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만화가
1. 대영제국의 개관
대영제국은 한 때 세계 육지 면적의 1/4, 세계 인구의 1/6을 지배하였으며, 세계 산업과 금융의 중심지였습니다.
유럽의 외딴 섬에 있는 혼열민족(이베리안, 켈트, 앨글로 색슨, 데인, 노르만 등)이 장기간에 걸쳐 세계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 학문 등을 주도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영국은 16세기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18세기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유럽의 강자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1899~1902)으로 제국주의의 자성론이 일었고, 1,2차 세계대전으로 국력을
거의 소모하였으며, 미국과의 수에즈 운하 분쟁(1956)으로 제국주의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영국은 17세기 이후 200년에 걸쳐 서서히 융성하였다가 절정에 올랐고, 다시 200년에 걸쳐 서서히 내리막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는데, 19세기가 대영제국의 절정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은 제국 초창기에는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에 바좇� 둔 중상주의적인 팽창을 했고, 제국 중반기인 19세기에는
강한 산업 경쟁력으로 자유무역에 바탕을 둔 번영기를 가졌으며, 제국 말기에는 독일, 프랑스 등과 과잉 제국주의
경쟁을 벌이다가 보호무역과 경제 블록화를 실행해 필연적으로 세계전쟁을 유발하였습니다.
영국의 힘을 지탱한 것은 막강한 해군력, 거대한 공업 생산력, 광대한 식민지, 금융 보험 해운의 발달 등입니다.
대영제국이 멸망한 결정적인 원인은 1,2차 세계대전때문인데 전쟁기간동안 국민소득의 60% 이상을 전비로 쏟아
부었고, 영국 재무부와 중앙은행은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렀습니다.
1945년 영국의 부채는 33억 6천만 파운드에 달했고, 11억 2천만 파운드에 상당하는 영국의 해외자산이 매각되어
중동의 석유 이권 등 해외자산을 미국 기업에 헐값에 넘겼습니다.
과도한 군비지출이 강대국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는 것은 이전 단원에서도 지적한 바 있는데, 영국이 오랫동안
제국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이 전성기인 19세기에도 국민생산의 2%만 군사비로 지출했다는 점입니다.
영국이 이렇게 적은 군사비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란 외교정책을 썼기
때문인데, 세력균형 정책은 한 나라가 강대해지면 다른 경쟁 국가가 세력균형을 이루도록 도모하는 정책입니다.
2.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스페인 무적함대
영국도 한 때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1558년)하기 전에 영국은 유럽에 남은 최후의 영토인 칼레를 상실하고 섬나라로 고립됬습니다.
그러나 평생 독신으로 지낸 엘리자베스 여왕은 성공회 수장이 되었고, 세심한 국정과 세련된 외교로 나라를 일으킵니다.
엘리자베스와 재상 세실은 즉위 다름 해 스코틀랜드를 점령해 에든버러 조약을 체결하여 스코틀랜드를 통합하였습니다.
1567년 스페인 정예 육군 5만명이 명장 알바 공작의 인솔 하에 네델란드 프로테스탄트들의 반 스페인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 건너편인 네델란드에 진주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던 네델란드를 스페인군이 점령하고, 그 곳이 영국 켄트 주의 해안까지 불과 48km밖에
안된다는 것은 영국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에 영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네델란드의 반군을 지원하며, 해적을 이용하여 스페인군의 보급을 방해하는 등의
간접적인 전략을 사용합니다.
결국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과 참모들의 치밀한 준비와 지도 끝에 130척의 함선과 3만명의 군사를 동원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유럽의 패권을 쥐게 됩니다.
대영제국의 기초를 이룬 것은 다름 아닌 풍부한 학식과 차분한 인품을 갖춘 엘리트들인데 이들은 폭 넓은 정보수집과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약점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엘리트가 배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영국의 귀족제도, 옥스퍼드 대학 같은 우수한 교육
시스템, 인격을 중시하는 영국의 신사(Gentleman) 정신 등이 있습니다.
3. 대영제국의 위기
영국은 19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1850년부터 1879년까지 영국의 대외무역은 3배나 신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선박이나 철도 등 교통수단의 발달로 북미와 동유럽의 농산물이 싸게 들어와 영국 내 농산물
생산은 저하되었습니다.
또한 영국의 산업 경쟁력이 약화되고, 해외 투자가 급증해 영국의 경제적 불안감이 높아졌습니다.
1820년대까지 보호무역을 시행했던 영국은 경제패권을 확립하여 공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자 해외 시장확보를
위해 자유무역의 기치를 들고 외국에 시장개방을 요구하였습니다.
자유무역은 영국은 공업은 발전시켰지만, 농업시장의 개방으로 대량의 식량 수입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무역적자가 일어났습니다.
19세기 말의 20년 동안 세계를 덮은 경제불황은 각 국을 보호무역주의로 몰아 넣었고, 면제품 등 영국의 수출은 대폭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영국은 경쟁력이 저하된 자국 산업의 유지를 위해 식민국가와 경제 블록화를 형성했고, 개방적 블록으로서의
대영제국의 세력권을 넓혀 나갔습니다.
이러한 영국의 노력은 제국의 과잉 확대를 초래하게 되었으며, 광범위한 지역의 군사적 개입에 따른 비용이 증가되었고,
고전적인 제국의 피폐로 연결되었습니다.
영국의 팽창주의는 세계적인 '대경쟁의 시대'를 격화시켜 선진국과 후발 공업국과의 마찰을 빚었고, 식민지에 대한
무리한 억압은 식민 지배에 대한 도덕성과 명분의 상실을 가져 왔습니다.
4. 대영제국의 수치 - 보어 전쟁
남아프리카 전쟁이라고도 하는 보어전쟁은 1899~1902년 영국과 트란스발공화국이 벌인 전쟁입니다.
19세기 후반 남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이 케이프 식민지를 기지로 하여 세력을 확대시켰고, 그 북방에는 네덜란드인의 자손인 보어인이 건설한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예자유국이 있었다. 1867년 트란스발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오렌지강변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영국은 이 지역에서의 지배권 확립을 기도하여, 많은 영국인을 이 지방으로 옮겨 들어가게 하였다. 따라서 영국인과 보어인 사이에 마찰이 생겨, 1881∼84년 제1차 전쟁이 일어났다. 그 후 트란스발은 영국과 대항하기 위하여, 오렌예자유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양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1899년 10월 마침내 양측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1900년 6월 영국군은 트란스발에 침입, 점령하고 9월 트란스발공화국의 영국병합을 선언하였다. 오렌예자유국도 전쟁이 개시되자 트란스발 측에 가담하여 참전하였으나, 2월 영국군은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5월에 오렌예자유국의 영국병합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연합보어군은 그 후 2년 동안 게릴라전을 전개, 반항을 계속하여 영국군을 괴롭혔으며 두 나라의 대부분을 다시 해방시키고, 영국령까지 진격하여 들어갔다. 이에 영국은 철저한 전멸전법을 취하여, 인구 50만 명에 총동원 병력 약 7만 보어인을 정복하기 위하여, 45만 군인을 동원하여 보어인의 전답 ·가옥을 불사르고, 21만의 비전투원을 강제적으로 집단수용소에 집어 넣었다. 이 강제수용소의 설비 ·대우는 최악의 상태로서 총 약 2만의 사망자를 내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민족전멸의 위기에 봉착하자, 1902년 마침내 보어인은 영국에 굴복하고, 영국은 두 나라를 영국령 식민지로 함으로써 남아프리카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희생도 매우 컸다. 영국은 이 전쟁을 통하여 세계 여론의 공격을 받았고, 국제적으로도 ‘영광의 고립’ 정책을 버려야 하였다. 국내에서도 반전운동이 고조되어 자유당의 로이드조지는 이때에 제국주의 정책의 반대론자로 활동했으며, 노동당 결성이 촉진되었다. 또한 남아프리카에서도 보어인의 생활부흥을 위하여 300만 파운드의 보조금을 내주어야 하였고, 그들의 자치를 인정해야 했다.
<두산 백과사전>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영국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끌어 모은 50만 대군으로 총력전을 펼치고도 3만5천명의 보어군과
오랫동안 접전을 벌렸고, 야만적인 민간인 학대는 국제적인 비난과 제국주의에 대한 영국내 자성론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전쟁의 명분도 없었고, 단지 남의 나라에서 발견된 금광이 탐이 나서 침략전쟁을 벌인 것은 영국의 도덕성에 상처를
주었고, 대영제국의 쇠퇴를 알리는 전초적 사건이었습니다.
전쟁의 시작은 영국의 세실 로즈 일파가 영국인 중에서 범법집단을 군사적으로 조직하여 트란스발 공화국을 침공해
정부를 타도하고 금광의 지배를 꾀한 제국주의적 음모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3일만에 보어 정부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영국 제국주의'라는 오명을 전 세계에
퍼뜨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899년 10월 보어전쟁의 개전과 함께 영국은 불러 대장의 지휘 하에 3개 사단 8만명의 병력을 남아프리카에
파견하였는데 이는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장군이 지휘한 영국군의 두배 이상 되는 병력입니다.
20세기 들어 첫 전쟁인 보어전쟁은 공교롭게도 미국이 사상 처음 패한 베트남 전쟁과 같은 게릴라전이었는데
보어군의 용감한 반격과 매복공격에 의한 영국군의 패배는 영국을 충격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영국 육군 최고의 명장이었던 불러는 경질되었고, 수 많은 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70세의 로버츠 원수가 지휘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지휘는 49세의 참모장인 키치너가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는 거대한 조직에 의한 '기계 전쟁'을 위해
총동을 체제를 지휘하였습니다.
키츠너는 조직화된 병력의 집중 배치와 계통적인 보급체계를 중시하여 압도적인 화력으로 정면돌파를 실시하는
세계대전형 군인이었는데, 훗날 1차대전에서는 징병제를 도입해 거대육군을 창설하고 총력전의 선두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1차대전의 솜 전투나 파센텔의 대량전사라는 결과로 연결되고, 영국군의 궤멸적인 손실을
초래하게 된 전략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영국군은 보어군에 대한 민중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농촌의 부녀자들을 일정한 공간에 한사람씩 수용하는
콘센트레이션 캠프(concentration camp)에 강제 수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 엘리트 중 양식 있는 사람들의 커다란 환멸과 반발을 일으켜 '제국의 이상'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갖게 하였으며, 역사학자 골드윈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체임벌린과 세실 로즈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영국은 전 세계로부터
거대한 증오를 사고 있습니다. 저는 영국이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를 불 태워 죽인 이래 이만큼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을 저지른 적인 없다고 확신합니다.
부도덕한 전쟁에 대해 전쟁을 찬동하는 측은 좋든 싫든 우리 조국의 전쟁이라는 '애국주의'와 배타적 맹목적 광신적
애국주의이자 대외 강경론인 '징고이즘'(jingoism), 인류 평등을 위한 전쟁이라는 호전론(好戰論) 등으로 옹호하였습니다.
양자간의 격렬한 논쟁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엘리트 가운데서도 친구 가족 사제 간에도 분열을 일으켜 '양심의 대결'이라는
양상을 띠게 됨으로 영국인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러한 균열은 자유당의 붕괴와 노동당의 대두라는 20세기 영국 정치사의 대전환의 계기가 되었고, 지식인들 가운데
냉소주의를 심었으며, 이 후 스패인 내전과 수에즈 전쟁에서의 국론 분열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보어 전쟁은 영국군 5만명의 사상자와 보어군의 4천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강제 수용소에서 2만명의 부녀자가
희생되었고, 2억 3천만 파운드(1900년 국민 총소득은 17억 5천만 파운드)의 전비를 들인 끝에 3년만에 끝이 났습니다.
역사가 테일러는 보어 전쟁의 결과 보어인의 독립이 무산된 것 이상으로 영국인의 '제국에의 신념'에 대한 정신적인
권위가 실추된 것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은 제국 지배에 대한 정당성이나 도덕적 확신을 흔들리게 하였고, 국민의 정신적 활력의 쇠퇴를
가져와 제국의 종말을 앞당기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전성기인 빅토리아 여왕의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Age)에 이은 20세기 영국의 쇠퇴기인 에드워드
7세의 '에드워드 시대'(Edwardian Age)는 근엄했던 빅토리아와 방탕했던 에드워드의 성격만큼이나 극명하게 다릅니다.
중후하고 성실하며 확신에 찬 빅토리아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무책임하고 허무주의적이며 향락적인 에드워드 시대는
'마음의 상처'와 '자기 확신의 상실'을 초래한 보어전쟁으로 기점으로 갈리기도 합니다.
5. 미국의 도전
영국은 1763년 프랑스와의 7년 전쟁의 승리로 북미 대륙에서 프랑스 세력을 일소하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앵글로
색슨의 대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러부터 20년만에 미국과의 독립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북미에서 지위를 잃어 버렸고, 영국인들은 심한
배신감을 맛 보아야만 했습니다.
새로 태어난 미국 공화국은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였으며, 이후로 1세기 동안 영국과 대립과 마찰을
빗었습니다.
1820년대 중남미의 스페인 식민지가 독립 움직임을 보일 때 프랑스가 개입하려 하자 영국은 미국에 '아메리카에 유럽의
개입을 허용하지 말자'는 성명을 공동 발표하자고 제안했으나 미국은 영국을 빼돌린 채 먼로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캐나다 국경문제, 파나마 운하 구상, 영해군의 전시 봉쇄권 등을 놓고 대립했는데, 미국은 영국과의
힘의 격차를 인정하면서도 굴복하지는 않는 외교를 펼쳤습니다.
영국은 1861년 시작된 미국의 남북전쟁에 남부의 편을 들어 참전함으로써 미국을 분할하거나 미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30년만에 공업생산과 무역액이 두 배로 증가될 정도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고,
인구도 급격히 늘었습니다.
서부 개척이 끝나자 미국은 해외에 눈을 돌려 1890년부터 불과 10년만에 세계 3위의 해군국이 될 정도로 성장해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였습니다.
1895년 미국이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영국령 기아나의 국경분쟁 때에 먼로 선언을 내세워 자신의 강제적 중재권을
인정해 줄 것을 영국에 요청하였으나 영국이 이를 일축함으로써 양국은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치닫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같은 앵글로 색슨족끼리의 충돌을 꺼려 1901년 파나마 운하를 미국에게 넘겼고, 알래스카 국경 문제를
미국에 양보하는 등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는 영국에 당시 급격히 성장하는 독일을 주적(主敵)으로 규정하고 세계 각지로부터 군대를 철수시켜 유럽에 집중시켰기
때문에 프랑스나 러시아, 미국에 대해 양보해 협상을 맺는 외교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국의 포위망을 벗어나려는 독일과는 계속 충돌을 빗어, 1905년 탕헤르 사건(1차 모르코 사건)과 1911년
아가디르 사건(2차 모르코 사건)을 겪게 됩니다.
영국은 독일의 위협을 과대 평가하고 독일과의 공존 가능성을 포기하고 억지와 봉쇄에만 초점을 둠으로써 1차세계대전
이란 재앙을 맞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대국의 포용력을 잃어버리고 조급하게 대응했는데, 영국이 미국에게 양보한 것의 절반만 독일에게 양보했더라면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차대전으로 영국의 국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미국으로부터는 거의 도움을 받지 못했으며,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채무국으로 전락해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영국은 1차세계대전을 통해 '다 가지려고 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교훈과 '쥐도 코너로 몰면 고양이를 문다.'는
값 비싼 교훈만 얻게 됩니다.
6. 대영제국 몰락의 내부적 원인
당시에도 현재와 같은 자유무역으로 각국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영국은 신흥 공업국에 대한 가격과 품질의 우위를
점점 잃어 버리고 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기업가들은 해외에 공장을 세워 투자하거나 금융산업에 집중했는데, 이는 영국의 산업 공동화와 무역적자,
인력의 유출과 교육수준의 저하 등을 초래하였습니다.
이에 일부 개혁파들이 제조업의 기반유지와 관세수입에 의한 재원확보를 위해 보호무역을 주창하였으나, 자유무역을
신봉하는 보수파에 밀려 실행되지는 못했습니다.
영국은 독일을 견제할 거대육군을 창설할 재원을 마련할 수 없었고, 필연적으로 프랑스, 러시아와 연합하는 삼국협상을
맺었는데, 이는 오히려 1차 세계대전을 촉발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은 거대 토지를 소유한 귀족 중심의 사회였는데, 사회개혁을 위한 재원 조달을 위해서는 세제(稅制)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지만 의회를 장악한 토지 귀족이 스스로 개혁을 이루기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로써 사회 활력의 고갈, 자유무역을 둘러싼 대립, 그리고 부족한 재원이라는 세가지 장벽이 대영제국의 개혁을
좌절시키게 됩니다.
1906년 구성된 자유당 내각에서 보어전쟁의 반대와 복지사회의 이상을 부르짖었던 로이드 조지가 재무장관에 취임해
1910년 '민중 예산'(peoples budget)에 의한 사회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이드 조지의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개혁' 노선은 1차세계대전과 그것이 몰고온 여파에 의해 난파되는
운명을 맞이하고 맙니다.
7. 영국의 대참사 - 1차 세계대전 (1914~1918)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 군인의 전사자는 무려 90만명으로 2차 세계대전 전사자 40만명의 두배가 넘습니다.
독일 또한 1차 대전 때 180만명과 2차 대전 때 350만명의 전사자를 낳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대영제국을 탈진시켰고, 비인간적인 작전은 영국인들에게 전쟁에 대한 환멸을 가져왔습니다.
참호전으로 대표되는 1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은 가장 비참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0년 전부터 독일의 강대국화와 해외진출을 대영제국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 들이고
군사 외교 경제적 수단을 통한 억제와 압박으로 독일을 유럽 안으로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1914년 8월 거대한 독일 육군이 성난 파도처럼 벨기에를 지나 파리로 쇄도했지만 9월 4일 프랑스가 파리 근교 마른
강가에서 반격에 성공하여 간신히 프랑스를 지켜내었고, 전선은 프랑스 내에서 고착되었습니다.
전쟁은 철조망과 참호로 대치한 지루한 참호전이었고, 공격하는 쪽은 기관총 세례를 받았고, 방어하는 쪽은 포탄 세례를
받으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가 독일 측으로 참전하자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를 점령하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했는데, 적의
집중 포화를 받아 그 곳에서만 20만명이 사상했습니다.
유럽 전장의 교착 상태를 뚫기 위해 영국은 1916년 6월 솜 전투에서 25개 사단을 투입하는 대공세를 펼쳤는데,
수십만명의 보병이 광대한 적진을 향해 일제히 돌진한 무모한 전술은 첫날 7만명의 사상자를 낳았습니다.
영국은 3개월 동안의 솜 전투에서 50만명에 가까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대부분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지원병이었고,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출전한 사람의 1/3이 집에 돌아 오지 못했습니다.
8. 아라비아의 로렌스
1차 세계대전 후에도 영국은 모든 식민지를 유지하고 독일 식민지까지 취합함으로써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속으로는
인적, 재정적, 정신적으로 골병이 들었습니다.
영국의 젊은이들은 제국의 이상에 환멸을 느꼈고, 1925년의 총파업을 비롯해 상습적인 노사분규에 시달렸으며,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문명에 의한 세계지배라는 대영제국의 명분을 흔들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 석유수요가 높아겼기 때문에 석유자원을 확보하고, 인도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은 중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솜전투의 실패 등으로 좌절을 맛 보았던 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 영국 앨런비 장군이 지휘하는 중동 파견군이
이집트에서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투르크군을 추격하여 십자군이 철수한지 700년만에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습니다.
영화 '아리비아의 로렌스'로도 유명한 토머스 애드워드 로렌스는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고고학자 출신으로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카이로 주둔 육군 정보부의 정보장교로 근무하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 통치 하에 있던 아랍인들을 메카의 족장인 하시미테 가(家)의 후사인을 중심으로
결집시켜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도록 공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1916년 연락장교로 아라비아 반도 서부의 헤자즈 지방에 파견된 로렌스는 그곳에서 후사인의 아들 파이살과
역사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로렌스는 파이살과 협력하여 투르크군에 대항하는 아랍-베두인군의 사막 유격전을 지휘하게 되었고, 50기의 베두인
낙타 부대를 이끌고 죽음의 네프트 사막을 기적적으로 건너 난공불락의 요충항인 아카바 요새 기습에 성공합니다.
그 후 로렌스의 아랍 군단은 수에즈 운하에서 가자로 진출하여, 아라비아의 정규군 우익과 합류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수복에 성공합니다.
영국은 이미 메카의 족장 후사인과 만일 아랍인이 영국군과 협력해 투르크 제국에 반란을 일으킨다면 아랍인에게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해 주겠다는 밀약을 맺은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한편 프랑스와 아랍인 지역을 분할하기로 밀약한 상태였는데, 이를 안 로렌스는 도리상 중동지역을
아랍인들에게 돌려 주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함락한 뒤 아랍의 기병군단을 재촉하여 사라센 제국의 수도이자 아랍의 상징적 도시인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낙타와 말로 구성된 로렌스의 부대는 트럭과 지프를 타고 다니는 영국군을 앞지르기 위해 투르크 군의 저항이 적은
시리아 사막을 횡단해 영국군보다 하루 먼저 다마스커스 입성에 성공합니다.
대영제국의 탐욕스러운 제국주의에 맞서 영국의 신의와 도덕을 지키고 아랍인들에게 독립국가 건설을 원했던 로렌스의
작은 반란으로 인해 사람들은 로렌스를 이상주의자로 기억합니다.
로렌스의 아랍 군단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기 위해 시리아 사막을 달리고 있을 때 로이드 조지 내각의 외무장관인
벨푸어는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후에 벨푸어 선언이라고 불리게 된 이 약속은 영국과 미국의 유럭한 유대인 금융가로부터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자금을 순조롭게 조달 받기 위한 것입니다.
중동의 석유와 수에즈 운하를 손에 넣기 위해 벨푸어는 아랍에 독립국가 건설을 원치 않았고, 유대인 국가 건설이
제국의 유지라는 영국의 전 후 구상에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리하여 영국은 아랍 통일국가를 약속한 맥마흔 편지, 프랑스와 중동 분할을 약속한 사이크스-피코 협정,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한 벨푸어 선언이라는 서로 모순된 세가지 약속을 한 채 1차 세계대전을 끝냅니다.
이러한 행동양식은 벨푸어와 처칠 그리고 권력의 사제로 변신한 로이드 조지 등의 제국 유지에 대한 집념에서 나온 것으로
서로 모순된 것을 뒤섞어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주도권을 쥐는 앵글로 색슨의 행동양식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과 도덕으로 지탱되었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대영제국과는 다른 제국 정신의 명백한 후퇴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현재 중동지역 지도
1919년 인도에서 출정한 10만명의 영국-인도군은 페르시아만의 쿠웨이트에 상륙해서 이라크 평원을 북상하여 바그다드를
점령했고, 다시 북상하여 키르크크와 모술의 유전지대를 확보함으로써 페르시아만과 이라크 전역을 확보하였습니다.
로렌스는 제국의 야욕에 환멸을 느끼고 영국으로 귀국하여 옥스퍼드 대학의 고고학 연구원으로 돌아 갔지만 전장을
누볐던 로렌스는 적응하지 못하였고, 국가에서 주는 훈장도 거부한 채 살다가 1935년 오토바이 사고로 생을 마감합니다.
1919년 4월 벨푸어 선언에 의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이주가 된 다음부터 지금까지 80년 이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의 분쟁과 대립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지키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흘려야 했고, 아프카니스탄의 충돌과 이라크의 반란에도
직면해야 했습니다.
9. 잠에서 깨어난 식민지들
1919년 4월에 북인도 암리차르에서 영국군이 수천명의 무저항 인도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은 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씻을 수 없는 잔혹함과 오점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간디와 네루의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1920년 4월 인도의 펀자브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은 인도 식민정부의 예상을 깨고 급속도로 확산되었는데, 그것은 6년 전
세포이의 반란 이후 '대반란의 계절'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도는 영국에 있어서 자원과 시장을 제공하는 생명선과도 같은 존재였는데, 1차 대전 중에 출정한 군인 390만명 중
150만명이 인도 식민정부의 자체 비용에 의해 동원되었습니다.
영국이 '로렌스의 환멸'이나 '앨런비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중동에 대한 노골적인 지배의 야욕을 드러낸 이유도
인도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국이 무려 700년동안 오직 무력으로 지배해온 아일랜드도 1919년 자치권을 획들하기 위한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이후 영국 왕권의 부정과 완전 독립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영국이 1916년 아일랜드의 이스턴 봉기 참가자에 대해 잔혹안 처형을 실시하고, 로이드조지가 투입한 특수부대에 의한
독립운동가들의 학살은 아일랜드인이 영국인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도취했던 영국은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독립열기와 반란에 휩싸였고, 과연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영국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부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디까지 후퇴할 것인가?'가 주요 과제가 되었고
이 가운데 새로 등장한 개념이 유화(有和, appeasement)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의 나약함을 느끼면서도 깨끗하게 화해하지 않는, 지배에 대한 집념을 보여 주는데, 로렌스에게
환멸을 심어 주었던 속임수적인 대응 방식이 대영제국의 '유화'정책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유화정책은 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고, 점차 주변 유럽에
대한 정책에도 적용되었습니다.
10. 대영제국의 말로 - 2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성장에 대한 영국의 무리한 억압으로 발발하였다면, 2차 세계대전은 피폐해진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무리한 전쟁 배상금 요구로 발발하였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대공황까지 겹치자 독일은 극도의 정치 사회 경제적 혼란을 겪었고, 자연스럽게 전체주의적인
파시즘 정권이 들어선 것입니다.
히틀러는 집권하자 경제부흥과 함께 금지된 재무장을 실시했고, 국가의 모든 자원을 군사력에 집중한 군국주의적인
정책은 단기간 내에 독일을 다시 세계 최고의 군사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소련과 불가침 협정을 맺은 독일은 마음 놓고 서부로 진격할 수 있었고, 안일하게 안주했던 프랑스는 참패했고,
됭케르크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영국은 뒤늦게 제국은 모든 자원을 전쟁에 투입했습니다.
영국에 비해 영불 해협을 무사히 건널 해군력이 없었던 독일은 우세한 공군력을 바탕으로 런던을 비롯한 영국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지만 이는 오히려 영국이 군수품을 생산할 시간을 벌어 주었습니다.
영국이 항복하지 않고 새로 개발된 레이더를 이용한 조기 경보망과 허리케인과 스피트파이어 같은 우수한 전투기로
대등한 공중전을 벌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영국 정복을 포기하고 소련을 침공하게 됩니다.
스탈린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허약해진 소련군은 독일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순식간에 밀려 모스크바 앞까지 진격을
허용했지만 추운 겨울과 대대적인 반격으로 방어에 성공합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 점령을 포기하고 남부의 유전과 곡창지대를 노려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노렸으나 치열한 접전 끝에
오히려 포위되어 대군을 잃었고, 이후로 계속 소련군에 밀리게 됩니다.
독일이 소련과 싸우고 있는 동안 영국은 직접 대응을 피하고 주로 중동에서 롬멜의 기갑사단과 전쟁을 벌여 보급이
빈약한 롬멜 사단을 물량전으로 물리치고 이탈리아로 진격하게 됩니다.
미국이 진주만 피해로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전쟁의 상황은 급변하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과 동쪽에서 진격한
소련군에 포위된 독일군은 끝내 다시 패망하고 맙니다.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영국은 엄청난 물직적 피해를 입었고, 국가의 모든 자원을 투입한 나머지 빚더미에 올랐으며,
거의 모든 식민지를 잃고 미국에 제국의 자리를 물려 주게 됩니다.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아시아 방어에 소홀히 하게 되는데, 아시아의 거점이었던 싱가포르를 일본에게
뺏김으로써 13만 5천명 이라는 전례 없는 영국군 포로를 만들었습니다.
1945년 5월 8일 처칠은 하원에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전하고 환희에 빠졌지만 수주일 뒤 치루어진 총선에서 패배해
권좌에서 물러났고, 1960년 1월 사망합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의 '무기 대여법'(Lend-Lease Act)에 의한 대규모 경제지원으로 생활을 영위했지만
전 후 미국은 모든 지원을 중단하였고, 영국은 식량수입에 대한 대금지불조차 할 수 없는 단계에 이릅니다.
'무기 대여법'의 규정에는 영국이 미국으로부터 제공 받은 물자와 비슷한 제품은 어떤 것도 다른 국가로 수출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영국 공업제품의 수출을 막아 영국 경제를 망가뜨린 독소로 작용합니다.
1944년 영국의 수출액은 1938년의 1/3 수준으로 떨어졌는데, 그 해 6월에 영국 상무부는 '전 후 영국은 수출이 증가할
전망이 없으며 영국 산업의 경쟁력 저하는 피할 수 없다.'는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11. 대영제국의 종말 - 인도에서의 퇴진과 수에즈 운하 사건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약 11억 파운드의 해외 자산을 모두 잃었고,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7억 6천만 파운드였던
대외채무는 33억 파운드로 늘어났습니다. (1938년 영국의 국민 총소득은 46억 파운드였습니다.)
전 후 미국의 무기 대여법 정지로 영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아 배신감을 느꼈지만, 미국에 계속적인 거액의 융자를
구걸하는 것 이외에는 살 방도가 없었습니다.
1945년 영국과 미국의 재무 협상에서 미국이 제시한 조건은 37억 5천만 달러를 2%의 이자로 대여해 주는 대신
대영제국의 식민지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이른바 '제국 특혜관세'(imperial preferential tariff) 제도를 철폐하여
미국에 수출문호를 개방하고, 파운드 대 달러 교환율을 1939년 당시의 4달러 3센트라는 고율로 정하고, 조속한 시기에
파운드의 교환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영국은 1945년 12월 12개조로 된 영미 차관협정을 조인하였는데, 이 협정만큼 미국의
압도적인 우위와 영·미간의 지위 역전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 협정에 의해 파운드화와 경제적 유대에 의해 형성되었던 '스털링 지역'(Sterling Area)이 붕괴되어 대영제국의
해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 중에 인상적인 것은 미국의 대영제국의 해체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계획적이고 전략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반해 영국의 재무부 고문 케인스를 중심으로 한 영국 지도부의 대응은 영국의 객관적인 입장이 고려되서인지
숙명적인 체념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리하여 영국은 전후 재건에 필요한 모든 경제적인 원동력을 잃고, 중세시대의 가난한 섬나라로 주저 앉게 되었습니다.
1차 대전 이후 피폐해진 독일의 재건을 돕고, 히틀러가 재무장 하는데 가장 큰 협력을 아끼지 않은 것이 미국의 록펠러를
비록한 금융세력이란 보면 어쩌면 2차 세계대전은 대영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미국의 치밀한 연극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영국은 전후에도 수년동안 식량, 의약품, 연료 등에 대해 배급제를 실시했고, 레스토랑의 메뉴는
제한되었으며, 성인의 1주당 배당량은 버터 170그램, 치즈 40그램, 달걀 1개가 전부였습니다.
영국은 전후에도 세계 각지에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에 군사비를 줄일 수 없었고, 1946년의 군사비는 16억 파운드로
1938년의 7배에 달했습니다.
피폐해진 경제로 제국을 관리할 능력을 상실한 영국은 전후에도 수에즈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10년 동안 제국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진퇴에 대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미얀마 국경까지 다가온 1942년 인도 전역에서 발생한 반영 폭동은 영국인으로 하여금
인도에 대한 지배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것을 느끼게 했고, 미국마저 인도의 독립을 요구하며 압력을 가했습니다.
1943년 인도 총독이 된 영국의 웨이벌은 인도인의 독립 요구의 정당성을 깊히 인식해 인도인에게 독립을 약속하면서도
'인도 사수'를 반복하는 처칠의 훈령 때문에 고뇌해야 했습니다.
일본군의 인도 육박을 간신히 격퇴하였지만 인도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무력충돌은 점차 심각해졌고, 식민정부의
관료와 경찰은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대영제국의 요람인 인도에서의 단순한 퇴각은 제국의 미학과 위신에 맞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모양새
좋게 퇴진해야만 했습니다.
1947년 2월 20일 영국 수상 애틀리는 '영국 정부는 1948년 6월까지 인도에서 철수하고, 정권을 인도에게 양도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인도의 불신을 해소함과 동시에 '최후의 총독'이란 단서를 붙혀 46세의 마운트배튼을 임명합니다.
2차대전 후반에 동남 아시아 연합군 총 사령군으로서 일본군을 항복시키고, 동남 아시아에서 다시 유니온 잭을 펄럭이게
한 마운트배튼은 이미 아이젠하워, 맥아더와 함께 승리의 영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모엇보다도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였던 그는 영국 왕족 신분이고, 국경을 초월한 인류의 평등을 신봉하는 진보적
지도자라는 점에서 최후의 인도 총독으로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종말을 장식하기에 알맞은 인물이었습니다.
인도 현지인에게 최대한 잘 보인 마운트배튼은 인도와 파카스탄의 분할을 이루고, 예정보다 1년이나 앞당긴 1947년
8월 15일에 명예로운 퇴진을 실시하여 인도인에게 정권을 넘겨 주게 됩니다.
8월 15일 이전의 초여름 동안 인도 봄베이 항에서 장대한 군악대가 연주하는 동안 친영 인도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영국 병사를 가득 실은 수송선이 위풍을 간직한 채 서서히 부두에서 멀어지는 모습은 품위의 승리였습니다.
1947년 8월 15일 오전 8시 30분을 기해 인도 전역에서 유니언 잭이 내려졌고, 300년에 걸친 영국의 인도 지배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미얀마와 스리랑카에서도 철수한 영국은 어렵게 점령한 팔레스타인에서도 철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반영 테러를 계속하는 유대인 세력과 전투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걸프 지역의 석유 이권을 지키기 위해 친아랍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영국이었지만, 미국과 국제연합은 유대인
입장에서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에 계속 압력을 가했습니다.
유대 세력과의 유격전으로 탈진한 영국군은 아랍인의 불신과 모멸의 시선을 받았고, 국제 여론의 비웃음 거리가 되었으며,
본국은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신음하였습니다.
마침내 영국 정부는 1947년 12월 품위 있고 명예로운 퇴진과는 거리가 먼 큰 환멸과 굴욕 속에서 UN과 미국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철수하였습니다.
한편 1956년 이집트의 새로운 지도자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는데, 수에즈 운하야말로 1875년
디즈레일리가 사들인 이래 오랫동안 제국의 생명선이 된 중요한 권익이었습니다.
대영제국의 최후의 보부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 한 영국의 이든 수상은 수에즈 운하 탈환을 위해 현실을 무시한 채
이집트 파병을 결심합니다.
단독으로 행동하기를 주저한 영국은 프랑스를 충동질하여 이스라엘을 포섭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면 그
충돌에 끼어 들어 정전을 강제하기 위한 다국적군으로 영국-프랑스군을 수에즈 운하에 파견하는 방법에 열중합니다.
대영제국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유약하고 치졸한 음모는 보어 전쟁 못지 않은 도덕적인 결함을 드러냈는데, 이전과는
달리 힘이 없었던 영국은 비참한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특히 미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제국주의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국제도덕의 근본을 짓밟은 영국의 독단적 행동에 대해
워싱턴의 반발은 격렬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영국의 수에즈 파병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경고하였고, 뉴욕 시장에서 투매로 인한 파운드화의
대폭락은 과대 평가된 파운드화에 의해 간신히 모양새를 유지한 영국의 자존심을 짓밟았습니다.
미국의 비난에 이어 수련 흐루시초프는 영국 본토에 대한 미사일 공격의 위협마저 내비침으로써 영국은 미·소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더 이상 단독으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수에즈 사건은 대영제국의 완벽한 종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사건이었으며, 수에즈 운하 북쪽 끝에 있는 도시
포트사이드에 걸려 있던 유니언 잭은 영원히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 남아 있던 영국령 식민지의 독립사태가 이어졌는데, 영국은 이제 현실을 직시하고
순수히 물러나게 됩니다.
1971년 영국이 EC(유럽 공동체)에 가입하면서 싱가포르의 영국 극동 사랑부에 마지막으로 나부끼고 있던 유니언 잭이
내려짐으로써 영국은 영원히 제국의 깃발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드넓은 식민지가 20세기 와서는 오히려 독이 된 느낌이네요. 그러고보니 스페인도 비슷하게 무너지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몰락을 보면 뭐 ㅡㅡㅋ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주먹 거리도 안되던 미국에게 몽땅 털리고 나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 ;;
하지만 아직도 포클랜드나 세인트헬레나 섬 등 남대서양 섬들은 영국의 소유죠.
아라비아의 로렌스 예전에 60년댄가에 만들어진 영화도 꽤 재미있게 봤었죠 ㅎㅎ 근데 아랍쪽에서는 또 로렌스의 역할이 너무 부풀려졌다고 주장하더군요;;
실제로는 아랍민족들이 힘을 많이써서 독립했죠. 로렌스는 그냥 연락장교느낌이라고 ㅋㅋ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제대로 독립할수 있었죠 ㅋ
영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영국의 위치가 어떨런지, 대영제국은 아직 살아 남았을런지 그게 궁금해지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결정타였으니 말입니다.
시작은 그 어떤 제국과 마찬가지로 더럽고 추악했지만, 마지막은 나치즘이라는 거의 마성적인 악을 물리치느냐 온몸을 불살렀으니... 우리 세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시절에 저런 세력이 있었다는게 참 간지납니다.
그 대영제국이 이렇게까지 몰락하리라고는 ㅡ.,ㅡ
성쇄 -> 성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