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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발랏의 조롱과 위협
느 4:1-14
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4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5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7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8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9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10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11 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12 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13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14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느 4:1-14 / [원수들의 방해 책동] 우리가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하자, 사마리아의 통치자인 산발랏이 그 소식을 듣고 몹시 화를 내면서 유다인들을 조롱하였다. 2) 그는 자기와 함께 일하는 총독부의 관리들과 사마리아의 유지들 앞에서 이렇게 유다인들을 비웃었다. `힘도 없는 유다인들이 무엇을 한다고 수선을 떠는가? 그들이 자체 방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게냐? 제물이라도 바치면 무슨 효력이라도 생기는 줄 아느냐? 성벽공사가 무슨 하루 일거리냐? 그들이 불타 버린 잿더미 속에서 혹시 축성에 필요한 돌덩이들을 다시 꺼내어 쓰기라도 할 작정들이냐?' 3) 산발랏의 하수인으로 곁에 서 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나서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이 돌더미를 옮겨다가 성벽을 쌓는다 해도 모두 헛일이다. 그 성벽 위에서 여우 새끼만 뛰어다녀도 그 돌이 모두 무너져 내릴 것이다!' 4) [느헤미야의 간구] 그러나 우리의 일은 동시에 여호와의 일이었기 때문에, 원수들의 조롱에 대항하여 나는 여호와께 이러한 기도를 드렸다. `우리의 하나님이시여, 그들이 우리를 조롱합니다. 그 소리를 직접 들어주소서! 이러한 조롱과 수치를 그들에게로 돌려보내 주소서! 그들이 약탈을 당하고 포로가 되어 원수의 땅으로 끌려가서 그 모든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5) 그들의 허물을 덮어 주지 마시고, 주님 앞에서 그들의 죄악을 지워 없애지 마소서! 그들은 주님의 성벽을 수축하는 우리 이스라엘 민족을 모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6) 원수들의 방해 책동은 여러 가지로 거세었지만, 우리들은 차질 없이 성벽을 재건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민족적으로 모두 성벽재건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온 성벽의 기초를 완공하고, 높이도 반절이나 쌓아 올리게 되었다. 7) [안팎에서 몰려온 최대의 시련] 우리가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고 성벽의 뚫린 곳들을 보수해 나가자,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족속들과 암몬 족속과 블레셋 족속의 아스돗 주민들이 그 소식을 듣고 모두 크게 화를 내었다. 8) 이리하여 그들은 공동 전선을 펴기로 작정하고 예루살렘을 치려고 연합 군대를 조직한 다음 유다인들에게 혼란을 일으켜 성벽공사를 방해하려고 기습 공격을 준비하였다. 9)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기도로 우리의 하나님께 보고하였고, 보초를 세워서 밤이나 낮이나 그들을 경계하였다. 10) 그런데도 공사에 시달리던 유다인들은 이제 적의 기습이 두려워 사기를 잃고 다음과 같이 상엿소리처럼 처량한 노래까지 지어 불렀다. `져내고 져내도 끝도 없는 흙더미, 지치고 지쳐서 흙 한삽 못지겠네! 우리가 이렇게 지치고 피곤한데, 어느 세월에 이 성벽을 다 쌓겠나!' 11) 그런데다가 우리의 원수들은 기습적으로 우리를 살해하려고 작전을 세웠다. `유다인들이 낌새도 느끼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속으로 기습해 들어가서 그들을 모조리 쳐죽이고, 그들의 공사를 끝장내 버리자.' 12) [느헤미야의 보호조치] 그런데 사정은 의외로 달라져 버렸다. 원수들의 근처에 살던 유다인들이 위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달려와서 원수들의 동태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열 번도 더 그렇게 하였다. 13)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성벽 뒤의 넓고 높은 곳에 집합시키고, 그들에게 칼과 창과 활로 무장시켜 가문별로 배치시켰다. 14) 그런데 내가 사열하면서 보니, 그들이 모두 두려워서 떨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성주와 지휘관들을 비롯하여 온 백성 앞에 나아가 이렇게 격려하였다. `여러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시오! 여호와께서 얼마나 위대하시고 권능이 많으신가를 잊지 마시오! 여러분은 오직 용맹스럽게 싸우시오. 여러분의 형제와 아들들을 위하여, 여러분의 아내와 딸들을 위하여, 여러분의 집과 고향을 위하여 담대하게 싸우시오!'
성벽 재건은 쉽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벽 재건은 이스라엘 주권 회복의 상징이기에 주변의 대적들이 이를 절대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과 밖의 장애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 장은 이스라엘 공동체 밖에서 성벽 재건 공사를 방해했던 대적과 장애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너져 있던 이스라엘 공동체가 성벽 재건 공사를 하며 회복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밖에 있던 대적들의 집요하고 요란한 방해가 시작됩니다.
백성들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라(1-6) 자기의 예상과는 달리 느헤미야의 탁월한 지도력 아래 성벽 재건 공사가 큰 진척을 보이자 불안해진 권력자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공사를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먼저 공사를 방해한 방법은 비웃음과 조롱이었습니다. 공사 방해를 목표로 연합한 대적들은 미약하고 황폐한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 형편을 자극하는 말을 하여 공사하는 사람들을 낙담하게 함으로써 재건 공사를 멈추려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와 유대 백성들은 자극받지 않고 기도하며 마음을 합해 더욱 힘써 일합니다. 짧은 기간 안에 성벽이 전부 연결되었고, 쌓아진 성벽의 높이는 절반이나 되었습니다.
심히 분노하여 다함께 꾀하기를(7-12) 자기들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는 것에 몹시 분노한 대적들은 피부에 와 닿는 무력 공격으로 공사를 방해하기로 결의합니다(8, 11). 사방이 공사를 방해하는 대적들로 둘러싸였습니다. 대적들의 방해 공작은 이전보다 더욱 커지고 거세졌습니다. 그러는 만큼 재건 공사를 하는 이스라엘은 위축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낙담(10)과 분열(12)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까지 등장합니다.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13-14) 위기 속에서 느헤미야는 또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무장시켜 대적들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고, 두려움에 낙담한 백성들을 신앙으로 격려합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자요,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기억합니다. 열방의 왕이시며(시 10:16; 24:10), 우주의 통치자(대상 16:31; 시 93:1)이신 하나님이 우리 편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대적들을 향한 두려움, 이스라엘 공동체의 동요와 분열이 사라집니다. 성벽 재건은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적용: 대적들이 공격할 때, 그 공격의 강도가 더욱 커질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인생의 성패를 순경 속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성패는 순경 속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고난 극복의 힘은 무엇일까요? 용기입니다. 용기야말로 고난의 벽을 뛰어넘게 하는 삶의 동력입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용기 때문입니다. 용기는 고난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극복의 대상으로 보게 합니다. 고난과 당당히 맞서 싸우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용기가 믿음에서 나온다는 데 있습니다. 믿음은 삶의 용기를 주고 용기는 삶에 변화를 줍니다. 그리하여 고난의 바다를 기쁘고 당당하게 항해하도록 삶에 힘을 줍니다.
< 설 교 >
인생의 아름다운 작품을 위해
느 4:7-14 / 서정호목사
"인간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대한 파도와 굽이치는 강물과 저 광활한 우주의 태양과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는 감탄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는다" 성 어거스틴이 남긴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놀라워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내 존재가 얼마나 신기한 작품인지 감탄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한 작품으로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가치 있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 때에 혼신의 힘과 온 정성을 쏟고 모든 재능을 다해서 정성껏 그 작품을 만드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그렇게 온 정성을 기울여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시장에 가보면 대량생산되어서 나오는 상품들이 많이 있지만 어떤 유명 디자이너가 옷을 만들 때에는 자기 고객의 개성에 맞게, 그 사람의 체형에 맞게, 독특한 하나의 옷을 만들어서 주는 데 그것은 하나의 작품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에, 조각을 할 때에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독특한 작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독특한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도예가가 도자기를 만들 때에도 독특한 그릇을 각각 만들어내는 것이고, 서예가가 글씨를 쓸 때에도 독특한 자기 나름대로의 필체를 가지고 글씨를 써서 거기에 낙관을 찍습니다. 그럴 때 그것이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각각 다른 개성을 가진 독특한 작품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판단하고 평가할 때에는 그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잘생겼느니, 못생겼느니, 유능하니 무능하니 그렇게 평가하고 판단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각각 다 독특하게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한 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각각 다 개성을 가진 독특한 특별한 작품으로 만드셨고 하나님은 작가이시고 우리는 작품이고, 작가와 작품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숨은 잠재력 개발을 통한 성공 지침서이라는 책을 쓴 브라인언 트래지(Brian Tracy)라는 사람은 "인간의 삶도 훌륭한 예술 작품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사람의 삶도 걸작이 있고 졸작이 있습니다. 참 추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고 참으로 걸작품이 되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감동을 받는 생도 있습니다. 트래지는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되는 성공한 인생의 기준을 7가지로 제시합니다. 마음의 평화, 건강과 활력, 사랑(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무슨 일을 한다 해도 공허함), 경제적인 자유(인간은 일상적인 지출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산), 가치 있는 목표와 이상(마음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을 통해 의미 있는 가치를 수행), 자기 인식(자신이 삶을 대하는 자세), 개인적인 성취감 등을 말합니다.
작품인가, 상품인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산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영원히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 살고 있기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너무도 귀중한 존재요, 창조의 신비를 담은 걸작품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작품이 아니고 시적인 작품이고 아주 놀라운 예술적 작품이요, 걸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육체적인 걸작품을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육체적 작품을 자신에게서 보아야 합니다.
금세기의 유명한 크리스챤 의사인 폴 브랜드와 필립 안시가 공저한「오묘한 육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시편 139편 14절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한 책으로 그는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기 위해 정자와 난자의 만남이 십조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깊은 묵상 속에서 자기 존재의 신비, 탄생의 신비,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보면서 '참으로 놀라운 작품이구나!' 감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성공했다고 느끼든 실패했다고 느끼든 창조하신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많이 생각해 주신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걸작품으로 보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창조의 믿음입니다. 나를 이렇게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나에게 하나님의 창조품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외모나 나의 외모나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데 그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솜씨가 있고 숨결이 있습니다. 우리의 외모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현재 나의 이 모습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작품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겼든 작가이신 하나님의 그 정신을 살려놓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걸작품인 나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우리의 육체만 보아도 걸작품인데 은혜를 받고 보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놀라운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육적인 창조뿐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으로서 태어난 새로운 존재의 선언입니다. 왜 우리가 자신을 소중히 알아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투자한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나 한 사람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면 나 한 사람을 값싸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물건은 지불한 가치에 의하여 값이 결정됩니다. 또 하나는 희소가치에 의하여 값이 결정됩니다. 상품은 아무리 많은 가치를 투여해도 대량 생산입니다. 그러므로 상품으로서 효용 가치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예술 작품은 인격을 담은 가치로서 유일한 것이므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이나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 밀로의 비너스 상 같은 작품을 볼 때 감동을 받습니다. 또한 펄벅의 "대지"나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 조정래의 태백산맥 같은 작품을 읽을 때도 역시 감동을 받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사야를 들을 때 우리 마음은 막힌 것이 확 뚫리는 상쾌함을 느끼게 됩니다. 한 작가가 수년 혹은 수십 년 아니면 일생을 바쳐 만들어낸 작품은 후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향력을 주고 있습니다. 예술 작품도 그렇지만 신앙인의 신앙적 작품도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감동과 영향력을 줍니다.
우리는 한 시대 조그마한 공간에서 살아가면서 누구나 다 인생의 작품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작품을 만들기 원하십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느헤미야는 전쟁으로 폐허된 민족을 재건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참으로 좋은 신앙의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신앙 작품을, 모세는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신앙 작품, 솔로몬은 성전이라는 신앙 작품을, 바울은 유럽 복음화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작품을 남겨야 할까요? 감동적이고 영향력 있는 신앙의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감동적이고 영향력 있는 신앙의 작품을 만들길 원하는 사람들은 소명감에 의한 뚜렷한 목적 즉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비전을 말하면 흔히들 야망, 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야망이나 꿈은 예수 믿든 안 믿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에 의한 비전은 누구나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느헤미야가 지금 하고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적군의 침략으로 황폐해진 성을 포로에서 돌아와 재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야망이 아닌 소명에 의한 비전입니다. 당시 느헤미야의 신분은 술 맡은 관원장이었습니다(느1:11). 그는 전쟁에 패배해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인데 그곳에서 출세를 하였습니다. 왕의 신임을 받아 술관원장이 되었고 인간적으로 권력, 부도, 명예도 어느 정도 이룬 상태이고 인간적인 야망을 이루었으며 원한다면 더 높은 관직에 올라 총리를 하고 싶은 생각도 있을 수 있지만 그가 가진 비전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고국에 남아 있는 백성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성문들이 불탔고 예루살렘 성은 다 부서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때 그는 예루살렘 재건에 대한 비전을 가졌습니다. 1장 4절 말씀을 보면 민족 재건에 대한 그의 비전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신앙적 작품을 남기는 신앙인의 소명적 비전인데 이 소명적 비전은 책임의식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응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고자하는 소명의식에 의한 결단이고 비전입니다. 기본적으로 책임의식을 갖는 것 중요합니다. 가정에 대한 책임의식, 직장에 대한 책임 의식, 교회에 대한 책임의식, 나라에 대한 책임의식 등 책임의식이 필요합니다.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 작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임 있는 성도가 있는 교회가 무엇인가 신앙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금의 환경이 주님을 위해 위대한 작품을 만들라는 조건인 줄 알고 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명예, 재물과 재능, 지위와 지식, 외모, 능력, 신앙, 교회, 가정, 직장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을 통한 신앙 작품의 비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통한 신앙의 작품을 만드는 비전, 자녀, 교회, 민족을 통한 신앙 작품의 비전을 가지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무엇인가 작품을 만들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
작품을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작가에게는 가난이 다가 올 수 있습니다. 도구가 없습니다. 건강이 쇠약합니다. 유혹이 있습니다. 신앙의 작품을 만드는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크게 외적인 장애물과 내적인 장애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외적 장애물
그것은 외적들이었습니다. 성을 재건하는데 방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느헤미야가 성을 재건한다는 소식을 듣고 산발랏이 크게 분노하며 비웃습니다. 능력이 없다고 조롱합니다. 불타버린 성벽을 다시 일으키려고 한다고 조롱합니다.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겠다고 합니다. 적극적으로 방해를 하면서 고도의 심리전을 펴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무리를 크게 보이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무리들이 스스로 매우 미약한 무리라는 것을 자각하게 합니다. 자신감을 상실하게 하고 자포자기하게 만듭니다. 성벽 재건이 너무 큰일인데 너희가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라고 낙담하게 만듭니다. 성을 쌓으나 무너질 것이라고 실패의 두려움을 주어 결국 일을 포기하게 하려고 합니다.
내적인 장애물
그것은 자기를 따라야할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럴 때 자기를 따르던 백성들이 단합하여 목적을 성취하면 좋을 텐데 외적 어려움이 오면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흐트러집니다. 배반합니다. 자기 살길 찾습니다. 이것이 비전을 이루는 무서운 적입니다. 신앙 작품을 만드는데 가장 힘겨운 적이 바로 내적인 장애물입니다. 그를 따랐던 백성들의 태도를 보면 사기가 저하되었습니다, 낙심합니다.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고 단언합니다. 두려워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까? 가정환경, 자신의 조건, 자신의 능력의 한계, 성격적 결함, 과거의 쓰라린 전력,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비협조, 질병, 나이, 성, 등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우리 앞에 있습니까? 그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신앙의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장애물을 극복했습니까? 먼저 기도했습니다. 소명적 비전을 이루어 신앙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꿈도 있어야 하고, 환경에 대한 통찰과 적응력, 문제의식과 해결능력, 사회적 감각, 창의력도, 분명한 가치관, 의사결정 능력, 과학적 경영능력, 지도력의 분산운용 능력, 강인한 의지력과 견인력, 선견지명, 전문지식, 도덕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적 능력 기도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금식기도를 하고나서 왕의 허락을 받아냅니다. 소명적 비전을 놓고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위대한 신앙적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기도를 통하여 신앙의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도하고 그대로 있습니까? 아닙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작품을 만들어 냅니다. 싸울 수 있도록 무장시켰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서로 협력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적의 꾀를 폐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도우심으로 다시 역사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중단되었던 성벽을 다시 재건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싸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벽을 52일 만에 완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완성을 향해 만들어가는 작품
우리는 아직 미완성품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이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조각가가 진흙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어떤 작품을 만들까? 는 결정되었습니다. 시작했기 때문에 이미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걸작품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미완성품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다 지금 부족합니다. 완성되어 가는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꾸만 자신이 이미 다 만들어진 완성품으로서의 작품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완전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이나 불완전한 것을 숨기려 합니다. 그것이 드러나거나 폭로되면 견딜 수 없이 자존심 상하게 되고 다른 사람이 나를 다 완성된 존재로 취급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남에게도 가족에게도 때로는 남편과 아내사이에도 교인들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들어 가는 존재이지 완성된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불완전하다고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무능하다고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처음 재료는 다 같습니다. 그러나 차츰 차츰 작가의 마음에 그린 그 모습대로 만들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실 구원의 완성품이 될 때까지 자신도 이웃도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향한 기대가 분명합니다. 작품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작품, 멋진 신앙의 작품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여 기도하며 순종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고 외적장애 뿐만 아니라 내적장애와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해 가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원수의 전략을 대적하라
느헤미야 4:7-14 / 피영민 목사
서 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을 하고 싶어서 하고, 하기 싫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전쟁 없이 편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의 원수인 사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7절에서 9절을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다른 말로는 옛뱀, 용이라고도 합니다. 사단은 에덴 동산에서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고 인류에게 원죄라는 멍에를 씌웠습니다. 그리하여 인류에게 사망이 오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에 갈 때 마다 사단, 옛뱀 때문에 우리가 슬픔과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원수는 정말 원수구나! 마귀는 온 인류의 원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를 미혹해서 죄에 빠뜨리게 했을 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의 전쟁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뱀인 너는 여자의 후손인 메시야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야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단이 메시야를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녀들을 낳고 후손인 가인과 아벨이 태어났습니다. 사단이 지켜보니 가인은 믿음이 없고 아벨은 믿음이 있어 보였습니다. 사단은 믿음이 있어 보이는 아벨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가 이 땅에 오지 못하게 믿음의 자녀들을 계속 죽이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의 몸을 통해 이 땅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 기쁜 소식도 잠시,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 대왕은 베들레헴 근처에 태어난 두 살난 어린아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을 보면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단이 헤롯 대왕의 마음 속에 들어가 메시야를 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피신하셔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33년의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신 백성들의 죄값을 다 값아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이제는 죽지 않는 몸을 입으시고 영원토록 살아계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을 보면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오지 못하게 하고 메시야가 택한 백성의 죄값을 값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역사는 완전히 패배 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끝난줄 알았지만, 예수님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영원토록 살아계신 우리 구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부활하신 사건은 사단에게는 머리가 상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패배하기 전에도 사악했고 패배한 후에도 여전히 사악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를 계속 공격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축구 경기를 보면 패배한 팀이 상대선수를 향해서 행패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헤를 끼친다고 해서 결과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를 끼치는 이유는 사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로써 우리의 사악한 원수입니다. 사단은 영물이기 때문에 사람을 통해 역사합니다. 사람 속에 들어가서 사악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악령의 도구가 되면 사악한 사상과 말, 그리고 사악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얼굴을 하였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다는 뜻으로, 사람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고 배은망덕하거나 행동이 흉악하고 음탕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즉, 그 사람 속에 악령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과 성벽을 연결하였고, 높이를 절반까지 쌓았습니다. 절반까지 벽의 높이가 올라가자 원수들인 산발랏과 도비야, 아라비아, 암몬, 아스돗 사람이 분을 내고 일어났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원수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경제적, 군사적, 감정적, 단순한 시기심 때문으로 일어났는지 정확한 이유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마음 속에 사단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는 것을 방해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영적인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피할 수 없고 피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우기만 하면 우리가 승리하는 싸움입니다. 피하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 4장을 통해서 원수가 어떤 전략을 썼는지 살펴보고, 느헤미야는 어떻게 대적해서 승리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Ⅰ. 원수의 전략을 3가지
1. 하나님의 백성들의 약한점을 조롱했다.
본문 2절에서 3절을 보면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산발랏과 암몬사람 도비야가 조롱하고 있습니다. 조롱하는 내용을 보면 ‘여우가 올라가도 성벽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원수인 사단은 우리를 놓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약한 점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약한 점이 발견되면 사단은 어김없이 공격합니다.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라라’ 도비야의 마음에는 이런 조롱의 언어가 가득 했습니다. 또, 제사장 가운데 도비야와 연락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도비야에게 뇌물을 받고 연락을 했습니다. 이런 자들을 간첩이라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도비야가 예루살렘 성전에 방을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 13장 8절을 보면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세간을 내쳤습니다. 우리는 원수와 내통하는 영적인 간첩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일에는 교회와서 예배드리고 월요일에는 점치러 다니면 안됩니다. 그것은 영적인 간첩행위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들을 협박하였다.
본문 8절을 보면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혼란케 하여 문제를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어느 곳에 가든지 혼란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딜 가나 평안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육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달려 들어가서 살육하자! 역사를 그치게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정 당당하게 1:1로 결투를 해야 합니다. 몰래 숨었다가 살육을 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입니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을 좌절시키려 하였다.
본문 10절을 보면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의 힘이 쇠하였다고 유다 사람들이 좌절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는 “그 대적의 근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고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 원수의 가까이 사는 유대인들이 우리에게 열 번이나 말하기를 ‘너희가 어디로 얼굴을 돌리든지 그 원수들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좌절시키려 했습니다. 이처럼 내분을 일으키고 좌절감을 주는 것이 원수의 전략입니다.
목회자들도 목회에 헌신하고 하나님의 일을 흥황케 하면 조롱과 협박을 당하기도 합니다. 좌절 시키려는 말도 듣게 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 사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조롱 당하고, 협박도 받고, 좌절의 말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패배하면 안됩니다. 성벽재건은 물거품이 됩니다. 도비야의 말대로 예루살렘의 성벽은 여우집이 되는 것입니다. 꼭 이겨야 합니다. 영적 전쟁은 싸우기만 이기는 전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승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으로 싸우기만 하면 승리합니다. 안싸우고 피하면 패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재의 가정, 사업, 영혼에 문제가 있으십니까? 사단의 역사입니다. 원수가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원수의 공격에 넘어가고 쓰리지면 안됩니다. 예수 이름으로 물리쳐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기되 넉넉히 이깁니다. 우리는 망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Ⅱ. 느헤미야의 대적방법 네 가지
1. 기도로 대적했다.
느헤미야는 산발랏이 쳐들어오고 도비야가 조롱하는 것은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조종하는 사단이라 생각했습니다. 본질은 영적인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적 싸움에는 영적 무기로 싸워야 합니다. 영적 무기 가운데 가장 강력한 무기는 기도입니다. 기도로 싸워야 합니다. 본문 4-5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 하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도 원수가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 가족, 교회, 국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을 보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합니다. 원수가 우리 자녀들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진실되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 원수가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2. 원수를 향해 방비하였다.
본문 9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했습니다. 원수가 쳐들어 오는데 기도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했고 원수를 향해서 방비했습니다. 그리고 성벽재건을 계속 했습니다. 본문 16-17절을 보면 “그 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한 손에는 칼을 잡고 한 손에는 일하는 도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의 출판사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검과 흙손입니다. 영국 침례교 스펄젼 목사님이 자신이 섬기던 메트로폴리탄 테버네클(Metropolitan Tabernacle) 교회에서 잡지를 출간 했습니다. 그 잡지 이름이 검과 흙손((The Sword and Trowel)입니다. 그런데 검과 흙손이 기원은 느헤미야 4장에 있습니다. 즉, 한 손에는 검을 잡고 한 손에는 흙손을 쥐고 성벽을 건축했습니다. 느헤미야 인도를 받아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고 원수들을 향해서 방비하며 일을 했습니다.
3. 인내함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느헤미야와 유대 백성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이루었습니다. 참지 못하는 것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인내함으로 이기시길 바랍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강하게 공격한 때는 성벽재건을 절반즘 이루었을 때입니다. 절반이라는 것은 피곤해서 지칠 때고 끝이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포기하기 쉬운 때입니다. 마라톤에서 42.195km중 21km 지점에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30km 넘어가면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뛰자’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뛴다는 것입니다. 절반즘 왔을 때 위기가 찾아옵니다. 사단은 성도들이 중간에 포기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전도하다가, 죄와 싸우다가도, 예배 참석하는 것까지 중간에 포기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단이 원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원하는대로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절반을 왔으면 인내하여 끝까지 뛰시기 바랍니다. 원수가 조롱해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협박해도 두려워 마십시오. 좌절감을 주더라도 물리치고 용기를 내어 끝까지 완주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승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9절에 보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꼭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 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4.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였다.
우리가 싸울 때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리라 하였었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일이 잘 진행되지 않고, 몸은 피곤하며, 원수는 강할지라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한 번 외쳐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과 피난처요. 환난날에 만날 큰 도움이십니다. 여러분 환난을 당하셨습니까? 하나님께 간구하시면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편에서 싸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너희가 무론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당신의 택한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사랑에서 끊을 자도 없고, 정죄 할 자도 없고, 송사할 자도 없고, 대적해서 이길 자도 없습니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고 나는 어리석어도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며, 나는 무능해도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모든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함께 하신 하나님을 늘 기억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시길 바랍니다.
결 론
성벽재건은 단순한 건축이 아닙니다. “자녀와 아내”의 생명과 미래가 걸린 일입니다.
느헤미야는 가장 강력한 동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벽재건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14절 보면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었느니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벽건설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자녀와 아내가 어려움에 처할 뿐더러 죽을 수도 있습니다’는 의미입니다. 자녀와 아내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데, 심지어 죽을 수도 있는데, 누가 게으름을 피우겠습니까? 우리가 낙심하고 포기하면 우리 후손은 “마귀의 종”이 됩니다. 우리의 후손이 사단의 노예가 되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고 패배하면 되겠습니까?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이 현재까지 네 차례 있었습니다. 1948년도에 일어났던 전쟁이 제1차 중동전쟁입니다. 유대인들이 시오니즘(Zionism)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돌아와 아랍 사람들을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랍 군대 5개국이 연합해서 유대인을 공격했습니다. 그 때에 미국과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으니 당신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미국으로 보내십시오. 우리가 당신의 자녀들을 평안히 보호해 주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은 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거절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내 처와 자녀들을 있기 때문에 전쟁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부인과 자녀를 보지 못한다면 누구를 위해 싸우고 어디서 싸울 용기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가족들을 보내지 않고 전쟁에 임했고 결국 승리했습니다.
이스라엘과 대한민국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기독교가 번창했습니다. 절반즘 왔습니다. 절반즘 오니 원수들의 공격이 심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좌절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사단이 공격해도 쓰러지지 마시고 이깁시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의 문제, 이렇게 해결하십시오
느 4:7-14 / 소강석목사
"인생이란 문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 문제없는 인생은 어디에도 없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문제로 가득차 있습니다. 문제가 없다는 것은 바로 인생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으면 해답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병이 있으면 약도 있듯이 우리의 삶에 아무리 큰 문제가 있어도 거기엔 반드시 열쇠가 있고 해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문제 앞에서도 당당하게 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의 열쇠를 받아서 언제나 승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메데파사에서 왕의 수석 비서관이나 장관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로 기도한 후 왕의 허락을 얻고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파견받아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총독으로 와서 보니까 성벽이 다 무너져 있었습니다. 성벽이 무너져 있으니 주위 민족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공격을 당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겠습니까? 재산을 뺏기게 되고 심지어는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성전이 훼파되니까 민족신앙까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걸 보다 못해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너진 성벽건축 역사에 엄청난 방해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방해역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산발랏과 도비야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건축 역사를 비웃었습니다.(1-3)
"하이고! 느네들이 성벽을 쌓아? 너희들같이 힘없고 미약한 놈들이 성벽을 쌓아? 여우가 올라가도 그 성벽은 무너지고 말거야! 그리고 우리가 성벽을 쌓도록 그냥 둘 줄 아니? 우리가 끝까지 방해하고 말거다."
그러면서 백성들을 유혹하고 백성들에게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성벽을 안 쌓게 여론화시킴. 이들은 한마디로 마귀의 일당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방해작업과 계략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부터 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주저앉을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문제를 맞는 사람들의 일반적인현상입니다.
누구에게나 문제를 만날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들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큰 문제를 만나게 되면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① 꿈을 잃기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큰 문제에 직면하면 먼저 꿈부터 잃기 시작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예루살렘 성벽 역사에 대해 크게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나쁜 분위기로 여론화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방해 역사를 위한 선전포고도 해옵니다. 그러자 그들은 겁부터 먹고 꿈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성벽을 제건하고 예루살렘 보호하여 강국을 형성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그들은 문제를 만났을 때 꿈부터 잃었습니다.
느4:10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
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처음엔 그들이 힘을 내어 시작했습니다. 설레이는 꿈과 영롱한 비젼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그 꿈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쳐들어온다니, 큰 일났네, 이 성벽을 건축하려면 적어도 몇 달은 걸리는데 도저히 못하겠어. 도저히 우리는 이 성벽을 재건할 수 없어!"
그들은 꿈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꿈을 잃어버리고 눈앞에 보이는 흙더미만 쳐다보며 푸념하고 있었습니다. "우린 못해, 절대로 우리는 할 수 없어라고 만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해 버리게 된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맞으면 누구나 먼저 꿈이 깨지기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젼을 잃어 버리고 희망이 깨져 버립니다. 그 설레였던 꿈이 산산 조각나기 시작합니다. 만사를 부정적인 생각으로 굳혀 버립니다.
이것이 문제를 당한 사람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문제를 직면해도 꿈만은 잃어 버려선 안됩니다. 비젼만큼은 꼭 소유해야 합니다.
② 좌절하게 됩니다.
느4:10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여기 힘이 쇠하였다는 말은 자포자기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좌절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쌓는 사람입니다. 모두 힘을 합하여 성을 쌓아야 할 일꾼들입니다. 그런데 일꾼들에게서 힘이 빠져나가 버렸으니 어떻하란 말입니까?
그들은 꿈을 잃어버리니 이제는 보이는 것이 문제만 보입니다. 그러니 좌절할 수밖에 없었고 자포자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문제를 당한 사람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문제 앞에서 좌절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큰 문제를 당하면 나도 모르게 자포자기 해 버리고 맙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형통하기만 하고 신바람이 나면 배가 고파도 힘이나고 의욕적인 사람이 되는데 갑자기 큰 문제를 만나면 아무리 배가 불러도 스스로 김이 빠지고 좌절하게 됩니다. 괜히 맥이 빠지고 스스로 주저앉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돼라."
③ 겁부터 먹고 맙니다.
느4:11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그들은 꿈을 잃고 좌절하게 되니까 대적들이 우리를 죽일거라는 불안감에 쌓이고 말았습니다. "저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대적들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죽고 말거야." 문제에 직면하니까 지레 겁부터 먹고 만 것입니다.
사람이 겁을 먹으면 왜 그렇게 자신이 초라하게 보입니까? 너무나 작게 보입니다. 너무나 왜소하고 초라하게 보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문제 앞에서 내가 이렇게 겁먹고 부들부들 떨고 있다니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믿음이 적은 소인들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큰 대인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의 특징은 문제가 닥치면 닥칠수록 더 문제를 바라봅니다. 그러니 문제는 더욱더 커지고 하나님은 참으로 적게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꿈을 잃어버리고 좌절하게 되며 겁부터 먹고 맙니다. 그래서 결국은 실패하는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큰 사람은 문제가 닥치면 닥칠수록 문제만 바라보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갖고 있는 하나님을 먼저 봅니다. 그러니 문제는 자꾸 작아지게 보이고 하나님이 더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면 더 꿈이 생기고 힘을 내며 강하고 담대하게됩니다. 그래서 결국 승리하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가 그랬습니다. 느헤미야는 정말 큰 문제에 봉착했던 것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방해로 온 백성이 꿈을 잃어 버렸고 좌절해 있었으며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것들이 느헤미야에게 얼마나 큰 문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그 모든 방해와 문제를 이겼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 문제 해결의 열쇠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다 건축하고 지치고 좌절해 있던 유대인들을 새롭게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이렇게 큰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느헤미야는 참으로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존경받는 영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믿음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막히면 막힐수록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승리하는 인생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느헤미야는 어떻게 다가온 큰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습니까? 느헤미야는 다음과 같은 문제 해결의 6원리로 승리했습니다.
1) 먼저 문제를 바로 이해하였습니다.
느4:14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었느니라
느헤미야는 먼저 모든 상황과 문제의 현실을 돌아보았습니다. 여기서 돌아봤다는 말은 문제의 현실과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나서 여유와 당당함을 잃지 않고 두려워 말고 계속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백성들을 권면하였습니다. 꿈을 잃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겁먹지 말고 힘내어 싸우라고 격려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로서 첫번째 자격을 갖고 있는 모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모습입니까?
만일 지도자가 되어가지고 먼저 두려워 허겁지겁하면 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이 어떤 문제를 당하게 되면 먼저 허겁지겁하고 헐레벌떡하고 열부터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상도 속담에 하루저녁내 울었는데 아침에 보니 이유도 모르고 울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열부터 내지 말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절망부터 하지 말고, 겁부터 먹지 말고 차분하게 먼저 문제의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문제를 삐딱하게 이해하면 안됩니다. 삐딱하게 이해하는 것이 오해입니다. 사람이 오해를 하게 되면 열을 받게 되고 열을 받으면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오해하면 본능적으로 판단+행동합니다. 사람이 문제를 정확하게만 이해하면 이미 그 문제의 절반은 해결이 된 것입니다. 그래야 문제를 정확하게 해결할 수 있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 문제가 다가 온다해도 먼저 당황해서는 안됩니다. 이럴수록 마음의 여유를 갖고 차분하게 진지하게 문제를 파악+이해해야 합니다.
2) 시각을 바꾸었습니다.
느4:14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었느니라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적들을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저들을 바라보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여기 기억한다는 말은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느헤미야는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문제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의 문제해결 비법이었던 것입니다. 처음엔 문제를 정확히 바라보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그 문제만을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랬다간 문제만 더 크게 보일 수 있습니다. 또 그 문제를 내 힘으로만 해결할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다간 스스로 지쳐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지극히 위대하시고 광대하신 주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이제는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내게 있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는 생각과 관점이 더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to me 보다 in me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객관적인 문제, to me 보다는 그 문제를 받아들이는 in me, 즉 나의 생각과 관점이 더 중요합니다. 시각과 관점이 문제보다 더 중요하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그 문제를 축복으로 바꾸시고 승리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을 먼저 바라본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럴 때 생각이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고 새힘이 오게됩니다. 절대로 꿈을 잃어버리지 않고 좌절하지 않습니다. 결코 두렵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새 힘이 나고 의욕이 생기며 확신이 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요일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하나님께 속한 성도는 이미 마귀(문제)를 이기었다고 했습니다. 왜 이겼습니까? 이유는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마귀(문제)보다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겼다는 말은 니카오란 말입니다.
니카오 : 완전히 제압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속한 성도는 어떤 문제, 어떤 마귀도 완전히 제압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우리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너무나 크시고 가장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작은자는 큰자에 의해 삼킴을 당합니다. 그런데 우리안에 계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문제보다 더 크십니다. 문제의 대장이 되는 그 어떤 마귀보다 더 위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문제, 그 어떤 고통도 하나님에 의해 삼켜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진적이 없습니다.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소속해 있는 성도는 이 하나님의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니카오 인생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승리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문제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승리의 확신이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길 수 밖에 없다는 니카오의 확신이 생긴단 말입니다. "나는 이긴다. 승리는 이미 내것이다. 나는 이미 이겨놓고 싸우는 것이다."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나가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니카오 인생을 살았습니다.
3)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느4:9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는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영리하고 명석하고 총명했습니다. 그래서 확신을 가지고 성공실패를 떠나서 먼저 자기 지혜와 능력으로 일을 처리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들으시나이까? 저 산발랏과 도비야의 방해들을! 하나님이여 역사하시옵소서. 우리를 반드시 승리하도록 말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느헤미야에게 해답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승리의 길을 열어 주시고 진정한 승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내 힘으로 뛸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또 안된다고 걱정과 푸념만 하지 말고 엎드려 기도하세요.
그런데 기도를 해도 효과적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조건 엎드려 매달리지만 말고 기도의 법칙을 적용하면서 기도해 보십시오.
① 기도의 1법칙 : 먼저 잘못한 것을 회개하라.
보통때는 모르지만 문제가 터진 후 엎드려 기도하면 왜 그렇게 죄가 많이 생각납니까? ⇒ 회개해야 합니다.
② 기도의 2법칙 : 확신과 상상력을 동원하라.
반드시 응답, 승리, 성취된다고 믿고 그것을 상상하며 기도해야 함.
"그러므로 나도 이루어진다. 반드시 나는 그렇게 된다.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된다." 라고 상상하며 기도하라.
③ 기도의 3법칙 : 선언과 선포를 하면서 기도하라.
상상할 뿐 아니라 선포를 하십시오. 믿음으로 선포하고 내 안으로, 내 바깥으로 선포하면서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이 문제는 내 밥이다. 이 일은 반드시 해결된다. 우리 아들은 반드시 합격한다." 그러면 그대로 됩니다.
4) 가능성을 찾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한 사람은 반드시 큰 확신이 생길 뿐 아니라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큰 문제도 해결의 가능성이 보이게 됨. 그러면 그 가능성을 향하여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밀어 부쳐야 합니다.
느 4:21-23 우리가 이같이 역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었으며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하고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
얼마나 최선을 다한 모습입니까?
밤에도 일하고 낮에도 일하고 한 쪽은 성을 쌓고 한쪽은 창칼을 들고 파수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갔습니다. 가능성을 향해 정면 돌파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랬을 때 느헤미야는 52일만에 기적적인 승리를 이루어 냈음.
오늘 우리도 기도했으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 문제가 해결됩니다.
ex) 찰스 알렌의 실험 / 똑같이 두 개의 철조망 안에 고기를 넣어 놓고 각각 닭과 개를 넣어봄.
① 닭 : 고기를 먹은 후 주둥이만 자꾸 철조망 구멍으로 넣음. 그래도 안되자 "꼬끼오!"
② 개 : 고기를 먹은 후 개는 처음엔 그렇게 해 보았지만 안되자 사방 팔방 이러저리 다녀봄. 그런데 저 모퉁이 쪽에 조그만 구멍이 있었음. 구멍이 작아서 발로 땅을 더 파더니 마침내 바깥으로 옴.
그것을 보고 알렌이 이런 말을 했음.
① 먼저 닭을 보고 한 말.
"아!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문제로 보는 것이 문제이구나. 절망이 절망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절망하는 것이 절망이구나. 안되는 것이 안되는 것이 아니라 안된다고 가만히 앉아서 자포자기 하는 것이 정말 안되는 것이구나."
② 개를 보고 한 말
"아하! 문제 속에서 문제를 보지 않고 그 문제 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믿음이구나! 절망이 부닥칠 때 절망 속에서 절망할 일을 보지 않고 절망 속에서 절망을 소망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진짜 믿음이구나. 도저히 안되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 부닥칠때도 안되는 것을 보지 않고 안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참 믿음이구나.!"
그래서 위스턴 처칠은 중요한 연설 때마다 말했습니다.
never give up!
여러분! 기도했으면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은 승리의 실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5)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느4:20 너희가 무론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싸우시리라."
마지막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 한 다음,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렇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 다음엔 하나님의 몫입니다. "진인사 대천명"이란 말처럼 내 계획대로 되든 안되든 그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만일 내 기도, 내 계획대로 안 이루어졌으면 하나님은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으면 더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싸우시고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승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할렐루야!
6)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느5:9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
5장을 보면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했음. 우선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 것도 중요하고 성을 파수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나부터 살기가 힘들다고 불평함. 그때 느헤미야가 대회를 소집하고 말함.
불평한다고 뭐가 되는 줄 아느냐? 불평하면 원수와 대적들만 더 좋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더 잘 경외하자.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감사해 버리자. 그것이 우리가 승리하는 비결이다." 그러면서 그는 총독의 녹을 받지 않았음. 그렇게 검소+청빈하게 살면서 오직 하나님만 더 경외하고 감사하는 모범을 보였음. 그럴때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승승장구와 만사형통의 길을 달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낙심하고 절망해도 안됩니다. 오히려 그럴 때 하나님을 더 잘섬기고 더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재앙과 역경은 물러가고 문제가 해결됨. 그리고 승승장구하게 됨. 감사는 문제 해결과 만사형통, 승승장구의 열쇠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싸우실 하나님
느헤미야 4:7-20 / 이수영목사
느헤미야의 영도 하에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는 공사는 주변 족속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중단되지 않고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유다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전체를 두르는 성벽이 중간에 끊어진 데 없이 다 연결되어 그 높이가 절반까지 쌓여 올라가자(느4:6) 주변의 대적들이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백성은 결코 견고한 성을 쌓을 수 없을 것이라며 비웃어(느4:2-3) 그들이 사기와 자신감을 잃고 공사를 포기하게 만들려 한 자기들의 계략이 먹혀들어가지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에 적대적인 족속들은 예루살렘 성의 건축을 막을 다른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으로 몰려가서 공격하고 공사현장을 뒤집어놓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7-8절에 기록되기를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합니다. 그들은 유다 백성을 기습하여 도륙하고 페르시아 왕에게는 유다 백성이 왕에게 반역을 일으켰으므로 그리 했다고 보고를 올리면 그만이고 그러면 페르시아 왕은 성벽 건축을 중단시키는 조서를 내릴지 모른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전에 에스라의 지도 하에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도 그런 모함과 고발로 왕이 조서를 내려 성전 건축이 한 때 중단된 역사(스4:7-24)를 알고 있던 산발랏과 그 일당은 자기들도 그런 식으로 예루살렘 성벽 건축공사를 중단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다 백성 또한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은 그때처럼 이번 예루살렘 성벽 쌓는 공사도 중단될 수 있으리라는 불안감 때문에 공사의 의욕을 상실할 수 있었고 대적들은 그것을 노렸던 것입니다. 유다는 사면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북쪽에는 사마리아가, 동쪽에는 암몬 족속이, 남쪽에는 아라비아 사람들이, 그리고 서쪽에는 옛 블레셋이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아라비아 사람들이 가세한 것은 유다 민족이 회복되고 안정되면 자기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을 빼앗기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옛날 앗수르에 점령당한 이래로 블레셋 족속의 영토는 별도의 주가 되었고 아스돗이라 불리고 있었습니다. 산발랏은 그들까지 반유다 진영의 새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였던 것입니다.
산발랏을 비롯한 대적들의 계략은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한 것 같습니다. 이들의 영향으로 용감했던 유다 백성의 기가 꺾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유다 사람들이 실제로 말하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벅찬 공사노역에 지쳐있었을 유다 백성에게 겁을 주고 내부분열을 일으키려는 대적들의 책동은 끈질기게 계속된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들과 인접하여 살고 있는 유다 백성들 사이에 예루살렘의 유다 백성이 미처 알지 못할 때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기습적으로 공격을 해서 그들을 도륙하고 성벽 공사를 못하게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 소문을 들은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을 지키며 성벽을 쌓고 있던 동족들을 염려하여 그들에게 열 차례나 찾아와 대적들이 공격하기 전에 공사를 내려놓고 자기네들에게 오라고 권면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내부의 유다 백성을 유약하게 만들고 예루살렘 성 수호의 의지와 단결심을 와해시키려는 공작이 상당히 먹혀들어갔던 것입니다. 본문 11-12절의 기록을 보면 “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합니다.
이렇게 내부의 동요를 일으키는 대적들에 맞서 느헤미야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야로 파수꾼을 배치하여 경비를 강화했습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합니다. 또 적의 공격에 가장 취약할 것이라 여겨지는 지점에 방어력을 증강시켰습니다. 본문 13절에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합니다. 공사인력을 줄여가며 성벽방어에 힘을 기울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느헤미야 자신이 상황을 점검하고 온 백성을 안심시키며 하나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싸울 것을 독려했습니다. 본문 14절을 봅니다: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에게서 적들에 대한 불안감을 없이하려고 “크신” 하나님 즉 자기 백성의 편에 계시고 그 적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인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유다 백성이 성벽 건축공사를 포기하기는커녕 경비를 강화하고 공격에 맞서 싸울 대비를 한다는 정보가 대적들에게 흘러들어갔고 유다 백성의 철벽경계로 기습을 감행할 수 없게 된 그들은 무력도발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적들의 공격계획을 미리 알려주셔서 그들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가게 하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렇게 전투준비를 강화했던 예루살렘의 유다 주민들은 다시 성벽 쌓는 일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 15절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이 우리가 그들의 의도를 눈치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일하였는데”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한시도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방비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무장도 강화했습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합니다. 앞선 13절에서는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했다고 했는데 16절의 언급에서는 갑옷과 방패가 보충되었음을 봅니다. 무장을 강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7-23절의 기록은 예루살렘 성을 수호하려는 느헤미야와 그를 좇는 유다 백성의 의지가 얼마나 결연해졌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내가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공사는 크고 넓으므로 우리가 성에서 떨어져 거리가 먼즉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우리가 이같이 공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으며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일하리라.` 하고 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 20절에서 느헤미야는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거듭 거듭 경험하며 확인한 사실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역사를 기억하고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의지할 것을 다짐한 것입니다. 나라는 망하고 많은 백성이 타국에 끌려갔으며 땅은 다른 족속들에게 빼앗겼던 유다 민족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고 새 패권국가가 된 페르시아에 의해 유다는 광복을 얻었으며 잃었던 조국 땅을 되찾고 신앙생활의 자유를 돌려받았으며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다시 건축하여 민족공동체의 재건에 나설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이고 범국민적인 사역은 유다 민족의 부활을 우려하는 주변 이방 족속들의 견제와 방해를 받아 여러 차례 위기와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여러 뛰어난 지도자들과 그들을 신뢰하고 한 마음으로 협력한 백성에 의해 착실하게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이 유다 민족의 광복과 국가재건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대한민국의 광복과 재건의 역사와 너무나도 흡사한 것입니다. 우리도 나라를 잃었었습니다. 남녀 백성이 전장으로 노역장으로 끌려가 일본제국을 위한 희생을 강요당했습니다. 교회도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며 모진 박해를 받아 숱한 순교자를 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미국에게 무조건항복을 하고 미국의 통치 하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광복을 얻었습니다. 땅도 되찾고 국권도 찾았습니다. 신앙의 자유도 되찾았습니다. 우리의 국회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며 출범을 했습니다. 벌거숭이와 같은 상태에서 새 출발을 한 대한민국은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고 지켜주셔서 공산화의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국가재건과 국토개발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가속화하며 경제발전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눈부시게 발전하는 나라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하계올림픽, 월드컵경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이어 동계올림픽까지 유치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건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룬 기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기적이라고 우리는 믿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께 충성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가 안정을 되찾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것 때문에 질시하고 불안해하며 견제하고 방해하려는 세력들이 있는 것도 포로기 후 유다 민족의 재건의 역사와 흡사합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의 숨은 야욕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우리와 인접한 중국은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갈수록 팽창하며 무례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항공모함까지 진수시키며 군사력의 증강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언젠가는 북쪽으로는 백두산을 중심한 국경분쟁과 남쪽 끝에서는 이어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으로 우리와 다툴 가능성이 있는 나라입니다. 일본은 어떠합니까?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해오던 그들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그들의 역사교과서와 국방백서를 통해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명시하는 일을 감행하는가 하면 국회의원들이 자기네 땅을 방문하겠다며 입국을 감행하려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과거 일본제국의 침략주의 근성을 뻔뻔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의 분쟁과 충돌이 계속 빚어진다면 언젠가는 양국군 사이의 무력대치와 충돌까지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때 세계 제2위의 해군력을 자랑하는 일본 해상자위대와 우리 해군의 대결은 처음부터 그 결말이 불 보듯 훤한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세계 제2, 3위를 다투는 나라들을 상대로 나라를 지켜야 하는 우리의 입장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의지할 힘은 느헤미야가 가졌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는 믿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밖에 안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 싸우시고 우리를 지켜주셔야만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잘 믿는 나라와 국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사의 위기의 고비고비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에 순종하는 믿음과 충성된 삶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실하고 충성된 주의 백성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그러셨던 것과 같이 우리를 위해 싸워주실 것입니다. 그 어느 나라도 우리를 넘보지 못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유다 민족과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황의 유사성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중요한 난관을 극복했는가 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곧바로 소중한 교훈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가 있어야 하며 그를 신뢰하고 따르는 국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며 헌신적인 지도자가 되게 하시고 국민은 그를 신뢰하고 힘껏 협력하는 나라가 되어 온 국민이 행복하고 이 나라가 세계평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게 해주실 것을 날마다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광복 66주년을 맞으며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짐하고 실천해야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겠느냐
느헤미야 4-6장 / UBF
요절/ 느헤미야 6:3 “내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오늘 말씀은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52일만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 중건을 마치는 내용입니다. 느헤미야가 거룩한 성을 중건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설상가상, 업친 데 덮친 격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외부에서 대적들이 끈질지게 이 역사를 방해했습니다. 내부에서는 힘든 건축 역사 가운데 흉년이 들어 가난한 백성들이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무엇보다 느헤미야 자신이 안팎의 모든 공격의 표적이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무슨 선한 일을 하고자 하다가도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되면 그만 집어치우고자 합니다. 내가 왜 사서 고생하는가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거룩한 성을 중건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첫째, 외부의 원수와 싸워 이겼습니다(4:1-23).
4:1절을 보십시오. 유다 사람들이 모두 힘을 내어 성을 건축한다는 말을 듣고, 당시 사마리아 총독으로 있던 산발랏은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그는 느헤미야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영향권 아래 있던 유다 사람들이 자기의 영향에서 벗어나 성을 중건하는 것에 크게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화가 나도 왕이 허락한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를 모아 놓고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이는 한 마디로 미약한 유다인들이 되도 안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총독 말이 맞아요, 저들의 건축하는 것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질 것입니다.”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미약함을 바라보게 하고, 힘이 빠지게 하고자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대 유다 심리전을 편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말대로 유다 사람들은 미약하였습니다. 그들은 수도 많지 않았습니다. 성을 건축하겠다고 나섰지만 그들 중에는 성을 쌓아 본 적이 없는 초보 일군이 대부분이요, 심지어 여자나 노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일어나 성을 건축할 수 있게 된 것은 미약한 자신들을 바라보지 않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미약함을 콕 찍어 비웃고 조롱하는 대적들의 말을 들을 때 힘이 빠지고, 자신을 바라보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래 네 말이 맞어, 나는 미약하지, 그래 나 같은 자가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겠어, 그래 관둘게”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이런 비웃음의 숨은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말려들거나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저희의 머리에 돌려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들도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두지 말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보면 느헤미야도 대단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하였을까요? 이는 그가 미약한 백성들에게 믿음을 심고 용기를 심어 선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찬물을 끼얹고 재를 뿌리는 대적들에게 크게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대적들의 말이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는 대적들과 맞서 싸우고자 하는 fighting spirit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적들과 혈과 육의 인간적인 싸움을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로 영적인 싸움을 싸웠습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백성들에게는 자신들의 미약함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계속 성을 건축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랬을 때 성벽 전부가 연결이 되고, 성벽의 높이도 절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대적들의 비웃음에 말려들지 않고, 마음을 들여 일한 결과였습니다. 우리도 무슨 일을 할 때 이런 저런 사람들의 이런 저런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서 일일이 반응하며 혈과 육의 싸움을 싸워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내게 맡겨주신 일을 묵묵히 마음을 들여 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승리의 길이 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산발랏과 사면의 대적들은 그들의 심리전이 아무 효과를 보지 못하고, 성이 중수되어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고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로서는 보통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에도 대적들이 쳐들어와서 다 부수고 불을 질러 성 중건이 좌절된 적이 있었는데, 또 그렇게 된다면 정말 다시 일어서기 힘들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 문제도 하나님께 들고 나가 기도했습니다. 그런 한편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 이중 삼중의 어려움이 가중되었습니다. 하나는 성을 건축하는 백성들이 지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날라야 할 흙 무더기는 태산 같이 많은 데 자신들은 힘이 쇠하였으니, 성벽을 건축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대적들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들려들어가서 살육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고 계속 위협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안 그만두면 쳐들어간다 각오하라’였습니다. 좋게 말로 할 때 빨리 그만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대적들의 근처에 사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빨리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열 번씩이나 간구했습니다. 이로 인해 느헤미야는 얼마나 답답하고 가슴을 짓누르는 짐과 고통을 느꼈겠습니까? 그도 사람인데 망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하고, 괜한 일을 내가 시작했다는 후회가 들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런 상황이 되었다고 해서 위축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느헤미야는 fighting spirit을 가지고, 맞서 싸우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도 fighting spirit을 심었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느헤미야는 성 뒤 낮고 넓은 곳에 백성으로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모이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말없이 그들을 한바퀴 둘러보았습니다. 일순 긴장과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러면서 아직 군대 제대한 지 얼마 안 되는 박 모 예비역 병장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습니다. “니 두렵나?” 그러나 그는 말했습니다. “예, 두려워유” 그러자 아직 군대를 안 갔다 와 뭘 모르는 모 목동이 눈 빛을 빛내며 나 한테 물어봐요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눈 빛을 쳐다보며 “니 두렵나?”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닙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힘껏 복창했습니다. 그러자 느헤미야는 단상으로 펄쩍 뛰어 올라서며 말했습니다.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를 위하여 싸우라.” 분명 그들이 처한 상황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향해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백성들을 선한 손으로 도우십니다. 이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백성들을 크고 강한 손으로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주님을 기억함으로, 어떤 상황 앞에서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대신 fighting spirit을 가지고 대적들과 싸워야 합니다. 나의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과 양들을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fighting spirit을 갖고 싸우고자 하고, 백성들에게 싸우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를 심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맞서 싸우고자만 했는데도, 대적들이 안되겠다며 계획을 포기해버렸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싸우고자 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부전승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싸우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빠져 뒤로 물러서는 자에게는 부전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일을 할 때, 어떤 대적들과도 맞서 싸우고자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미약함을 보지 않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맞서 싸우고자 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반드시 승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느헤미야는 방심하지 않고 유다 백성들을 조직적으로 배치시켰습니다. 먼저 자신의 부하들의 절반은 일을 하게 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도록 하고 창과 방패와 활로 무장을 시켰습니다. 민장들은 유다 온 족속들의 뒤에 있으면서 상황을 살펴보며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또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들은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으로는 병기를 잡도록 했습니다. 성벽을 쌓는 자는 허리에 칼을 차게 하였고, 나팔 부는 자는 항상 비상 나팔을 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기 곁에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위기 상황이 생기면 나팔을 불어 모든 사람들이 한 곳으로 모여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너희가 무론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이렇게 철저히 대비하면서 동시에 계속해서 성을 쌓았습니다. 이때 백성들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습니다. 또 모든 사람들은 밤에도 예루살렘 성 안에 자면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힘을 다해 일하고 밤에는 파수를 섰습니다. 느헤미야 자신도 백성들과 함께 자면서 함께 싸우고 함께 일했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백성들과 함께, 잠을 잘 때도 옷을 벗지 않았고, 물을 길러 갈 때도 무기를 놓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는 원수들의 위협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원수들과 싸우는데 신경쓴다고 해서 성을 쌓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들다며 잠시 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며 일하고, 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웠습니다. 그는 한 손으로 일하고, 한 손으로 병기를 잡게 했습니다. 그는 절반은 파수하게 하고, 절반은 일하게 했습니다. 그는 밤에는 파수하게 하고 낮에는 일하게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떤 경우에도 일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계속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는 맡은 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확고한 목표의식을 자기고 줄기차게 일했습니다. 김태환 목동님을 보면 영어공부를 이런 자세로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랬을 때 토익 점수가 900점도 넘게 나왔습니다. 이제 이분이 하나님의 선한 일도 이런 자세로 하는 것을 배우면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려 한다면 이런 느헤미야의 자세를 깊이 배워야 합니다. 이런 자세를 배울 때, 우리는 기도하며 공부하고, 공부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한 손으로 공부하고, 한 손으로 1:1을 할 수 있습니다. 낮에는 직장생활하고, 밤에는 목자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단의 비웃음과 위협도 이기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거룩한 성을 쌓을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목자님들은 누구보다 이런 자세를 배움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줄기차게 1:1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때 캠퍼스에서 예수님의 참 제자를 키우고, 세계선교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느헤미야의 fighting spirit과 일하는 자세를 배우도록 도우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내부의 문제와 싸워 이겼습니다(5:1-19).
느헤미야가 외부의 원수들과 힘써 싸우며 성을 건축하는 동안 내부에서 문제가 터지게 되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힘든 건축 역사를 하고 있는 중인데 흉년이 겹치면서 백성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그 형제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는 많은 데 흉년이 들자 이제 곡식을 얻어먹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전당 잡히고 곡식을 얻고자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어 세금을 바쳤기에 아예 전당잡힐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종으로 팔아야 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난한 백성들이 이런 어려움을 겪는 데도 일부 귀인들과 부자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 재산을 저당 잡거나 아니면 자녀를 종으로 주어야 곡식을 빌려주고, 이자까지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원망이 터져 나오고, 공동체 전체가 술렁거리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게 백성들 사이에 합심동역의 그릇이 깨어지고, 이대로 가다가는 성벽 재건 자체가 중단될 수도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이런 부르짖음을 들었을 때 크게 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귀인과 민장들을 꾸짖었습니다.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를 하는도다.” 느헤미야는 가난한 이웃을 그냥 도와주어도 시원치 않을 그들이 이기심과 탐욕에 병들어 형제에게서 이익을 취하고자 한 죄악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회를 열고 공개석상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8-11절을 보십시오. 느헤미야는 포로생활을 하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동족들을 돌아보고 속량했는데,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왔는데도 동족들을 돌아보지 않고 있음을 개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얼마나 옳지 못한 행동이며, 이방 사람이 욕할 짓이요,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이자 받기를 그치고, 오늘이라도 이자로 받은 것은 다 돌려보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느헤미야의 단호하고도 분명한 책망을 들은 부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대로 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이 말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떨치실지니라.” 엄중히 경고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다 아멘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말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느헤미야는 자기가 유다에서의 총독 생활을 어떻게 했는지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그 자신이 성령의 그릇을 이루기 위해 평소에 얼마나 힘썼는가를 말하고자 함이었습니다. 14-19절을 보십시오. 그는 12년 동안 총독 생활을 했지만 한번도 총독의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벽 건축 역사에 힘을 다해 헌신하였으며 자신의 부하들까지 다 동원시켰습니다. 식사시간마다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150명을 기본적으로 초청하고 그 외에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비록 이같이 했을지라도 12년 동안 한 번도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이같이 한 것은 백성들의 부역이 중함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백성들의 고난과 아픔을 깊이 이해하는 선한 목자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적인 삶을 살므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성령의 그릇을 힘써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때 내부의 그릇이 깨어지는 문제가 생길 때 잘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캠퍼스 영적 부흥역사를 합심하여 섬기려고 하면 외부의 대적들을 일으켜 우리를 훼방할 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문제를 일으켜 방해하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사단은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사람들, 인본적인 사람들에게 먼저 역사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합심동역의 그릇, 성령의 그릇을 깨뜨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버리고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나게 함으로 남은 사람에게 두려움과 회의를 심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만 희생적으로 섬기기보다 적당히 섬기게 하면서, 희생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그릇이 깨어지면 아무 역사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누구보다 이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백성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이를 해결하고 다시 합심동역의 그릇을 이루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릇을 이루기 위해 가진 자, 여유 있는 자들이 양보하고 섬기도록 방향을 주었습니다. 또 자기 자신도 이를 위해 항상 희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그릇을 이루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힘써 지켜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서로 섬기고 사랑하고 양보하며 희생적인 삶을 살며, 성령의 그릇을 깨는 죄의 세력과 힘써 싸워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6:1-19).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을 물리치고 일치단결하여 성벽 건축 역사에 전념한 결과 거의 다 완공이 되었습니다. 다만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산발랏과 도비야와 대적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느헤미야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느헤미야에게 편지를 써서 오노 평지의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대화가 없었던 것이 문제인 것 같다며, 이제 대화를 하면서 서로 좋게 지낼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들의 속셈을 알고 이러한 제안을 즉시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사자를 보내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느헤미야는 자신이 지금 큰 역사를 하고 있으므로 내려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에 대적들은 이 역사를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하찮은 일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볼 때 이 일은 어떤 일보다도 큰 역사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 역사는 어떤 경우에도 현장을 떠나거나, 정지하게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였습니다. 대적들은 이런 느헤미야를 불러내기 위해 네 번이나 계속해서 똑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요동치 않고 역시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그러나 산발랏도 끈질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섯 번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며, 다섯 번째 편지를 또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편지를 봉하지 않고 보냈습니다. 그들은 그 편지에서 느헤미야가 성을 쌓고 왕이 되어 모반하려 한다는 소문이 들리니, 자신들을 만나면 잘 해결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느헤미야가 반역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바사 왕에게 들어가는 날에는 즉시 반역자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편지는 위협적인 것이었으며, 느헤미야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그들은 네가 반역자로 몰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와서 의논하자며 회유와 위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답장을 써서 그런 일은 원래 없었던 일이요 모함이므로 전혀 개의치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손을 힘있게 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후 선지자 스마야가 두문불출 하기에 그 집에 찾아갔더니 그가 느헤미야에게 겁을 주었스니다. 대적들이 밤에 몰래 느헤미야를 암살하려 함으로 빨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숨고 그 문을 닫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성소는 원래 제사장 외에는 아무나 그곳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적들은 느헤미야가 성소에 들어가도록 유혹한 뒤, 그렇게 하면 모함하여 죽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느헤미야는 이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그는 구차하게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도망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결코 도망쳐서는 안 되는 자신의 위치를 알았습니다. 그가 생명에 연연하여 두려워 도망치면 누가 대적들의 위협 앞에 버틸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제사장도 아니고, 더더욱 환관 출신으로서 고자였기에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다 죽게 되면 죽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생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맡은 역사를 더 귀히 여겼습니다. 그가 이런 자세가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가 범죄하지 않고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셨습니다. 대적들은 거룩한 성을 중건하는 역사에 가장 중요한 인물인 느헤미야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그의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기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자기와의 가장 힘든 싸움에서도 이겼습니다. 사람이 자기 생명에 연연하게 되면 사단의 종이 되고, 오히려 생명을 잃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이 그를 이길 수 없는 불굴의 삶을 살게 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 모든 방해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 역사가 오십이 일 만에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모든 대적들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며 낙담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이 역사를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 중건의 역사는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의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역사는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역사를 선한 손으로 도우시고, 친히 이루셨습니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이 하나님을 믿었고, 모든 대적들과 어려움과 싸우고자 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 거룩한 성이 중건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젊은 시절 무지와 교만과 정욕 가운데 살 우리를 그의 종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캠퍼스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순종하는 예수님의 참 제자를 키우는 거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맡은 이 역사는 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 크고 중대한 일임을 믿습니다. 우리의 생명보다 귀한 일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새해에도 이 큰 역사를 떠나지 않고, 느헤미야처럼 절대적인 자세로 충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 성벽을 쌓을 때
느헤미야 4~6:16 / 계강현 목사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살던 유대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페르시아 제국 고레스 왕 원년에 있었던 일이다. 세 차례에 걸쳐 유대 포로들이 고국으로 귀환했다. ① 1차 귀환(B.C. 538) - 총독 스룹바벨/ 성전 재건 ② 2차 귀환(B.C. 458) - 학사 에스라/ 영적 개혁운동, ③ 3차 귀환(B.C. 445) - 총독 느헤미야/ 성벽 재건. 93년 동안 세 번 귀환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와 동시대 인물로 느헤미야서에도 나오지만, 조금 먼저 사역을 했다. 한 번 외워보라!
이렇게 3차에 걸쳐 귀환한 유다백성들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과 영적 개혁운동과 성벽 재건은 매번 여러 가지 방해를 겪으면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은 적들의 방해로 16년 동안이나 중단되었다가 기초를 놓은 지 20년 만에야 겨우 완공했다. 에스라의 영적개혁운동도 이방혼인이라는 죄악과 싸워야만 했다.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도 마찬가지로 원수들의 방해가 심각했다. 적은 백성을 데리고 예루살렘 전 성벽을 재건하기엔 너무 방대한 공사였고, 백성들은 왕에게 세금을 바치느라 가난하였고 집과 밭을 저당 잡혀야 했고, 굶주렸다.(느 5장) 누가 봐도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그 성벽 재건을 단지 52일 만에 이루어낸 것이다. 이게 예루살렘이 무너진 지 140년 만의 일이다. 그것도 원수들이 집요한 방해 속에 일궈낸 그야말로 기적이다. 이 성벽재건이 왜 그리 중요한가 하면 이 성벽 울타리가 든든하게 지켜줘야 이스라엘 공동체가 모여 성전 중심으로 안심하고 예배하고 하나님나라를 세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성벽 재건 얘기는 오늘 우리의 목장과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사역의 얘기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사역을 안전하게 해나갈 수 있을까?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때 크게 두 방면의 공격이 있다. 외부적인 공격이고, 또 하나는 내부적인 공격이다. 그런 공격 속에서 영적 리더십은 진가를 발휘하고 그 공격을 이겨나갈 때 열매를 거둘 수 있다.
1. 외부의 공격을 이겨내는 리더십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성벽 공사가 조직적으로 진행되자, 원수들의 방해공격이 시작됐다. 사마리아의 총독인 산발랏과 그의 종 도비야가 그 대표였다. 4:1-3, “우리가 성벽을 다시 쌓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산발랏은, 몹시 분개하며 화를 내었다. 그는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2 자기 동료들과 사마리아 군인들이 듣는 데에서 ‘힘도 없는 유다인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냐? 이 성벽을 다시 쌓는다고? 여기에서 제사를 지내겠다는 거냐? 하루 만에 일을 끝낸다는 거냐? 불타 버린 돌을 흙무더기 속에서 다시 꺼내서 쓸 수 있다는 거냐?’하고 빈정거렸다. 3 그의 곁에 서 있는 암몬 사람 도비야도 한 마디 거들었다. ‘다시 쌓으면 뭘 합니까? 돌로 성벽을 쌓는다지만, 여우 한 마리만 기어 올라가도 무너지고 말 겁니다.’” 조롱과 공개적인 비웃음을 보낸 것이다. 여러분도 그런 조롱과 공개적인 비웃음을 당한 적이 있나? 그때 어떠했나?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남을 조롱하거나 공개적으로 비웃어서는 안 된다.
이어서 주변 나라 사람들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무장공격을 꾀하려 했다. vv7-8, “그 때에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랍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잘 되어가고 있으며, 군데군데 무너진 벽을 다시 잇기 시작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몹시 화를 내면서, 8 한꺼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성을 치기로 함께 모의하였다.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것이었다.” “왜 다 나만 공격해!” 그런 느낌이 든 적이 없나?
건축이 진행되는 단계마다 더욱 야비한 형태의 공격이 들어왔다. 다음에는 한번 만나서 대화로 해결하자는 회유책으로 위장한 암살음모가 이어졌다.(6:2-4) 큰 공사를 하므로 갈 수 없다고 대답하자, 네 번씩이나 똑같은 전갈을 보냈다. 그때마다 느헤미야는 같은 말로 대답했다. 그러자 위험한 중상모략과 비난이 담긴 공개서한을 보냈다.(6:5-8) 느헤미야가 성을 쌓는 것은 페르시아 왕에 대해 반역을 꾀하려는 시도라고 주의에 소문이 파다한데, 한 번 만나서 얘기해보자는 내용이었다. 그때에도 느헤미야는 사실이 아닌 꾸며낸 얘기에 불과하다고 단호하게 답했다. 느헤미야는 정말 위태위태한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마지막에는, 느헤미야를 영적인 곤경에 처하게 만들려고 유대인 제사장을 통해 거짓 예언을 하게 했다. 6:10-13, “하루는 스마야를 만나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들라야의 아들이며, 므헤다벨의 손자인데, 문밖출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갑시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성소 출입문들을 닫읍시다. 자객들이 그대를 죽이러 올 것입니다. 그들이 밤에 와서, 반드시 그대를 죽일 것입니다.’ 11 나는 대답하였다. ‘나 같은 사람더러 도망이나 다니란 말입니까? 나 같은 사람이 성소에 들어갔다가는 절대로 살아나올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는 못합니다.’ 12 나는 그 때에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매수되어서, 나를 해치는 예언을 하였다. 13 그들이 스마야를 매수한 것은, 나에게 겁을 주어 성소를 범하는 죄를 짓게 하여서, 나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나를 헐뜯으려는 속셈이었다.” 참고로 성소는 제사장만 들어가는 장소이다.
지금 내가 장황하게 뭘 얘기 하려는 건가? 원수의 외부공격이 집요하고 치밀했다는 얘기다. 우리가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들어 신약교회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할 때 원수마귀는 비상을 걸고 갖은 모략을 다해 주위 사람들을 동원하여 방해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거의 모든 방해공작이 야비한 심리전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렇게 공격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실망과 두려움을 불어 넣으려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두려움을 갖게 함으로 성벽 재건을 중단하게 하려는 것이다. 6:9, “그들은 우리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겁을 먹고 공사를 중단하여, 끝내 완성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 그렇다! 원수의 공격은 우리로 하여금 겁을 먹고 두려워하게 함으로써 영혼 구원, 제자 만들기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중단하고 포기하게 하는 게 목적이다.
여기에 반해 느헤미야의 모든 공격에 대한 대응책은 오직 한 가지 목적,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성벽 재건을 완성하는 것에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원수의 공격과 방해에도 우리는 교회에게 주신 사명,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자, 성령님의 지원이 있는 영혼 구원, 제자 만드는 사역에 목적을 둔다. 이 목적을 위해서 느헤미야가 취한 구체적인 목표와 방법을 우리도 배우자.
1) 기도생활 – 원수 산발랏과 도비야의 조롱과 공개적인 비웃음을 듣자마자, 느헤미야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 4:4-5, “우리의 하나님, 들어주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업신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제발, 우리에게 퍼붓는 그 욕이 그들에게 되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고, 남의 나라로 끌려가게 하여 주십시오. 5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마시고, 그들의 죄를 못 본 체하지 마십시오. 그들이야말로 성을 쌓고 있는 우리 앞에서 주님을 모욕한 자들입니다.” 즉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걸 반사기도라고 한다. 저주를 퍼부을 때 맞서 저주하지 말고 반사! 하면서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느헤미야의 기적의 출발은 다름 아닌 기도에 있다. 그의 리더십은 기도에 기초한다는 말이 맞다. 그만큼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다. 그의 기도의 특징은?
① 공동체적인 관심의 기도 -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 즉 경호실장 같은 측근 관리로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달에 안주하지 않고, 유대에서 온 친구로부터 예루살렘 백성들이 환란을 당하고 있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소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즉시 슬퍼하며 수일동안 금식기도하기 시작했다.(v4) 그는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한 관심을 기도로 아뢰길, v6, “이제 이 종이 밤낮 주님 앞에서 주님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드리는 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살펴 주십시오.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은 것을 자복합니다. 저와 저의 집안까지도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과 이스라엘의 죄를 회개하며 기도했다. 우리도 나와 가족을 위한 좁은 기도에서 목장과 교회 공동체와 vip와 나라 민족과 선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② 일보다 선행된 기도 - 우리는 느헤미야를 통해서 만사에 기도가 선행되어야 함을 배운다. 그는 예루살렘의 비보를 듣자마자, 누굴 만나 상의하거나 계획을 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 꿇고 기도했다.(1:5) 그의 기도는 넉 달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2:1)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확인될 때까지 그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 것이다. 후에 아닥사스다 왕이 뭘 원하는 지 물어보는 기회가 왔을 때 느헤미야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다. 2:4-5b,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왕께서 또 나에게 물으셨다. 나는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나서, 5 왕에게 말씀드렸다” 그는 항상 기도를 선행함으로 삶의 지혜를 얻은 사람이다.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확신 속에서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여러분도 무슨 일이 있거든 먼저 기도하라. 어떤 대화를 나눌 때 먼저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러면 지혜 주시고 할 말을 입에 주신다. 언제나 위대한 일은 기도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인생에게는 아무 염려가 없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염려와 걱정뿐인 인생이 되고 만다. 고든(A.J.Gordon) 목사는 ‘기도한 다음에는 기도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하기까지는 결코 기도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목장사역은 기본적으로 기도사역이다. 목자 목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사실 아무 것도 없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목원이 빚져서 사업이 망하겠는데, 뭘 할 수 있겠나? 우울증으로 죽고 싶어 하는데, 뭘 할 수 있나? 부부가 갈등이 심각해 이혼하려는데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전문가가 상담해도 안 되는 문제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일이다. 일 터지고 기도하지 말고, 그것도 있어야겠지만, 그보다 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라. 기도가 전부다. 기도하면 성령이 음성 들려주시고 가르쳐주시고 인도해주시기 때문이다. 기도를 먼저 하면 실수를 줄일 수 있고, 열매를 거둘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 기도로 먼저 승리하는 나와 여러분이기를 축원한다.
③ 책임지는 기도 - 느헤미야는 “하나님, 다른 누군가를 통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고 기도했다. 그래서 1:1, “주님, 종의 간구를 들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주님의 종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제 주님의 종이 하는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여 주시고 왕에게 자비를 입게 하여 주십시오.” 이 일을 이루는데 자신을 사용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위관직을 내놓고 오직 하나님 영광을 위해 책임졌다. 기도 중에 가장 끔찍한 기도는 자신은 쏙 빼놓고 설교하듯이 기도하는 기도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사랑이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자신은 쏙 빼놓고 정죄하는 식으로 하는 기도는 정말 듣기 힘든 기도이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바리새인적 기도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이렇게 사랑이 부족한데, 제가 그 일에 앞장 선 장본인입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맞다. 에스더 왕비처럼 “그러다가 죽으면, 죽으렵니다.”(더 4:16) 책임지는 기도를 하나님이 즐겨 들어주신다.
④ 지속적인 기도 - 느헤미야는 지속적인 기도를 했다. 예루살렘의 비보를 접하자마자, 금식했고, 4개월 동안 주야로 기도했다.(2:1) 왕 앞에 설 때에도 기도했다. 고국에 돌아와서도 기도하며 돌아보았고 기도가 생활화되어 있었고, 원수의 공격을 받는 순간순간에도 그는 항상 기도로 맞섰다. 4:8-9, “한꺼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성을 치기로 함께 모의하였다.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것이었다. 9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우리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비병을 세워, 밤낮으로 지키게 하였다.” 성벽을 지은 후 왕에게 반역을 꾀하려는 소문이 퍼져있으니 한 번 만나자는 회유와 위협에도 6:9, “하나님,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 기도했다. 거짓 예언으로 성소에 들어가게 함으로 명예를 떨어뜨리고 헐뜯으려는 흉계에도 6:14, “나의 하나님, 도비야와 산발랏이 한 일을 잊지 마십시오. 예언자 노아댜와 그 밖에 나에게 겁을 주려고 한 예언자들이 나에게 한 일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기도했다. 성전 개혁을 한 후에도 기도했다. 13:14, “하나님, 내가 한 일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성전을 보살핀 일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정성껏 한 이 일을 잊지 마십시오.” 제사장들을 거룩하게 한 이후에도 기도드렸다. 13:31,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십시오.” 시작과 과정 그리고 마무리가 모두 기도로 점철된다. 그의 기도의 특징은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벽을 완성한 느헤미야의 리더십은 기도의 리더십이고, 느헤미야서는 기도의 책이다.
2) 영적 분별력 - 느헤미야의 영적 분별력은 탁월하다. 원수들의 공격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적절하게 대처하고 있다. ① 조롱과 공개적인 비웃음에는 맞대응하지 않고 저들의 저주를 반사하는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었다. 4:4-5, “우리의 하나님, 들어주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업신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제발, 우리에게 퍼붓는 그 욕이 그들에게 되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고, 남의 나라로 끌려가게 하여 주십시오. 5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마시고, 그들의 죄를 못 본 체하지 마십시오. 그들이야말로 성을 쌓고 있는 우리 앞에서 주님을 모욕한 자들입니다.” ② 그러면서도 성벽 쌓는 일을 계속했다. ③ 대적들이 연합전선을 구축해서 쳐들어오려 하자, 백성 가운데 얼마를 가문별로 칼과 창과 활로 무장시켜 성벽 뒤 낮은 빈터에 배치했다. ④ 그리고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보고 격려했다. 4:14,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위대하고 두려운 주님을 기억하고, 형제자매와 자식과 아내와 가정을 지켜야 하니, 싸워라.” ⑤ 또 젊은이들 가운데 반은 일하게 하고 나머지 반은 창과 방패와 활과 갑옷으로 무장하고 성벽을 쌓는 백성들 뒤에 진을 치게 했다. ⑥ 그래도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위대하고 두려운 주님을 기억하고, 형제자매와 자식과 아내와 가정을 지켜야 하니, 싸워라.”(4:14) 적절하게 격려했다. ⑦ 짐을 나르는 사람들은 한손으로 짐을 나르고 남은 손으로 무기를 잡게 했다. 성벽을 쌓는 자들도 허리에 칼을 차고 일을 하게 했다. ⑧ 또한 나팔수를 옆에 두어 어디서든 나팔소리가 들리면 그곳으로 합세하여 싸우도록 지시했다. ⑨ 한 마을로 와서 만나자는 흉계도 간파하고 네 번씩이나 거절했다. 페르시아 왕에게 반역을 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으니 한 번 만나 얘기하자는 회유와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초지일관 거절한 채 계속 공사를 진행해나갔다. ⑩ 거짓 예언자를 통해 암살계획이 있으니 성소로 피하라는 예언을 듣고도 그는 원수에게 매수되어 거짓 예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원수의 공격과 방해공작에 맞춰서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 이게 전부 다 그의 기도생활에서 온 하나님의 지혜이다. 약 1:5,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
원수와 싸울 때 우리에게 이런 지혜와 영적 분별력이 정말 필요하다. 우리는 항상 나 자신도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사단에게 누구나 이용당할 수 있다. 목사도 장로도 목자 목녀도 말이다. 그 좋은 실례가 베드로 아닌가?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막아서서 말리는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 16:23) 책망했다. 그래서 우리가 선한 동기, 좋은 의도가 있다고 절대로 안심하면 안 된다. “저 사람은 착한 사람이야!” 아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여러분은 좋은 의도로 말하는지 몰라도 얼마든지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지혜를 구해서 영적 분별력을 갖고 살아야 한다.
3) 비전과 열정(passion) - 결국은 원수는 성벽 재건을 못하도록 갖은 위협과 회유와 방해하는 것이다.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이뤄내고야 마는 비전, 열정을 갖고 있기에 그 목적을 향해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 모든 방해공작에 적절하게 대처하면서 결국 해내고 말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목적을 향한 강한 비전과 열정에서 비롯된다. 우리 교회도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고, 생각도 많고 의견도 많을 수 있고 목소리 높은 사람도 있지만, 삼위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명령하시고 지원하시는 영혼 구원, 제자 만들기 라는 교회의 사명에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설득되어 같은 목적을 품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참 부흥을 이룰 수 있다. vv21-23, “우리는 이른 새벽부터 밤에 별이 보일 때까지 일을 하였다. 우리 가운데 반수는 창을 들고 일을 하였다. 22 이 기간에 나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밤에는 저마다 자기가 데리고 있는 부하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와 묵으면서 경계를 서고, 낮에는 일을 하여라.’ 23 나도, 나의 형제들도, 내가 데리고 있는 젊은이들도, 나를 따르는 경비병들도,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옷을 벗지 않았으며, 물을 길러 갈 때에도 무기를 들고 다녔다.” 이런 열정이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 주님! 우리에게 이런 열정을 더하여 주십시오.
2. 내부의 공격을 이겨내는 리더십
5장에는 내부 문제가 나온다. 이젠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 동역자들 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즉, 다시 말하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사단이 외부를 흔들려다가 안 되니까 이제 교회 내부를 흔들고 있다. 사실 어떤 문제든지 외부 문제보다 내부 문제가 훨씬 심각한 문제다.
어떤 문제인가? 백성들이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왔다. 남편들이 성벽 재건에 불려나가 일할 때 부인들이 어려움을 호소한 것이다. v3에 흉년에 곡식을 얻기 위하여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을 잡혔다. v4에 어떤 사람들은 왕에게 세금을 바치기 위해서 밭과 포도원을 잡히고 돈을 빚을 냈다. 또 어떤 사람들은 v5에 빚을 갚지 못하자 심지어 자기들의 자식을 종으로 파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런 문제는 대부분 귀족과 부자들에 의해 발생한 문제였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일어나게 되니 공동체 안에서 불만과 원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까닥 잘못하면 성벽 재건은 고사하고, 나라 전체가 내란으로 붕괴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교회도 그렇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참 강하게 대처했다. 외부로부터 핍박이 오면 성도들은 서로 똘똘 뭉쳐서 하나가 된다. 그런데 교회가 좀 평안해지면 교회 내부에서부터 세속주의가 들어오고 인본주의, 물질주의의 욕심과 질투와 시기와 미움과 이기심이 갈등을 불러 일으켜 서로 헐뜯고, 비난하고, 험담하고, 불평 원망하고, 갈라서고 결국 무너지기 쉽다.
느헤미야는 그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 5:6, “그들의 울부짖음과 탄식을 듣고 보니, 나 또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지도자는 분노부터 터뜨리고 나면 안 된다. 그는 먼저 신중히 살폈다. 5:7-8, “나는 그들이 울부짖는 내용을 신중하게 살핀 다음에” 기도하며 신중하게 살필 때 영혼을 실족시키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이 일하게 된다. 그리곤 귀족과 부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책망했다. “귀족들과 관리들에게, 어찌하여 같은 겨레끼리 돈놀이를 하느냐고 호되게 나무랐다.” 때론 지도자의 책망이 필요하다. 위로만 받으려 하지 말고 책망을 달게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다. 또한 대회를 열어서 공개적으로 처리했다.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하겠기에, 나는 대회를 열고서, 8 귀족들과 관리들에게 말하였다.”
감사하게도, 귀족들과 관리들이 “(저당 잡은 밭과 집을) 모두 돌려주겠습니다. 그들에게서 (이자를) 아무것도 받지 않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 죄를 뉘우치며 느헤미야의 말에 순종하기로 결단했다. 가진 자, 먼저 믿은 자들이 없는 자, 나중 믿은 자들을 공감해주고 배려해주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때도 느헤미야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5:12, “나는 곧 제사장들을 불러 모으고, 그 자리에서 귀족들과 관리들에게 자기들이 약속한 것을 서약하게 하였다.” 일 보러 갈 때와 보고 나서가 다르다. 그래서 서약이 필요하다. 부모님들이 혹시 돌아가실 임박에 예수영접하고 돌아가시면 꼭 동영상 찍어 놔라. “나 죽거든 꼭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해다오.” 안 그러면 믿고 천국에 가셨어도 나중에 안 믿는 가족들 때문에 제사상 차리고 장례해야 한다. 또 느헤미야는 그들을 경계시켰다. 5:13, “나는 또 나의 주머니를 털어 보이면서 말하였다. ‘이 서약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집과 재산을 이렇게 다 털어 버리실 것입니다. 그런 자는 털리고 털려서, 마침내 빈털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럴 때 든 사람이 “아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백성은 약속을 지켰고 행복해졌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언제나 해피엔딩이다.
내부의 공격은 서로 회개하고, 가진 자가 희생하고 신앙 좋은 자가 섬기기로 하고, 허물을 덮어주고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이 하나 되는 방법이다. 철저하게 각자 회개하는 거다. ‘아직도 내가 그까짓 것도 못 받아주는 좁은 마음이구나!’ 회개하고,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그냥 넘어가는 거다. 이게 성숙이다. 내 자존심을 좀 꺾고 내려놓고 공동체가 사랑으로 하나 되도록 나를 좀 희생하는 거다.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모든 걸 다 마귀의 공격이라고 하면서 맨날 마귀 내쫓는다고 쉿쉿 거리며 산다. 그러나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외부의 원수의 공격에는 기도하며 대항하고 지혜롭게 물리쳐야 된다. 그러나 내부의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회개하고 공동체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럴 때 거기에서 영적 권위가 생기고 회복이 일어나고 치유와 하나 됨이 일어난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요청할 때 왜 귀족들과 관리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사리 포기하고 순종했을까? 그것은 v14ff에 나오는 느헤미야의 솔선수범하는 희생적이고 청렴한 삶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의 말은 파워가 있었다. 희생에서 영적 권위가 나오는 거다. 그 권위에 복종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갈등이 해결되고 하나 되는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공격이 더 거센가? 외부 공격과 내부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걸 이겨내는 리더십으로 계속해서 가정과 목장과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 성벽을 쌓아가길 축원한다. 아멘
비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느 4:1-6 / 조상호목사
요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 교회 안에 자전거를 타는 분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집에 차가 두 대나 있는데도 어느 형제님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이른 시간에 새벽기도회에 자전거를 타고 오는 분도 있고, 한 대에 4,000불(?)이나 되는 자전거를 타고 주일에 교회에 오는 분도 있습니다. 주말 뿐 아니라 주중에도 학교를 갈 때나 직장에 출근할 때, 자전거를 타고 가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산성광침례교회를 섬기는 유관재목사님이 국민일보에 실은 글에 보니까, 원래 이 자전거는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던 19세기 초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산림청 책임자였던 독일의 귀족 ‘카를 폰 드라이스’(Karl von Drais·1785∼1851)는 관할지 시찰을 위해 말 이외에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자전거와 비슷한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가 1817년입니다. 처음에 그가 만든 자전거는 안장에 올라타고 상체를 세운 채 걷거나 뛰는 것처럼 좌우의 발로 땅바닥을 번갈아 차면서 그 추진력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드라이지네(draisine)’ 또는 라틴어로 ‘빠른 발’을 뜻하는 ‘벨로시페드(velosipede)’로 불려졌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시도를 비난했습니다. 그가 만든 벨로시페드를 ‘사람을 말이나 마차로 만드는 이상한 발명품’으로, 이전에 동물이 하던 일을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또 ‘하찮은 것’ ‘우스꽝스러운 것’ ‘선박을 끌고 운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 ‘고귀한 인간에게 홀로 경주하게 만드는 것’ 등으로 폄하하며 혹평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난과 혹평을 받은 자전거가 200년이 지난 요즘에는 올림픽의 정식 종목이 되었고, 국가와 지방자치 단체마다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고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자전거 타기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최초로 자전거를 만든 ‘카를 폰 드라이스’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본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비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전거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비전이 비난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비전으로 사는 사람은 비난을 극복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바로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느헤미야 강해설교 여섯 번째로 “비난을 극복해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비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비전의 사람과 비난의 사람, 등 두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비난의 사람
먼저 비난하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려는 느헤미야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벽재건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바로 산발랏과 도비야였습니다. 당시 산발랏은 사마리아 지역의 총독이었습니다. 유대의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 성전은 이 산발랏에 의해 건립되었고, 이 성전의 대제사장으로 자기 사위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든지 사실이 아니든지, 사마리아를 다스리고 있는 산발랏은 무너져있는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루살렘 성이 재거되면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느헤미야가 주축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걱정하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1절에서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산발랏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아니 당황하다 못해 크게 분노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난했습니다. 2절을 보면, 산발랏의 비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같이 2절을 보겠습니다.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산발랏은 질문 형식을 사용하여 다섯 가지로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난했습니다.
1) ‘미약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라고 비난했다
첫째로 그는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라고 말하며 비난했습니다. 여기 ‘미약하다’는 말의 원어 ‘아말’은 ‘나무가 시들어 말라 비틀어지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주로 소망이 없는 암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산발랏은 지금 권력을 갖고 있는 자기 친형제들과 사마리아 군인들이 듣는 데서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라 비틀어버린 고목나무로 비유하며 조롱하고 비난했습니다.
2)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라고 비난했다
둘째로 그는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라고 비난했습니다. 여기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는 말은 반어법인데, 이 말은 ‘너희들 힘으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딸이 퀸스타운까지 혼자 운전해서 간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네가 혼자 운전하려고 그러니‘라고 말할 때가 있는데, 이 말은 아직은 혼자서 퀸스타운까지 운전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산발랏은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수 없다고 무시하며 비난했습니다.
3) ‘제사를 드리려는가‘라고 비난했다
셋째로 그는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를 드리려는가’라고 비난했습니다. 여기 ‘제사를 드리려는가’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심을 조롱하는 말입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언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려고 그러느냐 그것은 착각이다‘ ’예배한다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이 재건될 수 있을까‘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무시하고 신앙심을 조롱하며 비난했습니다.
4)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라고 비난했다
넷째로 그는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라고 비난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재건공사를 마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하루 만에 모든 공사를 마치겠다고 말한 적도 없고, 하루 만에 공사를 끝내려는 마음조차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쳐 있었고, 또 몇몇 사람들은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고 말할 만큼 힘이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발랏은 그들을 더욱더 낙심케 하며 비난했습니다.
5)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라고 비난했다
다섯째로 그는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 재건에 필요한 자재들을 확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질적으로 매우 궁핍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서 자재를 가져올 수 있느냐며 조롱했습니다.
이처럼 산발랏은 다섯 가지 질문을 하면서 성벽 재건공사에 임하려고 하는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난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산발랏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고 비난한 것이 아닙니다. 3절에 보면 암몬 사람 도비야의 조롱이 나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옆에서 산발랏의 비난을 듣고 있던 도비야도 거들었습니다. 만약 무너져 있는 예루살렘 성이 다시 재건된다 할지라도 너무 약해서 여우 한 마리가 올라가도 곧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조롱과 비난은 산발랏과 도비야 두 사람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면, 비난하는 반대 세력들이 많아졌습니다. 도비야에 이어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산발랏의 방해 작전에 동참했습니다.
비전의 사람
그 때 비전의 사람 느헤미야는 어떻게 했을까요?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느헤미야로부터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맞서 싸우지 마라
첫째로 비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난하는 사람과 맞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비난을 받았을 때 화를 낼 수도 있고, 비난하는 사람을 향해 욕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비난한 그 사람을 향해 반드시 그 이상으로 갚아주겠다고 복수를 다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따진다고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자대면하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만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만 더 생기기 때문입니다. 죤 드라이든은 “고통을 받을 때는 침묵이 최고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토마스 칼라일은 “언어는 위대하다. 그러나 침묵은 더욱 위대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비난을 많이 받으신 분도 없습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오해도 받고, 없는 자리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면전에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던 길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곰곰이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해를 직접 풀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조용하게 침묵하셨습니다.
19세기의 목회자로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Charles Haddon Spurgeon ; 1834~1892)은 단순한 문장을 사용하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유명해서 '설교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사회 문제 역시 외면하지 않고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해서 비난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여러 개의 학교와 고아원, 그리고 요양원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스펄전 목사님이었지만, 주변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달걀을 판매하는 일이었습니다. 스펄전과 그의 아내는 여러 마리의 닭을 직접 길렀습니다. 그런데 두 부부는 자신들이 기르는 닭이 낳은 달걀을 절대로 그냥 나누어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반드시 돈을 받고나서 달걀을 건네주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스펄전 목사 부부를 구두쇠라고 하고, 돈만 아는 욕심쟁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펄전 목사 부부는 비난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스펄전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비로소 스플전 목사 부부가 왜 그렇게 구두쇠처럼 돈을 벌었는지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달걀을 판 돈은 두 명의 늙은 과부들의 생활비를 대는데 고스란히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스펄전 목사 부부는 자신들의 선행이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았고, 또 늙은 과부들을 도와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비난을 일삼던 사람들과 맞서서 싸우지 않고 철저하게 침묵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어디에도 느헤미야가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웠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비난하는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왜 그러한 말들을 하고 다니느냐’고 따졌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예수님처럼 스펄전 목사님처럼 비난하는 사람과 맞서 싸우지 않고 침묵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비난하는 사람과 맞서 싸우기보다,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이 우리가 비난을 극복할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2) 하나님께 기도하라
둘째로 비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유머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모기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피 터져 죽은 것이 너무나 억울한 모기가 하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 사람들이 파리는 죽이지는 않고 그냥 손으로 쫓기만 하는데, 왜 우리는 창자가 터지게 때려죽이나요? 너무 불공평한 일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파리는 항상 손을 싹싹 빌잖아….”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비난하는 사람에게는 침묵했지만, 하나님께는 침묵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다같이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고 하나님께 억울함을 하소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행한 악을 그냥 덮어두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성을 쌓고 있는 우리 앞에서 주님을 모욕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못 본체하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느헤미야의 이 모습을 보고, ‘느헤미야의 신앙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 앞에 나아가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처 받은 것, 속이 상한 것, 억울한 것을 다 풀어놓아도,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여러분, 구약에 등장하는 한나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브닌나를 둘째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한나는 남편의 사랑은 갑절로 받았지만 아이가 없었고, 브닌나는 아이는 있었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한나를 심하게 질투하며 괴롭혔습니다. 그 때 한나는 수치와 굴욕, 아픔과 절망을 안고 하나님 앞에서 슬피 울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술에 취한 것으로 착각할 만큼 한나는 하나님께 통곡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눈물을 보시고 후에 위대한 선지자가 된 사무엘이라는 귀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한 감정을 다 받아 주시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기도가 핸드폰보다 좋은 이유>라는 글이 있습니다. 첫째, 핸드폰은 잘해봐야 한 달 100분 무료 통화지만, 기도는 한 번 가입하면 평생 무료로 통화할 수 있다. 둘째, 핸드폰은 환경에 따라 통화 성능이 결정되지만, 기도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통화가 가능하다. 셋째, 핸드폰은 공공장소에서 사용하기엔 눈치가 보이지만, 기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용 가능하다. 넷째, 핸드폰의 사용 내역은 통신회사에 남지만, 기도의 사용 내역은 하늘나라 책에 남는다. 다섯째, 한 대의 핸드폰으로는 한 사람밖에 통화할 수 없지만, 기도는 원한다면 한 번에 수많은 사람이 동시 통화할 수 있다. 여섯째, 핸드폰으로 통화할 때의 침묵은 쓸 데 없는 상상을 일으키지만, 기도할 때의 침묵은 주님이 알아서 접수하신다. 일곱째, 핸드폰은 부재중일 때 받는 사람이 없지만, 기도는 하나님께서 항상 기다리시고 받아주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고 받아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시편 62편 8절에서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로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다 토해내었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찾아가 하소연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한숨도 있었고, 탄식도 있었고, 아픔도 있었고 상처받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토해냈습니다. 그러므로 속이 상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다윗처럼 사람에게 털어놓기보다 하나님께 다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게 비난을 받을 때마다 느헤미야처럼,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비난을 극복할 수 있는 두 번째 비결입니다.
3) 비전을 붙잡으라
셋째로 비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전을 붙잡아야 합니다. 다같이 6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여기 ‘마음을 들여’라는 말을 NIV영어 성경에 보면 ‘with all their heart'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무너진 성벽을 절반이나 쌓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기도하면서 건축하고 건축하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짧은 기간 안에 전체 성벽 중 절반이나 재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비전을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의 비난에도 굴하지 않게 된 세 번재 비결입니다.
옛말에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정신을 한 곳에 모으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로 ‘중석몰촉(中石沒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살이 돌에 깊이 박혔다는 뜻으로, 중국에서 생긴 말입니다. 전한(前漢)의 이광(李廣)이라는 사람은 궁술(弓術)과 기마술이 뛰어난 용장으로 황제를 모시는 시종 무관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황혼녘에 초원을 지나다가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일발필살(一發必殺)의 마음으로 활을 당겼습니다. 화살이 명중했는지 호랑이가 꼼짝하지 않아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호랑이가 아니라 큰 바위였습니다. 화살이 그 바위에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아까 활을 쏘았던 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활을 당겼지만, 화살은 바위를 뚫고 박히지 않고 공중으로 튀어 올랐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처음에 쏜 화살은 바위에 박혔지만, 두 번째 쏜 화살이 바위에 박히지 않고 튀어 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신을 한데 모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집중의 힘은 대단합니다.
1953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한 사람은 뉴질랜드 출신 에드먼드 힐러리 경입니다. 어느 날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 높은 산을 어떻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힐러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입니다. 확고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꿈을 이룰 때까지 계속 시도합니다. 저 역시 중간에 장애물이 나타나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방법을 찾아서 도전했습니다. 만일 그래도 풀리지 않는다면 그 원인을 분석하고 연구했습니다. 이쯤 되면 시련도 제풀에 꺾이게 마련이지요.” 이처럼 비전을 붙잡는 것이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세운 목표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돋보기로 초점을 모으면 나무를 태울 수 있는 것처럼, 비전을 붙잡을 때 그 비전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우물을 파려면 한 곳을 집중해서 깊게 파야 물이 나오는 것처럼, 세운 목표에 집중할 때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난받을 때마다, 비난하는 사람을 신경 쓰기보다 이루어야 할 비전에 신경 쓰시기 바랍니다. 조롱하며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때 촉망받던 한 피아노 연주자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녀는 일곱 살 때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아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한창 피아노를 연습하던 어느 날, 그 피아니스트가 제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디션에 임했습니다. 스스로 만족스런 연주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람으로부터 ‘피아니스트로 성공하기는 글렀다.’라는 최악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피아노를 즉시 그만뒀습니다. 그 후 평범한 중년 여인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마침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연주회가 열린다는 뉴스를 듣고 그 연주회에 갔습니다. 연주회가 끝난 후 그 피아니스트를 만나 따졌습니다. “당신이 내 인생을 망쳐 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군요. 연주가 인상 깊어 오래 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옛날 당신의 연주는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 말을 들은 중년 여인은 왜 나에게 ‘피아니스트로 성공하기는 글렀다’고 해서 나를 망치게 했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피아노를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합니다. 세계적인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는 남이 뭐라 하건 스스로를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내 말 때문에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했다면, 분명히 당신은 사람들의 비난과 혹평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생을 망친 건 내가 아니라, 나약한 당신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욕을 먹고 비난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의도적으로 나쁜 일을 했으면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일이나 실수로 벌어진 일에 대해서 비난을 받는다면, 견디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런 잘못을 범하지 않았는데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뒤에서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만히 있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비난하는 사람과 맞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비난을 극복한 느헤미야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억울하게 비난을 받을 때마다 느헤미야처럼 비난하는 사람과 맞서 싸우기보다, 침묵하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게 비난을 받을 때마다 느헤미야처럼,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으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게 비난받을 때마다, 비난하는 사람을 신경 쓰기보다 느헤미야처럼 이루어야 할 비전과 달려갈 목표에 집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귀한 손길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좌절을 극복하라
느 4:1-6 / 조재호목사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지냈습니까? 지난 주 가장 기뻤던 일은 무엇입니까? 자연의 날씨가 한결같지 않고 변하며 날씨의 변화가 사람들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듯이 우리 생활과 인생의 날씨도 변화가 심하며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히 큽니다. 현재 중동에는 전쟁의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곧 폭풍우로 바뀔 것 같고,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 구름이 끼어있고, 안보정세도 불안한 안개속이고, 백성들의 마음도 맑고 화창하지는 않습니다.
1. 우리는 살아가며 실망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맑고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이기를 원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느헤미야와 유대 백성들이 겪고 있는 좌절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450년 경,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재가에 따라 유다백성들이 오랜 포로생활을 끝내고 느헤미야의 지도아래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새 삶을 살리라. 하나님 성전도 새로 짓고 예루살렘의 무너진 예루살렘성도 새로 쌓고, 가족들과 함께 집도 짓고 새로운 삶을 살리라’ 희망에 찬 계획과 힘찬 출발을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호론 사람 산발랏, 암몬 사람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게셈을 중심으로 한 강한 반대세력이 있었습니다. 커다란 반대앞에서 백성들의 희망은 실망으로 바뀌었고, 멋진 계획은 벽에 부딪히고, 힘찬 출발은 멈추고 말았습니다. 지도자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과 믿음 생활에 실망의 먹구름이 드리우고 좌절의 늪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 기간이 길지 않고 짧게 끝나기도 하지만 긴 시간이 흘러가기도 합니다. 사단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귀한 물건들을 사람들에게 팔려고 야시장에 내다 놓았습니다. 거짓이라는 물건, 자랑이라는 물건, 불신이라는 물건, 미움이라는 물건, 시기라는 물건 등등 한달동안 열심히 팔고 결산을 했는데 가장 많이 팔린 인기 품목이 ‘좌절’이라는 물건이었다고 합니다. 살아가면서 구름 낀 흐린 날씨도 만나고 비가 오는 궂은 날씨도 경험하지만 그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실망과 좌절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실망이 깊어지면 좌절에 이르고, 좌절이 깊어지면 절망으로 변하고 절망은 곧 죽음을 낳습니다. ‘희망 없이 살아가는 절망은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깊은 실망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실의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좌절감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실망과 좌절 가운데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2. 그러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실망과 좌절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첫째로 깊은 실망과 좌절은 열악하고 힘겨운 삶이 계속될 때 옵니다. 열악한 환경이 계속되면 벗어날 힘을 잃어버리고 좌절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둘째로 일의 실패 때문에 실망과 좌절이 옵니다. 일을 실패했을 때 실망이 찾아옵니다. 큰 실패는 좌절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잘못된 기대는 실망과 좌절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어느 신혼부부 집에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습니다. “지금은 사정상 이름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저는 두 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 연극표를 두장 보냅니다. 꼭 보시고 좋은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봉투를 펼쳐보니 5만 원짜리 연극표가 두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날밤 그 부부는 행복하게 연극구경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을 열어보니 집안이 엉망이 되어 있고 없어진 귀중품들이 많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둑이 침입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엔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연극표는 도둑이 보낸 연극표였던 것입니다. 셋째로 실망과 좌절은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 그리고 반대 때문에 옵니다. 오늘 말씀에서 느헤미야와 유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을 건축한다는 말을 듣고 산발랏이 비웃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유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벽돌 한 장이나 제대로 쌓을 수 있겠느냐?”, “벽돌 쌓은 꼴 좀 봐라.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져 내리겠다. 한심하다 한심해” 비웃고 비난하고 업신여기고 조롱하고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말로 할 수 있는 악담은 전부 퍼부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비난을 듣고 야유를 받으면 사람들은 주눅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주눅이 들면 마음이 작아집니다. 스케일이 작아집니다.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전해 해보지도 않고 지는 것입니다.
애굽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본격적으로 광야를 행진하기 전에 약속의 가나안땅을 정탐하러 12지파의 대표들을 파견했습니다. 열 두 명의 정탐군들이 정탐하고 돌아와서는 여호수와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이 스스로를 비하하며 업신여겼습니다. “우리들이 보기에도 우리들은 메뚜기같았다” 그 소리를 들은 온 백성이 일시에 실망과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졌습니다. 실망은 좌절로, 좌절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은 포기로 이어집니다. 시도해보지도 않고 주저 않는 것입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세계 타이틀 매치를 앞둔 권투선수들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기자들 앞에서 주먹질하고 눈싸움을 하는 것은 서로 기죽이기 위한 것입니다. 사울과 유대 군인들이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불레셋 군대와 싸우려고 할 때, 비웃고 조롱하고 야유하는 골리앗에 유대군인들이 짓눌려 싸워보지도 않고 꼬리를 내렸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너무나 많이 겪게 됩니다. 한 마디 비난이 사기와 기분을 완전히 꺾어 버립니다. 한 마디 조롱의 말이 찬물을 끼얹어 타오르던 불을 꺼 놓습니다.
3. 어떻게 하면 우리는 실망과 좌절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먼저는 하나님을 다시금 바라보아야 합니다. 관심과 초점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비방하고 업신여기고 온 백성들을 좌절 속으로 몰고 갔을 때 믿음의 사람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우리는 메뚜기가 아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다. 그들은 우리들의 밥이다. 우리는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믿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골리앗의 비웃음과 야유 앞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잔뜩 겁먹고,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야 할 지경에서 믿음의 사람 다윗은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허깨비 골리앗아!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아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산발랏과 도비야의 비난과 야유, 조롱으로 인해 백성들이 실망과 좌절 속에서 성벽쌓기를 포기하고 있을 때 믿음의 사람 느헤미아는 하나님께 초첨을 맞추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4)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 둘째는 무시하는 것입니다. 근거 없은 비방과 조롱은 무시해야 합니다. 공연한 트집과 상투적인 불평을 무시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실망과 좌절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셋째는 대비하는 것입니다. 나를 키우는 것입니다. 느헤미아는 기도하며 이 방법을 활용했습니다. 주저앉아 있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불러 반은 낮에 일하게 하고 반은 밤에 무기를 주어 파숫군으로 세웠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한 손에는 연장을 주고, 한 손에는 무기를 주어 일하며 맞서 싸우게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해 싸워라”(14)
우리 안에 실망과 좌절을 극복할만한 실력과 담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런즉...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습니까? 새 봄에 새로운 용기와 새로운 결심을 소유하십시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피곤하지 아니하면’이라 함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나가면’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성취토록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판과 반대 앞에서
느 4:1-6 / 김형준목사
두 친구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라는 게 대체 뭐지?”
“간단하게 설명하면 하나의 물체가 관련성 여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는 이론이야. 예를 들면, 자네가 잠옷을 입고 뜨거운 난로 옆에 앉아 있다면 1분이 한 시간처럼 여겨지겠지. 그런데 만일 잠옷 입은 여인이 자네 무릎에 앉아 있다면 그때는 아마 한 시간이 1분처럼 여겨질 걸세. 이것이 상대성 이론이라네.”
설명을 듣고 난 후 집에 돌아갔습니다. 밥을 먹으려고 보니까 국에 부인의 머리카락이 들어있습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여보! 내가 오늘 상대성 이론을 배웠거든.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머리카락이 당신 머리에 한 가닥밖에 없다면 너무나 적은 것이지. 그러나 머리카락 한 가닥이 국에서 발견된다면 머리카락의 수는 너무 많게 여겨지지 않겠나?”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수많은 말 중에 칭찬과 격려의 말은 아무리 많아도 적게 보이고 비판과 반대의 말은 한 마디라도 크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많은 성도들이 설교를 듣고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졸고 있으면 그 분 때문에 외로워지고 가슴 아파지는 것이 설교자의 마음입니다.
비판과 반대의 말은 듣는 이의 용기를 꺾습니다. 무언가 선하고 바른 일을 시작하고자 할 때 특히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아갈 때 부딪히는 비판과 반대는 낙심과 절망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는 비판으로 자기 자신도 판단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외부에 미루고 자신은 의롭다는 전제 아래 사람들과 일을 평가하는 교만이 뿌리를 두고 있는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비판대신 분별하라고 말씀합니다. 비판은 개인과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단의 전략이 배후에 있기 쉬운 반면, 개인과 공동체를 세워 가는데 관심을 두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분별이기 때문입니다. 분별의 동기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분별은 상대방의 잘못을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보며 추스리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던 예루살렘 성이 극적으로 세워지는 현장 속에서 산발락과 도비야, 게셈은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성 쌓는 일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목표를 세우고 어떤 일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할 때 누군가 비판하고 반대하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여러분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한 대를 맞으면 두세대를 때립니다. 그 결과 전면전이 벌어지고 성경말씀과 같이 피차 망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승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은 뒤로 물러섭니다. 비판과 반대라는 첨예한 공격 앞에 뒤로 물러나지만, 패배의식 때문에 마음에 한을 품고 병을 얻거나 기회가 되면 폭발합니다. 마음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아 반대했던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진행하는 중에 사람들이 반대하고 조롱하고 경멸하며 나올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느헤미야의 지혜를 함께 나눠보고 싶습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기도했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집요하게 경멸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4절과 5절에는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나아가 속상한 마음을 기도 중에 토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 하고” 기도의 내용을 우리가 쓰는 말로 “하나님, 우리가 너무 창피스럽고 고통스럽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욕하는 그 욕이 저들의 머리에 그대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뿐만 아니라, 저들도 우리와 똑같은 상황을 경험하게 하셔서 비참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들이 와서 잘못했다고 빌 때도 절대로 용서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작살을 내주시옵소서.” 라고 바꿔볼 수 있습니다. 속이 시원하십니까?
여러분 이렇게 기도해 보신 적 있습니까? 아마 이런 기도 따라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면, 지금 여기 앉아 있을 사람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분명 다른 누군가에게 분노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느헤미야가 기도한 기도의 내용보다는 느헤미야의 자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노를 품지 말라 하셨고, ‘해를 넘기지 말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정 시간을 정해 주셨을 뿐입니다. 화가 마음에 있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무엇보다 자신이 눈물 흘려 기도해왔을 뿐 아니라, 민족의 생존이 달린 일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데 자신의 이익 때문에 반대하고 나서는 무리 때문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소개되었기 때문에 표현이 완화된 것이지 느헤미야가 진짜 기도한 내용은 더욱 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쨋든 우리는 느헤미야가 안타깝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하나님께 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속상하고 어려운 일을 또 다른 사람에게 토해 내고 공격합니다. 자기입장을 설명하려고 하며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만큼 분노와 속상함을 온전히 받아주는 사람이 있던가요? 오히려 허무하지는 않았습니까? 사람은 모두 자기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도 할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표현합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온전히 받아들여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생에 분노할 일의 연속인 삶을 살았던 다윗, 시편 62편을 통해 자신에게 분노가 있고 반대와 비판에 부딪힐 때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중략)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토할 때 아까워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속에 있는 것을 그냥 다 토해내지 않습니까? 다윗은 안타깝고 억울한 심정을 하나님께 다 토했다고 했습니다.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고 내 마음과 소원을 알아주시는 분도 그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풀 수 있을 듯이 보이는 사람에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쏟아내고 있습니까? 오히려 쏟아 내었기 때문에 큰 아픔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가슴에 묻어두면 병이 됩니다. 어딘가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을 속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감정도 창조하신 분이 우리가 얼마만큼 분노하고 속상해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주님 앞에 쏟아내십시오. 주님이 그 마음을 받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대와 비판에 직면하여 좌절과 절망을 느낄 때 해야할 일은 사람들에게 불평과 원망 그리고 분노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먼저 기도하는 것이 비판과 반대를 해결하는 신앙인의 첫째되어야 할 방법입니다.
둘째 느헤미야는 반대와 비판 앞에 낙심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더욱 충성스럽고 견고히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절 말씀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오히려 더욱 열심을 내어 성을 쌓았다고 말씀합니다. 비판과 반대 앞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에게 있을지 모를 잘못을 살펴본 다음에는 백성들을 격려하며 목표를 이루어가는 느헤미야를 보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옳은 일인 줄 알지만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고 칭찬하지 않으면 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구나 비판하고 비난하면 더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공동체에 꼭 필요한 일을 포기하게 되면 우리는 사단의 전략에 항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단은 주님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온갖 방법으로 우리 의욕과 용기를 꺽어 중단시키고 전략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습관적 중독을 끊으려 할 때 이런 문제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술을 안 먹어야지, 노름 하지 말아야지, 가족을 위해야지. 이제는 복잡한 관계를 청산해야지.’ 라고 결심하지만, 작은 문제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자신을 발견할 때 낙담합니다.
10절 말씀 이스라엘 공동체 내부로부터 좌절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나귀 한 마리도 지나갈 수 없는 무너져내린 성의 흙더미를 치워야 하는데 나를 사람과 힘이 없어 자신들의 힘으로는 성을 세울 수 없다고 절망하는 절망감이 일하는 백성들 사이에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8절, 반대와 비판의 말이 점점 더 많이 생깁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우리 앞의 돌멩이를 치워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슈바이처박사가 아프리카를 갈 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한 길을 갈 때 사람들이 앞길의 돌멩이를 치워 줄 것으로 기대하지 말라. 사람들은 더 큰 돌멩이를 던질 것이다.” 12절 말씀, 대적의 근처에 유하는 유대사람들이 일하러 나간 자신의 남편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보 그 일을 꼭 해야 되요? 그들이 쳐들어간다던데, 당신 살아야 되잖아요. 그만 하고 돌아와요. 우리는 그 일하고 상관 없잖아요.’ 격려해야할 가족들이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비판과 반대가 있으면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나누어집니다. 갈등이 생기고 내부분열이 생기며 어려워집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권면하고 용기와 힘을 줍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느헤미야 자신은 부족하지만 능력과 권세 있으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적은 수지만 취약지구에 군대를 배치합니다. 일하는 사람에게 한 손에는 쟁기를 한 손에는 무기를 들게 하고, 서로 나팔을 불게 하여 적들이 쳐들어올 때를 대비할 수 있는 비상 연락망을 짜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적들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해야할 일은 너무 많으나 우리 힘은 연약하고 부족해서 좌절할 때가 참 많습니다. 여기에 비판과 반대를 만나면 더 큰 자괴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꼭 이렇게 해야 인생이 잘되는 것은 아닐텐데.’ 라는 회의로부터 시작해서 결국에는 의미를 잃고 일을 중단하게 됩니다.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 되는 이유를 수십 수 백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된다고 하는 사람은 신기하게도 되는 이유가 또 그만큼 나옵니다. 안된다고 마음 먹으면 안되는 일이 많습니다. 생각이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느헤미야가 담대한 이유는 자신은 약하나 하나님의 역사는 놀라우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실패와 연약함의 상징이었지만, 가장 무기력한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는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작은 지팡이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작은 등불과 나팔로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견고하고 단단한 여리고 성은 수양의 뿔의 나팔로서 무너졌습니다. 다윗은 거대한 골리앗을 작은 돌맹이로 무너뜨렸고, 방주는 작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담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노예로 온 죄수출신 요셉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엘리야의 외투는 보잘 것 없었지만 요단강을 가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기 때문에, 질그릇은 깨지기 쉽지만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가 질그릇을 존귀한 존재로 만든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 인류최초의 무선전신기, 핸드폰의 시초가 되는 무선전신기는 마르콘이 10여 년 동안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실험한 결과 인류에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뉴딜정책으로 국가적 어려움을 몰아내며 미국역사상 4번이나 연속해서 대통령에 당선되는 영광을 누린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소아마비라는 절망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파리군사학교에서 51명중 42등으로 겨우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벅의 ‘대지’의 초고는 무려 14곳의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던 작품입니다.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의 커널 샌더슨은 65살에 사업에 실패해서 모든 것을 날려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세계적인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열거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부족한 점을 보완해서 끝까지 도전하는 자세는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위대한 일을 이루는데 밑거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대와 비판은 낙심할 일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부족함이 무엇인지를 살펴본 다음에는 낙담하지 말고 중심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두려워 할 것을 두려워 할 때 반대와 비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하고 있는 대상은 동서남북으로 우겨 싸기 시작하는 산발락과 도비야 그리고 게셈의 군사들이었습니다. 자기 재산과 생명을 위협하는 무리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남을 비판하고 반대합니까?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산발락과 도비야와 게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어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반대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사실은 자신의 영향력을 잃어버릴 것 같아 반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산발락이 사마리아 지역의 총독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북방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산발락의 야심은 남방의 유다까지도 자기 영향력 아래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바사왕의 친서를 가지고 총독으로 오는 것을 보니 자기 영향력이 줄어들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사마리아로 들어오는 교통과 무역의 통로가 예루살렘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예루살렘에 성을 쌓으면 경제적인 이윤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비판하고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주로 자기 이해관계가 얽혀있을 때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 바울과 실라가 여종에게 들렸던 귀신을 쫓아주니까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한 영혼이 살아나는 것보다 자기 이익이 우선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자 바로 나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명과 재산을 적들에게 빼앗길까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너희 육신의 생명을 빼앗는 자보다 영혼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두려워하라.’ 고 그리고 ‘저들이 힘이 있어 빼앗을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들의 반대와 비판은 두렵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할지 중단해야 할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뜻보다 내 뜻과 이해관계, 내 생각과 전통의 관철에 관심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이 좌절되고 절망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는 분별력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바램대로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으나 자기로 인해 하나님 뜻이 좌절되는 것을 허용치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쪽을 선택하셨습니다. 자기를 못 박는 로마병정보다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였기에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쏟아진 비난과 반대의 말을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의 친구다. 율법의 파괴자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정신 나간 참람한 자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다.’ 정말 듣기 어려운 비난의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하는 일은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는 것이라 말씀하며 쏟아지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이루고자 정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간직해야 할 것은 반대나 비판하는 입장에 서거나 반대로 받는 입장에 서거나,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나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가, 내 생각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정하신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시대는 비판과 반대로 인해 소중한 것을 너무 많이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무엇을 위한 비판과 반대인지를 살펴보면서 역사 앞에서 후에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를 살피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김충배 장군의 편지를 인터넷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만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들이여’ 라고 시작되는 이 글은 지난 50대 60대가 걸어왔던 수모와 고통의 모습을 역사 속에서 나름대로 정리하며 60년대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 해?"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훼 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 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 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 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낳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 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 우리들 신,구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
이 내용에 수긍하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어제가 없었다면 오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오늘 없는 내일도 없습니다. 지금 비판과 반대보다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할 것은 분별입니다. 민족을 세우고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세워나가는데 있어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하고, 사랑이 동기가 되어 현실을 직시하는 눈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보다는 분별을 통해서 개인과 공동체가 살아날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봅시다. 그들의 헌신과 땀으로 오늘 누리는 풍요로움이 있다면, 오늘 우리의 헌신과 희생이 없을 때는 당연히 미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지금의 세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생각해 보고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판단할 것인지,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할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대를 분별하며 지혜로운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위기를 헤쳐 나가는 사람들
느 4:1-23 / 서명성목사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일 때였습니다. 숫자나 장비로 볼 때 미국의 민병대는 영국군에 비해 절대 열세였기에 전면전을 벌여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민병대는 계속 밀렸고 이대로 가다가는 영국에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전선을 관찰하던 어떤 민병대 지휘관이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영국군 장교는 일반 사병들과 달리 멀리서 보아도 금방 알아볼 수 있는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군과 싸울 때 모두에게 총을 쏘지 말고 장교들만 골라서 쏘라고 하였습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습니다. 민병대와 싸움을 벌인 영국군 부대들마다 장교들이 집중 사격을 받아 많이 죽었습니다. 영국군은 군대의 숫자도 많았고 화력도 압도적이었지만 지휘계통이 무너지니 제대로 싸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영국군은 패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에 빠졌던 민병대였지만 상황을 분석하고 잘 대처한 리더의 말을 들었을 때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한자의 위기(危機)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를 뜻하는 두 개의 글자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대 중국의 현인들도 위기는 “감춰진 기회”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다른 문을 열어 두신다”는 서양 격언과도 상통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누구나 인생의 위기를 경험합니다. 당시에는 앞이 캄캄하고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지만 이제와 보니 그 문제들은 대부분 사라졌을 것입니다. 지금의 위기를 잘 견디면 도리어 위기 속에 감춰진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고레스 칙령으로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 이스라엘 본토로 귀환해서 대적의 방해 속에서도 성전을 완공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벽은 여전히 훼파된 상태로 있어서 유다 백성은 불안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대적들은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는 것을 계기로 유다가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해 아하수에로 왕 통치 초기에 시작했던 예루살렘 성벽 증축 공사를 중단시켰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의 설득으로 유다 백성이 이 역사에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깨닫고는 성벽 재건에 열정적으로 동참했습니다. 그러자 호론 사람 산발랏을 중심으로 대적들이 일어나 성벽 공사를 방해했습니다. 자칫하면 예루살렘 재건 공사가 또다시 중단되거나 지체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대적들의 끊임없는 위협과 방해를 어떻게 극복하고 성벽 재건을 수행했는지 살펴보면서 위기에 대처하는 비결을 찾고 각자의 삶에 적용하면서 인생 승리를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비웃는 대적들(1-3절)
느헤미야 당시에 예루살렘 사면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유다 북쪽에는 산발랏과 사마리아인들, 동쪽에는 암몬 사람 도비야, 남쪽에는 아라비아 사람들, 그리고 서쪽에는 블레셋에 속한 아스돗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오기 전까지 성벽 재건을 방해하려는 대적들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온 후로 성벽 재건 공사가 잘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적들이 크게 분노했습니다. ‘분노하다’라는 동사는 감정의 동요를 동반한 분노를 나타냅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벽 건축이 산발랏에게 극도의 위기감과 두려움을 주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형제들과 군대 앞에서 유다 사람들을 조롱했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도비야와 함께 그를 돕기로 한 자들이며, 그의 군대는 사마리아 총독으로서 거느리는 병사들이었습니다.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라고 하면서 5개의 질문을 연속적으로 던졌습니다.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말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힘이 없는 자들이 지금 무모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는 유다 백성의 힘으로 성벽 복원을 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제사를 드리려는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빈정댐입니다.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지난 백 년 동안에도 못한 일을 이제 와서 한다고 하니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는 말은 흙무더기가 돌로 회복될 수 없듯이 성벽 재건이 불가능한 일임을 강조합니다. 산발랏의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도비야가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곁에서 맞장구를 쳤습니다. 능력도 없는 것들이 성벽을 짓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부실공사가 분명해. 금방 무너질 거야. 주변에 있던 무리들이 그 말을 들으면서 함께 웃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함께 소리 내어 웃지만 속으로는 그들 모두 무엇인가 불안한 심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로 대응하는 느헤미야(4-6절)
대적들은 유다 백성들의 미약한 능력이나 이루어야 할 사역의 방대함은 보았지만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가진 능력이 어떠한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함부로 떠들었습니다. 그들의 조롱은 느헤미야와 유다인들을 향한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대적이 하는 비웃음이나 모욕은 참기 어려웠지만 느헤미야는 그들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함께 일하고 있는 유다인들은 얼마 전까지 자기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논쟁이 있을 때 종종 대화로 풀려하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귀의 조종을 받는 자들의 목표는 문제해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적의 목표는 느헤미야의 제거와 성벽 공사의 중단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떤 방식의 대화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방해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적대자들의 조롱과 허위 사실에 기초한 협박에 기도로 대응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그의 기도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느헤미야가 혼자 기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모아놓고 함께 기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이 유다 백성과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다는, 느헤미야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는 유다 사람들에 대한 대적들의 ‘업신여김’에 대해 벌을 내리심으로 그들이 ‘노략거리’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이 기도는 저주의 시편들(시 35, 69, 109)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분께 도전하는 대적들에게 분노하며 그들의 멸망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주를 노하시게’등의 표현을 한 것은 개인적으로 비방을 당하여 기분 나빠서 드리는 것이라기보다 대적들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복수하려기보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믿고 그분께 맡겼습니다. 느헤미야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된 근거는 멀리 아브라함까지 올라갑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 12:3)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 하신 약속입니다. 느헤미야는 그 약속에 근거하여 기도했습니다. 대적의 조롱과 위협을 받으면서도 유다 사람들은 공사를 멈추지 않고 오히려 온 마음을 다해 일을 했습니다. 성벽공사는 한쪽에서부터 진행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42개 구간에서 동시에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벽전체가 연결되고 지금은 예정한 높이의 절반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위협에 낙담하는 백성들(7-12절)
예루살렘 성벽의 허물어진 틈이 메워져 간다는 소식을 듣고 산발랏과 도비야를 비롯해서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 사람들, 아스돗 사람들이 심히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유다 사람들을 치고 그들을 혼란에 빠지게 해서 성벽 완공을 무산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에 느헤미야와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다시 기도했습니다. 기도 후에 그들은 파수꾼을 세워 주야로 방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원수들의 끈질긴 심리전과 공격의 위협이 먹혀 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리가 참 이상해서 부정적인 말에 더 잘 미혹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할 때는 무너진 성읍을 보면서 빨리 재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니 무너진 성읍이 더 크게 보이면서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 다시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백성들 중에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는 비관론이 퍼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흙덩이가 너무 많고 짐을 나르는 사람들이 지쳐서 성을 더 이상 짓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언제는 흙덩이가 없었습니까? 성을 쌓는 것이 힘든지 몰랐습니까? 그러나 일단 부정적인 생각이 지배하니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대적들은 쳐들어와서 유다인들을 죽이고 공사를 그치게 하겠다고 위협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특히 대적들의 근처에 거하던 유다 사람들, 곧 예루살렘 외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대적들과 가까운 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다 사람들은 성을 쌓는 사람들에게 공사를 중단하고 자기들에게 와 달라고 애타게 요청했습니다. “와야 하리라”를 직역하면 ‘너희는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가 됩니다. 이는 긴급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불안해하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열악한 상황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적은 인원을 가지고 성벽 주위에 쌓인 돌이 섞인 흙무더기를 쉴 새 없이 날라야 했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 성은 언덕에 위치하였기에 험난한 지형에서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공사를 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느헤미야의 도전을 듣고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하기는 했으나 공사가 힘이 들고 또한 쉽게 끝날 것 같지 않고, 대적들이 언제 공격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위협에 대처하는 느헤미야(13-20절)
느헤미야가 얼마나 기도하고 열심히 준비하면서 시작한 공사였습니까? 그렇지만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는 것을 방치한다면 공사가 중단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럴 때 전세를 뒤집은 민병대 지휘관과 같이 느헤미야는 분위기를 반전시킬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 방법으로 대처했습니다. 첫째는 대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먼저 든든한 방어태세를 갖췄습니다.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을 종족별로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적의 시야에 노출되는 낮고 넓은 곳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중무장한 군대가 배치되었다는 것을 일부러 보여줌으로써 이쪽의 경계태세를 보여주고 상대방의 기세를 꺾으려고 했습니다. 둘째로, 유다 사람들을 돌아보고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독려했습니다.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 백성들을 위하여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사용한 어휘들은 과거에 적들과 싸워 승리한 조상들과 그들을 위해 싸우신 하나님의 승리를 떠올리게 합니다(출 14:13-14; 신 8:18). 그리고 백성들에게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울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서는 것을 보면서 원수들은 자기들의 작전이 노출된 것을 알고 공격계획을 취소했습니다. 전에 대적들이 성전 건축 계획을 좌절시킨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성벽 건축을 방해하는 대적들의 계획이 좌절된 것입니다(스 4:5). 느헤미야의 전략이 먹혀든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자기가 세운 전략이 좋아서 적이 침공 계획을 포기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꾀를 폐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위협적인 분위기가 수그러들자 백성들은 다시 성에 돌아와 공사를 재개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대적들이 침공계획을 포기한 것을 알고도 경계태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체계적으로 적들의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16절에 ‘내 수하 사람들’로 번역된 단어를 직역하면 ‘내 젊은이들’이라는 뜻으로, 느헤미야를 돕는 임무를 담당하는 수비대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성벽 건축에 참여한 유다 백성과는 구별되었습니다. 그들의 절반은 성벽 건축에 동참했고, 나머지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갖추어 무리를 보호했습니다. 민장들은 성벽 방어를 위해 종족을 따라 조직된 군대의 지도자들로, 성벽 재건과 예루살렘 방어 체계를 지휘했습니다. 긴급 상황에 발생한 경우에 즉시 출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성벽 재건에 참여한 백성의 가족들을 뒤에서 돌보는 임무도 담당했을 것입니다. 짐을 나르는 자는 흙무더기 가운데서 불탄 돌 같은 성벽의 잔해를 치우거나 성 안팎의 건축 자재를 운반하는 일을 맡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한 손으로는 일을 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돌을 날리는 무기를 잡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공사가 각 구역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까닭에 대적들의 공격에 대비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방어해야 할 범위가 넓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이 공격해 오는 위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성안의 백성에게 신속하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자기 곁에 나팔 부는 자를 두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유다 백성을 향해 하나님이 친히 싸우실 것을 선포했습니다. 성벽 재건을 위한 자신들의 전쟁이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는 거룩한 전쟁임을 강조한 것입니다(출 14:14; 신 1:30; 대하 32:8).
본을 보이는 느헤미야(21-23절)
느헤미야가 앞장서서 본을 보임으로써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느헤미야 자신은 물론 그의 형제들과 측근들까지 모두 성벽 재건에 동참했습니다. 느헤미야의 부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틀 때까지 창을 잡았습니다. 그는 성 밖에 있던 지도자들에게 종자들이 함께 예루살렘 성안에서 자도록 했습니다. 이는 대적들의 기습에 대한 대비, 성의 안전, 노동력 확보를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의 측근에 있는 수비대까지도 적의 기습에 대비해서 잠을 잘 때도 옷을 벗지 않았고, 물을 길으러 갈 때조차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만약 느헤미야가 본을 보이지 않고 입으로만 떠드는 리더십을 보였다면, 성벽 재건은 온전히 시행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솔선수범은 공동체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고 공동체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본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위기 속에서 느헤미야가 보여준 대응책은 무엇입니까?
- 기도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원수들이 조롱하고 위협한 결과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지만 느헤미야는 기도로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백성이 적의 위협 때문에 두려움에 떨 때에도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원수들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싸우실 것이라고 하며 격려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이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바울도 에베소서 6:18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같이 하나님 백성을 비웃고 성도의 헌신을 조롱하는 자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자존감과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우리도 느헤미야와 같이 기도함으로써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 철저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일을 수행할 때 예상치 못한 난관이나 훼방을 만나면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고 옮은 일이며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기도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대처 방안과 구체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현실적 대책을 세우는 것을 세속적인 타협으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위협에 대하여 철저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한편으로 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성을 지켰습니다. 느헤미야가 철저하게 대비하는 것을 보면서 대적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좌절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대비하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가 될 것을 권면하셨으며, 그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요 17:21).
- 행동으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지도자로서 앞장서 백성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백성과 함께 일했습니다. 백성들이 방해와 위협 속에서도 한마음이 되어 일을 재개한 것은 느헤미야의 동기를 부여하는 말과 더불어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신실한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하는 동안 희생적으로 함께하며 짐을 나누었습니다. 느헤미야 자신도 성 안에서 백성들과 함께 잤을 뿐 아니라 옷을 벗지 않고 지냈습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모범을 보이는 리더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사랑과 순종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 각자는 삶의 현장에서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나가면서
조롱, 위협, 두려움, 곤고함. 지금부터 2400여 년 전에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나타내는 단어들입니다. 그 단어들은 지금도 삶의 현장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문제로 둘러싸인 답답한 현실을 인하여 고민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하는 일이 힘들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낙담이 되고 그냥 주저앉고 싶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다르고 대처하는 행동이 다릅니다. 육신의 눈은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상황을 전적으로 바꾸시기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영적인 안목을 주셔서 두려워 떠는 성도들을 평안케 하십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것입니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모든 문제의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위기의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백성들과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세웠습니다. 한손에 연장을 들고 다른 손에 칼을 들면서 일을 계속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싸우시리라고 하며 백성을 격려할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며 리더로서 본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 군사입니다. 날마다 영적전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게 해야 합니다. 힘들지만 각자에게 주신 사명 끝까지, 담대하게, 그리고 함께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거두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