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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남, 동쪽 건축자의 명단
느 3:16-32
16 그 다음은 벧술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아스북의 아들 느헤미야가 중수하여 다윗의 묘실과 마주 대한 곳에 이르고 또 파서 만든 못을 지나 용사의 집까지 이르렀고
17 그 다음은 레위 사람 바니의 아들 르훔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하사뱌가 그 지방을 대표하여 중수하였고
18 그 다음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헤나닷의 아들 바왜가 중수하였고
19 그 다음은 미스바를 다스리는 예수아의 아들 에셀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성 굽이에 있는 군기고 맞은편까지 이르렀고
20 그 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
21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야의 아들 므레못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엘리아십의 집 문에서부터 엘리아십의 집 모퉁이에 이르렀고
22 그 다음은 평지에 사는 제사장들이 중수하였고
23 그 다음은 베냐민과 핫숩이 자기 집 맞은편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아나냐의 손자 마아세야의 아들 아사랴가 자기 집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
24 그 다음은 헤나닷의 아들 빈누이가 한 부분을 중수하되 아사랴의 집에서부터 성 굽이를 지나 성 모퉁이에 이르렀고
25 우새의 아들 발랄은 성 굽이 맞은편과 왕의 윗 궁에서 내민 망대 맞은편 곧 시위청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로스의 아들 브다야가 중수하였고
26 (그 때에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주하여 동쪽 수문과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내민 망대까지 이르렀느니라)
27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내민 큰 망대와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오벨 성벽까지 이르렀느니라
28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29 그 다음은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
30 그 다음은 셀레먀의 아들 하나냐와 살랍의 여섯째 아들 하눈이 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자기의 방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31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인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성루에 이르렀고
32 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
느 3:16-32 /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아스북의 아들 느헤미야인데, 그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9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벧술 지역의 절반을 통치하였다. 다윗성의 남단에는 다윗대부터 안장뒤 유다 왕들의 석굴이 있었는데, 바로 그 맞은편에 이르기까지 그가 성벽을 수축하였고, 또 도성 밖의 인공호수에 이르기까지 성벽을 수축하고 계속 북향하여 군인들이 주둔한 용사의 집에 이르기까지 공사를 하였다. 17) 그 다음에 이어서 레위 사람들이 바니의 아들 르훔의 지휘에 따라 성벽을 수축하였다.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하사뱌인데, 그는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2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그일라 지역의 절반을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지역을 대표하여 공사하였다. 18) 그 다음에 이어서 레위 사람들이 헤나닷의 아들 바왜의 지휘에 따라 성벽을 수축하였다. 바왜는 그일라 지역의 다른 절반을 다스리는 자였다. 19) 그 다음에 이어서 미스바를 다스리는 예수아의 아들 예셀이 자기에게 할당된 반 구간의 성벽을 수축하였는데, 그는 성벽이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하는 곳까지 공사하였고, 그 성벽 안에는 무기고에 이르는 비탈길이 있었다. 20) 그 다음에 삽배의 아들 바룩이 자기에게 할당된 반 구간의 성벽을 수축하였는데, 그는 성벽이 굽은 곳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대문에 이르기까지 공사하였다. 21) 그 다음에 이어서 학고스의 손자이며 우리야의 아들인 므레못이 성벽을 수축하였는데, 그것은 엘리아십의 집 대문에서 그 집이 끝나는 모퉁이까지였다. 22)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들은 예루살렘의 둘레에 사는 제사장들이었다. 23)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들은 베냐민과 핫숩인데, 이들은 자기들의 집 맞은편을 공사하였다.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아나냐의 손자이며 마아세야의 아들인 아사랴인데, 그는 자기 집 가까운 곳의 성벽을 맡아서 공사하였다. 24) 그 다음에 이어서 헤나닷의 아들 빈누이가 성벽을 수축하였는데, 아사랴의 집에서 북쪽으로 굽은 곳을 지나 그 모퉁이까지 공사하였다. 25)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우새의 아들 발랄인데, 그는 성벽 모퉁이 다음 부분을 공사하였다. 이곳은 왕궁에서 불쑥 솟은 높은 망대의 맞은편으로, 형무소의 마당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바로스의 아들 브다야였다. 26) 왕궁 남동쪽의 오벨 언덕에 살던 성전의 막일꾼들은 동쪽의 샘터로 통하는 성문과 왕궁에서 돌출한 망대까지 수축하였다. 27) 그 다음 돌출한 망대에서부터 오벨 언덕의 성벽까지는 드고아 사람들이 수축하였다. 28) 왕궁의 동쪽에는 말들이 통과하는 성문이 있었고, 이 성문에서부터 북쪽으로는 제사장들이 저마다 자기 집 앞의 성벽을 수축하였다. 29) 그 다음에 이어서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 앞의 성벽을 수축하였고, 그 다음에 이어서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성벽을 수축하였는데, 그는 동쪽 성문을 지키는 자였다. 30)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들은 셀레먀의 아들 하나냐와 살랍의 여섯째 아들 하눈이다. 그 다음에 이어서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자기 사랑채의 맞은편 성벽을 수축하였다. 31) 그 다음에 이어서 성벽을 수축한 이는 말기야이다. 금 세공업자인 그는 성전 초소의 성문이 마주 보이는 성전 막일꾼들과 상인들의 집까지 성벽을 수축하고, 이어서 북동쪽의 모서리에 있는 누각까지 수축하였다. 32) 이 누각에서 양 떼가 드나드는 성문까지의 성벽은 금 세공업자들과 상인들이 수축하였다.
계속 성벽 재건에 참여한 공로자들의 명단이 이어집니다. 명단을 보면 다양한 계층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안에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성밖에 사는 사람인 여리고, 드고아, 기브온, 미스바도 성벽 재건 작업에 참여하도록 했고, 성직자들뿐 아니라 기술이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 더 나아가 성안의 모든 사람이 성전 재건에 참여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성전 재건 작업에는 권력과 재산의 유무, 신분과 성별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경건한 삶을 통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던 느헤미야가 이 재건 사업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느헤미야의 주도로 이루어진 성벽 재건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건물의 건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거룩한 공동체의 건축이었습니다.
그 다음은(16-25) 예루살렘의 남동쪽 성벽이 재건되었습니다. 샘문에서 수문에 이르는 성벽입니다. 이곳은 특히 많이 허물어진 곳입니다. 느헤미야가 이곳을 답사했을 때, 이곳은 그가 탄 나귀 한 마리조차 지나갈 수 없을 만큼 무너진 돌더미와 무성한 잡초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2:14). 한층 힘든 작업이었을 이곳을 중수한 사람들은 아스북의 아들 느헤미야, 레위 사람 바니의 아들 르훔 등입니다.
동쪽 수문과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26-32) 예루살렘 북동쪽의 성벽이 재건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수문에서부터 마문과 동문, 함밉갓 문을 거쳐 양문(羊門)에 이르는 구간입니다. 양문에서 시작된 성벽 쌓기 작업이 예루살렘 성을 한 바퀴 돌아 성벽 쌓기가 시작된 양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빈틈없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곳을 중수한 사람들은 느디님 사람, 드고아 사람들 등입니다. 베레가의 아들 므술람은 집이 아니라 “자기의 방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합니다(30). 집과 가정이 없이 어느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까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유력하고 근사한 사람들만이 이룬 일이 아니라, 비록 유력하지는 않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여 이룬 일이었습니다.
적용: 당신은 지금 당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 섬기는 일에 얼마나 협력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기 70년경에 로마에 의해 망하고 거의 1900년 동안을 방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기적적으로 1948년 5월 14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나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더불어 투철한 애국애족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느 때든 어떤 상황이든 유대인이란 자부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살 길은 하나님의 신앙과 더불어 애국애족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6월 달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애국애족의 마음을 다질 수 있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모두가 마음 들여 할 일
느 3:28-4:6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은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유다의 총독으로 파견된 느헤미야의 주도로 유다 백성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불타버린 성문들을 재건하는 공사를 시작하여 진행시켜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기록한 느헤미야 3장 전체는 비슷한 사실들의 지루한 반복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어떤 절에서는 누가 건축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절에서는 누가 무엇을 건축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절에서는 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건축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3:1에서는 이 세 가지를 다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합니다. 3:2에서는 누가 건축하였는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합니다. 3:3에서는 누가 무엇을 건축하였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3:32에서는 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건축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 이런 몇 가지 형식의 기록이 번갈아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성벽 쌓는 일에 남녀노소, 신분이나 부족의 구별이 없이 온 백성이 참여했다는 사실입니다. 3:1을 다시 보면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라고 했고, 오늘 본문 28절에서는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8절에 보면 “그 다음은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 등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향품 장사 하나냐 등이 중수하되 ...”라고 기록되어있고, 본문 32절에 보면 “성 모퉁이 누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고들이 중수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즉 대제사장 같은 고위성직자들로부터 금장색, 말하자면 세공기술자, 향품장사 등 상고들 즉 상인들까지 꼭 같이 일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성벽은 이렇게 해서 재건된 것입니다.
또 봅시다. 3:9에는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후르의 아들 르바야가 중수하였고”라고 기록되었고, 3:17에는 “그 다음은 레위 사람 바니의 아들 르훔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하사뱌가 그 지방을 대표하여 중수하였고” 라고 썼는가 하면, 29절에서는 “...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레위 지파 사람의 아들만 아니라 최고위층 행정관의 아들도, 심지어는 고위행정관 자신도 함께 성벽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남자들만 아니라 여자들도 같이 일했습니다. 3:12에 보면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 딸들이 중수하였고” 라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온 백성이 한마음으로 일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다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이 다시 서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 3장의 기록 중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은 ...”, “그 다음은 ...”, “그 다음은 ...”이라는 말이 거의 매 절마다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루살렘 성벽 전체 둘레를 쌓는데 “무엇은 누가 건축하고 그 다음 무엇은 누가 건축하고” 하는 식으로 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누가 중수하고 그 다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누가 중수하고” 하는 식으로 성벽 쌓는 일이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듯이 성벽 쌓는 일에 참여한 백성들이 각각 자기 집 앞을 맡아 쌓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유의할 만한 일입니다. 본문 28-32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셀레먀의 아들 하나냐와 살랍의 여섯째 아들 하눈이 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자기의 방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인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성루에 이르렀고 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 무엇을 말하고 잇는 것입니까? 백성들이 각각 자기가 사는 집의 맞은편 성벽부분을 책임지고 쌓음으로써 성벽이 이 빠진 데 없이 다 연결되어 차곡차곡 올라갈 수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누가 혼자서 또는 몇몇이 도맡아서 성벽을 중수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 자기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자기의 할 몫을 성실하게 행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끝 절인 4장 6절을 봅니다: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이 문장은 우리에게 세 가지 사실을 확인시켜줍니다. 첫째는, “전부가 연락되고” 한 것처럼 일단 성벽둘레 전체가 중간에 끊어진데 없이 다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한 대로 그때까지 쌓은 성벽의 높이가 계획하는 높이의 절반 정도까지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한 것과 같이 그만큼 성벽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온 백성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이 이렇게 성을 재건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숱한 난관과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본문 4:1-3에서 보듯이 산발랏이라 하는 자와 암몬 사람 도비야라 하는 자 등 이방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방해했습니다. 이들은 유다 민족이 제 땅을 되찾고 민족공동체를 재건하는 일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좇아다니면서 유다백성들이 하는 일을 중지시키려고 했습니다.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조롱하여 사기를 떨어뜨리거나 하고 있는 일에 회의를 갖게 만들려고도 했고, 공사현장을 습격하여 유다백성들을 살육하는 일까지 계획했습니다. 그럴듯한 말로 느헤미야를 유인해내서 살해하려고도 했고 동족을 매수해서 그를 모함하거나 위협하기도 했으며 흑색선전으로 그를 대역죄인으로 몰려고도 했고 동족들과 이간시키려고도 했습니다. 이러한 온갖 방해와 위협 앞에서 유다백성들은 비장한 각오와 단결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을 지키고 재건의 사역을 완성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뒤따르는 말씀들 속에서 우리는 유다 백성의 결연한 자기방어의 의지를 잘 엿볼 수 있습니다. 4:16부터 몇 절을 읽어봅니다: “그 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 (21절로 뛰어넘어서) 우리가 이같이 역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었으며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찌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하고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 유다민족공동체의 새 성벽을 세우고 지키기 위하여 한 손에는 일 한 손에는 무기, 낮에는 성을 쌓고 밤에는 파수하는 일에 있어 너나가 없었으며, 최고지도자로부터 그 종자에 이르기까지 옷을 벗고 편안히 누워 잠을 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무기를 들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백성의 영도자로서의 느헤미야의 청렴성과 솔선수범하는 헌신도 예루살렘 재건에 큰 힘이 되었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14-16의 말씀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왕 이십년부터 삼십이년까지 십이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나의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를 하였으며” 합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유다 민족의 역사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 자신과 이 나라를 위하여 예비된 소중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2018년 동계올림픽이 대한민국 평창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1988년 하계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에 이어 다시 한 번 국격을 높이고 국가발전을 기할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 국제 체전이 성공적으로 치러지도록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국내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각 분야에서는 국민 사이에 이념적 양극화와 대립이 극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소통의 부재와 합리적이고 건전한 대안 없는 상호비방만 난무하고 있습니다. 내년은 또 총선과 대선이 둘 다 있는 해입니다. 이 두 선거를 앞두고 여야 간에 비방전은 치열해질 것입니다. 일단 이기고 보기 위해 무책임한 행태로 국민의 마음을 갈라놓을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은 매우 중요한 해입니다. 이런 때 교회가 국민화합의 매체가 되고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해야 할 터인데 지금 교회는 국민들로부터 오히려 불신과 외면과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곧 국가적 위기라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금년 8.15 구국기도회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다 같이 힘껏 나라를 위한 기도의 손길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8.15는 나라를 잃었던 우리 민족에게 광복을 준 기쁨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민족이 두 상반된 이념과 두 상이한 체제로 갈라져야 했던 새로운 슬픔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북녘의 동포들을 생각하며 또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남북의 동포들이 평화공존과 자유민주국가로의 통일을 이루어가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해야 합니다.
유다 백성이 느헤미야와 함께 예루살렘 성벽을 중수한 일은 새 성전 건축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 새문안교회를 위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사십여 년 만에 새 성전 건축이라는 큰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도 느헤미야와 더불어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벽을 중수하던 그 마음, 그 정신, 그 헌신, 그 용기, 그 수고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모두가 마음을 들여 헌신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모두가 자기 앞에 있는 자기 몫의 부분을 감당해주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좀 크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아무개는 낼만한 사람이 안 낸다고 속으로 불평하거나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면 예루살렘 성벽이 올라가듯이 우리의 새 성전도 올라갈 것입니다. 그 다음은 내가, 그 다음은 네가, 그 다음은 누가 하는 식으로 중간에 이 빠진 데 없이 온 교우가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건축해야 합니다. 남의 일 구경하듯이 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직으로 시무하는 데는 은퇴가 있어도 건축헌금 바치는 데는 은퇴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하는 데 신분과 지위의 차별 없이 모두 참여했듯이 우리 새문안교인이라면 그 누구도 빠짐없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참여해야 합니다. 헌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형편을 다 아십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힘껏 마음 바쳐 하면 됩니다. 그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이 성전건축의 기회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두고두고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를 비웃고 방해한 자들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된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 같이 새문안교회의 역사에 기억될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새 성전 건축은 모두가 마음 들여 할 일입니다. 시작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식 설계계약이 지난 주 금요일에 이루어졌습니다. 새문안교회 새 성전 건축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미 절반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남은 절반을 완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마음 들여 참여하는 이 일에 큰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벽 재건이 계속됨
느헤미야 3:15-32
1. 두 몫의 일을 한 사람들
1) 아셀과 바룩(19~20절)
예수아의 아들 아셀은 이미 자신이 맡은 부분을 보수한 후에 성의 굽은 곳에서부터 그다음 구간까지 보수했고, 삽배의 아들 바룩은 이미 자신이 맡은 부분을 다 보수한 후에 또 성의 굽은 곳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까지를 더 보수하였습니다.
2) 학고스의 자손 우리야의 아들 므레못(21절)
학고스의 자손들은 에스라 때에 제사장의 가문이었으나, 자기들이 제사장의 후손임을 증명할 족보가 없어서 성전 봉사에 참여하지 못했던 자들입니다(에스라 2:61~62). 그렇게 성전 봉사에 참여하지 못한 채 약 14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이 제사장임을 인정해주지 않았음에도 실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보다 두 몫의 일을 합니다. 그들은 맡은 부분을 보수하고, 또 엘리야십 문에서부터 그다음 구획까지 보수합니다.
3) 빈누이가 한 부분을 보수한 후에(24절)
헤나닷의 아들 빈누이는 18절의 헤나닷의 아들 바왜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빈누이는 18절에서 자기가 맡은 부분을 보수한 후에, 또다시 아사랴의 집에서부터 성의 모퉁이까지 보수한 것입니다.
4) 드고아 사람들(27절)
드고아 사람들은 귀족들의 도움을 받지 못했고, 아라바아 사람 게셈으로부터 공격받기 쉬운 곳에 있었으면서도 이미 그들이 맡은 부분을 보수하였고(5절), 여기에서 또다시 다른 부분을 보수하였습니다.
5) 제사장들(28절)
제사장들도 이미 북쪽 성벽을 보수하였고(1절), 그 후에 또다시 자기들이 사는 집 맞은편 성벽을 보수하였습니다.
6) 하눈이 한 부분을 보수한 후에(30절)
하눈 역시 이미 11절에서 자기가 맡은 부분을 보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다시 다른 부분을 보수하였습니다.
2. 느디님 사람들과 금장색과 상인들
1) 느디님 사람들(31절)
느디님 사람들은 여호수아에게 거짓으로 평화협정을 맺었던 기브온 사람들과, 이방인으로 이스라엘에 사로잡혀 와서 성전 막일꾼이 된 노예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노예로 멸시와 천대를 받아왔으나 여기에서 당당히 이스라엘 백성의 대열에 합류하여 성벽 재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느디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는 한 노예 출신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는 것이 더 좋아 고난을 각오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귀환하여 성벽 재건에 참여합니다.
2) 금장색과 상인들(31절)
금장색은 어제 8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록 포로 백성이었지만 우상을 만들어 파는 직업으로 꽤 부유하게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돈벌이를 다 버리고 귀환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와서 성벽 공사에 참여합니다. 상인들은 오늘날의 무역업자들처럼 먼 곳을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한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자들이지만 자기들의 손해를 감수하고 성벽 재건에 참여합니다.
● 묵상 : 안일한 자와 충성된 자
느헤미야 3장은 성벽 재건이라는 일을 통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안일한 자와, 하나님의 일에 충성된 자를 구분하여 소개합니다.
5절의 드고아의 귀족들은 안일한 자였고, 본문 15~32에 나온 사람들은 충성된 자들입니다. 이들 모두 자기들 앞에 놓은 일을 보고 각자 자기의 생각을 따라 선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안일한 쪽으로 선택을 했고, 어떤 사람은 충성된 쪽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각자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선택한 일이 장차 심판대 앞에서 주께로부터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당장의 일만 보지 말고, 이 일을 심판하시는 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판단하십시오.
* 기도제목
1. 드고아의 귀족들처럼 안일한 자가 되지 말고, 갑절로 일을 한 자들처럼 주께 갑절로 충성된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2. 오늘 내가 한 말과 행동을 지켜보신 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다시 세울 열심
느헤미야 3:15-32 / 한마음장로교회
함께 힘을 모아 성벽을 중수하며 각자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는 가운데, 성벽의 남동쪽에 위치한 ‘샘문’과 북동쪽에 위치한 ‘마문’ 역시 중수됩니다. 개인, 가족, 지역, 지위에 따라 성벽 재건에 참여한 동기는 다양했겠지만, 동일한 목적을 따라 협력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성도의 태도를 배웁니다.
힘써 드리는 열심으로(15~27절)
성벽의 남동쪽에 위치한 샘문을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사람이 중수합니다(15절). 그다음은 벧술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느헤미야(동명이인)가 중수해 용사의 집까지 이릅니다(16절). 17절에는 레위 사람도 등장하는데, 그는 성전 일을 하면서도 성벽 재건에 참여할 정도로 열심을 냈습니다.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하사뱌도 중수했고(17절), 그의 형제들 가운데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바왜도 성벽 중수에 동참합니다(18절). 그다음은 미스바를 다스리는 예수아의 아들 에셀이 중수했습니다(19절). 15~19절에 등장하는 이들은 일정 지역을 다스리는 지도자 그룹입니다. 많은 지도자가 솔선수범해 성벽 중수에 참여했습니다. 20절에는 더욱 특별한 이가 등장하는데, 삽배의 아들 바룩입니다. 그는 한 부분을 ‘힘써’중수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해 수많은 지도자와 특정인이 마음을 다해 힘써 주의 역사를 감당했습니다. 한편 26절에는 느디님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전쟁 포로로 끌려와서 성전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노예들이었습니다. 느디님은 ‘드려진 사람들’이란 뜻으로, 다윗 때에 레위 사람들을 섬기도록 넘겨진 이들입니다(스 8:20). 여호수아 9장을 근거로 기브온 족속이 이들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낮은 지위였지만,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할 때 함께 돌아와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힘써 드린’ 열심을 귀하게 보십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십시오(롬 12:11).
두 몫의 열심으로(28~32절)
동쪽 성벽에 있었던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한 부분을 중수했습니다(28절). 이 제사장들은 두 몫 이상의 공사를 감당하며 다른 이들 못지않게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임멜의 자손 사독 역시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제사장 가족의 후손으로(스 2:37) 책임 있게 참여했고(29절), 8절에 한 번 등장했던 향품 장사 하나냐가 다시 30절에 등장해 여러 곳을 책임졌음을 알립니다. 하나냐와 같은 특수 직업 종사자는 31절에서 금장색 말기야, 32절에서 금장색과 상인들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여러 곳에서 여러 모양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열심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살람의 여섯째 아들 하눈이 한 부분을 중수했다는 30절의 기록은 ‘그 많은 아들 중에서 오직 여섯째만 참여했는가’라는 독자들의 질문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냅니다. 막내 혹은 막내에 가까운 아들 하눈 한 사람의 이름 외에는 살랍의 다른 아들들의 흔적이 보이질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을 다한다면 하나님이 이를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의 헌신과 열정이 하나님께 각인되기를 소원합니다.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며 베드로 사도는 흩어진 나그네와 같은 성도들을 위로했습니다(벧전 3:13). 고통의 과거를 씻고 소망의 미래를 빚어 갈 성벽 재건 공사에 열심을 다하여 두 몫을 행한 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 역시 하나님이 행하시는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하는 그의 백성이 되기를 다짐합시다.
그 다음은.....
느 3:15-32
* 시작 기도 / 주님... 제 안에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비존재 세력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일어나 말씀 앞에 앉았나이다. 이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나이다. 주의 보혈로 나를 덮으소서. 보혈의 능력으로 나를 씻어 정결케 하소서. 죄로 가득한 이 종에게 주의 분노로 마시고 주의 긍휼하심으로 안아주소서. 내 영혼이 평안을 얻도록 허락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나의 묵상
본문은 예루살렘 성벽의 남쪽과 동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느헤미야의 비밀시찰에서 확인된 것처럼 그 피해가 가장 심한 지역이다.
그런데 이런 지역일지라도 그곳의 성벽을 건축하는데 남에게 미루지 않고 맡은 자들이 충성스럽게 감당한 것이다.
이들이 부자든 가난하든,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이든 일반 백성들이든, 남자든 여자든, 신분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하고 협력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데 힘썼던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불과 52일 만에 이 성벽 재건을 완공할 수 있었다.
특히 오늘 본문이 포함된 3장에서 주목하게 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다음은’이다.
3장에서 이 단어는 총 31회 나온다.
이것은 성벽을 재건하는 각 구간의 공사를 맡은 자들이 한 치의 소홀함이 없이 공사를 진행하여 결국 온전하게 하나로 연결된 성벽을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성벽 공사가 한 구간 마치면 그 다음 구간을 공사하는 식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구간을 모든 사람들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시작하여 공사를 완성하였다.
그런데 어느 한 구역이라도 공사를 소홀하게 하여 성벽을 마무리 하지 못했다면 이 공사는 온전하게 완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다음은’이라는 이 단어가 주는 뉘앙스는 다른 사람들이 공사하는데 불편을 끼치지 않으면서,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공사를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한 치의 오차 없이 서로의 성벽이 잘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모여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어떤 사람은 팔의 역할을, 또 어떤 사람은 다리의 역할을 하며, 다른 사람은 몸 안에 있는 심장의 역할을, 또 다른 사람은 신장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가 유기적으로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엡 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부교역자로 섬길 때 주일학교에서 실물 설교를 자주 하였다.
퍼즐 맞추기 판을 가져다가 아이들을 향하여 세워놓고 그 중에 아래쪽에 있는 퍼즐 한 개를 빼낸다. 퍼즐 한 개를 빼내더라도 퍼즐 전체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 다음 두 번째 퍼즐을 빼내면 퍼즐이 무너질 것처럼 느슨해지면서 좀 위험해 보인다. 그리고 세 번째 퍼즐을 빼내면 위쪽에 있는 퍼즐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아이들에게 이것이 바로 교회임을 가르쳤다.
교회는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서로를 잡아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지탱해 주기도 한다.
그로 인하여 온전한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하나가 되어 세워진다.
(엡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역사는 다름 아니라 성도를 통하여 일하신다.
따라서 교회를 세우는 일이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물론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처럼 동시에 시작하여 같이 마치는 것은 아니다.
교회도 그렇고, 하나님 나라도 그렇고 주님께서 시작하셨으며 또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완성된다.
그 때까지 우리 성도들은 시대 시대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되게 감당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이 되시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터를 일구었다면 그 다음은 우리들이 성령 안에서 믿음의 기둥을 하나하나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기둥을 세우고 이 세상을 떠나면 그 다음은 우리 믿음의 후손들이 우리의 그 다음 사람들이 되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 다음’이 계속 이어지다 보면 하나님의 때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며, 그 날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이다.
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족보로써 현상적으로 보면 군데군데 벌레 먹은 곳들이 보인다.
3절의 유다와 다말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이지만, 이들은 서로 동침하여 부적절한 관계가 되어 쌍둥이를 낳게 된다.
5절의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으로 몸과 술을 파는 여자이다.
또한 룻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조차 없는 이방 모압 여인이다.
6절의 우리야의 아내는 다윗과 간음을 저지른 부정한 여인이다.
이처럼 줄기가 군데군데 벌레가 먹어 썩은 듯 보이지만, 그 뿌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결국 그 뿌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교회가 문제가 많고, 타락하고,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는 것처럼 보여도, 그 깊은 곳에서는 면면히 흐르는 맑은 물이 있다.
이는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영생을 사는 자들이 모인 공동체를 말한다.
외적인 교회는 썩은 듯 보이나 그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기에 결국 주님은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이다.
내가 곧 교회요 또한 교회를 이루는 지체이지만, 나는 완전하지 않다.
내 안에 얼마나 벌레 먹어 썩은 곳이 많은지 모른다.
그런 나는 때로는 영적으로 고통스러워 절규하며 낙심과 절망에 빠지기도 하였다.
내 안에 다말과 라합, 룻과 밧세바의 모습이 있다.
나는 그들의 죄를 다 합한 것보다 더 큰 죄로 켜켜이 싸여서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기도 한다.
나는 다말 라합 룻 밧세바와 같은 사람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고 비웃기도 하였지만, 어느새 그 손가락은 내 안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나의 죄를 보면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끊임없이 내 속에서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구쳐 내며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
내 안에 환난과 곤고, 죄책감과 망상 등 헛된 사망의 증상들이 가득 채워져 나를 사망으로 끌고 가려 한다.
나도 나를 용납할 수 없으며 나는 나를 어찌할 수 없다.
정말 나는 나를 보면 포기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나를 당신의 품에 품으신다.
그리고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쉬라 하신다.
이 은혜는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마치 무덤과도 같은 영적 혼돈과 환난 속에서 다른 것을 찾기보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기에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나는 죽은 자이나 주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주님과 연합하여 십자가에 죽고, 그와 함께 무덤에 장사되어 아버지께서 주님을 살리심과 같이 나 또한 새 생명으로 일으켜 주신다.
연휴를 맞아서 성도들이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이 들린다.
물론 여행을 갈수도 있다.
주일을 포함해서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여행을 가는 목적이 힐링하러 간단다.
그것도 자칭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하는 사람이 말이다.
그 소식을 듣는 내 영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것까지도 주님께 맡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무엇을 기대하면 내 마음이 순간 지옥으로 변하고 만다.
내가 천국을 누려야 성도들도 그 천국을 소망할 수 있다.
내가 누리는 영생의 비밀을 저들도 함께 누리길 소망한다.
그래서 ‘그 다음’ 그리고 또 ‘그 다음’ 주어진 영생을 모두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
모든 이들이 다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갖고 주님이 보았던 창세전 아버지의 영광을 보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각자에게 주어진 복음을 통하여 ‘그 다음’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소서.
땅과 만물 안에 속한 것들에 천착하여 거기에 매몰되지 않게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하소서. 평생 애벌레로 살면서 땅의 것만 먹는 자가 아니라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있는 말씀을 먹는 자 되게 하소서.
그곳에 진정한 영생이 있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짐을 알게 하소서.
비록 순간순간 벌레 먹어 썩은 것 같은 모습일지라도 나 자신을 보고 낙심하여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나를 시작하게 하신 주님을 보고 다시 담대하게 일어서게 하소서.
주님의 나라가 오기까지 ‘그 다음’ 바톤을 잘 받아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세워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격려의 리더십
느 3:22-32 / 푸른교회
이 3장에는 정작 느헤미야의 이름이 없습니다. 16절에 나오는 <느헤미야>는 동명이인인 벧술 지방 아스북의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 느헤미야의 이름이 안 나올까요? 우리는 이 대목에서도 다시 한 번 느헤미야의 사람됨과 지도자로서의 인품을 확인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의 기술과 수고와 공로를 인정하고 그걸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함께 애쓴 사람들의 노고와 수고를 알아주고 그들의 이름을 널리 알리며 그들에게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자신의 이름보다는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다 기록하여 성경에 남긴 것입니다. 그게 일하는 사역자들에 대한 최대의 격려고 배려가 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간 구간을 맡아 수고한 사람들의 대표 75명의 명단을 빠짐없이 다 기록하여 역사에 남기면서도 자신의 이름은 거기서 뺀 것입니다.
이는 느헤미야가 얼마나 남을 생각하고 남을 배려하는 리더십을 가진 지도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지도자는 함께 일하는 사역자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갖게 합니다.
엘머 타운스(Elmer L. Towns)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을 훌륭한 지도자로 만드는 8가지 법칙>에서 신뢰성을 쌓는 여섯 가지 전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모범이 되라 (남이 따를 수 있을만한 역할 모델이 되라)
둘째, 열정을 표현하라(그들의 마음속에 불을 붙이라)
셋째, 낙관적으로 생각하라 (그들의 정신에 꿈을 심으라)
넷째, 긍정적인 경험으로 인도하라 (승리감을 맛보게 하라)
다섯째 기술을 갖추게 하라 (그들의 손에 장비를 쥐어 주라)
여섯째, 훌륭한 결정을 내려라 (신뢰감을 심어 주라)
이를 느헤미야의 리더십과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당신도 느헤미야처럼 신뢰받는 리더십을 발휘해 보십시오. 남을 격려하고 인정하며 자신의 이름은 내려놓는 겸허한 리더십이 지도자로서의 느헤미야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인품임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적용>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리더십은 어떤 것입니까?
-성벽 중수에 수고한 모든 사람들의 명단에서 느헤미야의 이름이 빠진 것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느헤미야와 이 시대 지도자들의 리더십을 비교해 보십시오.
<기도>
주님, 느헤미야는 실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보다도 함께 일하는 다른 사람들을 더 생각하고 배려하고 격려하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를 신뢰했고 따랐고 하나되어 그 주어진 과제를 단기간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실로 이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리더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름보다도 남의 이름을 기록하여 그 명단 자체가 곧 이스라엘의 역사가 되게 한 느헤미야야말로 이 시대 저희들이 다 본받아 마땅한 아름다운 지도자상임을 결코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주님께서 불러주시는 이름
느 3:15-32
주님,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은 배농장에 가서 봉사합니다. 능숙한 손길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원하는 마음입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영혼을 덮어 주옵소서.
오늘도 진리를 보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주해)
오늘 본문은 샘문(15절), 수문(26절), 마문(28절), 동문(29절), 함밉갓문(31절) 그리고 다시 양문에 이르기까지의 성벽 재건 진행과 이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자들의 명단을 말한다.
(나의 묵상)
성도는 벽을 쌓는 사람들이다.
이 벽은 세상의 것이 넘쳐 흘러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전(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할 성도들의 마음이 세상으로 이끌려 나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말씀 묵상을 이 성벽 세우기라고 생각한다.
매일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를 붙듦으로 세상 것으로 오염된 내가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되는 은혜를 입는다.
또 구원을 받은 자임에는 분명하지만, 육체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내 안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시달림을 당한다. 바로 탐심과 자기의와 자기주장의지가 솟구치고 이를 통해 죄의 세력이 역사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죄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주님 안에 거할 수 있게 된다.
매일의 성벽 세우기가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귀환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아시기에, 7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포로지에서 안주할 수도 있지만, 기대보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더 컸을 고향으로 담대히 돌아갈 것을 결심한 그 백성들을 사랑하시기에, 성전을 세우게 하시고, 그 성전을 둘러싼 성벽을 세우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아시기에 느헤미야를 통해 이 일을 일사분란하게 해 나가도록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그리고 감사하고도 감사한 것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불러주시는 것이다.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공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계속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구체적인 개인의 이름뿐 아니라, 공동체로 언급되는 이들의 이름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다 기억하실 것이다.
성문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임을 암시한다.
매일의 말씀으로, 세상에 대해 부지런히 성벽을 쌓아가는 우리들의 이름도 주님께서 기억해 주실 것을 믿는다.
(묵상 기도)
주님,
성벽 재건에 자발적인 성도들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의 이름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지체들의 이름도 있습니다.
그 얼굴들을 떠올려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이미 아들에게 맡기신 영혼들임을 저희들이 알고 있으니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다 불러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모든 일 역시 성령께서 주관하심을 믿으며 나아가니 늘 안심합니다.
오늘도 든든하게 성벽을 세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