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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여협과 무심 공자
검을 뽑아든 맏이의 눈엔 살기가 등등했다. 좀처럼 등에 메고 있는 검에 손을 대지 않으려 하던 그가 검을 높이 쳐들자 모두들 긴장했다. 귀도 허재의 공격을 그저 피하기만 하던 맏이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쉽게 검에 손을 대지 않는 그를 두고 반신반의했었다. 자신이 없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막강한 실력의 소유자였기에 그럴 것이라고.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의 검날이 허공을 갈랐다. 허재의 도법(刀法)도 보잘것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맏이가 검을 그어대자 허재의 도법에도 빈틈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초수가 실력대로 발휘되지 않아 속도로 일정하지를 못했다. 허재가 자신의 약점을 무마시키려는 듯 맏이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야압!"
허재의 칼이 맏이의 귀 옆을 스쳤다. 서로 엇갈려 몇 걸음 떨어졌던 이들은 다시 자세를 추스리고는 맞붙었다.
"검을 받아랏!"
맏이의 검은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럽게 허재를 몰아붙였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맏이가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허재도 위로 솟구치며 칼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쨍! 검과 칼이 공중에서 불꽃을 튀기며 작열했다.
한편 허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도객 중 맏이인 무도(無刀) 맹랑(孟浪)이 곧게 상체를 펴고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터억 땅을 구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우리 같은 맏이끼리 한 번 붙어보는 게 어때? 그대가 허재와 싸운다면 체면이 서질 않지!"
이말에 십팔검객 맏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 맹랑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10여 년 전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맹랑이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술에 만취가 된 그는 중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며 비오는 거리를 헤매였다. 사람들이 이런 맹랑을 두고 한마디씩 던졌다.
"저 사람 미쳐버린 거 아냐? 미친 게 틀림없어!"
그도 그럴 것이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거리를 비칠대며 걷고 있으니 사람들의 눈에는 정상적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맹랑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엔 막연한 두려움도 생겨났다. 아무래도 무슨 큰 일을 치를 사람인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그는 다시는 칼을 잡지 않았는데 칼은 쓰지 않아도 손에 칼을 든 것과 마찬가지로 싸움에 임했다. 또한 사람들을 그때부터 그를 무도 맹랑이라 불렀다.
역시 맹랑의 손엔 칼이 들려 있지를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십팔검객 맏이가 넌지시 그에게 말을 건넸다.
"무도 맹랑, 그댄 항상 마음속에 칼을 품고 다니는가?"
맹랑이 두어 번 고개를 저어댔다.
"흠, 내 마음속에 칼이 있다고? 천만에, 단지 그대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따름이지. 난 칼을 원하지 않아."
"어디 그럼 시험을 해볼까?"
맏이가 아래로 떨어뜨렸던 검을 바로 잡으며 그를 겨냥했다. 맏이의 걸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초식 중 비교적 단순하면서도 무리가 없는 것을 선택하려 했다. '횡도탈애(橫刀奪愛)'라는 초식이었다. 그는 이 맹랑의 도법을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칼도 들지 않은 맹랑에게서 도법을 읽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맹랑이 맏이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맏이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는 그로서는 피하고 싶지가 않았다.
"우얏!"
곧 두 사람이 공중에서 격돌했다. 높이 치솟은 두 사람이 엇갈리며 강한 빛이 번뜩였다. 그것은 금속성의 물체가 서로 맞부딪칠 때 나는 소리와 빛이었다. 그렇다면 맹랑 역시도 칼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의 동작이 하도 빠르고 맹렬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맏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금속성의 물체에 막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봐서는 그도 칼을 쥐고 있는 게 분명했다.
"훌륭한 도법이군!"
맏이가 검을 왼쪽 어깨 위로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맹랑 역시도 맏이의 실력을 인정했다.
"훌륭한 검술이야."
그런데 갑자기 맹랑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입과 귀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피를 본 십도객(十刀客)들이 발악을 하며 맏이에게로 달려들려고 했다.
"가만있어!"
맹랑이 이들을 제지했다. 맹랑의 매서운 눈빛은 맏이를 응시한 채 조금도 흔들리지를 않았다. 십도객들이 맹랑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십팔검객 맏이가 서 있었는데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그의 낯빛은 맹랑보다 더욱 창백했는데 십도객들은 그 이유를 곧 알아차렸다. 맏이의 가슴엔 빗금을 그어댄 형상의 칼자국이 나 있었고 어깻죽지는 살점이 달아나버려 솟구친 피로 옷이 뻘겋게 변해버렸다.
이번엔 십팔검객들이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이들은 아주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일명 십팔거사(十八居士) 노절천(怒折天)이라 불리는 울부짖음이었다. 강남에서 널리 알려진 외침소리로 웬만한 종소리보다 더한 울림으로 퍼졌다. 반벽산장을 뒤덮을 정도의 이 외침에 모두들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지었다.
십팔검객이 이처럼 힘을 내보이자 십도객들도 가만있지를 않았다. 이들 역시 동시에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더욱 우렁차 구중천을 진동시킬 정도였다.
겉으로 봐서는 그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유기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옆에 있던 딸 유일민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짐승들의 포효소리와도 같은 이들의 괴성에 딸이 두려움을 느낄까 봐 근심이 된 모양이었다. 한편 옥총은 얼굴색이 약간 변하는가 싶더니 이내 원래의 상태를 되찾았다.
그러나 왕중양은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고 가슴이 요동치는 기운에 몸이 한껏 달아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도 목청을 높여 어떠한 소리라도 제압할 수 있는 고함을 내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왕중양은 쉽게 그런 충동에 자신을 내맡길 수가 없었다.
챵바가 무심에게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던졌다.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아는가? 늑대의 울음소리라도 흉내내려는 건가?"
무심이 씨익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들의 고함소리에 가장 경멸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귀낭자였다. 또한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협은 오히려 관심이 없다는 투로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십팔검객들이 쥐고 있는 검은 모두 열여덟 개였다. 이 검들은 긴 것과 짧은 것 그리고 더러는 부러진 단검(斷劍)까지 다양했다. 또한 녹이 슨 수검(銹劍)과 연검(軟劍)이 눈에 띄는가 하면 중검(重劍)도 보였다. 이들은 각기 다양한 검을 움켜쥔 채 부동자세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반면에 십도객들은 열 자루의 칼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칼을 한데 모아 무너뜨릴 수 없는 장벽이라도 세워놓을 태세였다.
십도객 중 하나가 그다지 크지 않은 소리로 이렇게 주위를 일깨웠다.
"십지도진(十地刀陳)이다!"
이 십지도진이란 대협 소소(簫嘯)가 만든 진법인데 공교롭게도 그는 한 번도 써본 일이 없었다. 이유는 그의 수하에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는 도객이 열이 채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소도 써보지 못했다는 이 십지도진이 십도객에게서 불리워지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십팔검객들이 사못 긴장하는 듯했다.
"십지도진을 조심해라!"
맏이가 경각심을 주기 위해 이들에게 급히 일렀다. 그리곤 자신이 몸을 솟구쳐 십지도진을 이루고 있는 칼날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야아 !"
그러나 맏이는 십지도진을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그는 십지도진 안으로 채 들어가지도 못한 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뒤집히듯 날아와 버렸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이미 맏이의 몰골은 아까보다 더 형편없어졌다. 옷은 주린 맹수가 달려들었는지 갈기갈기 찢어져 너덜거렸고 상처가 몇 군데 더 깊이 나있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검을 높이 쳐들었다.
"어서 검성직천(劍星織天)을 펼쳐라!"
]그러자 나머지 십팔검객들이 맏이를 따라 십지도진을 향해 와 하며 달려갔다. 이 검성직천이란 말 그대로 검빛이 별빛으로 되어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천라지망(天羅地罔)을 만드는 초수였다. 대개의 검객들은 각기 자기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검술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무리로 조화되기가 어려운 점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검성직천은 이 조화되기 어려운 각기의 검술들을 한데 모을 수 있게 하는 위력을 지닌 초수였던 것이다.
십지도진을 작파하기 위해 달려든 검성직천. 이십여 자루나 되는 검과 칼이 서로 엉키어 피를 튀는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대결을 쭉 지켜 보던 유일민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져갔다. 아직 세상의 험악함을 모르고 있는 탓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보자 속까지 울렁거렸다.
'이 사람들은 왜 목숨까지 내걸고는 싸우려 하는 것일까? 강호란 이토록 서로를 죽이는 곳이란 말인가?'
그녀는 겉잡을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옆에 있는 아버지 유기에게 매달렸다. 가뜩이나 딸의 반응을 우려하고 있던 유기로서는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만약 죽게 되면 이 애는 누굴 믿고 살아갈 것인가?'
그는 속으로 한탄을 하고 있는데 무심이 챵바를 툭 치며 물었다.
"그대 생각에는 저 사람들의 법수가 어떤 것 같은가?"
챵바가 요란스럽고 어지럽기만 싸움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하도 복잡해서 구경이나 제대로 하겠나?"
챵바의 시큰둥한 태도를 무심은 이해했다. 그 역시도 챵바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생각을 품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검술이든 검법이든 복잡하면 할수록 정신과 힘만 소모될 뿐이라 믿었다. 상대에게 숨돌릴 틈도 주지 않은 채 단칼에 베어버리는 초수야말로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공격이 아니겠냐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싸움은 그러나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여기저기서 칼과 검이 마찰할 때마다 챙챙!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또 피가 사방으로 튀고 목이 달아나는 참극까지 벌어져 그야말로 일대의 살육전이 이어지고 있는 판국이었다.
유일민은 더 이상 눈뜨고 볼 수가 없었는지 유기의 옷깃을 잡아 당겨 얼굴을 감추고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왕중양의 가슴엔 다른 의미의 떨림이 자리했다. 이들처럼 고함을 내지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지금은 그런 불길이 아닌 살육에 대한 일종의 혐오감이었다.
유기가 해불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해불개 네가 지난번 반화대회에서 나를 모욕했는데 그 대가는 알고 있겠지?"
그러자 해불개가 입을 실룩거리더니 받아쳤다.
"이거 안되겠는데. 그런대로 낯 붉히지 않고 살려고 했는데 정말 귀찮게 구네. 죽지 못해서 안달이라도 난 거냐?"
"뭣이, 네가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게냐? 네가 아무리 강남 흑도의 우두머리라고는 하지만 내게는 소용이 없다!"
유기의 도전에 해불개가 바람소리를 내듯 피식 하고 웃었다.
"후후, 흥! 건방진 소리. 넌 당장 죽고 말 것이다. 후회할 사이도 없이 말이다. 후회할 사이도 없다고!"
사람들은 해불개가 왜 후회할 사이도 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지 의아해 했다. 왠지 숨겨진 속뜻이 있는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해불개에 맞서려던 유기가 자신의 옆구리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우욱!"
유기가 양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칼날이었다. 어느샌가 옆에 있던 옥총이 그의 옆구리를 칼로 찔렀던 것이다.
"아버지!"
유일민이 유기를 안으며 오열을 터뜨렸다. 양손이 피투성이로 붉게 물들어진 유기는 두 눈을 흡뜨며 옥총을 노려보았다.
"네, 네 놈이…… 네 놈이 이럴 수가…… 있느냐!"
옥총이 꺼져 가는 유기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입을 놀렸다.
"반화대회 후에 내가 왜 그렇게 너를 대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라고. 해불개 형님은 내 뺨을 몇 대 갈겼을 뿐이지. 하지만 난 해불개 형님에게는 원한이 없어. 아니 나를 죽인다고 해도 절대 원한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기는 숨이 막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는 왕중양에게로 사그라드는 눈길을 주었다. 왕중양이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는 듯싶어 다가갔다.
"유 장주님!"
유기가 다시 어렵게 입술을 떼려고 했다.
"한 가지…… 난 죽어도 마음…… 마음을 놓을 수가 없네."
그가 급히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본 왕중양이 얼른 등을 받쳐주었다.
"염려마시고 어서 말씀하시오."
"내 딸을 좀……."
유일민은 유기를 부여잡은 채 그저 울기만 했다. 왕중양이 그녀를 한 번 돌아보고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유기가 십팔검객 맏이에게 띄엄띄엄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서…… 어서들 피하시오. 당신들은 십도객의 적수가…… 못 되오."
그리곤 그만이었다. 유기는 목을 아래로 꺾은 채 더는 말을 잇지를 못했다.
유기가 죽자 해불개의 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하! 반벽산장의 인간들은 들어라! 이제부터 너희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이 해불개의 노복들임을 명심하여라. 어느 한 놈이라도 내 말을 거역한다면 몰살시키고 말겠다!"
그러나 반벽산장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하나 해불개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해불개를 강물에 처넣을 듯이 덮쳐 들었다.
"이것들이!"
해불개가 그중 한 노인의 머리채를 낚아채더니 눈을 부라렸다.
"이 늙은 두상이 우기를 따라 지옥에 가지 못해 환장을 했구나!"
그가 노인의 목을 단번에 꺾어 비틀었다. 노인이 맥없이 해불개의 다리를 타고 주르르 미끌어졌다.
"이놈 해불개야! 네 죄가 벌써 하늘에 이르렀는데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또다시 살인을 저지른단 말이냐?"
이때 왕중양이 불쑥 끼여들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해불개의 안중에는 왕중양이 제대로 된 적수로 여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건성으로 왕중양을 확인한 해불개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왕중양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여협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감히 해불개에게 대든 왕중양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있는 눈치였다.
왕중양이 해불개를 치려고 일어서려는데 유일민이 붙잡았다. 그녀는 겁먹은 눈으로 왕중양의 팔에 매달린 채 부들부들 떨며 간청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아요. 제발!"
어린 유일민을 바라보는 왕중양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감았던 눈을 뜨고는 해불개에게로 천천히 다가간 그가 위엄 있게 말했다.
"네 이놈, 남은 파리목숨으로 알아도 제 목숨은 소중하다고 생각할 테지!"
"네가 바로 그 유운장 놈들에게 혼찌검이 난 놈이더냐? 한 번 목숨을 구했으면 고맙게 알고 있을 것이지 왜 또 나서는 것이냐? 오냐, 어디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
독이 잔뜩 오른 해불개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가슴을 졸이기 시작했다.
"젊은이, 그와 맞서지 마오! 해불개는 악독한 사람이오."
누군가 왕중양을 말렸지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또한 얼굴을 가린 여협 역시 왕중양의 행동을 제지하고 싶었지만 내버려두기로 했다. 왕중양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과연 해불개를 물리칠 수 있을지…….
해불개는 왕중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난번 반화대회에서 입은 중상으로 왕중양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을 거라 믿었던 것이다. 회복이 되었더라도 완벽한 자기 실력은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원래 그의 실력이라고는 대단한 게 아니었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넌 지금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죽더라도 아쉬워할 사람은 없다!"
말을 마친 해불개가 서서히 손을 들어 앞으로 절도 있게 내밀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오룡수(熬龍手)'였다. 이 오룡수는 손을 용의 발톱처럼 구부린 채로 움켜쥐기도 하고 때론 할퀴기도 하는 초수였다. 해불개가 왕중양을 잡아채려고 힘껏 손을 휘어 쳤다.
왕중양이 얼른 몸을 뒤틀며 해불개의 손아귀를 피했다. 이를 조심스럽게 주시하고 있는 여협의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을 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무심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번엔 어림도 없다!"
옆걸음질을 치면서 기회를 엿보던 해불개가 몸을 휙 날리면서 왕중양의 손을 잡아챘다.
"으악!"
그런데 왕중양의 한쪽 팔을 움켜쥐었던 해불개가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왕중양의 팔은 불덩이와도 같았다. 그는 손바닥으로부터 심장까지 들쑤시고 들어오는 화기에 당황했다.
"우습군!"
하며 해불개를 내려보던 왕중양이 선천신공(先天神功)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는 선천신공이라 불리우는 내공심법이었다. 신공심법(神功心法)은 천하지성(天下至聖)의 심법으로 그것은 전후좌우가 온통 물이고 얼음이 없는 곳에서 공을 닦아야 하는데 태호에서 왕중양은 정말 우연하게 바로 그런 곳에 떨어졌었다. 호수 가운데 있는 거북의 등 위로 떨어진 왕중양은 그곳에서 이 선천신공을 비로소 터득했던 것이다.
해불개가 깜짝 놀라며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왕중양의 공격이 날아왔다. 조금만 늦었더도 해불개는 일격을 맞고 다시 허물어졌을 것이다. 얼른 양손으로 왕중양의 공격을 막아낸 해불개가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탁! 탁! 탁!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내밀며 밀었다 물러섰다는 주고받았다. 해불개는 그러면서 틈만 나면 왕중양의 손을 잡아채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는 왕중양의 몸 어디든지 잡히기만 하면 단번에 찢어버릴 태세였다.
"제법이군!"
해불개가 왕중양의 눈을 응시하여 중얼거렸다. 그리곤 잽싸게 몸을 날려 왕중양의 팔을 잡으려 했다. 해불개의 손길이 다가오자 왕중양이 손가락을 탁 튕겼다.
"이크!"
해불개가 팔을 부여잡으며 옆으로 비틀거렸다. 갑자기 어깻죽지까지 쩡 하고 울리는 통증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해불개는 조금씩 왕중양에 대해 두려움을 품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이 늘었군. 그런데 왜 남의 일에 참견하고 나서려는 게지?"
왕중양은 대답 대신 슬쩍 미소만 내비쳤다. 이제서야 여협은 안심을 하는 기색이었다. 이제는 여유롭게 두 사람의 싸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해불개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높이 쳐들었다. 무슨 꿍꿍이 수작을 하려는 것인가. 왕중양이 약간 경계를 하며 한 걸음 다가섰다. 해불개의 손아귀로 칼 한자루가 슝 하고 날아들었다. 수하 중 누군가가 재빨리 칼을 해불개에게 던져 준 것이다.
"어디 이 칼도 막을 수 있나 볼까?"
그가 곧 흙바람을 일으키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땅에서는 뿌우연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얏!"
해불개가 질풍처럼 돌진해 오자 왕중양은 가볍게 훌쩍 몸을 띄웠다. 해불개의 머리 위로 치솟은 왕중양이 아래로 내리기 전 얼른 그의 등짝을 발로 찼다. 왕중양의 발차기에 해불개가 저만큼 허겁지겁 밀려가다가 섰다. 왕중양은 사뿐히 땅에 내려앉은 후였다. 해불개가 급히 몸을 돌렸는데 잔뜩 기가 죽은 표정이었다.
"자, 받아랏!"
해불개가 죽기살기로 다시 왕중양을 향해 칼을 뻗으며 달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이 몸을 날린 왕중양은 해불개의 머리 위에서 마음껏 무공을 펼쳤다. 이번에는 뒷발로 해불개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해불개가 앞으로 풀썩 엎어졌다.
칼끝으로 몸을 지탱하며 겨우 일어선 해불개의 눈가엔 불꽃이 튀었다. 그는 지금 참을 수 없는 치욕에 이를 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강남 흑도의 우두머리라고 떠벌이고 다니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처지였다. 만약 해불개 자신이 전의를 상실한 채 칼을 떨어뜨린다면 강남 흑도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돌아갈 게 불 보듯 뻔했다.
"이아아!"
칼을 앞으로 모아 쥔 해불개가 다시 왕중양을 향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갔다. 새처럼 하늘로 날아오른 왕중양은 아예 멀찌감치 몸을 날려 해불개와 제법 떨어진 곳에 내렸다. 마구 칼을 휘두르던 해불개가 사라진 왕중양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두리번거렸다.
이쯤하면 무릎을 꿇고는 용서를 빌 것이라 생각한 왕중양이 다시 몸을 새처럼 띄워 해불개에게로 날아들었다. 해불개가 쓰는 도법은 같은 무리들이 부리는 초수와는 달리 사악하고 무자비한 살기를 띠고 있었으므로 왕중양은 한편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해불개 바로 앞으로 소리 없이 내린 왕중양이 미소지었다.
그런데 아직 해불개의 공격은 끝이 난 게 아니었다. 때를 기다려 해불개가 칼로 왕중양을 내리쳤다. 그는 왕중양이 이미 손가락 하나를 곧추 펴 높이 쳐드는 것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쨍! 하는 쇠붙이 소리가 나며 해불개의 칼이 허공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정말 멋진 솜씨군!"
구레나룻을 기른 챵바가 외쳤다.
그 옆에서 함께 팔짱을 낀 자세로 서 있는 무심 역시도 감탄을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해불개, 어서 칼을 내려놓으시지?"
챵바가 왕중양 대신 해불개의 가슴을 들쑤셔 댔다. 그러나 해불개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곧 하얗게 질려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곤혹스런 낯빛으로 아직까지 높이 쳐든 상태로 있는 자신의 칼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물러선다면 강남 흑도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마지막이다. 기필코 너의 목을 치고 말리라!"
해불개가 결사적으로 칼을 휘둘러댔다. 왕중양이 기묘한 보법(步法)으로 공격을 피하자 또 챵바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니, 저건 또 무슨 보법이지?"
그말에 무심도 왕중양의 걸음에 눈길을 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일종의 성진보법(星陳步法)같기도 한데 모르겠어. 말만 들었지 아직 보지를 못했거든."
무심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왕중양의 걸음걸이를 살피기에 바빴다. 사실 왕중양 자신도 지금의 이 보법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아니 어떤 특정한 보법이라는 생각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단지 자연스럽게 발을 옮겨놓고 있을 따름이었다. 바로 선천신공의 절기가 몸에 들어오면서 생겨난 새로운 보법이었다. 한순간도 왕중양의 동작을 놓치지 않고 있던 무심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인형(仁兄)은 무공이 실로 대단하시군요. 정말 탄복하였소이다."
무심이 나서자 해불개는 기회라도 만난듯 한쪽으로 얼른 물러섰다.
"그런데 그 무공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다시 무심이 물어오자 왕중양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선천신공이라 하지요."
이말에 모두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선천신공을 연마하려면 물 안에서만이 가능하다는 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언제인가 소소라는 대협이 우연한 기회에 수정궁에 오랫동안 머물게 되었는데, 비로소 그 무공을 익힐 수 있었다는 사실도. 선천신공은 매우 신기한 무공으로 무궁무진한 힘을 갖게 하는데 소소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익힌 사람이 없었다.
해불개의 안색도 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창백해졌다.
"이거 덕분에 견식을 넓히게 되어 고맙군요."
무심이 탁탁 박수까지 쳐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챵바가 무심에게 물었다.
"그럼 저 선천신공인가 하는 것도 사대 기이한 무공 속에 드는가?"
"물론이지. 사대 천하기공에는 그밖에도 유운장의 합마공 대리 단씨의 일양지, 동해 도화도의 탄지신공 등이 있다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이 선천신공을 천하 사대 기이한 무공 속에 넣기를 싫어한다는 거야. 그 연유는 사람들이 아무리 애를 써봐도 좀체 익힐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지."
무심이 설명을 해주자 챵바가 화를 버럭 내며 따져 물었다.
"거짓말! 선천신공이 익히기 힘든 무공이라면 어째서 저 사람은 능숙하게 하는 거요?"
어이가 없어진 무심이 입을 헤 하고 벌리자 챵바의 주먹이 대뜸 날아들었다.
"어쿠!"
옆으로 몇 걸음 밀려가던 무심이 몸을 세우며 챵바에게 따끔한 충고를 했다.
"이 사람아,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리고 그 주먹 좀 잘 다스리라고!"
그런데 난데없이 해불개가 무심의 말을 걸고 넘어졌다.
"공자께서도 이 일에 간섭할 의양이라면 좀 공평하게 처신을 하시오."
해불개의 태도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윽박지르며 나설 것이 분명했으나 때가 때인 만큼 그도 조심을 하는 눈치였다.
무심이 해불개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한탄조로 중얼거렸다.
"몽골의 대군이 이미 변경을 들이치고 있는데 당신들 송나라 임금은 임안에서 향락에만 젖어 있으니 이를 두고 망국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 그런데 그런 송나라를 위해 목숨들을 바치려고 하니 이 또한 한심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오?"
"그게 무슨 소리요?"
하며 무심에게 따지듯 나선 사람은 십팔검객 중 성미가 고약하게 생겨먹은 한 사내였다.
"다른 뜻은 없소. 준마는 영웅에게 바치고 미인은 지기에게 준다는 말도 있기에…… 당신들만 좋다면 내가 추천하여 당신들에게 몽골국의 큰 벼슬을 내리게 해주겠다는 말이지요."
그러면서 슬쩍 해불개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해불개의 눈동자가 요리조리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해불개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판단한 무심이 다시 덧붙였다.
"해불개 총타주님께서 몽골 대군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시겠다고만 하면 저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도록 내 도와줄 수도 있소. 사실 나 혼자서라도 문제는 없지만 말이요."
무심이 내민 손가락 끝에는 왕중양을 비롯해 반벽산장의 사람들이 걸려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해불개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고 나왔다.
"뭐라고! 나더러 몽골놈들의 개노릇이나 하라고? 이놈아, 이 해불개를 어떻게 보고 하는 수작이냐? 나 해불개는 지금까지 떳떳한 대장부였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내가 사람 같지 않은 놈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만 그래도 대장부야. 내가 남의 집 대문 앞을 기웃거리며 문전걸식은 할지언정 몽골 놈들에게 빌붙는 짓은 못한다!"
"어허, 이거 감히 누구를 욕하는 거야?"
"바로 네 놈을 두고 하는 욕이다!"
무심의 으름장에도 해불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해불개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 오히려 흐뭇하게 이들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안되겠다. 먼저 저 놈의 모가지부터 비틀어야겠다!"
느닷없이 긴 팔을 쑥 내민 무심이 해불개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원공삼격(猿公三擊)이다!"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바로 얼굴을 가린 여협의 외침이었다. 왕중양은 원공삼격에 대해 알 수는 없었으나 워낙 여인의 외침이 다급하여 대단한 무공일 거라 추측했다.
무심은 여협이 말한 그 무공을 앞세우고는 해불개를 덮쳐 들었다.
"받아랏!"
무심의 공격은 무서웠다. 돌풍이 인듯 그의 손놀림에 흙먼지가 풀풀 일었다. 해불개는 그의 공격을 두어 번 피하더니 곧 옷 앞자락을 찢기고 말았다. 가슴팍이 서늘해진 해불개가 뒷걸음질 쳤다.
"타인은 유심(有心)이지만 이 공자는 무심(無心)이다!"
이렇게 주문을 외우듯 지껄인 무심은 틈을 주지 않고 해불개에게로 달려갔다.
"윽!"
그의 장에 해불개는 그만 어깨를 들이쳤다. 어깨가 으스러지는 아픔과 함께 해불개가 미끄러지듯 뒤로 밀려났다. 부서진 어깨를 부여잡고는 해불개가 부르짖었다.
"죽어도 난 몽골놈들의 개노릇은 안 하련다!"
무심이 회심의 일격을 날리려고 하는데 왕중양과 여협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심 앞에 먼저 당도해 그를 막아 선 것은 챵바였다.
"너까지 나를 막을 셈이냐? 넌 내 말을 따라야 한다는 걸 잊었어?"
챵바를 노려보는 무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건 나도 알지. 사부님께서 공자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으니까. 하지만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방관하라는 말씀은 안 하셨소. 우리에게 투항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일 수는 없어. 그건 대장부로서 할 짓이 못되오."
"집어치워. 투항하지 않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야 해!"
슬쩍 왕중양과 여협을 확인한 무심이 챵바를 슬쩍 떠보았다.
"이봐, 저 왕중양이란 사람이 바로 대장부가 아니라고. 저 여인 역시 마찬가지지. 그러니 자네가 한 번 겨루어보는 게 어때?"
"대장부가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인까지는 너무 하잖아?"
챵바가 떫떠름한 얼굴을 그쪽으로 돌렸다. 무심은 챵바를 부추겨 이들을 치려는 속셈이었다.
"그럼 저 사내와 먼저 붙어보지?"
챵바 역시 왕중양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던 차라 은연중 한 번 겨뤄보고 싶었다.
왕중양에게로 다가간 챵바가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왕중양이 부동의 자세로 고개를 슬쩍 돌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
"대단한 기로군!"
왕중양이 비꼬는 투로 빈정대자 챵바가 열을 올렸다.
"내 주먹을 피하다니?"
초원에 있을 때 큰 황소를 때려눕힌 적도 있는 챵바였다. 그런데 왕중양은 눈썹 하나 까닥 하지 않고 자신의 주먹을 옆으로 흘려보냈던 것이다. 챵바가 다시 주먹을 끌어쥐고는 왕중양에게 일격을 날렸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왕중양은 두 다리가 땅에 붙박힌 듯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들의 싸움에서 시선을 뗀 무심이 여협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도대체 저 여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왕중양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과연 누구일까. 손에 든 장검을 봐서는 무술 역시 만만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가려진 얼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그는 다른 일은 몰라도 여인의 관해서는 무심코 지나쳐본 적이 없었다. 미인을 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고야마는 성미이기도 했다. 무심으로서는 여인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과 싸운다면 기회를 봐서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까지 품었다. 그런데 여인은 좀체 앞으로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무심이 왕중양에게 눈길을 주고 있는 여협에게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무심이 인사드립니다."
무심이 공손하게 예를 올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인을 고르는 것은 준마를 선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색깔과 용모 그리고 재간과 목소리 심지어는 걸음걸이는 물론 잠든 모습에 이르기까지 무려 열 가지나 되는 기분에 적합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눈엔 웬만한 여인은 들어차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 여협에게서는 부드럽고도 진정한 여인의 품성이 느껴졌다. 비록 면사포에 얼굴이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대는 저 왕중양과는 구면인가요?"
무심이 묻자 여인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의 마음속에는 괜한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단순히 구면이라고만 했는데도 마치 그들이 연인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더욱이 왕중양을 적수로 생각하고 있기에 그 질투심은 더욱 사납게 일었다.
"왜 얼굴을 가리고 계시지요? 강호에 다니시기에 불편함이 많이 따를텐데……. 또한 그대의 용모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소?"
무심의 말투는 제법 차분했으며 여인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 번은 마음에 드는 여인을 방에 가두어 놓고 사흘 낮밤을 설득한 적도 있는 그였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마음을 닫아두고 있던 그녀 역시 나중에는 스르르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반년도 못 되어 무심은 그녀를 차 버렸다. 그런 재주를 지니고 있는 무심이였기에 여협이 꼭 제 손으로 얼굴을 드러내게 하리라 자신을 했다. 그런데 어떤 달콤한 말로도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다. 잠시 여
인의 동태를 살피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저 왕중양은 사람은 좋은데 한 가지 아깝게도……."
슬쩍 말꼬리를 흐리자 여협이 물어왔다.
"아깝다니요? 무슨 말이죠?"
무심의 입꼬리로 회심의 미소가 짙게 떠올랐다. 슬슬 자기의 계략에 넘어가고 있다고 판단한 그가 여협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대도 상술(相術)에 대해 알고 있겠지요? 관상을 보는 것 말입니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압니다만 내 보기엔 저 공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을 거느릴 수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아깝게도 그다지 오래 가지는 못할 운명이지요."
"그래요?"
여협의 반응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분명 왕중양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는 게 확실했다. 계속 헛손질을 하며 왕중양 앞에서 허둥대고 있는 챵바를 무심코 돌아보던 그가 다시 입을 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저 왕중양은 나중에 자신의 신세 또한 비참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인과의 정 또한 품을 수 없게 되는 건 물론 폐인으로 남을 뿐이지요."
"당신의 말이 맞다면……."
여협의 눈동자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졌다. 무심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대도 제게 관상을 좀 보시지 않으시겠소? 그대가 얼굴을 잠시 내보인다면 앞날에 대해 훤히 꿰뚫어 드리리다."
그녀가 무심의 말에 잠시 손을 들어 면사포를 들추려다 불현 멈추었다.
"아니오. 내 관상은 필요없소."
무심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린다는 격으로 괜한 심술까지 생겨나 열이 받쳤다. 무심이 속마음을 숨기고 다시 여협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반벽산장 사람들은 들어라! 어서 몽골에 투항하여 충설을 맹세하여라. 만일 내 말을 듣지 않았다가는 산장 전체가 살육잔치를 이룰 것이며 강은 피로 물들게 될 것이다!"
바로 귀낭자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십팔검객들 속에서 누군가 비웃었다.
"그런 엄포가 통할 것 같은가? 구원군이 온다면 몰라도 너희들로서는 어림도 없다."
이번엔 십도객 무리에서 이렇게 받아쳤다.
"구원군이 바로 여기 있다!"
그러고보니 어느샌가 십도객들이 다시 칼을 들고 반벽산장 사람들을 노리고 있지를 않은가.
"어서 몽골에 투항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반벽산장의 이름은 강호에서 영원히 사라질 줄 알아라!"
십도객들이 다시 목청을 돋구었다. 반벽산장 사람들은 누구 하나 동요하지 않았다.
"덤빌 테면 어서 나서라!"
반벽산장 사람들 중 한 노인이 이렇게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지르며 나서자 십도객들이 내심 놀랬다. 노인의 몸으로 거침없이 나서는 것을 보자 은근히 두려웠던 것이다.
귀도 허재가 앞으로 나서며 노인을 향해 칼날을 그어댔다.
"윽!"
비록 자신을 굽히지 않았던 노인이었지만 힘이 있을 리 만무였다. 노인은 허재의 칼날에 목이 잘린 채 널브러졌다.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는 더욱 치를 떨었다.
"이 잡놈들아!"
반벽산장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주먹질과 몽둥이질을 십도객들에게 퍼부었다. 하지만 맨주먹으로는 십도객의 칼날을 이길 수가 없었다. 십도객들은 제 세상이라도 만난 듯 마구 칼을 휘둘러 피를 뿌렸다.
반벽산장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 넘어갔다. 여기저기서 나는 아우성과 사지가 찢겨나가는 비명이 한데 어우러져 일대의 피바다를 이루었다.
반벽산장 사람들은 서넛이 떼를 지어 십도객 한 사람과 맞붙었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미친 듯 허공을 그어대는 칼날 앞에서는 떨어지는 낙엽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드디어 십팔검객이 나서게 되었다. 싸움은 더욱 치열해져 검과 칼이 내뿜는 ㅂ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십도객 중 한 사내가 반벽산장의 사람의 몸뚱이를 두 동강 내자 심팔검객이 달려들었다.
"이 개백정 같은 놈아!"
십도객에게로 검들이 날아갔다. 십팔검객은 그의 숨통을 향해 일제히 검을 찔러댔다. 그러자 놈이 재주넘기를 하며 옆으로 피해 달아났다.
"차라리 그 검으로 반벽산장 놈들의 밑구멍이나 쑤시거라!"
놈이 이죽거리며 놀려댔다. 그러면서 자기에게로 떠밀려온 반벽산장 사람의 목을 쳐 날려버렸다. 직검 마옥과 그의 아내인 손불이도 합세를 했다.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고 그에 따라 죽어 가는 사람의 수도 늘어났다. 발에 밟히는 것은 잘려 나간 사람들의 목과 사지였고 보이는 것은 하늘로 치솟는 핏덩어리였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왕중양! 어서 여기를 보거라!"
그 목소리는 무심의 말이었는데 왕중양이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그는 어느 틈엔가 유기의 딸인 유일민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곧 죽일 듯한 기세였다.
"싸움을 그만두고 어서 우리 몽골에 투항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계집의 목은 날아갈 것이다!"
유일민은 눈을 감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어 보기에도 애처로웠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미처 손을 쓸 여유가 없었던 왕중양은 이 일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그런데 다시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유일민을 끌어안고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있는 무심 뒤로 휙 하고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무심이 자기 뒤쪽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더욱 유일민의 목을 졸랐다.
"한 발짝만 움직이면 이 계집의 목숨은 끝이다!"
그러면서 뒤를 짧게 돌아보던 무심의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그곳에는 여협이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여협은 유일민의 생사가 달린 일이라 조심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대가 내 말 한마디만 들어준다면 이 계집을 놓아줄 수도 있소."
무심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지껄였다.
"무엇으로 당신의 말을 믿소?"
여협의 말에 무심이 탁한 웃음을 토했다.
"하하핫! 날 믿지 않는다면 누굴 믿겠다는 거요?"
살육전도 이미 멈춘 상태였다. 싸움을 중단한 이들이 모두 무심의 행동에 관심을 보였다.
"이봐, 자넨 이 여인이 누구인지 아는가?"
무심이 왕중양을 향해 불쑥 물었다. 왕중양이 여협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지금껏 어느 누구도 마음에 품어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가 알고 있는 알고 있는 여인이라고는 오로지 임조영과 결의형제를 맺을 때 옆에 있었던 자지(紫枝) 뿐이었다. 그러나 이 여협이 자지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난 모르오."
왕중양이 고개를 내젓자 무심이 콧바람을 불었다.
"흥, 모른다고? 하지만 이 여인은 너를 알고 있다. 이 여인의 눈을 보고 난 알았지."
모심공자가 휙 고개를 돌려 여협을 협박했다.
"이 계집을 살리겠다면 어서 얼굴을 내보이시오!"
"필요없소. 난 그 애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오. 만약 그 애가 죽는다면 다만 그 원수를 향해 일침은 가할 수 있소."
여협의 태도는 부드러우면서도 완강했다. 무심이 뱀눈을 만들었다.
"내가 그대의 손에 죽는다고? 허허."
그는 손아귀에 있는 유일민을 당장 죽일까 생각했지만 망설여졌다.
"무신, 넌 짐승보다 못한 짓을 하고 있는 거다. 부끄럽지도 않느냐?"
왕중양이 꾸짖으며 한 발 내딛었다. 무심이 고개를 젖혀 웃는 시늉을 하더니 곧 순금으로 만들어진 부채를 펼쳐 들었다. 중간에는 누공(鏤空)으로 새겨진 불조도겁도가 있는 부채였다. 그 황금 부채를 유일민의 눈앞으로 들이민 그가 잘근잘근 씹어 뱉었다.
"자, 이 부채를 보렴. 여기 그려져 있는 이 화상이 바로 부처님이란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분이 누구지? 부처님이지?"
유일민이 바들바들 떨며 겨우 대답했다.
"그…… 그래요."
무심이 히죽 웃더니 부채를 흔들었다.
"그런데 이 부처님이 지금 무얼 하고 있더냐?"
자세히 부채에 새겨진 그림을 보던 유일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몰라요."
유일민이 고개를 돌리며 뿌리치려 하자 무심이 가로막았다.
"어서 똑똑히 보란 말이다. 부처님도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러면서 그가 유일민의 백옥같은 볼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사내와 한 번도 살을 섞지 않은 여인에게서는 늘 특별한 향기가 나거든……."
마치 암내를 맡은 수캐처럼 무심은 유일민의 몸 여기저기에 코를 대고는 벌름거렸다. 유일민은 그때마다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첫댓글 ^^
즐감
ㅈㄷ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