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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세미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 등 4인 탐구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깊이 변화하고 우리의 초점을 우리 자신에게서 타인에게 향하게 하겠다고 다짐하는 가운데 계속되어야 할 긴 과정의 시작점을 표시하는 것입니다.”(“이냐시오와 함께 걷기” 중)
이냐시오 성인의 회심에 대해 신자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란 질문에 아르투로 소사 신부(예수회 총장)가 내놓은 답이다. 이처럼 회심은 신앙 여정에서 계속되는 과정이자 삶의 근본을 그리스도로 옮겨놓는 계기다.
부와 명예를 얻겠다는 꿈을 꿨던 예수회 창립자 이냐시오 성인은 500년 전 한 전투에서 다리에 포탄을 맞았다. 긴 회복 기간을 거치며 그는 그리스도와 만났고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가난과 정결을 서원했다.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한다는 영성으로 형제적 소통과 봉헌생활, 사도적 성소를 중요하게 여기는 예수회를 시작했다.
예수회 한국관구는 지난해 5월 20일부터 올해 7월 31일까지 성 이냐시오 회심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를 보내고 있다. 그간 이냐시오 성인의 회심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현재적 소명, 이냐시오 성인의 가난과 사목적 배움 등을 다룬 여러 세미나 자리가 있었다.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는 이냐시오 해 폐막을 앞둔 22일 코로나19 대유행 뒤 처음으로 현장 세미나를 열었다.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 도러시 데이, 대니엘 베리건 신부, 무위당 장일순 네 사람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회심이라는 개인적 사건이 어떻게 공동체적 체험이 되는가, 종교적 회심은 어떻게 사회적 회심으로 연결될 것인가를 묻는 세미나에는 사제, 수도자, 평신도 등 70여 명이 참여했다.
각 주제 발표는 김민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부소장), 박상훈 신부(예수회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정경일 연구교수(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정다빈 연구원(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조현철 신부(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가 맡았다.
이날 예수회 인권연대센터는 ‘회심과 전환, 이냐시오 회심의 사회적 의미’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김수나 기자
스스로 깨어나도록
엘살바도르 예수회 회원으로 순교자이자 해방신학자로 올해 초 시복된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1928-77) 오랜 군부독재 가운데 특정 가문과 교회 권력이 정치, 경제를 장악하고 소작농에 대한 억압이 컸던 1970년대 엘살바도르에서 그란데 신부는 시골 지역 교회공동체를 살리고 농민 스스로 공동체 지도자로 서도록 하면서 민중이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가 되도록 하는 일에 집중했다.
김민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부소장)는 그란데 신부에게 교회는 “움직이는 교회, 찾아가는 교회”였다면서 “교회는 새로운 민중의 살아 있는 공동체이자 삶의 자리, 회심의 자리였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란데 신부는 민중들이 자연적인 지도자, 스스로 촉진자가 될 수 있도록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지도자를 뽑도록 독려했고, 지도자가 뽑힌 뒤에는 보조성의 원리에 따라 물러서서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김 신부는 “이러한 사목적 목표의 하나는 평신도가 교회에서 책임과 지위를 맡고 사제는 오직 보조적 방식으로 평신도의 활동을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란데 신부의 삶은 오랜 친구였지만 군부와 가깝고 보수적이며 학구적이었던 오스카 로메로(1917-80) 대주교의 회심을 이끌어냈다. 로메로 대주교는 그란데 신부의 순교 뒤 군부에 맞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편에서 빈곤 문제와 사회정의를 위해 저항하다 3년 뒤인 1980년 암살당했다. 이들의 순교는 남미 전체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김민 신부는 그란데 신부의 사목적 실험이 민중의 리더십 형성으로 이어져 엘살바도르의 혁명을 이끌어냈다는 분석도 소개했다. 엘살바도르의 내전을 다룬 호아킨 차베스에 따르면, 엘살바도르의 혁명은 마르크르주의자처럼 외부에서 유입된 좌파가 아닌 “그란데 신부 등이 했던 가톨릭 사회교리 워크샾 등을 통해 깨어나고 새롭게 형성된 농민 지식인층이 엘살바도르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는 것이다.
(왼쪽부터) 김민 신부, 정다빈 연구원, 조현철 신부, 정경일 연구교수, 박상훈 신부. ⓒ김수나 기자
회심은 과정이자 여정
도러시 데이(1897-1980) 역시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영성과 사회정의를 통합하는 삶을 살았다.
가톨릭 신자도 아니고 급진적 사회주의자였지만 영적 세계에 대한 이끌림을 놓지 않았던 데이는 딸을 낳아 기르던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에 사랑과 생명에 대한 깊은 감사와 기쁨을 느끼며 회심을 체험했고 당시 미국에서 가난한 이들의 교회였던 가톨릭에 귀의한다.
하지만 그녀의 회심에는 갈등도 따랐다. 정다빈 연구원(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은 “도러시 데이는 1932년 11월 ‘굶주림의 행진’이라고 불린 실직자들의 시위를 취재하면서 신자가 된 뒤 너무 자기중심의 내향적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됐고, 길거리에서 형제들이 투쟁하는 동안 독서와 기도, 자기 몰입으로 시간을 보냈던 것은 아닌지 죄스러움도 느꼈다”고 설명했다.
도러시 데이는 갈등 속에서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자들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에 가까운 것임을 알아차리고 눈물과 고통의 기도로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이 쓰일 수 있도록 청했다. 회심에 이어진 또 하나의 회심이었다. 그 뒤 50여 년 동안 도러시 데이는 신문 <가톨릭일꾼>을 발간하며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고 노동자,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갔다.
정다빈 연구원은 도러시 데이에게 가난은 “운동의 수단이나 참아내야 할 고난이 아니라 그 자체가 그의 삶과 <가톨릭일꾼> 운동의 핵심 가치”였다면서 “급진성, 반전주의,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철저한 평화주의 입장으로 교회 내에서도 이상주의자라는 비판, 비웃음과 함께 동료와 독자들의 이탈 및 교구의 의심도 받는 등 위기를 겪었지만 자기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고, 전례 및 위계까지도 교회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고 설명했다. 도러시 데이의 신앙적 열망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그는 “도러시 데이의 삶은 회심이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 모든 것을 바꾸는 이벤트가 아니라 삶을 통해 축적되고 풍요로워지는 과정이며 여정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면서 “도러시 데이는 종교적 회심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연대의 지평을 넓히며 계속되는 회심과 회심들로 미국뿐 아니라 20세기 세계 전체에 회심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세미나 참가자들. ⓒ김수나 기자
소명으로 이어져야 할 회심
생명을 구하기 위한 저항에 평생을 바쳤던 미국 예수회 사제 대니엘 베리건(1921-2016) 역시 시대적 영성을 위한 회심이 무엇인지 묻는 인물이다. <가톨릭 일꾼> 공동체인 메리하우스에서 함께 활동했던 도러시 데이는 베리건 신부를 “무시당하기만 하는 이들을 보이게 하고 빈곤의 일차적 원인은 전쟁이라고 보게 한 사람”이라고 했다.
1939년 예수회에 입회, 1952년 사제품을 받은 베리건 신부를 회심으로 이끈 사건, 사람들은 여럿이지만 먼저 1953-54년 프랑스 리용 노동 사제들과의 만남은 그의 생애를 뒤흔들었다. 그 뒤 징집 서류를 불태우고, 핵미사일 공장, 군수회사에 항의하고 점거하는 등 40년 동안 수배와 체포, 투옥이 반복되는 삶을 살았다. 뉴욕 교구와 예수회는 베트남 전쟁 반대 활동을 이유로 그를 5달 동안 남미로 추방했다. 그는 시인이자 예언자로서 책 50여 권을 남겼고, 미국의 폭력 문화를 비판했으며, 에이즈, 성소수자, 장애인 인권 보호에도 헌신했다.
박상훈 신부(예수회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는 “이냐시오 성인의 회심은 신비경험과 행동의 내적인 결합이며 성경에서 특징적인 종교 경험은 내적 평온이나 환시가 아니라 소명과 사명”이라면서 “내적 변화와 사회 변혁의 결합만이 이냐시오 전통의 온전한 회심”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저항과 평화라는 베리건의 삶은 회심 사건의 확장으로, 베리건 신부는 이냐시오와 함께 헌신하는 신비 경험과 타인의 선익을 위한 행동 사이의 연관을 가장 분명하게 제시했다”면서, “이는 근본적 전환의 과정으로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보고, 관습적 상태에 강력하게 도전하게 만든다. 이러한 해방의 영성에서 자기 삶의 근본 쇄신은 사회구조 자체의 변화를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왼쪽부터)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 도러시 데이, 대니엘 베리건 신부, 무위당 장일순. (사진 제공 = 예수회인권연대연구센터)
자기 제한, “다른 사람 앞에 서려 하지 마라”
비슷한 시기 한국에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생명을 공경하는 무위당 장일순(요한, 1928-94)이 살았다. 극단적, 배타적 자기 증식으로 폭주하는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로 공동의 집 지구가 위기에 놓인 시대에 장일순의 삶은 우리가 어떻게 회심해야 하는지 보여 준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는 “이 시대의 요구는 자발적 자기 제한이다. 하느님의 물러남으로 시작된 창조는 하느님의 자기 제한이며, 이는 창조의 운동이자 생명의 힘이라는 신학적 함의를 갖는다. 반대로 자기 증식은 파괴의 운동이자 죽음의 힘”이라고 설명했다.
한평생을 겸손, 공경, 모심의 정신으로 집(생태)를 다시 지었던 장일순의 자기 제한적 삶은 개인, 사회의 생태적 회심이란 것이다.
장일순은 원주교구 원동 성당에서 1940년 세례를 받았지만, 가톨릭뿐 아니라 동학, 불교, 노자 사상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고향인 원주에 대성학교를 세웠고,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을 발족했으며 지학순 주교와 함께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이 때문에 오랜 세월 당국의 감시 속에 살았으며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곤란하지 않도록 글을 남기지 않았고 원하는 이들에게 언제든 글씨와 그림을 내주었다.
조현철 신부는 “교육, 협동, 민주화, 생명 운동으로 모아지는 무위당의 삶은 원주에서 시작돼 강원도, 한국, 우주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그의 삶의 태도, 공경, 모심, 살림이며 운동방식은 겸손, 부드러움, 협동, 포용”이라면서,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글쓰기 욕구를 제한했으며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주의를 집중하는 습관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원주에서 나고 원주에서 잠든 장일순은 한 지역에 뿌리내린 삶을 통해 그 지역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삶의 바탕을 보여 줬다. 집은 소유와 이용, 자산이며 자연은 자원일 뿐인 현대인들의 삶과 대비된다. 곡식 한 알도 땅에 떨어지면 주워 담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생명을 공경하는 삶의 태도는 할아버지 여운 장경호의 영향이다.
조현철 신부는 “그는 종교를 넘나들며 생명, 우주라는 진수를 받아들였고, 겸손한 삶을 몸으로 보여 주고, 자기를 절제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이어 장일순이 생전 강조했던 노자의 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 “세상에서 다른 사람 앞에 서려고 하지 말아라 이 말이야”, “혁명은 주판처럼 근원적 전환이지만, 때리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것, 보듬어 나아가는 것”, “상대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하거든. 똥물에 함께 들어가라”를 들며 “이는 생명은 하나라는 것, 한 살림의 이치”라고 강조했다.
네 사람은 모두 진리에 따라 살고자 노력했고, 끊임없이 행동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회심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랑을 구원에 이르는 길로 여기며 여러 고초를 겪으면서도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환대하는 실천적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회심은 구체적 행동이자 삶에서 계속된 순례다.
정경일 연구교수는(성공회대 신학연구원)는 “회심과 순례를 세상에서 돌아서는 것, 거룩한 삶을 위해 세속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냐시오에게도 회심의 장소, 순례의 목적지는 세상 밖이 아닌 세상 속이었다”면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는 이냐시오 회심, 영성, 순례의 출발점이자 목적지이고 순례자는 계속되는 회심 사건을 경험하고 일으키기 위해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세미나 영상은 예수회인권연대연구센터 유튜브에서 다시 볼 수 있으며, 발표 자료는 예수회인권연대 홈페이지에 게시된다. 올해 말쯤 책으로도 발간될 예정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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