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는 지게 귀신이 없느냐
내가 고등고시 공부를 할 때 밭도 팔고 논도 팔고 소도 팔 때 너는 지게를 졌지 소를 얻어 부리려고 소품앗이도 했지 “형들은 중학 가고 대학 갔는데 너는 중학도 못 갔으면서 일은 왜 하노?” “지게 귀신 붙으면 신세 망친다” “너는 너의 형들보다 키가 작다 지게 귀신이 붙어서 키도 안 큰다” 동네 사람들이 지껄여대는 음흉하기 짝이 없는 이 소리에 열여덟 살 너는 두 다리 뻗고 엉엉 울었지 우는 너를 보고 나는 울대가 콱 막혀 큭큭 하다가 말았다
기계화가 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 우리집 노동력이래야 환갑이 내일모레인 부모님과 아직 잔뼈가 여물지도 않은 너뿐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네가 안 보여 들에 나가 보니 보리밭에 호미를 내팽개쳤더구나 둑새풀이 그리도 지긋지긋하더냐 동네 사람들이 오입이라고 빈정거리기에 오입 같은 소리 한다고 고함으로 받아쳤지만 내 말끝이 꽁보리밥 방귀같이 힘없이 새더라
그해 날씨는 왜 그리도 가물이 들던지 부모님이 밤 세워 웅덩이 파고 물 풀 때 아들 여섯을 죄다 농사일을 시킨 작은아버진 팔짱 끼고 논두렁을 어슬렁거렸고 “예천군수를 할래? 점수(종제)네 아부지를 할래?”라고 물으면 하나같이 점수네 아버지를 한다는 교활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온 동네 사람들의 코웃음 거리가 되었고 점수네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거고 나는 죽을 맛이었단다
네가 가본들 어디로 가겠나 고작 삼척 묵호 등지로 바람을 쐬다가 강남 가는 제비 등을 타고 귀가한 네가 부모님 앞에선 씩 웃고 말았다는데 내 방에 들어와서는 왜 무릎을 꿇고 엎드렸느냐 그리도 형이 무서웠느냐 그때 그 장면을 떠올리면 나는 언제나 소리 없이 철철 운다
대학 졸업 후 겨우 2년 반을 버티다가 공부를 오래 할 처지가 못 된다고 판단하고 낙방거자(落榜擧子)로 일생을 살아오면서 아홉 식구의 입에 풀칠하는 데 정신이 팔려 곧으면 곧다고 꺾이고 굽으면 굽었다고 꺾이던 약약한 그 세월, 사십 세가 될 때까지 공부하여 성공한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나는 겨우 서른한 살에 뜻을 접었으니 너무 경솔하게 평생을 그르치고 말았다 가소롭지 아니 하냐 설사 그것이 생을 걸 만한 가치가 못 된다 하더라도 한 번 뜻을 세웠으면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 진정한 대장부라 하겠거늘 부끄럽도다 나는 너를 볼 면목이 없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한평생 한결같이, 내가 한 번 얼씬하면 그 작은 키를 꼬부장하게 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내관이 되었더란 말이냐 거기가
어디라고 너는 내 앞에 먼저 갔노? 거기에는
지게 귀신이 없느냐?