동과 경청의 영성’인 듯하다.
무엇이든 먼저 내가 나서서 내 힘으로 해결해보려 하고, 듣기보다는 말하려고 한다.
내 뜻과 내 힘을 앞세우는 것이다.
이런 삶은 주객이 뒤바뀐 것으로 영성생활이 아니라 우상숭배라 아니 할 수 없다.
끝으로 사람들은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6,54)
나아가 ‘그들은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시기만 하면,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하였다.’(6,56)
그들은 병든 이들을 직접 예수님께 데리고 갔다.
우리는 몸과 마음의 아픔과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하느님의 선과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가야 한다.
나아가 이 사회의 반생명적 문화와 창조질서의 파괴, 진실의 왜곡, 사회적 갈등과 부패, 경제 정의의 상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무감각 등을
그리스도께로, 그분의 복음의 질서 안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자비와 선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있으며, 깨어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가?
말씀과 성체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일상사를 통해서 살아계시는 주님 앞에 얼마나 깨어 있는가?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회복하도록 부르는 목소리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투신하고 있는가?
이제부터라도 모든 것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 힘쓰고,
또 그분께 ‘너와 나의 질병’, ‘이 사회의 질병’을 데리고 가는 사랑의 소명에 더 헌신적으로 응답하자.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귀향(歸鄕:coming home)의 여정>
고향을 찾는 마음은 하느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이 참 고향이자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닿아있습니다.
사실 살아갈수록 '찾아갈 곳'은, '찾아갈 분'은 하느님 한분 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영원한 그리움의 향수(鄕愁:homesick)'입니다.
하여 어쩔수 없이 사람은 누구나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여기가 고향이 아니라 하느님이 고향이자 본향임을 말해 줍니다.
"기쁨과 평화 넘치는 하느님 계신 곳,
언제나 마음속에 그리며 살리라.
우리의 모든 소망 이뤄지는 그곳,
영원한 천상 행복 누리게 하소서."
믿는 이의 근원적 소망의 표현과도 같은 성가 68장입니다.
세상에 이방인이요 나그네임을 말해 줍니다.
바로 이런 우리의 심중을 반영하는 히브리서의 고백이 고맙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히브11,13-14).
참 은혜롭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고향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자 본향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40년 전, 초등학교 제자들이 선생님인 저를 발견하고 열광하며 찾는 마음도 바로 이런 향수의 발로입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삶에 옛 고향(故鄕) 같은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 겁니다.
이 그리움의 뿌리는 하느님께 닿아 있습니다.
새삼 '하느님의 향수(鄕愁)'를 불러 일으키는, '하느님의 이정표'가 되는, 사제가 정말 이상적 사제임을 깨닫습니다.
"선생님, 날씨가 너무 춥습니다.
친구들이 선생님 빨리 뵙고 싶어하는데 선생님이 정해 주세요.
아님 16일 저녁이 어떠세요?"
지난 밤에 도착한 제자의 카톡메시지입니다.
38년 전엔 13살의 초등학교 6학년 제자들이었으나 지금은 51세의 본격적 중년을 넘어선 제자들입니다.
아무리 나이 들어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되어도 고향은 고향이며 선생님은 선생님이고, 어머니는 어머니이며 하느님은 하느님입니다.
'천국 같은 교실' '행복한 교실'을 모토로 하여, 나 하나만이라도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집이 아닌 가정 같은 교실을 꾸미고자 열정을 다한 청년교사 시절이 그립고, 아이들도 그런 고향 같은 선생님을 그리워 찾는 것입니다.
집(house)은 있어도 가정(home)이 없는 오늘의 세태일수록
참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고향(故鄕), 향수(鄕愁), 본향(本鄕), 귀향(歸鄕)이란 한자 '향(鄕)'자가 들어가는 단어들입니다.
저는 삶을 '귀향의 여정', 즉 우리의 본향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라 칭합니다.
죽음을 향한 인생 여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귀향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아버지인 하느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자 본향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말고, 하느님을 믿으라.'
정곡을 찌른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어디나 계시기에 바로 지금 여기가 고향이요 본향입니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아도 약속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으니
약속이 아닌 하느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깊은 평화와 안정을 줍니다.
바로 뉴튼수도원에 가서도 실감한 사실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했고 행복했기에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것도 없었습니다.
어디나 하느님의 집인 성당만 있어 그 안에 머물면 고향에 있는 듯 편안했습니다.
하여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아 성당을, 수도원을 찾는 것입니다.
요셉수도원을 찾는 많은 자매들의 이구동성의 말은 '친정집에 오는 것 같다'는 고백입니다.
수도원 고향집이 마치 친정아버지 같은 하느님이 계시기에 나온 자연스런 고백인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계신 본향집으로의 귀향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이지만 이미 여기 본향집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어디나 계시고 하느님 계신 곳이 참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정주서원을 통해 하느님 참 고향에 영원히 뿌리내리고 사는 분도수도자들입니다.
바로 오늘 1독서 창세기의 내용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어둠이 뒤덮고 있는 심연을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 주시는 과정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느님은 주도면밀하게 혼돈에서 안정과 평화의 아늑한 환경의 가정집 분위기로 만들어 주십니다.
창세기 저자의 고향을 상실한 혼돈의 세상을 반영합니다.
바로 성령의 감도하에 나온 '오래된 미래', 하느님의 집을 향한 향수의 원초적 갈망의 표현입니다.
똑같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 지금 여기서 본향을 앞당겨, 맛보며 살게 하십니다.
창세기에서 기본적인 창조과정의 도식은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입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대로 되어,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균형과 조화의 세상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바로 지금 여기 본향집에서의 삶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위력이 놀랍습니다.
똑같은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한 창조는 오늘도 계속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치유되는 사람들이 상징하는 바 복원되는 본향집의 가정들입니다.
창세기의 창조가 재현됨으로 치유를 통한 새창조의 구원입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얼마나 신바람나는 장면인지요.
오늘 창세기의 똑같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창조활동을 하시니
사람들은 구원되어 혼돈(chaos)의 마을은 질서(cosmos)잡힌 건강한 사람들의 마을로, 고향들로 변합니다.
여기 '구원 받았다(were healed)'라는 희랍어 단어의 의미가 깊습니다.
희랍어 'eszonto'는 육신의 치유 그 이상을 함축합니다.
초대교회의 어휘로 보면 그 말마디는 '구원의 전적인 체험(the total experience of salvation)'의 묘사로,
'심신이 모두 건강한 상태(wellness)'라기보다는 '온전함(wholeness)', 다른 말로 '귀향(coming home)'을 뜻합니다.
바로 우리의 원고향인 주님을 만남으로 온전한 치유의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구원의 고향이요 동시에 온전해지고(whole) 거룩해지는(holy)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 은총입니다.
워낙 중요한 말마디들이라 이해를 깊게하기 위해 영어단어를 넣습니다.
주님은 귀향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모두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잠시 천상의 본향집을 앞당겨 맛보게 함으로
온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으로 치유의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새삼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성전미사가 거행되는 지금 여기 이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시편 103.2)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하느님의 사랑이 물상으로 드러난 것이 자연이고 내 목숨이다.
창조성과 건강성이 빛났으니 보시니 좋았다.
그러나 악마의 부추김으로 형제를 죽이고 이기와 탐욕으로 갈라져 싸우며 질서를 벗어났으니 질병의 고통이 왔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느님의 사랑인 창조성이 왜곡되고 타락된 현상이다.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은 변함없어 고통에 빠진 생명을 구조한다.
지상에 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손길이 그것이다.
창조성을 일그러뜨린 악령을 추방하고 병마를 무상으로 치유하시는 행위가 사랑이고 구원이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교 사상의 요약이다.
예수님의 구마(악령 추방)와 치유 현상은
지상에 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고 본디의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창조성과 건강성이 꽃피고 관철되어 완전하고 행복한 생명의 상태를 이른다.
내 삶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본디 주어진 창조성이 악령의 포박과 질환 중에 있음을 뜻한다.
그 상처를 예수님께 보이는 것이 회개이며 자비를 얻는 길이다.
그래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이 겐네사렛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와 치유를 간청했다.
멀리서 소리치며 간청하는 이, 몰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는 이,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을 동원해 부탁하는 이….
그 방법은 각자 삶의 궁리에 따른다.
그들마다 구원을 받았다.
치유의 길은 자신이 병자라는 점을 아는 것이 첫째이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둘째이며,
셋째는 상처를 보이고 자비를 간청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병든 것조차 모른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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