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숲 / 문태준
숲에 새집이 이처럼 많았다니
높은 고립이 이처럼 많았다니
동트는 숲 위로 날아오른
은사(隱士)들은
북쪽 하늘로 들어가네
풍막(風幕)을 이쪽 겨울에 걸어놓은 채
풍막은 홀로 하늘 일각(一角)을 흔드네
음지에는 잔설이 눈을 내리감네
- 문태준,『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창비, 2015)
겨울숲 / 신경림
굴참나무 허리에 반쯤 박히기도 하고
물푸레나무를 떠받치기도 하면서
엎드려 있는 나무가 아니면
겨울숲은 얼마나 싱거울까
산짐승들이나 나무꾼들 발에 채여
이리저리 나뒹굴다가
묵밭에 가서 처박힌 돌멩이들이 아니면
또 겨울숲은 얼마나 쓸쓸할까
나뭇가지에 걸린 하얀 낮달도
낮달이 들려주는 얘기와 노래도
한없이 시시하고 맥없을 게다
골짜기 낮은 곳 구석진 곳만을 찾아
잦아들듯 흐르는 실개천이 아니면
겨울숲은 얼마나 메마를까
바위틈에 돌틈에 언덕배기에
모진 바람 온몸으로 맞받으며
눕고 일어서며 버티는 마른풀이 아니면
또 겨울숲은 얼마나 허전할까
- 신경림,『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
겨울숲 / 복효근
새들도 떠나고
그대가 한 그루
헐벗은 나무로 흔들리고 있을 때
나도 헐벗은 한 그루 나무로
그대 곁에 서겠다
아무도 이 눈보라 멈출 수 없고
나 또한 그대가 될 수 없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지금
어쩌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눈보라를 그대와 나누어 맞는 일뿐
그러나 그것마저
그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보라 그대로 하여
그대 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내가 견딘다 그리하여
언 땅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얽어쥐고
체온을 나누며
끝끝내 하늘을 우러러
새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보라 어느샌가
수많은 그대와 또 수많은 나를
사람들은 숲이라 부른다
- 복효근,『버마재비 사랑』(시와시학사, 1996)
초겨울 숲 / 장철문
저 남루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비워진 숲의
한그루 참나무로 서서
여분의 피와 살 말리고 싶다
떨군 잎사귀야 서걱이며
흩어지든 말든
껍질 속에 잔류한 그리움 함께
삭풍에 떨고 싶다
겨울까지 푸르른 소나무
積雪에 넘어질 때
물관도 체관도 다 겨울잠 재우고
웃자라 병든 가지일랑
뿌리 곁에 떨구고
形骸만 남고 싶다
저대로 초겨울의 남루 드러낸 채.
- 장철문,『바람의 서쪽』(창작과비평사, 1998)
겨울숲에서 / 이재무
겨울나무들의 까칠한 맨살을 통해
보았다, 침묵의 두 얼굴을
침묵은 참 많은 수다와 잡담을 품고서
견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겨울숲은 가늠할 수 없는 긴장으로 충만하다
산 이곳저곳 웅크린 두꺼운 침묵,
봄이 되면 나무들 가지 밖으로
저 침묵의 잎들 우르르 몰려나올 것이다
봄비를 맞은 그 잎들 뻥긋뻥긋,
입을 떼기 시작하리라
나는 보았다
너무 많은 말들 품고 있느라 수척해진
겨울숲의 검은 침묵을
- 이재무,『저녁 6시』(창비, 2007)
겨울 숲에서 / 안도현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마음 속 헛된 욕심이며
보잘것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발 속에다
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돌아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 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
그때까지 내 할 일은
머리 끝까지 눈을 뒤집어쓰고
눈사람되어 서 있는 일입니다
- 안도현,『그대에게 가고 싶다』(도서출판 푸른숲, 1991)
겨울 숲을 바라보며 / 오규원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罪를 더 얻는다.
한 벌의 罪를 더 걸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 오규원,『사랑의 기교』(민음사, 1975)
겨울 숲에서 흔들렸다 / 박남준
이 숲에 들기까지 얼마나 오래도록 무겁거나
낯 뜨겁게 가벼웠나
뒤축이 낡은 영혼을 버리고 누군가 걸어간 길이 있다
길을 묻는 이에게 별을 가리키듯
나무들이 직립의 팔을 들어 하늘로 향하는 곳
눈을 씻고 간절하던 시간을 떠올렸다
이곳에서는 덕지덕지 가난한 이름마저 벗어버려
몸에 걸칠 쓸쓸함도, 두려움도 없지만
바람은 끝내 고요 속에 들지 못하고
새들은 어찌하여 여기 누워 허공을 잊었는가
몸은 아직 세상의 화두에 발을 딛고 있으나
가야 할 곳, 적멸을 묻고 싶을 때 겨울 숲에 들어야 하리
“지금이 바로 그 때다”
그 속삭이듯 유혹의 곤두선 소름 끝으로
천수수천 토막이 난 채
벼랑에 선 육신을 치 떨어야 하리
혼백이 둬 번은 날아가야 하리
- 박남준,『중독자』(펄북스, 2015)
겨울 숲에 들어
류윤
나만 외로운 줄 알았는데
다들 고독을 견디며 서 있었구나
발등이 소복이 붓도록
단단히 나이를 견디는 고목들
속내에 갈무리한 둥근 둥근 울음들
고독이 울어 해결될 일이라면
저 둥근 울음들을
다시는 유턴해 오지 못할 곳으로
아주 유배보내도 좋으리
묵묵히 견디다보면
다시 봄은 오고
슬하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꽃들
어린 것들 피어나는 것이나보며
살아가는 것도 생의 보람일지니
나이란 허무한 거라고들 하지만
꼭 그렇지 만은 않으리
돌아보면 각자 속내에 감춘
내면의 이야기들이
책 한권으로도 모자란다고들
한탄을 하고
다들 왜그리 나이 먹어가는 것을
서러워들 하는가
이제 나이를 가부좌 틀고 앉아
흘러간 옛노래를
턴 테이블에 올려
가벼운 콧노래의
음악으로 흥얼거려보는 건 어떠리
각자의 살아낸 풍운의 이력을 담아낸
레코드 판이라면 더욱 더 좋으리
각자 새겨진 나이테를
레코드 판으로 바꾸어낸다면
온 숲이 웅장한
대지 합창단으로
아니면 숲 전체로
폐부를 긁는 목관악기라도
오가는 이들의 이목을 끌지 않으리
그냥 다들 묵묵한 고독으로 서서
무거운 나이를 견디기보다는,
-ㄹ ㅇ - 꼽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